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주 뜨겁게 연애했거든.2020.11.28.
“마주칠 때마다 나는.”
“…….”
“넌 줄 알고 있었다고.”
그의 목소린 평온했지만, 소란은 긴장이 훅 치솟았다.
“네가 교복 입고 구름다리에 서 있던 날을 말하는 거라면.”
10여 년 전.
“나도 기억해.”
그는 두 사람의 처음을 알고 있었다. ◇ ◆ ◇ 소란이 처음 강호를 보았던 건 고3 때였다. 12월. 논술고사를 보기 위해 찾았던 대학교 교정에서 그를 보았다.
“붙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소란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 난간에 서서 교정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회색빛 구름이 자아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생동감이 넘쳤다.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대. 거기서도 법대를 목표로 공부해왔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전부 가족 덕분이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며 소란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없는 종교도 만들어 빌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였다.
“어어!”
“악, 공!”
“머리 맞는다!”
구름다리 아래, 그리고 저 뒤쪽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자신을 향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그저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막 뜨려던 참. 그러니까 촌각을 다툴 만큼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꺄아악!”
누군가 팔을 당겼고 회색빛 하늘이 빙글, 돌았다. 단단한 품에 갇혔다는 것은 이후에야 깨달았다. 소란이 있던 자리로 스치듯 지나 날아간 것이 뒤쪽 바닥에 타악 꽂혔다. 야구공이었다. 동시에 위로 날아올랐던 종이 파일이 후드득 떨어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무거운 책들은 이미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이의 품에 안긴 소란은 심장이 쿵 떨어지고 숨이 가빠졌다. 자신의 팔을 휙 잡아당긴 사람이 아니었다면, 빠르게 날아온 저 단단하고 작은 야구공에 정통으로 맞았을 터다.
오래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물론 그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사고였고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온몸으로 구한다는 건, 소란에게 있어 무겁고 아픈 상처였다. 절 구해준 이가 힘을 풀고 절 놓아주자, 소란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의 팔을 붙들고 다리부터 살폈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소란의 적극적인 살핌에 움찔한 듯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혹시 다치신 건 아니죠? 한번 움직여보세요. 네?”
그러자 그가 소란의 팔을 툭 쳐냈다. 제게 손대지 말라는 듯 까칠한 태도였다. 진짜 절 구해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차갑기만 했다. 흠칫 당황한 소란이 고개를 들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남자의 얼굴이었다. 헉, 숨이 막혔다. 지금까진 오빠인 성준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누구든 분위기로 먹어치울 것처럼 압도적인 남자가 있다는 걸 태어나 처음 깨달았다. 귀티가 흐르는 하얀 피부에 강렬한 태양 같은 눈빛. 마치 흰 눈밭에 쏟아지는 겨울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잘생겼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토록 깊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니. 그리고 그런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맞출 일이 있다니. 비현실의 세계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사람은 내 쪽 같은데.”
도움을 받은 상황에 오히려 구해준 이부터 걱정하고 있으니 입장이 반대로 되긴 했다.
“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고.”
“아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소란이 꾸벅 인사했다.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다는 듯 남자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종이와 책을 줍기 시작했다. 그는 재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고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등, 탄탄한 팔뚝이 마치 거대한 맹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이다.”
“안 맞았네.”
놀라 모여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 날렵한 동작으로 자신을 공으로부터 구해준 남자는 더는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묵묵히 책만 주웠다. 소란은 얼른 몸을 숙여 그의 책과 파일을 모았다. 다치지 않도록 구해줬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여기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까지 다 모아 온 소란이 그에게 내밀었다.
“올려.”
그는 자신이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책과 파일 위에다 올리라며, 아래를 턱짓했다. 그 오만한 분위기와 말투까지도 심장을 폭주하게 했다.
“네.”
소란은 손에 든 것들을 얼른 그의 책 위에 놓아두었다. 짐이 제법 되는데도 그는 가볍게 들고 있었다. 별 인사 없이 남자는 휙 스쳐 갔다. 제 갈 길 다시 가는 그를 향해 소란이 서둘러 외쳤다.
“잠깐만요!”
바닥에 떨어진 회색 머플러를 얼른 주워 들고 그에게 달려갔다.
“이것도 떨어뜨리셨어요.”
