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건.”
역요괘가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엄청난 검법을 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이만큼 강력한 검기는 원영기의 역검봉 봉주의 몸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게 정말 축기기 제자의 실력이란 말인가? 이건 장난 아니잖아! 그는 이제야 왜 그 진석이 그녀를 같은 조에 넣어줬는지 알 듯했다. 그녀의 실력은 절대 금단기 제자에 뒤지지 않았다. 검술만 놓고 보더라도 역검봉 봉주도 가능했다.
“당신, 검의를 이해한 거예요?”
설마, 아니겠지. 이제 축기기에 있는데.
시하는 대답 대신 입으로 피를 토했다. 역시 그녀의 지금 실력으로 낙성진의 제일 마지막 동작인 성진멸(星辰滅)을 사용하는 건 아직 무리였다. 역요괘가 자신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미안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하 씨, 당신 괜찮은 거예요? 아무래도 먼저 가는 게 좋을 듯해요. 난 당신이랑 그리 특별한 사이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요.”
동문 간의 우정을 놓고 봐도 그녀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시하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닥쳐요! 이왕 남기로 했으니, 당신을 구할 거예요. 도움을 주지 못할 거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요.”
시하가 다시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방금 그 검술로 괴물들을 잠깐 멈춰 서게 했지만, 수가 너무 많아 용검이 지나간 자리를 바로 채워 버리고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전 안에 있는 붉은색의 검의를 바로 검술로 끌어들여 낙성진의 두 번째 동작을 실행했다. 낙성살(落星殺)! 검광이 사방으로 비치고, 검기도 점점 더 맹렬해지면서 땅 여기저기에 심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의!”
역요괘가 눈을 크게 뜨고 흥분하면서 하늘에 있는 기류를 살폈다. 그녀의 검의가 대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 후, 하늘에 빼곡하게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무?”
분명 내가 잘못 봤을 거야. 검의는 검수 중에 제일 강한 것이 아니었나? 왜 그녀의 검의는 무인 거지? 그것도 저렇게 많은 무를? 괴물들에게 먹여서 배불려 죽게 할 셈인가?
하지만 잠시 후, 턱이 빠질 만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시하가 검을 휘두르자 하늘에 있던 그 붉은 무들이 한꺼번에 괴물들에게 쏟아졌다. 마치 수만 개의 폭발물이 동시에 터진 듯한 커다란 폭발음을 내면서 아래에 있는 괴물들을 일시에 재로 만들었다.
“대, 대단하네요.”
이게 정말 무란 말인가? 무가 폭발할 수 있어? 위력을 봐서는 괴물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듯했다.
“가요!”
시하가 역요괘를 부축해 검을 부려 날아올랐다.
어라?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왜 도망가는 거지?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검을 띄울 영기도 남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축기기의 수사라는 걸 깜박하고 있었다.
시하는 한 손으로는 역요괘를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비검의 속도를 높였다. 방금 검의까지 하면서 괴물들을 공격했던 것은 무리들을 흩어 놓으려던 의도였다. 흩어 놓지 못하면, 최소한 그들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목표물을 찾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녀는 비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렇게 들어가면 서로 길이 엇갈려 괴물들이 더는 따라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 몸을 감출 수 있을……. 응? 왜 괴물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 거지? 왜 하필 여기로 쫒아오는 거야? 겁에 질리면 바로 흩어지는 그런 무리들이 아니었어? 왜 계속 쫓아오는 거지? 필홍 이 구라쟁이 같으니! 방금 도망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우릴 쫓아와?
그때 역요괘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 도망가긴 틀렸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저를 내려놓아요. 제가 가서 괴물들을 상대할게요.”
“그 몸으로 괴물들을 상대한다고요?”
“나를 얕잡아 보는 거예요? 막지는 못해도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어요.”
“그다음은요? 가서 죽으려구요?”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을 수는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구한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다른 방법 있어요?”
“아니요!”
“…….”
“하지만 절대 당신 혼자 버려두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왜?”
그의 얼굴에 의심, 놀라움, 감동이 뒤섞였다. 그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의심이었다. 그렇게 친숙한 사이도 아닌 데다가 전에 자신이 무시까지 했는데 왜 도우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불현듯 뭔가 떠올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마 날 좋아하는 거예요?”
시하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타고 있던 검이 휘청거렸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저기 하 사매, 절대 저를 좋아하면 안 돼요. 제가 좀 잘생기고, 수행 능력도 좋고, 또 뇌영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저를 몇 번 더 구해준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가능성이 없…….”
“지금 당신을 떨어뜨려도 될까요?”
누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리고 얼굴은 왜 빨개져?
“당신 지금 내가 좋아하지 말라고 그래서 화가 난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성격이 남자 같아서 제 취향은 아니, 아야!”
