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결혼식에서(1)2020.12.26.
“들어와. 네가 해줘.”
소란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려 했다. 물론 드레스를 입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뒤뚱거리며 일어서는 그녀에게로 도우미가 달려왔다.
“잠시만요, 신부님. 잡아드릴게요.”
“네, 저쪽으로 갈게요.”
도우미는 소란의 드레스를 솜씨 좋게 잡아 다리를 편히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너만 들어와.”
강호가 룸으로 휙 들어가자 소란은 도우미를 향해 괜찮다는 듯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긴 드레스 자락을 여신처럼 끌며 안으로 따라 들어갔고 곧 문이 닫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작 타이 하나 매겠다고 신랑이 신부를 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상황. 이내 신부대기실의 모두가 허허, 웃음을 주고받았다.
“우리 신랑신부님이 벌써 금슬이 아주 좋으시네요.”
도우미의 발언에 말도 말라는 듯 연희가 보탰다.
“큰일이에요. 불타오르다 못해 아주 폭발하겠어요. 둘이 안 만났으면 어쩔 뻔했대.”
“그러네. 사이가…… 정말 좋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태석의 음성이 헛헛했다. 대기실 안 거대한 전신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다. 잘 차려입은 정장과 코트. 스스로 단정하게 매었던 넥타이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다. 보타이까지 제대로 갖춘 강호가 먼저 나왔다. 살짝 인상을 쓰며 나오는 모습이 짜증 나게 잘생겼다. 저 보타이에 소란의 손길이 닿았겠구나. 뒤이어 나오는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다. ……그래, 아름답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 깊게 해보지 못했는데. 오늘의 소란은 정말이지 눈이 부셨다. 그때 바깥쪽에서 돌아다니던 찬규가 신부대기실로 들어왔다.
“이야, 백강호. 너 타이 하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답답한 거 싫어해서 절대 안 하잖아.”
“오늘은 하는 게 낫다고 해서.”
강호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거울에 다시 한번 비춰 보았다. 그사이 소란은 다시 신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근데 이건 뭐냐, 책가방이냐.”
태석이 찬규가 백팩을 앞으로 멘 듯한 모습에 의아한 듯 물었다. 찬규는 몸을 옆으로 휙 돌려 보였다.
“자, 삼촌 안녕하세요, 해.”
가방이 아니라 아기띠였다. 볼살이 미어터질 듯한 아기가 찬규의 앞에 매달려 안겨 있다. 연희가 소란을 챙기며 옆을 지키고 있으니, 찬규는 아기를 전담하는 중이다.
“헉, 귀엽다. 많이 컸네. 너희 집에 놀러 갔을 땐 요만했는데.”
팔뚝만 했던 아기가 금세 자랐다.
“빨리 크지. 벌써 10개월이야.”
공갈젖꼭지를 문 아기가 태석을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봤어? 얘 웃는 거? 와, 마태석이 ‘마성의 태석’ 준말인 거 얘가 딱 알아보네.”
“원래 웃음이 많아.”
찬규가 딱 잘라 말했지만 태석은 오구오구, 우쭈쭈, 아기에게 정체 모를 소리를 하며 소통하기 바빴다. 어쩐지 이 순간 마음 둘 곳은 아기뿐인 것처럼.
“얘 이제 걷는다, 볼래?”
“10개월이라며 벌써 걸어? 애들이 원래 이렇게 빨리 걸어?”
“우리 서후가 좀 빠른 편이지.”
어느새 찬규는 아기띠 버클을 풀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아직 하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이라 여유가 있어 소란도 마음 편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휴, 오빠는 팔불출 안 될 줄 알았는데.”
“보기 좋은데, 왜.”
연희의 싫지 않은 소리에 소란이 웃었다. 연희의 육아휴직은 길지 않았다. 로펌 변호사의 직업적 특성상 휴직을 길게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시기를 교차해 진행하는 많은 소송과 송무는 긴 공백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여 하더라도 다른 인력이 대체해야 하는 업무는 상상을 초월했고, 중소형 로펌일수록 사정은 더 어려웠다. 출산 전후로 사건 수임이 어려운 건 당연했고. 아무리 대표변호사와 동료들이 배려해준다 해도 폐를 끼친다는 미안함에, 출산하고 몸을 풀자마자 돌아오는 변호사도 허다했다.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빠르게 업무에 복귀했고, 아기는 베이비시터와 친정 부모님이 함께 돌보고 있다. 경제적인 부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매일 어린 아기를 떼어놓고 출근하는 마음은 하염없이 미어진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연희는 참 어른스러웠다.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엔 늘 최선을 다하는 연희와 찬규 부부가 결혼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멋있게 보였다.
