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9)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를 쫒을 때의 흉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고양이는 그녀를 보고 야옹하며 반기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위협하듯 이빨을 드러내어 울부짖었다.

지금 나를 도와주는 거야? 생선포 한 봉지에 우정이라도 생긴 건가?

감동이야. 묘계(瞄界)의 생물들은 정말 다정하기도 하지!

“호산영수(護山靈獸, 산을 보호하는 상서로운 짐승)로구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하찮은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나의 서혼독무(噬魂毒霧)를 무슨 수로 피해 갔나 했다. 흥, 일개 오계영수(五階靈獸)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겠어?”

그가 다시 검은 풍인을 몇 차례 날리자 발톱을 치켜세운 고양이가 걷어차 버렸다. 검은 풍인은 순식간에 부서지며 흩어졌고 고양이는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라 남자에게 일격을 가했다. 검은 옷의 남자는 몸을 살짝 돌리며 일격을 피해 다시 풍인을 날렸다. 사람과 고양이가 하늘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시하는 걱정되는 마음에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며 묘계의 친구를 응원했다. 그 틈을 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호흡이 미약한 건 주위에 퍼진 검은 안개 때문인 듯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 한참 고민하는데 하늘에서 “야옹!” 하는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자 몸에 구멍이 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시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고양이도 남자를 당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강한 힘으로 상대의 풍인을 부숴 버린다 해도 남자의 몸놀림은 민첩했다. 촘촘히 날아오는 풍인을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싸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자를 상대하기가 더 어려울 터였다. 고양이가 상처를 입자 남자는 더욱 사납게 공격했고, 거대한 검은 풍인이 고양이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야옹!”

정면으로 풍인을 맞은 고양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쿵 하고 하늘에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고양이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야옹아!”

그녀가 마음 졸이며 뛰어가자 손바닥 길이만큼 찢어진 고양이의 배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너무 화가 나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야, 이 미친놈아. 지금 고양이를 학대한 거야? 내가 동물협회 회원인 줄은 몰랐지?”

나무막대기를 움켜쥔 그녀 거침없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내가 너 오늘 죽여 버릴 거야!”

남자가 냉소를 지으며 결을 읊자 앞에 법진(法陣. 일정한 법칙을 이용하여 만든 진) 하나가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법진 가운데에서 불덩이가 나타나 순식간에 커졌다. 남자가 손에 든 부채를 한 번 흔들자 불덩이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시하는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치자 손에 든 막대기를 꽉 잡았다. 어차피 죽게 생겼으니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사람을 위해 죽든 아니면 고양이를 위해 죽든, 죽을 때까지 덤빈다고!

날아온 불덩이가 바로 코앞에 떨어져 그녀의 인생을 돌아볼 짧은 시간조차 여의치 않은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흰 섬광이 내려와 불덩이를 덮쳤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은 불덩이가 아닌 재에 뒤덮였다.

불덩이가 꺼졌어!

그런데 그녀의 발 옆에 투명한 광검이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쳐 날뛰던 검은 옷의 남자가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두려운 눈빛을 보이더니 도망을 가려고 했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려는 순간, 남자가 무언가에 눌리며 처참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몇 차례 피를 토한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깜깜하던 하늘이 갑자기 환해지자 고개를 들어 보니 축구장처럼 크고, 법진처럼 둥근 모양의 물건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하얀 섬광이 비치더니 그녀 발 옆에 꽂힌 검과 동일한 검들이 날아와 촘촘히 주위를 둘러쌌다.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법진 위에 흰 인영이 보일 듯 말 듯 서 있었지만 시하는 눈이 부셔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를 구한 건가?

“흑살, 너 이 마귀 같은 놈아. 이제 어디로 도망가나 두고 보자.”

그때 우측 전방 멀리에서 열댓 살로 보이는 소년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는 검은 옷의 남자에게 날아왔다.

시하는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흰옷을 입은 걸 보니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군.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밧줄로 꽁꽁 묶은 소년이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여기서 태사조(太師祖, 사부의 스승 또는 사부의 부친을 부르는 호칭)님을 만날 줄이야, 태사조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허공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광검에 둘러싸인 그는 흰옷 때문에 하얀 눈처럼 보였다.

저러다가 벼락을 맞는 건 아닌지.

시하가 혼잣말로 조용히 읊조렸다.

흰옷의 남자가 익숙한 듯 보이던 소년은 오히려 시하를 보고 놀라워했다.

“어?”

시하는 그런 소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하이, 착한 사람.”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아래위로 시하를 훑어보았다.

“흑살이 뿜어낸 독무를 마시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건 나도 모르겠……. 맞다, 야옹이!”

