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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진심으로 사랑해 (13/112)

#13화. 진심으로 사랑해2020.12.15.

강호가 진상을 본 건, 소란의 로펌 건물 지하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외부 디저트 업체 방문이 있어서 나왔다가 들어가던 길. 마침 동행한 직원 없이 혼자였다. 강호는 업체에서 나오면서 일부러 마카롱과 다쿠아즈, 조각케이크 등을 하나하나 골라 잔뜩 샀다. 그녀가 단걸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서였다. 소란에게 회사 직원들과 나눠 먹으라고 주고 갈 참이다. 시간은 별로 쓰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주차를 막 마쳤을 때였다. 앞쪽에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진상이다. 그는 휴대전화로 통화 중인 듯했다. 다만 거슬리는 건, 그가 소란의 승용차 옆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점이다. 탁. 강호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이쪽을 등진 채 진상은 소란의 차 바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통화를 이어갔다.

“백강호 그 자식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여자한테 손찌검은 예사고, 성격도 개차반이라고. 친척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냐?”

갈수록 가관이다.

“사귀는 동안에도 뭐 줄 듯 말 듯 사람 간만 보고 말이야. 아빠 편찮으시다, 오빠 일 도와야 한다, 공부한다, 시험 본다, 하여튼 지 사정만 급하지? 아오오! 짜증 나.”

진상이 분에 차서 소란의 차 앞바퀴를 퍽 걷어찼다. 아무래도 승용차를 그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너 9년이나 나 왜 만났냐? 나한테 뜯어낼 거 다 뜯어냈다고 돈 많아 보이는 내 친척한테까지 옮겨타는 스킬, 진짜 대단하다.”

더 듣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돈만 보고 달려들었으니, 앞으로 백강호한테 맞고 살아도 넌 할 말 없…….”

강호는 진상의 어깨를 꽉 잡아 돌렸다. 너무 아픈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아악, 음소거 상태로 입만 벌린 채 진상이 돌아보았다. 진상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여기서 강호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을까. 강호는 다른 손으로 그의 휴대전화를 잡아채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툭.

“더러워서 못 들어주겠네.”

뜯어낼 거 뜯어냈다니. 돈을 보고 일부러 옮겨탔다니. 9년이나 만났다는 전 애인에 대한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사실 예의를 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긴 했지만.

“내가 여자는 안 때리는데.”

여자한테 손찌검이라느니, 개차반이라느니. 저에 대한 헛소리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다. 소란에게 치욕스러운 말을 퍼붓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딴 놈 때문에 그녀를 멀리서만 바라봤던 10년이 억울해서라도.

“쓰레기는 좀 치워야겠다.”

“아악! 혀, 형……, 자, 잘못……!”

멱살을 잡아 올리자 진상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잘못했다며 싹싹 빌 기세인 그를 더 이상 봐주지 않고, 강호는 주먹을 날렸다. 퍼억. 단 한 번의 펀치에 진상은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 ◆ ◇ 경찰서.

“고소할 거야, 고소. 합의 절대 안 해줄 거라고.”

제가 맞았으니 피해자라고 생각하는지 진상은 목소리를 높였다. 딱 한 대였지만 진상의 입가는 처참하게 터졌고 코 옆이 부어 있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할 상처였다. 진상은 욱신거리는 입가만큼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옆에 강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로. 경찰서가 아니라 마치 명품 매장에 쇼핑이라도 하러 온 듯 여유로운 작태에 진상은 더 부아가 치밀었다. 여기에 소란과 마태석까지 우르르 와 있어 밀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당당하게 굴었다.

“깡패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패는 게 어디 있어? 보세요, 형사님. 바로 입건 가능하지 않습니까? 대체 내 변호사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조용히 좀 하세요.”

형사가 진상을 피곤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고를 한 건 진상이다. 미친놈이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진상은 완전히 달랐다.

“통화 녹취 이미 제출했고, 지하주차장 CCTV 파일도 받아서 넘겼어.”

강호의 옆에 서 있던 소란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먼저 내 차량에 위해를 가했고, 아무리 경미하다고 해도 물질적으로 훼손을 입힌 점, 손괴죄에 해당해. 고의성도 다분했고.”

“야, 내가 뭐 얼마나 그랬다고…….”

“게다가 나를 모욕한 점, 그리고 강호 씨에 관해 확인되지 않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점.”

“그게 무슨.”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스토킹해온 사실 등을 근거로, 내 결혼 상대자인 강호 씨의 행위는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만한 부분이 있어. 특히나 그게 너의 개소리 끝에 이어진 단발성 폭행이었다면.”

줄줄 이어지는 소란의 설명에 진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더 불리한지 정 확인해보고 싶다면 고소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네가 좀 피곤하겠지만.”

