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89)

시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하얗게 비어 있던 시하의 머릿속에 서서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란 병아리!”

시하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다 침대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오른쪽에 있는 그 흰옷의 인영은 아주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후지?”

그 순간 그동안의 억울한 감정들이 북받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서인지 시하가 반가운 마음에 코를 훌쩍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후지를 안았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옆에서 희미하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고, 시하의 품에 안긴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잠시 후 조금씩 움직였다.

“오라버니! 저 죽을 뻔했다고요! 대체 어디로 갔던 거예요? 절 지켜준다면서요!”

시하가 원망하듯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온몸이 눈물로 범벅되었다.

“맞아. 병아리! 제 옆에 있던 그 봉황은요? 그 병아리처럼 생긴 거요.”

그때 파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놀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 영수를 말하는 거예요? 그게 봉황이라고요? 소저, 급할 것 없어요. 사부님이 이미 익령지(益靈池)에 넣었으니까. 그가 내단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익령지가 그의 몸에서 영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잠시 막아줄 수 있을 거예요.”

시하가 그제야 안심하고 눈앞에 있는 청년을 훑어보았다. 후지가 언제 이런 덩치 큰 제자를 또 거둔 거지?

“그럼 지금 어떤 상태인 거죠?”

“생명의 위협은 없는 상태예요. 당분간은 깨어나기 어렵겠지만.”

시하가 걱정스러워 후지를 붙잡고 물었다.

“후지, 그의 내단을 복구할 방법은 없을까요?”

후지가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있죠.”

“정말이에요? 어떻게요?”

그때 옆에 있던 파란 옷의 남자가 다급히 뭔가 말하려 했다.

“사부님.”

그러나 후지가 얼굴을 찌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한테 질문 하나만 할게요.”

“무슨 질문이요?”

그가 미간을 깊숙이 찌푸리며 그녀를 아래위로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예요?”

단원(笪源)은 그가 환해에서 데려온 이 여수사가 어딘가 좀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수행 계급이 그보다 많이 낮았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도겁기의 수사이고, 옆에 신족인 봉황까지 있었다. 아래 세계에서 이런 사람을 대적할 적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고 옆에 있던 신수는 내단이 사라진 뒤였다. 도대체 얼마나 미련했으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걸까?

게다가 그녀의 몸에 그와 연결되어 있는 동심인(同心印)이 새겨져 있었다. 혼계(魂契)는 인을 받은 사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그 인이 더욱 발동하여 시술자(施述者)의 몸으로까지 전달된다. 술법은 그 시술자 본인이 직접 심는 것이지만 그는 자기가 그런 법술을 심었는지조차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의혹을 떨치지 못해 그녀를 아예 염하봉(拈霞峰)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그녀의 상처를 살피면서 그제야 그녀의 영기가 모두 고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순간적으로 모든 영력을 모두 쏟아부은 듯한 모습으로 신식이 망가져 있었다. 그녀의 영근까지 모두 옆으로 무너져 있었기에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그녀가 경맥으로 영기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원래는 조금만 치료하고 나서 그녀가 깨어나면 자세한 상황을 물으려 했으나, 계속해서 치료를 하느라 훌쩍 날이 새어 버렸다.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어 수행 계급도 안정을 회복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던 그 봉황도 익영지에 던져 넣었다. 제자 청명(淸茗)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막 꺼내려던 환혼단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오랫동안 사람을 구해보지 않아서 조금 생소했을 뿐이야. 절대 이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닐 거야.

3일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녀가 자신을 생소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후지가 누구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그녀가 너무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설마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도 있는 건가?

“저의 이름은 단원입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소개를 해 버렸다.

“……네? 후, 후지. 날 놀리지 마요. 전 시하예요. 당신의 누이 시하요. 장난치지 마요! 기억상실증 뭐 그런 건 이미 유행도 지난 건데!”

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저는 단원이에요.”

시하가 한참 멍하니 있더니 웃음기가 싹 가신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순간 시하는 마치 서리 맞은 가지처럼 온몸이 축 처졌다.

“당신, 정말 저를 몰라요?”

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 얼음 같은 얼굴 위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근데 당신 몸에 어떻게 동심인이 있는 거죠?”

“동심인? 무슨 동심인이요?”

