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89)

시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후지가 그녀를 내보낼 때 제일 마지막에 한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안함이 계속 들었다. 특히 비경을 나오고 난 후, 힘껏 출구를 버티고 있던 단원을 봤을 때 그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날 잠룡연에서 나오고 나서 그들은 바로 환해로 가 영악파로 도착했다.

잠룡연은 상고의 지역으로 똑같은 상고의 물건이 그들을 인도하지 않는 한 그곳의 허공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전체 천택대륙에 상고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영악파의 파진지보(派鎭之寶) ‘옥무우’밖에 없었다.

전에 그녀가 청운파를 대표하여 문파 대비에 참석했을 때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우승자에게 줬던 상이 바로 비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곳에서 병아리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때 영악파의 상고법보인 옥무우가 바로 그 비경을 여는 열쇠였다. 그 비경은 비록 병아리를 위한 공간이었지만 옥무우는 확실히 상고의 땅과 연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영악파에서 누군가가 옥무우를 이용하여 잠룡연의 입구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하는 그 사람이 바로 단원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후지가 그녀를 돌려보낼 때 지금의 자신은 오랫동안 출구를 유지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말했던 ‘지금의 자신’은 본인이 아니라 밖에 있는 단원이라는 의미였다.

비경 안에서 만났던 삼천 년 전의 후지가 그녀를 구하러 온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단원은 그녀가 얼마 전만 해도 오빠의 일로 협박하지 않았는가. 근데 그가 그렇게 허공을 가르고 그녀를 구하러 왔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사람 혹시 마조히즘 같은 성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기억을 잃기 전이든 후든 시하는 점점 더 단원과 후지 이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외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뒤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언니, 기쁘지 않아요?”

그때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하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유! 언제 왔어?”

잠룡연을 나온 후 시하는 영기로 유유도 영악파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요 며칠 안 보이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무 일도 아니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을 뿐이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

유유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순간 시하는 그녀와 상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유, 뭐 하나만 물어볼게.”

“네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한테 가족처럼 잘 대해주고 너를 여러 번 구해줬어. 근데 그 사람이 너의 유일한 가족을 죽였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누가 언니를 괴롭혔어요?”

유유의 얼굴이 갑자기 벌겋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그녀는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키만큼 커다란 구리종을 불러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언니, 누군지 말해 봐요. 가서 죽여 버릴 거예요.”

“잠깐만!”

시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는 유유를 붙잡았다.

“흥분하지 마. 그저 너한테 묻고 싶었을 뿐이야.”

유유가 안심하며 어깨에 들고 있던 구리종을 내려놓고 결계를 통해 거둬들이더니 방금 시하가 물었던 질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언니의 질문은 참 이상하네요. 만약 그 사람이 정말 언니에게 잘해준 거라면 어떻게 언니의 유일한 혈육을 죽일 수 있죠?”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죽였다니까!

“내가 예를 들 테니까 잘 들어봐. 만약, 어느 날 내가 헌림을 죽였어. 너는 날 미워하지 않겠어?”

유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비웃음 섞인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가 그 이름을 얘기하지 않았으면, 저에게 그런 오라버니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을 뻔했네요.”

시하의 마음이 순간 무겁게 내려앉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헌림에게 버림받고 애써 울음을 참던 유유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시하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 이놈이 입이 문제야, 문제.

“유유, 미안해. 난 그저,”

“괜찮아요! 오래전부터 신경 쓰지 않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선문에 들어가기로 한 후부터 이미 결심하고 있었죠. 그와 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근데 언니는 왜 그를 죽이려는 거죠?”

“아니야. 아니야. 그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말하면 그렇다는 거지.”

시하가 서둘러 그녀에게 설명했다.

“만약 네가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 날 미워할 거야?

유유가 잠시 침묵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헌림이 저를 버리긴 했지만 어찌됐든 저의 혈육이에요. 전에 그가 했던 일을 잊은 건 아니지만 제가 그를 미워할 자격도 없죠. 때문에 만일 어느 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해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언니는…….”

유유가 고개를 돌려 시하를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말했다.