단 1회에 불과한 우발적 폭행이었다. 반면 지하주차장 CCTV에는 진상이 소란의 승용차 주변을 맴돌면서 통화하고, 화풀이하듯 차체를 주먹으로 치고, 바퀴를 걷어차는 모습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이미 헤어진 상태에서 계속 찾아온 정황이라든가, 통화 내용에 담긴 그의 발언에서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내가 맞을 짓이라도 했다는 거야?”

“적어도 강호 씨가 너한테 주먹을 날린 일로 입건까지 되진 않을 거란 얘기야.”

합의도 아닌 화해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 애초에 일을 만든 건 진상이다. 피해 사실을 부풀려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불거질 일도 아니었던 터다. 물론 진상도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무실로 전화했기에 소란에게 녹취 파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왕 자신이 맞았으니, 그 사실만 물고 늘어져 백강호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넌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억울한 마음에 내질렀더니 소란이 지체하지 않고 대꾸했다.

“당연히.”

“…….”

“강호 씨야. 내가 결혼할 사람.”

간신히 움켜쥐고 있던 인연의 끈이 싹둑 잘려나갔다.

“너한테 복수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일부러 강호 씨한테 접근한 것도 절대 아니야. 너 때문에 강호 씨를 만난다는 착각, 그만뒀으면 좋겠어.”

소란은 침착하게 덧붙였다.

“나, 강호 씨 진심으로 사랑해.”

그 말에 진상이 가장 먼저 큰 충격을 받았고. 함께 서 있던 태석이 덜컹 내려앉는 마음으로 소란을 바라보았으며. 앉아 있던 강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스쳤다. 경찰서란 장소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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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상은 너무도 속상했다. 그토록 거부했던 이별이 코앞에 닥쳐와 있었음을 이제야 실감했다.

“이십 대를 함께 보냈어. 너랑 나, 10년 가까이 만났다고. 나한테 너는 전부였는데. 난…… 그냥 난 너랑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여기서 그런 얘기는 왜 하시나. 형사님 듣기에 너무 TMI인데.”

태석이 어지러운 속내를 애써 감추며 진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선배님! 선배님은 학교 다닐 때부터 보셔서 아시잖아요. 제가 얘한테 얼마나 정성을 쏟았습니까? 저희 인연이 이렇게 허무하게 정리될 만한 것인가요?”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진상이 태석에게 매달렸다. 진상의 기운이 그의 쪽으로 옮겨온 건 기분 탓이 아니다. 다분히 태석이 의도한 바였다.

“알지, 당연히 알지.”

CC였던 소란과 진상을 보아온 건 한두 해가 아니다. 소란은 워낙 떠벌리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남자친구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연애가 별문제 없이 오래 이어진 것은 그 덕이기도 했다. 헤어지고야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까지 친밀하지 않았다는 것도, 헤어짐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태석은 진상의 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소란의 편이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그런데 다 끝났잖아. 이젠 받아들일 때도 됐지. 헤어진 지 1년이 되어가는데. 네 마음은 잘 알지만, 사랑을 놓아줄 땐 놓아줄 줄도 알아야…….”

태석이 진상의 어깨를 투욱, 두드리며 위로를 늘어놓았다. 전부 소란을 위해서다.

“우긴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매달려봤자 너만 피곤하고 힘든 거야. 인생이든 사랑이든 그렇다? 잡으려고 애쓰면 안 잡히고, 놓아주면 어느새 찾아오고.”

진상을 흠씬 더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태석은 성의껏 달래주었다.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너도 그만 소란이 놓아주고 네 인생 살아야지. 앞날이 얼마나 창창하냐, 이제 겨우 서른인데 당연히 소란이보다 더 좋은…….”

진상은 태석이 자신을 비난할 줄로만 알았나 보다. 뜻밖의 부드러운 위로에 진상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돌연 울음을 쏟아냈다.

“전 진짜 억울하다고요. 으흑, 바람도 일부러 피운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그런 건데, 흑, 그래도 제가 사랑한 사람은 소란, 흐흐흑, 소란이밖에 없었는데…….”

혼란으로 가득한 경찰서. 진상의 설운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제야 그녀와의 헤어짐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듯. 참으로 진상다운 이별이었다. 때마침 양복을 입은 한 사내와, 퍼 코트에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여인이 들어섰다.

“아니, 대체 누가 우리 진상이를 때렸다고…….”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다가오던 여인이 우뚝 멈춰 섰다. 소란, 그리고 아들 옆에 앉아 있는 강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진상의 모친 박후길 여사였다.

“아……, 혼자 오시랬더니.”

