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예비신랑의 짝사랑2020.12.12.
“천천히, 하나씩 전부 확인시켜줄게.”
힘쓰는 것도 잘한다던 그는 쌀을 둘러메고서도 세상 그 무엇보다 가뿐해 보였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 팔뚝에 툭툭 불거진 힘줄. 넓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 늘씬하고 강인한 허리. 바지가 착 감싸고 있는 탄탄한 허벅지까지. 엄청난 시각적 자극에 소란의 숨이 훅 막혔다.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강호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백강호가 지금 내 집으로 쌀을 나르고 있다니. 비현실적이라 믿기지 않았다.
◇ ◆ ◇ 강호의 차 안. 성준이 만든 반찬을 조수석에 고이 모시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낮에 식당에서 마주쳤던 소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이, 우리 강호 씨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데요. 저한테만 불러줬나 봐요. 그쵸?”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요. 강호 씨는 뭐든 잘하거든요.”
활짝.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 비록 제 뜻에 동조하라며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강호는 눈앞에 환한 빛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속이 바짝 타는데 그녀는 그의 옆구리에 손까지 댔다. 쿡, 쿡, 찌르는 그 손길이 제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 견뎌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것도 모르겠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밤에 잠이 들 때도 온통 믿기지 않는 순간뿐이었다.
“혹시 불쾌하셨던 건 아니죠? 저희 결혼한다는 걸 다들 믿지 않다 보니 좀 세게 얘기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어요.”
아까 차 안에서 소란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해명하듯 말했다. 불쾌할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저도 별생각 없이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 앞에서나 그러지, 제가 대표님께 따로 마음을 품은 건 절대 아니니까요.”
그녀는 계속해서 선을 그었다. 서로 간 이성적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사실 그 조건은 그녀와의 계약 전에 만든 것이다. 상황이 변하지 않았던가. 결혼 상대로서 우소란은 다르다. 강호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이성이니까. 하지만 소란은 이전 조건을 그대로 인수하여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했고, 그는 찬성했다. 그는 제가 소란에게 따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며 예전부터 계속 지켜봐왔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바보는 아니다. 그랬다면 소란이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을 테니까. 계약의 빈틈을 파고들지언정 기회 자체를 놓칠 수는 없다. 앞서가는 제 마음을 잡아채 그녀와 속도를 맞추어야만 했다. 그게 지금 강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후우…….”
누가 믿을까.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이 여전히 짝사랑 진행 중이란걸. 그것도 천하의 백강호가. ◇ ◆ ◇ 대표변호사 마태석. 제 이름이 쓰인 명패가 놓인 책상 앞에 앉은 태석은 서류를 읽다 말고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인가. 가슴에 이토록 심한 갑갑증이 생긴 게. 그는 서랍을 열어 하얀 카드를 꺼냈다. 강호와 소란의 청첩장이다. 어찌나 자주 들여다봤는지 안에 적힌 문구까지 다 외우게 생겼다.
“날짜도 얼마 안 남았네.”
최근 모이는 자리마다 강호와 소란의 결혼 이야기가 한창이다. 얼마나 불타올랐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혼을 결정했겠냐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되는 결혼이 모두에겐 놀랍고도 신기한 소식이었다.
“흐으음.”
태석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탁, 탁, 짚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섰다.
“후우우우!”
태석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이유 없는 무력감이 연일 밀려들었다.
“늙어서 그래, 늙어서.”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아무 서류나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태석이 향한 곳은 소란의 방이다.
“우 변, LW 공장 관련 의견서 검토해봤는데.”
“네, 선배님. 무슨 문제라도?”
“아니, 완벽해. 너무너무 완벽해.”
그는 크흐, 하고 엄지를 치켜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뭐 잘못된 거 있나 했잖아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따 화상회의가 있을 예정이에요. 이건 의견서 의뢰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고요.”
일 때문에 온 줄 아는지 소란은 즉석에서 브리핑했다. 아니. 내가 궁금한 건 이게 아니고.
“소란아, 그런데.”
“말씀하세요.”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
“네?”
궁금한 건 많지만 우선 그것부터 물었다. 강호와 소란이 제대로 안면을 튼 건 이번 일로 그녀가 파견 나가면서부터였다. 그의 고등학교 인맥인 강호, 찬규, 나린 쪽과 대학교 인맥인 소란, 연희 쪽은 애초에 접점이 없다. 강호가 같은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전공이 다른 소란과 엮일 일은 없었단 말이다. 찬규와 연희를 중간에서 소개한 것도 바로 태석이다. 마당발인 태석은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지인이 있고, 그들 중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주길 즐기기도 했다. 연인뿐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라든가 친구로도 말이다. 하지만 태석의 커플 매칭 대상에 강호와 소란은 없었다.
