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네가 정말 시하라는 것이냐?”
“네, 왜 그러는 거죠?”
그녀는 자신을 누르는 위압감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빨리 집에 돌아가 시하가 정말 내 이름이 맞는지 호적을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한참 그녀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서늘한 시선에 그녀조차 자신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병원에서 애가 바뀐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 이름을 부르지 말거라.”
“네?”
무슨 뜻이야, 이게. 내 이름이 당신을 해치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 휙 날아갔다.
“태사조님!”
원오가 급하게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시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몸을 덜덜 떨면서 태사조를 쫓아갔다. 검을 부리며 황급히 태사조를 따라가는 소년의 눈에는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
“태사조님, 잠깐만요!”
그는 마치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날아갔다.
시하의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리무중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와서 설명 좀 해줬으면.
두 사람이 가고 난 후 쓰러졌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고 그중에는 헌림과 유유도 있었다. 초원 위에 다시 모여든 짙은 안개에 선산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중요한 일을 두 선인에게 물어본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원 이동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디로 가야 이들을 찾을 수 있지?
그때 원오가 준 옥패가 생각나 자세히 보자 옥패 위에 가는 광선이 하나 있었다. 화살촉처럼 생긴 모양이 한 방향을 가리키더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시하는 이 옥패가 내비게이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광선을 만진 그녀는 큰 통증을 느꼈다.
“아야.”
그녀의 손가락에 구멍이 뚫려 핏방울이 흘러내리더니 옥패 위에 떨어졌다.
이건 레이저인가? 뭐가 이렇게 날카로워. 엄청 아프네.
“은인님.”
헌림이 깜짝 놀라 그녀의 발아래를 보자 시하도 고개를 숙였다.
“어머, 이게 뭐지?”
그녀의 발아래에 둥근 모양의 지도가 있었다. 붉은 광선을 뿜어내는 지도의 도안 가운데에는 글씨가 춤을 추듯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글씨가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붉은빛이 더욱 짙어졌다.
시하가 깜짝 놀라 도안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눈앞에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헌림과 유유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넓은 바다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기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요패(腰牌)를 주세요.”
멀지 않은 곳에 단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나무 탁자가 있었다. 흰 비단에 파란 문양이 수놓인 옷을 입은 남자가 성가신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인지 그의 옷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시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걸어갔다. 주위를 곁눈질하자 뒤이어 몇몇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희색이 만면한 이들은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들도 그녀처럼 차원 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 옥패가 만들어 낸 도안이 전송 수단이었을까?
남자는 나무패 위에 몇 글자를 쓴 뒤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운이 좋았다 생각하세요. 당신이 오늘 마지막이니까.”
“네?”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은 채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요. 해가 저물고 있잖아요.”
시하는 그제야 옆에 있는 문을 발견했다. 아니, 문보다는 문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면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이건 혹시 보안 검색대?
“왜 그러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지 않고.”
패를 건네준 남자가 그녀를 노려보더니 줄을 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인원이 다 차서 저 사람이 마지막이에요. 당신들은 내일 다시 오세요.”
실망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자니 시하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겨우 웃음을 참고는 보안 검색대는 있는데 어째서 콘센트가 없는지를 고민하며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통과한 시하는 순식간에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다. 조용하고 넓던 모래사장이 시끄럽고 요란한 부둣가로 변해 있었다. 눈앞에 큰 배 하나가 보였는데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움직였다.
부둣가에는 단상에 있던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크게 번호를 외치고 있었다.
“246번, 247번, 248번!”
그가 번호를 부를 때마다 한 사람씩 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하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보안 검색대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는 그저 넓은 모래사장만이 있었다. 방금 전 그 문은 들어올 수만 있고 나갈 수는 없는 단방향 전송 문이었다.
“205, 205번 왔어요?”
번호를 외치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시하를 보았다.
“거기, 당신을 부르고 있잖아요. 당신이 205번?”
“아니요!”
이백오(중국어로 멍청이라는 발음)라니, 너나 이백오 해라!
“아니라고요?”
그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잔뜩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서 목패를 낚아챈 남자가 화를 냈다.