고양이 친구가 떠오르자 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양이의 몸 아래 고인 피는 이미 덩어리가 되어 굳어 있었다. 고양이는 이따금씩 낮은 신음을 냈다.

“야옹아.”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시하는 마음이 답답하고 아팠다. 그녀는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작업복을 보니까 선한 신선인 모양인데, 이 고양이를 살려줄 수 있을까요?”

작업복은 어디에 쓰는 거지? 소년은 가까이 다가와 고양이를 살펴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건 천애파의 호산영수가 아니냐? 어떻게 여기에? 설마…….”

소년이 고개를 돌려 밧줄에 꽁꽁 묶인 흑살을 보자 흑살은 더 시끄럽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아깝게도 한발 늦었군. 천애파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끝내 천애파를 모조리 멸살했구나! 괘씸한 놈.”

얼굴을 붉힌 소년의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무슨 주문을 읊었는지 흑살이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하지만 흑살은 겁도 없이 다시 소년을 도발했다.

“네가 지금 나를 죽인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어.”

“네놈이 아주 미쳐서 날뛰는구나.”

소년이 다가가 혼을 내주려 하자 시하가 급하게 말렸다.

“됐어요, 대선인님. 지금은 고양이를 살리는 게 더 급해요! 이제 흘릴 피도 없다고요!”

소년은 난처한 표정으로 멋쩍어하며 말했다.

“저기요, 저건 영수예요. 소생은 동물을 치유하는 기술이 없어서 고쳐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떡하죠?”

어디를 가야 수의사를 찾을 수 있나요?

이를 악문 소년은 하늘에 떠 있는 흰 인영을 보며 말했다.

“태사조님, 보시기에 어떠십…….”

그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 하얀 섬광이 내려와 고양이를 감쌌다. 육안으로도 조금씩 상처가 아무는 것이 보였다. 잠깐 사이에 피부는 원상태로 돌아왔고 상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완전 최첨단 기술이잖아!

상처가 치유된 고양이는 당황한 듯 어리둥절하다가 조금씩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자리에서 몇 차례 뛰고 앞으로 구르기도 했다. 고양이는 다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 만족한 듯 가르릉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느릿느릿 걸어왔다.

“야옹아, 너무 잘됐다!”

시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구인의 우정을 보여 주려는 순간 고양이가 그녀의 주머니에 몸을 비비며 두 눈을 반짝였다. 고양이의 시선이 시하의 주머니에 고정되었다.

“어, 생선포는 이제 없어.”

시하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양이는 애교 넘치는 몸짓으로 머리를 비비더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큰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괜히 감정 낭비했다는 눈빛이었다.

소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태사조가 있어서 다행이었으니 서둘러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추었다.

“감사합니다. 태사조님.”

“고마워요. 착한 사람 2호.”

시하도 서둘러 인사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 공중에 펼쳐진 진법(阵法)의 빛이 사라졌고 땅 위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였다.

“소저, 이걸 받으세요.”

소년이 그녀에게 물건을 건네주었다.

“이건 뭐예요?”

“소저도 선산의 길을 찾으려고 이곳에 온 거죠? 보니까 소질이 있는 듯해요. 그 길로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소년이 건네준 건 흰색 옥패였다. 알 수 없는 글씨가 위에 새겨져 있었지만 생김새만 보면 매우 평범한 옥패처럼 보였다.

“마수의 독은 모두 풀렸어요. 저 사람들도 금방 일어날 테니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시하는 손에 쥔 옥패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소년은 웃으면서 비검을 불렀다. 공중에 있던 흰옷의 사내는 벌써 선산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태사조님, 잠깐만요!”

소년은 바닥에 꽂혀 있던 마수 흑살의 검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시하에게 물었다.

“맞다, 제 이름은 원오예요. 옥화파의 제자이지요. 소저의 존함은 어찌 되시나요?”

“어, 저는 시하라고 해요.”

대화가 막 끝날 무렵 날아오르려 하던 원오가 툭하고 지면에 떨어졌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온 하늘에 춤추듯 날고 있던 광검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그녀 근처에 우수수 꽂혔다.

“당신은…….”

소년이 말을 마치기도 전, 멀리 날아갔던 흰 인영이 어느새 돌아와 시하 앞에 서 있었다.

“뭐라고 했느냐?”

시하는 그가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 어리둥절해하며 자기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완전 미남이잖아.

원오가 태사조님이라고 부르기에 나이 많은 할아버지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젊은 사내일 줄이야. 치켜 올라간 눈썹과 별처럼 반짝이는 눈,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옷. 물씬 풍기는 금욕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쉬이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낮고 묵직한 음성조차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네 이름이 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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