“두 사람이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 너무 신기해서. 백번 양보해서 사귀기로 했다고 하면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수긍은 할 텐데, 결혼이라고 하니까.”
“제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요.”
“네가?”
태석이 기함해 소란을 바라보았다. 사실 강호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해도 믿지 못할 판이었다. 강호는 연애나 결혼은커녕 이성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거세게 거부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유명했다. 누군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극도로 꺼렸다. 몇 년 전에 부득이하게 참석한 파티에서는 제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접근한 여자를 거칠게 밀쳐낸 적도 있다. 바닥에 세게 나동그라진 그 여자가 창피했던 나머지, 그에게 맞아서 넘어졌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강호는 종종 그런 부분에서 오해받곤 했다. 여자를 함부로 다루고 손찌검도 예사라는 루머까지 돌았다. 물론 태석은 강호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안다. 그러나 선입견이란 무서워, 강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은 그를 대할 때 겁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한 건, 강호가 굳이 루머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잡는다고 잡히냐면서. 오히려 귀찮은데 잘됐다는 듯 그는 본인에 대한 소문을 내버려두곤 했다. 그런 강호에게 소란이 먼저 결혼하자고 했다니. 게다가 강호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두 사람이 연애에 결혼까지 하게 됐다니.
“강호가 그렇게 쉬운 남자는 아니었을 텐데.”
“어려워서 좋았어요.”
그에게 어떤 소문이 따라다니든 소란은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다. 태석은 문득, 얼마 전 바로 이 사무실에서 밀착해 있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농염한 분위기가 질척하게 흐르는 그 현장을 바로 제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내가 진작 소개해줬을 텐데. 생각도 못 했어.”
“에이, 아니에요. 저야 남친이랑 헤어지고 정신없었는데요.”
그런데도 시작된 연애. 두 사람의 결혼. 태석은 씁쓸한 약을 물도 없이 삼킨 기분이었다.
“축하해.”
생각해보니 결혼을 축하한단 말도 못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인사가 늦었다. 결혼 축하해.”
“그러고 보니 축하한단 말 거의 못 들었어요. 다들 너무 놀라기만 해서.”
소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강호, 멋진 남자야. 남자인 내가 봐도.”
태석은 결국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란이란이 우소란이, 알고 보니 눈이 엄청 높았구먼.”
“고마워요, 선배님. 역시 선배님밖에 없어요.”
“그치? 역시 나밖에 없지?”
“네, 그럼요.”
“결혼 선물 받고 싶은 거 생각해놔. 뭐든 해줄 테니까.”
복잡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태석은 대외적으로 해야 할 말을 줄줄이 읊어냈다. 그러나 그의 속은 더욱 아릿해지기만 했다. 그때 소란의 책상 위 인터폰이 울렸다.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팀 비서가 전하는 이야기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우 변호사님, 급한 전화 상담이 있습니다. 지금 가능하실까요?
태석이 손짓하여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일을 보라 했기에 소란은 끄덕이며 응대했다. 잠시 전화 상담을 진행할 시간 정도는 있다.
“어떤 사건이죠?”
- 동생의 학교 폭력 피해 사실과 관련하여 이에 대응하다가 가해자를 폭행하게 된 형의 전화입니다. 연결할까요?
“네, 연결해주세요.”
소란은 메모를 위해 태블릿을 열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경우라니. 그것도 가족의 학교 폭력 피해로 인해서. 벌써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우소란 변호사입니다.”
전화 상담에 들어간 소란을 두고 태석은 문 쪽으로 향했다. 그도 업무가 산재해 있어 그녀를 더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기도 했다. 아쉽게도 갑갑증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지만.
“우선 사건 경위부터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사실 위주로 설명 부탁드릴게요.”
- 소란아, 나야.
그러다 스피커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태석은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의뢰인의 태도가 수상했다.
“……백진상?”
- 그래, 나야. 역시 내 목소린 바로 알아듣네.
백진상이라면, 소란의 전남친이 아닌가. 태석은 기가 막혀 소란을 바라보았고, 소란의 눈썹은 일그러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이런 식으로 전화해?”
- 네가 내 전화 계속 피하잖아. 찾아가면 접근금지 가처분인가 뭔가 하겠다고 하고. 이렇게라도 해야 너랑 통화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거짓말로 상담을 요청했다고?”
하,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태석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자 소란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태석이 당장에라도 전화에 대고 욕을 할 것만 같아서.
