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89)

“후지. 뇌겁은 다 맞은 거예요?”

“응.”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닥에서 요염하게 가지를 흔들고 있는 화선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확실히 선기(仙氣)가 짙어진 것 외에 그의 몸은 정상적이었기에 시하는 그제야 안심했다. 역시 공부 귀신이야.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 여기는 한옥왕화요(寒玉王花妖)예요. 오빠가 분명 이 선계에 있는 듯싶어서, 이 꽃을 파내서 자세히 물어보려고요.”

무슨 사연인지 알게 된 후지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때 이미 뿌리가 절반쯤 뽑혀 있던 꼬마 한옥(寒玉王花妖)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작은 주인님, 어서 절 좀 도와주세요.”

한옥이 억울한 듯 힘껏 잎사귀를 흔들었다.

“알겠어. 잠시만.”

시하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기다릴 수 없어요. 어떻게 파다가 멈출 수 있죠? 이렇게 파다가 말면 제가 너무 힘들다고요.”

“힘들어도 좀 참아! 네 뿌리가 길면서도 굵고, 또 조금만 다쳐도 아프다고 난리고, 그러니까 바로 뽑을 수가 없잖아.”

“아아아, 작은 주인님 너무하세요. 전 처음이라고요.”

“알겠어. 알겠어. 살살하면 될 거 아냐.”

“아니에요. 그래도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연약해 보인다고 너무 살살 하지 마시고 더 힘을 주세요.”

“와, 소리 좀 낮출 수 없어?”

“아프니까 그렇죠. 아! 또 아프게 했잖아요.”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후지는 왠지 모르게 불편해지는 심기를 참았다. 차라리 저걸 죽여 버릴까.

반면 시하는 이곳에서 오빠가 계약한 화요(花妖)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드디어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일까. 이제 보니 오빠가 아래 세계에서 사라지고 난 후 바로 선계로 온 듯했다. 시하는 어서 그 한옥을 파내어 오빠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다만 그 작은 화요가 어떻게 된 일인지 뿌리가 아주 복잡하게 나 있었다. 시하가 두 시진이나 걸쳐 뿌리를 파고 있어 이미 2m 남짓한 구멍이 생겼지만 아직도 그의 뿌리 전체를 뽑아낼 수 없었다.

마지막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후지가 더는 참다못해 결계를 하더니 손쉽게 그의 뿌리 전체를 뽑아냈다.

“이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됐네요.”

땅에서 나온 한옥이 가지를 흔들며 자신의 뿌리에 남아 있는 흙을 털어 냈다. 그리고 시하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발 위에 올라섰다.

“작은 주인님, 저를 파내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작은 주인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작은 주인님을 따를게요. 앞으로 살아서는 주인님의 꽃이 되고 죽어서는 작은 주인님의 거름이 될게요.”

그는 어쩐지 시하의 이름을 알고 난 뒤로, 아예 스스로를 내려놓은 듯했다. 그 오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체면도 다 버린 듯한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리고 내 다리는 좀 놔줄래?”

“싫어요. 한옥은 작은 주인님을 처음 만났잖아요. 잠시만 이렇게 선기를 좀 맡게 해주세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후지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오더니 한옥을 시하의 다리에서 바로 뜯어냈다.

“어디서 이렇게 못난 선수가 나타난 거죠? 당장 이 몸을 내려놓지 못해요?”

한옥이 그제야 후지를 바라보더니 다시 그 오만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경고하는데, 저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아야!”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후지가 그를 다시 그 구덩이로 던져 버렸다.

한옥이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몸을 공처럼 말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 역시 화가 났는지, 순식간에 초록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무슨 콩나물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네놈 같은 선수들이라고!”

한옥이 몸을 덜덜 떨더니 다섯 개의 영검으로 변하여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조준했다. 후지가 어두운 안색으로 손을 한 번 휘두르자 하얀 영검 하나가 나타났다. 그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한옥을 바라봤다.

사람이랑 꽃이 싸우다니. 시하는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웃기……기는 개뿔!

같이 오빠를 찾기로 해 놓고, 출발하기도 전에 싸움부터 하는 거야?

“그만!”

시하가 한옥을 잡아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묻는 질문에나 답해. 우리 오라버니 어디 있지?”

“작, 작은 주인님.”

한옥은 재빨리 자신의 영검을 다시 꽃잎으로 전환했다. 다만 그 붉은 가지는 더욱 빨개졌고, 그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은 주인님, 당신, 당신.”

시하가 깜짝 놀라며 바로 손을 거두었다.

“이봐, 괜찮은 거야?”

설마 방금 힘 좀 썼다고 이렇게 바로 쓰러지는 건가?

한옥은 상처 따위 전혀 없는 모습으로 다시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붉게 변한 두 잎사귀로 꽃잎을 가리며 말했다.

“작은 주인님께서 저의 꽃, 꽃잎을 만지셨어요.”

“응?”

내가 만지지 말아야 할 데를 만진 건가?

“주인님께서 전에 말씀하셨어요. 저희 초목정괴(草木情怪)들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바로……. 아아, 작은 주인님 미워요!”

“뭐?”

그러니까 그게 뭔데? 함부로 막 생략하고 그럴래?

“저는 지금까지, 저의 화분(花粉)을 아주 잘 보호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작은 주인님이라면, 저는,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지? 나는 너의 화분 따위 필요하지 않은데?

“명년이면 제가 작은 주인님을 위해 많은 꽃들을 생산할 수 있을 거예요. 호호호.”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잠깐만! 화분?

