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하(夏), 하(夏)?”
“응.”
“하(夏), 하(夏)!”
“오빠, 나야.”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하(夏夏), 어떻게 네가? 네가 2호 집행자야? 너도 여기로 온 거야?”
“그런 것 같아.”
“내가 이놈의 시스템을 박살내고 말 테야!”
역시 오빠였어. 이제야 연락할 수 있게 됐네. 시하는 마음이 그제야 조금 놓이는 듯했다.
“오빠, 지금 어디야?”
그가 갑자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안 돼. 하하(夏夏). 너 절대로 여기로 오면 안 돼. 나는 지금…….”
“왜? 오빠, 오빠?”
소리가 끊긴 듯해 시하가 알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시 예전의 그 황금색 무늬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와! 하필이면 이 중요한 순간에 끊기네. 시간이 2분밖에 없다고 했던 건 통화 시간이었던 걸까? 너무 정확한 거 아냐? 초 단위로 통화료를 계산해?
시하가 알을 자세히 연구해보았지만 알에는 번호를 누를 수 있는 다이얼이나 충전 기능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오빠가 유명지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에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시하는 그곳으로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비경을 나가는 문이 열렸다. 시하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당신 이렇게 그냥 갈 수는 없어요.”
고개를 돌려 보니 알 위에 갑자기 자색의 화염이 떠올랐다.
“화영! 당신 어쩌다가 알 속으로 들어간 거죠?”
어쩐지 갑자기 왜 안 보이나 했어.
“저는 원래 주인이 만들어 내는 이화를 통해 살아요. 근데 제가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뭐가 그렇게 이상하죠?”
“당신의 주인이 이 알이라고요? 이건 도대체 무슨 영수죠?”
원기도 막고, 통화도 할 수 있고, 게다가 이화까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영수라니 이런 영수는 처음 보는데.
“제 주인님은 영수와 같은 그런 하찮은 물건이 아니에요. 그녀는 봉족(鳳族) 중에 가장 고귀한 홍련화봉(紅蓮花鳳), 염봉(炎鳳)이에요. 영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고요.”
“봉황!”
시하가 놀라며 소리쳤다. 설마 아니겠지? 이 안에 신족(神族)이 누워 있다고?
“그럼 누가 감히 원화(源火)를 명해 음부의 원기를 막을 수 있죠?”
화영이 자랑스럽게 화염을 흔들며 말하고는 뭔가 떠오른 듯 다급히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음부의 균열이 봉인되었으니 주인님이 더 이상 원기를 누르고 있을 필요 없어요. 이제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죠. 하지만 봉족이 껍질을 깨고 나오기는 아주 어려워요. 주인님이 가지고 있는 몸의 속성과 다른 뭔가가 도와줘야 해요. 순수한 영력이라야만 이 알을 부화시킬 수 있는데……. 혹시 주인님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저보고 이 알을 부화시키라고요?”
“네, 네. 주인님은 신족이라서 만약 당신이 주인님을 부화시키면 반드시 보상하실 거예요.”
“보답은 필요 없어요. 그가 원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막고 있었으니 고생할 만도 하네요. 영력을 조금 주는 건 별거 아니에요.”
시하가 바닥에 있는 알을 안았다. 양란지가 자신의 심두혈을 떨어뜨렸는데도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신족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일반 수사를 주인으로 인정하겠어.
시하가 영력을 손으로 집중시키고 안으로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색 무늬가 밝게 빛나더니 점점 더 밝아졌고, 알이 조금씩 움직였다. 시하가 바로 알을 내려놓고 자세히 바라봤다.
이건 전설 속에서나 들어보던 그 봉황이잖아! 어떻게 생겼을까?
잠시 후, 퍽 소리와 함께 알의 겉면이 열리더니 산산이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껍질이 나타났다.
“안에 왜 껍질이 더 있는 거지?”
껍질이 조금 작아진 것 말고는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화영도 이런 상황은 뜻밖이었는지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곳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봉족은 원래 후손을 아끼는 성향이 강해서 다른 알들과 달라요. 아마도 정상일 거예요!”
어디가 정상이라는 거지? 알이 이렇게 개성이 강한 줄 다른 영수들은 알고 있는 걸까? 시하가 다시 영기를 안으로 전달하자 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소리와 함께 두 번째 껍질이 열렸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껍질이 나타났다.
다시 영력을 전달하여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껍질을 벗기고 그 다음 껍질을 발견했다. 젠장! 이건 알을 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수(神獸)의 옷을 벗기는 거잖아?
“화영! 저한테 장난친 거 아니죠?”
이제 여덟 번째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사람 키만큼 거대하던 알이 이미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변해 있었고, 영력도 이제 바닥을 보였다. 이제 그만 나오면 안 될까?
“이번, 이번엔 나올 거예요.”
화영이 자신 없이 말하자 시하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영력을 안으로 전달했다.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집어치울 거야. 그러나 드디어 이번에는 뭔가 다른 듯했다. 퍽 소리와 함께 갈라진 틈으로 붉은 털이 나타났다. 시하가 긴장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껍질이 완전히 열리고 안에서 노란 털이 난 병아리가 기어 나왔다. 화봉이라며?
“주인님!”
화영이 흥분하며 그쪽으로 날아가자, 그의 화염이 갑자기 노랗게 되었다.
“이게 정말 홍련화봉이에요?”
어딜 봐서 홍련인 거지? 꼬리에 붉은 털이 있는 것 빼고는 전부 노란색 털인데?
