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는 그 정원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 그들이 비경을 나오던 당일, 영악파는 산의 문을 닫고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시하는 문파 전체에 긴장감이 가득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언제쯤 찾아와 상황을 물을까 생각하는데 기다리던 영악파의 사람들은 오지 않고 유유가 그녀를 찾아왔다.
“언니. 저희 사부님이 언니를 뵙고 싶대요.”
어라? 유유의 사부님이? 그 대단한 범천 존자가? 그 사람이 왜 나를 찾는 거지?
사하가 마음속에 의심을 안고 유유를 따라 주봉(主峰) 뒤에 떠 있는 한 봉우리 위로 날아올랐다.
영악파에서 범천 존자에게 배정해준 방은 역시나 고급스럽기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기가 넘쳐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꽃밭이며 연못, 작은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까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길가에 자라고 있는 풀조차도 영초였다. 그녀가 묵고 있는 작은 정원에 비하면 완전히 최고급 호화 주택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원의 면적도 엄청 넓어서 그녀는 유유를 따라 오래 날아서야 건물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건물을 보는 순간 현대의 호화 주택을 보는 듯했다.
“언니.”
유유가 짙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희 그냥 가지 말까요? 사부님께는 언니가 이미 산을 내려갔다고 말할게요.”
“왜?”
“언니. 저의 사부님은 사람이 아주…….”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더니 적당한 단어를 찾았는지 입을 열었다.
“특별해요!”
“사람을 먹어?”
“그건 아니에요.”
“아, 그럼 걱정하지 마.”
“언니는 몰라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듯한데……. 아니면 저랑 같이 가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더니 시하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응?”
시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뒤에서 문이 열렸다. 뭔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문소리였다.
“왔으면 어서 들어와라.”
“네.”
유유가 얼굴 가득 후회하는 표정을 짓고는 시하를 데리고 앞으로 다가갔다.
“유유, 너는 들어올 필요 없다. 뒤뜰에 가서 청란을 좀 살피거라.”
“사부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얘기 잘하고 있을 테니까.”
유유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걱정되는 표정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내키지 않는 듯 포권을 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시하도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사람을 먹는 건 아니겠지?
시하가 짙은 안개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갈한 모습의 대나무 다락집이 보였다. 영하(靈荷)가 가득 심겨 있어 공기 중에도 옅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 제자가 성격이 매우 냉담한 편인데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시하가 그제야 연못 옆에 있는 돌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꽃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더군다나 범접할 수 없는 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얼굴은 유유만큼 빼어나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풍기고 있는 그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존자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요. 당신이 유유가 말한 그 하 언니?”
“아. 네!”
사실 내 성은 ‘시’인데 유유가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저도 굳이 고쳐주기는 귀찮아서요.
“흥, 또 언니네. 걔는 한 번 당하면 그만이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원. 수선계에 들어왔으면 원래 가족 간의 인연은 끊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으니.”
범천 존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탄하더니 시하에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오늘 당신을 부른 것은 당신이 누구든 유유는 저 범천의 제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감히 다른 속셈이 있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차가운 위압이 시하를 향해 몰려왔다.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두려워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내가 유유를 잘못 가르칠까 봐 위협하는 건가? 이제 보니 이 사부는 유유를 끔찍하게 아끼는 모양이로군.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유는 앞으로 크게 성공할 저의 제자예요. 저는 그 애가 지난번처럼 형제자매라는 명목으로 다시는 그런 음모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형제자매? 시하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헌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도 이 대륙으로 왔어요?”
“당신도 그 사람을 알아요? 당시에 그가 구구절절 매달리고 유유의 오라버니라고 해서 같이 데리고 왔는데, 심술을 부리는 데다가 마도(魔道)에 들어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헌림이 마도를 배웠다고?
“저는 유유가 가족의 연을 중시하는 걸 반대하지만 당신에 대한 신임이 지극해서요. 당신은 헌림처럼 심법 따위 때문에 자신의 여동생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길 바라요.”
세상에, 헌림 이 나쁜 놈 더 비뚤어졌네! 잠깐!
“심법이요? 설마 음살결(音殺訣)은 아니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심법은 제가 유유한테 준 거예요.”
시하가 습관적으로 반지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여기 ‘천강술(天降術)’, ‘영롱결(玲瓏訣)’, ‘천진술(天辰術)’, ‘청심결(淸心訣)’. 당신도 하나 드릴까요?”
순식간에 그곳에 적막감이 흘렀다. 범천이 한참 말없이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제 생각이 짧았네요.”