생물 선생님이 생물은 화분을 통해 수정을 한다고 말씀했었지. 그럼 이 초목 요괴에게는 그 화분이 사람의 그…… 부분이라는 건가? 그럼 내가 방금 전에 만진 건…….

시하는 순간 자신의 손이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한옥,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시하가 참다못해 그 염치없는 화요를 다시 구덩이 속으로 차 버렸다.

“난 순결하다고, 날 더럽히지 마!”

오빠는 도대체 이 꽃한테 뭘 가르친 거지?

“작은 주인님.”

“닥쳐!”

그 농락당한 듯한 억울한 표정은 당장 집어치워!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나 해, 어서!”

그대로 가다가는 시하가 정말 그를 짓밟을 듯했다.

“네. 하지만 저도 그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뭐?”

“제가 이곳에 수년간 있으면서 몸이 변화하지 않아, 주인님이 어디에 계신지는 정확……. 아아아! 작은 주인님, 그 검은 왜 들고 계신 거죠? 살려 주세요!”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 후 시하는 다시 오빠와 연락할 수 없었고, 어렵게 사람을 찾아다니며 아래 세계에서 오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들 사이에 몇천 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수사는 폐관을 한 번 하면 수천 년도 바로 지나가는 것이라 기다릴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시하는 한옥을 만나 오빠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근데 그 한옥이 이렇게 믿을 수 없는 물건일 줄이야. 시하가 오빠를 만날 꿈에 부풀어 있던 그 순간, 한옥이 자신도 오빠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자백한 것이다.

“작은 주인님, 저도 주인님을 빨리 찾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 형태를 바꾸지 못한 작은 화요에 불과해요. 아직 계약의 반응으로 주인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제 근처에 나타나면 느낄 수는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건 길 안내지, 그렇게 전파 감지기 같은 기능이 아니야.

“됐어. 네가 무슨 죄냐.”

아직 형체도 바꾸지 못하고 주인과의 관계도 끊긴 상태이니 그럴 만도 하지. 오빠가 선계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오라버니, 저희는 이제 어떡하죠?”

“우선 조용한 곳을 찾아야 돼. 경계를 안정시켜야 하거든.”

시하는 그제야 자신이 선계에 올라올 자격도 없이 여기까지 몰래 올라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록 선기의 영향으로 수행 계급이 비승기를 넘어서게 되었지만, 아직도 주변의 선기가 그녀를 압박하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시하도 조용한 연못을 찾아 몸을 담그고 경맥을 씻은 다음 신선의 몸으로 거듭나야 될 듯했다.

“그럼 저희 어디로 가요?”

시하가 눈앞에 펼쳐진 초토화된 땅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근처에는 물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데 어디로 가지?

“여기서 오백 리쯤 되는 곳.”

오백 리, 방금 겁뇌를 받은 범위가 그렇게 넓은 건가? 이 황폐한 불모지를 만든 장본인이 이렇게 담담한 표정을 지어도 되는 건가? 한 번의 뇌겁으로 오백 리나 되는 땅을 뒤집어 놓고!

“그럼 우리 동쪽으로 가 봐요.”

오백 리를 가다 보면 연못도 만날 수 있겠지.

“가면서 오라버니 소식들도 들어 보고요.”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후지의 성격이라면 얼마 가지 않아 아마 뭔가 그럴듯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듯했다.

“동쪽이요?”

그때 한옥이 놀라더니 가지를 꼿꼿이 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주인님, 그 이상한 곳에 가서 뭐 하시려고요?”

이상한 곳?

“동쪽으로 가면 안 돼?”

“……그렇지는 않지만, 작은 주인님은 선수시고 여수시잖아요. 일이 없으시면 최대한 동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지요.”

“왜지? 동쪽도 선수들이 있는 곳이잖아? 남쪽에 있는 요수(妖修)들과 비교하면 동쪽이 훨씬 안전하지 않아?”

“작은 주인님, 동쪽이 더 안전하다고 누가 그래요?”

“우리를 안내하던 청축이라는 선인이 그랬어.”

한옥이 놀라더니 몸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작은 주인님, 그놈이 당신을 속인 거예요!”

동쪽과 서쪽 모두 선수의 지역이긴 했지만, 본질상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차이가 바로 관리자였다. 동쪽 대륙의 관리자는 네 개의 지역의 관리자들 중에 수행 계급이 제일 낮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주 유명한 비천계(斐兲界)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곳은 영기가 충족하여 몇백 년에 한 번씩 비승에 성공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어렵게 비승에 성공하는 비율에 비하면, 그곳은 비승에 성공하는 비율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정말 하늘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비승 성공률이 높은 것이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강한 자는 번성하고 약한 자는 점점 없어진다고, 다른 세계에서 어렵게 올라온 선수들은 비천계에서 대량으로 올라온 그들에 비해 자질이나 심성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높았다. 그러니 모두가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시작하는 선계에서, 그들은 당연히 다른 선수들보다 어려움을 겪었고, 오랫동안 무시를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단결하여 자신들 중에 수행 계급이 제일 높은 사람을 선존(仙尊)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무리를 결성했다.

수행 계급이 부족하지만 괜찮아. 우린 사람이 많잖아. 자질이 부족해도 괜찮아. 우린 사람이 많잖아. 지위가 낮지만 괜찮아. 우린 사람이 많잖아. 다른 사람들이 혼자 멋있게 싸우고 있을 때 우린 떼거지로 패싸움이나 하면 되니까. 인해전술로 이기지는 못해도 상대를 지키게는 할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오랫동안 무극전(無極殿)은 동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전체 동방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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