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너, 애인 있잖아. (2/112)

#2화. 너, 애인 있잖아.2020.11.07.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소란으로선 꽤 용기 내 한 말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굉장히 깊이 생각한 끝에 터트린 말이기도 했다. 일 분을 한 시간처럼 고민했다. 오 분을 반나절처럼 숙고한 결과였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강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꾹 다문 입술은 쓸데없이 매혹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놓기 충분했다. 에라, 차라리 보지 말자. 그때.

“왜?”

마침내 강호의 입이 열렸고 가장 먼저 흘러나온 말은 왜, 였다.

“그러니까, 우 변호사가 왜.”

이 정도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숱한 의구심이 함축된 질문에 소란은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대표님의 결혼 상대 조건에 부합합니다.”

“조건에 부합한다……. 어떤 부분에서?”

느릿하게 곱씹어 되짚는 목소리가 제법 나직했다. 특별히 반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에 더욱 용기가 생긴 소란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 이성적 관심이 없으며, 필요에 의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의사가 있습니다.”

“…….”

“저는 대표님을 귀찮게 할 여자가 아니거든요.”

대답이 없다. 그러나 거절할 거라면 벌써 했겠지. 소란은 좀 더 어필해보기로 했다.

“게다가 제 직업에 따른 이점도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부분에서?”

“본 계약에 있어 법률 자문이 필요하실 때 별도의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으셔도 되니 비용이나 시간 면에서 경제적이실 겁니다.”

“…….”

“말하자면 제가 결혼 상대자이자 변호사, 두 가지 역할을 한 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표님의 편의성을 보장해드릴 수 있다는 말이죠.”

그가 경청하는 듯해 소란은 더욱 밀어붙였다.

“저는 당사자인 만큼 비밀 유지에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 없고요.”

강호가 나린과의 계약 시 가장 신경 썼던 부분도 비밀 유지 조항이었다. 그에겐 투자금 회수가 걸린 문제였다.

“그러니 대표님의 결혼 상대자로, 이만한 인재가 또 있을까요?”

소란은 당당한 태도로 말하며 웃어 보였다. 신뢰감을 주는 미소가 분명하다고 자평했다. 좋아, 그래, 잘하고 있어.

“……한 가지 묻지.”

“네, 말씀하세요.”

소란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은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매섭다. 첨예한 칼끝이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살벌함이 지독하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빙하처럼 거대한 냉기로 둘러싸인 그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

“……네?”

뜻밖의 질문이다.

“계나린과 계약을 진행할 때부터, 우 변호사는 옆에서 이런 마음을 갖고 있던 건가 하고.”

소란은 멈칫했다. 그의 물음대로라면, 자신이 완전 주제도 모르는 또라이처럼 느껴지는데?

“혹시 날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던 건가.”

소란은 자신의 어필이 너무 적극적이었음을 깨닫고 얼른 부정했다.

“아니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다?”

그가 소란의 마음을 꿰뚫듯 물었다. 깊은 속 어딘가를 확인하려는 듯 그 눈빛이 매섭게만 느껴졌다.

“정말 아니에요. 전혀.”

“……전혀?”

그는 꼭 이렇게 되묻는 방식의 화법을 사용해서, 상대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소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두 분 계약은 제게 그냥 단순 업무였고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마음도 없어요. 있을 리가 없죠.”

강호의 얼굴에 일순 실망의 빛이 스쳤다. 너무 찰나인지라 소란이 보지 못했을 뿐.

“물론 대표님이 객관적으로 아주 잘생긴 외모라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꿈틀, 움직였다.

“그렇다고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서요.”

이번엔 눈썹이 불쾌한 듯 살짝 움직였다. 강호는 뭔가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알 리 없는 소란은 부지런히 항변할 뿐이었다.

“다만, 대표님이 아까 말씀하셨듯 상대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겨 계약을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

“대표님은 빠듯한 일정으로 곤란을 겪게 되셨는데, 저에게도 마침 원하는 조건이 있으니.”

“…….”

“괜찮으시다면 제가 계나린 씨를 대신해 그 상대가 되면 어떨까 제안드린 것뿐입니다. 상생을 위해.”

“상생이라.”

계약의 기본은 결국 윈윈이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탐탁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기탄없이 의견 말씀해주시고 지금 당장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

“처음부터 제가 다른 마음을 품었던 건 절대 아니고, 아까 계나린 씨가 하신 제안이 괜찮아 그때부터 생각해본 거라서요.”

소란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져 있다. 몹시도 뜨거운 이 불을 끄기 위해 소란은 나름의 카드를 여러 개 준비하던 차였다. 그런데, 계나린의 말을 들은 순간 눈이 반짝 뜨였다. ‘백강호와의 결혼’이란, 소란이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다 합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방패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더 아쉬운 건 백강호 쪽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장 올해 안에 결혼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소란은 결혼을 ‘해드리겠다’고 선심 쓰듯 제안한 것이다. 설득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는 걸 얻게끔 해주는 거니까. 잘만 하면 주도권은 소란 쪽에서 잡을 수도 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답변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소란은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아무래도 오늘 미팅은 이걸로 끝내야 할 터, 그만 돌아가야겠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계나린도 없는 지금, 단둘뿐인 호텔방은 그리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소란이 서둘러 노트북 가방을 챙기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바로 앞에 강호가 와 있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엄청난 위압감에 소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가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소란이 한 발 더 물러났고 엉덩이에 테이블이 닿았다. 그가 또 한 발짝, 다가들었다. 소란은 숨을 흡 들이마시며 테이블에 기대앉았다. 그렇게 노력하여 거리를 유지했건만 소용없었다. 강호가 또 한 발 다가왔으니, 이제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 가까워지고 말았다.