시하가 발로 다리를 차는 바람에 그가 무릎을 꿇어 버렸다. 요즘 어린애들이란. 어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역요괘가 입에 모래를 잔뜩 물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렇다고 정말 버리면 어떡해요!”
시하가 눈을 흘기며 하늘에서 내려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이 없어요.”
“아!”
역요괘가 어리둥절해하더니 그제야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바다 위로 영기를 가로막는 벽이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여기가 비경의 끝이에요.”
역요괘의 말에 시하가 앞에 있는 영장(靈墻)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벽을 넘어갈 수는 없는 거예요?”
“이건 영장이 아니라 비경의 연안이에요. 이 바다가 보기에는 넓어도 사실 이 담장 밖의 풍경은 환상에 불과하죠.”
이 위에 있는 출구를 뚫지 않는 한 도망갈 방법은 없다는 말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괴물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각종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떡하죠?”
역요괘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이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으니까.
“하나 있긴 있어요!”
“무슨 방법이요?”
“역요괘, 영기를 이미 다 쓴 거죠?”
“그, 그렇죠! 왜요?”
“제가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은 꼼짝도 못하겠네요.”
“그렇긴 하지만, 대체 뭘 하려는 거죠?”
“그냥 살짝만 때릴게요.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네?”
시하가 영력을 실어 주먹을 날리자 역요괘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쓸모없는 몸은 잠깐 버리고 쓸모 있는 몸을 불러내야지. 잠시 후, 감겼던 그의 눈이 다시 떠지더니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하하(夏夏).”
후지가 그녀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야? 상처를 입었잖아!”
시하는 그제야 안심했다. 이제 늦지 않았어.
그 순간 큰 무리의 괴물들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하가 괴물들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오라버니, 저기, 저 쪼그만 동물들이 저를 괴롭혔어요!”
후지가 고개를 돌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시하는 지금까지 사람의 능력 차이를 이렇게 절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죽기 살기로 쫓아오던 괴물들이 후지가 가볍게 검을 흔들자 순식간에 큰 얼음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가볍게 소매를 흔들자 얼음들이 녹아내리며 비처럼 쏟아지더니 바닥 전체를 채워 버렸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미친 듯이 포효하던 괴물들이 전부 사라졌다. 눈앞에 넓게 펼쳐진 물만 아니면 괴물들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게 바로 화신기의 수사로구나. 순식간에 싹 쓸어버렸어.
“하하(夏夏), 두려워하지 마.”
후지가 검을 거두고 시하를 끌어안더니 등을 두드려줬다. 하찮은 괴물 따위가 감히 누이를 괴롭히다니 용서할 수 없지!
“오라버니가 그 쪼그만 동물들을 다 쫓아 버렸어.”
쫓아 버렸다고요? 다 죽여 버린 거 아니고요?
“상처를 좀 봐야겠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영기를 불어 넣었다. 체내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며 몸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경맥도 처음처럼 회복되어 그 어디에도 상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정신도 맑아졌다. 시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래.”
그가 손을 거두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 둘만 있는 걸 확인하더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하는 그에게 서수수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저희는 여기서 7계급의 괴물을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서서수는 한빙옥화를 지키는 수호 괴물이야. 그리고 그 괴물의 대부분은 한빙옥화를 이용하여 교룡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네가 말한 그 목패는 서수수를 봉인하고 있었을 테고.”
“그 말은 우리 오라버니가 서수수를 거기에 봉인해 두었다는 건가요?”
“서수수 목에 있는 오래된 상처가 그 증거야.”
“근데 오라버니는 왜 한빙옥화만 취하고 서수수는 그 섬에 가두어 둔 걸까요?”
“아마 죽일 수 없었을 거야.”
“죽일 수 없었다고요? 그 말은 오라버니는 서수수가 괴물들을 몰고 올 줄 미리 알고 그를 그 섬에 봉인하기만 했다는 건가요?”
“그래.”
“말도 안 돼요!”
왜 매번 오빠의 행동으로 피해를 보는 건 그녀인 걸까? 이제라도 남매의 인연을 끊어 버릴까? 그때 후지가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 무망경은 금단기의 비경이야. 그 말은 7계급의 괴물은 나타나지 않…….”
그가 중간에 말을 멈추더니 급하게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바다를 살폈다.
“왜 그래요?”
“저쪽에서 마기(魔氣)가 느껴져.”
“뭐라고요? 제 오라버니를 말하는 거예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
그가 고개를 들고 수면 위에 있는 장벽을 자세히 살폈다.
“여기가 비경의 끝이 아닌 듯해. 이 장벽 뒤에 분명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
“마기는 저기 건너편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데, 거기까지는 어떻게 건너간 거죠?”
“바다 밑으로.”
“바다 밑에 길이 있다고요? 그럼 뭘 더 망설여요! 어서 건너가요.”
그녀가 여기에 온 목적은 바로 그 허당 오빠를 찾는 것이었다. 시하가 물을 피하는 결을 만들어 앞에 있는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