진상이 원망스레 변호사를 보자 사내는 시선을 피했다. 하긴,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아들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엄마인데. 변호사로부터 진상의 연락에 경찰서로 간다는 말을 들은 박 여사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여기까지 달려왔나 보다. 혹시나 자신의 다친 모습을 보고 흥분한 엄마가 경찰서에서 소동을 벌이지 않을까 진상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저를 때린 강호에게 대차게 퍼부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진상이가 다쳤다고 해서 놀랐는데, 가, 강호였구나.”

언제 열이 올라 들이닥쳤냐는 듯 박 여사는 금세 온순해졌다.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네? 딱 한 대라더니, 이 정도는 약 바르고 하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지 뭐.”

박 여사는 보는 사람 당황스럽게 눈웃음까지 지어가며 말했다.

“괜히 다들 번거롭게 됐네. 이럴 일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진상아, 어때? 괜찮지?”

“엄마 나…….”

나 맞았다고. 내가 지금 맞았다니까? 짜증 나 치받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진상은 그래봤자 제 꼴만 우스워지리란 걸 알았다. 박 여사는 이미 강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친 곳은 없는지 묻고 있었다.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강호에게 다행이라면서. 진상은 소란에 이어 또 한 번, 이번에는 엄마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 ◆ ◇ 경찰서에서 나온 강호는 소란을 로펌에 데려다주었다. 태석은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갔기에 두 사람만 강호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손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지하주차장에 들어와 엘리베이터 가까운 데 잠시 정차시킨 후 강호가 말했다.

“혹시 백진상이 또 찾아오거나 귀찮게 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긴 해요.”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다. 소란은 무조건 독립적으로 문제를 헤쳐나가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싶진 않았다. 가장 나은 방법을 사용할 것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그래서 강호와의 결혼을 결심했고, 그는 이제 제 편이다. 심지어 본인을 ‘이용’하라고까지 한 사람. 그런 강호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꼭 잡을 것이다.

“덕분에 백진상도 조금은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안심은 하지 말고.”

“물론이죠.”

백진상이 한 발짝 물러선 건 다행이다. 강호의 말처럼 안심할 순 없지만. 진상에게 ‘결혼’이라는 벽은 꽤 높게 느껴지긴 했을 터다. 소란의 결혼이 이제 코앞에 닥친 걸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테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소동은 큰 성과였다.

“이거 가지고 가서 먹어.”

그가 뒷좌석에서 쇼핑백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간식.”

“와……, 엄청 많네요.”

“직원들이랑 나눠 먹어.”

먹기도 아까울 만큼 예쁜 간식들이다. 게다가 소란이 좋아하는 것들뿐이었기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가뜩이나 백진상 때문에 열 받았는데 잘됐다. 얼마 안 남은 결혼식 때문에 참고 있었지만, 오늘은 꼭 먹어야겠다.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들어가.”

소란을 내려준 후, 강호는 지체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부웅,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차를 바라보며 소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는 이걸 주려고 여기까지 왔던 건가……?”

경찰서에서 나와 로펌까지 오면서 강호는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살갑게 챙겨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다. 모든 게 번거로웠다는 듯 그녀를 내려주자마자 쌩하니 가버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 여긴.”

다시 쇼핑백을 살피던 소란이 디저트숍 로고를 알아보았다. 절대 오프라인으로만 판매를 고집하던 숍이라 일부러 찾아가야만 먹을 수 있었는데, 얼마 전 강호의 회사에 입점했다고 들었다. 독점 계약 좋아하는 강호가 또 한 건 해낸 거다.

“일 때문에 다녀오는 길이었구나.”

그가 던지듯 주고 간 간식들도 그제야 좀 이해가 되었다. 나름 반은 맞는 추리였다. 강호가 간식을 산 건 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소란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어찌 됐든 그녀는 강호가 무심한 듯 베푼 친절, 호의, 배려, 그 모든 게 어색하면서도 든든했다. 반면 강호는 그녀의 로펌 건물을 빠져나오는 차 안에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아까부터 내내 귓가에서 맴도는 한마디.  

“나, 강호 씨 진심으로 사랑해.”

  경찰서에서 백진상의 단념을 바라며 소란이 한 말이다.

“진심이라.”

아니면서. 진심 절대 아닐 거면서. 그렇게 예쁜 입술로 진심이라고 해버리면.

“후우…….”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우소란. ‘이용’은 강호 제가 먼저 하라고 해놓고선, 막상 소란이 제 존재를 방패로 내세우자 속절없이 휘둘린다. 경찰서에서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감추지 못한 미소가 바람결처럼 입가를 스쳤고, 거짓이란 걸 알면서도 심장은 자꾸만 거칠게 반응했다. 이대로라면 폭발하는 건 시간문제다.

“자극하면, ……안 좋을 텐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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