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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1/112)

#1화.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2020.11.03.

체이스호텔 스위트룸. 문 앞에 선 소란은 크게 심호흡했다. 지난 한 달간 수차례 들렀던 곳인데도 매번 긴장됐다. 저 안을 가득 채운 백강호의 위압감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래도 오늘이면 끝이네.”

딩동. 문 옆의 벨을 지그시 눌렀다. 5시 십 분 전. 숨을 고르며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다. 딩동. 잠시 후 한 번 더 딩동. 또 딩동. 벨을 재차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아직 안 왔구나. 먼저 들어가 있어야겠다.”

소란은 호텔에 들어서면서 프런트에 들러 신분증을 제시하고 키를 받았다. 이 룸에 미리 등록된 방문객으로서 늘 거치는 절차였다.

“……어디 있지?”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층을 인식할 때 사용한 후 노트북 가방에 넣어둔 키가 막상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앞주머니에 끼워둘걸.”

결국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쪼그리고 앉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덜컹.

“아앗!”

갑자기 열린 문에 부딪힌 소란이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가 앉았다. 심장도 같이 곤두박질쳤다. 열린 문 사이로 보드라운 슬리퍼를 신은 깨끗한 발목이 보였다. 길게 뻗은 탄탄한 맨다리를 타고 올라간 시선은 새하얀 가운 끝에 닿았다.

“……!”

소란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바닥에 엉거주춤 앉은 채라 더욱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거대한 태산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순결한 백색이 주는 이미지와 다르게 하얀 가운은 심히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안은 온통 맨살이란 걸 짐작할 수 있기에. 여민 끈 위로 벌어진 앞섶엔 채 닦지 않은 투명한 물기. 단단하게 짜인 가슴 근육 사이 아찔한 골. 넓고 각이 진 어깨. 소란의 눈에 차례차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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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물이 아니네.”

그리고 싸늘하게 내뱉는 입술까지도. 수려하고도 완벽한 얼굴 속에 그 입술은 너무도 매정해 보였다.

“우 변호사가 무슨 일이지? 너무 이른데.”

소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묵직하게 절 바라보는 그에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는 샤워 중에 벨이 울리자 가운만 걸치고 나온 모양이다. 호텔 직원이 세탁물을 가져온 줄 알고서.

“미팅 시간이 다 되어서요. 지금 오후 5시입니다.”

소란이 스위트룸을 찾은 이유는 백강호와의 계약 관련 미팅 때문이다. 백강호는 소란의 의뢰인인 동시에 그녀와 같은 대학을 나온 선배다. 그는 소란이 동문인지조차 몰랐던 듯하나, 소란은 백강호의 존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워낙 유명했던 사람이다. 한 다리만 건너도 인연이 얽힌 사람이기도 했고. 심지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물론 그는 10여 년 전 스치듯 만났던 일을 기억도 못 하겠지만. 덕분에 백강호와 내적 친밀감이 있는 소란은 이 일을 맡게 됐을 때부터 편하게 말을 놓으시라 권했다. 그래봐야 업무상 만남이 전부인지라 서로 간 호칭은 ‘대표님’과 ‘우 변호사’였다.

“미팅은 7시로 알고 있는데.”

“네?”

소란은 의아해했다.

“아닙니다, 대표님. 오후 5시라고 비서분께서 메시지로 안내해주셨어요.”

“내 비서가 일을 잘못한 건가, 아니면 우 변호사가 착각한 건가.”

느릿하게 묻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엔 후자 같은데.”

“그럴 리가요.”

소란은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그의 비서로부터 도착했던 메시지를 열어 보였다.

“이거 보세요. 분명히 오늘 17시라고……. 어?”

강호의 앞에 내밀었다가 다시 액정을 보며 확인하던 소란이 멈칫했다. 헉.

[우소란 변호사님. 김상현 실장입니다. 오늘 미팅은 체이스호텔 2301호에서 7시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대표님은 출장 후 호텔로 바로 도착하실 예정이니 시간에 맞춰 준비 부탁드립니다.]

7시! 17시가 아니다. 비서의 잘못이 아니라, 소란의 착각이었다. 미팅은 잠시 후 저녁 7시였다.

“아……. 착각이 맞네요.”

항상 17시, 18시, 이렇게 안내해주다가 왜 오늘은 7시야. 19시라고 하지 않고. 그러나 비서를 탓할 순 없다. 회의 중에 도착한 메시지를 급하게 확인하느라 착각한 제 잘못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그 바람에 백강호의 지극히 사적인 모습까지 봐버렸다.

