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89)

“사실 당신이 목계시련진 위에 쓰러지는 바람에 진이 열렸고, 저랑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난 당신이 쓰러뜨려서 넘어진 거잖아요?”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지 말아요! 저도 당신이랑 같이 들어왔잖아요?”

역요괘가 시하의 말을 믿었는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말을 한 번 만들기는 쉬워도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바보라도 점점 속이기 어려워지는 법이었지만, 후지가 죽어도 그녀 혼자는 진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려 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화계시련진(火系試練陳)에서도.

“제가 왜 또 여기에 있죠?”

“어, 그건 말이죠. 당신 몽유병이 있던데. 몰랐어요?”

몰랐는데?

또 금계시련진(金系試練陳)에서도.

“당신이 연습을 너무 힘들게 해서 휴식이 필요해 보여 같이 왔어요!”

“……나는 뇌영근인데요. 금계시련진에 들어오는 건 날 해치는 행위잖아요!”

그리고 뇌계시련진(雷系試練陳)에서도.

“들어봐요. 여기 우레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아요. 당신은 뇌영근이니 더 좋죠?”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뭐가 듣기 좋다는 거죠?”

풍계시련진(風系試練陳)에서도.

“여기 풍경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들어와서 봐야죠.”

“……여긴 그냥 허허벌판이잖아요.”

수계시련진(水系試練陳)에서도.

“외계인이 비경을 침략했다고 하면 믿을래요?”

“외계인이 뭔데? 제대로 된 단어로 설명해줄래요?”

빙계시련진(冰系試練陳)에서도.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요. 이제 알고 싶지 않아요.”

시하는 역요괘의 의심을 무릅쓰고 모든 시련진을 경험했다. 뇌계진에서 역요괘가 큰 힘을 보탠 것 외에 다른 진법에서는 모두 그녀 스스로 신식에 들어가면서 각계의 심법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계급은 여전히 축기대원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역요괘는 뇌진을 나오고 나서 바로 결영(結嬰)을 하게 되었다. 이제 이 비경을 나가 결영뇌겁만 맞으면 바로 원영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일곱 가지를 배웠지만 전부 결단하지 못했고, 그는 한 가지만으로도 바로 결영을 할 수 있었다. 역요괘가 오랜만에 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 씨, 이젠 저를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는 말아요! 노력하면 결영은 아니라도 결단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역요괘가 얄밉게 웃자 마음이 상한 시하는 득의양양한 그를 뒤로하고 제일 마지막 전송진으로 걸어갔다. 진에서 나오자 가까이에서 하얀 인영이 몰려왔다.

“대인님, 이제야 나오셨네요!”

시하는 그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역요괘가 그들의 공법을 아직 정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 익혀서 그들의 지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번에 진에서 나왔을 때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길래 이미 환생했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저희는 기다리다가……. 아! 이 녀석, 결영을 했다면서?”

노인은 말을 채 마치지 않고 놀란 얼굴로 뒤에 있는 역요괘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노인들도 그의 주위로 몰려와 눈빛을 반짝이며 빙빙 돌았다.

“잘했네, 잘했어. 내가 가르쳐준 보람이 있네.”

“녀석,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아직 나보다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앞날이 창창하니 괜찮아.”

“잘했어. 내 얼굴에 먹칠은 하지 않았네!”

네 노인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요괘는 겉으로는 겸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하늘에 가서 걸릴 듯했다.

“그동안 저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좋아 죽네. 역요괘를 본 시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노인 2호가 뭔가 생각난 듯 반지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 반지를 받아. 이걸로 잠시간 너의 계급을 금단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거야.”

역요괘가 놀라며 노인에게 물었다.

“왜 계급을 다시 낮춰야 하는 거죠?”

노인 3호가 나서며 역요괘를 나무랐다.

“멍청한 녀석. 네가 지금 결영은 했지만 이 비경에서는 뇌겁을 맞을 방법이 없어.”

“괜찮아요! 지금 이 능력으로 원영의 뇌겁은 거뜬히 맞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리고 그는 뇌영근을 갖고 있어 천둥 번개에 대한 저항력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시하가 보다 못해 손바닥으로 역요괘의 등을 치며 말했다.

“당신이 이 비경을 나가는 순간 바로 뇌겁을 받아야 하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뇌겁을 받을 수 있고, 입구가 문파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위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의 계급을 잠시 낮춰 두었다가 문파에 도착하면 그때 가서 뇌겁을 하라는 거라고요.”

계급만 오르고 이해력은 그대로네.

“그래, 바로 그거야!”

노인 3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역요괘는 그제야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반지를 건네받았다.

“아, 노인네, 혹시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요?”

진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던지라 시하가 묻자 노인 1호가 대답했다.

“대인님이 제일 첫 진법에 들어가서부터 지금까지 딱 50년이 흘렀어요.”

“이미 50년이나 지났다고요? 그럼.”

“맞아요. 오늘이 바로 무망경이 다시 열리는 날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대인님께 알려드리러 온 거예요.”

시하가 역요괘를 끌어당겼다.

“그럼 뭘 더 기다려요! 어서 나가요.”

그들이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네 노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잠깐.”

“또 무슨 일이죠?”

네 노인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옆에 있는 역요괘를 바라보며 뭔가 망설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얘기해요.”

네 노인이 갑자기 줄줄이 무릎을 꿇고 앉자 시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이러는 거죠?”