“……말씀하세요.”

대리석 테이블의 차디찬 감촉이 엉덩이에 닿았다. 도톰한 소재의 바지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했다. 그는 쭉 뻗은 긴 팔을 소란의 엉덩이 양옆으로 내렸다. 테이블을 짚은 손 사이 그녀가 어정쩡하게 걸터앉은 셈이 되었다. 그렇게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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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란은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억지로 가둔 것도 아니고, 금방이라도 밀치고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허술한 팔 사이인데도. 가까이에서 보니 강호의 얼굴은 더욱 압도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장난 아니긴 하네.’

도자기를 빚어놓은 양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세심하게 깎은 콧날은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이다. 대학 때 왜 그리 백강호를 졸졸 쫓는 이들이 많았는지 새삼 실감했다. 하물며 예쁘장하던 그 시절보다 남성적인 매력이 단단히 영근 지금이 훨씬 더 섹시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순간 그의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너, 애인 있잖아.”

그 한마디에 소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녀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놀란 이유는 딱 하나다. 강호가 자신에 대해 알 리 없다고 생각해왔으니까. 제 존재조차 모른다고 여겼다. 오래전 마주쳤던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후 같은 대학을 다니긴 했으나 전공도 다르니, 조용히 살던 자신을 그가 알 리 만무했다. 심지어 그의 친구와 소란의 친구가 지난해 결혼했지만 스치듯 결혼식에서 봤던 게 전부일 정도였다. 그나마도 백강호는 친구 아내의 지인 중에 우소란이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를 게 분명하다. 이 정도면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무방하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그는 소란의 질문을 가볍게 넘기고서 다시 말했다.

“애인이 있는데도, 나와 결혼을 하시겠다?”

그녀의 눈빛과 강호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사실이라면 내 쪽도 조금, 난감한데.”

그에 소란은 궁금증을 뒤로하고 일단 대답부터 했다.

“아니에요.”

바닷물에 처넣어도 부족할 그놈이라면, 진작 헤어졌으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결혼이 절실한 이유도 바로, 그 전남친 때문이다. ◇ ◆ ◇ 오늘 아침 출근길.

“소란아!”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난 전남친의 얼굴을 보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아침 안 먹었지? 여기 샌드위치. 사무실 올라가서 먹어.”

그녀의 전남친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란을 보자마자 달려와 샌드위치와 커피 꾸러미를 건넸다. 마치 다정한 남자친구라도 되는 양.

“아침 안 먹으면 속 버린다니까. 그렇게 말을 해도 절대 안 듣더라, 너는.”

“백진상. 너 다시 나타나면 내가…….”

“우 변, 일찍 출근하네.”

선배 변호사가 지나가며 알은체했고 소란도 서둘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숨이 나온다.

“하아…….”

중소형 로펌이 가득 입주해 있는 건물의 로비. 오가는 대부분이 아는 얼굴들인지라 소란은 쉽게 화를 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진상의 앞에서, 자신만 미친년이 될 게 뻔하다. 욱해서 일터에서 소동을 일으켜봤자 손해는 저만 보겠지. 원체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소란은 괜한 문제를 만들 생각이 없다. 조용하게 해결할 것이다. 때를 보는 중이다.

“바람 차가워지니 또 입술 트는 것 좀 봐. 립밤 안 가지고 왔지? 너한테는 이게 제일 잘 맞더라. 나 아니면 누가 이렇게 널 챙겨주냐? 자.”

진상이 싱긋 웃으며 립밤을 꺼내 보였다. 그의 잘못으로 헤어진 지 어언 열 달.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이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진상은 몇 달이 지나자 슬금슬금 찾아오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도 화난 거 아니지? 에이, 좀 풀어라. 너한테도 나뿐이잖아.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곤 하면서. 그 뻔뻔한 행태가 기막힌 것도 하루 이틀이지, 소란은 질리고 또 질렸다. 그렇다고 진상이 대놓고 위협을 가한 적은 없다. 다만 다시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도 집요하게 찾아들 뿐. 끈덕지게 전화에 문자에 메일까지. 사람의 뇌를 좀먹는 듯한 교묘한 괴롭힘이었다.

“그만해.”

“또, 또 그런다. 자꾸 앙칼지게만 구는 것도 안 좋아.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마음 좀 풀고…….”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낼 거야.”

“뭐?”

