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89)

“혹시 글을 몰라?”

필홍이 묻자 시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린 듯했다.

“하하하, 놀리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글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거…… 신선계 통용 문자예요?”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건 없나요. 영문도 괜찮은데.

“너, 글을 모르는구나.”

확신에 찬 필홍의 말투에 ‘문맹’이라는 두 글자가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지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말이 통하는데 문자가 다를 줄 누가 생각이나 했냐고!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이야!

“하하하하하!”

필홍은 하늘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더니 심지어 배를 끌어안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이렇게 다 큰 어른이 글을 몰라? 하하하, 옥화파의 열 살 어린아이도 다 아는데, 글도 모르면서 공법을 익힌다고? 하하하!”

“그만 웃어요!”

이건 단지 문화 차이일 뿐이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하하!”

필홍은 일 년이라도 웃을 수 있을 듯했고 갑자기 그동안의 모든 화가 다 풀리는 듯했다. 시하는 순간 엄청난 상처를 받고, 조용히 옆에 있던 후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오라버니.”

후지의 마음이 일순간 움직이더니 바로 어시스트 모드가 가동됐다.

“입 안 닥쳐?”

필홍은 놀라서 조용해졌고, 즐거웠던 것도 잠시 바로 비참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를 혼내시다니, 역시 사부님은 나를 내치시려는 게 분명하구나.

“글을 몰라도 괜찮다. 그저 한 가지 공법에 불과하니 내가 읽어주지. 이 무술 내공 공법은…….”

나도 배워 본 적이 없는 듯해.

“괜찮아, 천천히 익히면 되지. 무술 동작들이 비록 글로 깨우치는 것이긴 하지만, 글을 모르면…….”

정말 방법이 없어.

“오라버니가 가르쳐줄 테니, 수련 방법을 바꿔 보는 건 어때? 아니면 불수는 어때? 불수는 불경을 읽기만 하면 되거든.”

필홍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끼어들었다.

“사부님. 불경도 글을 알아야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럼 귀수는 어때?”

“사부님, 얘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럼 마수는?”

“사부님, 저희는 선문입니다.”

선문의 제일 태사조가 마도(魔道)에 들라고 권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게다가 마수도 영근이 있어야 하고요.”

시하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희망이 두세 마디에 충격을 받고 부서졌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순간 살아갈 의미조차 잃어버린 듯 느껴졌다. 역시 이 세계에 온 건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인가.

시하의 기분이 안 좋으니, 오라버니도 기분이 우울해져 이 모든 일의 진상을 폭로한 원흉을 흘겨봤다. 저 미련한 제자가 망쳐 놓았으니 이제 정말 쫓아낼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

필홍은 흠칫 놀라며 오히려 억울해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나를 흘겨보시지? 난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해! 사부님, 제가 제자가 맞긴 한 건가요?

사부의 무서운 눈빛에 못 이긴 필홍이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방법이 없진 않아. 글을 모르면 배우면 되거든. 우리 문파에 효관봉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계학당에서 전문적으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어. 그곳에 가서 배우면 될 거야.”

하지만 거기에 있는 제자들은 모두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었다. 시하는 희망이 보이자 바로 원래 그 혈기 왕성하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전 국민의 적인 자신이 그곳에서 안전히 글을 배울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제가 가서 배울 수 있어요?”

“효관봉은 모두 새로 들어온 제자들뿐이라, 관리하는 수사들도 너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좋아요. 그럼 저 내일 바로 갈게요.”

그래 봤자 외국어 하나잖아? 학창시절 해마다 표창장을 받아 온 이 모범 소녀가 외국어 하나 익히는 것쯤이야.

글을 다 배우고 나서 다시 돌아와 무술을 익히면 되겠지. 그때부터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 무술 능력도 키우고, 승계(昇階, 불교에서 법계가 오름을 뜻함)도 해서 인생 최고의 길을 걸을 거야.

* * *

그러나 그녀의 확신은 등교 첫날에 바로 엄청난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십여 명의 무 대가리가 빽빽하게 들어 앉아 그녀의 특대 무 대가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초등반이라는 말은 왜 안 해준 거지.

수정같이 빛나는 두 눈동자에 반짝반짝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시하는 갑자기 십여 년 정도를 유급당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무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창피를 무릅쓰고 제일 뒷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어린 친구들과 같은 반이라니,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하가 아직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고뇌하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갑자기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옆자리를 보니, 보기에도 사오십 살은 족히 돼 보이는 검고 건장한 뚱보가 앉아 있었다. 이 반에 고령자 동창생도 있다니 갑자기 외로움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뚱보가 그녀를 보더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흥! 네가 다 망쳤어!”

시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라 순간 가슴이 철렁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나는 필홍이라고! 필홍!”

뚱보는 갑자기 화를 내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그 둥글둥글한 몸집이 움직이니 의자도 같이 움직였다. 시하는 깜짝 놀라서 아래위로 그를 한 번 훑어봤다.

“필홍? 노인네?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하룻밤 새에 겉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인종이 바뀐 듯했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그럼 예전에 그 노인네는…….”