“당연하죠. 화봉은 봉족 중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제일 아름다운 봉황이에요!”
신수계(神獸界)의 기준은 정말 알 수가 없어!
“됐어요. 부화시켰으니 이제 괜찮은 거죠?”
“네, 주인님은 아직 유봉(幼鳳, 어린 봉황)이라 밖은 너무 위험해요. 여기가 원래 주인님의 공간이어서 화영기만 충분하면 계속 여기에 있는 것이 제일 좋겠어요.”
이제 보니 여기가 병아리의 공간이었네. 어쩐지 계속 줄어들기만 하고 붕괴되지는 않는다 했어.
“삐약, 삐약, 삐약!”
노란 병아리가 드디어 알 밖으로 기어 나오다니 눈을 크게 뜨고는 시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낮게 지저귀었다.
“삐약!”
작은 발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듯했다. 그런데 발을 헛디뎌 높게 쌓인 껍질 무더기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시하가 참다못해 손으로 그가 계속 굴러 내려가지 않게 막아주었다.
“삐약!”
노란 병아리가 어리둥절해하더니 머리를 그녀의 손에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시하가 그를 안아 올려 쌓여 있는 껍질 안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털을 어루만져주었다. 화영에 비하면 아주 약삭빠르고 귀여운 듯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안한 모습으로 지저귀더니 다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시하가 몸을 일으켜 그 밝은 빛이 비치고 있는 출구로 걸어갔다. 시하가 막 출구를 나서려는데 뭔가 그녀의 발에 부딪쳤다. 그것은 몸이 공처럼 말린 병아리였다.
“삐약.”
그가 고개를 들더니 다시 부드럽게 지저귀었다. 또 굴러온 거야? 시하가 다시 그를 안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시하가 돌아서자 그가 다시 데굴데굴 굴러왔다.
나한테 들러붙는 건가? 조류들이 알에서 깨어난 후 제일 처음 보는 사람을 자신의 어미로 착각한단 말은 들었지만, 설마 봉황도 그런 걸까? 시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오면 안 돼!”
이렇게 작은 신수를 혹시 다른 사람들이 빼앗으려고 해도 금단 수사인 시하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었다.
“삐약.”
“안 돼!”
“삐약…….”
힘이 빠진 병아리가 작은 발로 조용히 시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시하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돌아서서 출구를 나오려는데, 뒤에서 병아리의 불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 악, 삐, 악.”
* * *
영악파의 장문 현기는 요즘 아주 우울한 상태였다. 영악파의 가장으로서 문파를 빛내는 건 그의 책임이었다. 때문에 그는 항상 기회만 있으면 문파의 실력을 뽐내려고 노력했고, 대비의 상으로 문파에서 사유하던 비경도 아낌없이 열어주었다. 사실 이번 여행을 통해 영악파의 명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어 버렸다.
멀쩡하던 비경이 갑자기 무너진 것이다. 비록 사상자가 나오진 않았지만 비경을 여는 데 꼭 필요한 문파의 보물 옥무우가 부서져 버렸다. 이건 앞으로 다시는 아무도 그 비경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현기는 가슴에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도 왜 비경이 무너졌는지 그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한 명 한 명 걸어 나오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무슨 핑계로 각 문파의 제자들을 붙잡아 놓고 심문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비경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생각지도 못한 뜻밖에 인물이 튕겨 나왔다.
다른 제자들이 멀쩡한 것에 비해 이 사람은 상처가 깊은 듯했다. 현기가 자세히 그를 살펴보다가 그의 소매에 수놓인 도안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곳에 있던 다른 문파의 장로들을 살펴보니 그들도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매에 수놓인 그림은 천의맹의 표기였다. 그것도 금색이면 장로들이나 받을 수 있다는 것. 천의맹의 장로가 언제 안으로 들어갔지? 상처가 말이 아니었으니 현기는 혼란스러웠다.
천택대륙에 수선문파가 많지만 실력으로나 자질로나 진정한 우두머리는 이들 일류 선문이 아니라 바로 사대세가를 잡고 있는 천의맹이었다. 지금 이 사람이 갑자기 영악파에 나타나 그것도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었으니, 혹시라도 상대 문파에서 책임이라도 묻는다면…….
현기가 몸을 덜덜 떨다가 망설이지 않고 음모를 꾸미기로 결심하고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짰다. 이게 설마 처음부터 천의맹이 꾸민 음모는 아니겠지? 그는 생각할수록 불안해져, 눈앞에 늘어선 제자들을 돌볼 여력도 없이 형식적으로 몇 마디 건네고는 대전당으로 돌아가 영악파 고위층 회의를 소집했다.
시하가 머릿속에 비경에 들어가 그 특수 체질을 망가뜨린 경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뜻밖에도 광장은 텅텅 비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를 맞으러 온 진 어린이뿐이었다. 진이 그녀에게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왜 아무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거지?”
“당신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알아도 말 못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시하가 코에 묻은 먼지를 문지르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삼켜 버렸다.
그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도 병이야. 치료받아야 돼!
“아, 그리고 혹시 하옥심. 그 빙선자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그는 범천 존자의 제자니까 당연히 그녀의 사부와 돌아왔겠죠.”
진은 오직 시하를 데리고 오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다. 맞아, 유유에게는 대단한 사부가 있었지. 시하가 진의 손을 잡고 그들이 원래 있던 작은 정원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