소란은 탁탁 털어낸 머플러를 길게 펼쳤다. 코트 안에 라운드넥 티셔츠 차림인 그의 목이 무척이나 휑해 보였다. 머플러까지 떨어뜨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건…….”
“아, 조금만요.”
남자가 뭐라 말하려는데 소란은 머플러를 쥔 팔을 쭉 뻗는 데에만 열중했다.
“조금만, 좀 낮춰보세요.”
그가 책을 잔뜩 들고 있으니 대충이라도 목에 걸쳐줄 생각인데, 키가 워낙 큰 남자라 어림없었다. 까치발을 들며 종종거리듯 팔을 쭉쭉 뻗자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순순히 무릎을 굽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양손으로 길게 잡은 머플러를 휙 그의 머리로 던지듯 걸었다. 마치 맹수를 포획하는 것처럼.
“됐다.”
소란이 한 발짝 더 다가서 머플러 한쪽 끝을 다른 어깨로 돌려 목을 감싸주는 동안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짐을 드느라 당연히 머플러를 받아 들 손이 없었다. 바람은 불고 목은 추워 보이고, 머플러를 그저 짐 위에 툭 올려놓을 정도로 소란은 매정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그저 당연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한 상황에 감사해서라도.
“이제 끝.”
소란은 환히 웃었고,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까지 잠잠하고 묵묵했던 눈빛이 세찬 파도에 휘말린 듯 일렁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란은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책을 주워주고 머플러를 목에 감아준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 듯 안심되었다. 소란을 바라보던 그가 돌아섰다. 찬바람이 쌩 날리며 그는 저만치 멀어졌다. 고마운 사람인데 좀 차갑네. 자신을 확 끌어안았던 것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와, 방금 백강호 아니었어?”
“저 교복 입은 애 구해준 거지? 살다 살다 백강호가 누굴 도와주는 걸 다 보네.”
“그 정도면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옆에 지나가다가 반사적으로 움직인 거 아니야? 본능 같은 거.”
“하긴, 진짜 빨랐잖아. 완전 초스피드.”
저만치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 남자 이름이 백강호구나. 이 학교 학생인가 보다. 여기 입학하면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백강호는 다가설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백강호를 알았고, 누구나 백강호를 얘기했다.
‘헐, 거의 연예인이네.’
유명인은 자신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소란에겐 그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일 뿐. 전공도 다르니 쉽게 만나거나 다가갈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뭐.’
이성으로서의 호기심보다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수려한 사람을 향한 관심 정도였다. 아주 잠깐의 인연이었다. 더구나 교복을 입고 안경을 썼던 그때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 ◆ ◇ 그런데 알고 있었어? 백강호도? 나를? 소란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요?”
“그래. 백진상과 만나기 전부터.”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심장이 미칠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냥 놀란 것뿐일까. 당황한 건지도 모른다. 인생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일어선 그는 테이블을 돌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란에게로 왔다.
“그래서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못 했어. 지금까지.”
절 일으키는 손길에 소란은 홀린 듯 소파에서 일어섰다. 확인하고 싶은 것? 그는 책상에 걸터앉듯 하체를 대고 몸을 낮췄다. 그가 팔을 당기자 흡, 숨을 삼킨 그녀가 바짝 다가들었다.
“단추, 만져봐.”
“네?”
갑자기 단추를 왜 만지래? 그의 뜻을 알 수가 없어 정신이 혼미했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 아래, 만져보라 말하는 입술이 얼마나 선정적인지 이 사람은 알고나 있는지.
“손.”
그가 말없이 소란의 손목을 잡아 조금 더 당겼다. 갈수록 태산이다. 바싹 다가든 지금, 이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내 단추, 만져보라고.”
소란의 시야에 그의 셔츠 목깃이 바로 박혔다. 단추가 두 개 풀어져 있다. 그 사이로 드러난 살결이 얼마나 매끄럽고 탄탄한지, 길고 굵은 목이 얼마나 섹시한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단추쯤이야 못 만질 일도 없다. 소란이 이내 섬세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셔츠 첫 번째 단추를 쓸듯이 만졌다. 강호가 가볍게 인상을 썼다. 살짝 구긴 눈썹마저 섹시해 소란은 목이 바짝 탔다.
