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終天之慕(종천지모) (34/34)

외전. 終天之慕(종천지모)

「너는 항상 말하지.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그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감정에 취한 말이었던가.」

「손으로 잡을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 감정이라는 것에 스스로 취해 버린 너. 그리고 나. 결코, 같을 수가 없는 태생적 차이.

우리를 존재하는 인격체로 만들어 낸 최초의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정확한 우리의 명칭마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존재했다. 생명이 움트는 그 시작부터 때때로 도래하던 멸망의 순간에도.

그저 존재할 뿐인 무언가였을 때부터 명확한 신앙의 대상이 된 순간에도.」

「그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서로를 제대로 이해한 적 없으나, 서로의 존재 의의를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단 한 번을 함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여도. 우리가 서로 가장 닮은 꼴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 별의 시작은 너, 그리고 나. 원래는 하나. 그러나 하나로는 유지할 수 없던 가련하고 초라한 어둠 속의 별 조각. ‘너’는 ‘너’를 쪼개어 ‘나’를 만들었지.

무색의 별이 어둠 속에 푸르게 빛나고 네 위를 노니던 것들이 내 아래에서 숨 쉬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숨 쉬고 살아가기 위한 것.

그러니 나는 그저 너의 일부, 너로 인해 태어난 가치. 네가 준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였다.」

「나는 너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가치 외에 내게 무엇이 있나 알 수가 없어 그저 눈을 감고 흘러 다녔다. 흐름에 몸을 맡길 뿐,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최초의 신앙을 받기 전에 네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너였다.」

「그 알량한 감정으로 나를 가엽게 여긴 너는 내 눈을 뜨게 만들었지.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보게 하고 함께 사랑하자 강요하였어.」

「네가 그리도 사랑한다는 것들이 마음에 들었던 적 한번 없었으나 나는 네 말에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너의 일부. 네 감정의 가장 큰 결과물.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나. 결국 나 또한 너의 전리품일 뿐일진대. 부정한들 의미가 없다 여겼다.

그러나 네 행태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네 위에 노니는 것들을 너는 사랑하지 않아. 그것들을 사랑한다 여기는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건방지기 그지없는 내 말에 너는 웃음을 지었다. 바라보는 경관의 땅을 그대로 품은 머리카락이 한들거렸다. 그 계절을 봄이라 불렀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빛의 눈으로 나를 보며 너는 말하길.」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바람에 휘청이는 작은 꽃가지 같은 답만 입에 담을 뿐이었다. 그런 너를 나는 보았고, 너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내가 눈에 담는 것들은 너무나 거시적인지라 너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너는 하나하나. 네 위를 노니는 것들을 느끼고 살펴보느라 나를 볼 틈이 없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내 앞에 자리한 존재인 너를 나는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으며, 너와 내가 원래는 하나였음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너의 의지를 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그 성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서로가 어리석고도 욕심 많다고 생각할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 한 번도 상대를 부정하지 않았다.

너에게는 나 또한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그래서 무엇을 하든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내게 있어 너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관해선, 너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일방적이라면 일방적인 관계였다.」

「너는 내게 물었다. 외롭지 않냐고. 어찌하여 자신만을 보느냐고.

저 멀고 먼 너머, 나의 시선이 닿는 어디든 따사로이 웃고 우는 저들을 함께 보자고. 그러지 않겠냐고.」

「내게 하는 그 어리석은 물음이 마냥 언짢지만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오롯하게 나만을 보았으니까.」

「하여, 나도 물었다. 너는 그것으로 만족하느냐고. 너를 갉아먹는 그 어리석고도 고약하며, 방자한 것들을 품는 그 알량한 포용력이 너의 최선이냐 물었다.」

「내 물음에 너는 웃었다. 함부로 꺾이고 버려지는, 더 긴 시간을 살 수 있음에도 짧은 생을 마주해야 하는 어떤 꽃처럼. 사라지는 바람처럼. 저무는 어느 날의 해처럼.」

「사랑스럽다 하였다. 그것들이, 사랑스럽다 하였어.」

「짧은 생. 도구 없인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연약한 몸뚱어리. 그러나 약은 지성체의 무리라는 이점으로 땅에 사는 모든 것의 우위에 선 것들.

