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후진은 없다. (7/112)

#7화. 후진은 없다.2020.11.24.

“남편 뒀다 뭐 해.”

“…….”

“얼마든지 하라고, 이용.”

강호의 음성이 낮고 깊었다. ‘이용’이라니. 사람을 상대로 ‘이용’이라는 표현을 쓰면 어감이 좋진 않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지금 강호가 내뱉는 ‘이용’이라는 말은 왜 이리 달콤하게 들리는 걸까. 소란의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내 귀가 미쳤나…….’

본래 그녀는 이용은커녕 신세 지는 것조차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다. 금전 문제로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아무리 친한 선배이자 로펌의 대표인 마태석이 돈이 차고 넘치는 금수저라 해도. 친구 연희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모자라 천재 엔지니어이자 ‘비욘드 더 테이블’의 공동대표인 홍찬규와 결혼까지 했다 해도. 이들이 힘들 땐 언제든 얘기하라며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줬다 한들 소란은 신세 지길 원치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여기까지 우직하게 달려온 것이다.

“이용이라니요, 꼭 그러겠다는 건 아니라…….”

“괜찮아.”

강호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단단히 잡았다.

“나는 이용당하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괜찮은 걸까. 누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이용하려고 들었다간 뼈까지 산산이 부숴놓을 듯 살벌한 얼굴을 했으면서. 이용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하…….”

소란은 어색함을 떨치려 작게 웃었다. 그러나 의심과는 다르게 마음 깊은 곳으론 온기가 퍼져나갔다. 지금부터 알게 된 ‘이용’의 뜻은 전혀 다르다. 남편의 역할 그 이상으로, 어떤 식으로든 큰 힘이 되어주겠다는 다짐 같은 것. 마음 놓고 기대도 된다는 허락 같은 것. 넓은 품을 내어주겠다는 약속 같은 것. 그 모든 것을 대신하는 어떠한 마음, 같은 것.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면을 바라본 소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열린 문 앞엔 마태석 변호사가 서 있었다.

“앗, 선배님.”

작고 젊은 로펌을 만들어 이끌어가는 대표변호사 태석은 낡아빠진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늘 유쾌하고 활달한 그는 후배와 직원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하기도 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란은 과 선배였던 태석의 제안을 받아 이곳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고, 가장 친한 친구인 연희 또한 먼저 입사해 있었으니 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업무가 많아 힘든 것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뜻으로 하는 일이라 즐거운 날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소란은 항상 자신을 잘 챙겨주고 아껴준 태석에게 마치 비밀을 들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놀란 소란이 강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는데 여의치 않았다.

‘어……?’

힘이 너무 세다. 그는 일부러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강호가 소란의 손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소란은 대롱대롱 매달려가듯 그를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란이란이 우소란이. 외근 갔다 오는 거야? 수고가 많네!”

태석은 소란을 향해 여느 때처럼 밝게 인사했다. 뭔가 다른 낌새를 바로 알아차리진 못한 모양이다.

“강호도 일 보러 왔구나. 조만간 술 한잔하자.”

그러곤 강호에게도 알은체하며 지나쳤다. 그들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전공은 다르지만 대학까지 같기도 했고. 두루두루 사람을 잘 챙기는 태석에게 강호는 무척 아끼는 동생이다. 그런 인연으로 강호도 태석의 로펌에 일을 의뢰했던 것이다. 싱글싱글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태석은 해맑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문이 닫힐 무렵.

“어?”

태석이 급히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의 의아스러운 눈빛이 소란과 강호 두 사람에게 꽂혔다.

“어어……?”

강호와 소란의 얼굴에 닿았던 시선은 점점 내려가,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에 이르러 멈추었다. 태석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도 완전히 사라졌다.

“……뭐 하냐, 둘이 지금?”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태석의 뒤에서 스르륵 문이 닫혔다.

“요즘 의뢰인이랑 변호사 사이에 손잡는 게 새로 생긴 룰인가?”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 설마 지금 트렌드 놓친 거야?”

“선배님, 실은 저희가 결…….”

“형.”

소란의 말을 막으며 강호가 손을 놓고 한 발짝 나섰다. 그는 한쪽에 들고 있던 검은색 쇼핑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마패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태석에게 내밀었다.

“자.”

“이게 뭔데?”

“청첩장.”

“……청첩장은 왜.”

“우리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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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봉투를 열어보지도 못하고서 태석은 그저 멍하니 소란과 강호를 바라보았다.