“이 미친 새끼야.”
소란이 또박또박 부러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욕을 하는 건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 화를 내긴 내네.
오히려 진상은 픽 웃었다.
- 내가 바람을 피웠을 때도 화 한번 안 내길래 은근히 서운했는데.
화를 내진 않았다. 헤어지자고 했지. 그러나 소란의 감정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야겠다는 듯 진상은 자극하고, 또 자극했다. 갈등이 생긴 후에야 그를 풀어내는 두 사람의 방식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걸 소란은 깨달았다.
- 그런데 이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네가 하도 나를 역병 걸린 사람처럼 피하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뿐인데.
거머리의 정도를 넘어섰다. 삶 곳곳에 징그럽게 파고드는 기생충 같았다. 개인적인 연락 수단이야 다 차단한다고 쳐도, 업무에까지 침범하다니. 대체 어떻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접근금지 신청을 낸다 한들 그게 끝나고 나면? 작정하고 달려드는 벌레 앞에서는 법의 보호마저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참담하기까지 했다.
- 차단 그만 풀고, 접근금지니 뭐니 그런 협박도 그만해. 다 소용없어.
“나 결혼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 너희 엄마가 말씀 안 하셔?”
- 들었어.
통화 내용을 생생히 듣고 있는 태석은 속이 다 부글부글 끓었다. 소란이 전남친 때문에 이 정도까지 괴로운 상황이란 건 몰랐다. 이것도 오늘 이 통화를 듣지 못했다면 끝까지 몰랐겠지.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그를 상대로 소란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보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강호와의 결혼 소식보다 이게 더 마음 아렸다.
- 그런데 네가 백강호 그 자식하고 결혼하는 것도 결국 다 나 때문이잖아?
진상은 친척 형인 강호를 ‘그 자식’이라 칭했다. 형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는 듯.
- 네가 나를 못 잊어서. 나를 어떻게든 자극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건 이해해.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소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다만 무작정 전화를 끊었다가는 진상이 또 어떤 지능적인 방법을 이용해 제게 접근할지 모를 일이다.
“하, 이 새끼가 진짜.”
태석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나서려는데 소란이 팔을 올려 툭 막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음성 녹음 어플을 켜고는 버튼을 눌렀다. 증거를 모으는 건 습관이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녀의 담담하고도 차분한 태도에 태석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많이 당했으면 꿈쩍도 하지 않을까.
- 백강호 그 자식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여자한테 손찌검은 예사고, 성격도 개차반이라고. 친척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냐?
진상의 발언은 점점 더 도를 넘어섰다.
- 백강호네 집이 우리 집안에 어떻게 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나 엿 먹으라고 하필이면 백강호한테 들이대서 결혼까지 해?
“…….”
- 너 설마 그런 스타일을 좋아했던 거야? 내가 지극정성으로 잘해줘도 은혜도 모르더니.
말하다 열이 더 뻗치는 듯 진상은 해선 안 될 말까지 입에 올렸다.
- 하여튼 없는 집 애가 자존심만 드럽게 세서, 사귀는 동안에도 뭐 줄 듯 말 듯 사람 간만 보고 말이야. 아빠 편찮으시다, 오빠 일 도와야 한다, 공부한다, 시험 본다, 하여튼 지 사정만 급하지? 아오오! 짜증 나.
급기야 무언가를 걷어차는지 퍽, 퍽, 소리가 났다. 대체 어디서 저러고 있는 건지. 헤어진 후의 진상은 종종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잘못했다며, 자신이 흥분해 말이 지나쳤다고 사과하곤 했다. 적어도 사귀는 동안엔 신사적이었는데. 사랑싸움이라 할 만한 일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까지 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 기어이 끝장을 보게 된 지금이 참으로 씁쓸했다. 진상은 정말 말 그대로 진상을 부리는 중이다.
- 너 9년이나 나 왜 만났냐? 나한테 뜯어낼 거 다 뜯어냈다고 돈 많아 보이는 내 친척한테까지 옮겨타는 스킬,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돈만 보고 달려들었으니, 앞으로 백강호한테 맞고 살아도 넌 할 말 없…….
그때였다. 투욱. 뭔지 모를 파열음이 둔탁하게 울렸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조금 멀게 들려왔다.
- 더러워서 못 들어주겠네.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선 소란과 태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내가 여자는 안 때리는데.
누가 들어도 백강호의 목소리.
- 쓰레기는 좀 치워야겠다.
- 아악! 혀, 형……, 자, 잘못……!
퍼어억. 한 대 맞기라도 했는지 진상의 비명이 처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