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는 그녀가 깨어난 걸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잘했어.”
“왜 결단이 이렇게 쉽게 느껴지죠?”
시하가 참다못해 그에게 물었다. 아마 일부분은 여의주가 있어서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기가 너무 쉽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영기들이 자원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에 그녀가 축기에 오를 때에는 구사일생으로 영기를 끌어모았었는데.
“넌 방금 깨달음을 얻어 심경에 이르렀고, 자동으로 금단에 오른 거야.”
“심경이요?”
방금 그녀가 생각한 그 일을 얘기하는 건가?
시하가 고개를 돌려 후지를 바라보자 마음이 무거워져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후지, 할 얘기가 있어요.”
후지가 그녀를 석실에서 끌고 나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너의 뇌겁이 곧 떨어질 거야.”
뇌겁? 젠장, 금단 이후부터 우레를 맞아야 한다는 걸 깜박했네.
맑기만 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뇌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주변에 알 수 없는 기류가 그녀를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역요괘의 모습을 떠올리자 시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우레는 역요괘가 맞던 그것처럼 그렇게 심하진 않겠죠?”
“이치상으로는 금단의 뇌겁이 원영보다 약하지.”
“만약 이치상과 다르면요?”
“뇌겁의 강도는 뇌겁을 하는 사람의 수행 수준에 따라 결정돼. 수행 수준이 높고 영근이 깨끗할수록 뇌겁의 강도가 더 강해지지. 때문에 단영근의 뇌겁보다 다영근의 뇌겁이 항상 더 강하고 변이성 영근은 그보다 더 강하지.”
역요괘는 변이 뇌영근이라 영근이 원래부터 깨끗하여 결영하면서 그렇게 무거운 천뇌를 맞은 것이다.
“차라리 우레에 맞아서 가루가 될 수도 있다고 하지 그래요?”
뇌영근이 그 정도인데 순양 영근으로 사체는 찾을 수 있을까? 후지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기에 걱정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면, 이번에 그냥 맞지 말까?”
“됐어요! 그래 봤자 뇌겁이잖아요. 제가 맞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시하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집중하며 뇌겁을 기다렸다. 시하에게 밀려난 그의 오라버니는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키고 서 있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외쳤다.
“걱정 마. 오라버니가 여기 있으니까.”
시하는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도 불안함이 가득했다.
뇌영근의 천뇌는 욕조만큼 크더니, 순양 영근을 가진 나에겐 수영장만 한 천뇌가 떨어지려나? 하늘도 전보다 훨씬 어둡잖아?
시하는 방금 후지가 만류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 조금 후회됐다. 구름 속에 빛이 점점 더 밝아지면서 영기가 점점 더 몰렸다. 그리고 하늘도 점점 더 어두워지며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커다란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고 굵은 모양의 거대한 인영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혹 하나가 올라왔다.
시하가 로봇처럼 뻣뻣한 몸놀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지는 세숫대야 크기의 하얀 수정처럼 생긴 물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왜 우박이지? 뇌겁이라며? 그렇게 거창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고작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리고 우박이 커도 너무 크잖아!
시하가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늘에서 다시 한 번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얼음덩이가 연달아 아래로 떨어져 순식간에 그녀는 머리 위에 동그란 혹이 여러 개 솟아나 석가모니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시하가 급하게 옆으로 피했지만 우박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어디에 숨든 따라와 그녀를 명중했다.
기어코 나를 치겠다 이 말이야? 젠장! 이게 대체 뭔데?
“이봐요. 거기! 이제 다른 곳에 떨어지면 안 돼요?”
쿵!
“아! 내 발!”
뼈까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발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시하는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발을 감싸쥐었다가 다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시하의 얼굴이 통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치라고 했다고 정말 치네!
후지도 이 이상한 뇌겁에 어리둥절하여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오지 마요!”
시하가 손으로 그를 막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
“버틸 수 있어요!”
쿵쿵쿵쿵. 큰 우박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시하의 몸은 얼음에 묻혀 버렸다. 마지막으로 탁구대만 한 크기의 얼음덩이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늘에 두텁게 깔려 있던 뇌운이 그제야 깨끗이 사라졌다.
후지가 그제야 앞으로 다가가 얼음에 묻혀 있는 시하를 꺼내었다. 그녀가 아무 탈 없이 숨을 내쉬자 그제야 안심하고 법술을 걸었다. 그 순간, 머리 위 혹을 비롯하여 다리에 난 상처까지 모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지가 주변의 수정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겁뇌가 특이하긴 해. 엄청난 영압(靈壓)을 갖고 있어 그 위력이 보통 겁뇌에 못지않아.”
“인격적인 모욕, 심적으로 받은 상처, 신체적으로 입은 상처를 생각하면 그냥 일반 겁뇌를 맞는 게 더 나아요! 오라버니, 저 억울해요. 마음이 아프다고요!”
후지가 깜짝 놀라 묵묵히 시하를 안아 주었다.
“왜 저한테 알려주지 않았어요? 뇌겁에 우박도 있다는 걸.”
그건 그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잠깐! 후지가 손으로 우박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얼음이 아니야.”
“얼음이 아니면 뭐죠?”
“이건 영석(靈石)이야.”
“네? 영석이요? 영기를 품고 있는 그 영석이요? 수선계에서 화패도 사용해요?”
“그래. 그것도 일등급 영석이야.”
“일등급!”