‘나도 언젠가 아기를 낳는다면, 연희처럼 살 줄 알았는데.’
물론 이제는 그 상상이 저만치 멀어졌지만. 제 인생에 가짜일지언정 결혼은 있지만, 출산과 육아는 아마 없을 테니까. 소란은 이 결혼을 토대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가면 된다. 제게 주어진 상황이 든든하게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아기 서후가 한 발, 한 발, 뒤뚱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저렇게 조그마한 아기가 걷는다고? 소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너무 귀여워!”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아직 대기실에 서 있던 강호는 팔짱을 낀 채, 이모 미소를 함빡 지으며 서후를 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쁘네.’
가뜩이나 예쁜데 오늘은 특히 더 미치게 예쁘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올려 길고 가녀린 목이 드러나 있다. 아까 타이를 매어줄 때의 그녀 앞에서 또 한 번 그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희고 부드러운 그 목에 입술을 묻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또 참으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강호의 눈에 아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소란만 가득했다.
“이야아, 진짜 잘 걷네. 이리 와, 삼촌한테, 자!”
태석이 박수를 짝짝 치며 아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정말 마성의 태석인지, 서후는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떼었다. 그러나 아직 안정되지 않은 걸음인지라 금세 꽈당하고 넘어졌다. 그 모습마저 어찌나 귀여운지. 태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후를 안으려는데, 서후가 으아앙 울며 태석의 손을 밀쳐냈다. 그리곤 아빠인 찬규를 향해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 동동거렸다. 서럽게 우는 모습에 연희와 찬규가 서둘러 서후에게 달려갔고, 아기는 찬규에게 안기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
“와.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네. 벌써 이렇게 부모를 알아본다고?”
“당연하지. 누구 새낀데.”
아빠에게 꼭 안겨 안정을 찾는 아기를 보면서 태석이 쓸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오늘 너무 외롭다.”
“형도 하나 낳아.”
게임기 하나 사라는 것처럼 산뜻한 찬규의 한마디에 태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산은 나를 외롭게 하지 않지. 산이나 가야겠다. 태석이 쓰린 가슴을 달래는 동안 소란은 아기를 안고 달래는 연희와 찬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0개월이랬지.’
딱 저만했겠구나 싶었다. 강호가 부모를 잃고 조부모에게 처음 안기던 때가.
‘저렇게 아기여도 엄마, 아빠를 아는데.’
부모의 품에서 안정을 찾는 서후를 보니 왜인지 가슴이 저릿했다. 말 못 하는 아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닌데.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 품이 따뜻했던 걸 잊은 게 아닌데. 얼마나 그리울까. 그를 너무나 사랑했을 아빠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아기였던 강호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렸다. 훤칠하게 잘 자란 그가 소란의 눈에 보였다. 겉으론 너무도 근사하고 멋있을지라도 속에는 채워지지 않은 빈구석이 있으리라.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하려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진 않았을까. 저야 그렇다 치고, 왜 그는 깡통 같은 결혼을 하려고 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인데. 여사친인 계나린과 허울뿐인 결혼을 하려 했고, 그게 무산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저와 결혼을 강행하는 그가 참 짠했다.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걸 싫어해서, 그런 거랑 연관이 있나? 결벽증 같은 건가?’
그러나 자신의 손길은 그럭저럭 참아냈다. 조금 전 룸에 불려 들어가 그의 셔츠 윗단추를 잠가주고, 타이를 둘러줄 때도 약간 인상을 찡그리긴 했지만 잘 넘어갔다. 무슨 이유인지 소란은 괜찮지만 타인의 손길은 여전히 싫다는 얘기겠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다.
‘꼭 좋아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괜찮지.’
그의 남성적인 매력에 아찔함을 느끼는 제 본능을 잘 참아내기만 한다면 이 관계는 적당히 잘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안쓰러운 그에게 저 역시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깟 단추야 백번 천번도 더 잠가줄 수 있다. 이제는, 가족으로. 하나뿐인 아내로서.
“그럼 난 나가볼게.”
강호가 대기실을 뜨려 하자 소란이 급히 불렀다.
“강호 씨.”
남들 앞에선 ‘대표님’ 대신 ‘강호 씨’라고 불러왔다. 그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였는데 어느덧 진짜 자연스러워졌다.
“저, 잠깐만요.”
