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9)

티라노사우루스를 능가하는 황색의 거수가 입을 벌리더니 으르렁 큰 소리를 내면서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상식’이라는 두 글자가 산산이 부서졌다.

“요괴다!”

시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황급히 몸을 돌려 방금 전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산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상식 같은 소리 하네. 과학도 부질없다! 어떻게 이곳에 이렇게 큰 고양이가 있는 거지?

고양이는 등에 돋아난 큰 날개 때문에 육식동물처럼 보였다. 방금 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뛰어갔는지 알 듯했다. 제 다리가 열 개만 달렸어도 훨씬 더 빨랐을 텐데, 두 개뿐인 게 한일 지경이었다. 예전에 학교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도 이렇게 열심히 뛴 적은 없었다. 조금만 늦어도 뒤에 있는 고양이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다.

출발은 늦었지만 그래도 빨리 뛴 편인지, 먼저 도망가던 사람들을 따라잡아 같이 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체력 때문인지 선두에 선 사람들은 모두 젊은 남성이었고 그녀 옆에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뿐이었다. 늦게 뛰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싫었으므로 시하는 죽기 살기로 미친 듯이 뛰었다.

“아……!”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에 있던 여자아이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 여자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로 제법 어려 보였다. 열심히 산 위로 기어 올라가려 했지만 아이는 금세 다시 주저앉았다. 붉은 피를 보니 다리에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유아!”

앞에서 뛰어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멈춰 선 뒤 여자아이에게 돌아가려 했다. 여자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뒤에 따라오던 괴물이 피비린내를 맡고 흥분을 했다. 성큼성큼 뛰어온 괴물이 여자아이 앞으로 다가섰다. 시하로부터 고작 세 걸음 남짓한 곳이었다. 여자아이에게 다가간 괴물은 입을 벌리며 오싹한 이빨을 드러냈다.

놀란 여자아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머리 위 괴물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뺨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자아이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그녀였지만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다가간다면 같이 먹히고야 말 테니 도저히 도와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 고양이 새끼야!”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며 아이를 덮치려고 하는 순간 시하가 뛰어들었다. 여자아이를 안고 구른 시하는 거대한 고양이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고, 괴물 반대 방향으로 몇 미터를 굴렀다.

위급한 순간이라 없던 초능력이라도 생긴 걸까. 시하는 운동에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어린아이를 안고도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빨리 도망가!”

시하는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향해 소리치면서 여자아이를 안은 채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발길질을 당한 거대한 고양이는 머리를 휙 젖힌 뒤 으르렁거렸다.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고양이는 도망치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어머, 이건 예상한 거랑 다르잖아!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된 일인지 고양이는 그녀를 쫓고 있었다.

지금 사과해도 늦지 않을까?

시하는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솔직히 돌아볼 틈도 없었다. 머릿속에 ‘뛰어!’라는 단어만이 떠올랐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던 그때, 희미한 날갯소리가 들리더니 주위 초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 날 수도 있었구나! 그냥 뛰는 것도 충분히 무서운데 날기까지 해야겠니?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바로 그때, 하늘이 응답하듯 그녀의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다만 좋은 응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눈앞에 솟아난 절벽을 본 시하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가 되겠다고 괜히 나서서 이런 개고생을, 에잇!

앞에는 절벽, 뒤에는 괴물. 꼬마야 미안, 우린 죽었다.

여자아이는 이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시하의 옷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잡았는지 안에 있는 살가죽까지 꼬집혀 너무 아팠다.

꼬마야, 내 가슴은 놔줘!

하지만 시하는 지금 가슴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거대한 고양이 괴물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고양이가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작은 태풍이 일어나 얼굴이 다 아팠다. 큰 소리로 울부짖는 걸 보니 더는 두 사람이 도망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했다. 지면에 착지한 고양이 괴물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가 새빨간 아가리를 벌렸다.

시하는 지독한 비린내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놈의 고양이, 입 냄새까지 나네.

어떡하지, 어떡하지?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입 냄새에 질식해 죽을 듯했지만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죽은 척하는 건 먹히려나? 이렇게 큰 고양이는 사이언맨으로 변신해도 못 이길 것 같은데?