“죄송합니다.”

가운 하나만 걸친 모습이 심하게 섹시해서 소란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럼 7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호텔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그렇고, 사무실에 다녀오긴 더더욱 애매하고. 갑자기 붕 뜬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싶었는데.

“들어와.”

백강호가 몸을 비켜 길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와서 기다려도 돼.”

그가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다정한 친절은 아니었다. 들어오는 게 좋을 거라 경고하듯 깊고 싸한 눈빛이 그러했다. 정말 들어가도 될까. 둘만 있다가 숨이 막혀 죽는 건 아닐까.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은 둘째치고, 백강호는 그냥 서 있는 자태에서도 섹시함이 줄줄 흐를 만큼 너무나도 강력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다. 소란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안에서 업무를 보며 대기하는 게 나을 듯했다. 번화가 카페나 식당까지 오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몸과 문 사이로 지나가면서 소란은 잔뜩 긴장했다. 문을 열고 삐딱하게 서 있는 그에게선 보디워시 향이 짙게 풍겼다. 미처 닦지 않은 물기마저 소란의 시야에 박히며 점점 더 숨이 가빠졌다. 간신히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거실로 쓰이는 공간의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소란은 노트북을 펼쳤다. 오늘 이곳에선 극비리에 계약이 진행된다.

“계약서는.”

“말씀하신 대로 출력하지 않고 보안문서로만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 진짜 세탁물이 도착했다.

“잠시만.”

강호는 짧게 양해를 구한 뒤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단추를 두 개 푼 검은 셔츠 차림은 강호 특유의 강렬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한층 올려줬다.

“계약서.”

“네, 여기 파일 열어두었습니다.”

잠시 후 상대인 계나린 팀장이 도착하면, 그들은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최종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에 우소란은 전담변호사이자 유일한 증인, 계약서 작성 및 검수자, 법률대리인 등의 자격으로 동석한 것이다.

“대표님, 이 부분에 대해 추가로 확인해주셔야겠는데요. 특유재산과 공유재산의 구분이 더 상세하게 필요합니다.”

“더 상세히?”

“네, 부부별산제에 의거해 두 분께서 기존에 소유하고 계신 고유재산 외에 혼인 중에 취득하신 특유재산을 어디까지 인정하실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단순 조항만 들어가 있어서요.”

“혼인 중에 취득한 특유재산이라.”

“네, 계 팀장님 도착하시면 현재 재산목록부터 한 번 더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그들이 오늘 최종 합의에 이르게 될 이 계약은, 백강호 대표와 계나린 팀장의 결혼 계약이다. ◇ ◆ ◇ 잠시 후 계나린 팀장이 도착했다. 강호의 결혼 상대자인 계나린은 그의 회사 직원인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친구 사이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 지인이기도 했다. 그런 나린이 오자마자 대형 폭탄을 던졌다.

“나 임신했어.”

강호의 미간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뭘 했다고?”

“임신.”

“하.”

아무리 사랑 없는 결혼이라지만, 예비 신부의 임신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강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장난이 지나치단 생각 안 해?”

“아니야, 장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린은 딸깍, 클러치를 열었다. 흑백 초음파 사진을 한 장 꺼내서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어쩔 수 없었어, 나도.”

강호는 싸늘한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먹구름처럼 온통 시커먼 사진. 나린은 그 안에서 용케도 작은 하얀 점을 찾아내 손가락으로 짚었다.

“보이지, 이 점?”

“안 보여.”

“이게 바로 아기래. 지금 내 배 속에 소중한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젠장.”

강호가 탁 일어섰다. 그는 거친 한숨을 내뱉으며 창가 쪽으로 갔다. 타이 없이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낸 셔츠 네크라인 안쪽으로 단단한 목울대가 움직였다. 강호는 검은색 셔츠 소매를 거칠게 접어 올렸다. 힘줄이 드러난 팔뚝은 지나치게 성이 나 있었다. 투명한 창 너머 강변을 따라 자동차 불빛들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헐, ……임신이라니.’

테이블 앞에 앉은 소란은 놀라서 이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입이 떡 벌어지는 전개다. 하지만 그들은 변호사 우소란의 존재를 이미 잊어버렸다. 정적이 내려앉았고, 이내 강호가 돌아보았다.

“좋아. 낳아.”

그러자 오히려 나린이 기가 차단 듯 대꾸했다.

“낳으면?”

“키워는 줄게.”

“미쳤니? 이 애는 내 애야.”

