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89)

너무 오래 걸어서인지 아니면 전력 질주를 해서인지 시하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다행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뭘 얼마나 먹어서 그렇게 큰 거람. 이제 생선포도 없으니 다시 만나기라도 했다가는 큰일이었다.

계속 걷다 보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시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유를 안고 앞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숲을 헤치며 걸어가자 순간 눈앞이 환해지면서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엄마야, 이제야 나왔네.

시하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고 털썩 땅에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탈주극을 찍은 듯했다.

“유유!”

그녀가 아이를 내려놓는 순간 파란색 작은 인영이 다가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유유는 눈을 반짝이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을 끌어안았다.

“유유, 너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남자아이는 다친 곳이 없는지 여자아이를 살펴보았다.

유유는 머리를 흔들며 시하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언니가 있었어.”

남자아이는 그제야 시하를 보고는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누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를 아는 아이네. 시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마워할 것 없어. 국민을 위해 봉사한 것뿐이니까.”

남자아이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예의를 갖춰 말했다.

“목숨 걸고 누이를 구해주신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심부름이든 소생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됐어, 꼬마 녀석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시하는 유유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지만 제법 어른스러운 소년을 웃긴 듯 바라보았다.

“지금 다리에 힘이 없어서 나도 못 일어나거든? 너를 일으킬 수도 없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

그녀의 말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바닥과 한 몸이 된 듯 바닥에 드러누운 시하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곧 동생과 함께 꿇어앉더니 진지하게 두 손으로 포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소생은 헌림이라고 하며 양국 사람입니다. 길이 이렇게 험한 줄도 모르고 누이를 데리고 신선을 보러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하지만 은인 덕분에…….”

“신선은 언제 내려오는 거지?”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시하가 벌떡 일어났다.

“신선이라니, 무슨 뜻이지?”

헌림은 시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은인께서도 신선에게 길을 묻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까?”

난 그저 시스템이라는 함정에 빠진 무고한 택배 배달원일 뿐인데?

“선산(仙山)의 문은 십 년에 한 번 열린다고 합니다. 거기로 들어가기만 하면 신선의 제자가 될 수 있어요. 신선이 사는 숲이 험하기는 해도 산에 올라가기만 하면 속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는 것입니다.”

시하는 그제야 왜 사람들이 초원에 모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숲에서 탈출한 걸 축하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신선을 기다리는 것이라니.

잠깐만! 설정이 왜 이렇게 판타지소설이랑 닮은 듯하지?

“이 세상에 정말 신선이 있어?”

“당연하죠!”

머리를 끄덕인 헌림은 초원 끝에 보이는 안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늘이 선문(仙門)이 열리는 날인 듯합니다. 조금 있으면 신선이 저기에서 나올 거예요.”

시하는 어쩐지 희망이 생긴 듯했다. 이 세상에 정말 신선이 있다면 그녀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신선은 전지전능하니까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그녀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맞다. 아직 은인의 존함을 묻지 않았네요?”

“어, 내 이름은…….”

헌림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선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시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욱하게 주위를 뒤덮은 하얀 안개가 무언가에 잘린 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짙은 안개 너머, 뿌연 안개에 휩싸인 세상이 오락실 게임 속 한 장면처럼 드러났다. 흰 구름이 감도는 산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하얀 궁전들이 봉우리 정상에서부터 아래까지 은색 리본처럼 줄지어 늘어섰다. 봉우리와 맞닿은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들이마셨고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갑자기 땅속에서 흰색을 띤 네모난 무언가가 하나둘씩 솟아오르더니 계단처럼 이어지며 멀리 있는 선산(仙山)까지 닿았다.

“승선제(昇仙梯)다! 선산으로 오르는 계단이야!”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흥분하며 계단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시하는 너무 멀리 있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몰려든 인파에 쉽지 않았고, 헌림이랑 유유도 인파에 밀렸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응? 왜 올라가지 않는 거지?”

“이 계단 설마 고장난 건가?”

“아야, 넘어져 죽을 뻔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서 비명이 들렸다. 시하가 걱정스러워 바라보자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몇 걸음 가다가 모두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아닌 모양이군.