그럼에도 쉽게 죽고 망가지는 것들. 그 짧은 순간이나마 무언가를 이루겠다 발버둥 치는 존재.

그것들을 향한 동정인가 하는 물음에 너는 그 짧음이, 영원하지 않음이 애틋한 거라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감히 생각건대, 역시 너는 저들을 그리 절절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어리석고도 고아하며 방관적인 존재였다. 제 몸 위에서 노니는 방종한 것들의 삶과 죽음과 파괴와 생존,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이였다.

그 따스한 방치 아래 태어나 죽고 살아가는 이들이 너의 전리품이었으며 나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너와 마주 서 보고 싶었고, 닿아 보고 싶었다. 저 아랫것들마저 네게 닿는데, 나라고 못 할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바람을 꿈꾸는 나를 보며 너는 웃었다. 그렇게 자라는 거야, 하고.」

「그때는 몰랐지. 몰랐어. 그것이 참으로 허무하고도 허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세상의 끝. 땅도 하늘도 맞닿는 그러한 곳에서야 간신히 만날 수 있는 너. 겨우 손끝 하나 닿을 수 있는 너.」

「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네 바람의 가치 이상을 갖지 못해 자그마했던 나는 어느새 너와 눈을 맞추게 되었다. 눈을 맞추기 위해선 몸을 숙여야 했다.

그런 나에게 너는 언제나 그랬듯 하얀 꽃으로 만들어진 화관을 씌워 주었다.

너에게 바라나, 나에게 비는 자들이 바친 그것을.」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존재가 너의 위에 있게 된 것은. 네가 사랑하는 어리석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네가 아닌 나를 모시기 시작했던 것은.

단순히 굽어보는 존재라는 이유 하나로 나에게 빌기 시작했다.」

「비를 바라는 것은 풍요로운 땅을 원해서. 따사로운 햇볕 한 줌을 바라는 것은 설원에 숨은 봄을 찾아 삶을 연명하고 싶어서.

그런데 왜 내게 비나. 왜 내게 바라나. 결국, 들어주는 것은 내가 아닌데. 그것을 주는 것 또한 내가 아닌데.

풍요의 땅을 내주는 것도, 살아갈 터전을 내주는 것도 내가 아닌 것을. 먹고살 것을 피워 내는 것도 내가 아닌 것을.」

「잘못된 바람의 방향성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훨씬 더 오래된 그 욕심이란 것이 문제였을까.」

「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모든 것을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

너는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네가 더 이상 마냥 베풀지만은 못하게 된 것이. 너는 말했다. 우리의 기원은 바람. 믿음. 그러한 것들.

거기서부터 시작된 힘.」

「땅에 가뭄이 들고, 작물이 자라지 않고 강은 말랐다. 그럴수록 네게 빌어야 하는 것들은 내게 빌었다. 힘을 쓰는 것은 너인데 네게 돌아오는 힘은 없었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것은 누구였는가. 네가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 그것이 말하기를. 신의 죽음만이 저들이 살길이라 하였다.」

「너와 나는 본래는 하나. 그러나 별개의 존재.」

「내가 아무리 비를 내린들 가뭄은 끝나지 않았다. 땅은 온전한 너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래서 너는 죽음을 강요받았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신을 잃은 이 땅이, 너를 잃어 빈 이 땅이 나의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너는 말했다. 나의 시야 안 닿는 곳이 이 땅에는 없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보았다. 매일매일. 몇 날 며칠을 죽어 달라 빌던 자들과 그런 자들을 자애롭게 바라보던 너를.」

「그 같잖은 것도 믿음이라고. 그딴 것도 존재 의의의 가치라고. 기나긴 가뭄이 끝나고 땅은 다시 살아났다.

간신히 끌어모은 힘을 다 써 버린 너는 또다시 아무것도 못 한 채 내게 비는 것들처럼 땅을 기어야 했다.