“우리?”

그러더니 허허, 하하,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하, 나, 이것들이 아닌 밤중에 봉창을 두드리네. 오늘이 만우절인가 보다?”

태석은 봉투를 열었다. 이것들, 하하, 참, 나, 하며 찡긋 웃기까지 한 그는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다.

“어디 보자아, 신랑 백강호오, 신부, 우소란, 하하하, 야, 너희 무슨 청첩장까지 찍어가며 뻥을 이렇게 정성껏 치는…… 거 아니야……?”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태석은 진실을 요구했다.

“뭐야, 진짜야?”

“그래, 보다시피 진짜.”

강호는 다시 소란의 손을 그러쥐었고, 그 옆에 선 소란은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진짭니다.”

가까운 지인들도 믿지 못할 만큼, 충격적인 결혼이었다. ◇ ◆ ◇ 건물 1층의 카페에서 나온 박후길 여사는 대기 중이던 자신의 차량에 올랐다. 기사가 차를 출발시키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호의 앞에서 냉큼 꼬리를 감추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표독스러운 눈빛이 살아났다. 박 여사는 결혼한다고 하던 강호와 소란을 떠올렸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아들 진상이다.

- 엄마.

“응, 아들?”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아직도 얘기 중이야?

“방금 헤어졌어.”

- 그래서? 소란이가 뭐래?

박 여사는 엄마가 나서면 안 될 일이 없다며 큰소리치고 집을 나섰다. 그런 엄마를 믿고 기다렸는지 진상의 목소리에 기대가 가득했다.

- 다시 만나겠대? 내 전화 차단 풀라고 했어? 접근금지 그건? 그런 소리 이제 하지 말라고 했지?

“어, 그게 있잖아.”

박 여사의 가슴속에 열불이 치솟았다. 그러나 아들을 자극해선 안 된다.

“일단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가 하는 얘기.”

평생 아들을 싸고돌았다. 진상은 어릴 때 건강이 안 좋아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전전긍긍하며 아들을 키웠던 박 여사는 그가 성인이 되고 건강해진 후에도 무조건 비위를 맞춰주는 데 급급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누군가 진상을 거슬리게 하면 뒤에서 손찌검을 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뿐일까. 박 여사는 못 할 짓이 없었다. 그릇되고 비뚤어진 모정이다.

“그 애, 결혼한다더라.”

- 뭐? 나랑 결혼하겠대?

진상은 홀로 행복회로를 돌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가뜩이나 충격적인 소식인데, 그 상대가 육촌인 백강호라는 걸 알면 진상은 아마 뒤로 넘어갈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진상이 타격을 덜 받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제게 이런 큰 짐을 지우는 소란이 더 얄미워졌다. 혹시 저 엿 먹으라고 강호와 결혼하는 걸까, 싶을 만큼.

“엄마가 하는 말,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 뭔데?

“아니다. 엄마 집에 들어갈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가서 얘기할게.”

더 이상 아프다고 쓰러질 일도 없는 아들인데. 그런데도 박 여사는 행여 아들이 충격이라도 받을까 봐 여전히 조심했다. 이제 서른이나 된 아들을 마치 세 살 대하듯 했다. ◇ ◆ ◇ 소란의 사무실.

“여기까지 와주시고, 감사해요.”

그녀는 강호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괜히 청첩장 때문에 시간 빼앗아 죄송하고요. 그냥 퀵으로 받아도 되는데.”

전에도 강호가 이 사무실에 들어온 적은 있지만, 그때는 의뢰인으로서였다. 사실 강호가 로펌에 의뢰했을 때 일을 맡기로 했던 변호사는 소란이 아니다. 원래 강호의 일을 진행하기로 했던 다른 변호사가 장기출장으로 인해 투입이 어려워지면서, 소란이 자원해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게 고작 한 달 전.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정말.

“방음은 잘되는 건가, 여기.”

“네, 그럼요.”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만 조금 낮추면 어떤 말씀이든 하셔도 돼요.”

“백진상과는 언제 헤어진 거지?”

“작년 연말쯤이요.”

이제 11월에 접어들었으니 거의 1년이 되어간다.

“그래?”

강호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소란이야말로 전부터 강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런데…….”

“한 달 전만 해도, 두 사람 만나던 중 아니었나.”

