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89)

단원은 담장 안에 몸이 끼어 어쩔 줄 모르는 제공을 바라보다가 시하를 쳐다봤다. 내가 이 사람을 손 좀 봐도 될까요? 그렇게 묻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공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있었다.

“소사숙님, 어서 도망가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단원, 소사숙을 건드리면 당신은 남자도 아니에요.”

시하가 길게 한숨을 쉬며 눈짓으로 단원에게 담장에 있는 진법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제공을 담장 위에서 꺼내 왔다. 시하는 전에 있었던 오빠의 일에 대해 자신이 의심했던 부분과 그동안에 있었던 후지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그에게 들려주었다. 제공이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찌푸리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사부님께서 그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그가 사부님을 죽인 거라고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걸 믿어요?”

“저는 믿어요!”

사실 이 일은 처음부터 그녀가 추측한 것이었다.

“왜요?”

그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날 저희가 이 두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소사숙님, 사부님은 당신 오라버니예요!”

“후지도 마찬가지예요.”

옆에 있던 단원이 한기가 풀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공은 한참 침묵하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부님이라면 그런 요청을 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이유가 뭔데요?”

“몰라요. 하지만 제 생각엔 분명 유명지해와 가체사의 정생련과 관련이 있는 듯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제야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원을 바라보니 또다시 사부가 했던 그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방금 자신을 담장 속으로 처박아 넣었던 일도 생각나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소사숙님, 사부님의 일은 확실히 조사를 해봐야 하지만, 그걸 반드시 단원과 함께 조사해야 할까요? 그냥 저희가 먼저…….”

“언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그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푸른빛을 반짝이며 한 무리의 얼음 나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땅을 밟는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소녀로 변신했다.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제공의 표정이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방금 여기에서 강력한 영기의 움직임을 느껴서요.”

유유가 시하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마치 탐조등처럼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한 번 살피고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언니, 괜찮은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걱정하지 마. 뭐 좀 논의하고 있었을 뿐이야.”

시하가 습관적으로 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녀의 키가 이미 시하를 넘어 버리는 바람에 다시 손을 거두었다. 시하는 방금 제공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제공, 방금 우리가 먼저…….”

제공이 뭔가 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생각에는 사람이 많으면 힘도 더 커지니까, 이왕 조사해볼 거면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듯해요.”

방금 하려고 했던 말은 그 말이 아니었던 듯한데.

제공이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시하의 옆에 있던 유유를 바라보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분도 저희와 함께 동행하시는 거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문파는 어디이시고, 스승님은 어느 문파이신지? 배필은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제공이고, 미혼이에요!”

이 민머리 중놈이 지금 누굴 넘봐.

유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공이 더욱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가 봤을 때 소저는 영기가 깨끗하고 성품이 아주 고고하신 듯해요. 제가 좀 가르쳐…….”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유가 구리종을 불러내고는 아주 익숙하게 휘둘렀다.

“꺼져!”

잠시 후, 제공은 세 번째로 담장에 처박혔다. 시하는 더 이상 꺼내주고 싶지 않았다.

* * *

제공이 유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소사숙님, 제자의 평생 행복이 걸린 문제인데 정말 이러실 거예요? 저의 친사숙이시잖아요!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감정 전선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요. 절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고 이제 이 다리 좀 놔줄래요?”

매일 와서 다리 붙잡고 통곡하고, 다리가 이보다 더 굵다고 해도 버텨 내지 못하겠네. 제공이 코를 들이마시더니 그제야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울긋불긋 멍이 들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그는 참혹한 얼굴에 잠시 홍조를 물들이더니 수줍게 말했다.

“바, 바로 하 소저가 남긴 자국이에요.”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잔뜩 부어오른 그의 눈에 뜻밖에도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매번 제가 하 소저를 찾아갈 때마다, 아무 말도 없이 저를, 저를…….”

유유에게 맞은 거라고? 얼마나 맞으면 대체 이렇게 되는 거지?

“소사숙님, 저 하나도 안 아파요. 제자,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말해봐요.”

“제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사부님을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았어요. 사부님이 저의 스승이기도 하셨지만 저의 아버지이기도 하셨어요. 제공에게도 가족이 생긴 거죠. 나중에 사부님께서 실종되시고 나서 몇천 년 동안 저 혼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가체사를 지켜 왔죠.”

