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천리 밖의 영봉(靈峰). 눈같이 하얀 인영이 만년설이 깃든 듯한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손에 화상 흔적이 나타났다. 이건 동심인(同心印)이 만들어 내는 그 흔적?
시하가 아래위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몸에는 아무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석인의 공격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 건가?
“이건 말도 안 돼!”
석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화공이 화허기의 수사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일개 금단기의 수사가 그의 공격에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언니!”
유유가 날아오면서 아래위로 시하의 몸을 살피고는 무사한 걸 확인하더니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고 방금 일을 떠올린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풍영기를 물밀 듯이 뿜어냈다.
시하가 말릴 새도 없이 유유의 몸은 이미 석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진공청소기처럼 바닥에 있던 용암을 깨끗하게 빨아들였다.
용암의 지원이 끊긴 석인은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그도 이 엄청난 장면에 기가 눌렸는지 말을 더듬었다.
“당, 당신 뭐 하려는 거지?”
유유의 몸에서 밝은 빛줄기가 새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구리종 하나를 만들어 냈다. 바로 검의였기에 시하가 흥분하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유유가 이렇게 대단한 검의를 갖고 있다니.
“감히 우리 언니에게 상처를 입혀?”
유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몸을 날리더니 거대한 검의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거대한 종을 석인에게 떨어뜨렸다.
이렇게 큰 종이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거였어? 이건 대체 무슨 검의인 거지?
중요한 것은 정말 효력이 있다는 점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람 살려! 내가 잘못했어!”
석인이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허둥지둥 도망가려고 했지만, 완전히 폭력적으로 변신한 유유는 계속해서 종을 석인에게 던졌다. 종이 튕기면 다시 던지고를 반복하면서 리듬감 있게 공격하고 있었다.
“누가 우리 언니를 때리라고 했어? 감히 우리 언니를 괴롭혀? 네 몸을 반신불수로 만들지 못하면 내가 오늘 성을 간다!”
유유는 석인을 따라다니며 공격했다.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화석으로 만들어진 석인의 몸이 유유의 공격으로 거의 산산조각이 났다. 시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귀엽고 연약하게만 보이던 소녀가 갑자기 폭군처럼 변해 있지 않은가.
석인은 유유의 공격으로 키가 일 미터도 안 되는 난쟁이가 되었고, 떨어져 나간 돌무더기처럼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그제야 화가 잔뜩 났던 유유의 표정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유유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시하를 불렀다.
“언니.”
시하가 조용히 검지를 치켜세웠다.
“잘했어!”
유유가 시하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언니, 괜찮아요? 깜짝 놀랐잖아요.”
깜짝 놀란 건 네가 아니라 그 석인일 거야. 저기 봐봐, 쟤 놀라서 울고 있잖아.
돌무더기 사이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희미한 자색 등불이 뿜어져 나와 불꽃처럼 여기저기 흩날렸다. 그의 울음소리가 하도 구슬퍼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화영(火靈)?”
시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석인의 몸은 화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화(異火)와의 교합이 있어야만 생성될 수 있는 영지(靈智), 그렇게 생성된 것을 화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화 자체를 만나기도 어려웠기에 화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앙, 내가 진귀한 화영인 걸 알면서도 감히 나를 괴롭히다니! 난 당신들을 그저 놀라게 하려고만 한 거라고!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내가 어렵게 만든 몸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당신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나쁜 사람들, 와아아앙!”
“그만 울어요. 당신이 먼저 위협해 놓고 왜 저희를 탓하는 거죠?”
“상관없어! 나는 화영이라고,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고, 나는 그런 특권을 가졌단 말이야! 내 몸을 돌려놔! 내 몸을 돌려놓으라고!”
그가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어린애처럼 소리쳤다. 시하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유유는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닥쳐!”
화영이 울음을 멈추니 두 덩어리의 화염도 촛불만큼 희미해졌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하듯 말했다.
“그렇잖아요. 제 몸은 대인(大人)님이 주신 것이고, 천 년 동안 영기를 모아 이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 모두 망가졌잖아요!”
시하가 입을 삐쭉 내밀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무서우면, 애초에 왜 나와서 날뛴 건데요!”
시하의 대꾸에 화영은 굽신거리던 태도를 바꾸고 화염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대인님의 얼굴을 봐서, 이 어른이 너희처럼 맘 좁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이만 가 보도록 해!”
화영이 몸을 흔들더니 몸속에서 파란 화염을 뿜어내며 뒤에 있는 석벽으로 날아갔다. 화석으로 가득하던 석벽이 서서히 열리더니 세 개의 입구가 나타났다.
“중간에 있는 저 입구로 들어가면 지면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어서 가. 난 계속해서 몸을 이어 붙여야 하니까.”
시하가 동굴 입구들을 자세히 살피는데 유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니, 그냥 이렇게 놓아줘도 돼요?”
“화영은 원래부터 영기로 만들어진 몸이라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아. 우리가 저 화영을 만들어 낸 이화를 찾아내지 않는 한 화영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유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에 있는 화영을 노려보더니 시하를 따라 세 개의 동굴이 있는 쪽으로 날아올랐다.
시하는 우선 중간에 있는 입구를 살펴봤다. 동굴의 출구가 위에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위로 통로가 뚫려 있는 듯했다. 다시 우측에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입구를 살펴보니, 그 출구는 아래로 뻗어 있었다.
