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괜찮아. 아가씨가 사부님을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기회가 있을 거야. 자네같이 어린 후배들이 능력 있고, 강한 사람을 숭배하는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해. 사부님이 사람이 조금 무섭고, 손이 좀 거칠고, 성격이 좀 안 좋고, 사람이 좀 폭력적이고, 수행이 조금 높은 것 빼고는……. 아. 평소에 말이 없고, 입을 열면 조금 독하고, 그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야.”
장점이 있긴 한가요? 이렇게 대놓고 비꼬다니 정말 사제지간은 맞아요?
그녀는 더 불안해졌고 생각할수록 억울하여 주머니에서 무를 꺼내 분노를 삭이기라도 하듯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베어 물었다. 우선 무라도 먹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노인은 계속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
“이 노인네를 믿어 봐. 반드시 만날 수……. 어? 자네, 손에 들고 있는 이 무 왜 이렇게 눈에 익지?”
“드실래요? 하나 드릴게요.”
시하는 남은 한 개를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어린 아가씨가 마음도 착하네.”
노인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무를 받았다.
“이 무 참 특이하게 생겼네!”
무는 노인이 약초밭에 심은 자옥빙삼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가 참다못해 한입 베어 보니 맛도 괜찮았다.
“아, 근데 아가씨 이름이 뭔가? 이 무는 어디에서 찾았어?”
“바로 앞에서요. 그 채소밭에서 뽑았어요!”
노인이 씹고 있던 무를 뿜어냈다.
“아, 그리고 제가 바로 그 시하예요.”
그는 그 한마디에 피가 솟구치면서 순간 가슴이 무언가에 찔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후지가 평생에 제일 미워하는 사람, 그 사람은 단연코 마존이었다. 후지가 어려서부터 수련에 몰두하여 유일한 취미는 바로 각종 술법을 다루는 것이었다.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아 그렇게 일찍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덧 이 수선계에 그와 겨룰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을 뚫고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능력까지 얻게 되었고, 아주 순탄하게 선도(仙途)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 마존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수선계에 전해져 오던 소문과는 다르게 그가 마존을 귀찮게 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마존이 스스로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격렬한 싸움도 없었다. 한 사람은 길을 묻고 한 사람은 길을 가르쳐줬을 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이 마존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항상 그를 찾아와 싸움을 걸었다. 그를 이기지 못하면 늘 터무니없는 흰소리들만 지껄였는데, 내용은 전부 그의 누이에 관한 것이었다. 전설 속에 극악무도한 마존은 사실 매일 자신의 누이 자랑만 하는 바보였다.
“오, 사형. 듣자 하니 자네가 수선계 일인자라면서? 하지만 아직도 혼자인 모양이네? 맘에 드는 처자는 찾았나? 에이, 이렇게 대단하면 뭐 해. 처자는커녕 누이도 없는데. 당신은 누이가 없지만 나는 있거든.”
누가 뭐라고 했나.
“내가 말했나? 내 누이 시하를 알아? 아마 모를 거야. 엄청 예쁘게 생겼어. 특히 어렸을 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었지. 작은 얼굴이 동글동글한 데다가 손가락을 만지면 너무 촉촉해서 누르면 물이 나올 듯해. 착해서 말도 잘 듣고, 맨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녀. 그 애가 ‘오라버니’ 하고 귀엽게 부르면 그 목소리가……. 쯧, 자네는 분명 이 느낌을 모를 거야.”
무슨 상관인데?
“내 누이 시하는 어려서부터 특히 세심해서 이 오빠를 많이 챙겼지. 다섯 살 때부터 작은 의자를 밟고 서서 나에게 밥을 해준다고까지 했다니까? 얼마나 따뜻하고 자상한지. 아, 자네는 누이 없으니 모를 거야.”
누가 알고 싶다고 했나?
“내 누이 시하는 옛날이야기 듣는 걸 제일 좋아해. 매일 내가 옛날이야기 하는 걸 듣지 못하면 자지도 못해. 자네는 누이에게 옛날이야기 해봤나? 분명 못해 봤을 거야. 누이도 없으니까.”
없으면 또 어때서?
“내 누이 시하는 총명해서 뭘 가르치든 금방 배운다네. 뭐든 두 번 다시 가르칠 필요가 없어. 이 아이만큼 총명한 애는 아마 없을 거야. 자네가 누이가 있다고 해도 그 아이만큼은 아닐 걸세.”
누가 비교한다고 했나?
“내 누이 시하는…….”
그만해!
평소에 큰소리치는 걸 싫어하고 주로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후지였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마존은 매번 그에게는 한 마디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얘기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화를 내도 마존의 누이에 대한 칭찬은 막을 수 없었기에 대신 그를 공격하기로 했다.
“자네는 실력이 너무 없어서 나를 이길 수 없어. 그만 포기하게!”
“하지만 나는 누이가 있지!”
“자네는 진법을 아직 통달하지 못했으니, 이 진법은 자네가 쓰기 어려울 걸세.”
“하지만 나는 누이가 있지!”
“우리 옥화문은 출중한 제자가 하도 많아, 자네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승산이 없을 걸세.”
“하지만 나는 누이가 있지!”