소란이 나직하게 건네는 경고에 진상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소란아.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울상을 짓는 그를 뒤로하고 소란은 매정하게 돌아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진상은 항상 자신을 약자로 설정했다. 그래서 그를 내치는 순간마다 소란은 스스로가 모질고 독한 사람이 된 듯 느껴져 굉장히 불쾌했다. 연을 깨끗하게 잘라낼 가위가 필요했다. 소란이 로펌에 올라와 제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로펌 동료인 연희가 따라 들어왔다.

“설마 그 새끼 또 찾아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소란이 코트를 벗으며 묻자, 연희가 씩씩거렸다.

“좀 아까 정 변호사님이 들어오시면서 그러시더라. ‘우 변 남친은 아침부터 찾아와 커피 챙겨주더라, 부럽다.’ 하고. 헤어진 사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도 안 믿는다니까? ‘에이, 남친이 지극정성이던데 뭘.’ 하면서.”

“그렇게 싱글거리면서 서 있으니 사귀는 줄 알겠지.”

“남 얘기처럼 한다. 지겹지도 않아, 그 새끼?”

“왜 안 지겹겠어.”

차라리 진상이 깽판이라도 치면 좋겠다. 경찰 부르게.

“소란아. 너 돈까지 엮여 있어서 더 그런 거면 내가…….”

“아니. 거기까지 하진 말자. 아는 사람이랑 돈으로 얽히는 거 이젠 정말 안 하고 싶어.”

진상과는 복잡한 금전 문제도 남아 있었다.

“마음 써주는 건 너무 고맙지만 너 신경 안 쓰이게 잘 해결할게. 시간이 걸려도 상환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니까.”

소란의 깊은 사정을 다 꿰고 있는 연희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럼 그놈을 무슨 수로 빨리 떼어내. 점점 더 심해지는데. 접근금지 가처분 낸다고 해도 일시적인 방안일 뿐이고, 뭔가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소란이 덤덤하게 입을 뗐다.

“나 결혼이라도 할까 봐.”

이따 점심은 해장국으로 먹을까 봐, 하는 듯한 말투였다.

“뭐?”

“얼마 전엔 남자친구 있다고도 했는데 안 믿더라고. 하지도 않는 연애 핑계 대지 말라더라. 결혼해서 유부녀 되는 거라면 모를까, 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을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성은 없어 보였다. 일은 바쁘고 시간은 없고 돈은 벌어야 하고, 현실을 살아내는 데 온 에너지를 쏟다 보니 전남친을 떼어낼 여력조차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

“진짜? 그래서 너 정말 결혼하겠다고?”

“음, 일단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려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문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기도 전에 결혼부터 할 상대를 찾을 수 있냐는 거다. 어떻게 이 ‘결혼’ 카드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전략이 필요했다. 어떤 상대를 만나야 할지. 어떤 시점에 결혼해야 할지. 백강호와 계나린처럼 ‘그사세’ 끝판왕이라 돈을 바탕으로 계약 결혼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일이 소란의 앞에 커다랗게 닥쳐든 것이다.

“한번 의사라도 물어보는 게 좋지 않아? 이분은 너랑 결혼하는 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이소라 변호사, 생각 있으면 얘랑 결혼 한번…….”

생각지도 못한 떡이 손에 쥐어졌다. 진상에게 시달리고, 연희와 대화를 나눴던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는데. 사랑 없는 결혼.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결혼. 골치 아픈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줄 만큼 산뜻한 형식의 결혼. 그로 인해 마침내 얻게 될 든든한 방패. 소란이 백강호와의 결혼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태를 빠르게 파악했고, 결정에 주저는 없었다. 현실로 돌아온 소란은 자신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강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운명은 누구의 편일까. ◇ ◆ ◇

“우소란.”

강호가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변호사 호칭도 떼고 그냥 이름으로만. 마주한 눈은 지금까지와 다르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깊은 눈빛 속에 가라앉은 수많은 이야기가 일렁거렸다.

“……후회할 텐데.”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다. 모든 의식을 흩뜨리며 심장을 헤집는 것만 같은 느낌. 소란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내가 누군가. 호랑이 굴에 물려 가도 당당히 살아 오고도 남을 우소란이 아닌가.

“글쎄요. 전 후회할 결정, 애초에 하질 않아서요.”

“…….”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죠. 제가 계나린 씨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표님 마음에 드는 상대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마치 선거에 출마라도 한 것처럼 열심이었다. 강호의 눈에 비친 소란은 열정이 넘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 제가 어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지 알기나 할까. 제 앞에 선 남자가 어떤 마음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꿩 대신 닭이라.”

“네, 훌륭한 닭이 되어보겠습니다.”

아니다. 강호에게 소란은 이미 ‘꿩’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훌륭한 슈퍼 꿩인 것이다. 훨씬 좋은 상대가, 바로 우소란이라는 말이다.

“병아리든 닭이든 꿩이든, 상관없어.”

생각지도 못하던 그녀와 결혼을 앞두게 된 현실이, 강호는 전혀 믿기지 않을 뿐. 이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깨지 않았으면 하는 꿈.

“좋아.”

그가 마침내 몸을 떨어뜨리며 시원하게 말했다.

“결혼하자.”

생각보다 훨씬 빠른 허락에 소란의 눈이 커졌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처음으로 강호는 할아버지의 억지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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