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시하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던 진흙을 닦아 내며 연못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시하가 주저앉아 수면으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착각인가? 몸에 뭔가가 더 생겨난 듯싶은데?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는 말할 수가 없네. 키가 조금 작아지고, 얼굴이 조금 까무잡잡해지고, 가슴이 작아지고, 예전보다 몸에서 빛이 조금 나는 것만 빼면 별로 달라진 건 없는 모양인데.
시하가 옷을 입으려는 순간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의 주머니를 후지에게 맡겼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에 입었던 옷은 물기를 닦는 바람에 이미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떡하지?
“하 선우님.”
앞에서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지 선우님이 이 시간쯤이면 당신이 일어났을 거라고 하면서 이 옷이 필요할 거라고…….”
소심이 숲속에서 나오더니 하얀 장포를 건네주었다. 바로 시하의 옷이었다.
“소심, 당신은 정말 천사예요.”
시하가 기뻐하며 자신의 옷을 받아 몸에 걸쳤다. 역시 호구 오라버니는 세심해.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는 누군가와는 비교도 안 된다니까.
“고마워요!”
“아니, 아니에요. 천, 천만의 말씀이에요.”
“당신이 전해 주지 않았다면 다 벗고 있었을 거예요.”
“천, 천만에요. 저는.”
시하가 옷을 입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얼굴을 붉혔다.
“얼굴이 왜 그래요?”
열이 나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은 걸까? 시하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소심은 갑자기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오라버니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을 마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둘러 숲속으로 사라졌다. 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지? 설마 내가 연못에서 있는 동안 후지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시하의 마음속에 뭔가 낯선 기운이 일어나며 답답함이 느껴졌다. 곧 고개를 저어 그 이상한 기운을 떨쳐 낸 다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후지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한기를 뿜어내며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차가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시하는 그가 한참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가 한기를 모두 해제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하(夏).”
“작은 주인님!”
그런데 녹색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더니 그녀의 옷에 찰싹 달라붙었다.
“작은 주인님,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주인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연못에 들어가 계시는 동안 저는 몸이 말라 부스러지는 줄 알았잖아요!”
후지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더니 한옥을 뜯어냈다. 이거 목 졸라 죽여 버릴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한옥은 자신의 두 잎사귀를 뻗으며 시하에게 안아 달라고 소리쳤다.
“작은 주인님, 안아 주…….”
후지가 결국 꽃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시하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하(夏夏), 안아줄래?”
저 호구 오라버니가 더 유치해진 거 아닐까? 진지한 얼굴로 저러니 더 이상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 소심은 어쩐지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은 뭐지? 다들 좀 정상적일 수는 없는 거야?
“저희 우선 태명파로 어떻게 들어갈지부터 논의해 볼까요?”
시하가 후지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를 주저앉혔다.
“전에 소심을 쫓아왔던 그 두 사람이 그랬었잖아요. 무슨 통령(동문(同文)으로 널리 발포하는 훈령(訓令). 동문 명령(同文命令))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두 놈이 분명 소심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태명파는 반드시 무극전의 지점을 지나야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아요. 혹시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소심이 미안한 기색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 선우님, 그 일은 제가 저지른 것이니, 만약…….”
“됐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당신 일에 끼어든 건 맞지만 이렇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 당신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고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당신을 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중요한 순간에 그녀의 목숨을 바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소심은 더 이상 자신을 그들에게 넘기라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후지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극전에는 여선이 없어.”
후지가 병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시하가 병을 건네받아 거꾸로 들자 안에서 두 개의 단약이 굴러 나왔다. 단약에서 향기로운 향기가 올라왔다.
“역형단(易形丹).”
“역형이요?”
“전에 필홍에게 역용단(易容丹)을 가르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용모를 바꿔 주는 효능이 있어.”
필홍? 그럼 그 후지의 뚱보 제자 1호? 전에 그 뚱보는 걸핏하면 모습을 바꿨었지. 노인으로 변신하여 나에게 밥도 해 주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이 단약으로 변신한 거였어?
“저와 소심이 남자로 변신하여 그 두 사람의 추격에서 벗어나자는 건가요?”
“그래. 이 단약은 내가 만들어 낸 거라, 수행 계급이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전혀 눈치챌 수 없어.”
그 말은 각 문파의 관리자와 보통 선인들은 모두 눈치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좋은 방법이네요.”