“자네는 무기를 다루는 데 정통하지 않고, 법기를 다루는 면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수준이 많이 떨어지니 오늘 나한테 져도 억울할 것 없네.”
“하지만 나는 누이가 있지.”
젠장, 누이가 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네 마력이란 게 누이를 칭찬하는 것에서 나오기라도 하는 거냐.
“하지만 나는 누이가 있지!”
내가 졌다!
후지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신선계를 종횡무진하며 다녔지만 상대방의 허풍에 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누이’ 이 두 글자 자랑에 완전히 질려 버렸기에 그 후로 이 두 글자는 주문처럼 후지의 머릿속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바보스러운 마존이 실종되고 나서야 그의 삶에도 이전과 같은 평온한 삶이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세상에서 바보 하나가 사라졌다. 매일 그의 귓가에 자신의 누이를 자랑하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일상이 그는 오히려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
누이가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인가? 정말 그 바보가 얘기하던 대로 그렇게 좋을까? 세상 모든 누이가 그렇게 신기한 걸까? 아니면 그의 누이만 그런 건가?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도 그의 누이를 한 번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어느덧 백 년이나 지난 지금,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가 제일 처음 그 시하라는 아이를 보았을 때 그녀는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길 능력도 없으면서 금단기(金丹期)의 마수를 대적하고 있었다. 역시 그 오라버니에 그 누이여서 그런지 그 바보스러운 모습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금방 그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선문까지 올라와 전혀 힘든 기색도 없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 당당히 신분을 밝혔다.
후지는 이렇게 가다가는 그녀가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녀를 들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마존이 손으로 잡으면 부서질까, 입에 물면 녹아 버릴까 하던 그 누이었다. 입만 열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고 칭찬하기에 백 년 동안이나 궁금해했으므로 그 누이가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어디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그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시하를 바라보았다. 바보 마존이 별의별 아름다운 말로 그렇게 칭찬하더니, 깨끗하게 씻은 그 누이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아주 예뻤다. 이런 갑작스러운 감정이 사실인지 믿을 수 없어 살을 꼬집어 확인하고 싶었다.
음, 이건 분명히 착각일 것이야.
그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그가 다시 시하를 만났을 때 그녀는 한창 풀밭에 앉아 뭔가를 갉아 먹고 있었다. 아삭아삭 씹어 먹는 모습이 토끼 같아서, 갑자기 그 바보 마존이 누이의 피부는 아주 부드러워 얼굴의 감촉이 아주 좋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찔렀다.
“뭐 하는 거예요?”
시하는 갑자기 나타나서는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찌르는 이 변태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파 무 몇 개를 뽑아 먹었을 뿐인데 설마 혼내려고 온 건 아니겠지?
“사부님, 바로 저 여자입니다! 바로 저 여자가 훔쳐 먹었어요.”
노인은 후지의 등 뒤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일러바치듯 손가락으로 시하를 가리켰다.
“배고파서 무 몇 개를 먹었을 뿐이에요!”
“허튼소리, 뭐가 무야!”
그녀의 이름을 알고 난 후 노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건 자옥빙삼이야. 내가 이백 년 동안 키운 자옥빙삼! 무를 먹었다니, 과연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마녀로군!”
“당신도 같이 먹었잖아요!”
시하는 그의 손에 들고 있는 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인은 손을 숨기며 바로 쥐고 있던 무 반 토막을 버렸다.
“그, 그건 네가 나를 모함하는 거야. 나는 먹지 않았어.”
그럼 무 위에 있는 이빨 자국은 개가 남긴 건가?
“그렇게 당당하면 나와서 얘기하세요. 남의 등 뒤에 숨어서 뭐 하는 건데요?”
노인과 나이 차이만 적었어도 뭐라 하지 않았겠지만, 나이도 많은 노인네가 남의 뒤에 숨어서 고자질이나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거 아냐?
“난 나가지 않을 거야!”
노인이 차갑게 소리치고는 후지의 옷깃을 잡고 하늘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그 어디에도 고수의 품격과 선인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부님, 저를 도와주셔야 돼요! 제가 이백 년 동안 키워 온 자옥빙삼입니다. 이백 년이요! 이틀만 있으면 다 익을 수 있었는데 저 여자가 무라고 먹어 버렸어요. 제가 방금 약초밭에 가서 보았더니,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렸지 뭡니까?”
시하는 순간 엄청난 시비에 휘말리게 된 듯해 당혹스러웠다. 역시 노인을 상대하기란 만만치 않군.
“저는 정말 그게 무인 줄 알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늘 이 노인네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내가 오늘 너…….”
“미안해요!”
노인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게 염치없게 우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쉽게 사과를 해? 그럼에도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지 바로 돌아서서 사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부님, 어서 이 제자를 위해 한 마디 해주시지요.”
그냥 시비를 걸고 싶어 보이는 노인을 바라보던 시하는 여전히 제 볼을 찌르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제 얼굴을 찌르고 있을 거예요?”
후지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시하의 얼굴을 찌르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그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맘속에는 몽실몽실 뭔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바보의 말이 맞았다. 과연 누이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웠다. 꼭 다시 한 번 찔러 보고 싶었다. 근데 이 아이가 왜 무를 먹고 있지 않는 거지?
“사부님! 내 불쌍한 자옥빙삼!”
노인은 더욱 크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