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한 여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님께서 부르세요.”
시하는 가는 길에 지형을 익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망갈 요령이었다. 하지만 여선을 따라 이리저리 돌고 돌아 한참을 걸으면서 그곳이 상상외로 아주 넓은 곳이고 곳곳에 전법들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걸음에 한 번씩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력으로 지형을 익히고 그곳에 있는 진법들을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각 정도 걸어가자 길을 안내하던 여선이 갑자기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주위에 있는 건물들에 비해 특별히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선이 시하를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돼지에게 제공될 배춧잎을 쳐다보듯 시하를 바라봤다.
“선우님,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선이 사라지자, 사방에 기이한 적막이 흘렀고 사람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주는 선력을 봉인한 다음 그들을 천뢰(天牢, 하늘 감방)에 가두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삼 일간 그들을 그곳에 가두고 있었다. 그와중에 저를 단독으로 부른 건 대체 무슨 속셈인지 시하는 알 수 없었다. 성주가 그 소굴에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을 가두고 있을까?
시하는 후지가 귀띔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다. 시하는 그제야 그 방 안에 큰 욕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짙은 수증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변에 마치 윤이 나는 얇은 비단천이 휘날리듯 방 안이 흐릿했다. 공기 중에는 희미하게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겼다.
“드디어 왔네요.”
갑자기 등 뒤에서 요괴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뭔가가 시하의 몸에 들러붙는 듯했다. 시하가 놀라며 반사적으로 돌아서서 뒤에 있는 사람을 밀쳐 냈다. 여자가 시하에게 밀려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화는 내지 않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시하를 흘겨봤다.
“아직도 제 마음을 몰라주시네요.”
“성주.”
변태 성주는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욱 시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속옷을 제외하고 반투명한 아주 얇은 천 한 장만 걸치고 있어 그녀의 몸이 훤히 다 드러나 있었다.
나랑은 인연이 아닌 것이 미안할 따름이네.
“며칠간 생각은 해보셨나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더니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시하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이 여기 암운성에 남기만 하면 선도(仙途)의 평탄함을 보장하고, 아무도 당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할게요.”
시하는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잠시 후에 해야 될 일에만 집중했다.
“생각 잘해야 돼요. 이제 갓 비승한 소선(小仙)인데, 소심이라는 골칫거리까지 떠안았잖아요. 저의 암운성이 작긴 하지만 사방에 대륙들이 얼씬도 하지 못해요. 당신이 이 암운성을 나간다고 해도 나의 보호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거예요.”
“소심이 왜 골칫거리라는 거죠?”
“아주 큰 골칫거리죠. 듣자하니 태명파 장문 영수자(靈須子)에게 죄를 짓고 무극전의 보물을 훔쳤다더군요. 동서 대륙 양쪽에 죄를 지은 몸이랍니다. 사람들에게 발견되고도 여기까지 도망 와서 나와 거래를 한 걸 보면 그래도 능력은 있는 모양이더군요.”
와, 나쁜 계집애. 처음부터 우릴 속인 거네. 그래서 그 무극전 사람들이 그렇게 질기게 쫓아왔었구나.
“설마 그 여자를 좋아했던 건 아니죠?”
“내가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을 좋아할 것 같아요?”
“그건 그렇네요. 그 여자의 용모가 어찌 저의 아름다움만 하겠어요?”
“하하하.”
어련하시겠어요.
성주는 몸을 꼬며 다가가 말했다.
“그런 머리 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3일이나 갇혀 있었는데 이제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때요? 이곳에 머물겠다고 하면 바로 수행 계급을 풀고 그 친구도 풀어 줄게요.”
“정말이에요?”
“당연하죠. 이래 보여도 이 성의 성주이니, 말한 건 반드시 지켜 드리죠.”
시하가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당신 말을 믿으면 바보지.
후지는 성주와 수행 계급이 비슷했다. 때문에 성주의 습성을 봤을 때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려고 하면 했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방금 선계에 오른 소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수행 계급을 올리려면 아마 몇 달은 걸릴 걸요? 당신이 나를 따르기만 하면 제가 신급공법(神級功法)으로 바로 당신의 수행 계급을 올려줄게요.”
“신급공법이요?”
지금까지 상, 중, 하품 공법, 그 위에 있는 선품공법(仙品功法)까지는 들어 봤어도 신급공법은 처음 들어 보는데?
“신품공법은 등급이 제일 높은 선품공법보다 더 위에 있어요.”
시하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성주가 설명했다.
“그런 공법도 있어요?”
“당연하죠. 이 공법은 제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공법이죠. 이 공법은 아주 심오한 공법으로 수행 계급을 올려 줘요. 이 공법을 수련하면 천 년 안에 금선은 물론 중선, 상선, 심지어 비승하여 신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신이 된다고요?”
시하가 놀라 소리쳤다. 한옥은 수만 년 동안 선계에서 상선에 오른 사람도 많고, 아래로 떨어진 사람도 많지만 신이 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니 신이 될 수 있는 공법이 있다는 말은 더더욱 들어 보지 못했으리라.
