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89)

“시 소저!”

제공도 멈춰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지우개가 곧 용오천의 몸에 다가가기 일보 직전, 시하가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날았다.

“은인님!”

용오천이 놀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 바보예요? 따라오기 힘들면 말을 했어야죠!”

“저는…….”

시하가 그를 쏘아보며 소리치자, 용오천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 얘기를 하려다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혼낼 여유도 없어 시하는 힘껏 지우개와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앞을 향해 날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지우개가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하는 용오천을 데리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지우개로부터 4, 5미터의 거리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순간, 제공이 그들에게로 다가와 다른 한쪽에서 용오천을 끌어주었다.

“영기를 풀고 동시에 검을 부려요.”

시하가 바로 그의 말대로 검을 부리자 갑자기 짙은 영기가 몰려왔고, 세 사람의 발아래에 있던 검에 속도가 붙었다. 검이 더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날았다. 그제야 그들은 그 지우개를 멀리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

“죽는 줄 알았네.”

시하가 그제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오천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제가 너무 느려서…….”

“됐어요. 당신이 무사하면……. 당신, 손이!”

시하가 개의치 않아 하며 대꾸하다가 놀란 눈으로 그의 오른손을 보며 소리쳤다.

“손이요?”

용오천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팔이 없음을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마도 뒤에 있는 그 물건이 삼킨 모양이에요.”

제공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지우개요?”

“시 소저,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알고 있나요?”

시하의 한마디에 제공이 놀란 얼굴로 묻자 시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는 건 아니에요. 그저 그 물건의 모양이 전에 제가 알고 있던 어떤 물건이랑 닮아 있어서요. 그 물건은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되면 수정하려고 닦아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이었죠.”

제공이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림이라, 그러고 보니 이 세계의 색깔이 확실히 그림 속 모습이랑 닮아 있긴 하네요.”

설마, 그걸 정말로 믿는 거야? 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한 건데?

제공은 용오천을 보며 말했다.

“우선 영력으로 팔의 경맥을 막고 있다가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때 다시 복구해요.”

용오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영기를 움직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 팔 주변의 경맥을 느낄 수가 없어요.”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용오천의 말에 제공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은 아주 특수한 곳이라 광량의 손은 그 정체불명의 물건에 삼켜져 아마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듯해요.”

“……괜, 괜찮아요.”

용오천이 애써 웃음 지으며 앞에 있는 출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서둘러 이곳을 나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공이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 앞까지 도착하면 안전할 거예요.”

시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따라오고 있는 그 지우개를 바라보며 뭔가 망설이듯 말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면 이자의 손은 다시 찾을 수 없잖아요.”

제공은 자신의 민머리를 쓰다듬더니 대꾸했다.

“그렇죠. 아니면, 하나 더 그려 주면 어떨까요? 어차피 여기는 그림 속이니까요.”

“…….”

“…….”

지금 날 놀리는 거죠?

“이곳이 그림 속처럼 생겼고 우리 몸도 그 속에 있으니, 몸의 일부가 사라졌으면 다시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제공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자 시하가 말리듯 대꾸했다.

“방금 그림이라고 말한 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제공은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붓을 어느새 손에 쥐고 있었다.

잠깐 당신, 그 붓은 어디서 난 거죠? 정말 그리려고요?

제공이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의욕에 찬 얼굴로 말했다.

“한 번 시도해 보면 어떨까요? 여길 나서면 그의 팔을 영영 다시 회복할 수 없으니 이렇게 그냥 나갈 수는 없잖아요. 죽은 말을 살아있는 말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치료는 해 봐야 하니까.”

일리는 있지만 왜 이렇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지?

결국 제공이 붓을 휘두르며 용오천의 오른팔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검은 먹 자국이 남았다. 방금까지도 어두운 안색으로 있던 용오천이 기뻐하기 시작했다.

“저, 저 이제 경맥을 느낄 수 있어요.”

정말 효력이 있는 거였어?

제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네요.”

그때 시하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물체를 보고 결계를 하며 다급히 소리쳤다.

“지우개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어서 그려요. 최대한 비슷하게요.”

“소저, 걱정하지 마세요. 빈승 평소에 경을 베끼고 회화를 그리는 걸 좋아해서 그림 그리는 데에는 소질이 있지요. 신속하게 그리고 최대한 비슷하게 그릴 수 있어요.”

제공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다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하가 결계를 하다가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고개를 돌렸다.

“됐어요!”

이렇게나 빨리?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완성하다니…… 는 무슨, 이게 대체 뭐야? 귀신이야?

“이거 혹시 성냥개비 인간을 그린 건가요?”

