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189)

“후지는 날 아주 많이 도와줬어. 그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고 오빠를 찾지도 못했을 거야.”

시동이 눈빛을 반짝이며 뭔가 떠오른 듯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친절하게 대하는 거야? 하지만 은혜를 갚는 방법은 아주 많아. 나중에 이 오빠에게 보물이나 재물이 생겼을 때 갚으면 그만이야. 그런 일은 나에게 맡기는 게 어때?”

시동은 그런 방법으로라도 후지를 그녀에게서 당장 떼어 내고 싶은 듯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시하가 당황하며 말했다.

“오빠도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진짜 그를 좋아하는 거야?”

“아, 아마도.”

“뭐가 아마도야?”

시동이 시하의 말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주변을 초조하게 맴돌았다.

“넌 그 녀석을 좋아하면 안 돼. 혹시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얘기해줄 수 있어? 그게 어느 정도의 감정이야? 전에 그 뚱보 왕 씨 녀석이랑 비교하면 어때?”

“오빠! 걘 나한테 초콜릿을 선물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건 내가 유치원 다닐 때의 일이잖아.”

“제대로 말해봐. 그 녀석이 초등학교 때에도 너한테 편지를 썼었잖아!”

“그 편지는 오빠가 빼앗아 가는 바람에 난 보지도 못했잖아.”

“당연히 안 되지! 넌 그때 너무 어렸어! 그런 놈한테 넘어가면 어떡할 뻔했어?”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잠시 후 화제를 바꾸었다.

“그 이굉(李宏)은? 후지랑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좋아?”

“이굉이 누군데?”

“중학교 2학년 때, 널 집에 데려다줬던 그 녀석! 농구한다고 했던 그 녀석 말이야.”

“아.”

시하는 그제야 어렴풋이 떠올리다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제야 생각났네! 그때 대체 그 사람에게 뭔 짓을 했길래 고등학교 내내 날 피해 다니게 만들어?”

“그건 그 녀석이 자처한 거야!”

중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여자나 꼬시려고 다니고, 감히 내 동생을 넘보잖아. 그런 녀석은 매운맛을 봐야 한다고.

“그럼 대학교 때 그 학(郝) 선배는? 그랑 비교하면 어때?”

“학 선배는 누구야? 난 모르는 사람인데, 설마 그 대학교 3학년 때 그 학생회장을 말하는 거야?”

시하가 아는 사람 중 학 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그는 확실히 시하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대학교 3학년이 된 후부터 갑자기 볼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어느 외국 쪽 회사에 특별 채용되었다고 했다.

“설마 그 사람을 취직시킨 사람이 오빠였어? 그를 취직시켜서 해외로 보내 버린 거야?”

“그건 그 녀석도 너한테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야.”

고작 그 정도 감정으로 내 동생을 넘볼 수 없지!

“그 뚱보 왕 씨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리고 후지와는 더더욱 비교할 수 없어!”

시하가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뱉어 버렸다.

“너 정말 그 녀석을 좋아하는 거야?”

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찬성 못해.”

“오빠.”

“안 된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 이 세상에 이 오빠 외에 믿을 만한 놈은 없어. 특히 그 후지 녀석은 아래 세계에 있을 때 항상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놈이야. 너 그 녀석한테 속으면 안 돼. 네가 그 녀석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녀석도 널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잖아.”

그러고 보니 후지는 한 번도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시하는 후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선계에 있을 때 후지는 그녀에게 확실히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후 그 둘 사이에는 애매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귄다고 하기에는 아직 제대로 된 표현은 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을 그녀의 오빠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 일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때인 듯했다.

“동생, 오빠가 너를 힘들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감정이 있든 없든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이제라도 마음을 접어!”

시동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더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누구든 괜찮지만 후지는 정말 아니야.”

“왜?”

그가 길게 탄식하더니 그녀에게 힘주어 말했다.

“우린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의 말에 시하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시동이 그녀를 후지와 떼어 놓으려고 하는 말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하는 반나절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혼자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지에게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하지만 그날 밤, 후지가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그것도 창문을 통해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침상 위로 올라와,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 눕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습격은 또 처음이네.

“밖에 방어진을 열 겹이나 쳐 놔서 마존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거야.”

그가 말을 마치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서 잘했다고 칭찬해 달라는 듯했다.

