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89)

공양은 뭔가 중요한 걸 구경시켜 주려는 듯 옆에 있는 절벽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가 옆에 있는 절벽을 몇 번 긁으니 덜커덕 소리가 나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안에는 칸칸의 석실(石室)들이 나뉘어 있었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도 하나 보였다.

“여기가 제집이에요! 여기는 대청, 저기는 침실, 옆에는 제가 수련하는 곳이죠. 그리고 많은 방들이 있어요. 여기 석실은 제가 직접 다 파서 만든 거예요. 어쨌든 당신도 이제 여기 머물러야 하니,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맘에 드는 방이 있으면 이 오라버니한테 얘기하고요.”

“어, 고마워요.”

이런 절벽에 이렇게나 깊은 동굴을 파냈다니, 혹시 두더지인가?

“여기예요.”

공양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손으로 결 하나를 만들었다. 그 속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이 나타나며 절벽 위에 있던 화로를 환하게 밝혔다. 깜깜하던 통로가 갑자기 대낮같이 밝아졌다.

“여기는 제가 위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그가 앞을 가리키며 말한 그 순간, 그녀 앞에 산봉우리가 하나 나타났다. 옥패와 서책, 그리고 각종 이름을 알 수 없는 법기들이 높게 쌓여 있었다.

“이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이 계곡은 죽음의 계곡인 건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까?

“저도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사람들이 기어코 주니, 저도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예요.”

공양은 그녀에게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네, 당연히 알죠. 저도 한 주머니 가득 채웠는걸요.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비교적 희소성이 있는 공법영기들은 저 뒤에 보관하고 있어요. 여의주도 바로 거기에 보관하고 있고요.”

공양이 그녀를 봉우리 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위로 완만하게 뻗은 통로가 하나 있었다. 통로 양쪽에 정방형의 칸들이 파져 있었는데, 안에는 그녀가 노인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옥패들과 법기들이 칸칸이 놓여 있었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통로를 이렇게 깊이 파야만 놓을 수 있어요.”

시하는 당황스러웠다. 공법비적(功法秘籍)들을 무슨 통배추처럼 다루고 있었다.

20분쯤 걸으니 그제야 끝까지 도착했는지 그가 멈춰 섰다.

“도착했어요!”

공양이 벽 전체에 가득 채워진, 마치 네온사인과 같이 오색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구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바로 이것들이에요.”

이런 용족 살인마 같으니.

“나한테 한 개를 주었으니 나도 한 개 줄게요. 여기서 맘에 드는 걸로 하나 고르세요.”

“괜, 괜찮아요.”

용족이 알면 울겠다.

시하의 반응에 공양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맘에 드는 게 없어요? 그럼 밖에 있는 것들 중에 고를래요?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중에 아무거나 괜찮아요.”

시하는 마치 졸부의 장식장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영근도 없는데 그걸 뭐에 쓰겠어요.”

“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그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시하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공양, 여기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어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래됐어요. 확실한 건 여기 내려와서도 계속 수련을 했으니까, 지금은 아마 화신쯤 됐을 거예요.”

그 말은 최소 몇백 년은 됐다는 거네.

“여기서 나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여기는 나갈 수 없어요. 이 계곡은 너무 높아서 수행 능력이 없으면 날아오를 수 없거든요. 능력이 있어서 날아오른다고 해도 위에 있는 멸영진에 먹히고 말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살다가 죽는 방법밖에 없어요.”

“꼭 낭떠러지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절벽에 긴 구멍을 통해서 통로로 올라가면 되지 않나요?”

그녀가 절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능력 정도면 분명 쉽게 뚫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공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동생, 농담도 잘하네요. 이 절벽 위에도 혼돈의 바람이 섞여 있어서 그렇게 쉽지는 않…….”

덜커덕. 돌멩이 하나가 갑자기 떨어지더니 위로 짙은 남색의 맑은 하늘이 보였다.

시하가 방금 전 벽을 두드리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통, 통로가 뚫린 모양인데요.”

공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해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몇백 년이 걸려도 파지 못했던 통로는 그녀가 몇 번 두드리자 바로 열렸다. 매번 통로를 파려고 할 때마다 혼돈의 바람에 의해 가로막히곤 했었는데?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걸 거야.

“우리 이제 나갈 수 있어요.”

시하가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공양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시하는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건 공양이 파 놓은 동굴 덕분이었다. 근데 뜻밖에도 시하가 함께 나가서 이 넓은 바깥 세계를 둘러보자고 하자 공양은 거절했다.

“왜요?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동생, 알다시피 저는 대부분 이 계곡에서 수련을 했어요. 그리고 여기 떨어지기 전에는 연습생에 불과했고요.”

“알아요. 저번에 얘기했었잖아요.”

하지만 공양은 제 말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멸영진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제가 아래에서 수련할 때도 당연히 자연을 떠나 살았어요.”

“무슨 뜻이에요?”

영근도 없는 이 사람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제발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 좀 해보세요.

