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89)

날이 저물었다. 개구리와 벌레 울음소리만 들리는 깊은 수풀 사이, 곧 끊어질 듯 겨우 숨을 쉬고 누워 있는 소년 외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소년의 온몸은 칼에 베인 상처와 엉겨 붙은 피로 가득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죽기 살기로 마지막 의식을 붙잡은 채 온 가문이 멸살당한 피맺힌 원한과 복수를 생각했다. 수백 명의 망혼들이 그가 설욕을 씻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할 수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까? 몸은 맹독에 중독되었고, 경맥 대부분이 끊긴 데다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곳에 던져져 점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다가 금세 깜깜해지니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원망도 점점 사라져 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무래도 이번 화를 피하지 못할 듯하구나.

“이봐요, 거기 누구…….”

갑자기 귓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으로 바짝 마른 그의 마음에 맑은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여기, 사람 있어요!

그는 말라붙은 피로 가려진 눈을 힘껏 뜨며 앞을 보려고 애썼다. 희미하게 보이는 건 한 여인의 모호한 인영뿐이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이상한 옷차림을 한 여인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마치 그의 혈흔을 보지 못한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세상천지에 이렇게 대담한 여자가 있다니.

꿈인가?

“당신 이름이 용오천이에요?“

역시 꿈이었군, 아니면 저 여인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겠어.

그는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었다. 절박한 마음에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러 온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당신, 용오천 맞아요?”

꿈속의 여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됐어, 고작 꿈인데 알려주면 어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용성(龍城)의 어린 성주가 아니었다. 복수를 할 수 없다면 ‘용오천’이라는 이름도 아무 의미 없지 않은가.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이번엔 제대로 전달한 모양이에요.”

그 여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 뒤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다.

“자자자, 용오천 당신의 금수지(金手指)는 이미 전달했으니 어서 받으세요. 내공도 부탁해요!”

금수지가 뭐지?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그의 당혹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여인이 설명했다.

“금수지는 먹는 게 아니에요.”

먹을 수 있는 건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근데 금수지가 먹는 것보다는 더 쓸모가 많아요.”

여인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혼원비급(混元秘笈, 오랫동안 소중히 보관된 책)만 있으면 당신은 바로 무림 고수로 승격할 수 있어요.”

비급! 여인의 손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무공 서책이란 말이야?

“저는 시간이 없어서 이만, 책은 여기에 둘게요!”

여인은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펼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 버렸다.

용오천은 서책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펼쳐 놓은 부분만 익혀도 원기를 회복할 만한 내공을 얻을 수 있어 보였다. 이 방법대로 수련만 한다면 그의 몸에 난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텐데.

“아, 맞다!”

이미 열 걸음 정도 걸어가던 여인이 갑자기 돌아서서는 옆에 있는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연못에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가 있는데 그 물고기로 몸에 남은 독을 해독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 옆에 있는 그 이상한 풀로는 경맥을 치료할 수 있고요. 아무튼 앞으로는 당신이 알아서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냥 미리 알려준 것뿐이니 틈이 날 때마다 많이 뽑아서 드세요. 그럼 이만 안녕!”

해독! 경맥을 이어주다니!

용오천은 살아날 방도가 있다는 이야기에 맘속에 세찬 파도가 이는 듯했다. 이 절세무공 서책이 있다면 그 피맺힌 원한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저기요.”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이제 막 떠나가려는 은인을 불렀다. 아직도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돌아서더니 물었다.

“아직 궁금한 게 남았어요?”

“저기,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요?”

여인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순풍택배라고 생각해줘요! 갈게요. 안녕!”

용오천은 한동안 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더는 보이지 않자 시선을 거두었다. 사람에게 해를 입어 이 지경에 이르긴 했지만 그래도 귀인을 만났으니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은 셈이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마음을 가다듬으며 밀서의 내공법을 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독을 해독하고 상처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절세무공도 배워 살고자 마음먹었다. 피맺힌 원한을 갚은 다음 다시 돌아와 은인님의 큰 은혜에 보답해야지. 그는 은인님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했다. 순풍택배!

* * *

에취!

얇은 옷차림으로 먼 길을 온 시하는 등이 서늘해 으슬으슬 떨다가 곧 재채기를 했다.

엥? 갑자기 뭐가 좀 이상한데. 에이, 됐어.

어차피 미션은 이미 끝냈고, 그녀도 돌아가야만 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차원 이동’이라고 쓰인 애플리케이션을 켜자 상단에 놓인 미션 제출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미션 진행: 10/10’라는 작은 글씨가 보이자 안심이 되었다.

