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89)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고요? 시하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다시금 긴 검이 오빠의 가슴을 뚫고 나왔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갈색 검 위에 붉은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시하는 머리에 얼음물이 쏟아진 듯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러는 거지? 원수지만 도움을 받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와 더 이상 어떤 이유로도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고, 또다시 자연스럽게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있다니. 오빠를 생각하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지만, 또다시 방심하는 순간 바로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른 내 모습이 여우와 뭐가 다르지? 내가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된 거지?

“멈춰요!”

단원이 놀라서 검을 멈추려는 순간 시하가 먼저 자신의 영검을 불러내 아래로 내려갔다.

“하하(夏夏)!”

단원이 바로 그녀의 뒤를 쫒아갔다. 제공과 연묵이 그녀의 외침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사숙님, 왜 그러시는 거죠?”

제공은 바닥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시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뭔가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기쁜 듯한 표정도 섞여 있는 듯했다.

시하가 갑자기 몰려든 그 감정들을 추스르며 안정시킨 후 그들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들과 함께 갈 수 없어요. 먼저 가세요. 저 혼자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제공이 놀라 소리치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네? 왜 그러시는 거죠? 단원 존상께서 나가는 길을 안다고 하셨잖아요?”

“제 자존심 때문이에요.”

제공이 멍한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소사숙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어쨌든 먼저 가세요. 알아서 길을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괜찮으니까.”

단호한 태도에 제공이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어쩔 수 없이 제일 어려운 단원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단원은 여전히 제공의 말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시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온몸에서 무서운 냉기를 뿜어냈다. 다만 그의 눈빛만은 아주 부드러워 보였다. 시하가 같이 가지 않는다는데 단원으로서는 남은 두 사람과 같이 가기 싫었다.

“하하(夏夏).”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기복도 없었지만 시하는 뭔가 애원하는 듯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저리 가요! 단원, 제가 말했죠. 저는 당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요. 그리고 그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제공도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 원인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들이 처한 지금의 현실을 떠올리며 시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소사숙님, 저도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봐 왔듯이 여긴 위험해요. 우선 여기를 벗어나 밖으로 나간 다음에 다시 얘기합시다.”

“아뇨, 전 이미 그렇게 결정을 내렸으니 계속 그렇게 할 거예요. 위험한 일을 만났다고 그런 마음을 바로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를 이용하면 저는 뭐가 되는데요? 저의 그 결심은요? 제 오빠는 뭐가 되는데요?”

시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

“제 말은 모두 진심이에요. 당신의 도움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건 제 오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지만 당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해요.”

시하는 생명을 존중하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을 두려워하며 죽는 건 더욱 두려웠다. 그와 같이 가는 것이 옳은 선택임을 알지만, 그럼 나가고 나서는 어쩔 건데? 그냥 이렇게 애매모호한 감정으로 단원과 계속 함께 있어야 한다고? 오빠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여기서 나가고 난 후 바로 그와의 관계를 끊는다 해도, 그의 도움을 이용해 온 게 있잖아.

시하는 이 세계에 온 지 아주 오래되었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배신, 이용, 살육, 약육강식 등 말로만 듣던 일들을 수선 세계에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시하는 항상 스스로에게 본인은 달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언젠가 돌아가야 하니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때문에 지금까지 이곳 세계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그 신념을 꿋꿋이 지킬 수 있었다.

만약 살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언젠가 똑같이 배신을 당하지 않을까. 시하는 잘난 척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지키고 이 세계에 동화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그녀의 말에 단원이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힘껏 끌어당겼다.

“당신은 내 거예요. 내 동생이라고요!”

그가 말을 마치더니 바로 검을 날려 방금 날아가고 있던 그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가 시하의 허리를 더욱 힘껏 끌어당겼다. 그 행동이 너무 빨라 시하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이미 하늘로 올라와 있었다. 이번에는 결계를 하지 않았던 탓에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스치자 시하가 그제야 반항할 여유를 되찾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영기까지 봉인하고, 예전에는 이런 사람인 줄 왜 미처 몰랐던 거지?

“날 내려놔요!”

“싫어요!”

“왜 저를 잡는 거죠?”

“위험하니 나가야 돼요!”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제 누이동생이잖아요!”

“누가 당신의 누이동생이죠?”

“당신이요!”

