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89)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두기로 했다. 계속하여 영근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녀는 입정(入定, 불교에서 수행하기 위해 방 안에 둘러앉는 일)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영근의 새싹은 어느새 잎사귀가 세 개나 자라 있었고,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았다.

“은인님, 날이 밝았어요. 어음파의 제자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제.”

용오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하가 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금방 갈게요.”

시하가 짧게 대꾸하고는 유유를 깨우고 간단하게 씻은 후 용오천을 따라나섰다. 유유는 유난히 아쉬운 듯 망설이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어음파 제자들이 바로 저기 있네요.”

용오천은 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에 서 있는 세 사람은 어제 제자를 선발하던 바로 그 제자들이었다. 헌림도 그 사람들 속에 무거운 표정으로 머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유유가 긴장되는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괜찮아. 선산에 도착하면 사부님도 계시고, 아주 많은 사형들이 너를 보살펴주실 거야. 그러니까 잘 지내. 알았지?”

유유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는 밤에 이미 준비해 놓았던 옥패를 꺼내며 유유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유유의 이마에 누르며 밤에 배워 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나타나더니 바로 유유의 이마 중심부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옥패도 같이 사라졌다.

“가기 전에 언니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앞으로 네게 도움이 될지는 나도 장담 못해.”

그녀가 어제 알아보기로는 어음파는 음률에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문하의 제자들도 모두 음공(音攻)에 능하다고 했다. 이 옥패는 두 번째 노인이었던 음살문당주(音殺門堂主)가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둘 다 ‘음’ 자가 들어갔으니 분명 유유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네가 선문에 들어가면 내가 전달해준 공법에 대해 연습할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명심해. 절대 다른 사람들, 특히 헌림에게는 알려서 안 돼. 알겠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공법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낭떠러지에 떨어졌던 노인들이 하나같이 말했던지라 그렇게 평범한 물건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리하여 시하는 옥패를 유유에게 바로 건네주지 않고 그 내용을 유유의 머릿속에 바로 입력했던 것이다.

유유는 마치 머릿속에 새로 나타난 정보에 적응이라도 하듯 한참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시하는 유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음파 제자 세 명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깜짝 놀라며 서둘러 포권을 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순풍 교우님.”

세 사람은 무슨 영문인지 어제는 눈이 마치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거만하게 굴더니, 오늘은 그녀에게 다가와 문안 인사까지 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유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교우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이 사매를 알아서 잘 보살펴 드릴게요. 어제는 저희가 정신이 없어서 교우님이 옥화파에서 오셨다는 걸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근데 혹시 어떤 분의 문하에 계셨나요?”

“제가 옥화파에서 왔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그녀가 놀라 묻자 그는 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교우님이 입고 계시는 복장을 보고 알 수 있었죠. 입고 계신 복장은 옥화파의 신입 제자 복장 아닙니까. 수련은 삼층(三層)까지 하셨군요.”

그러고 보니 교복(敎服)을 입고 있었네. 어제는 너무 더러워서 알아보지 못했고, 오늘은 새로 갈아입은 후라 알아보는 듯했다. 근데 내가 언제 삼층까지 했지?

“교우님은 이미 제일 선문이신데, 왜 따님을 어음파로 보내시는지요?”

“이 아이는 제 애가 아니에요!”

“아, 그럼 동생이시군요.”

“아니에요.”

“그럼 사랑하는…….”

“아니에요.”

“…….”

이봐요. 그 눈빛은 뭐예요? 내가 아이를 보내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인데.

“시간이 다 돼서, 이제 출발을 해야겠네요.”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바로 화제를 돌리고는 작은 부채를 하나 꺼내 하늘로 던졌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부채로 변했고, 그는 그녀와 용오천에게 작별인사를 하더니 사람들을 부채 위로 안내했다.

유유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더니 갑자기 다시 그녀에게로 뛰어와 머리를 품에 묻고 힘껏 안겼다.

“언니는 유유의 언니죠?”

시하가 웃으며 그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줄게.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계속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부채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부채가 날아오르자 시하는 손을 힘껏 흔들었다. 한참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용오천이 힘껏 등을 때리는 바람에 거의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하하하, 은인님, 이제 맘 놓으세요. 혹시 오늘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제가 여기저기 용성 구경을 좀 시켜 드릴게요. 보시다가 맘에 드시는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하시구요. 뭐든 말씀하세요. 이 성에서는 제가 뭐든지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전 다른 볼일이 있어서요.”

“은인님, 용성을 떠나시려고요? 아직 제대로 대접도 못해 드렸는데.”

“저를 돕고 싶으시다면 여비나 좀 보태 주실래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또 도움이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어디로 가냐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걸! 영근이 있긴 하지만 공공의 적인 그놈의 신분은 여전히 변함이 없잖아!

