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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결혼식에서 (2) (17/112)

#17화. 결혼식에서 (2)2020.12.29.

신부대기실에서 나온 강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화장실 안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화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히려고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었다. 세수라도 할 참으로 손을 뻗던 강호는 이내 관두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단장한 얼굴과 머리가 엉망이 될 터다.

“후우…….”

물을 잠근 그는 세면대에 양손을 받친 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이리 와보세요. 살랑살랑 나비처럼 손짓하던 소란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가까이 오라던 그녀가 귓가에 뜨거운 숨과 함께 불어넣은 말.  

“이제 결혼하면, 제가 잘해드릴게요.”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다짐에 강호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잘해드릴게요. 잘해드릴게. 제가 잘해드릴게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아름답고도 황홀하지만, 위험한 유혹처럼 느껴졌다. 뭘 잘해줄 건데. 어떻게 잘해줄 건데. 내가 뭘 원하는 줄 알고. 내 속이 어떤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이건 뭐……, 옆에 있으니까 더 괴롭네.’

그녀가 멀리 있을 땐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은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제 것이 아니기에 욕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저도 모르는 사이 10년이나 흐른 것이겠지만.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다. 언제든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다. 심지어 자꾸만 시선이 닿고, 몸이 닿고…….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그냥 대표님과 저 사이에 높은 벽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 벽을 허물 일이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대표님 길 가시면 됩니다.”

  거센 발길질로 당장이라도 그 벽을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강호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숨죽여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그렇게 쟁취해왔다. 섣불리 나서는 법이 없다. 대신 기회를 포착하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낚아채었다. 그런데 소란은 자꾸만 제 인내심을 시험하며 무너뜨린다.

‘10년을 참았어.’

앞으로 1년이 될지, 6개월이 될지 모르지만 10년에 대면 짧을 터다. 그녀를 품 안에 넣는 그날이 오면 지금껏 견뎌온 모든 걸 쏟아내리라. 그땐 소란이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이고, 제가 그녀를 놓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허리를 펴고 거울을 보며 흠, 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강호는 곧 몸을 돌려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객을 맞이하러 가려는 순간. 복도 옆쪽으로 여자 화장실 문 앞에 낯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꺾인 벽에 딱 붙어 핸드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저 너머를 보고 있다. 마치 숨어 있기라도 한 듯.

“계나린.”

허어억, 놀란 나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강호를 보고는 쌀쌀맞은 눈빛으로 한숨을 탁 내쉬었다.

“어휴, 놀랐잖아.”

“뭐 해. 사채 썼냐.”

“사채?”

“누가 돈 받으러 쫓아왔냐고. 왜 숨어 있어?”

“수, 숨긴 누가.”

애써 당당하게 구는 나린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보고 있어?”

“보긴 뭘 봐.”

“얼굴은 왜 가려.”

“뾰루지 났어. 관심 끄지?”

강호가 내려다보니 나린의 얼굴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남의 결혼식에 와서 왜 이렇게 수상하게 행동하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피차 서로 관심 없는 사이. 강호는 신성한 결혼에 임하기 위해 더 이상 나린을 상대하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나린이 그의 팔을 붙들어 당겼다.

“야.”

졸지에 나린에게 이끌려 꺾인 벽 뒤에 나란히 숨게 됐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왜 이래.”

“거두절미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뭘 묻고 싶으면 공손하게 좀…….”

“저 남자 누구야?”

나린이 손가락 끝으로 저 멀리 누군가를 가리켰다.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려던 강호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나린의 손끝을 무심히 좇은 강호는 한 남자를 보았지만 나린이 그를 가리킨 게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어떤 남자.”

“해태 눈깔이냐. 저 남자, 저 남자. 지금 저기 서서 인사하는 남자. 안 보여?”

“가슴에 꽃 달고?”

“그래, 꽃 달고.”

“검은색 양복에?”

“맞아, 검은색.”

나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오, 이거 봐라. 강호는 팔짱을 낀 채 나린과 그 남자를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다.

“모델처럼 키 크고, 배우처럼 잘생기고, 천사처럼 착해 보이는 저 남자?”

“그래, 잘생긴 천사. 저 남자 대체 누구…….”

격하게 긍정하며 대답하던 나린이 흡,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눈이 동그래졌다. 비밀이라도 들킨 듯한 얼굴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강호의 눈빛이 다채롭게 일렁였다. 깨달음의 빛, 놀라움의 빛, 의아함의 빛. 그리고 악랄함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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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니야. 다 아니야.”