강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네 애야.”

“너랑은 상관없다고. 다른 남자 애를 왜 네가 키워?”

“곧 결혼하니까. 너와 내가 그 아이를 함께 키워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

소란은 막장으로 치닫는 광경을 숨죽여 바라봤다. 일단 계나린이 백강호의 아이를 가진 게 아니란 건 잘 알겠다. 하긴, 둘이 짱친이라 서로 손 닿는 것도 극혐하니까.

‘그런데 다른 남자 애라니? 남자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어서 계약하겠다고 한 거 아니었나…….’

강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이성적인 어투로 말했다.

“차라리 잘됐어. 아기까지 있다고 하면 이 결혼에 괜한 의심을 살 일도 없을 테고.”

“야, 이 새끼야!”

나린이 강호 앞에서 소리를 꽥 질렀다. 차라리 잘됐다니. 살다 살다 이런 미친놈은 처음 본다는 얼굴이다. 이 모습을 ‘쌩눈’으로 지켜보는 소란은 그저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꼬옥 맞잡을 뿐이다. 스펙터클한 이 드라마가 어디로 흘러갈지, 결말은 어찌 될지 종잡을 수가 없어 지켜보는 그녀의 등에 땀이 다 맺혔다.

“태교에 안 좋아. 소리 낮춰.”

그는 이미 제 페이스를 찾았다. 음산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혹시 계약서에 추가할 조항 있으면 지금 전부 말해.”

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려 소란을 보며 물었다.

“우 변호사, 고려해야 할 부분 있나?”

강호는 나린과 서로 주고받던 폭탄을 소란에게 넘겼다. 소란은 재깍재깍 타이머가 달린 폭탄을 껴안은 것처럼 급히 초조해졌다. 그러나 최대한 사무적인 얼굴로 중무장하며 답했다.

“네, 이 경우 자녀의 양육에 관한 권리와 의무가 발생함에 따라 양측에서 새롭게 협의할 부분이…….”

“협의는 뭔 협의! 너랑 안 키운다니까?”

강호는 아예 나린을 등지고선 소란만 바라보았다.

“우 변호사도 지금 봐서 알겠지만, 내 계약 상대의 신상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별것 아니란 듯이 말하는 모습은 그의 멘탈이 얼마나 센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아까 얘기한 특유재산 외에 자녀 문제도 추가해서 수정을…….”

“수정이고 개뿔이고 난 못 한다고.”

결국 강호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나린을 돌아보았다.

“경솔하게 굴지 말고 잘 생각해.”

“머리 부서지게 생각했고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어. 그런데 어떡하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의 아이야.”

“그 남자도 알아? 아니지, 그런 사이였다면 애당초 네가 이 계약을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지.”

정곡을 찔린 나린은 꼭 파헤쳐야겠냐는 듯 분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래, 내 짝사랑이다. 전부 네가 계약을 제안하기 전의 일이고. 그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 전혀 모르고 있어, 됐어?”

소란은 내심 놀랐다. 계나린의 이미지로는 짝사랑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을 상인데. 어떻게 된 걸까. 설마 나쁜 남자에게 단단히 홀리기라도 한 건가. 강호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짝사랑인데 임신? 헛똑똑이가 양아치한테 낚인 꼴이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매달릴 셈인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복잡한 상황과 다르게 나린의 반응은 심플했다. 오로지 이 계약을 엎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다음 일은, 그녀의 말대로 스스로 알아서 할 생각일 테고.

“너한테 이런 계약을 안심하고 제안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거 알아. 나도 집에서 결혼 압박 점점 심하게 받는 상황에 좋은 도피처였다는 거 인정해.”

“그 남자와의 관계가 절망스럽다는 사실도 한몫했겠지. 넌 홧김에 내 제안을 수락했을 거고. 짝사랑 따위, 계나린 성미에 맞지 않을 테니까.”

“맞아. 부정할 생각 없어. 그런데 이제 내 인생 완전히 달라졌고 난 이 사태를 제대로 수습할 거야.”

나린은 느끼는 바가 많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계약은 없던 일로 하자. 어차피 너랑 나, 여기 있는 변호사까지 우리 셋만 아는 일이잖아. 그냥 깔끔하게 끝내자.”

“무책임하네. 그럼 나는?”

“다른 여자 알아봐. 어차피 할아버지는 상대가 누군지 중요한 게 아니시잖아.”