“됐나요?”
“단추 잠가봐.”
단추는 왜 잠그라는 건지 의아하기만 했다. 색정적으로 달아오른 분위기만 봐서는, 잠그는 게 아니라 풀라고 하는 것 같기만 했다.
“한 개만요, 아니면 두 개 다?”
“한 개만. 하고 괜찮으면 하나 더.”
이게 이렇게나 진지하게 의논할 일인가. 소란은 다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째서 손끝이 떨리는 걸까. 오래전, 떨어진 머플러를 다시 그의 목에 감아주었을 때처럼. ◇ ◆ ◇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태석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다 말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꾼 건 아닌가 헷갈렸다. 결혼이라니?
“하…….”
강호와 소란을 아는 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도대체 언제 사귀고, 언제 결혼까지 하기로 했단 말인가. 강호가 개인적인 일로 법률 자문과 계약 진행을 의뢰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소란은 없는 시간까지 쪼개어 또 특별근무를 하겠다고 자원했고, 그게 강호가 의뢰한 업무였을 뿐이다.
“강호 일은 어때? 안 힘들어? 그 자식 좀 차가운 데가 있어서 걱정인데.”
“저야 그냥 맡은 일 하는 거죠.”
“그래도 명색이 동문인데 말이라도 좀 다정하게 해주는 거 없어?”
“에이, 대표님은 제가 같은 대학 출신인 것도 모르실걸요?”
그래도 상관없다며 소란은 싱긋 웃었다. 어차피 특근을 자처한 건 수당 때문이라 했다. 그렇게 심플한 두 사람 관계에 언제 사랑이 싹텄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전개다.
“결혼이라……. 후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밀려 나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자세히 물어봐야 후련해질 것 같아 태석은 차에서 내려 도로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로펌 ‘법무법인 현송’은 건물 5, 6층을 사용하고 있다. 태석은 소란의 방이 있는 6층에 도착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하자 안에서 소란의 목소리가 돌아왔고, 태석은 문을 열었다.
“우 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목격한 장면에 태석의 입술이 벌어졌다. 바깥쪽에서 근무 중인 사무직원들이 볼까 봐 태석은 서둘러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테이블에 기댄 강호와 그 앞에 선 소란은 제법 밀착해 있었다. 곧 키스라도 할 것처럼.
“아, 선배님.”
제가 들어오라고 해놓고도 당황했는지 소란의 얼굴이 새하얘져 있다. 태석은 안에서 들린 그녀의 말투와 억양이 평소와 똑같아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소란은 그저 노크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후회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태석의 심장이 덜컹했다. 마치 불청객이 된 느낌이다. 타이밍이 뭐 이렇게 거지 같냐. 슬퍼지게.
“너희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내가 진짜 너무…… 이해가 안 돼서…….”
“비밀이었어.”
강호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소란이 물러서려 했지만, 강호가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의 허리를 붙든 채 말했다.
“사귄 거 비밀이었잖아. 그렇지?”
태석에게도 그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보였다.
“하하, 네. 그렇죠.”
소란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태석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흘려보냈다.
“그렇구나. 비밀이었어……. 비밀이니까 몰랐지. 너도 알고 나도 알면 그게 비밀인가 어디.”
그러면서도 못내 믿지 못하겠어서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우 변이 그럴 새가 전혀 없었을 텐데.”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아주 뜨겁게 연애했거든.”
강호가 깊이 파고드는 의구심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 매서운 칼에 심장이 베이는 기분이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태석은 깨닫지 못하고서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아니.”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남녀 사이에 눈이 맞고 마음이 맞는 데 시간이 대수겠는가. 태석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오케이, 오케이,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럼 나, 간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냈다.
“아, 여기 사무실인 거 안 잊었지? 적당히 좀 하자, 적당히.”
천천히 문이 닫혔다. 달칵. 다시 고요해졌고, 방 안에 남은 두 사람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강호는 소란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하던 거 계속해야지.”
“네?”
“단추, 잠가달라고.”
내리깐 눈빛이 심하게 섹시했다. 단추를 잠그는 게 아니라 다른 요구라도 한 것처럼 상상력을 무궁무진하게 자극하는 얼굴이다. 소란은 숨을 삼키며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