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89)

그때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제공이 말했다.

“이곳은 천도에 속하지 않는 곳이에요. 오늘 유명지해의 봉인이 이미 뚫렸으니 혈막(血幕) 안으로 그동안 봉인되었던 물건들이 흡입되었죠. 그리고 이제 더는 천지오행에 구속되지 않아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퇴색도 거기에 포함된 건가요?”

용오천이 그에게 질문하자 제공이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요. 퇴색도 그중에 하나예요.”

시하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퇴색이니 뭐니 더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아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들은 여기에 왜 들어온 거죠?”

제공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창생지난의 일이 아닙니까. 유명지해를 지키는 것이 저희 가체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시주께서도 세상을 구하려고 이곳까지 들어오셨는데, 저희가 어찌 사람들이 고난받는 모습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창생이요?”

시하가 제진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그것이 창생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나요? 공덕을 위한 것이 아니고요?”

“순풍 동생.”

용오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공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그 친숙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시주께서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요? 저희는 이곳에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왔고, 그 목적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요. 창생을 구하는 일이든 세상을 구하는 공덕이든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있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사람을 구하는 거랑 특별히 찾아와서 사람을 구하는 건 다른 거예요. 제 눈에는 목적은 그냥 목적이고, 출발점은 그냥 출발점이에요. 모르고 저지른 잘못과 계획적으로 저지른 잘못은 확실히 다르죠. 저는 개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럴듯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는 사람을 제일 경멸해요!”

“시주께서는 저의 말을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

“밖에 있는 핏빛 장막 위에 이름이 쓰여 있지도 않은데, 제가 들어오든 말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죠? 이 정도면 시주께서도 할 말 없으시죠? 저희 능력으로는 봉인을 복구할 수 없으니 이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단원 존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에요.”

제공은 엄숙하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하더니 시하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하는 그제야 자신도 후지를 찾아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안은 아주 넓어 보였다. 먼 곳을 바라보니 역시 흑백 두 가지 색깔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풍경조차도 마치 소묘를 그린 것처럼 아주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의외였던 것은 그곳이 마치 경계가 없는 듯 아주 넓은 공간이라는 점. 시하는 길을 몰라 제공의 뒤만 따라갔다. 세 사람이 반나절을 날아다녔지만 단원은커녕 벌레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저기 제공, 아직 얼마나 남은 거죠?”

시하가 참다못해 그에게 묻자 제공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대답했다.

“몰라요.”

“길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길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당당했는데?

그는 도리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빈승도 길은 몰라요!”

“가체사가 이 봉인을 몇천 년이나 지켰다고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그렇죠.”

설마 몇천 년 동안 이곳을 한 번도 들어와 보지 못했다는 건 아니죠?

그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상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소저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봉인이 이미 뚫려 버린 이 유명지해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전의 그 유명지해가 아니었어요. 이 빈승도 방향을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방금 대체 어디로 그렇게 날아다닌 거야? 아, 힘 빠져.

“다른 방법은 없어요?”

시하의 물음에 제공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있긴 있는데, 만약 단원 존상의 영기와 같은 법기나 법인이 있으면 아마도 색령진(索靈陳)을 이용하여 그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색령진! 그건 감춰진 영기를 전문으로 추적하는 진법이잖아.

“소저, 혹시 단원의 영기와 통하는 물품을 갖고 계신가요?”

그녀의 몸에 유일하게 그와 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망할 놈의 도장이었다.

“소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제공이 재촉하자, 시하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제가 시도해 보죠.”

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거니까.

시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영기를 움직이더니 진을 만들었다. 색령진은 아주 간단한 진법이었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진이라 몇 번이나 시도해도 계속해서 실패만 거듭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밝은 법진이 서서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진 안의 영기가 사방으로 확산됐다. 시하가 얼굴에 있는 동심인을 작동시키자 그녀의 얼굴을 절반이나 차지하는 그 망할 놈의 자국이 밝게 빛나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밝은 진법 안에 옅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를 해 놓은 것처럼 그 모양을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위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동쪽이에요!”

그곳에 익숙한 영기가 흘렀다. 시하가 눈을 뜨고 방향을 전환하여 바로 그 동쪽으로 날아갔다. 제공과 용오천도 각각 그녀의 좌측과 우측에서 따라붙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동생.”

“왜요?”

“그 얼굴의 자국은…….”

시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지한 표정으로 둘러대었다.

