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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잘해? (10/112)

#10화. 잘해?2020.12.05.

강호는 교복 입은 여자애가 제게 머플러를 둘러주었을 때, 어쩌면 촉각 방어 증세가 조금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숨 막히는 기분이 덜했다. 아니, 뭐 조금만 닿아도 조이던 목이 시원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머플러를 하고도 멀쩡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다. 물론 그때만 잠깐일 뿐, 금세 풀어내야 했지만. 그래서 제 유일한 여사친인 나린에게 머플러를 들고 가 내밀었다. 누구라도 상관없는 건지, 아니면 그 여자애가 특별했던 건지 알아야 했다.

“이거 내 목에 둘러줘 봐.”

“이게 미쳤나. 뭘 해달래, 나한테.”

“나도 싫은 거 참는 중이야. 빨리 해.”

나린이 어이없어하며 옜다, 하고 머플러를 둘러줬다. 역시나 단번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아.”

강호는 거칠게 머플러를 풀어냈다. 촉각 방어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정상은 아니야. 어흐, 또라이, 또라이.”

머플러를 둘러달라며 가져와서 기껏 해줬더니 신경질적으로 풀어낸 강호를 보며 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그에게 ‘촉각 방어’라는 증세가 있다는 건 나린도 몰랐다. 납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기에, 그가 봉지로 목이 졸렸던 경험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사춘기를 겪으며 강호가 훨씬 까칠해졌고 시니컬해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조부모 대의 친분으로 얼굴 보며 지내고는 있지만, 별로 마주하고 싶은 사이는 아니라고 서로 생각했다.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

강호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린은 게임기를 두드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세상에 그런 건 없어. 결핍이 만들어낸 착각 같은 거야.”

결핍. 착각. 나린이 스치듯 던진 한마디에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찾아왔고 새내기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교정 곳곳에 가득했다. 3학년이 된 강호는 여전히 먹빛 어둠 속에 살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나 흘렀을까. 쏟아지는 벚꽃 잎이 눈발처럼 휘날리던 날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건물에서 나오던 강호는 우뚝 멈추어 섰다. 화사하게 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그보다 더 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애였다. 몇 달 전, 교복 입고 안경을 쓰고 있던 그 여자애. 지금은 안경을 쓰지 않은 얼굴에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지만 분명 같은 사람이다. 웃을 때 하얗게 부서지듯 사랑스러운 눈매가 똑같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한 모습도 아니다. 강호의 기억 속에 내내 숨 쉬고 있던 얼굴이기에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 입학했구나.’

궁금했었다. 어느 학교에 갔는지. 품에 파일 박스를 안고 친구들과 웃으며 지나가는 그 애가 내심 반가웠다. 알은체할까 했다.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제 목에 뭔가를 둘러주거나, 손을 대봐 준다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핍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인지.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소란아!”

강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는 얼굴이었다. 백진상. 그의 육촌동생으로, 집안 행사 때 가끔 얼굴을 보지만 그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좋지 않은 관계였다. 고인이 된 작은할아버지와는 경영권과 재산 문제로 트러블이 있었다고 들었다. 인격자인 백 회장이 오죽하면 동생을 밀어냈겠냐고들 말이 많았다. 백 회장은 자신의 대에서 친족 경영을 정리했고, 외아들인 강호 부친에게도 회사를 물려주는 대신 원하는 건축 공부를 하도록 지원해주었다. 먼 친척이나 다름없는 진상이 저와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건 강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소란아, 너 남친 왔다, 남친.”

“꺄, 좋겠다. 우소란.”

달려온 진상을 보며 그녀의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남친? 강호는 신경이 곤두서서 그쪽을 응시했다. 우소란이란 이름으로 불린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남친.”

“에이, 아직은 아닌 거겠지. 곧 될 거잖아, 남친.”

진상의 너스레에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다.

“너희 다 공강이지? 후문 영이네로 치즈떡볶이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진상은 소란의 친구들에게까지 친절하게 굴었다.

“좋아, 좋아!”

“튀김이랑 순대도.”

“콜! 너희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가자!”

화끈하게 인심을 쓰는 진상은 소란의 친구들에게 꽤 인기가 좋아 보였다.

“저기 봐. 쟤네가 법대 새내기 1호 커플 맞지?”

“여자애 너무 좋겠다. 백진상인가, 저 남자애가 이번 1학년 중에 제일 괜찮잖아. 집도 엄청나게 부자라던데. 백화푸드 계열사 사장 아니야, 아빠가?”

“맞아. 백화 집안이라더라. 대박.”

