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싱그러운 숨결 (9/112)

#9화. 싱그러운 숨결2020.12.01.

“단추, 잠가달라고.”

이 남자는 본인의 외양이 얼마나 색기가 넘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소란은 단추로 괴롭힘을 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 네, 단추.”

소란은 다시 그의 단추와 옷깃을 잡았다. 이 정도는 못 해줄 것도 없는 가벼운 수준이다. 다른 것도 아닌 그저 단추쯤이라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그와 붙어 있으니 호흡이 달리는 듯해 그게 힘들었다. 강호의 몸에서 은은히 퍼지는 향기가 매혹적이었다. 목 아래 조그마한 단추를 잡고 다른 쪽 구멍에 끼우는 간단한 작업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소란이 단추를 채워가는 동안, 그는 힘든 일을 참아내는 것처럼 조금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그에게 단추란 유쾌한 존재는 아닌 모양이다. 소란은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단추 채우기를 겨우 마쳤다.

“됐어요. 이제 단정하네요.”

대단한 일을 끝낸 것처럼 소란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는 일이 거의 없었다. 타이를 한 모습도 본 적 없고. 심지어 결혼식에 입을 슈트를 피팅할 때도 그는 타이를 하지 않겠다고 해 숍 직원들이 난감해했다. 꼭 타이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주인공으로 빛날 얼굴이긴 하지만, 신랑이 재킷 안에 다소 프리한 셔츠 차림으로 입장하겠다니 그야말로 파격이다. 하긴, 처음 보았을 때도 한겨울에 코트 안으론 목이 패인 티셔츠만 입고 있어 추워 보였던 기억이 난다. 10년 전이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차림이었다. 직접 머플러를 다시 둘러준 게 바로 소란 자신이었으니까.

“흐음…….”

마찬가지로 숨을 참고 있었는지, 강호가 깊은 호흡을 내쉬며 다 잠근 셔츠 끝을 만지작거렸다. 기다랗고 남자다운 손가락 끝이 단추를 매만졌다. 힘줄이 불거진 손등이 조심히 움직였다.

“역시, 좀 낫네.”

그래도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이내 단추를 풀어냈다. 기껏 잠가달라고 해서 잠가줬더니 금방 도로 푸는 건 또 뭐야.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으시다는 건 뭔가요?”

“확인했어.”

이제야 속이 후련한 듯 강호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

“그걸 확인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네.”

처음부터 알아보았다는 말. 내 느낌이라는 말. 단추를 잠가줄 운명이라는 거야, 뭐야.

“우소란. 역시 잘할 줄 알았어.”

“설마 이것 때문에 저랑 결혼하시는 건 아니죠?”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군.”

황당해 던진 한마디에 그가 냉큼 수긍했다.

“앞으로 타이 맬 일이 있으면 부탁할게.”

그러니까. 단추를 잠그고, 타이도 매달라고? 소란은 강호의 속을 알 수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강호가 자신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예전에 절 알아보았다는 것. 백진상의 여자친구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추를 잘 잠가줄 사람으로서.  

“그걸 확인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네.”

  순간 소란은 낯선 운명의 소리를 들었다. 이 결혼 어쩌면, 단순한 계약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 ◆ ◇

“……걔 강호랑 결혼한대.”

“그게 무슨 소리야.”

박 여사는 대뜸 진상에게 청심환까지 먹여놓고서 겨우 운을 뗐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아 진상은 얼얼한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그 강호가 나도 아는 강호 말하는 거야? 큰할아버지네 백강호 형?”

“그래, 두 사람이 언제 그렇게 됐는지 곧 결혼한다고…….”

“그게 말이 돼?”

박 여사는 지금껏 소란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진상 때문에 쳐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들 앞에서는 늘 좋은 엄마인 척했다. 집안이고 뭐고 다 상관없으니 난 네가 좋으면 좋다고 했다. 뒤로는 온갖 지저분한 짓을 다 했으면서, 진상의 앞에선 아닌 척했다. 어떤 일이든 ‘두 얼굴’은 박 여사의 기본이다. 작년에 드디어 헤어졌다고 해서 내심 기뻐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그 계집애를 다시 만나겠다며 난리를 쳐댔다. 이럴 바에야 결혼이라도 한번 시키는 수밖에 없다 싶어 제가 나선 것이다. 진상도 끝장을 봐야만 흥미를 잃을 테니까. 그러면 며느리가 된 그년을 깨뜨리고 부수어 성에 찰 때까지 괴롭혀준 다음에 이혼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백강호의 신붓감이라니, 세상 참 좁다. 우소란도 그렇지. 그 집이 어떤 집인 줄 알고 제 발로 들어가. 평생을 힘들게 살더니 박복하기도 해라. 집에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그리 나쁜 상황만은 아니다. 그간 약 올랐던 마음이 벌써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지금은 자신이 약자로서 백 회장 집안을 향해 납작 엎드려 지내고 있지만, 이 짓 끝낼 날도 머지않았다. 거기에 소란까지 더불어 한 번에 싹 치울 수 있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웬 떡인가 싶을 만큼.

