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는 당황스러워 식은땀이 나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들었던 말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재워줘야 한다는 말은 대체 어디에서 들은 거지?
그녀는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좀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지, 사실…….”
“오라버니라고 부르거라.”
아예 우기겠다 이거네. 이전에는 소통이 이렇게 어렵다고 느끼진 않았는데. 시하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저는 당신의 누이가 될 수 없어요. 알겠어요? 저는 이미 오빠가 있다고요. 친오빠요! 당연히 그 사람은 마존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의남매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녀의 오빠는 조금 신경질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서로 의지하며 자라다 보니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우애가 더욱 깊었다. 때문에 ‘오빠’라는 이 두 단어가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하지만 후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마디마디 힘주어 대꾸했다.
“의남매가 아니라 내가 너의 오라버니가 되어주겠다고, 오라버니!”
말도 안 돼, 당신은 오라버니가 무슨 미국의 총통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지. 경쟁해서 남의 자리를 꿰차려는 거야?
“너도 대답했잖아, 낮에.”
“그때는 당신이 저를 제자로 받아준다고 하는 줄 알았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든 저항을 잠재우듯 말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거라.”
“당신은 제 진짜 오라버니가 아니잖아요!”
방금 전까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이 갑자기 뻣뻣해지더니 얼음 깨지는 소리를 냈다. 방 안 온도도 덩달아 몇십 도가 내려가는 듯했고, 그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 곧 눈꽃이 필 듯했다. 그의 등 뒤에서 뭔가 냉기 같은 것이 흘러나가는 듯해 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큰 울림이 있더니 그녀가 있던 방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그녀의 침대 위에 있는 지붕을 제외한 그 외 지붕들은 모두 이미 재가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후지의 등 뒤를 보니 달이 훤히 밝은 가운데,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시하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순간 절개 따위는 이제 집어던지고 목숨부터 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당신이 바로 제가 몇 년간 찾아다니던 저의 친오빠예요!”
방금까지만 해도 차갑던 그의 손은 그제야 그녀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지.”
그는 그제야 동생이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이야기 계속 들어 볼래?”
“네, 당신이 뭘 얘기하든 다 들을게요.”
“그래.”
저무는 석양 아래 한 남자가 기뻐함과 동시에 그녀의 절개도 사라져 갔다.
후지는 자신이 백 년 동안 궁금해했던 이 여동생에게 이미 맘을 뺏기고 있었다. 수행을 너무 오랫동안 해 오다 보니 주변의 사람들도 다 가 버리고 늘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마존이 자신의 동생에 대해 미쳐 있을 때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동생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마존이 365일 끊임없이 자신의 여동생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아이라고 세뇌할 때도 흘려듣곤 했었다.
처음에는 희미한 개념만이 있었지만 마존의 설명에 그의 머릿속에도 아주 어렴풋이 인영 하나가 생겼다. 하지만 마존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그에게 그 누이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마음속에 인영을 그리던 붓도 갑자기 사라져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속 그 여동생은 마치 자신이 하나하나 그린 듯 완전한 자기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나타났을 때, 마치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렸던 사람이 드디어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방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누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음속에만 존재하여 오로지 자신만 간직하던 그 인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존의 누이이니까.
바로 그 점이 그도 맘에 걸렸다. 백 년 동안 상상해 왔던 그 사람이 왜 하필 그렇게 바보스럽고 어리석기만 한 마존의 동생이란 말인가. 왜 마존에게는 누이가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지 인정할 수 없었다. 마존의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허술하기만 한 마존이 누이를 제대로 돌봐줄 수는 있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누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구하기 위해, 신선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누이를 뺏어 오기로.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참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이가 바보같이 무 하나도 가려먹을 수 없는 건 모두 마존이 잘못 교육한 탓이다. 하지만 자신은 깨달음이나 여러 면에서 마존보다 백배는 뛰어나므로 분명 그보다 잘할 수 있을 테고, 이건 분명히 누이를 위한 결정이지 마존을 질투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자신을 어색해하는 건 아직 처음이라 그런 것이라 곧 괜찮아질 터였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진정한 오라버니라 느끼고 마존은 잊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후지는 힘 하나 안 들이고 누이 한 명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노릇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선법책에도 그런 내용은 없는데.
지금까지 읽어 왔던 공법비급들을 생각해봐도 어디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귓속에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당시에 마존이 했던 누이에 대한 칭찬들이었다.
“내 누이는 자기 전에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제일 좋아하지. 하루라도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잠을 못 자. 자네는 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봤어? 아마 없었을 거야. 누이도 없으니까.”
그러면 자기 전에 이야기 들려주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하여 야심한 밤에 옥화파의 태사조께서 창문을 기어올라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하는 절개를 저버림으로써 후지에게 호신술을 가르침받는 대가를 받게 되었다.
