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어느새 시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하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오라버니 말을 들어야지.”
그의 관심 어린 말투에 시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자신의 생각이 너무 많았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있으면 출구가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서 여기를 나가야 해요.”
출구! 시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소리쳤다.
“이것 놔요!”
“소사숙님!”
제공이 그녀를 구하려고 하자 단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움직였다. 제공은 반항할 새도 없이 연묵과 함께 밝게 빛나고 있는 출구 쪽으로 밀려났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공!”
시하가 놀라서 힘껏 그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손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영력도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필이면 소녀도 연밥을 먹고 지금은 영수대 안에서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그가 시하를 안고 마치 위로하듯 등을 두드리며 어린애를 타이르듯 말했다.
“착하지.”
“젠장!”
시하는 자신의 자유마저 빼앗긴 듯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그에게 강제로 붙들려 있어 도망갈 수가 없었다.
“젠장, 날 내려놔요! 당신 도대체 누구예요?”
“난 후지야.”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어떻게…….”
잠깐만! 지금 후지라고 한 거야?
“기억이 돌아왔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 그가 보여준 그 이상한 모습은 확실히 시하를 누이동생이라고 우기던 그때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기억?”
그가 놀라며 뭔가 떠올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기회다!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시하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손에 검을 들고 있던 사실을 잊고 움직이는 바람에 살이 에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왼쪽 팔뚝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시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근데 아프지가 않네. 마치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통증이 갑자기 사라졌다. 소매를 걷어 보니 역시 왼쪽 팔뚝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동심인이 작동한 건가.
맞은편에 서 있던 단원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의 팔에 약 3척 정도의 상처 흔적이 나 있었다. 어떤 각도로 봐도 그 흔적은 방금 시하의 팔에 있던 그 상처와 똑같았다. 말도 안 돼!
그도 팔에 있는 상처를 보며 놀란 듯하더니 곧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있었던 거야.”
“당신, 정말 단원이에요?”
시하가 멍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방금까지 그의 몸에 있던 동심인은 가짜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리고 동심인은 동시에 두 대상을 한데 묶을 수 없었다.
“아니, 난 후지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미소를 지은 그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라버니라고 불러 봐.”
시하가 그의 손을 때리며 경계심을 해제하고 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게 맞아요?”
그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거두며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하지만 아직 전부는 아닐 거야.”
“네?”
“구체적으로는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하하(夏夏)가 나를 많이 안아주면 모두 생각이 날 수도 있어.”
많이 안아 달라니, 그런 치료 방법도 있어요?
잠깐, 시하의 머릿속에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시하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서 있던 그의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색이 희미한 걸 보니 오래된 상처인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하는 그의 수행 계급이 높아 술법을 이용하여 상처가 금방 아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지. 혹시 옥화파에서 매일 밤 뭘 했는지 기억해요?”
그가 놀라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하하(夏夏), 듣고 싶어?”
기억하네.
“당신의 수행 계급은 뭐죠?”
“진선(眞仙).”
머릿속에 뭔가 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시하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선! 수선계에 제일 높은 계급도 비승기(飛升期)에 불과했다. 그 계급은 일반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계급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시하가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당신은 지금 단원이에요? 아니면 후지예요?”
그는 시하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夏夏), 정말 똑똑하구나. 이렇게 빨리 알아내다니.”
“당신, 정말 후지예요?”
“3천년을 거슬러 왔어.”
시하는 시공을 뚫고 온 오빠의 전화에 이어, 이번에는 삼천 년 후의 후지를 만나게 되었다.
“하하(夏夏), 오라버니라고 불러 봐.”
“당신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죠?”
“하하(夏夏)가 날 여기로 오게 만들었어.”
“제가요?”
설마 미래의 내가? 아마도 예전의 내가 스스로 위험한 걸 알고 차원 이동을 하여 누군가를 데려왔을 수도 있겠지. 근데 왜 후지가 온 거지?
시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후지를 바라보면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미래의 나는 저 사람과 아주 친한 사이인건가?
그가 그녀를 구하러 온 걸 보니 미래에 그들의 관계는 시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아마도 지금은 생각하지 못한 어떤 일이 일어났겠지.