계열사라 해봤자 자회사 중 하나로 규모가 작은 기업이다. 작은할아버지는 기를 쓰고 차지한 재산을 무서운 속도로 날려먹었고, 이리 밀려나고 저리 밀려난 진상의 부친은 자회사 하나 간신히 붙들고 있는 처지였다. 그마저도 내실을 다지지 못해 위태로운 지경이라, 그룹 차원에선 흡수합병을 고려하는 상황이었고. 눈치가 빠르고 처세에 능한 진상의 모친 박 여사가 아니었다면 진작 길거리에 나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위기감 하나 없이 럭셔리 라이프를 즐겼다. 집안을 자랑하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진상을 보면서, 강호는 더더욱 제 배경에 대해 함구하게 됐다. 그렇기에 그들이 육촌이란 건 대부분 몰랐다.

“남자애가 오티 때 여자애 콕 찍어서 바로 들이대기 시작했다며. 완전 꽂혔나 본데, 제대로 순정파네.”

“근데 아직 커플은 아니라던데?”

“남자애가 인물 괜찮아, 집 부자야,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줘.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 저렇게 대놓고 쫓아다니는데 조만간 사귀겠지.”

소란의 주변이 뾰족한 철망으로 둘러싸인 것만 같다. 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간 다른 이의 입에 골치 아프도록 오르내릴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란과 진상의 만남이 그렇게 오래 이어질지 몰랐다. 그녀가 제게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인지 확인해보고 싶던 마음을 접어둔 채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그러나, 접어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결핍이 만들어낸 착각이 맞는 걸까. 오히려 더 짙어지는 감정은 때때로 그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했다. 외면하고 싶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제 욕심 때문에 그녀를 시끄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란이 둘러준 머플러 이후로, 단 한 번도 촉각 방어 증세가 나아진 적이 없던 강호는 애타는 마음을 힘겹게 밀어냈다. 기대하고 체념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오늘에서야 강호는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

“그걸 확인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네.”

착각이 아니었다. 소란이 제 앞에 가까이 와서 손을 뻗고, 손끝으로 단추를 만지고, 잠그는 사이사이 뻗은 손가락이 옷깃을 스쳐 피부에 닿고……, 그건 모두 참을 만한 자극이었다. 그녀가 닿을 때만큼은 숨통을 끊어놓을 듯 목이 졸리는 느낌이 약해졌다. 다소 괴로운 순간은 있어도 평소와 같은 강도는 아니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우소란. 역시 잘할 줄 알았어.’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 그녀는 제게 그런 사람이다.

  ◇ ◆ ◇

“백진상한테는 진짜 연락 없는 거야, 그 이후에?”

“응.”

며칠이 지난 후 점심시간. 소란은 간만에 연희와 외근 동선이 맞아서, 함께 식사하러 부대찌개 집에 앉아 있었다. 직원이 재료가 푸짐하게 든 냄비를 가운데 놓고 가자 두 사람은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진상 이제는 정말 포기하겠네. 차라리 결혼이라도 하지 그러냐고 하더니, 진짜 결혼하는 거 보고 나가떨어졌나 봐.”

“그럼 다행이지.”

박 여사가 다녀간 후로 진상으로부터 전화라도 한 통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직 소식이 없다.

“그 새끼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더니. 어휴, 내가 다 홀가분하다.”

연희는 찰거머리를 떼어낸 데 후련하게 웃었다. 그러나 소란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걔가 원래 그렇잖아. 연락이 전혀 없는가 싶다가 갑자기 들이닥치고. 아직 마음 놓긴 일러.”

“그래도 강호 오빠랑 결혼한다는 거 알았는데 설마 계속 그러겠어? 일단 먹어. 맛있겠다.”

라면 사리를 뜨는 연희를 소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른 먹어봐, 여기 국물 진짜 끝내줘. 찬규 오빠 단골이잖아. 이 근방이 오빠네 회사라서.”

저 라면 먹어, 말아. 곧 드레스도 입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호 오빠냐. 암만 생각해도 진짜 대박이야. 네가 그때 그래서 결혼이라도 할까, 소리 했던 거지? 얘가 왜 이러나 했어.”

왜 이러나 맞다. 그땐 사귀긴커녕 강호와 나린의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으니까. 답도 없이 꿈꿨던 막연한 결혼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라면 진짜 꼬들하게 잘 익었네. 먹을까, 말까.

“찬규 오빠랑 나는, 너랑 강호 오빠 두 사람 연결해볼 생각 진짜 꿈에도 해본 적 없었는데. 강호 오빠가 어디 보통 사람이냐. 어흐, 그 눈빛 살벌해서 난 말도 못 붙이겠더라. 난 역시 귀요미 취향인가 봐.”

“찬규 오빠가 좀 귀여운 스타일이긴 하지. 라면 맛있어?”

“응, 맛있어.”

연희는 면발을 후루룩 흡입하며 오물오물 씹었다. 그녀는 태석의 소개로 만난 찬규와 결혼했다. 길지 않은 기간 알콩달콩한 연애 후에 결혼했고 금세 아들도 낳았다. 연희와 그의 남편 찬규는 자타공인 결혼 장려 커플이다.