“민간 수행은 영(靈) 밖의 것만 수련하고, 불수(佛修)는 오랜 시간 동안 공덕을 쌓아야 하니 너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귀수는 귀혼수련(鬼魂修練)법을 익혀야 하니 더더욱 안 되지. 그러니 너는 무술을 익혀 도에 입문하는 수밖에 없어.”
“네.”
“무술은 아주 많은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익힐 수 있으니 마음을 집중하여 수련해야 해. 물론 버티기 힘들다고 하면 강요하진 않겠다. 궁금한 것이 있느냐?”
“딱 하나가 있긴 한데…….”
“말해 보아라.”
“제 볼을 만지지 않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는 오전 내내 시하의 볼을 만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찐빵이라도 되는 줄 아나? 아니면 이 세계에서는 볼을 만지며 가르치는 게 유행이라도 돼? 게다가 노인네는 도대체 무슨 병이라도 난 게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사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지는 아쉬웠지만 이내 정중히 손을 거두었다. 시하가 화를 내는 모습도 너무 귀여워 마냥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세요.”
“무술은 당연히 무술을 연습하는 것으로 시작해야지. 무술은 종류가 다양하여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아마 너는 그중에 하나만 집중해서 배우게 될 거야. 나도 예전에 일부 무술공법에 대해서만 접해보았으니까.”
“좋아요!”
“하지만 내가 아는 공법은 많지 않아 너한테 적합할지 모르겠…….”
“괜찮아요. 있으면 됐어요. 뭐든 배울게요!”
필홍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더니 끼어들며 참견을 했다.
“쳇, 영광인 줄 알아. 우리 사부님의 공법은 모두 최고라 그중 하나라도 배우면 영광이라고.”
왜 저가 입문했을 당시에는 이런 대우가 없었을까 싶어 노인은 손수건을 깨물었다. 시하는 그의 질투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순간 후지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고 시하가 덧붙였다.
“오라버니.”
“그래.”
후지가 만족하며 손가락으로 결 하나를 만들자 세 사람의 머리 위에 법진 하나가 나타났다.
“너의 몸은 영기가 없어 신식심법(神識心法)을 사용할 수 없어. 때문에 내가 공법을 서책으로 만들었지. 아쉽게도 수량이 많지 않지만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당탕하고 책들이 떨어졌다. 법진 중심부에서 파란색의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세 사람을 책으로 덮어 버렸다. 법진 위에서 서책들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어디가 많지 않다는 거야. 도서관을 통째로 옮겨 왔다고 해도 믿을 듯한데.
시하가 이렇게 생각할 무렵, 필홍은 사부가 왜 자신에게는 단 한 권의 공법책밖에 주지 않았나 싶어 낙심했다.
“여기서 한 권만 골라 보거라, 만약 맘에 드는 것이 없으면 오라버니가 찾아주마.”
퍽! 그 순간 시하는 위에서 떨어지는 책 한 권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렇게 가다가는 책 더미에 파묻혀 죽을지도 몰라 바로 아무 책이나 한 권을 집어 들고 말했다.
“필요 없어요. 이걸로 할래요.”
“그래, 그걸로 해. 근데 왜 더 고르지 않고?”
오라버니가 준비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아요.”
더 고르다가는 책에 깔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후지는 그제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손가락 사이로 밝은 빛이 반짝 빛나더니 땅 위에 가득 쌓여 있던 책 더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공법은 주로 내공을 수련하는 것이다. 무술의 중상급에 해당하며 다 배우고 나면 금단과 겨룰 정도의 능력을 얻을 수 있지.”
필홍은 얼굴 한가득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금단과 겨루다니! 무술에 이렇게 대단한 공법이 있었어요?”
수선계에선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수사들조차 상대할 수 없는 무술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금단과도 겨룰 수 있다니!
“그래.”
누가 그의 누이 아니랄까 봐 골라도 어쩌면 그렇게 잘 골랐는지, 후지의 마음속에 갑자기 자부심이 용솟음쳤다. 듣자 하니 대단한 책을 고른 듯해 시하는 조금 흥분되어 책의 겉면을 만지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배울 수 있어요?”
후지가 손을 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든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이 오라버니에게 물어보거라.”
시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흥분된 마음으로 서책을 펼쳤다. 이것만 익히면 이제 더는 누군가 죽이려고 쫓아와도 무섭지 않을 듯했다. 최소한 이기지는 못해도 도망은 갈 수 있었다. 반드시 열심히 집중해서 배우리라 결심하던 그 찰나, 갑자기 머릿속에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교차해 시하가 힘껏 책을 덮었다.
“왜 그러는 거야?”
필홍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분명 책을 펼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야. 내가 책에 있는 글을 못 알아볼 리가 없어. 응, 분명 착각일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책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넘길수록 온통 기이하게 생긴 올챙이 문자들이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인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음물 한 동이를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과 마음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