몰래 사랑을 나누는 듯한 이 분위기는 무엇이며, 왜 이렇게 설레는 것일까.

“하하(夏夏), 보고 싶었어.”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귓가에 뜨겁게 닿자, 시하의 온몸이 떨려 왔다.

지금 날 유혹하고 있는 걸까?

후지가 시하를 잠시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아쉬운 듯 계속해서 입을 맞추니, 시하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 두 사람만 있게 됐네.”

그래서 뭘 하려는 건데.

“늦었으니까, 이제 시작해.”

시작하긴 뭘 시작해?

“하하(夏夏).”

그런 표정으로 날 유혹하는 거야?

“드디어.”

안 돼. 우린 아직 너무 일러요!

“너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됐어!”

뭘?

잠시 후, 후지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저리 꺼져요!”

시하가 후지를 밀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하의 마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후지는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는 거야?”

시하는 화가 나다 못해 마음이 아팠다. 나쁜 놈.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예요! 누가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

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후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시하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였다. 깊은 호흡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화가 가라앉았다. 후지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누이지.”

“누가 당신의 누이인데요? 누가 당신 동생이나 한다고 했어요?”

시하가 참았던 화를 폭발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날 똑바로 봐요!”

시하가 후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그를 침상 위에 눕히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후 말했다.

“누이가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네?”

시하가 후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로 그의 윗옷을 찢으며 물었다.

“누이가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할 수 있겠냐고요!”

이어서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며 물었다.

“대답해봐요! 당신한테 전 뭐죠?”

다시 한 번 그 누이 소리나 해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상의가 다 벗겨진 후지가 당황한 표정으로 몸 위에 앉아 있는 시하를 바라봤다. 마치 불에 달궈진 듯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삶아 놓은 새우처럼 온몸이 붉게 변해 갔다. 후지는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하, 하하(夏夏).”

“말해봐요!”

시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제게 어떤 사람인 거죠?”

“나야 당연히 너의 오라버니…….”

그가 말을 마치며 습관적으로 시하를 껴안으려고 했다. 시하는 그 오라버니라는 말에 차가운 물을 맞은 듯했다.

“하하(夏夏).”

시하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구석으로 다가가 후지를 등지고 앉은 채 마음을 달랬다. 후지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나가요!”

“왜 그러는 거야?”

후지가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며 물었다.

“나가요!”

그는 얼이 빠져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얼굴 가득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시하는 그런 그를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두 다리를 감싼 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신경이 쓰였는지 잠시 후, 후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났어?”

그러고는 여전히 왜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하의 마음은 점점 더 차갑게 식어 갔다.

“……아니에요.”

“화났네.”

후지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확신하며 말했다.

“왜 화가 난 거야?”

걱정 가득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시하의 마음속에 깊은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래, 내가 화를 내면 뭐 해? 그래 봤자 실연당한 거밖에 더 있겠어!

“아니에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에요.”

시하는 서둘러 마음의 싹을 잘라 냈다. 후지는 원래부터 수련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자신이 어리석었다.

“하하(夏夏)?”

“밤이 깊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봐요! 저도 이제 쉬고 싶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시하가 깊은숨을 내쉬며 침상 위에 있던 책을 주워 그에게 건네주곤 말했다.

“저는 자기 전에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제가 다섯 살 전의 이야기이니, 오빠가 당신에게 장난친 거예요.”

“…….”

“이건 가져가세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창문으로 들어오지 말고 방문으로 들어와요.”

시하가 침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방문을 열면서 말했다.

“제가 문을 열어줄게요.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잖아요.”

시하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 보니 그가 아직도 침상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전혀 나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 지긋한 눈빛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왜 그러는 거예요?”

그가 책을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눈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실리는가 싶더니,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조금 아파.”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시하는 낮에 시동이 그와 싸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디 다친 거예요?”

시하가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어딜 다친 거예요? 어디가 아픈 거죠?”

“여기.”

그가 갑자기 시하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시하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녀의 손에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몸으로부터 느껴지는 열기로 손이 델 지경이었다. 잠시 후, 시하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장난하지 마요!”

“정말이야!”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만해요!”

시하는 겨우 잠재웠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놀리면 재밌어요? 나랑 결혼할 거 아니면 꼬시지도 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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