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89)

용오천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지금 말하기에는 장소가 부적합하다고 느꼈는지 다시 뒤로 물러났다. 보아하니 제진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용오천의 앞에 서 있는 사람도 그와 똑같이 흰옷을 입은 승려였다. 제진이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다면 이 승려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을 만한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가체사는 인물을 보고 사람을 뽑나?

“단원 존상께 인사 올립니다.”

제공이 단원을 향해 예를 갖추더니 시하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차가운 표정을 짓더니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며 제공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차갑기만 하던 그가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러고는 시하를 바라보며 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시하는 주위를 살피다가 바로 아래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존상. 천 년에 한 번 있는 그 천연지일이 이미 이르렀나 봅니다. 오늘 보니 절 안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고, 정생련(淨生蓮)조차 그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마도 이번 천연지일의 폭발이 전과 달리 좀 더 엄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청명 존자의 능력으로 봤을 때에는…….”

“그 일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당신들은 갈 필요 없습니다.”

“존상께서 직접 처리하려고 그러십니까? 빈승, 존상께 감사 인사 먼저 올리겠습니다. 저희가 전력을 다해 도울 테니…….”

“필요 없소, 혼자 가면 되니.”

“그건…….”

제공이 놀라며 말끝을 흐리자, 시하가 호기심을 참다못해 옆에 있는 제자에게 물었다.

“천연지일이 도대체 뭐예요?”

“환해 동쪽에 있는 가체사 부근에 봉인된 해역이 있는데 매번 천 년에 한번 어두운 기운을 폭발하지요. 천지오행과 다른 기운을 형성하여 모든 생령(生靈)들을 멸절시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운이 폭발하는 그날을 바로 천연지일이라고 하죠.”

생령을 멸절시키면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니,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긴장하는 거구나.

그때 제공이 큰 소리로 말했다.

“존상, 제가 재주는 없지만 중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자, 천 년 전에도 봉인하는 일을 도왔던 경험이 있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단원은 여전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방해만 될 겁니다.”

제공은 놀라서 웃음기가 가셨지만 또다시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말했다.

“천연지일은 원래 저희 가체사의 일인데 어떻게 옆에서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음암 기운이 봉인된 곳은 이 빈승만 알고 있지요. 유명지해가 넓어서 존상께서도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유명지해!”

그곳은 오빠가 있는 곳이잖아?

시하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공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지금 봉인이 유명지해에 있다고 했어요?”

“네, 맞습니다.”

“단원, 저…….”

“안 돼요.”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유명지해에는 진법이 많거든요.”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더러 진법 무식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이래 봬도 며칠 동안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고요!

시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원이 일어서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결정하죠. 3일 후, 저 혼자 가겠습니다.”

시하가 그에게 따지려 하던 찰나, 갑자기 지면이 움직이며 대전이 다 흔들거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어서 밖을 보세요!”

대전 밖에 갑자기 커다란 붉은빛이 나타났다. 시하의 마음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이 얘기를 하다 말고 모두 밖으로 나섰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색 빛기둥이 해면 위로 올라와 구름 속까지 솟아 있었다. 붉은색 기둥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높은 곳까지 솟아 있었고 희미하게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누군가의 울부짖음 소리로 매우 날카로웠다. 비록 멀리에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에 고막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시하가 결계를 만들어 귓가를 자극하는 그 소리를 막았다. 돌아서서 보니 옆에 있던 선검문 제자들의 얼굴이 모두 창백해져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호산대진을 열어요!”

제정이 근처에 있던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장로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결인을 시작했다. 순간 투명한 막이 공중에 나타나더니 선검문을 둘러싸 그 소리를 막자, 그제야 사람들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두운 안색으로 두려움에 덜덜 떨며 공중에 있는 그 붉은빛을 바라봤다.

“이게 도대체 뭐죠?”

소리 하나로 사람들을 이렇게 상처 입힐 수 있다니.

그때 제공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가체사가 있는 방향인데, 설마…… 유명지해? 유명지해의 봉인이 뚫린 모양이에요. 아직 천연지일이 이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단원 존자…….”

제공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옆에서 뭔가 반짝하더니 단원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공은 다급히 몸을 돌려 그 붉은빛이 있는 곳을 향해 쫓아갔다.