그가 결계를 이용하여 수경(水鏡, 물을 거울에 비겨 이르는 말)을 만들어 내더니 다시 소매를 휘저었다. 흰색의 복잡하게 생긴 인기(印記)가 그녀의 오른쪽 볼 위에 나타났다.

“이 거북이는 대체 누가 그린 거죠?”

후지가 기억을 잃었다니, 시하가 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겉모습만 똑같고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후지는 겉보기에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속은 따뜻한 반면, 단원은 온전히 냉정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시하는 단원이 후지의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은 아닌지 의심했지만 002호가 그를 스캔한 후 확실히 답해주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그 냉정한 사람은 바로 후지라고.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있는 그 거북이도 후지가 전에 그려놓은 것이라고 했다. 전에는 그가 볼을 만지는 걸 그저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무의식적인 작은 행동들은 사실 그녀 몰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숨겨진 그림이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호구 오라버니에게 화가 났다. 다른 곳은 다 놔두고 왜 하필 얼굴에 그림을 그려?

시하는 누구라도 끌어내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기억을 완전히 잃은 채 차갑게 서 있는 그 원흉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열받아! 시하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가 당신을 의매(義妹, 의로 맺은 여동생)로 인정했다는 건가요? 그것도 제가 먼저요?”

단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마도 시간상 차이는 있을 거예요. 저희가 이 대륙으로 전송되면서 흩어졌으니까 당신은 저보다 천 년 정도 앞서 있을 거예요.”

그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렸다.

“옥화파의 제자 필홍은 기억 안 나요?”

“됐어요.”

단원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기색도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자신의 내력을 폭로하기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을게요. 그리고 이 동심인은 제가 알아서 풀어 볼게요.”

“저를 믿지 않는 거예요?”

시하는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마음이 시큰거렸다.

“만 년 동안 수행을 하면서 지나간 일에 대해 모두 기억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의매를 거두거나 동심인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아요.”

“만 년이요? 당신이 이곳에 온 지 벌써 만 년이나 되었다고요?”

이건 내가 들었던 거랑 다르잖아. 002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띵!

[[002] 대상에 따라 전송에 오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차는 무슨! 오차가 커도 너무 크잖아. 저 사람은 왜 기억까지 잃은 거야?

시하가 참다못해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제 말을 들어봐요. 저는 시간의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난 줄 몰랐어요. 하지만 전 정말 당신의 누이가 맞아요!”

단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하에게 잡힌 자신의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차가워진 그가 다른 손을 펴서 자신의 팔뚝을 위아래로 훑었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네요. 내일 다시 와서 주문을 풀어줄게요.”

그가 말을 마치고 바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하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밖으로 나가는 인영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쳤다.

“오라버니!”

밖으로 나가던 하얀 인영이 잠깐 멈칫하더니 더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하가 참다못해 달려가 그를 막아섰다.

“잠깐만요!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가 드디어 멈추더니 차갑게 한 마디를 했다.

“네.”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막아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시하가 마음에 통증을 느끼며 옆으로 물러나 그가 가던 길을 마저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가 발을 옮기려는 순간 또다시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가 차가운 눈길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얼굴에 분노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시하가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용솟음치는 감정들을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병아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 건 사실인가요?”

“네.”

“그럼, 제가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그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진 걸 보고 시하가 뒤에 바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연히 동심인을 푼 다음에요.”

“하지만…….”

“고마워요.”

시하가 그의 손을 풀어주자 그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잠깐만요!”

“또 무슨 일이죠?”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거긴 절벽, 그쪽엔 길이 없어요.”

그 흰 인영이 잠깐 멈칫하더니, 바로 방향을 바꿔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가 도망가듯 황급히 그곳을 떠나 버렸다.

시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002호의 말에 의하면 공간 이동은 각 개인마다 다른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때문에 용오천과 초오도 그녀와 천 년의 차이가 있었고, 후지는 그보다 더 터무니없는 만 년이라는 시차가 발생한 것이고 게다가 기억까지 잃었다. 역요괘는 대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80도로 변한 후지의 태도에 시하는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마치 길가의 돌멩이 보듯 냉담했다. 시하는 마음이 답답해 단원이 정말 후지가 아닐 수 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시차를 생각하며 또다시 냉정을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용오천도 변했는데 후지가 기억을 잃은 것도 어떻게 보면 아주 정상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라버니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하는 기회를 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결심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억해 낼 거야. 시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사람도 이미 찾았으니 천천히 진행하기로 하고 우선 병아리부터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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