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89)

경맥의 영기가 점점 더 많아져 단전은 하얀 영기로 가득했다. 영기가 계속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곧 그녀가 눌려 죽을 것만 같을 때, 귓가에 뭔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도 빼곡하게 차 있던 단전이 갑자기 열 배나 여유로워졌다. 원래는 공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여의주가 지금 보니 한쪽 구석만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는 아주 작던 어린 싹 영근이 이제는 나무 묘목만큼 자라 작은 가지가 손가락만 한 굵기로 자라 있었다. 몸의 경맥도 적지 않게 확장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가는 시냇물 같았다면 지금은 한줄기 강을 이루고 있었다.

몸의 통증도 사라졌고 영기가 더는 넘쳐나지 않았다. 갑자기 작은 상자에서 큰 상자로 옮긴 것처럼 여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영기가 들어오는 속도도 빨라져, 마치 갑문을 열어 놓은 것처럼 그녀가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영기가 알아서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영기가 많이 축적될수록 묘목도 점점 더 굵어졌다. 익숙한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시하는 본인이 축기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그것도 축기 대원만(大圓滿)에 이른 것이다.

근데 영기는 언제까지 끌어들여야 하지? 왜 아직 끝나지 않는 거야? 다음은 설마 결단인가? 결단은 어떻게 하는 거지? 계학당 사부도 여기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이건 반칙이잖아!

한창 넘쳐나는 영기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기가 멈추었다. 그녀는 영기를 끌어들이는 것을 멈추고 피가 끈적끈적한 몸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한 번 죽었다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눈을 뜨고 보니 과연 어지럽게 떠다니던 흑백의 기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혼돈의 기는 사라지고 주변에 어두움만이 남자 그녀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몸 전체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역시 계급을 올리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 용오천이 상처 입은 몸으로 여우를 손에 꼭 껴안은 채 절룩거리며 걸어왔다. 그리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은인님, 은인님! 여기 곧 무너질 듯해요. 어서 나가요.”

사방에서 우르르 쾅쾅 돌덩이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더니, 아까는 깜깜한 동굴과 혼돈의 기가 덮치더니, 이제는 산이 무너져 내렸다. 이 몸은 전생에 지구라도 멸망시킨 걸까?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은인님, 꽉 잡아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유일하게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용오천이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우를 그녀에게 안기고는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땅에 있는 넝쿨로 시하와 자기 몸을 한데 꽁꽁 묶었다. 용오천이 사람 한 명과 여우를 업고 위에 생긴 틈을 향해 기어올랐다.

용오천이 의리가 있는 사내임은 인정해야 했다. 그는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한쪽 손은 부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주위에 돌덩이가 정신없이 굴러떨어지는데도 두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출구로 기어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피를 토하지 않았다면 시하가 그의 상처를 잘못 봤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출구로 나온 순간, 그가 끝내 모든 기운을 다 소진한 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손과 발은 상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 얼룩져 있었고, 눈은 뒤집히고 호흡도 약해져서 곧 숨이 넘어갈 듯했다. 시하는 이를 악물고 경맥이 확장되면서 오는 통증을 애써 참다가 용오천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안전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멀리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는 제발 다른 변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정말 그 선부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의식을 막 잃어 가려던 순간, 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강한 위압감이 몰려왔다. 젠장, 변고는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고!

“천신만고 끝에 그 고적을 찾아온 보람이 있네.”

하늘에서 온몸에 자색 옷을 걸친 여자가 땅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기산파(岐山派)의 제자들이 아니네?”

계한과 그 무리들이 말했던 그 고적 지도는 이 사람이 전달해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독으로 독을 제하려는 속셈이었을까?

“상관없지, 누구든 보물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 적회륜을 내놓으시지!”

또 그놈의 적회륜. 도대체 누가 그 선부에 적회륜이 있다고 한 걸까? 안에는 빈 상자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엄청 사나운 빈 상자!

“왜, 못 주겠다 이거야? 됐어, 어차피 당신들은 다 죽을 거니까 내가 직접 가져가지!”

말하면서 손을 흔드니 갑자기 무섭게 생긴 화룡(火龍) 한 마리가 땅으로 내려왔다.

젠장, 이렇게 무서울 일이야? 누가 안 준다고 했어?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화룡이 그들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순간, 갑자기 바닥에 얼음벽이 세워지더니 화룡을 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영검이 비처럼 쏟아지더니 시하와 두 사람을 에워싸고 방어진을 만들었다.

자색 옷의 여자가 깜짝 놀라던 그때, 영검이 그녀의 가슴을 뚫고 지나면서 피를 토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몸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도망갔다.

멀리서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눈같이 하얀 옷에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가 급하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불여우가 반응이 없더라니. 시하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정신을 놓아 버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 돼지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도 반쪽은 푸른색, 다른 반쪽은 자색의 아주 괴상한 모습이었다. 시하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아야!”

돼지머리가 통증을 호소하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봐, 왜 사람을 치고 그래!”