나린은 언뜻 깨달음이 찾아온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나린의 시선이 대뜸 소란에게 꽂혔다. 사실 한 달간 수차례에 걸친 미팅 내내 나린은 소란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장승 내지는 거실의 화분 정도로 취급했다. 있어야 할 장소에 그저 묵묵히 서 있는 존재로. 나린은 강호에게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소란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미혼이에요? 남친은 있어요?”

“……네?”

“오소리 변호사라고 했나.”

“우소란입니다.”

“애는 없죠? 아, 있어도 상관없겠다. 어차피 얘가 키워줄 거라서.”

“너 뭐 하는 거야.”

강호의 깊게 팬 미간을 바라보며 나린이 방긋 웃었다.

“대타 구해놓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책임감 없다고 또 엄청 깔 거 아니야?”

백강호의 평소 스타일대로라면, 어떻게든 끝까지 계약을 밀어붙이고도 남을 놈이다. 달리 ‘백도저’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에 나린은 초강수를 두는 것이다.

“생각해봐. 너와 내 결혼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이분이잖아.”

“그만해.”

“한번 물어라도 보는 게 좋지 않아? 이분은 너랑 결혼하는 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강호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감쌌다. 나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소란에게 적극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얘 소문만큼 막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에요. 내가 보장할게. 그리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얘가 머리도 좋고 근성도 장난 아니라서 회사도 여기까지 성공시킨 거고요.”

듣다 보니 디스인지 칭찬인지 조금 헷갈렸다.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고생하는 거 옆에서 다 봤는데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성질머리가 내다 버릴 정도로 나쁜 편은 아니에요. 참을 만은 해.”

나린의 엉뚱한 제안이 소란에게로 향했다.

“그러니까 이소라 변호사, 생각 있으면 얘랑 결혼 한번…….”

“시끄러워.”

강호의 커다란 손이 나린의 입을 턱 막아버렸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더 이상 결례를 범하지 못하도록 또 다른 손으로 나린의 어깨를 잡고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 밀려 나가며 나린이 과장된 몸짓으로 버둥거렸다.

“우웁, 웁! 우우!”

아, 임신했지. 강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기다렸다는 듯 나린이 확답을 요구했다.

“그럼 나랑 결혼, 안 하는 거지?”

“안 해. 그러니까 그만 가.”

“계약 체결 전이었으니까 위약에 따른 배상은 당연히……?”

“할 필요 없어.”

“오케이! 이제 뒷일은 서로 알아서 잘해보자? 나도 이제 내 코가 석 자라서.”

제 뜻대로 일을 마무리한 나린은 흡족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럼 회사에서 봐. 안녕!”

탁. 문이 닫혔다. 너른 공간 안에 얕은 숨소리가 퍼졌다. 계약 당일, 상대는 엿을 먹이고 달아났고 강호만 여기 남았다. 아니, 비밀리에 계약서를 작성하던 전담변호사 우소란과 함께 남겨졌다.

“후우…….”

강호는 테이블 앞에 앉아 괴로운 숨을 흘리며 두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약 한 달여에 걸쳐 긴밀하게 논하던 계약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벌써 10월 중순. 연말까지는 두 달 반이 남았을 뿐이다. 그사이 어떻게 다시 적합한 상대를 구해 결혼식까지 올린단 말인가. 그것도 계약부터 식까지 단 두 달 반 안에. 대체, 어떻게.

“대표님? 물 드실래요?”

소란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그의 주변으로 따스하게 가라앉았다. 강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계나린이 던지고 간 폭탄보다도, 그 폭탄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제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생각이 꽉 막혔다. 앞이 캄캄해 보이질 않았다. 하아.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드는데,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우소란 변호사. 여전히 그녀의 존재는 강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왜 매번 타이밍이 이따위일까. 하필이면 우소란 앞에서. 미치겠군, 정말.

“……우 변호사, 그만 가지.”

“대표님.”

두통약이라도 먹고 일찍 자야겠는데, 그녀는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은 채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얘기가 많은 건 안다. 일이 말끔하게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제 이미지만큼이나 단정하고 야무지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다. 10년이 지나도록 사랑스럽고 화사한 소란은, 그대로였다. 그녀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강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까지 진행한 계약서는 파기하도록 하고, 남은 얘기는 내일 다시…….”

“저는 어떠세요?”

순간 강호의 숨이 딱 멎었다. 당황한 나머지 그의 얼굴에선 표정이 일체 사라졌다. 언뜻 냉담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싸늘한 얼굴을 마주하고도 소란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차분하고도 단단한 음색으로,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커다란 존재감을 온 방 가득히 드러내면서.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믿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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