“어떻게 소란이가 강호 형이랑 결혼해? 진짜 말이 안 되잖아!”

도무지 믿기 힘들다는 듯 진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이 그거야. 네가 그 애한테 얼마나 잘했니. 엄마도 네가 그렇게 좋아하니 잘해주려고 애썼는데 걘 우리한테 어떻게 했어?”

아들에게 피해자는 우리 쪽이라는 걸 분명히 주지시켰다. 늘 그래왔듯이.

“헤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어떻게 네 친척 형인 강호를 꼬드겨 결혼까지 할 수가 있냔 말이야. 세상에 어쩜 그런 불여시 같은 게 다 있니.”

박 여사의 말에 진상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 상처받는 거 싫어. 배신하고 떠난 그런 애 신경 쓰느라 인생 낭비할 필요 없단 말이야. 아무리 잘해주면 뭐 하니?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어차피 진상도 소란이 정말 좋아서 매달린 건 아닐 터다. 내내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오기가 생겨서 여태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었을 뿐이다. 뭐든 마음껏 쓰다가 제가 먼저 내다 버려야 속이 후련한 애인데. 그쪽에서 먼저 거리를 벌리고 선을 그으니 안달이 나고 애가 탔겠지.

“그딴 애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자. 응?”

박 여사는 어린아이 달래듯 진상의 어깨를 잡으며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감정이 격해진 그는 엄마의 손을 훅 뿌리쳤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만 나가.”

박 여사가 그 힘에 떠밀리듯 내쳐졌다.

“알았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부르고.”

진상이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것 같았다. ◇ ◆ ◇ 검은 밤. 드레스룸에 들어서서 셔츠를 벗기 위해 단추에 손을 올린 강호가 멈칫했다. 제 앞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소란의 얼굴이 생생했다. 대뜸 단추를 만져보라는 말이나 한번 잠가보라는 말이 어이없었을 텐데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요구를 들어주었다. 강호는 셔츠를 벗어젖혔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그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섰다. 탄탄한 근육 위로 투명한 물이 쏟아져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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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천천히 제 목 주변을 문지르듯 쓸어보았다. 갑갑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은 다른 날보다 확실히 덜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저랑 결혼하시는 건 아니죠?”

  그녀의 황당해하는, 그러나 당돌하고도 귀여운 질문이 다시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너는 알까. 네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 각인되었는지를. ◇ ◆ ◇ 매캐한 연기. 질식할 듯 조여드는 숨.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은 어둠. 꽉 졸리는 목.

“조금만…… 조금만 참아. 금방 죽을 거야.”

죽음을 예고하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 아릿하게 풍기는 알코올 냄새. 폐창고 안에서 열여섯 살의 강호는 손발이 묶인 채 얼굴엔 검은 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머리에다 통째로 뒤집어씌운 봉지를 목 쪽에서 단단히 묶어두었기에 강호는 앞이 안 보이는 건 둘째치고 목이 조여드는 불쾌한 느낌에 미칠 지경이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시각이 차단된 상태로 냄새, 소리에만 의존한 채 공포를 견뎌야 하는 것도 죽을 만큼 괴로웠다. 평소보다 후각과 청각이 상당히 예민해져 더 힘들었다. 이대로 빨리 뭐든 끝났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우르릉 콰아앙! 돌연 천둥이 울렸다.

“뭐야,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는데.”

괴한의 당황한 음성도 똑똑히 들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걸까.

“에이, 씨발. 몰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던진 말끝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바닥에 어떤 액체를 왈칵왈칵 뿌리는 소리. 탁,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 검은 봉지 밖이 밝게 빛나는가 싶더니 저 멀리 화르르 불길이 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괴한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그러다가 타다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제 혼자 남았다. 강호는 테이프로 입이 막힌 채 소리 지를 수도 없는 공포 속에서, 차라리 정신이 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저녁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고 그걸 보관하고 있다는 편의점에 찾아갔다. 처음 가는 동네였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훔치거나 주운 사람이 거기까지 가서 놓고 간 모양인가 했다. 낯선 편의점에 들어가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나오는 길에, 으슥한 골목에서 누군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이 상태였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은 채로 죽어버렸으면 이 끔찍한 공포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괴한이 원하는 건 뭘까. 들어준다면 살려줄까. 그러나 아무런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강호가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꼼짝없이 죽을 뻔했던 강호는 바로 도착한 소방차와 경찰로 인해 기적적으로 구출될 수 있었다.

