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더니 녹의와 함께 돌아서서 뒤에 있는 그 문들을 향해 걸어갔다. 시하는 그제야 통로 끝에 있는 그 문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오는 길에 만났던 문들과는 다르게 이 문은 훨씬 고급스러웠다.
문 위에는 각종 고풍스러운 도안이 새겨져 있었는데, 꽃인지 짐승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문양들로 아주 생생하고 정교했다. 고동색의 빛깔을 보니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도안의 배열은 얼핏 제각각인 것처럼 보였지만 또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문 중앙에 밝게 빛나고 있는 금색의 법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법부(法符) 문자들이 떠다니고 있어 보기만 해도 복잡했다.
시하는 진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녹의가 계한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모양이었다. 법부 문자는 어찌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지 소들이 서로 우격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진법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진법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지?”
시하가 무심결에 묻자 옆에 있던 척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건 진법이 아니에요.”
“응? 진법이 아니라고?”
몇 미터 밖에 있던 계한도 듣고 그들에게 다가오려다가 노려보고 있던 용오천에게 잡혀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진위에 분명 영력이 흐르고 있어요. 파동이 천차만별이라 규칙적이진 않지만, 진법이 아니라뇨? 그럼 설마……. 당신은 이 진법의 현묘(玄妙,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 깊숙하고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함)를 볼 수 있으시군요!”
계한이 끈질기게 협력하자고 설득한 것은 상대에게도 금단수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에 생문, 사문 앞에서 쉽게 법진을 뚫고 나가는 걸 보면서 상대의 능력이 훨씬 위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그렇게 몸을 낮춰 가며 그들에게 사과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척후가 법진을 대충 보더니 바로 맞춰 버렸다. 그들이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어쨌든 진을 열 수 있는 희망이 생기자 계한은 조금 흥분하며 물었다.
“진법이 아니면 그 변하는 법부는 또 어떻게 된 거예요? 무엇 때문에 저희가 만지기만 해도 공격하는 거죠? 왜 그런 건지 알 수 있어요?”
계한의 연이은 질문에도 척후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감정 낭비하기 싫은 듯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법진을 만지려는 시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나도 이게 뭔지 너무 궁금해.”
“잔진(殘陳)이에요. 이건 아직 절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가상진(假相陳)이죠.”
“가상?”
“이 법진 자체에 별다른 위력은 없어요. 이건 속임수에 불과하고 진짜 진법은 이 진 뒤에 있어요.”
그가 손가락으로 위에서 끊임없이 떠다니고 있는 법부들을 가리켰다.
“저 법부들은 복잡해 보여도 사실 아무 의미 없는 부호들이 그저 떠다니는 것뿐이에요.”
방금 전까지 그 부호들이 고급스럽게만 보이던 시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계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방금 저희가 강제로 법진을 열려고 했을 때만 해도 분명 움직임이 느껴졌었어요.”
척후는 여전히 그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시하에게만 집중했다. 시하는 어쩔 수 없이 계한이 한 말을 척후에게 다시 전달해줬다.
“진법이 움직였었대.”
에휴, 낯가림이 심한 영수와 함께 있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야.
“그건 이 진 위에 있는 반상진이 외부 공격에 대해 반동을 일으키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계한은 스스로 공격받을 짓을 찾아 한 거란 말이었다. 시하가 고개를 돌려 계한을 바라보니 그도 당황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척후, 그럼 넌 이 진법을 풀 수 있는 거야?”
“풀 수만 있다면 저도 풀고 싶어요.”
척후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 진법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결인을 하고, 뭐라 주문을 외우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문 대부분을 둘러싸고 있던 진법이 마치 기포가 터지듯 서서히 어두워지며 내려갔다.
그저 수수하고 고풍스럽기만 하던 문에 변화가 일어났다. 각양각색의 문양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문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뜻밖에도 모두 오른쪽 아래 구석을 향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한쪽은 서서히 모이더니 장방형 형태를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정방형 형태를 만들었다.
한참 후에야 도안들이 멈춰 서더니 법진에서 나왔던 것보다 더 밝은 황금빛을 뿜어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양쪽 도안이 안으로 꺼지면서 서서히 두 개의 입구가 나타났다. 긴 모양의 장방형 문은 밝았고, 크기가 작은 정방형 문은 아주 캄캄했다. 계한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 문이 열렸다!”
용오천이 손가락으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입구의 위를 가리켰다.
“위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자세히 보니 입구 위에 도안이 두 개의 검은 문자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바로 이 세계의 문자였다. 시하가 소리 내어 문자를 읽었다.
“사(舍), 득(得)”
문자의 뜻을 생각할 틈도 없이 갑자기 옆에서 뜨거운 기운이 훅하고 몰려왔다. 시하가 바로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불길이 크게 번진 후였다.
“하하(夏夏)!”
척후가 순식간에 방어진을 치더니 그녀 옆으로 몰려오던 맹렬한 불길을 차단했다. 그러자 발밑에 다시 진법이 들어오더니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또 곤진(困陳)이잖아! 고개를 들어 보니, 역시나 계한이 진을 열고 있었다.