젠장, 이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

자칭 시스템이라고 하는 녀석이 들러붙은 뒤로 그녀는 강제로 각 나라를 돌며 주인공에게 금수지를 전달해야 했고, 휴대전화에도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야 했다. 과학을 숭배하던 모범 소녀의 삶이 하루아침에 봉건 미신을 숭배하는 전근대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한 달 내내 택배를 배달하고 나서야 미션 진행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돌아가면 쿠키나 먹으며 쉬어야겠어!

“이봐요, 시스템! 당신이 전달하라는 택배는 모두 전달했으니 이제 좀 떨어질 수 있겠죠?”

[띵!]

귓가에 전자음이 들리더니 이어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플레이어의 완벽한 미션 수행을 축하합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셨군요. 본 시스템의 최종 목적은 ‘지성과 미모를 갖춘 소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쳇!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는.

분명 주인공을 위한 봉사이지, 그녀는 고작 택배 배달원에 불과했다. 그렇게 많은 세계를 오가며 주인공에게 금수지를 전달했는데 아직 월급도 못 받았다.

젠장! 지성과 미모는 개뿔!

시하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최종 미션을 제출해 주십시오.]

시하는 서둘러 제출 버튼을 눌렀다.

[미션 제출 최종 전송 5, 4, 3…….]

맛있는 쿠키야, 내가 간다!

아주 잠깐 동안 그녀는 원래 있던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결국 도착한 곳은 아까보다 더 어두운 곳이었다.

집에 보내준다고 했잖아! 내가 살던 집에는 협곡도, 이렇게 큰 수림도 없는걸?

“시스템, 당장 안 나와? 배송 완료하면 깔끔하게 떨어져서 날 보내 준다고 했잖아? 이 괴상한 곳은 대체 어디야?”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특급 미배송건’이 있다는 소리 따위는 제발 하지 마.

[띵! 최종 전송 완료. 시스템 해제 중: 100%, 90%, 70%, 40%]

“어이, 나부터 먼저 집에 보내 주고 해제하라고. 여긴 대체 어디야? 나를 여기로 보내서 뭐 하려고?”

시하는 당혹스러웠다.

[40%, 30%, 20%]

“잠깐만, 잠깐만! 우선 해제하지 말고 여기는 대체 어디냐고!”

[10%, 5% 해제 완료!]

“…….”

귓가에 지직 소리가 들리더니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시스템이 해제됐네. 정말 날 이런 곳에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시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냈지만 강제로 설치했던 애플리케이션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 달 전 그녀는 마트에 들러서 오빠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줄 생선포를 샀다. 마트를 나오자 자칭 시스템이라고 하는 녀석이 갑자기 머릿속에 나타나 말을 했다. 시스템은 휴대전화에 내비게이션같이 생긴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라고 강요했다. 또 여러 가지 물건을 주었는데 비급, 법보, 가상공간 심지어는 메스암페타민(마약류)까지 별게 다 있었다. 시스템은 그녀에게 이상한 곳으로 가서 주인공에게 금수지를 전달하라고 했고, 배송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고 계속 따라다닐 거라며 협박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는 며칠 내내 소위 금수지라고 하는 것을 분류했고, 택배 배달원이 되어 휴대전화에서 지정해주는 각 세계의 인물들에게 물건을 전달했다.

일을 마쳤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마트가 아니라 이런 괴상한 곳에 있는 거지. 설마 내가 샀던 생선포에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걸까?

아니야, 아니야. 하늘이 내게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시스템상 작은 오류가 있을 거야.

그녀는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을 뿐이지, 돌아온 게 틀림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고개를 돌려 끝도 없이 펼쳐진 수림을 한 번 둘러보고, 신호가 끊긴 휴대전화를 보았다.

그래, 조금 멀리 있을 뿐 여기는 분명 지구일 거야! 나무, 푸르른 풀, 높이 솟은 절벽, 모두 지구에서 보던 것들이잖아. 물론 저기 거대하고 요상하게 생긴 식인 꽃은 지구에서 보지 못했지만 지구 환경이 안 좋으니 이 정도의 변이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저기 몇몇 고대 복장을 입은 남자들은…….

잠깐, 고대 복장이라니. 이 많은 연기자들은 어디에서 온 거지?

사람들은 마치 무서운 것이라도 본 듯 허둥지둥 산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요, 요괴!”

“요괴가 왔다. 빨리 도망가!”

“사람 살려!”

요괴?

옛날 복식으로 꾸민 사람들이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며 시하는 멍해졌다.

요즘 세상에 어떻게 요괴가 있을 수 있지.

그녀는 과학을 신봉했기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허응…….”

그때 하늘땅을 뒤흔드는 거대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진동이 울리더니 바로 쿵쾅하는 소리가 전해졌다. 거대한 황색 인영이 하늘에서 내려와 바로 열 걸음 앞에 서 있었다.

시하는 놀란 나머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박 큰 고양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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