두 사람이 가고 난 후, 수행 계급이 조금 높은 사람들은 서둘러 붉은빛이 만연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시하도 결인하여 소리를 방어하는 결계를 만든 후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쪽에 가까워질수록 그 붉은빛은 점점 더 커지고 짙어졌다. 전체 하늘이 그 붉은빛으로 뒤덮여 있었고, 희미한 바람 소리도 들렸다. 바람 소리에도 뭔가 귀를 자극하는 듯한 소리가 겹쳐 있었다. 뭔가 원망하는 듯한 소리가 혼재되어 있는 듯했다. 자세히 들으려고 했지만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었고, 마치 여러 귀신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대략 삼십 분쯤 가고 나서야 그 붉은 기둥이 있는 부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붉은 기둥을 멀리에서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아주 넓은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아주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기둥은 계속해서 조금씩 확장되고 있었다. 선홍색의 핏빛을 띠던 기둥이 이번에는 검붉은 색을 띠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려 버렸다.

빛은 계속 확장되고 있었지만 뭔가에 막혔는지 위에서 계속해서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흉악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그 어두운 광막(光幕) 위로 나타났다. 그 충돌로 생겨나는 자국들은 커다란 건물처럼 높기도 했고 작은 바늘처럼 날카롭기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예외 없이 아주 두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도 아닌 모습으로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현대에서 봤던 공포 영화에 나오는 괴물의 모양과 닮은 듯했다.

“저, 저것들은 다 뭐죠?”

사람들 중 한 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모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유명지해.”

제공이 미간을 깊숙이 찌푸리며 앞에 있는 붉은빛을 바라보더니 손으로 합장하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말 유명지해네.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어. 그 상고의 봉인이 정말 뚫리고야 말았어.”

“제공 주지님, 봉인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제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지만, 제공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용없어요. 저희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유명지해 안의 봉인은 삼계(三界, 불계(佛界), 중생계(衆生界), 심계(心界)의 세 가지)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음양오행 간의 요물이 아니고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물건은 없다고 하셨죠. 지금은 봉인이 뚫렸으니 복구한다고 해도 전체 인간계가 그 피해를 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전체 인간계. 그곳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단원은요?”

시하가 묻자 사람들이 놀라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들보다 먼저 출발한 단원이 그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태사조님은 먼저 오시지 않았어요? 근데 왜…….”

“단원 존상은 설마…….”

제공이 눈을 크게 뜨더니 앞에 있는 핏빛 장막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안으로 들어간 걸까요? 하지만 봉인은 이미 뚫렸고, 안에 있는 기운은 생령을 멸절시키는데……! 수행 계급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후지도 위험해! 시하가 생각을 거듭하다가 이를 악물고 바로 검을 부려 안으로 들어갔다.

“택배 동생!”

용오천이 다급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그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광량……!”

제공이 그를 막으려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길게 염불만 외웠다.

“아미타불, 내가 지옥으로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으로 갈까.”

그러다 그도 뒤따라 핏빛이 감도는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시하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귓가에 뭔가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모든 색깔이 흘러서 없어지듯, 시하의 눈앞에 핏빛을 비롯한 황색, 녹색, 청색, 파란색, 자주색 등의 모든 색깔이 사라졌다.

왜 모든 색이 다 사라지고 이 안은 흑백인 거지? 내가 입은 옷마저 회색빛으로 변했잖아?

시하가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붉은색의 화석을 꺼내 보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회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천연색을 내고 있던 텔레비전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한 듯한 느낌이었다. 옆에 있는 화초들마저 회색빛을 내고 있었지만 조금 짙은 회색과 옅은 회색으로 구분될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세계를 이어주는 배선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잠시 후, 용오천도 다급한 표정으로 핏빛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순풍 동생, 당신……!”

그러나 그 역시 말을 마치지 못하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 졌다.

“당신, 얼굴에 왜 색이 없는 거죠? 왜 이렇게 퇴색된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왜 이렇게 퇴색됐는데요?”

그가 놀란 표정으로 제 몸을 살피더니 더욱 놀란 얼굴로 시하에게 말했다.

“저, 저는 왜 당신이랑 똑같이 퇴색된 거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살펴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혹시…….”

“설마 제가 전염시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랬다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용오천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전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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