그러다가 갑자기 휴대전화에서 봤던 지도가 떠올랐다. 호구 오라버니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길은 오직 일방통행만 가능하다고는 했지. 하지만 시스템이 그녀에게 시간을 넘나들도록 했는데 공간을 넘어서지 못할까?

그녀는 꼭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아, 용성주, 혹시 모현선부라고 들어 봤어요?”

용오천은 얼굴색을 바꾸더니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모현선부! 은인님, 설마 거기로 가려는 건 아니시죠?”

“왜요?”

“저도 길을 지나가는 수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곳은 창미삼림(悵醚森林) 깊은 곳에 있는 동부(洞府, 신선이 사는 곳)이지요. 예전에 화신기에 있는 수사가 내려왔었는데 그곳이 바로 모현선부라고 했어요. 듣자 하니 그곳에는 진귀한 법기가 셀 수 없이 많다더라고요. 그리고 ‘역회륜(亦回輪)’이라는 법기도 있는데 그걸로 천기를 꿰뚫어 보고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대요.”

그렇게 대단하다고?

”다만 창미삼림은 아주 위험한 곳이고, 안에는 요괴도 많다고 해요. 그리고 선부의 위치는 아무도 몰라요. 전설에 의하면 안에는 곳곳에 각종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그 안에서 한 번도 수사들이 나온 적이 없대요. 또 원영(元嬰)기의 수사가 여기에 살고 있다더라고요!”

시하는 그 지도를 떠올려 봤다. 분명히 삼림의 동남쪽이었고 그리 깊은 곳도 아닌 데다가 삼림 변두리에 있었다. 그녀는 도전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찾은 은인님이 섣불리 길을 나섰다가 목숨이나 잃는 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은인님, 그쪽은 너무 위험하니 신중히 생각하셔야 돼요. 오래전에 이미 발길이 끊긴 곳이라, 은인께서 정말 그곳이 궁금하시다면 수련을 조금 더 하신 다음에 가셔도 늦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너무 일러요.”

“내일 출발할게요!”

“네? 은인님, 다시 생각…….”

용오천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시하는 이미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시하는 밤새 기초적인 술법들을 통달했다. 다행히 계학당에서 글자를 배울 당시 습관적으로 내용을 먼저 외운 후 다시 글자와 발음을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공부했던지라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술법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때는 글자 위에 발음을 표기하는 단순한 글자 공부였다면 지금은 드디어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행 능력이 생기고 나서 다시 법술을 공부하니 많이 수월했으나, 그렇다 해도 하룻밤 새에 그녀가 배울 수 있는 건 고작 한두 가지 정도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그제야 그녀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발견하게 됐다.

술법은 모두 외웠는데 이제 보니 여행에 반드시 필요한 검을 부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건 마치 차고에 명품차가 가득 있는데 아직 면허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두 다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막 용성을 떠나 성문 앞에 이르니 용오천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그는 기어코 그녀를 따라갈 작정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나열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예전에는 은인님을 찾지 못해서 그랬다 쳐도, 이제 찾았으니 이 용오천의 목숨은 사나 죽으나 은인님의 것이에요. 그 위험한 곳도 당신이 뭐라고 하시든 함께하겠어요.”

은혜에 보답하면 했지 말을 왜 이렇게 이상하게 해? 사람들이 지금 쳐다보고 있는 거 안 보여? 프러포즈하는 줄 알잖아!

“당신이 나를 따라오면 당신의 용성은 어떡해요?”

당신은 용성주잖아요. 이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요! 성에는 저 말고도 몇 명의 부성주(副城主)가 더 있어요. 그들은 오래전부터 제가 이 성을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걸요.”

“……그럼 식구들이랑 친구들은요? 그냥 이렇게 버리고 가도 되는 거예요?”

“은인님, 저의 가족은 이미 모두 죽었잖아요.”

“아.”

“놈들은 아화(阿花)마저 데려갔다고요.”

“아화는 누구예요?”

“제가 어렸을 때 키우던 고양이요.”

시하는 그를 돌려보내려고 욕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끝내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의 그 굳은 의지에 시하는 할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제 본명은 시하가 맞아요.”

그러니까 나를 따라다니는 건 아주 위험하다고요.

용오천은 놀라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은인님은 이미 순풍택배라는 깊이 있고 품위 있는 이름이 있는데, 왜 이름을 고치려고 하시는 거죠?”

어디가 깊이 있고 품위가 있어? 도대체 택배 회사에서 광고비를 얼마나 받았으면 이렇게 험한 말을 하지?

“따라오든 말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시하는 용오천을 떼어 놓기를 포기하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용오천이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했다.

“은인님, 이름은 부모님이 주신 건데 함부로 바꾸면 안 돼요. 그리고 정말 이름이 싫다고 해도 성까지 바꾸면 안 되죠. 그럼 혹시 순풍특송이나 순풍물류는 어떠세요? 아니면 일로순풍(一路順風, 중국에서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가는 길이 순조롭길 빌며 하는 인사말)은요?”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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