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89)

“한옥, 어떡하지?”

봉인은 15분 정도 더 걸려야 해제된다. 그렇다면 현재 시하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제로인 상태였다.

시하의 옷에 들러붙어 있던 한옥은 죽은 연기라도 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고 꽃이고 믿을 사람 하나도 없군.

“어, 당신은 며칠 전에 성으로 들어온 그 샌님이잖아요?”

사람들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시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자세히 살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전에 성문 입구에서 돈을 받던 그 사람이잖아? 큰일이다!

“당신은 성주에게 잡혀가지 않았나요?”

그 사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시하를 아래위로 살피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죠? 설마.”

순간 그의 얼굴에 살기가 서렸다. 시하는 긴장되어 이마에 땀이 맺혔다. 끝장이다. 이제 도망갈 수 없어.

“아이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갑자기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하를 감방으로 안내했던 그 여선이었다.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시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원앙각(鴛鴦閣)은 이 방향이 아니에요.”

그녀가 시하를 끌어당겼다. 시하는 우선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항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잠깐만요.”

방금 그 키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연(紫鳶) 선자(仙子), 며칠 전에 성주께서 이 사람을 하늘 감방에 가두시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3일간 갇혀 있었으면 충분하죠. 지금은 성주님께서 이분을 원앙각으로 보내라고 하셔서 그곳으로 가던 길이에요. 곳곳에 진법이 깔려 있어 아무래도 제가 직접 데려다 드려야 할 듯싶어요.”

“원앙각이요?”

남자가 뭔가 크게 깨달은 듯 그제야 의심을 거두고 말했다.

“자연 선자가 고생이 많네요. 그래서 성주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신임하시나 봐요.”

그가 웃자 뒤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선우님은 복이 참 많은 듯하군요.”

그때, 남자가 갑자기 시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뭔가 아첨하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앞으로 당신께 부탁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뭔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방금 도주범을 보는 듯한 눈빛이 아니라, 샌님 N호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보아하니 성주의 그 염문의 역사가 아주 오래된 모양이군.

그때 자연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자, 이제 길을 비키세요. 성주님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성주님을 방해하면 당신들에게 화가 미칠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바로 길을 비켜 주기 시작했다. 자연은 망설이지 않고 시하와 연무장을 나섰다. 그녀는 이리저리 길을 돌고 돌아 더욱 후미진 곳으로 시하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한참을 걸어 어느 한 숲속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심지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시하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잠깐만요!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죠?”

분명 변태 성주가 있는 곳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자연도 걸음을 멈추더니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하 도우님,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성주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지금 도망가는 거예요?”

“당연하죠! 당신은 모를 거예요. 성주는 양기를 약탈하여 음기를 보충하는 공법을 사용하죠. 지금까지 그녀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살해한 남선의 수는 셀 수도 없어요. 계속 그곳에 있다가는 당신도 그렇게 될 거라고요.”

“근데 당신이 왜 저를 구하려고 하는 거죠?”

“하 도우님은 좋은 사람이잖아요. 이런 곳에서 해를 당하게 할 수 없어요.”

“그래요? 우리는 이제 두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제가 좋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하 도우님, 시간이 없어요. 성주에게 발견되면 여길 빠져나갈 수 없어요. 우선 이곳을 나가서 다시 얘기해요.”

“전 가지 않을 거예요.”

“하 도우님!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믿어야 하죠?”

시하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나를 구해 주면, 나가서 또 나를 팔아먹을 텐데.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소심!”

“하 언니는 역시 총명하군요.”

그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서 방울처럼 생긴 법기가 나타났다.

“혼영음(魂鍈音)을 모방하는 이 환상은 오랫동안 수련한 선수들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알아보시네요.”

“알아본 건 아니었어. 다만 이 선계에서 날 하 도우라고 부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거든.”

“그런 거였군요.”

그때 갑자기 주변에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큰일 났어요. 암운성을 봉쇄하라는 호각 소리예요. 하 언니, 어서 가야 해요. 호각이 울리면 바로 문이 닫힐 거예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요.”

“안 돼! 오라버니가 아직 안에 있어.”

“시간이 없어요. 후지 선우님은 수행 계급이 높아서 선력만 해제되면 성주도 그에게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당신, 어떻게 그의 선력이 풀렸다는 걸 알고 있지?”

시하가 놀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는 걱정이 돼서, 며칠 동안 그 안에 있었어요.”

소심이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시하의 팔을 당기며 그녀를 설득했다.