“이건 단원이 최근에 연구한 방어진법이에요. 수선계의 신상인 거죠. 제가 바로 그 첫 수혜자고요. 알겠어요?”

절대 이것이 그 망할 놈의 도장 자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용오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아. 단원 존상은 당신한테 참 자상하시군요. 그러면 저도…….”

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제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존상께서는 워낙 성품이 담백하신 분인데 이렇게 동심인을 다 펼치실 줄은 몰랐네요. 보아하니 소저는 존상과 아주 각별한 관계인가 봐요!”

이놈의 중도 동심인을 알고 있었네.

“제 오라버니이니까요.”

시하가 얼떨결에 그에게 말하자 제공이 놀라 표정을 굳혔다.

오라버니? 그래서 선검문 사람들이 그녀를 사숙조로 칭한 거였군. 근데 단원 존상에게 언제부터 누이동생이 있었어?

“소저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는…….”

그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름을 묻자 망설이고 있는데, 용오천이 나서서 그녀를 소개했다.

“주지 스님, 이 사람이 바로 제가 말씀드렸던 그 은인이에요. 그녀의 이름은…….”

“시하예요!”

시하가 그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보나마나 택배라고 소개할 텐데 택배는 무슨.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당신 가족한테나 붙여 주라고!

“저는 시하라고 해요.”

제공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재차 물었다.

“시, 뭐라고요? 다시 한 번 얘기해 줄래요?”

“시하라고요. 시간의 시, 춘하추동의 하.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제공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시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그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이었으므로. 설마 우리 오빠를 아는 걸까?

“제공, 당신 혹시…….”

시하가 그에게 자세히 물으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용오천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길 봐요!”

시하가 고개를 돌려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흰색 형체를 바라봤다. 형체는 아주 거대하여 거의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형체의 변두리는 간단하게 검은 선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평면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하늘에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형체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아래로 내려옴과 동시에 원래의 새 울음조차 들리지 않았고 조용하기만 하던 그 공간에 갑자기 뭔가 마찰하는 듯한 소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물건은 미술 도구로 사용하던 그 지우개랑 닮았잖아?

“저기 보세요. 숲이 사라졌어요!”

용오천이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형체가 내려온 곳은 하나의 광활한 지면 세계였지만 그것이 내려오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마치 그 부분만 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지우개잖아!

시하도 이곳이 마치 소묘를 해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지우개로 싹 지워 버릴 수 있는 곳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말 이것이 흑백텔레비전이라면 빨리 채널을 돌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물건이 날아오고 있어요!”

용오천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방금까지도 조용히 내려오던 그 지우개가 갑자기 가속하더니 쓱싹쓱싹 몇 번 움직여 그들 뒤에 있던 흑백 지면을 깨끗하게 닦아 버렸다. 그리고 그 물건이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쳤다.

“어서 도망가요!”

시하는 영기를 움직여 앞을 향해 정신없이 날았고, 다른 두 사람도 힘껏 앞을 향해 검을 부렸다.

뒤에 있던 풍경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지우개가 지나간 곳은 그것이 꽃이든 초목이든, 산이든 내천이든 상관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텅텅 빈 공간으로 변해 갔다.

세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해 검을 부리고 있었다. 사라지는 물건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었고, 그 지우개가 그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 이렇게 이상한 곳이 다 있어? 분명 3차원적인 세계인데 도구는 왜 이렇게 2차원적인 거야?

그때 제공이 앞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저길 보세요.”

앞을 바라보니 우측 하늘가에 황금색 지평선이 나타났다. 황금색!

“저쪽이 출구예요.”

시하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용오천을 부르며 방향을 바꾸어 그쪽으로 날아갔다.

그쪽에 가까워질수록 그 금빛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시하는 그제야 그것이 태양의 빛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이 흑백 세계라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밑으로 희미한 초록색도 비쳤는데, 아마도 그쪽이 이 흑백 세계의 끝인 듯했다.

“어서요. 빨리 나가야 해요. 아니면 저들도 지우개가 모두 닦아 버릴 수 있다고요. 용오, 어, 어딜 갔지?”

그녀의 뒤를 쫓아오던 용오천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그의 수행 계급이 자신과 제공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러니 그가 그들보다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하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뒤를 자세히 살펴보니, 멀리 몇백 미터 밖에 희미한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무시무시한 지우개가 아주 근소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하가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던 길을 되돌아 용오천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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