용오천의 오른쪽에 그려진 두 개의 검은 막대기를 보며 시하가 입술을 떨었다. 잘 그린다더니 결국 이 막대기 두 개를 그린 거였어?

“허! 올해는 경을 좀 더 베껴야겠네요. 그림이 조금, 조금 생소하죠?”

당치도 않다는 듯 시하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출가인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제 말은 모두 사실이라고요!”

“당신이 이렇게 무식한 걸 당신의 불조(弗組,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는 알고 있어요?”

“…….”

“붓, 이리 줘 봐요.”

아, 힘 빠져. 시하가 붓을 받아 들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가 그려 놓은 성냥개비 위에 손과 손가락 등을 그려 넣으며 섬세한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공이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와. 정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시주의 그림 실력은 정말 대단하네요!”

대단하긴 개뿔, 당신의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것이다.

“빈승이 몇천 년을 수행하면서 스스로의 그림 실력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소저처럼 이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네요. 소저의 그림 스승은 어느 대가이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초등학교 선생님이요.

“언젠가 소승에게도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까요? 사실 소승, 기초는 아주 잘 다져져 있거든요.”

“…….”

“시주님, 믿으셔야 해요. 방금 그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거라고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그려 볼까요?”

“저리 비켜 봐요!”

“네.”

지우개가 가까워지고 있자 시하는 빠른 속도로 마지막 남은 손가락 세 개를 그렸다. 용오천은 초조한지 방금 그려 놓은 그 검은 자국을 움직였다.

“순풍 동생. 그냥 여기까지.”

“닥쳐요!”

시하가 더 빨리 붓을 움직여 마지막까지 그림을 완성시켰다.

“가요!”

옆에서 준비하던 제공이 바로 검을 부려 앞에 있는 그 금빛 속으로 날아갔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바로 그 금빛 속으로 사라졌다. 시하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뒤에 있던 흑백 세계가 이미 사라지고 주변에 따뜻한 금색이 감돌았다. 멀리 희미하게 초록색 풍경이 들어오더니 향기로운 꽃냄새도 풍겨 오는 듯했다.

“이번엔 또 뭐지?”

시하가 조금 망설였다. 풍경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보였으나 유명지해 안에서는 정상적인 것이 제일 비정상적일 수 있었으므로.

제공이 앞으로 나서며 자세히 살피더니 말했다.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는데요? 여기에서 유명지해 중심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아요.”

지금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시하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바로 앞에 있는 초록색 신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용오천이 갑자기 우물쭈물해하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두 손을 불끈 쥐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순풍 동행, 전에는 제가…….”

“우선 여기를 나가고 나서 얘기해요. 저는 지금 후지를 찾는 것에 집중해야 해요. 지금은 그런 얘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네요.”

“후지?”

“단원이요.”

“그랬군요. 당신, 그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가 뭔가 미소를 짓는 듯, 그렇다고 완전히 웃는 표정은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당신이 베푼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다는 걸요.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요.”

시하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는 무력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이것 봐요. 이게 바로 당신이랑 저의 차이예요.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당신을 친구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저를 은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죠. 우정은 길게 갈 수 있어도 은혜는 언젠가 끝나는 날이 있기 마련이에요.”

“순풍…….”

그때 제공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어요. 아마도 저 앞에서 이 금빛이 나오고 있는 듯해요. 앞에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 당신은 제 뒤에서 따라오시고 항상 조심하세요.”

“아, 네.”

시하가 그의 뜻밖의 모습에 조금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중한테 이렇게 신사적인 모습도 있었네.

“고마워요!”

“아미타불, 당연한 거지요.”

제공이 염불을 하며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용오천을 보며 말했다.

“광량, 당신이 앞에서 길을 찾는 것이 어때요?”

“네! 주지 스님.”

허, 신사는 무슨. 자기가 앞에 선다고 하더니. 와! 이게 바로 주지의 진면목인 건가?

그가 그녀의 경멸하는 듯한 눈길을 느꼈는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빈승은 앞과 뒤를 모두 살피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저 웃을 수밖에, 하하.

세 사람이 금빛을 빠져나오는 순간, 마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것처럼 모든 풍경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눈앞에는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하였고, 공기 중에는 각종 꽃향기가 짙게 풍겼다. 하늘에서는 따뜻한 햇볕이 그들을 비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뭔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시하는 뭔가 방을 잘못 찾은 느낌도 들었고 긴장했던 신경들이 갑자기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녀의 귓가에는 잔잔한 배경음악까지 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리샤르 클레데르망의 <별밤의 피아니스트>와 같은 피아노 연주곡 같달까.

그때 제공이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소리. 착각이 아니었구나. 정말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있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