노인 1호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대인님, 저는 이 비경에 갇혀 몇십 년을 여기서 살았습니다. 이 비경에는 천도가 통하지 않아요. 때문에 저희는 그저 외로운 혼령이 되어 여기 머물면서도 저 해역을 넘을 수 없었죠. 대인님께서 저희를 이 비경에서 데리고 나가 저희에게 세상에서 환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여기에서 나갈 수 없었다고요?”

자원해서 여기 머무는 게 아니었어?

“맞아요. 저희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여기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왔어요. 이곳은 천도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제한받고 있어서 스스로 밖으로 나갈 수도 환생할 수도 없었어요.”

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도를 이탈한다고? 뭔가 좀 이상한데? 그때 역요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선배님들,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게 술법을 가르쳐주셨는데 모른 척하면 안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아쉽게도 네 노인은 그런 역요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저리 비켜 봐!”

“그러게,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있어!”

“왜 길을 막고 서 있는 거야? 대인님이 우리를 볼 수 없잖아!”

“쉬, 쉬.”

방금 전에는 미래가 창창하다고 칭찬하더니.

노인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더니 시하의 몸에 달려 있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인님, 당신만이 저희를 도울 수 있어요. 당신이 갖고 있는 그 옥령롱만이 저희를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이 비경을 나서면 저희를 인도할 수 있죠.”

“이걸 말하는 거예요?”

시하가 주머니에서 방울을 꺼내며 말했다. 전에 토계진에서 나왔을 때 역요괘가 그녀에게 방울을 다시 돌려줬었다. 네 노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령롱은 원래부터 혼령들에게 사용하는 법기라 저희를 안으로 가둘 수 있어요. 그리고 저희가 여기를 나가 이 해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 나올 수 있답니다.”

시하가 손에 있는 방울을 쳐다봤다. 이 방울이 그런 쓸모가 있었다니.

“대인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네 노인이 절박한 얼굴로 애원하자 역요괘도 참다못해 옆에서 거들었다.

“하 씨, 하 사매, 선배님들을 도와주세요.”

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걸음 나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노인들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저희는 당신들이 여기에 갇혀 있는 건 줄 몰랐어요. 그동안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당신들을 데리고 나가 환생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이왕 돕기로 했으니, 완벽하게 도와 드리죠.”

시하가 일어서더니 영기를 법기 속으로 주입시켰다. 순간 흰색 방울이 점점 커지며 하늘로 떠오르더니 흰색 영광(靈光)이 바다 전체를 비추기 시작했다.

“하 씨, 이건?”

네 명의 혼령을 안으로 넣는데 영기를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시하는 네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바닷속에 당신들만 있는 건 아니죠?”

네 사람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감동해서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은인님, 감사합니다.”

띵! 옥령롱의 소리가 바닷속에 울려 퍼지자 하얀 인영들이 앞다투어 사방팔방에서 나타나더니 방울 속으로 사라졌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네 노인들마저 방울 속으로 사라졌다. 시하가 대충 세어 봐도 백 명은 넘는 듯했다.

이 바닷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동부유적(洞府遺迹, 신선들의 자취)을 삼킨 거야? 전시회를 열어도 이 정도는 아니겠네.

흰색의 인영이 십여 분 정도 날아들더니 그제야 멈췄다. 시하가 더는 흰색 인영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바로 방울을 거두어들였다. 이젠 다 들어갔겠지?

“정말 이 혼령들을 다 데리고 나가려고요?”

역요괘가 당황한 얼굴로 묻자 시하가 방울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인심을 쓰기로 한 거 크게 써야지.

“하지만 다른 혼령들은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노인들을 도와주는 건 이해하겠지만 다른 혼령들은 얼굴도 모르는데 왜?

“다른 혼령들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는데, 내보냈다가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죠?”

“환생하라고 내보내 주는 거지, 나가서도 혼령이 되어 떠돌아다니라고 내보내 주는 거 아니에요.”

“환생을 해도 마찬가지죠! 그들 중에 전생에 악한 짓을 저지른 마수가 있었으면 어떡하죠? 그리고 환생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수선인들은 인과응보를 경계해야 한다고요. 만약 당신이 공연히 악에라도 감염되면 당신의 승계에도 방해가 될 수 있다고요.”

“그게 아니면요? 혼령은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를 수 없어요. 그들 중에 나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모든 사람을 여기에 버려두고 혼비백산하는 것을 두고 봐야 되겠어요?”

“그건 당연히 아니죠. 그 네 분의 선배님들에게는 입은 은혜가 있으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달게 받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

시하가 길게 한숨을 쉬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저들을 도와준 이유는 절대로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에요. 계급을 바란 것도 아니고요. 이곳에 혼령이 갇혀 있는 것을 알았고, 도와줄 능력이 있어 도와주는데 네 명이면 어떻고 한 무리면 또 어때요? 그들 중 생전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다거나 혹은 나쁜 사람으로 환생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생전 일은 제가 간섭할 일도 아니고 사후의 일은 더더욱 관여할 일이 아니죠. 저는 ‘어쩌면’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그들을 모른 척하고 수수방관할 수 없어요. 저들을 구하고 구하지 않고는 저의 개인적인 도덕관념 문제이지, 나쁜 짓을 하고 안 하고는 그들 품성에 관한 문제예요. 능력이 되는 대로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구할 수 없어도 능력이 닿는 데까지 노력은 해봐야 한다고요. 다른 사람이 후세에 어떻게 살건 그건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