“하하, 됐어요.”
“이제 비경에서 있었던 일이나 얘기하는 게 어때요? 유유의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하게 물을 참이었거든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요?”
시하가 바로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모두 이야기했다. 미션에 관해서는 숨기고 적당히 에둘러서. 시하의 말을 듣고 있던 범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곽명이 제 이름을 빌려 유유의 법기를 빼앗으려 했다고요? 당신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고?”
“네.”
“나쁜 놈!”
범천이 손으로 돌 탁상을 내리치자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려?”
차갑고 고고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치 불을 붙인 폭죽처럼 범천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서 그놈을 혼내 줘야겠어요!”
“그는 이미 혼났는데요? 안 그래도 지금 숨이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예요. 꼭 그를 혼내셔야겠어요?”
“그럼 지금 가서 죽여 버려야겠어요!”
“이봐요. 저기…….”
“당신 아주 맘에 드는데, 같이 가서 죽일까요? 같이 가서 반씩 맡아요. 조금 있으면 주봉에 사람이 많아져서 손쓰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유유가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서 제일 먼저 걱정되었던 것은 천의맹에서 영악파에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닌지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오히려 영악파에서 천의맹을 찾아가 책임을 묻게 되었다. 천의맹의 장로라는 사람이 영악파의 비경으로 들어와, 그것도 다른 문파의 제자를 해하는 일을 꾸민 사실은 누가 봐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증인도 물증도 확보되어 있었고, 각 파에서 직접 목격했으니 인심은 모두 영악파로 쏠리게 되어 있었다.
현기는 상대에게 강하게 나가기로 결단하고 각 파의 명망 있는 장로들을 데려와 증인으로 나서도록 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중상을 입은 곽명을 데리고 천의맹으로 찾아갔다.
시하는 처음부터 영악파에서 언제든 그녀를 찾아와 일의 진상을 물을 것이 두려웠다. 비경이 무너졌다는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비경은 영악파의 사유 재산이었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조금은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하도 황당하여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비경을 무너뜨렸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그녀를 병자 취급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이 너무 많아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거짓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5일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영악파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얘기하자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시하가 그곳에 있는 것조차 잊고 있는 듯했다.
곽명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상처가 너무 깊은 탓인지 아니면 영악파에서 그가 일어나기를 아예 바라지 않기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시하는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산의 문은 이미 열렸으니 이제 돌아가도 된다고 통지했다. 시하는 아직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났다고? 정말 나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괜히 실망감이 드는 건 또 뭐지?
“저기, 정말 저 그냥 가도 되는 거예요?”
시하가 참다못해 통지하러 찾아온 제자에게 반복하여 확인했다. 그 제자가 아래위로 시하를 살피더니 말했다.
“설마 아직 또 무슨 일이 있어요?”
그는 자신의 문파에 무슨 볼일이라도 남아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시하를 바라봤다.
“아, 아니에요.”
안 되겠어. 진 어린이의 손을 잡고 얼른 하산해야겠어. 어서 도망가야지! 귀찮은 일이 하나 줄어들고 나니 시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매, 급히 돌아가야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
진이 고개를 돌려 급히 칼을 부리는 시하를 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유유는 어제 이미 이별 인사를 하고 범천 존자와 함께 천의맹을 찾아갔다. 유명지해의 일은 비경을 나온 날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해역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어떻게든 그곳을 찾아가고 싶어 시하는 범천 존자에게 물었지만, 범천 존자는 그곳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어도 환해 밖의 어느 지역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무래도 환해 가까이에 있는 문파에 찾아가 봐야만 그곳을 자세히 알 수 있을 듯했다.
공교롭게도 청운파는 바로 환해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하는 얼른 돌아가 별로 미덥지 않은 ‘교장’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얼른 오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야 돼.
“집으로 돌아간다고요? 뭐, 문파는 확실히 저희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시하는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뭔가 떠올라 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저번에 네가 나한테 준 주머니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마워. 자, 돌려줄게!”
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앗 뜨거워!”
그가 손을 떠는 바람에 주머니가 아래로 떨어졌다. 시하가 바로 검을 날려 주머니가 땅에 닿기 전에 받아 들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뜨겁다고?”
시하가 주머니를 만져 보았지만 차갑기만 했다. 시하가 빨갛게 달아오른 진의 손을 보며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보시시한 작은 머리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삐약.”
“노란 병아리!”
얘가 어떻게 이 안에 있는 거지? 노란 병아리는 흥분하여 동그란 눈을 반짝이더니 그녀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