미친, 이 두 인간이 이럴 줄 알았어. 전에는 진법이 그들을 막았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상대방도 이 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기회를 잡아 진법이 완성되자 계한은 망설임 없이 그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입구를 향해 날아 들어갔다.
“사매, 어서 들어가요!”
“네.”
녹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앞으로 따라가는 대신, 무기를 꺼내 단칼에 계한을 베어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녹의의 칼에 무참히 당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매, 당신.”
시하와 그녀의 동행들은 모두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척후는 심지어 진을 열던 손을 멈추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집안싸움이라니!
녹의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계한의 몸에 박았던 칼을 뽑으며 말했다.
“사형,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역회륜은 딱 하나밖에 없잖아요?”
척후가 손을 휘저어 곤진을 헐어 버렸다. 녹의는 멈추지 않고 승리자의 자태를 뽐내며 몸을 돌려 바로 입구로 들어갔다.
“아!”
방금 문 안으로 들어간 녹의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밝은 빛을 뿜고 있던 입구에 갑자기 각양각색의 커다란 진법들이 나타났고, 수만 개의 영검들이 날아들더니 그녀의 몸을 순식간에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득의양양하던 녹의는 잠깐 사이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가 두려움에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며 손을 내밀었다.
“살, 살려줘.”
하지만 영검들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두 손을 잘라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시하는 참상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은인님, 이 사람을 어떻게 하죠?”
용오천이 입구에서 쓰러져 있는 계한을 들며 말했다. 녹의의 검이 정확하게 치명타를 입힌 듯 가슴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숨은 아직 붙어 있었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내버려 두세요.”
“죽이지 않고요? 이 사람이 다시 저희를 속이면 어떡해요?”
“상관없어요.”
시하는 손을 내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태평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제 숨이 얼마 남지 않아 아무 짓도 할 수 없어요. 그를 죽이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구할 수도 없죠.”
용오천은 그제야 계한을 놔주며 경고하듯 사나운 눈빛으로 흘겨봤다. 시하는 다시 문 입구에 집중했다. 문 내부의 진법이 멈추긴 했지만 아직 밝게 빛나고 있어 통로 깊은 곳까지 환했다.
“척후, 이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네가 말했던 그 진법이야?”
전에 척후가 진짜 진법은 진 뒤에 있다고 했었다. 그가 말했던 진은 바로 이 내부의 진을 말하는 건가?
“네.”
계한과 녹의는 마음이 급해 척후의 말은 대충 듣고, 보자마자 문이 열린 줄 알고 바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가 죽음을 맞았다. 혹시 척후는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진법에 묶여 있을 때도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던 걸까? 모든 영수의 지능이 이렇게 높은 걸까?
척후는 담담히 그녀의 관찰을 받아들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반짝이며 마치 뭔가 아끼는 물건을 쓰다듬듯이 그녀의 머리를 만지더니, 꼬리를 두 가닥 내밀고 만족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시하는 조금 어색해서 머리 위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이 나쁜 습관은 어쩌다가 생긴 거지?
“그럼 이 진법은 네가 풀 수 있는 거야?”
척후는 아쉬워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늘어서 있는 진법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이 진법들이 금계법진(金系法陳)에 속해 있고, 누군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먼저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것밖에는 몰라요. 하지만 영검이 나타났다는 건 통제하는 대진(大陳)이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봤던 건 이 진법의 전부가 아니에요.”
“풀 수 없다는 말이야?”
용오천도 조급해하며 물었다.
“진의 형태를 보지 않고는 풀 방법이 없어요.”
“그럼 어떡하지?”
계한은 이 문 안쪽이 바로 모현선부의 제일 깊은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그녀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으니, 미션이 말하는 복원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이 진법에는 택상진(擇相陳)이 포함되어 있어, 들어가는 사람이 규칙에 부합하기만 하면 그 진법들이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이 진법에 선별 기능이 있다고?
“이런 진법의 수법은 뭐랑 좀 닮은 듯한데.”
척후가 말을 멈추고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용오천이 갑자기 놀란 눈을 하고 문 안쪽을 가리켰다.
“은인님, 저길 보세요! 타기 시작했어요.”
문 안쪽에서 큰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녹의의 사체에 푸른빛의 불길이 옮겨 붙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덮어 버렸다. 불길은 잠깐 사이에 그녀의 몸을 재로 만들어 땅바닥에 얼룩진 피까지도 깨끗하게 태워 버렸다. 잠시 후 문 위의 ‘사, 득’ 두 글자에 불이 들어오더니 검은색의 글씨가 금색으로 변했다.
용오천이 머리를 부여잡고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득, 뭔가를 버리면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인가? 어? 옆 통로에도 불이 들어왔어요.”
시하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정방향 문 쪽에도 붉은색의 진법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 진법들은 이동하면서 마치 전송대처럼 안으로 차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금계, 규칙, 선별, 전송대. 이 단어의 조합 뭔가 익숙한데? 하지만 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