그런 너를 모르지만은 않을 것들은 계속해 빌었다. 죽어 달라. 죽어 달라.

그리도 사랑한다면, 그리도 애틋하게 여긴다면 자신들을 위해 죽어 달라.」

「벌을 내렸는가. 무시했는가. 받아들였는가. 아니, 너는 그 무엇도 택하지 못했다.

감히 죽어 달라 비는 것들을 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 말을 들어주지 아니함의 이유마저 방종한 것들을 위해서였다.

어리석은 것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 신의 죽음 이후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알아서. 그래서 죽지도 못한 채 사그라지는 힘을 그러모으며 버텼다.」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다. 영원할 수가 없었다.」

「세계의 끝. 하늘과 땅이 마주하고 너와 내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그 끝에서 너는 내게 말했다.

눈을 감겠다고. 그 옛날 내가 그리했던 것처럼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겠다고.」

「내가… 다른 선택지가 있나. 결국 나 또한 너의 전리품이요, 너의… 그 빌어먹을 사랑이나 주워 먹고 자란 존재인 것을.」

「네 위에 노니는 모든 것들이 웃더라.」

「더 이상 신의 슬픔에 조각나는 땅과 신의 분노에 시드는 생과 너의 웃음에 제멋대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언제나 관용을 베푸는 네게 영원함을 요구하더라.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기꺼이 웃으며 눈을 감았고, 기껍게 눈물을 흘리며 잠들어 주었다.

너는 눈을 감았다. 그럼으로써 추앙받았으며 죽어 갔으며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영원을 약속하며.」

「너의 눈이 감기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너를 보았는데.

그래서 생각했다.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으나 내 시선이 가는 곳은 하나요. 너는 모든 것을 올려다보아야 함에도 네 눈을 가리는 자들로 인해 그 잠깐의 시간마저 나를 보지 못하더라는 걸.」

「네가 사랑하며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사랑하고자 하는 저것들을 한 점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 한 점의 부끄러움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것을 감추는 자들이었다. 너의 존재는 그렇게 지워졌다. 오로지 하늘을 향해서만, 내게만 제를 올렸다.」

「너의 그 대단하고도 하찮은 감정의 결과물은 겨우 이런 것들이었다.」

「그 방종한 것들이 감히 내게도 말하기를. 내게도 눈을 감아 달라, 죽어 달라.

나의 분노에 타오를 생명들과 나의 슬픔에 저버릴 것들과 나의 기쁨에 떠오르는 그 해마저 모든 것이 저들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방종한 것들이.」

「왜 나는 이것들을 그저 두었을까. 너 때문이다. 네가 바라서. 네가 저것들을 사랑해서. 함께 사랑하자 강요했으니까.

너의 사랑을 받아먹고 자란 것들은 어리석었다. 그래 나처럼. 더 이상 내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나를 어리석게 하는 존재를 저들이 스스로 사라지게 만들었으니.」

「수십 일의 폭우와 수백 일의 가뭄과 끝나지 않는 밤, 저물지 않는 낮의 시간을 보내며 그것들을 내게 조아렸다.

그럼에도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것들을 전부 죽이면 너는 마지못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너는 나를 저지하지 않을까.

내게서 살고자 발버둥 치는 저들이 너를 다시 찾고, 믿고, 바라서. 그렇게라도 눈을 뜨지 않을까.」

「닮은 것들끼리 모여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너를 생각했다. 가장 나와 닮은 꼴일 너를.

끝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너를.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너를.」

「그래서 네 흉내를 내 보았다. 의미 없는 짓들을 관두고 어리석은 것들을 잡아다가 하늘에 풀어 두었다.

신의 도움 없이는 살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의 무료함을 더는 것밖에,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들.