“계나린, 두 가지 중 하나겠지.”

“아니라니까.”

일단 부인하고 보는 나린을 향해 강호는 여유롭게 입을 뗐다.

“하나, 계나린은 여기 도착하자마자 본 저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저 남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하다.”

나린이 싸늘하게 노려보는데 그가 얄밉도록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또 하나, 계나린을 울리고 떠난 그 양아치가 바로.”

“…….”

“저 남자다. 그런데 이 결혼식에는 왜 와 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

나린의 눈썹이 구겨졌다. 이에 강호는 못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자네.”

나린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끝까지 살아 있는 자존심을 바짝 세울 뿐.

“누구냐고 물었어.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그거나 대답해.”

“내 형님.”

“너한테 형이 어딨어?”

“소란이 친오빠라고.”

나린의 입술이 벌어졌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싹 돌려 그쪽을 바라보곤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오 변호사 오빠라고? 저 남자는 우씨인데?”

“우 변호사야.”

“성은 그렇다 치고. 하나도 안 닮았잖아. 저 남자 이름은 우성준이야, 맞아?”

“네가 이름을 외우는 사람도 있었네. 우리 형님 성함이 우성준, 확실하지.”

나린은 다리가 풀렸는지 잠시 휘청거렸다. 물론 강호는 잡아주진 않았다. 나린 스스로 그의 팔을 붙든 채 정신을 차릴 뿐. 하지만 건수 잡았다는 듯 차갑게 내려앉는 한마디.

“우리 형님이 양아치인 줄, 미처 몰랐네.”

“아니야.”

나린은 잔뜩 깊어진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야, 양아치. 그러니까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

“죽여버린다.”

나린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오히려 애틋함으로 가득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지만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났다. 남의 결혼식에서. ◇ ◆ ◇ 백 회장을 위해 마련된 식장 테이블의 상석에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나 아직 사방으로 큰 영향력을 쥔 인물이다. 백 회장의 눈에 들고 싶은 자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 이럴까 봐 강호 하객들 위주로 초대하라고 하였건만.”

잠시 틈이 생기자 백 회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백 회장의 지인 중 고복희 여사가 말했다. 계나린의 할머니다. 백 회장의 아내 생전에 부부끼리 가장 친하게 지낸 내외가 자리해 있다.

“늙은이가 거짓말도 잘하지. 이렇게 성대하게 결혼식 여는 거 다 백 회장 세력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아니래도.”

철저히 하객을 제한하려던 처음 계획을 바꾸어 많은 이를 초대한 건 강호의 뜻이다. 하나뿐인 손자에게 결혼, 결혼, 노래를 불렀던 할아버지 아니던가. 이왕이면 식을 크게 열어 많은 이에게 축하받으며 결혼하는 모습을 선물처럼 보여드리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결혼이니까. 강호에겐 진심이 가득 담긴 진짜 결혼이기도 했고.

“나린이는 시집 언제 가나?”

“즈이 부모가 그렇게 선보라고 보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하니, 원.”

고복희 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강호처럼 알아서 연애해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나린이 고건 독신으로 늙어 죽을 모양이야.”

그리곤 안타까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자라는 동안 외로웠다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 저 혼자 살면 된다고 노래를 부르니. 나린이 부모가 일에 빠져 애한테 모질게 굴고 정 한번 안 주며 밀어내기 바빴으니 다 돌려받는 거지 뭐.”

고 여사도 나린을 돌보며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부모의 빈 자리는 채울 수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주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나린의 매정한 부모는 그저 외면했다.

“오죽하면 걔가 지 부모 회사는 절대 물려받지 않을 거라고 하겠어. 편한 길 다 놔두고 나린이 고것도 아주 독하다니까.”

나린은 제힘으로 인생 헤쳐나가는 데 익숙해 보였다. 강호가 만든 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해 함께 부딪혀가며 성장했고, 여전히 부모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백 회장은 이제 걱정 없겠네. 강호가 일 잘하고, 제때 결혼까지 하고.”

나린의 할아버지이자 고복희 여사의 남편인 계 박사가 부러운 얼굴로 중얼거리자, 또 다른 이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백 회장 참 대단하네, 어떻게 기꺼이 허락을 해줬나. 하나뿐인 손자의 결혼이라 더 욕심을 낼 법도 한데.”

“무에 그리 욕심나겠나. 강호가 사랑하는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된 게지.”