머릿속에 가득한 말을 그에게 꼭 해주고 싶어서, 소란은 강호를 불렀다.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용기가 사라질 것만 같다.
“왜?”
“이리 와보세요.”
손을 살짝 들어 제게 손짓하자 다들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핫뜨핫뜨한 예비부부의 애정행각이 펼쳐지려나 보다, 그럴 뿐. 이에 강호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몸 좀 살짝 내리라며 소란은 또 살랑살랑 손짓했다. 그가 의아해하며 허리를 조금 굽혔다.
“조금만 더요.”
강호에게서 겨울바람처럼 시원한 향이 풍겼다. 허리를 숙인 그의 귀에 대고 소란은 부케를 들어 살며시 가리며 말했다.
“이제 결혼하면, 제가 잘해드릴게요.”
앞으로 맡은 바 임무를 잘해내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그 말을 전하고 나자, 소란은 이 결혼에 임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 진지해졌다. 흡족한 얼굴로 말을 마친 그녀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런데 강호는 빈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흠, 헛기침하더니 휙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하물며 인사도 없이 그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뭐야, 너 뭐 했어?”
연희가 놀라서 묻는 말에 소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잘해주겠다는 게 화를 낼 일인가.
“강호 화장실 가네. 급했나 봐.”
밖을 내다본 찬규가 아무렇지 않게 말해 다들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소란은 제가 괜히 오버한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계씨는 왜 이렇게 안 오지? 일찍 오라고 했는데.”
찬규가 하는 소리에 태석이 말했다.
“일찍 오란다고 올 애 아니잖아.”
“하긴. 또 술 먹고 속 안 좋다고 아침부터 우욱, 하다 늦게 올지도 모르지.”
슬슬 하객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백강호와 우소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걸음하고 있다. 이 계약 결혼의 속사정을 아는 단 한 사람, 계나린도 막 호텔에 도착한 참이다. ◇ ◆ ◇
“아, 죽겠네.”
속이 비어 더 울렁거렸다. 아침에 뭐라도 좀 먹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나린은 차에서 내려 발렛을 맡기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입덧 없이 지나가는 사람도 많다는데 왜 자신에겐 이런 시련이 주어진 건지. 아무래도 조만간 본가에서 나와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옮겨야 할 듯하다. 그리고 차차 부모님에게도 얘기해야겠지. 최대한 미루는 게 좋겠지만. 그녀는 식이 진행되는 2층에 올라왔다.
“사진이 이게 뭐야.”
고급스러운 꽃장식이 곳곳에 가득하고, 커다란 LCD 패널엔 두 사람의 웨딩사진이 떠 있다. 나린은 쯧쯧, 혀를 차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그렇지, 웨딩사진을 무슨 증명사진처럼 찍어놨네. 매우 단순한 배경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 예비부부의 로맨틱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모던하다, 심플하다, 세련됐다 하면서 두 선남선녀의 사진을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진실을 아는 나린의 눈에는 그조차 허점으로 보였다. 이내 관심을 거두고 돌아서는데 또 속이 치받쳤다. 욕이 나올 것만 같다. 나린은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간신히 속을 달래고 화장을 고친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게 맞는 길인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혼란은 제일 처음 임신을 확인했을 때 이미 신물 나게 겪었고, 출산을 결심한 후로는 제 결정에 흔들린 적 없다. 하지만 몸이 힘들 때마다 서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신발이 편하긴 하네.”
나린은 제 발을 감싼 플랫슈즈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신부, 소란이 얼마 전 제게 선물해준 신발이다.
“플랫? 겨울인데 웬 플랫.”
“패션에 계절이 어디 있어요. 언니가 겨울이라고 털부츠만 신으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내 스타일 아닌데 이건.”
“발이 조금씩 부을 수 있대요. 앞으로 발 불편한 날 있으면 한번 신어보세요.”
절대 신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신발을 오늘 처음 꺼내 신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화장실로 뛰어가다 삐끗할 뻔한 적도 있는데. 굽 낮은 신발을 신으니 기동력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이런 게 웃프다는 거구나.”
나린은 피식 실소하며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 문 쪽으로 향했다. 이제 나가서 강호와 소란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야지. 그나마 앉아 있으면 좀 나을 것도 같다. 그런데.
“……어?”
화장실에서 나가려던 나린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사고가 정지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 사람이 왜…… 저기 있어?”
그 남자다. 나린의 마음을 앗아가고, 웃게 하고, 울게 했던, 유일한 그 남자. 그가 인파 속에 서 있었다. 빛처럼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