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와 필홍이 수릉봉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전송진에서 나왔더니 바로 옆에 후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후지, 아니. 오라버니. 저희를 기다린 거예요?”
“응.”
목소리에 그 어떤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하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힘들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여기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물으려고 할 그때 그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손을 마주치며 파이팅이라도 외쳐야 하나? 시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부딪혔다.
“고마워요. 오래 기다리셨죠?”
“응.”
후지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누이가 사랑스럽게 안아준다고 했는데? 마존은 역시 거짓말쟁이었다.
그때 필홍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처음으로 이 제자를 마중하러 다 나오셨네요.”
그는 감동한 표정으로 시하가 했던 것처럼 후지와 손뼉을 치려 했으나 후지가 바로 손을 거두는 바람에 허공을 치고 말았다.
내 동생을 종일 뺏어 놓고는 감히 손뼉을 치려 하다니 저리 비켜, 이 미련한 제자야.
“그만 돌아가거라.”
후지는 차갑게 눈을 흘기고는 몸을 돌려 시하와 손을 잡고 걸었다.
* * *
반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영어 공부를 할 때처럼 전력을 다해 공부하니 이제 이 세계의 문자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적어도 당시에 후지가 그녀에게 준 책들 중 2/3 정도는 이해했다. 계학당에서도 단순히 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고, 교과 과목에는 경맥, 경혈과 같은 기본적인 의학 지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하는 필홍이 왜 학당을 추천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술도 사실은 몸을 수련하는 것인 데다가, 내공심법과 영기를 다루는 법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경맥과 경혈을 모른다면 아무리 글을 배워도 수련할 수 없었다.
반년 동안 그녀는 문자를 배우는 것 외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경혈과 경맥을 변식하는 데 사용했다. 이런 지식들은 영기를 수련하는 수사들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모든 수사들은 자유자재로 모습과 경혈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맥만은 영수와 무술 모두를 통해야 했다. 영수는 영기를 다스려 수련을 하고, 무술은 내력(內力)을 통해 수련하다는 방법 면에서 서로 다를 뿐이었다.
무술이면 몰라도 후지는 경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하든 모두 답해 주었다. 시하는 이런 호구 오라버니가 꽤 만족스러웠다. 물론 가끔 코에서 이상한 바람을 내뿜고, 기분 좋으면 볼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녀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것 외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었다. 시하는 이런 호구 오라버니가 한 명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야밤에 창문을 기어 올라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가 왜 그렇게 이야기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녀가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고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섯 살 이후로는 옛날이야기 같은 건 끊었다고요. 이야기를 하더라도 전문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순 없는 거야? 도대체 뭘 이야기해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옛날에 동해 주변에 팔계 유림수(渝臨獸)라는 놈이 살았는데 몸집이 거대하여 높이만 대략 십 장(丈, 길이의 단위, 한 장은 약 3m에 해당함)이나 되고, 수계(水溪)의 술법을 아주 잘 다뤘어. 놈은 사방에 둥지를 틀고, 과거에 수사들을 엄청나게 살해했지. 하지만 그놈은 내가 죽였어.”
“옥림성에 마수가 살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 만귀번(萬鬼幡)을 수련하여 자신의 수행 계급을 높이곤 했어. 그 수하에 얼마나 많은 망혼들이 있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지. 근데 그놈은 내가 죽였어.”
“제월문에 한 역적이 살았는데, 사술(邪術)을 배워 귀도(鬼道)에 입도했어. 제월파의 삼천 제자가 그의 손에 죽었지. 근데 그놈은 내가 죽였어.”
젠장, 이게 자기 전에 들을 이야기야? 괴담이지! 재우겠다는 건지 깨우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번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그녀의 주머니에 간식을 챙겨줄 때, 진지하게 경맥에 대해 설명해줄 때, 매번 잊지 않고 다정하게 그녀에게 베개를 놓아줄 때, 그렇게 매사에 광명정대한 사람이 모든 일에 그녀만 싸고돌고 필홍만 벌할 때, 시하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 * *
“제자 원오, 태사조님을 뵙고자 합니다.”
어느 날, 공중에서 갑자기 한 음성이 들려오자 시하는 익숙한 이름에 기억을 되짚었다.
“이 녀석은 왜 온 거야?”
필홍이 손에 들고 있던 볶은 무채 그릇을 내려놓았다. 또 무잖아! 시하는 이미 반년이나 먹어 왔기에 질려서 얼굴을 찌푸렸다. 필홍이 손을 높이 흔들자 수릉봉의 하늘만 보이던 상공에서 투명한 문이 열렸다.
“들어와!”
익숙한 흰색의 인영이 위로부터 날아 들어왔다. 짙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니 몹시 절박한 일이 있는 듯 보였다. 시하가 자세히 보니, 바로 반년 전 삼림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었다.
“와, 오랜만이에요.”
시하가 그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흔들자 원오는 잠깐 멍해졌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라 제일 처음 만났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히 그녀를 한 번 보더니 다시 필홍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제자, 사부님을 뵙습니다. 태사조님은 어디 계신가요?”
“사부님은 어쩐 일로?”