“신부 될 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면서? 로스쿨도 장학금 받아가며 어렵게 공부해 졸업했다고 하던데. 우리 손녀와 동기라고 하더군.”

결국 강호에 비해 한참 처지는 신부의 배경을 얘기하는 것이다.

“아무리 강호 애비를 그렇게 보냈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건 좀……. 알지 않나. 어렵게 산 아이들일수록 더…….”

보다 못한 계 박사와 고 여사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참이다. 백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르면 가만히 있게.”

조용하나 묵직한 일갈이었다.

“소란이, 남 같지 않은 애야. 내 보자마자 그 애가 딱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게나.”

정말이다. 안 그래도 백 회장은 강호가 데려오는 여자라면 그 누구라도 무조건 허락해주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란은 처음 본 그날부터 느낌이 남달랐다. 첫인사 온 날 이후로도 계속 눈앞에 아른거릴 만큼 아이가 어여뻤다. 하도 이상하여 비서에게 소란의 사진을 구해달라고 했다. 로펌 홈페이지에서 출력했다는 소란의 사진을 가지고 김 보살에게 갔더랬다. 김 보살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책상을 탁 내리쳤다.  

“강호한테 얘 꼭 잡으라고 해. 하나뿐인, 유일한 여자야. 요즘 애들 말로 원 앤 온리라고, 자네 같은 파파할배가 뭘 알겠냐만. 암튼 해로하겠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토록 믿지 않았던 김 보살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만큼. 백 회장에게 소란은 세속적인 조건들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마저 없는 세상에 강호가 의지할 유일한 언덕이나 다름없는, 귀한 존재였다. 지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다 이내 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런데 강호한텐 얘기 아직 안 한 게야? 백 회장 그 병원…….”

“아서. 입조심해. 이런 곳에서 얘기 잘못 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계 박사의 단속에 결국 지인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 나이가 되어 거르고 걸러도 이런 사람은 꼭 주변에 있기 마련이다. 백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듯 웃어 보였다.

“강호 결혼하는 것도 보고, 강호 애비 집도 지어주었으니 난 이제 여한이 없어.”

“또 그런 소리. 여한이 왜 없나. 강호가 아들딸 낳고 잘 사는 것까지 다 봐야지.”

“그러면 끝이 어디 있겠어. 오늘 이런 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대화를 주고받는 계 박사와 백 회장을, 고복희 여사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제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라 한들 미련을 버리기가 어디 쉬운가. 백 회장의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 느껴져 고 여사는 마른침을 쓰게 삼켰다. 그때 누군가가 백 회장에게 다가왔다.

“회장니임.”

걸걸한 목소리를 애써 요사스럽게 빼어내는 모습이 역겨운 데가 있다. 머리와 의상에 한껏 힘을 준 중년 여성이 친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고, 그 옆엔 중년 남성, 또 젊은 남녀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잘 지내셨지요? 진상 애미예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여보, 뭐 해. 인사.”

박후길 여사였다. 멀뚱히 선 남편을 쿡 찌르자 백 사장이 로봇처럼 인사했다.

“백부님, 평안하셨습니까.”

“너희들도 인사드려야지, 큰할아버지께. 회장님, 여긴 제 아들 진상이고요, 이쪽은 제 딸 진혜랍니다. 많이 컸죠?”

박 여사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 ◆ ◇

“와, 사람 진짜 많이 오네.”

신부대기실은 소란의 동창들, 동료들이 몇 차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후 안정을 찾았다. 여유가 생긴 틈을 타 밖을 내다본 연희는 아직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바깥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하객 장난 아니야. 이렇게 큰 결혼식 진짜 첨 본다.”

“나도 첨 본다.”

소란은 제 결혼식이 이럴 줄 몰랐다. 얼마나 엄청난 집안의 엄청난 사람과 결혼하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식을 준비하면서 강호가 예상하는 하객 규모를 듣고는, 그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할 제 쪽 하객 수를 걱정했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 하객석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이지만 축의금은 정중히 거절한다고 안내되었기에, 소란은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 어느 부잣집 딸인 듯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그 한마디가 부른 파장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어떤 삶이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저 새끼가 여길 왜 와? 미쳤네?”

문 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던 연희가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떨어져 있어 연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소란이 되물었지만 그녀는 얼버무렸다.

“아, 아니야.”

이내 연희가 안 되겠다는 듯 문밖으로 나섰다.

“나 잠깐만 바깥 좀 보고 올게.”

신랑 신부 입장을 겨우 이십 분 남겨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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