질문은 그가 또 빨랐다. 한 달 전이라면, 백진상이 자신을 쫓아다니던 행태가 극에 달했던 시점이다. 누굴 만나든, 어딜 가든, 그가 나타나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아뇨. 헤어진 후 몇 달은 연락이 없다가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나타나더니, 이후로 따라다니는 게 더 심해졌어요.”

“그렇군.”

강호의 입매 끝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작년에 이미 헤어졌다니. 그것도 모르고 강호는 멀리서 소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심란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제 인생에 두어선 안 될 여자라고 외면했다. 제게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올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그럼 한 달 전 ‘산청재’에서 두 사람이 함께 나왔을 때도, 이미 헤어진 후였다는 거지?”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보셨어요?”

“그래, 주차장에서.”

그날을 떠올리던 소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후, 클라이언트와 식사가 있었는데 백진상이 거기 나타난 거예요.”

그가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가 쏟아졌다.

“제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얼마나……. 지금도 생각만 하면, 후우…….”

속이 끓고 열불이 난다. 의뢰인에게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직원과 손님들에게까지 창피해 죽는 줄만 알았다. 젊은 기업가였던 의뢰인은 난감해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소란은 절 붙들고 끝까지 난리를 치는 진상을 피해 겨우 밖으로 나왔다. 진상이 제 코트와 가방을 내주지 않고 인질처럼 잡은 통에 차라리 버리는 셈 치자 했다. 그만큼 떼어내기 힘든 거머리 같았다. 그래도 사귈 땐 이렇지 않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달려 나온 진상이 트렌치코트를 제 어깨에 걸쳐줄 적엔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모른다. 얘가 제정신인가 했다. 상대의 뜻에 상관없이 애타게 갈구하는 사랑은 폭력이다. 소란은 극도로 괴로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만 좀 해. 나 이제 만나는 남자 있어.”

“네가 만나는 남자가 어디 있어? 너도 나한테 미련 있으니까 내가 다시 매달려주길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던 거잖아. 다 안다니까.”

  진상은 제가 소란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사람과 인연을 맺는 데 신중한 소란이 몇 달 만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백진상과 만났던 사이라서…… 대표님 좀 곤란하실 것 같은데.”

“내가 왜.”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강호는 태연히 되물었다.

“육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뭐.”

“저는 대표님이 백진상이랑 친척인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과 제가 이렇게 되면, 집안에도 문제가…….”

“아까 봤다시피, 신경 쓸 필요 없어.”

강호는 진상의 모친, 박 여사의 앞에서 소란에게 전남친이 있든 전남편이 있든 다 상관없다고 했다. 오히려 박 여사가 강호의 앞에서 설설 기었다.

“할아버님께서도 괜찮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누굴 데려와도 상관없다고 하셨어.”

“말씀이 그렇지 막상 아시면 달갑지 않게 여기실 수 있어요.”

“그래서, 무를까?”

강호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무를 의사 같은 건 없다는 듯, 흔들림 없는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어떤 거친 폭풍우가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을 듯 깊고도 단단히 내린 뿌리. 굵은 나무에서 너르게 뻗어나간 가지. 빼곡하게 우거진 크고 푸른 이파리. 거기서 드리워진 그늘은 한없이 든든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 그는 소란의 앞에 우뚝 선, 커다랗고 단단한 나무 같았다. 그런 강호를 마주하자 소란 역시 무르고 싶은 마음은커녕 걱정조차 말끔히 사라졌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후진은 없다. 이 기회가 어떤 기회인데, 머뭇거리다가 놓치나.

“아뇨, 무를 생각 없어요.”

직진만이 답이다.

“그래. 앞으로도 그런 태도 유지해.”

마음에 든다는 듯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 이제 알겠어요.”

순간 소란은 깨달았다.

“백진상 여자친구라서 절 알고 계셨던 거네요. 본 적도 있으셨던 거고.”

그가 절 알았던 건 너무도 당연했다.

“전 또, 어떻게 아셨나 했어요.”

사실 소란은 이번 일로 조금 기대했다. 절 알아보지 못할 게 뻔한데도, 혹시 그가 잠깐의 인연을 기억하는 건 아닐까 해서. 하지만 착각이었다. 결국 친척인 진상과 엮여 있기에 알았던 것뿐. 어쩐지 그는 박 여사와 함께 있던 자신을 보고 당황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대표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은 저 입학 전에 교정에서 대표님과…….”

“처음부터 알아봤어.”

“……네?”

순간. 소란의 심장이 이유 없이 쿵 내려앉았다.

“마주칠 때마다 나는.”

“…….”

“넌 줄 알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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