“근데 만나보니까 어때? 강호 오빠 어떤 스타일이야? 그렇게 금방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우리 찬규 오빠는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랑꾼 아니야? 알고 보니 엄청난 스윗 가이?”

진짜 사귀어봤어야 알지.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연애 중인데 겉보기와 똑같이 살벌한 스타일이라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이에 소란은 아무 소리나 늘어놓았다.

“엄청 자상해. 배려심도 깊고, 센스도 있어서 뭐 원하는 거 생기기도 전에 먼저 다 들어주고. 그리고 겉으로만 봐도 알겠지만 몸도 진짜 좋고…….”

“잘해?”

“당연히 잘하지……, 응?”

생각 없이 말을 받던 소란은 눈이 동그래졌다. 잘하긴 뭘 잘해. 괜한 생각에 귀가 새빨개진 그때였다.

“어, 오빠!”

소란의 뒤쪽에서부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희가 반갑게 인사했다. 동글동글한 안경에 가지런한 앞머리, 언제 봐도 선한 인상의 찬규가 먼저 냉큼 연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안 갔네. 벌써 먹고 갔을까 봐 부랴부랴 나왔는데.”

“오늘 점심은 사무실에서 도시락 먹는다더니.”

“너랑 제수씨 여기 왔다는데 도시락이나 먹고 있을 순 없지.”

나린이 소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쩐지 홍찬이 이놈, 죽어도 도시락 안 먹겠다며 기어이 끌고 나오더니.”

“언니, 안녕하세요. 외근 나왔다가 생각나서 먹으러 왔어요.”

연희의 살가운 인사에 나린이 무심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했다. 소란도 그녀에게 인사하며 초조한 마음에 표정을 살폈다. 아까 연희와 하던 얘기를 들었을까? 못 들었겠지? 괜히 창피했다. 뭐라고 했더라. 잘한다고 했는데. 그 앞엔 몸도 좋다고 했고. 아, 진짜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나마 강호가 없는 게 다행이지만, 그래도 가짜 결혼인 걸 아는 나린에게도 부끄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라면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오 분 전이 훨씬 행복했다. 소란은 목이 바짝바짝 타는 통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컵을 들었다. 아무 맛도 없는 생수가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여기 주문할게요. 이쪽 테이블에 찌개 3인분이요.”

옆 테이블로 새로 주문을 넣은 찬규가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며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뭘 잘해?”

푸후우웁! 순간 소란이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 맞은편에 있던 연희와 찬규가 직격으로 날아든 물폭탄을 맞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연희야, 미안!”

소란이 얼른 티슈를 뽑아 건네는데 찬규가 하하, 웃었다.

“건조할까 봐 소란 씨가 자연 미스트도 뿌려주고. 뭐 이런 게 우정이지. 하하.”

“오빠, 나 화장 번지지 않았어?”

연희가 걱정스럽게 묻자 찬규가 자신보다 먼저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며 살폈다.

“아니, 전혀. 화장 아주 탄탄하게 잘했네. 우리 연희는 화장을 잘해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린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

뭔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진다. 이 순간 나린은 폭주기관차였다.

“뭘 잘하냐니. 너 그 앞에 한 얘긴 진짜 못 들었어?”

“무슨 말? 뭘 잘한다길래 그게 뭔지 물어본 건데.”

이에 나린은 소란을 놀리듯 슥 보며 말했다.

“겉으로만 봐도 알겠지만 몸도 진짜 좋고, 라고 했지. 백강호 예비 와이프님께서.”

찬규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거 백강호 얘긴 거야? 몸도 좋고 잘하고? 이야아.”

소란은 여기서 자신이 생을 마감한다면 사인은 수치사라고 생각했다. 가짜 결혼 주제에 그딴 소린 왜 해서 이 창피를 당하고 있나.

“소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화끈하네. 우리 강호 몸도 좋고 잘하고 그래서 결혼하는 거였구나. 어쩐지, 그렇게 빨리 결혼을 결정하기에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더라니.”

찬규가 즐거워하며 본인의 얼굴을 닦아냈다. 제대로 물세례를 맞은 대가로 이 정도는 놀려먹어야지 하는 심산 같다. 소란은 궁지에 몰렸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끈기가 생기는 타입이다. 그녀는 굳게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는 강호도 없는데 무슨 소릴 못 할까.

“네, 맞아요. 저 강호 씨 몸도 좋고, 잘하고, 그래서 너무 좋아 결혼하는 거 맞거든요.”

인생 뭐 있냐. 어차피 가짜로 시작해 가짜로 끝날 거, 누구에게든 지지는 말아야지. 그래야 아무도 얕잡아 보지 않는 거다. 그녀의 생존 방식이다. 역시나 나린은 소란의 강단이 의외라는 듯 오, 하고 입술을 모았다. 다만 계산에 없던 순간이 툭 튀어나왔다.

“내가, 뭘 잘하는데?”

히이익. 놀란 소란이 돌아보았다. 서늘한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가 제 뒤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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