“하 언니, 우선 여길 나가요. 제가 여기 진법을 숨겨 놓은 곳을 알아요. 그걸 타면 바로 이 암운성을 떠날 수 있어요.”

“작은 주인님,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해요. 이 사람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닌 듯해요.”

시하는 한옥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3일이나 버텼다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우선 그 진법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이곳을 나갈 수는 없을 듯했다.

“난 후지가 걱정돼서 안 돼. 가려면 혼자 가.”

“하 언니!”

그녀가 뭔가 더 말을 하려는 순간 멀리서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 각종 술법들의 빛이 비치더니 바로 이어서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두 사람의 압력이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지!”

시하가 놀라며 바로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후지가 그 변태 성주와 싸우고 있었으니까!

그때, 소심이 깜짝 놀라며 시하의 앞을 막아섰다.

“돌아가면 안 돼요. 그랬다간 언니도 못 나올 수 있어요.”

“비켜!”

후지는 선력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금선이었지만 후지는 이제 금방 금선에 올라 초기에 머물고 있었고, 그 변태 성주는 이미 후기에 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당연히 후지가 불리했다.

“지금 돌아가면 이곳까지 도망 온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된다고요!”

“그게 어때서? 저 사람은 내 오라버니야!”

잡히는 한이 있어도 그가 혼자 상처를 입도록 둘 순 없어.

“하지만 언니의 수행 능력으로는 그를 도울 수 없어요.”

시하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햇병아리잖아. 확실히 난 가 봤자 그에게 방해만 될 게 뻔해.

“그 전송진이 바로 저기 앞에 있어요.”

소심이 손가락으로 숲속을 가리켰다.

“우선 이곳을 떠난 다음에 나중에 후지를 만나도 늦지 않아요.”

소심은 시하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를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 앞에 작은 전송 진법이 밝은 빛을 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시하를 이끌고 진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시하가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안 돼. 지금은 갈 수 없어.”

후지와 시하는 봉인이 해제된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후지의 몸에 시하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추종부(追蹤符)가 있지만 그 법기로는 백 리 정도밖에 추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이 성을 나가면 후지가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 모호했다.

“나를 이곳까지 데려와 줘서 고마워. 난 오라버니를 기다렸다가 같이 갈 테니까 먼저 가.”

“하 언니.”

소심이 초조한 얼굴로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그 진법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제 전송진이 열려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 가지 않으면 시간이 없어요.”

“오라버니는 올 거야.”

아니면 또다시 부딪쳐 보는 거지 뭐.

“그는 아직 성주와 싸우고 있는데, 아무리 빨라도 저희 앞에 바로 떨어질 수는 없을 거잖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 나타나더니 쿵쾅하며 앞에 떨어졌다. 그가 익숙한 하얀 옷을 입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

후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멍한 시하를 껴안고 전송진 안으로 들어갔다. 소심이 놀라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거대한 위압이 느껴지더니 주변에 밝은 빛이 비치며 또 다른 곳이 나타났다.

“성을 나오기는 했지만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어요.”

그들이 전송진을 나서자 소심이 일러 주었다.

후지는 망설이지 않고 시하를 데리고 검을 부리더니 남쪽을 향해 급히 날아갔다.

세 시진을 날자 공중에 거대한 석산이 나타났다. 석산 위에 크게 ‘남(南)’ 자가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남쪽에 도착하자 그들은 안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괜찮아.”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시하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죠? 그 변태 성주에게 걸린 거예요?”

“아니. 난 그 성주랑 정면충돌한 적 없어.”

“그럼 방금 성안에 있던 그 위압은 뭐죠?”

그 두 기운 중에 분명 후지의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녀의 수행 계급이 나보다 높아 환술(幻術)을 좀 썼지. 성주와 싸운 건 나의 환영일 뿐이야. 봉인이 해제되고 나서 난 바로 도망쳤어.”

도망을 쳤다고? 도망 같은 건 후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전 오라버니가 정면으로 붙을 줄 알았어요!”

환술로 빠져나올 줄은 전혀 몰랐군.

“누이는 내가 싸웠으면 한 거야?”

후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검을 부려 돌아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잠깐만, 뭐 하는 거죠?”

“그녀의 수행 계급이 나보다 높긴 하지만 내가 싸울 능력이 아예 없는 건 아냐.”

후지가 당장이라도 돌아가 그녀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기라도 할 듯 말했다. 시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시하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 후지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수행 계급은 지금 성장 중에 있고, 누구에게나 성장 시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난처한 상대를 만났을 땐 계책을 쓰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술을 쓰길 잘했어요. 정말이에요. 대단해요.”

후지는 그제야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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