“필홍!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그의 얼굴은 빵처럼 부어 있었다. 얼굴에 있는 보라색 얼룩 때문에 돼지머리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네가 지금 그걸 물을 자격이 있어? 이게 모두 너 때문이잖아! 수릉봉에 조용히 있으면 될 것을 대체 어딜 갔던 거야? 그것도 일 년이나! 그 일이 없었으면 사부님이 나를 이렇게 심하게 혼내지는 않았을 거잖아!”

“여기는 어디죠? 혹시 수릉봉?”

“그럼 여기가 어딘 줄 알았는데? 네 몸을 좀 봐. 사부님과 나의 천 년 옥령련(玉靈蓮) 없이 너의 그 실력으로 축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아마 계급을 유지하기는커녕 목숨도 유지하기 어려웠을걸.”

시하는 그제야 몸이 모두 회복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체내에 그 불안정하던 영기도 이제 안정을 찾은 듯했다. 시하가 필홍의 돼지머리를 살피며 말했다.

“당신은 화신 수사 아니에요? 스스로 치료하면 되잖아요.”

그 정도 계급이면 그깟 상처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누군 그러고 싶지 않은 줄 알아? 사부님이 나의 영력을 봉인하고 ‘정안주(定顔咒)’를 거는 바람에 이 얼굴로 거의 일 년을 버티고 있어!”

사부는 찾아가기만 하면 때려서 돌려보냈기에 그가 다시 뚱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시하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두방정은요? 저랑 같이 있던 그 근육남이요.”

“사부님이 들고 온 그 똬리 말이야?”

똬리?

“던졌어.”

“던져요?”

“우리 수릉봉의 사람도 아닌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사부님이 주워 오시고 나서 장문 원조에게 넘겼어. 그의 상처가 너보다는 덜했으니까 지금쯤 아마 다 나아서 뛰어다니고 있을걸.”

시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괜찮으면 됐어.

게다가 새로 생긴 경맥이 아직 약하긴 하지만 이제 영기가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시하는 갑자기 산부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라 주변을 살폈다.

“후지는요?”

“사부님은 폐관(閉關)하셨어.”

“폐관이요? 왜 갑자기 폐관을 하죠?”

“다 너 때문이잖아! 너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사부님이 거기까지 나갈 일도 없고, 그렇게 모든 힘을 소진해 가며 쇄마진을 보강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무슨 뜻이에요?”

시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뭘 보강한다는 거지?

“사부님이 옥화파를 떠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어?”

“왜죠?”

긴 기간 동안 척후로도 살았잖아.

필홍은 멀리 떠 있는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쇄마진에 대해 잘 모르지?”

“전에 원오가 당신들을 유인하면서 말했던 그 진법이요?”

“맞아. 그 진 안에는 오래된 마수가 봉인되어 있었는데, 천지를 삼키는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어. 그 진은 사부님이 설치한 것이었고, 사부님 자체가 그 진법의 중심이라 사부님이 여기를 떠나시면 진법이 무너지게 되어 있었어. 근데 이번에 너를 구하려고 위험을 감수하고 그 창미삼림(愴醚森林)까지 가신 거야. 제때 돌아오셨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라.”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시하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를 찾아가야겠어요.”

그리고 바로 문을 나섰다.

* * *

한편 후지는 답답한 마음에 한창 벽을 긁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에서 누이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마존은 누이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오라버니의 임무라고 했었는데 그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해내지 못한 데다가 일생일대에 제일 큰 실패를 하고 만 것이었다.

이제 누이는 이 오라버니를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겨우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설득했건만. 순간 ‘불합격’ 세 글자가 가슴을 짓누르자 그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시하가 수릉봉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그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여우의 몸을 입고 그녀를 보호하는 동시에 그녀를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그녀가 모현선부로 가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은 그도 아는 곳이었으니까. 예전에 마존이 한동안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안에 있는 기관진법(機關陳法)은 일찍이 그가 모두 헐어 버려 얼마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가 그녀를 따라가기만 하면,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조용히 따르면서 별다른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최대한 신분을 감추었다.

한편으로는 누이를 보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누이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집 나간 누이를 도와 이 게임에 참여했다. 그 결과 그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왜 마존은 그 이상한 상자를 남겨 놓은 것일까? 상자는 어떻게 천지법칙(天地法則)의 구멍을 열 수 있었던 거지? 어떻게 그 구멍은 신식을 누를 수 있었지? 육계괴물의 몸이 어떻게 공격에 그렇게 취약할 수 있느냔 말이야. 죽기 살기로 쫓아갔는데 어떻게 늦을 수가 있냐고. 젠장! 왜 하늘은 누이를 집에 데려오는 데 이렇게 방해를 하는 거야?

그의 인생 전체가 회색빛을 띠고 있는 듯했다. 이 일로 누이는 이제 나를 더 이상 믿지 않을 거야. 이미 미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마존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거야. 오라버니라고 인정하기도 싫겠지. 겨우 잡아 놓은 누이를 이제 잃게 생겼어.

후지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상해 벽만 긁었다. 누이가 다시 마존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심장이 아팠다. 손으로 힘껏 벽을 긁고, 긁고 또 긁다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때 구멍 밖으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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