거대한 고양이가 점점 더 다가와 새하얀 이를 드러내니 보기만 해도 온몸이 아팠다. 분명 잡아먹으려는 모양새라, 시하는 피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다리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입을 벌리며 달려드는 고양이를 보자 덜덜 떨리는 손을 자르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다.

영웅이 되려다 죽게 생겼다. 이렇게 큰 고양이한테서 어떻게 도망을 가겠어.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주머니에 들어 있는 생선포가 생각났다.

한 번…… 시도해봐?

주머니에서 생선포 봉지를 꺼낸 그녀는 바닥에 힘껏 생선포를 뿌렸다.

고양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 효과가 있으면 더 이상하지. 괴물은 고양이처럼 생기긴 했지만 분명 고양이가 아니야. 어떻게 생선포 따위로 굴복을 시킬 수 있겠…….

“야옹.”

바로 그때, 거대한 고양이가 돌아서며 바닥에 던진 생선포를 향해 달려들더니 만족한 듯 울음소리까지 냈다.

진짜 효과가 있잖아? 저거 괴물 맞아? 역시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니었어. 생선포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고양이는 없는 모양이군.

시하는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 거대한 고양이가 생선포에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를 껴안고 앞을 향해 달렸다.

큰 길 작은 길 가리지 않고 초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죽기 살기로 달렸다.

얼마나 뛰었는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지만 품에 안은 아이를 떠올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둘은 모래 구덩이에 쓰러졌다.

그제야 그녀는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다. 손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렸고, 사방은 안개가 자욱한 데다가 하늘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날이 밝았다. 그녀는 밤새 뛰었던 것이다. 어쩐지 사지가 내 것이 아닌 듯하고 더럽게 아프다더니.

지난 이십 몇 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하루였다. 그 어떤 날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언니, 언니.”

품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더니 꾀죄죄하고 작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눈시울이 붉은 것이 곧 울음을 터뜨릴 듯했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착하지, 울지 마!”

시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쉰 시하는 힘겹게 말했다.

“난 금방 괜찮아질 거야. 착하지.”

“네, 유유는 울지 않아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는 아이었다.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아이는 분명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소리는 내지 않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울지 않는 척하니 시하는 마음이 아팠다. 시하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꼬마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반나절 누워 있고서야 시하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에 자라난 작은 무를 뽑듯 아이의 손을 떼어 냈다.

내 불쌍한 가슴!

“언니.”

여자아이가 복숭아같이 퉁퉁 부은 두 눈을 깜박이며 불쌍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하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뒤늦게 아이의 다리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다행히 찰과상이었고 더는 피가 나지도 않았다.

사람은 구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대여섯 살 정도인 것 같은데, 산에 두고 간다고 죽는 건 아니겠지. 시하는 한숨을 쉬었다.

“네 이름이 유유라고?”

여자아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언니한테 여기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어?”

여자아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시하는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너랑 같이 있던 그 아이는 네가 아는 사람이니?”

“오라버니.”

“그 아이가 네 오라버니야?”

여자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어쩌다 오게 되었는지도 알아? 너는 어디에 살아? 집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아?”

“돌아갈 곳이 없어요. 오라버니가 금방 도착한다고, 찾으면 더는 배고프지 않을 거라고, 엄청 멋지게 변신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시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여자아이의 말대로라면 아이는 오라버니를 따라 어딘가로 가다가 그 괴물을 만났다는 건데.

“오라버니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알아?”

유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뭐가 기억이 났는지 급히 그녀의 옷을 잡으면서 말했다.

“동쪽. 오라버니가 동쪽으로 가야 된다고 했어요. 금방 도착한다고.”

동쪽? 방향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든 시하는 해를 보며 방향을 찾았다. 마침 가고 있던 방향이 동쪽이었다. 고양이가 나타났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 그저 앞으로 계속 가야 했다. 유유의 오빠가 정말 동쪽으로 갔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테고.

시하는 잠시 쉬었다가 유유의 손을 잡고 계속 걸었다. 온몸에 진흙이 묻어 있었지만 씻을 겨를이 없었으니 그냥 피부라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이 세계는 그녀에게 매우 낯선 곳이라 씻기 위해 물가를 찾았다가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수차례 택배 배달을 해서 그런 걸까, 이 세계를 드나드는 일은 이제 담담했다. 차원 이동을 하도 해서 이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이 세계로 보내지는 않았을 듯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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