시하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계단에 오르기를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제일 높이 올라간 사람도 고작 열 계단을 오르고 떨어졌다. 사람들의 낯빛이 점점 굳어졌고, 단념하지 못한 몇몇만이 이따금씩 다시 도전했다.

“이 계단은 선인(仙人)의 도움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어요. 다들 서두르지 말고 선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제야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선인은 보이지 않았다. 선인은커녕 선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자 초원에 있던 사람들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이 주말이라 선인들이 출근하지 않은 건 아닐까? 시하가 그런 의심을 하기 시작하던 찰나,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어서 하늘을 봐요.”

검은 인영이 봉우리 위에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왔다, 선인이 오고 있다.”

“선인이 우릴 데리러 왔다. 잘됐어!”

사람들이 다시 흥분하며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하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날 수도 있다니, 세상에 정말 신선이 있다고?

인영은 점점 더 커졌다. 선인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한 자루 비검(飛劒)을 밟고 서 있었다.

검은 옷? 시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선인은 원래 모두 흰옷을 입지 않나? 이 선인 개성 한 번 독특하군.

착각일 수도 있지만 선산 위 노을이 조금 어두워진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인영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사람들은 그제야 인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선인은 남자였고 검고 긴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깡마른 몸에 하얀 피부는 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입술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었고, 고대 복장만 하고 있지 않았다면 텔레비전에서 봤던 뱀파이어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긴 칼을 밟고 허공에 멈춰 서더니 실눈을 뜨며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경멸하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잖아.”

“선, 선인!”

상대의 무시와는 상관없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허공에 서 있는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당신이 선산에 사는 그 선인인가요?”

“선인?”

그 남자는 질문한 사람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나는 신의 반열에 오르려 하는 선인이다.”

이 말을 듣자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

“진짜 선인이 맞아!”

“너무 잘됐어. 드디어 선인을 만났잖아.”

“저희를 데리러 오신 건가요?”

“우린 이제 선산으로 갈 수 있어!”

모두들 한마디씩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크게 웃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신들을 데려간다고? 그래, 나는 너희들을 데리러 오기야 했지.”

땅 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는 그는 웃고 있지만 표정은 차가웠다. 그때 갑자기 반짝거리는 부채 하나를 들어 느긋하게 펼쳤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되었느냐.”

시하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선산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선산에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선인께서는 어서 도를 행하시어 저희를 도와주세요.”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에 쥔 부채를 움직였다.

“너희가 여기까지 온 건 필히 천애파의 제자가 되기 위함이겠구나. 본존이 끝까지 책임지고 너희들을 본존의 사부와 선조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마.”

뭔가 이상한 말에 시하는 가슴이 철렁해져 입을 열었다.

“잠깐만!”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휘저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 줄 테니 거기서 만나거라!”

그가 쥐고 있는 부채에서 갑자기 많은 양의 검은 안개가 나오더니 홍수처럼 몰려와 초원을 가득 채웠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반항은 고사하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안개에 닿자마자 줄줄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하하하.”

남자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요란하게 웃더니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잔인하다고 원망하지 마라. 누가 너희더러 다른 문은 제쳐두고 천애파로 찾아와 죽음을 자처하라고 했느냐. 나 흑살(黑煞)이 살아 있는 한 천애파 제자들이 존재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 너희가 천애파에 들어가면 곧…….”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경악하며 시하에게 말했다.

“너는, 너는 왜 아직 여기에 있는 거지?”

“어…….”

시하조차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럼 저도 엎드려야 하나요?”

남자는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갑자기 화를 냈다.

“감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아니에요. 전 그냥 스모그에도 멀쩡할 뿐인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남자는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시 부채를 흔들었다. 부채에서 검은 풍인(風刃. 바람을 날카롭게 만들어 칼날처럼 만드는 것)이 날아오자 시하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우르르 쾅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전에 서 있던 자리에 반 미터 정도의 긴 도랑이 생겼다.

“와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날 죽일 셈이야, 진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다음 풍인이 눈앞까지 날아왔다.

끝장이다. 이제 곧 두 동강이 나겠어.

시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없었다. 옆으로 바람이 스치더니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고 보니 거대한 노란색 인영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고양이!”

이건 아까 봤던 그 괴물이잖아? 어떻게 온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