그가 점점 더 슬픈 표정을 짓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사부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유명지해의 봉인을 엄격하게 지켜 왔답니다. 몇천 년 동안 한 번도 그곳을 떠난 적도 없었고요. 근데 소사숙님을 만나고 나서 제 어깨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졌어요. 저도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닌 거죠. 때문에 당신을 존경하고 보호하며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던 거예요. 저는 일생에 한 번도 뭔가를 욕심낸 적이 없었어요. 저는…….”

“잠깐!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하 소저를 좋아해요. 그녀를 제 아내로 삼고 싶어요.”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뭘 그렇게 장황하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지.

시하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실 제공은 외모가 좀 평범한 것 빼고, 성격이 조금 엉뚱하고 겁이 좀 많고 눈이 좀 높고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것 빼고는 그래도 생각이 아주 바른 청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천택대륙의 빙선자 유유라니, 이 그림은 너무 아닌데. 게다가 절대로 넘지 못할 신분을 갖고 있잖아.

“당신, 불수잖아요.”

순간 낯빛이 변한 그의 주변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원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사숙님, 제가 어떻게 불수가 되었는지 아세요? 제가 일찍이 마음에 드는 처자를 만났으면 출가를 했겠어요? 그렇게 했겠냐고요!”

그럼 그동안은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중이 됐단 말인가?

“불수도 다시 속세로 돌아갈 수 있어요. 사숙님, 제 편이 되어 주셔야 해요.”

그가 말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시하의 다리를 잡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시하가 뒤로 물러서며 그의 손을 피했다.

“당신 생각이 정 그러면 가서 쫓아다녀요. 제가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행하는 사람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풍습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입장 문제만 없다면 아무도 그들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눈만 맞으면 결합은 성사될 수 있었다. 시하가 유유의 언니인 건 맞지만 그런 일은 유유의 자유 아닌가. 제공이 그 말을 듣더니 축 처진 얼굴로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하 소저가 저에게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 있어요.”

“왜요? 무슨 이유라도 있대요?”

제공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더니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제, 제가…….”

“뭐죠?”

제공이 한참 우물쭈물 망설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못생겼대요!”

“네?”

“보기 싫대요! 창피하대요! 꼴 보기 싫대요!”

그런 이유라면 정말 어쩔 수가 없잖아.

“소사숙님, 전 어떡하면 좋죠?”

시하는 한숨을 쉬며 이미 깊은 자책감에 빠져 있는 제공을 위로했다.

“낙심하지 마요.”

“네?”

“그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

“…….”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당신이 조금 못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눈 먼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유일하게 좋아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아주 이미 마음을 굳혔네, 굳혔어.

“소사숙님, 다른 부탁은 하지 않을게요. 사숙께서 저와 함께 가 주신다면, 그녀가 만나 주지 않을까요.”

시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제공의 얼굴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몇 가지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제공, 당신이 유유를 좋아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을게요. 만약 두 사람이 인연이 있어서 나중에 함께하게 된다면 저는 축하해주겠죠. 하지만 감정적인 것은 당신들 두 사람의 문제예요. 제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 편에 서서 강요할 수 없다고요. 저의 신분을 이용해서 어느 한쪽이라도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요. 순수하게 그녀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은 아주 소중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걸로 상대의 감정까지는 강요하지 마요. 당신은 오라버니의 유일한 제자이고 제가 인정한 사람이지만 유유도 제 동생이에요. 유유는 내 말이라면 거절하지 못하겠지만, 만약 이 점을 노리고 나에게 부탁한 거라면 당신 다리를 부러뜨릴 거예요!”

감정은 도덕적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제공이 계속해서 유유의 주변을 맴돌아도 시하는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공이 멍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을 보였다. 방금 그 애원하던 모습도 감춘 채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소사숙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숙님을 이용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리고 저를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강제로 얻기보다 순리에 맡기는 것이 좋죠. 저는 다른 마음은 품지 않고 진심으로만 대할 거예요. 제가 사숙님을 찾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제공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게다가 하 소저는 아직 저의 마음도 모르거든요.”

“잠깐만요! 아직 유유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못 했다는 건가요? 그럼 여태까지 뭘 한 거죠?”

이미 보름도 지났는데 아직 고백하지 못했다니 그게 말이 돼요?

“매번 하 소저를 만날 때면,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못생겼다면서 구리종을 꺼내 공격했거든요. 그래서 늘 말도 못 하고 쫓겨났어요.”

갑자기 불쌍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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