“노숙자요?”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들었다. 노숙자의 범행이라고 했다. 인생을 비관한 노숙자가 폐창고에 불을 지르고 죽을 생각으로, 지나가는 남학생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저승길 동무가 필요했단다. 그렇게 함께 죽으려다가 무서워서 결국 본인은 뛰쳐나갔다고 했다. 방화 사건은 보통 증거의 멸실로 인해 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편이다. 노숙자의 동태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강호는 꼼짝없이 목숨을 잃고 그 경위를 밝히기조차 어려운 지경이 될 뻔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신고해주신 분께 정말 큰 은혜를 입었다. 누군지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신고자 개인정보는 민간인에게 알려줄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깝게 됐어. 인사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 됐든 강호의 조부모는 하나뿐인 손자를 잃을 뻔한 그 사건이라면 치를 떨었다. 일찌감치 아들 내외도 화재 사고로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불이라면 아주 끔찍했다. 하지만 강호는 그 일로 인해 불보다도 더 큰 두려움과 강박 증상을 얻게 됐다.

“촉각 방어라고 합니다. 뭔가 목에 닿는 느낌을 극도로 싫어하는 증상이죠.”

외상 후 스트레스 관련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가만히 있어도 목이 졸리는 기분에 숨이 막히는 이유를 파악하게 됐다. 추위를 타는 편이라 겨울이면 터틀넥과 머플러를 즐겨 했는데 사건 이후로는 그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넥타이나 목걸이조차 힘들 수 있어요. 아예 목을 비롯한 신체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조차 꺼릴 수 있고요.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특정 경험으로 인해 발현하기도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목을 꽉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 뒤집어씌운 봉지가 목에 묶였을 때의 느낌과 기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죽을 것만 같았다.

“강호 군은 죽음과 맞닿았던 경험이 있기에 단순히 불쾌한 걸 넘어서서 공포를 느끼기도 할 겁니다.”

정말 그랬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손길마저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촉각 방어 자체가 반드시 치료를 요하는 증상은 아닙니다. 일상의 불편함이 없다면 이대로 적응해나갈 수도 있고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납치를 당하고 죽을 뻔했던 순간에 느낀 두려움 자체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공포심은 점차 옅어졌다. 다만 강호는 다소 냉랭한 성격으로 자라났고, 자신의 속내나 사정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게 됐다.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그의 성장 배경이나 환경, 집안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장하며 납치 경험으로 인한 갖가지 트라우마는 점차 흐릿해졌으나 다소 냉소적인 태도와 촉각 방어만은 여전했다.

“물론 촉각 방어 역시 의지만 있다면 차차 극복해가는 것도 가능은 합니다.”

굳이 그런 노력을 해야 할까 싶었다. 역시, 그마저 적응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대학 2학년 겨울, 12월의 어느 날. 강호는 방학 중 포럼 참가에 대비해 준비한 자료를 잔뜩 들고, 건물 사이 구름다리를 지나던 길에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교복을 입고 안경을 쓴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당시 학교에는 원서 접수나 시험, 면접 등을 위해 방문한 수험생들이 종종 보이던 때였다. 자신이 그 옆을 지나는데 저 멀리 타악, 소리와 함께 배트에 맞은 공이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것도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은 여자아이의 정면을 향해 날아온 게 아니었더라면. 하필이면 자신이 바로 그 옆에 있던 게 아니었더라면. 굳이 다른 이의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도와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날아드는 공. 어어, 하고 이쪽을 바라보며 놀라는 사람들. 강호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자료를 던지고 순식간에 그 여자애의 팔을 잡아끌었다. 반동으로 제 품에 풀썩 안긴 여자애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그런데 그 애는 대뜸 그의 안위부터 살피고 나섰다.

“혹시 다치신 건 아니죠? 한번 움직여보세요. 네?”

그의 팔과 허리를 붙들고 거침없이 살피는 통에 강호는 흠칫 놀랐다. 습관적으로 손을 쳐냈지만, 불쾌한 느낌이 든 건 아니었다. 드문 일이다. 돌아선 강호가 바닥에 내던졌던 책과 자료를 모으는데, 여자애는 그에게 고마웠는지 끝까지 도왔다. 그러더니 잠깐만요, 하고 그에게 달려왔다. 손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이것도 떨어뜨리셨어요.”

당연히 제 것은 아니다. 겨울에 머플러를 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모를 정도인데. 목이 조금이라도 올라오는 옷조차 입을 수 없는데. 하물며 머플러라니. 이건 내 것이 아니라고 하려는데 여자애는 조금만 자세를 낮춰보라며 살짝 짜증도 냈다. 제 앞에서 기도 안 죽고 당당히 요구하는 그 기세에 말문이 막혔다. 보통은 그를 좀 무서워하던데.

“됐다.”

심지어 자세를 낮춰주지 않는 제 목에 올가미를 걸듯 머플러를 휙 감기까지 했다. 처음이다. 그 일을 겪은 후로 누군가의 손길이 견딜 만해진 것은. 너무도 환히 웃는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화한 기운이 목을 관통한 것처럼 시원해졌다. 싱그러운 숨결이 제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마치 꽉 조인 봉지 매듭을 풀어준 듯. 소란의 미소는, 내내 열여섯 살의 폐창고에 갇혀 있던 강호를 꺼내주는 손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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