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89)

이 일은 방금 치러진 영근 시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유유를 데리고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 헌림은 금, 목, 화 이 세 가지 영근을 측정받고 있었는데,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린 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본인의 명성에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화를 참는 듯했다. 적어도 유유에게서 특이 영근인 풍영근(風靈根)이 측정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하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상에 있는 어음파 제자들이 기뻐서 날뛰는 모습을 보니 아주 특별한 영근인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수사의 체면도 내려놓은 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단상에서 내려와 유유를 둘러싸더니 다정하게 사매라고 불렀다.

인내심이 극에 달했는지 헌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시하는 화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유유를 칭찬하며 몇 마디 더 거들었다. 그때 헌림은 화가 폭발했는지 갑자기 미친개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우선 유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퍼부으며 제자를 선발하는 수사들을 향해 불만을 표했고, 곧 유유를 데리고 온 시하에게 그 화가 돌아갔다.

“시하는 마존의 누이에요. 그러니 그 마녀를 봐주면 절대로 안 돼요.”

“내가 시하라고 누가 그래? 증거는 있고?”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시선이 도처에서 느껴지자 그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어떻게 자신에게 날아올 칼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애초에 나한테 성은 ‘시’라고 했고, 유유가 당신을 ‘하 언니’라고 부르잖아. 당신 이름이 시하가 아니면 뭔데?”

“이봐,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성이 ‘시’라고 했어?”

“반년 전에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시’라고!”

기억력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누가 증명할 수 있는데?”

말문이 막힌 헌림은 고개를 돌려 세 명의 수사들에게 말했다.

“수사님들, 시하와 같은 마녀는 누구나 죽일 수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먼저 죽이셔야 합니다. 놓쳤다가 나중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이 자식이 아주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소인배 같은 자식.

헌림은 그녀를 보며 당당하게 웃더니 시하가 했던 말을 역으로 이용해 공격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시하가 아니라는 건 누가 증명할 수 있죠?”

시하의 말문이 막힌 그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더니, 단상 아래에서 어떤 중년 남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사람들이 그 남성에게 길을 내주며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봤다.

“용성주(龍城主)가 오셨네요.”

“정말 용성주네! 여기까지 직접 오시다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다들 흥분해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역력했다. 단상에 있던 수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용성주.”

“수사님들.”

남자도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시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생기가 가득한 두 눈에는 별빛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은인님! 살아생전에 은인님을 다시 만날 줄이야. 전에 베풀어주신 그 은혜는 잊지 않고 있었어요. 절을 받으세요.”

남자는 시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하는 깜짝 놀라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누구세요?”

“은인님? 저 용오천이에요! 30년 전 일, 아직 기억하시죠? 제가 적들에게 쫓기다가 상처를 입고 계곡에 쓰러져 있을 때 은인께서 저에게 절세비급을 주셨죠. 그리고 저에게 몸에 있는 독을 해독하고 경맥을 이어주는 법을 가르쳐주셨고요. 제가 다시 살아나 오늘 이 모든 성과를 이뤄 낼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인님의 덕분이에요. 지난 30년간 그 은혜를 하루도 잊지 않고, 언제고 은인님을 다시 만나 은혜에 보답하기만을 기다렸어요.”

30년 전이면 아직 엄마 배 속에도 없었을 텐데. 당신 사람 잘못 봤어요!

그녀는 이렇게 건장한 사람을 구해준 기억이 없었다. 남자의 몸은 얼마나 건장한지 근육이 옷을 뚫고 나올 듯했다.

가슴도 나보다 크잖아? 말도 안 돼!

그때 어음파의 세 수사가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용성주. 이 소저와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그럼 그녀는.”

그들은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마녀 시하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잠깐만.”

용오천이 세 수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단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저는 확실히 이 소저를 알고 있습니다. 이 소저는 제가 다년간 찾고 있던 제 은인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소저는 절대 마녀 시하가 아닙니다. 이 소저의 이름은 바로 순풍택배입니다!”

순풍택배는 또 뭔 소리야! 뭐 이렇게 괴상한 이름이 다 있어? 왜 함부로 남의 이름을 갖고 장난치는 거야? 이렇게 이상한 이름은 귀신도 안 믿겠다!

“그런 거였군요! 이 소저는 시하가 아니었군요. 모두 오해였네요.”

“순풍택배, 이렇게 위엄 있는 이름이 어딜 봐서 마녀예요.”

“맞아요. 맞아요. 성주의 은인이 어떻게 나쁜 사람이겠어요.”

“방금 전에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사람은 누구지.”

이걸 믿어? 군중의 지혜는 어디로 간 건데? 이걸 믿다니 말도 안 돼!