이게 네가 그리도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끼던, 너의 무책임한 방관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아. 정말로 허무하다.」

「그것이 내가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너 없는 세상에 홀로 남은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마저 오롯이 너 하나를 통해야만 느낄 수 있었다.」

「벌이라 한다면 벌. 어찌 보면 의미 없는 놀이. 헛된 유흥.」

「비천한 것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감상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지루하다. 무료하다. 그나마 감정이라 불릴 만한 것들마저 퇴색된다.」

「나는 여전히도 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저것들에게 그 ‘사랑’이라는 감정도 품을 수 없었다. 무지한 것들의 발버둥.

그런 것들을 위했던 어리석은 너의 선택. 너의 끝 또한 그 이상의 의미를 품지 못했다.」

「그래. 비틀려 갔다. 악을 쓰며 살려 달라 외치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비틀려 갔다. 너의 바람과 달리.

태생부터 글러 먹은 나는 저것들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전부 다 관둘까. 이 의미 없는 세상을 유지해야 함이 옳은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행했으니까.

너를 따라 흉내 내 만들어 본 천공 섬에 흐르던 그 붉은 것들은 네가 제법 애틋해하던 바다가 붉게 물들던 순간과도 비슷했다. 그 색이 짙고 짙어질수록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너를 보았다. 너만을 보았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어리석은 너에게. 스스로 나락에서 헤매는 너에게.

살려 달라 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저것들을 왜 너는 놓지 않는가 하는 원망을 담아서.」

「그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내가 끝까지, 끝까지 이 세상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그럼에도 이해하고 싶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왜 너를 이해하고 싶은가. 나는 왜 너를…. 너는 왜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취했다. 지쳤다. 점점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갔다. 이래서 너는 그리 굴었던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알 수 없게 되어서.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우리의 본질에 더 가까워서. 스스로가 잘못되어도 흘러가게 두었던 건가.

그래서 나도 그리했다.

소원을 들어주고 제 손에 죽어 달라 청하는 것도 들어주어 보았다. 맹랑한 것 하나는 기어이 내게 총을 들이미는 것까지 성공했으나 동시에 실패했다.」

「눈을 감기 전의 네 모습처럼 덧없이 불완전해진 몸을 보며 이대로 다 끝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사라지고. 이 가치 없는 세상은 사라지고. 그래….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네가… 사라지고.」

「…….」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네 장단에 맞추기로 하였다.

인간의 태를 타고 태어나 신격의 위상을 얻은 자와, 그 격을 타고났으나 의무를 저버린 자. 운명을 엮어 가는 재주를 타고난 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조건은 완성되어 있었고 너는… 이번에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움직였다.」

「내가. 네가 아닌 이상 막을 방도가 없는 내가, 진실로 너의 사랑하는 것들을 위협하자, 그제야.

그리도 애타게 찾을 때는 꼼짝도 하지 않던 어리석은 너는 삿된 것들의 왕의 앞에 나타났지. 거래를 했어.

너를 찾아 헤매는 나를 알면서도 말이야.」

「그 이유에 대해서 너는 또, 사랑이라 할까.」

「본래 하나였던 존재. 그것이 너와 나. 둘 중 하나의 죽음은 상대의 죽음과도 직결된다. 그것은 족쇄가 되었다. 너는 내가 네가 사랑하는 것들의 생이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너로 하여금 내가…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악독한 사랑을 하는 존재다.」

「긴 시간. 아주 긴 시간 동안 홀로 생각했다. 네가 바라는 이상은 무엇인가. 네가 바라는 나의 끝은 도대체 무엇인가.

답은 어렵지 않았다. 너는 이번에도 나를 택하지 않았다는 것.

너와 나 둘 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간섭할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

네가 나의… 죽음과도 같은 것을 바란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반대의 것을 바랐다. 너를 잡아먹어 하나가 되고, 온전해짐으로써… 네게 내가 느낀 것들을 느끼게 만들겠다고.

온전해진 몸. 우리는 하나. 그리고 나는 너의 일부. 본래대로 돌아가는 순간 사라지는 쪽이 누구인지야 뻔하지 않은가.