“어서 날 내려놔요. 내 말 안 들려요?”

“내려놓지 않을 거예요!”

“단원! 내가 얘기했었죠! 다시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요. 당신을 만나면 당신과 싸우게 될 거라고요!”

시하가 바로 주먹을 날려 그 무표정한 얼굴을 공격했다. 눈가와 입과 같은 약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그는 몸을 피하지도 않고 마치 영기를 사용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아무런 방어도 없이 그녀의 공격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는 오색찬란한 도장이 찍히고, 볼은 부어오를 대로 올라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너무 심하게 맞은 탓에 검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하가 계속 몸을 움직이던 탓에 바닥으로 내려오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고 있던 그의 손에도 힘이 조금 풀렸다.

시하가 그 틈을 타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단원이 바로 알아차리고 힘껏 끌어당겼다. 시하가 꼼짝없이 그의 가슴으로 끌려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시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夏夏), 제발 말 좀 들어요.”

“꺼져!”

날 놓으라고, 이 나쁜 놈아!

“도착했어요.”

뭐라고?

그제야 시하는 눈앞에 높이 세워진 석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석벽 위에는 복잡한 법진이 펼쳐져 있었고, 아주 오래된 문자처럼 보이는 복잡한 법부 문자를 보게 되었다.

“이건?”

“이곳은 출구랑 연결돼 있어요. 여기가 유일한 출구예요.”

잠시 후, 제공과 연묵이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그들은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몸이 마치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지 않은가.

“소사숙님, 당신들 지금.”

왜 안고 있는 거죠?

“날씨가 쌀쌀해서 온기를 느끼려고요.”

“하지만 지금은 여름인데.”

“닥쳐요!”

“네.”

시하는 어떻게든 피해 가고 싶었지만 단원의 그 마수 같은 손을 절대 피해 갈 수 없었다. 평생 이렇게 따라다니는 건 아니겠지?

제공은 두 사람을 한참 바라보더니 조용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하지만 연묵은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을 보더니 바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눈에 경멸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설마 여기가 출구예요?”

제공이 그들 앞에 있는 석벽 위 진법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그러다 진법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전송진 같은데요? 이 문자는 어느 상고유적에서 본 것 같군요. 아쉽게도 이걸 작동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잃어버렸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연묵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두 사람은 한참 고민에 빠져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수행 계급이 제일 높은 단원에게 물었다.

“존상, 당신은 이 진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거겠지?

단원은 제공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시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더러 물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시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셋을 셀 동안 놓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셋! 둘! 하나!”

그가 마지못해 시하를 풀어주고는 석벽으로 걸어가더니 두 손을 그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엄청 어렵게만 보이던 그 법진이 순식간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진 위에 오래된 문자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고, 빛은 점점 더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 빛들이 입구를 만들어 내고 나서야 그가 석벽 위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진법이 작동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들어갈 수 있어요.”

제공은 진법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며 단원에게 물었다.

“이 진의 다른 쪽도 출구인가요? 더 늦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화벽이 언제 또 여기까지 쫓아올지 모르니까 빨리 여기서 떠나죠.”

시하가 영기로 주변의 공기를 자세히 느껴 보니 공기 중 화 영기가 역시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보아하니 그 화벽이 근처까지 쫓아온 듯했다.

“빈승이 먼저 들어가서 길을 탐색해 볼게요!”

제공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바로 그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시하가 조금 더 버텨 볼 요령으로 한쪽에 서 있는데 단원이 이를 눈치챘는지 그녀를 이끌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시하의 눈앞에 밝은 빛이 반짝하더니 다음 순간 또 다른 곳에 도착했다. 전에 그 황량했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생기가 넘쳤다. 눈이 닿는 곳마다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는 정갈하게 정돈된 나무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각양각색들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곳은 삼림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가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공원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심지어 중간에는 길처럼 길게 뻗은 잔디밭도 보였다. 이제 보니 방금 그 상고 진법이 정말 전송진이였네. 보아하니 아주 멀리까지 온 모양인데.

그런데 그때 단원이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설명했다.

“전송진이 아니에요. 이건 계위진술(界位陳術)이에요.”

오히려 제공이 더 놀라워하며 단원에게 물었다.

“계위진! 이곳이 계위진으로 만들어 낸 곳이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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