시하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운성은 이미 수만 년 동안 그곳에 존재한 성이었다. 만약 그 공법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성주는 왜 아직도 금선에 머물러 있는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성주가 시하의 생각을 읽은 듯 설명했다.
“의심할 필요 없어요. 나의 수행 계급이 아직 올라가지 못한 건 이 공법에 한 가지 단점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 단점이 뭐죠?”
그녀가 크게 웃더니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시하에게 바짝 다가왔다. 시하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목적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공법의 단점은 바로.”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뱀처럼 시하의 목을 감고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뿜어냈다.
“혼자서는 수련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음, 양, 교, 합이 필요해요.”
그러고는 또다시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시하를 유혹했다.
“그건 쌍수공법(双修功法)이잖아요?”
신이 되는 김에 사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아주 일석이조네. 근데 선계는 솔로들을 차별하는 건가?
“맞아요.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금선에 머무르고 있어요. 심지어 그…….”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중간에 말을 멈추더니 그녀는 시하를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시하의 얼굴을 만졌다.
“내가 아직까지 이 공법을 수련하지 못한 것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성중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쓰레기거든요. 제가 만족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랍니다.”
이제 보니 성주는 자신과 함께 수련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장을 한 시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오히려 성주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야 할 듯싶군요.”
시하는 참다못해 제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는 성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허락하는 건가요?”
잠시 후, 그녀가 경계가 풀린 눈빛으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시하에게 바싹 다가서며 자신의 몸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녀는 시하가 고개만 숙여도 가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시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했다.
“하하, 성주의 은혜를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역시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시하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웃음소리가 더욱 요염해졌다.
“당신과 제가 인연인 듯하니, 오늘 아예 그 쌍수지법을 예습해보는 건 어때요?”
시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
“하, 하하, 좋아요!”
오라버니, 저는 이제 끝났어요.
시하는 성주가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잡아당겼다. 그건 옷이라기보다 그저 얇은 천에 불과했다. 그녀의 옷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백옥같이 흰 피부가 드러났다. 팔에 금색 인기(印記)가 보였다.
“찾았어요. 바로 이거예요.”
귓가에 한옥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하는 갑자기 울분이 솟구쳤다. 일찍 알았으면 바로 벗겼을 거 아냐.
시하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준비했던 부적을 그녀의 팔에 있는 금색 인기 위에 붙였다.
그 순간, 붉은빛이 나타나더니 금색 인기가 사라져 버렸다.
“뭐야? 날 가지고 장난친 거였어?”
방금까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품에 안겨 있던 성주가 차갑게 굳더니 손을 들어 시하의 뺨을 때렸다.
후지는 그들의 선력을 봉인한 그 진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했다. 위치가 계속 바뀌는 건 그렇다 쳐도 진에 묶인 사람조차 자유롭게 진을 조정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봉인진법은 후지처럼 진법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도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후지는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는 위치가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영력을 계속 공급해 줘야 하기 때문에 진안은 분명 사람의 몸에 있을 것이고, 성주의 몸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시하는 그 이상한 영근 속성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온 성주가 분명 자신을 다시 한 번 찾을 것이라 예상했다. 역형단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의 진안을 파괴하는 것이 봉인된 선력을 회복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후지는 모험적인 그 방법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지만 한옥이 설득했다. 한옥은 자신이 선기의 흐름에 민감하여 거리만 가까우면 진안의 위치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선력이 봉인되어 있어 시하의 옷에 꽃무늬처럼 붙어 있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후지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되었고, 시하가 떠나기 전 단약과 전송부(傳送簿)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건 신행부(神行符)인데 법력 없이도 작동할 수 있어. 위험한 순간에 이걸 만지면 원래 있던 곳에서 천 리 밖에 있는 아무 곳에나 이동할 거야. 정확한 방향은 예측할 수 없지만 위급 시에 너를 안전하게 지켜 줄 거야.”
“이건 법력 없이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전송부라는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신기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죄를 저지르고 급하게 도망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저한테 맡겨요. 문제없어요!”
성주가 분노한 얼굴로 공격하려고 하자 시하는 당황한 기색 없이 바로 손에 들고 있던 전송부를 만졌다. 순간 밝은 빛이 시하의 몸을 감쌌고, 그녀는 사람이 아주 많은 곳으로 이동했다.
“누구야!”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수행 연습을 하던 수백 명의 선인들이 순식간에 시하를 둘러쌌다. 순간 수많은 법기들이 시하를 조준했다.
“어디서 나타난 소선인데 감히 암운성 연무장(演武場)까지 들어온 거지?”
젠장, 이건 너무 아무 곳이잖아? 사람을 아예 적의 진영으로 전송하면 어떡하자는 건데? 잡아가기에 편하라고 여기로 보낸 거야 뭐야. 차라리 다시 감방으로 다시 보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