시하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순간 허리도 아프지 않고, 다리의 통증도 사라졌다. 사방의 풍경이 아름답게 변하는 듯했다. 시하가 바닥에서 영석을 하나 주우며 후지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저 이제 괜찮아요.”
후지는 바로 그녀에게 새로운 저장 장비인 반지를 만들어주었고, 시하는 그 안에 모든 영석을 집어넣었다. 원래는 일부를 옥화파의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지만 후지가 동의하지 않았다. 뇌겁을 했지만 우레 대신 영석을 맞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녀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시하도 동의하였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휴대전화에서 받은 미션, 친오빠가 남긴 메시지 등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모두 털어놓고, 마음속에서 그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후지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담담하게 한마디로 대답했다.
“응.”
겨우 응? 내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고작 응이라고?
시하가 서운한 마음에 후지에게 물었다.
“뭐 더 할 말은 없어요?”
후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휴대전화는 무슨 물건인데?”
시하는 바로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어 후지에게 보여주었다.
“어디에 쓰는 거지?”
“이건 명품 법기예요. 제가 살던 그 세계에서는 모두 이걸로 교류하죠. 음성으로도 전달할 수 있고 영상도 볼 수 있어요. 인터넷도 할 수 있어서 무슨 문제든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죠. 백과사전 같은 거라서 여행 갈 때도 꼭 갖고 다녀야 해요.”
“그럼 이 물건으로 그 바보, 아니. 마존하고도 연락할 수 있어?”
“지금은 안 돼요. 여기에는 신호가 없으니까. 휴대전화의 모든 기능은 신호가 있어야만 가능해요.”
“그럼 지금 그건 무슨 쓸모가 있지?”
“맞아요. 이건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어요.”
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쓸모없는 법기를 변동시켜 너를 모현선부와 비경까지 데려갔다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 ‘쓸모없는’ 네 글자는 빼줄 수 없어요? 이건 내 장기와도 같은 거라고요!
“그 미션들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미션들은 친오빠와 연관 있는 듯해요.”
“마존도 이 법기가 있어?”
“있긴 하지만……. 잠깐, 당신 말은.”
“그 시스템이 너의 법기를 변동시켰듯이 그의 것도 변동시켰을 수 있어. 그가 그런 곳으로 간 것도 아마 너와 같은 이유였을지도 모르지.”
시하는 모현선부에서 봤던 그 이상한 상자를 떠올렸다. 그것이 부서지자 허공에 균열이 나타났었다. 시하는 그것이 상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 허공의 균열은 존재했던 것이다. 상자는 그걸 봉인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무망경 안에 모든 해역에 깔려 있던 진법들도 비경의 중심인 취영지지였다.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누군가 고의로 조작한 듯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친오빠임이 분명했다.
“근데 시스템의 목적이 뭘까요? 왜 우리를 그렇게 먼 곳에서부터 끌고 와서는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사람으로 갈라놓는 거죠? 저의 오라버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마존의 행적은 옥화파의 공격과 연관이 있어.”
“그 짝퉁 소주요? 하지만 마수가 이미 깨끗하게 물러나 그 소주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데 어딜 가서 찾죠?”
“한 사람은 알고 있을 거야.”
“원오! 그럼 뭘 더 망설여요? 어서 벌계당으로 가요.”
시하가 검을 부려 검봉(劍峰)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벌계당으로 향했다. 검봉의 제자들은 검수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곳에는 이 항목과 관련된 기능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검봉 중심에 묻혀 있는 기이한 불 때문에 제자들이 법기를 주조하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하지만 불길이 사나워 가까이 다가가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어 벌계당의 감옥도 여기에 만들어 놓았다. 벌계당은 모두 18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기이한 불의 위력이 강하고 압제(壓制) 능력이 강한 수사들이 있었다. 원오는 제일 아래층에 있었다.
시하는 봉주 원하와 인사하고 바로 원오가 갇혀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바닥에는 여기저기 뜨거운 용암들이 떨어져 있어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용암들이 떨어져 있는 그 더미 중심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위에는 오륙 미터 높이의 단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진법이 두텁게 깔려 있었고 원오가 갇혀 있었다.
수행 계급이 봉인된 상태라서 그런지 원오는 아직도 며칠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돼지머리에 퍼런 멍 자국이 나 있어 얼굴을 몰라볼 지경이었다. 시하가 그를 만나러 내려오다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우 깜짝이야!”
시하는 당시에 자신이 너무 심하게 때린 건 아닌지 잠시 반성하게 됐다.
“뭐 하러 왔죠? 날 비웃으러 왔나요?”
“음, 저기 그게, 당신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요.”
시하는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그의 상반신에 고정시켰다.
“혹시 당시에 당신을 이용한 그 마수에 대해 아는 거 좀 있어요?”
시하의 추측대로라면 그 사람이 바로 그 소주일 듯했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때서요?”
그가 차갑게 웃더니 그녀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면 저한테 좀 알려줘요. 당신도 옥화파의 제자였으니 설마 마수가 다시 옥화파를 공격하길 바라는 건 아니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왜 당신한테 그걸 알려줘야 하죠?”
시하가 뒤에 서 있던 후지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럼 이 사람에게 알려줘요. 저는 듣지 않고 있을게요. 이렇게 귀를 막고 있을게요.”
“당신은 내가 죽기를 원하는 거지? 이런 마녀!”
그게 내 목숨을 달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