“모든 수사들이 결단(結丹, 다섯 가지 승격단계 중 세 번째 단계) 후 매 경계를 지날 때마다 몸에 벼락의 기운을 끌어들이기 위해 총 81개의 벼락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잖아요.”

호구 오라버니가 대부분 수사들이 거기서 탈락한다고 얘기했었다.

“네, 들어봤어요. 근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당연히 상관있죠. 저는 그동안 자연 밖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승계를 할 땐 벼락을 맞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근데 만약 제가 통로를 나서면 자연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럼 그전에 맞지 못한 벼락을 한꺼번에 맞게 된다고요.”

“아.”

“저는 이미 화신까지 되었으니 금단, 결영(結嬰), 화신까지 한 번에 세 차례의 벼락을 맞아야 해요. 모두 243번의 벼락을 맞아야 하는데 제가 당해 낼 수 있겠어요?”

시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를 위로하며 어깨를 다독였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정월 보름에 다시 찾아올게요.”

공양은 입을 삐죽거리며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가세요. 통로가 뚫리긴 했어도 위에 아직도 혼돈의 바람이 있어 도와줄 수가 없어요. 혼자 기어 올라갈 수 있죠?”

시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 혹시 전해야 될 말이나 물건이 있어요? 제가 전달해줄게요.”

“괜찮아요.”

시하는 어차피 택배를 배달하던 경험도 있었기에 물어보았지만 공양은 거절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다가 두 걸음 올라갔을 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괜찮아요? 서신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여기 떨어진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직 있겠어요?”

“그럼 시간 되면 보러 올게요.”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요?”

“이 계곡에는 비밀이 너무 많아요. 만약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성가신 일만 많아질 뿐이에요.”

“그럼 너무 외롭지 않겠어요? 아니면 애완동물이라도 키워 보는 건 어때요?”

“좀 가요, 이제!”

방금까지도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니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시하는 상한 마음을 안고 동굴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리를 펴서 힘껏 앞으로 나아갔다.

“동생.”

그때 갑자기 공양이 부르자 시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공양은 갑자기 뭔가를 그녀의 입속에 던졌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게 뭐예요?”

왜 함부로 남의 입에 물건을 던져? 내가 뭐 동물원 안 원숭이인 줄 아나?

“이별 선물이에요. 이제 그만 가요.”

“잠깐만요! 대체 뭐예요?”

“걱정하지 마요. 당신한테 좋은 거니까.”

그가 손을 흔들자 방금 전에 떨어졌던 돌이 갑자기 떠오르며 동굴 입구를 순식간에 다시 봉해 버렸다. 시하가 아직 마지막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만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떨어지지 마요. 처리하기 귀찮으니까.”

낭떠러지 끝은 통로의 출구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었다. 동굴 입구를 나오는 순간 시하는 마치 새로운 삶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자유를 만끽했다. 맑은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향기로운 꽃 모두 아름다웠다. 게다가 저기 곧 사람을 물려고 준비하는 고양이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잠깐만! 거대 고양이?

시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멀지 않은 곳에 큰 아가리를 벌리고 어린아이를 먹으려고 하는 거구의 괴수가 보였다.

왜 저 거대 고양이가 또 나타난 거지? 털 색깔도 반년 전에 봤던 그 고양이와 똑같잖아. 설마 황색 고양이 괴수가 모든 숲에 기다리고 있는 건가? 설마 지난번에 봤던 그 고양이는 아니겠지?

“고양이?”

참다못해 불러 보자 고양이가 흉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는 그녀를 보더니 가늘게 뜨게 있던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바로 발아래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뒤뚱뒤뚱 시하를 향해 뛰어왔다.

“야옹!”

그러고는 그 큰 머리를 그녀의 몸에 비볐다. 역시 같은 고양이었다.

“됐어, 됐어. 알았으니까 그만 찾아.”

생선포를 찾는 거잖아. 그녀는 주머니에서 큰 생선포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주머니에 틈이 날 때마다 먹을 걸 쑤셔 넣은 덕분이었다. 다행히 옥화파가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다른 건 다 없어도 생선포만큼은 많았다.

“야옹!”

고양이는 생선포를 한입 물더니 더 크게 울고 꼬리로 그녀의 발을 다정하게 감쌌다. 시하는 당황스러워하며 고양이의 큰 머리를 만져주었다.

“왜 또 나와서 어린 친구를 괴롭히는 거야? 너는 영수라며?”

전에 호구 오라버니가 그러길, 모든 영수는 주인이 있어 주인의 명령이 아니면 함부로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흑살도 이 고양이는 호산영수라고 했었고, 호산영수는 보통의 영수와 달라 맺는 계약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호산영수는 계약을 맺은 주인이 없지만 일정한 범위 내에만 머무르며 그 지대를 지켜야 하는데, 이 고양이가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지키고 있던 문파의 멸문과 관련이 있을 듯했다.

그러나 호산영수건 보통의 영수건 모두 영으로 수련하니 음식은 먹지 않는다. 사람을 먹다가 오히려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는지라 고양이가 사람을 쫓는 행위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심심해서. 묘성인은 역시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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