시하가 자세히 출구를 살피는데 화영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긴 뭘 봐. 중간에 있는 게 출구라니까? 그냥 들어가면 되잖아! 이걸 봐서 뭐 할 건데.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세 개의 방이 없어서 나도 영석을 감춰두지 못하고 있다고. 한 개도 없다고!”
안에 있는 세 개의 방에 영석이 있나 보지?
자신의 비밀이 누설된 걸 알고 화영이 당황했다. 원래는 그냥 자색이던 화염이 갑자기 짙게 변하더니 그가 격분하며 말했다.
“어서, 어서 가. 빨리 여기서 나가라고! 겁주는 건 아닌데 여기에는 엄청 무시무시한 물건들이 있어. 범인들은 물론이고 선계의 사람들도 그건 막지 못할걸! 난, 난 너희를 생각해서 얘기해주는 거야!”
시하가 마음속으로 그의 지능을 위로하고 길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긴장할 거 없어요. 영석이니 뭐니 그런 거엔 관심도 없으니까. 시하와 유유가 몸을 돌려 좌측에 있는 통로로 들어가려 했다. 화영이 더욱 놀라며 등불이 흔들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왜, 왜 여기로 들어가려는 거지?”
“당신이 특별히 콕 찍어서 중간에 있는 것이 출구라고 얘기해줬고, 아쉽게도 그 우측에는 영석이 있는 세 개의 방이 있다고 알려줬고, 근데 좌측에 있는 통로는 어디로 통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바보라도 저 좌측에 있는 통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겠어요?”
게다가 시하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가 명확하게 좌측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하는 그의 안내가 필요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서기가 더 어렵겠어.
“들어갈 수 없어! 안에 있는 물건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어서 돌아가.”
시하는 이 안에 그녀가 복구해야 할 물건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저희가 반드시 들어가야겠다고 하면요?”
화영의 화염이 갑자기 무섭게 솟아오르더니 다시 자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결계 너머까지 느껴졌다.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면 내 시체를 밟고 들어가야 할 거야!”
당신 몸은 이미 부서진 거 아니었어? 시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지 속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상 등급 영석을 꺼내 그에게 던져줬다.
정의에 불타 있던 화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길을 막는 일은 잊은 채 바로 영석을 향해 다가갔다. 공중에 하얀 포물선을 만들며 몸을 날리더니 영석을 끌어안았다. 역시 갓 생성된 영지의 영체는 영석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었다. 화영의 태도가 180도로 전환되었다.
“오오오, 이건 상 등급 영석! 두 분은 어디로 가시려는 거죠? 분부만 하세요. 이 산과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요. 맛있어, 맛있어! 대인님, 또 있어요?”
방금 전의 그 절개는 어딜 간 거야.
“여기 안에 있는 것이 대체 뭐죠?”
시하가 통로 안을 가리키며 묻자 화영이 영석을 씹으며 말했다.
“그곳은 주인이 잠든 곳이에요!”
“주인?”
“주인님은 바로 제 몸을 탄생시킨 분이시죠.”
화영이 더 이상 영석을 씹는 것을 포기하고 남은 영석을 화염으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대인님이 주인님을 여기에 있게 한 건, 그더러 여기 지하세계를 지켜서 아래에 있는 물건이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거예요.”
“지하에 있는 물건? 무슨 물건이요? 그 대인은 또 누구죠?”
“저도 몰라요. 대인님이 말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길에는 대인님이 만들어 놓은 장애물이 있어서 대인님이 확인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주인님을 만날 수 없어요.”
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길은 아주 밝고 곧게 나 있었다. 잠시 후, 시하는 그가 만들어 놓았다는 그 장애물들을 볼 수 있었다. 석벽 위에 여러 가지 색깔의 하트 도표가 빼곡했는데 그 숫자가 족히 백 개는 넘는 듯했다.
이건 십자풀이(십자 모양으로 같은 물건을 맞춰서 푸는 게임)잖아? 왜 뒤에 있는 배경은 내 사진인 거지? 그것도 여섯 살 때 이갈이를 하면서 앞니가 다 빠져서 찍은 그 사진을. 순간 시하는 그 대인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 듯했다. 오빠일 게 뻔하지, 뭐.
“하 언니, 이 위에 있는 아이는…….”
“몰라,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시하는 십자 모양으로 붙여 놓은 도표들에 화풀이를 하듯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밑에 가려 있던 그녀의 사진이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유유가 더욱 궁금한 얼굴로 석벽에 붙어 있는 사진과 시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얘기하지 마.”
이놈의 허당 오라버니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생각 좀 해야 되니까. 시하는 10분이나 걸려 석벽 위의 십자풀이를 모두 제거했다. 화영이 얼굴만 한 영석을 굴려서 갖고 오더니, 시하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 대인님이 말씀하신 연인이 당신이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주인님도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하시니까.”
뭐를 버티지 못한다는 건지 질문하려고 할 때 십자풀이 석벽이 갑자기 스르륵 열렸다. 하지만 시하의 사진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시하는 그제야 그 사진은 석벽 위에 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 위에 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집행자 2호죠? 드디어 왔군요! 균열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한 것을 축하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선배, 1호 집행자예요.”
시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 목소리는…….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