“그게, 태사조님께서 전에 저를 도와 마수 흑살을 물리치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가 그놈을 데려다가 쇄마진(鎖魔陳)에 가뒀거든요. 근데 오늘 가서 살펴보니, 그놈은 보이지 않고 쇄마진의 봉인이 모두 파괴되어 있었어요.”
“뭐?”
필홍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치던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움직이고 산이 흔들렸다. 멀지 않은 한 봉우리에서 한줄기 붉은빛이 보였다. 그 봉우리가 얼마나 크게 울렸던지 사방의 산봉우리도 같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하는 깜짝 놀라 급히 무채 접시를 붙잡았다.
깜짝이야! 하마터면 아침도 먹지 못할 뻔했잖아.
“안 돼, 봉인이 파괴됐어.”
필홍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돌려 실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부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 하얀빛이 반짝이더니 방금까지 실내에 앉아 있던 후지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바로 그 붉은 빛을 향해 사라졌다. 필홍도 급히 앞으로 두 걸음 가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멈춰 서고는 시하를 돌아보았다.
“쇄마진을 봉인하는 것이 평소보다 더 어려울 거라 내가 가 봐야겠어. 오늘은 너 혼자 계학당에 가야 될 듯해.”
“알겠어요.”
시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반년이나 살았는데 학교 가는 길쯤은 혼자서도 문제없었다. 필홍은 그제야 검을 부려 사부를 쫓아갔고, 그 장소에는 아직도 무를 먹고 있는 시하와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원오만 남았다.
“그 봉인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네. 쇄마진은 옛날 마수들을 가두고 있었는데, 파괴되면 파에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게 돼요. 때문에 사부님과 태사조님이 그렇게 급하게 봉인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거죠.”
시하는 원오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서 있는 원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제가 그렇게 무서워요?”
“아, 아니에요!”
“무섭지 않은데 왜 떨어요?”
시하는 갑자기 마치 어린 친구를 괴롭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됐어요. 이제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야겠어요!”
그녀는 빠르게 밥을 몇 숟가락 뜨고는 바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산에서 내려가려고요?”
“그래요!”
“그, 그렇지만 태사조님이랑 사부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잖아요.”
“괜찮아요. 길을 아니까.”
어린애처럼 길을 잃을 일도 없을 텐데 원오는 곧 울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기다려요! 저, 저도 같이 가게.”
학교 가는 길을 호구 오라버니와 노인네만 아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지? 시하는 원오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제가 도망갈까 봐 그러는 건 아니죠?”
그녀는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마녀로 보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망가지 않으니까. 효관봉에 갔다가 바로 돌아올 거예요.”
“그래도 저랑 같이 가요.”
“그럼 맘대로 하세요.”
시하는 일일이 설득하기도 귀찮아 바로 전송진으로 걸어갔다. 원오는 마치 그녀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하더니 진내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때,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잠깐만!”
“또 무슨 일이에요?”
“당신, 정말 효관봉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면요?”
당신 집으로 가게요?
원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으로 결을 하나 만들었다. 그러자 아래에 또 하나의 전송진이 나타났다.
“이 진도 효관봉으로 가는 것이니 이걸 타고 가세요. 그럼 제가 믿을게요.”
시하는 아래에 생긴 새 법진을 살펴보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그쪽으로 두 걸음 정도 가다가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싫어요.”
“왜, 왜요?”
“옆에 버젓이 안전하고 믿을 만한 전송진이 있는데, 제가 왜 이걸 타고 가야 하죠? 당신이 나한테 돈을 준 것도 아닌데.”
그녀는 공짜로 실험용 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당신이 이렇게 저를 두려워하는데, 저 전송진을 탔다가 효관봉이 아닌 어디 험악한 곳이라도 가면 어떡해요? 혹시 당신의 부모가 마존에게 살해당해서 동생인 나한테 복수하려 함정을 만들고 복수의 한을 풀려고 하는 거라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원오가 갑자기 놀란 기색을 하고 끼어들었다. 그에 오히려 더 놀란 쪽은 시하였다. 풋풋한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원오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내 계획을 다 알고 있었다니, 더욱 남겨두면 안 되겠어!”
혹시나가 역시나가 될 필요는 없잖아!
원오는 갑자기 그녀의 옷깃을 끌어당기더니 바로 그 법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법진이 반짝 빛나더니 눈앞에 풍경이 휙 바뀌었고, 그녀는 어느새 낭떠러지 위에 도착했다. 원오가 여전히 그녀의 옷깃을 잡고 있다가 홱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아래는 깊은 낭떠러지였기에 시하는 깜짝 놀라 발버둥을 쳤다.
“소년, 침착하세요.”
“역시 마존의 누이답네. 나의 구속 마술에 걸리고도 움직일 수 있다니.”
구속 마술이라니, 어디가?
“원오, 이건 오해예요. 저를 우선 풀어줘 봐요.”
원오는 크게 소리 내서 웃더니 차가운 기운과 함께 표정을 더 험악하게 굳혔다.
“풀어준다고? 마존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였을 때도 과연 놓아주려고 했을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그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내가 그 누이를 죽이면 공평하잖아!”
“소년, 제 말 좀 들어봐요.”
그녀는 최대한 마음속에 공포를 누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마존의 누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