“여기 쓰여 있잖아요? 당신이 바로 이백오 번인데 왜 아니라고 하는 거죠?”
알고 보니 목패에 번호가 쓰여 있었다. 번호를 바꿀 순 없는 건가? 이백오라니. 그건 멍청이라는 뜻이잖아.
“꾸물대지 말고 어서 배에 오르세요! 당신만 기다리고 있잖아요.”
남자는 성가신 듯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잠깐만요, 저는…….”
이건 어디로 가는 건데. 우선 설명 좀 해주라고!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시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 안으로 들어가다가 바닥에 주저앉은 시하를 본 남자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느려 터져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을 외운 남자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손가락을 뻗었다.
시하는 전신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졌고 살이 몇 킬로그램은 빠진 것처럼 온몸이 가벼웠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자 진흙이 잔뜩 묻어 있던 옷도 새 옷처럼 깨끗해졌다. 심지어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던 얼룩도 보이지가 않았다.
“와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당신 도대체 뭘 한 거죠? 어떻게 순식간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
“호들갑 떨기는.”
그는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시하는 여전히 신기한 듯 자신의 ‘새’ 옷을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너무 지저분하게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깨끗하니 이제 사람들이 외계인처럼 쳐다보진 않겠지.
그녀는 걱정스럽게 사방을 둘러보고는 얼른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외계인이로군.
배 위에 있는 반 정도의 사람들은 고대 복장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뭘 입은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헝겊으로 만든 대걸레 모양의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각양각색의 털을 전신에 꽂고 있었다. 더 심한 사람은 각종 알 수 없는 뼈다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예 침대보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 듯했다.
양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고 팔만 빼놓으면 다 옷인 줄 아나? 그래도 최소한 머리는 나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시하는 마치 코스튬플레이 파티장에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문득 자신의 옷차림이 오히려 이 시대의 정서에 더 맞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동생.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이리 와서 앉아요.”
몇 걸음 밖에서 몸에 닭털 분장을 한 남자가 이마에 늘어뜨린 알록달록한 닭털을 뽑으면서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풍랑이 세서 앉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어요.”
시하는 그제야 배가 이미 출발하여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닭털남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더니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만들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같은 처지인데 서로 도와야죠.”
닭털남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성은 육, 이름은 인. 외자예요. 여기는 내 남동생 육슬이고요.”
그는 옆에 있는 또 다른 닭털남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인데, 소저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육인(路人, 행인)’, ‘육슬(Loser, 패배자)’. 시하는 이름들이 참 품격 있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씰룩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저는 성이 시, 양국 사람이에요.”
그녀는 거짓말을 술술 지어냈다.
“당신처럼 이렇게 어린 처자가 여기까지 오려면 참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시하는 문득 지금까지의 눈물겨운 여정을 떠올리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괜, 괜찮아요.”
최소한 살아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잘한 거예요. 저와 제 동생은 꼬박 5년이나 찾아다녔어요.”
닭털남은 본인도 경험한 일이라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저 바다만 지나면 곧 도착할 수 있어요.”
“육인 오라버니는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육인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옥화파로 가는 거죠. 당신도 우리처럼 옥화파에 가서 선인을 뵙고 수선(修仙: 신선이 되는 도를 닦다)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수선을 한다고요? 옥화파에 신선이 있어요?”
시하는 조금 흥분되어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단 말이야?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죠?”
육인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는 표정을 짓더니 크게 한숨을 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닭털남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시하는 자신이 비로소 어떤 세계에 던져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여기는 판타지 세계였다. 그것도 판타지 선협 세계. 예전에 그녀가 봤던 칼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사람들은 진정한 선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수련 중에 있는 수선자들이었다.
여기는 일반인들도 와서 수련을 하면 신선이 될 수 있지만 수선계로 가는 길이 일반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연이 닿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가고 있는 옥화파는 소위 수선직업기술학원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는지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선이 되는 길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 평범한 사람들은 수선계의 존재를 발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발견했다고 해도 선문을 찾기도 어렵고, 좋은 스승을 찾아 제자가 되려고 해도 자질, 이해력 등등 모든 면에서 까다로운 평가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신선이 될 수 있는 결정적 요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