“만약 당신이 정말 삼천 년 후의 미래에서 온 거라면 저한테 몇 가지 일에 대해서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좋아.”
“가체사의 정생련은 대체 어디로 간 거죠? 제 오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는 어디에 있는 거죠? 제가 또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 곤란한 일을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夏夏). 곧 있으면 다 알게 될 거야.”
“곧 있으면요?”
“그래, 아주 빨리.”
그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런 것들을 미리 알아서 별로 좋을 건 없어. 만약 네가 정말 알고 싶다면…….”
“됐어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미래의 일을 미리 안다고 별로 좋을 것은 없었다. 어쩌다가 역효과만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답을 알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에 대해 시간 낭비를 줄이고 불필요한 근심은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노력하려는 의지도 훨씬 줄어드리라. 게다가 그가 말해준 그 결과 그대로 진행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전에 만났던 양란지도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결과가 진행되지 않았으니까.
무수한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나비효과니 뭐니 하는 것들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미래는 지금의 현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제 스스로 찾을 거예요.”
시하가 말을 마치자 후지가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가 시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가 또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그 손을 쓰면 화낼 거예요.”
그가 실망한 얼굴로 시하의 말에 중간에서 손을 멈추었다.
시하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무표정한 후지를 바라봤다. 그는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시하는 가끔 마음이 답답해졌다. 미래에서 온 그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보니 미래의 그녀는 그와 화해한 게 분명한 듯했다. 시하는 미래의 그녀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었다.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그와 그렇게 있는 것이 마치 정답인 듯한 느낌도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믿고 의지하고 싶어졌다.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그녀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단원이 아니라 후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출구가 닫히려고 해요.”
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있었던 그 충격에서 돌아와 전방을 살폈다. 역시나 그 구멍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시하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나가자.”
“좋아요.”
시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임 없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출구로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후지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후지?”
그가 평온한 얼굴로 바라보자 시하가 놀라며 소리쳤다.
“저와 같이 나가는 거 아니에요?”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갈 수 없어.”
“왜죠?”
“시간은 거꾸로 돌릴 수 없잖아. 잠룡연은 삼계중생(三界衆生) 밖에 떠다니고 있는 곳이고, 천지법칙 사이에 있는 곳이야. 그래서 내가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지.”
그 말은 후지는 여기 잠룡연에만 나타날 수 있다는 건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나가요?”
“난 당연히 방법이 있지.”
“무슨 방법이요?”
“걱정하지 마. 나는 내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다만 더는 너와 함께 있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거지.”
시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자 시하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출구를 더 이상 열어 둘 수 없어. 가기 전에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줄래?”
“뭔데요?”
“오라버니라고 한 번만 불러줘. 그게 안 되면 안아주는 건…….”
“꺼져요!”
후지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 허공에 있던 출구가 또다시 흔들렸다. 마치 뭔가 안 좋은 신호를 받기라도 한 듯 치지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말 이제 가야 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직도 후지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시하는 자기도 모르게 끝내 안아주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놀란 듯 후지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잠시 후 그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잘 지내야 해요.”
“응. 혹시 부탁 한 가지만 더 들어줄 수 있어?”
시하가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그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시하는 그의 눈에서 엿보이는 감정들로 완전히 매료되는 듯했다.
“하하(夏夏), 넌 내 유일한 누이동생이야. 내가 기억하든 못하든 변하는 건 없어! 그러니까 지금의 이 오라버니에게 공평하게 대해줘. 알겠지?”
시하가 자기도 모르게 뭔가 마음이 켕겨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지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시하의 입술에 뭔가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후지의 입술이 정확하게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진 것이다. 마치 예전에도 그렇게 수없이 해본 듯한 익숙한 입맞춤이었다.
시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하의 몸이 앞에 있던 그에게 밀려 출구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밝은 빛에 완전히 눈이 잠겨 버렸다.
시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잠룡연 밖으로 밀려났다. 밖으로 나와서도 시하는 여전히 좀 전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입맞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나 당한 건가? 분명 자기 입으로 본인은 내 오라버니라고 했잖아! 젠장! 동생한테 입맞춤하는 오빠도 있어? 후지, 당장 나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