그곳의 형세가 갑자기 전환되자 헌림의 얼굴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세 수사도 미안했는지 포권을 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용성주는 항상 충성스럽고 의리가 있으니, 믿어 의심할 바가 없죠. 모두 오해였습니다. 용성주와의 친분을 봐서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뒤 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헌림을 흘겨보았다. 폭로에 실패하고 원한만 가득 떠안게 된 헌림은 세 수사들의 마음마저 불편하게 만든 꼴이 되었다. 반면 신분에 대한 누명을 벗게 된 시하는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게 되었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마음이 많이 복잡해졌다. 물론 공공의 적이라는 누명을 벗게 된 건 기뻤지만 ‘순풍택배’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평생 동안 택배 배달이라고는 몇 번 해본 게 다인데 이름마저 순풍택배라니! 응? 잠깐만. 택배라면……. 용오천?

“당신이 그 용오천이구나!”

그녀는 절벽 아래 누워 있던 택배 10호가 기억났다.

하지만 거긴 무협 세계가 아니었어? 무협 세계와 선협 세계가 언제부터 동일한 세계관이 된 거지? 난 왜 몰랐지?

“은인님, 이제야 기억하시는군요!”

기쁜 듯 밝은 표정을 지은 용오천은 감동한 건지 눈시울을 붉혔다.

“저기, 일어나서 얘기해줄래요?”

그렇게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고요!

용오천은 뒤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은인님, 여기서 이렇게 서서 말하는 것보다 제집으로 가서 이야기 나누는 게 어떨까요?”

시하도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유유를 보니 또 망설이게 되었다. 용오천은 그녀의 심중을 읽었는지 말했다.

“은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아이도 같이 데려가면 되니까요. 제자 선발은 아직 하루 더 남았으니, 내일 출발할 때 제가 저 아이를 다시 데려다줄게요.”

“그럼 어서 가요.”

안심한 시하가 유유를 안고는 용오천의 집에 가다가 물었다.

“아, 혹시 밥은 주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배부르게 대접할 테니! 그나저나 은인님, 이걸 기억하세요?”

용오천이 서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제가 살아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피 맺힌 원한도 갚을 수 있었고요.”

시하가 보니 책 위에 무슨 ‘원비급’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앞에 글자는 모르는 글자였다. 하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혼원비급!”

이건 전에 내가 전달해준 택배였잖아?

“바로 그거에요.”

용오천은 기뻐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게 확실해요?”

그녀가 전달해줬던 택배는 분명 간체자로 쓰인 서책이었다.

“당연하죠! 이 비급은 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보관해 오고 있는 거예요.”

시하는 책을 받아 보았지만 마음속에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근데 나는 분명히…….”

그녀가 말을 다 마치지 못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당신도 봤어요?”

“뭘요?”

“글자요. 여기 위에 글자가 바뀌었어요.”

방금 전까지도 이 세계의 글자였는데, 지금 갑자기 간체자로 바뀌었어!

“그래요?”

그가 책을 펼쳐 보는 순간, ‘혼원비급’의 네 글자가 흔들거리며 다시 이 세계의 글자로 바뀌었다. 용오천은 한참을 보고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더니 서책을 다시 시하에게 넘겨주었다.

“예전이랑 똑같은데요? 은인님, 제가 무식해서인지 정말 다른 점을 찾아볼 수가 없네요.”

시하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한 번 책을 펼쳤다. 역시 책 안의 글씨가 흔들거리더니 갑자기 그녀에게 익숙한 간체자로 변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용오천의 면전에서 책을 펼쳤는데 그가 보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설마 이 책이 나에게만 이렇게 보이는 걸까?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 호구 오라버니가 줬던 비급을 꺼내 보았다. 그 비급서의 글씨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왜 이 혼원비급서만 그런 거지?

“용성주, 이 서책 저한테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아무리 봐도 이 택배는 그냥 택배가 아닌 듯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 서책은 원래 은인님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는 건 당연하죠. 그 당시 은인께서 저에게 이 공법서책을 남겨 주시지 않았다면 저도 지금 이렇게 무수(武修)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무수?”

이 책은 무림비급이 아니었어? 어떻게 갑자기 공법책으로 바뀐 거지?

“그럼요! 저도 전에 우연히 신선계의 사부님을 만나 알게 되었어요. 은인께서 저에게 주신 무수공법만 다 익혀도 축기(筑基, 신선계의 다섯 개의 수행 계급 중 두 번째 계급에 해당함)의 수사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걸요. 덕분에 저는 이 용성을 세울 수 있었고, 그 후 선문과 왕래하며 은인님을 찾으려고 했어요.”

“저를 찾았다고요?”

“그럼요. 25년 전에 복수를 하고 난 후 줄곧 은인님을 찾고 있었어요.”

“25년 전.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금년에 이미 오십하고도 세 살을 더 먹었지요.”

“어딜 봐서…….”

시하는 아래위로 그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덩치가 좀 있었지만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30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도에 입문하고 이제 축기에 이르고 나니, 나이에 대한 개념이 전과 조금 달라졌어요. 은인님도 무수이니 분명 아실 거예요.”

“저는 무수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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