그래. 네가 사랑하는 것들의 끝을 마주 보듯 나를 보면 좋겠다고 바랐다.」

「네가 더 이상 휘둘리기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못마땅해하는 내 날 선 것들이 네게 조금이라도 섞여 사랑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너는 그마저도 싫다 하고 네 몸을 쪼개어 나를 죽일 방도를 만들어 냈지만.

너무 오래되고 바뀔 의지가 없는 나의 바람은 여전히 같아서. 너를 찾아 헤맸지. 그래, 너만을 찾아 헤맸다.」

「네가 선택한 존재가 내게 칼을 들 준비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의 말에 답해 주는 너를 보면서도.

내 죽음을, 너의 바람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며 네가 하던 말을 들으면서도.」

「…. 또 같은 말만 하지.」

「…그래. 나는 네가 미웠다. 사랑을 강요하는 네가 미웠고, 끝끝내 평등한 기회와 사랑을 외치며 나를 저버리는 네가….

길고 긴 시간을 함께한 나를, 단 한 번을 택하지 않고 저것들을 택하는 네가 밉고, 미웠으며….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네 감정에 동화됐다.」

「내가 너의 유일한 하늘이었던 것처럼 너는 나의 유일한 땅이었고. 내 눈에 보이는 전부였으며, 나의 세계요, 나의….」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너 또한 나처럼 나 하나만을 보기를 바랐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 또한 저 어리석은 것들처럼 너를 마주 보고, 너와 이야기하고, 너와 닿고 싶었다.

네가 내게도 그리 절절하고 무조건적인 감정을 주기를 바랐다.」

「끝의 끝에 다다라서야 너는 나를 보고, 나를 마주하고. 초라한 것이 되어 사라지며 안아 주었지.

너는 그 한 번으로 내게 덧없는 것만 남기고 떠났다.」

「기어이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닌 모시는 법을 찾아낸 너의 어리석은 아이.

그 새까맣고도 푸르게 빛나던 눈을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네가 왜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인지.

처음으로 마주 본, 처음으로 네가 아닌 것을 눈에 담은 내게 있어 그 어리고도 어설프나 동시에 굳건하던 존재는….」

“…네가 그리도 사랑하던 존재 그 자체였으니까.”

강유진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너무 엄청난 것을 손에 넣고 만 기분이었다.

미국의 노아 이스벨라가 급하게 보낸 문서. 본인의 하늘 조각 안에서 찾아낸 자료라며 보낸 이 문서를 그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욕심을 자제할 줄 몰랐던 사람과 그런 사람의 편을 들어 테오그라젠스가 사라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또 다른 하나라는 것인데….

애매했다. 절대적인 악도 선도 없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굳이 시작을 따지자면 악의의 원인은….

“…미치겠네, 진짜.”

처음부터 이해되지 않기는 했다. 원래 무조건적인 악의보다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애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테오그라젠스 쪽이 더… 이해 가능한 범위였다.

또 다른 하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던 그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품 안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 와중에도 라이터는 어딜 갔는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하얀 가운 주머니를 뒤지던 그녀 앞에 불붙은 라이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꽥 소리치며 들고 있던 담뱃갑을 던져 버렸을 것이다.

“…언제 오셨어요?”

그녀의 물음에 주세진은 말없이 담배의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내동댕이친 종이 뭉치를 들고는 반대쪽 소파에 가 앉았다.

한 개, 두 개.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주세진은 그것을 읽었고 내려놓았다가 다시 읽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죠?”

“…진실이 언제나 아름답다는 건 개…. 헛소리다.”

“그 애가 이걸 알게 되면….”

“난리 나겠죠. 아마.”

이제야 겨우 좀 안정되었다. 꼬박 두 개의 계절을 지나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는 지금에 와서야 말이다.

우리가 어떤 겨울과 봄을 보냈던가. 생기가 넘쳐흐르는 이 여름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가.

겨울이 끝났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의 봄은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았다. 소복소복 쌓인 눈을 치우기에도 버거웠던 나날이었다.

모두가 애써 웃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얼음을 녹이는 온도에 그 안에 꼭꼭 숨겨 왔던 감정이 터져 무너진 사람도. 지금에 다다르기까지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사람도.