“유유는 오래전부터 언니를 친언니로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만약 어른이 되면 언니를 보호해줄 거라고 결심했죠. 언니는 헌림과 다르기 때문에 저는 언니를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언니를 믿어요. 언니가 하는 일에 당연히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언니는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근데 만약 어느 날, 그를 죽였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고요.”

유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덧니 두 개를 귀엽게 드러내며 웃더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절대로 고의로 저를 힘들게 하진 않을 거라 믿어요.”

시하는 며칠 동안 계속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드디어 풀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전에 후지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어.”

시하가 일어서자 유유가 놀라며 물었다.

“어, 언니 어디 가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러!”

시하는 바로 검을 부려 봉우리 꼭대기로 날아갔다. 후지가 지금의 후지에게 공평하게 대해 달라고 부탁했었지. 후지가 말한 공평의 대상은 바로 그와 시동이었다. 두 명 다 그녀의 오라버니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자신의 친오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원이 칼에 베었을 때에도 그를 치료해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공격하기에만 바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에게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시하는 지금까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동은 그녀의 친오빠이자 혈육이었고, 어려서부터 함께한 남매였다.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그와 비교한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맞아. 다른 사람! 시하는 바로 그런 생각으로 자기도 모르게 후지를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그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시동 앞에만 서면 후지는 남으로 배척했다. 그녀는 후지가 분명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가 그녀를 해하는 일을 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지어 계속해서 자신을 구해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하기는커녕 상황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공평하지 못한 걸 떠나서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했다.

만약 후지를 정말 친오빠로 생각하고 시동처럼 대했다면 그러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렇게 죽기 살기로 그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시하는 처음부터 후지와 시동을 똑같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후지와 시동을 동일 선상에 놓고 생각해본 적도.

시하는 이제야 후지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미안함이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이제야 알 듯했다.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화만 내고, 나야말로 정말 나빴구나.

일의 내막이 이해되자 가슴이 순간 뻥 뚫리는 듯해 검의 속도를 좀 더 높였다. 다행히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이제 더는 도망갈 이유가 없어졌다. 후지와 오빠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든, 일의 내막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동생으로서 최소한 후지에게 진 그 빚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하가 서둘러 검을 부려 단원이 있는 그 방 앞까지 다가가 힘껏 그의 방문을 열었다.

“후지, 우리 얘기 좀.”

시하가 깜짝 놀라며 하던 말을 멈추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바로 몸을 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그 바지부터 입으면 안 될까요?”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시하는 그 시간에 단원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것도 하필이면 바지를 벗고 있을 줄이야. 문을 여는 순간 그의 하얀 허벅지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 그림이 하도 아름다워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였다. 시하는 갑자기 비경을 나오기 전 후지가 했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입맞춤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느낌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잠깐! 나는 화해하러 온 거였잖아. 저 사람과 친남매처럼 잘 지내기로 결심하고 온 거면 우리의 관계는 당연히 아주 순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일순간의 아름다움에 미혹되면 안 돼.

“하하(夏夏).”

“네?”

“허리띠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주변을 살펴보니 의자 옆에 하얀색의 허리띠가 보였다. 평소 그가 항상 허리에 묶고 다니던 허리띠였다. 시하의 머릿속에 또다시 방금 전의 장면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다리, 다리, 다리. 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같은 노처녀에게 방금 그런 행동은 완전 범죄행위라고요!

“하하(夏夏)?”

그녀가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자 뒤에 있던 그가 참다못해 불렀다. 시하가 자신의 등 뒤로 허리띠를 든 손을 내밀었다.

“여, 여, 여기요.”

시하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단원의 움직임이 조금 줄어든 듯하자 물었다.

“됐어요?”

“네.”

시하는 그제야 안심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그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또다시 시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옷을 또 벗고 그래요?”

방금은 하반신이더니 이번에는 상반신이냐. 단원이 침상에 있는 옷을 집어 몸에 걸치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하의를 다 갈아입어야죠.”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라 시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죠?”

그가 진지한 얼굴로 시하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불편하거나 미심쩍은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방금과 같은 일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시하는 온갖 야한 생각이 다 떠오르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이상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말했다.

“단원, 사실……. 잠깐 저게 뭐예요?”

그의 옷 여기저기에 울긋불긋 붉은 자국이 묻어 있었다. 시하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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