여자만 아니면 그 무극전에서도 그들을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시하가 손에 들고 있던 단약 하나를 소심에게 건네주며 나머지 단약을 삼켰다. 아주 가끔 후지가 만든 단약을 먹어 보았지만 항상 그 품질을 보증할 수 있었다. 후지가 만든 단약에서는 짙고 단 향이 나고 있었다.
역시 1분도 지나지 않아 시하는 자신의 가슴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목 부분에 뭔가 툭 튀어나오고 손가락도 조금 굵어진 듯했다. 참으로 신기한 약이었다. 시하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하반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그것도?
“하 선우님, 당신.”
소심이 바뀐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더니, 곧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도저히 못 봐 줄 지경이에요?”
그렇게 끔찍한가? 차마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아니에요. 아, 아주 보기 좋아요.”
소심 역시 목울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 나도 그렇게 많은 변화는 없을 텐데?
“와, 작은 주인님.”
어렵게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온 한옥이 최선을 다해 아첨을 부렸다.
“남자로 변신하니 더 멋있으시네요. 이 한옥이 당신께 열매를 다 맺어 드리고 싶어요.”
열매는 또 뭔데?
“역형단의 효능은 열흘까지야.”
후지가 시하를 힐끗 보더니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을 아껴야 돼.”
그때 한옥이 놀라 소리쳤다.
“열흘이요? 하지만 이곳에서 태명파까지 최소 보름은 걸리는데요?”
“그렇게 오래 걸려?”
그들은 동대륙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다. 아무리 역형단을 먹었다고 해도 사람들의 의심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때 소심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어요.”
“무슨 방법인데요?”
“우선 남쪽 암운성(闇云城)으로 가요. 그 성에는 각 대륙으로 통하는 전송 진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만약 그쪽으로 가면, 이틀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런 곳도 있어요? 그럼 뭘 더 망설여요.”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의외로 조용하던 한옥이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 암운성에 대해서는 저도 주인님께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그곳은 동남쪽 변경에 위치하고 있고 아무도 그곳을 관할하지 않아 아주 혼잡한 곳이에요. 마선이든 요선이든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그곳에는 귀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문파에서 죄를 범하여 추방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어요. 생각만 해도 너무 위험한 곳이에요. 그리고 그곳의 성주는 여요선(女妖仙)이에요.”
소심이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위험하긴 하죠. 하지만 남쪽으로 가려면 그곳에 있는 전송진을 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에요. 그리고 혼잡하기 때문에 성안에서는 무극전도 쉽게 손을 쓰지 못할 거예요.”
“작은 주인님, 예전에 주인님도 가지 않던 곳이에요. 듣자하니 그곳의 성주가 여선이긴 하지만, 수행 계급이 아주 높다고 들었어요. 인품은 엉망이어서 항상 남자들을 잡아다가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하는 아주 변태적인 사람이라더군요. 만약 상대가 작은 주인님을 좋아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되면 주인님께서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특히 작은 주인님처럼 이렇게 준수한 용모에 온몸에서 기품이 철철 흘러넘치는 분은 인간계에서 흔히 볼 수 없다고요!”
음, 아주 기분 좋은 칭찬이군.
“오라버니, 어떡할까요?”
시하가 묻자 후지가 대꾸했다.
“가자.”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작은 주인님!”
“출발!”
시하가 영검을 불러내 소심을 자신의 검 위로 데려왔다. 그들은 남쪽에 있는 암운성을 향해 검을 부렸다. 한옥은 어쩔 수 없이 후지의 검 위로 기어올라 새침한 모습으로 그의 옷 위에 들러붙었다. 시하가 그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한옥! 성주가 한가롭게 성밖으로 나와 거닐 시간이 어디 있겠어? 성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시하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수행 계급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집에만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자인 데다가 괴롭히는 건 남자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러길 바라야죠.”
한옥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누군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심의 말대로 그들은 이틀 만에 암운성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단속하러 돌아다니는 무극전의 제자들을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모두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존력이 강한 소심 덕분에 오는 길에 선계의 크고 작은 상식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멀리 아주 낡은 성 하나가 나타났다. 선성(仙城)이긴 했지만 어쩐지 그곳은 그 ‘선’ 자와 어울리지 않는 곳처럼 보였다. 아주 큰 성이었지만 선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성벽조차도 아주 허술하여 사람의 주먹으로도 뚫을 수 있을 듯했다. 성벽 위에는 구멍이 잔뜩 나 있었고, 어떤 곳은 아예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 틈으로 성벽 안에 허름하게 서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성벽은 방어는커녕 성을 가려 주는 기능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형태만 갖추고 있는 허울뿐인 성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