“그건 마술로 변신한 거고. 어쨌든 나도 태사조 중의 한 명이니까, 연령을 늘려서 좀 더 중후하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직 ‘중(重)’만 보이고 어디에도 ‘후(厚)’는 보이지 않았다.

“근데 여기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시하의 물음에 필홍은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다 망친 거잖아! 네가 글을 배우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사부님이 너를 보호하라고 날 보냈다고!”

“제가 여기 와서 공부하는 건 당신이 의견을 낸 거잖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 발을 돌로 내리친 기분이 들었다.

“됐어. 이왕 왔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날이 향상하세요, 누이님.”

그래도 시하는 그가 있으니 이제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길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근데 누가 당신 동생이에요?”

그가 뭐라고 또 한소리 하려는데, 어린 무 대가리들이 다가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 내었다.

“뚱보 아저씨, 아저씨도 수업 들으러 오신 거예요?”

“뚱보 아저씨, 다 큰 어른이 아직도 학교를 다니세요?”

“뚱보 아저씨, 너무 많이 먹어서 아직도 학교를 마치지 못한 거예요?”

“뚱보 아저씨, 얼굴이 엄청 동글동글하네요! 정말 신기해요.”

“뚱보 아저씨, 아저씨 배도 엄청 동글동글해요. 공처럼 생겼어요.”

“아니야, 아니야 동과(冬果)같이 생겼어.”

“뚱보 아저씨, 아저씨 이름은 공이에요? 아니면 동과예요?”

“뚱보 아저씨!”

젠장, 누굴 보고 동과라는 거야, 너야말로 동과다! 그저 조금 통통할 뿐인데 어디가 뚱뚱하다는 거야?

그는 엄연히 옥화파의 태사조 중 한 명인 데다가 수선계에 두세 손가락에 꼽히는 화신이다. 나이도 많고 모습도 조금 특출한 필홍이 있으니 작은 무들은 옆에 있는 시하를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하는 오히려 그들을 저지했다.

“그만해, 그만. 새로 온 친구를 괴롭히면 안 되지. 이래 봬도 아저씨는 엄청 대단하신 분이야.”

“정말이에요?”

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시하는 말을 꾸며 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아저씨는 공부도 잘하고, 너희보다 글도 더 많이 알거든. 그리고 아저씨는 날 수도 있어, 너희 사부님처럼. 밥도 잘하고 무 요리도 엄청 잘해. 또 장난감도 잘 만든다? 하늘에서 나는 거, 물에 뜰 수 있는 거 전부 만들 수 있어. 그러니까 친구들은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아저씨는 능력도 엄청나고 유능한 인재라 수선계의 ‘엄친’이야. 그러니 잘 지내야 해. 알겠어?”

“네!”

필홍은 어쩐지 ‘엄친’이라는 생소한 단어 뒤에 한 글자가 생략된 느낌이 들었다.

* * *

후지는 시하가 떠난 효관봉을 계속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복잡했다. 어떻게 키운 누이인데 바로 학당으로 떠나보내다니! 그녀의 결정이라 차마 그도 반대하지 못했지만 그 작고 부드러운 얼굴을 한동안 보지 못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오라버니로서 뭐든지 누이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니, 시하의 잘못은 없다. 그저 썩을 의견을 낸 제자가 잘못이지. 학당은 무슨 학당을 간다고, 글을 모르는 게 뭐 그렇게 큰일이야? 내가 가르치면 되는데.

가르쳐 본 적도 없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맨날 속으로만 중얼거리지만,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제자의 잘못이다. 그는 갑자기 천 년 전에 필홍을 제자로 거두기로 했던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후지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초조해져 수릉봉을 왔다 갔다 반복했다. 누이는 무 하나를 먹고도 큰일 날 뻔하고, 수행도 해본 적 없는 데다가 심지어 영근도 없었으니 한없이 연약했다.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집을 나가 오라버니도 없이 만약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괴롭히고 싸우다가 맞으면 어떡하지? 귀여워서 누가 데려 가면 어떡하지?

그는 계학당에는 고작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들뿐이라는 것도, 이미 그녀 곁에 제자를 파견하여 보낸 사실도 무시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효관봉을 향해 날아갔다.

마침 계학당의 사부는 삼자경(三字經, 글을 처음 배우는 아동에게 글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사용했던, 세 글자로 된 단어를 모아 엮은 책)을 들고 학당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일 처음 마주친 게 꼿꼿한 자세로 서서 신선처럼 흰옷을 휘날리고 서 있는 문파의 태사조였다. 그는 엄숙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담장 위에 서 있었다.

“노, 노사부님.”

“수업해.”

사부는 짧게 한마디 하더니 바로 교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계학당 사부는 노사부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왜 이상하게 담장 위에 서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계학당의 교육 실태를 조사하러 오신 건가? 그는 마음 한가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감히 묻지는 못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교실까지 들어갔다. 그러다가 교실 맨 끝에 거구의 어린이 두 명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두 명은 누구지?

사부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수업을 시작했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쯤 마쳤다. 담장 위에 있던 후지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숨을 돌린 그는 갑자기 나타난 두 학생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현할 겨를도 없이 책을 들고 바로 도망가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태사부가 수업을 참관하다니, 너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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