마냥 웃는 게 힘들어진 사람들.

“…….”

이호연은 이 더위에도 여전히 소매가 긴 옷을 입는다. 정 더위를 못 참고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을 때면 여전히도 류의 눈치를 살폈다.

이예린은 과한 영역 사용으로 인한 후유증에 대한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영역 사용자인 류와 공간 능력을 가진 오정인과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는 훈련을 받는다.

너무 과하게 열린 영역의 틈새를 다시 닫는 훈련을.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였기에 해결을 본다 해도 영원히 후유증은 남을 거라 하더라.

류의 심리 상담 및 우울증과 PTSD 치료는 아직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위안은 제 눈치를 살피는 이호연을 볼 때면 류가 싱겁다는 듯 웃는다는 점이었다.

그래 웃었다. 가장 추운 겨울에 다다를수록, 무너지던 모습과 달리. 날 선 기세를 스스로도 감추지를 못해 때때로 사라지고는 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여름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였다. 그리고 저 종이의 내용은 다시 그 여름의 끝을 맞이할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그 성격에. 이걸 알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감추는 것은 기만인가.

가장 큰 희생과 노력을 한 그 사람에게 진실을 감추는 것이 잘못되기만 한 일일까.

강유진은 선의의 거짓말은 거짓말하는 인간들을 위한 변명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영국으로 입양 간 뒤 거기서 혼자 잘 살다가 굳이 찾아온 한국에서 친모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나를 버렸느냐 하는 질문에 그 사람이 했던 답.

어쩔 수 없었어.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해.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선의의 거짓말을 무슨.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그건 그냥 변명거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다고 말하며 그녀를 파양한 부부도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너를 사랑했어, 라고. 그 말을 비웃었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돌아오는 선의가 없는 것이 어떻게 선의의 거짓말인가. 그녀의 인생에서 제대로 된 선의를 처음으로 맛보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그 선의라는 것을 제일 먼저 알려 준 사람이 굳은 낯으로 앉아 있었다.

평생 올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국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도 한번은 만나 보고 싶었으니까. 그 혈육이란 게 뭐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끝까지 그녀 인생에 있어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지옥도 당시 안전 구역에서 쫓겨날 뻔했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원망은 그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국민을 위한 자원도 부족한 마당에 타국의 국민까지 품지는 않겠다는 것. 여권에 찍힌 것이 태극무늬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때 도움을 줬던 것이 주세진이었다. 출생 신고, 입양 절차…, 파양, 뭐, 이것저것. 복잡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결과 그녀의 국적은 한국으로 결정 났다.

실상은 제대로 된 행정 절차가 없던 차에 주세진이 밀어붙여 그렇게 결정 난 거라는 걸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와준 주세진이라는 사람이.

그녀가 영국에서 하던 일이 해커였다는 것을 알게 된 주세진은 거기에 더해 그녀를 스카우트하기까지 했다. 사람들 간에 대화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때마침 정보 쪽으로 전직을 했던 그녀는 그 말을 따랐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결국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놓치면 안 되는 인재가 되어 이 나라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민인 거였다.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 없다는 걸 그녀가 가장 잘 아니까. 선의는 선의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 둘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종류였다.

그리고 이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너지게 만드는지도 잘 알았다.

깊게 빨아들였던 연기를 후 불어 냈다. 비흡연자인 사람들이 들어오면 얼굴부터 찌푸릴 정도로 어느새 방 안에는 담배 냄새가 자욱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방에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주세진이 사실은 꽤나 골초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린애들 상대해야 한다고 담배를 끊었다는 것도. 그게… 어린 여동생과 함께하면서부터였다는 것도.

그를 따라 애들 있는 앞에서는 담배를 자제했다. 말도 나름 조심했다.

아마도 닮고 싶어서…였다.

저 지나치게 곧고 우직하며, 바르고 언제나 선 쪽에 있는 사람을.

그런 이 역시 사람이니 무너지지 않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휠지언정 꺾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들고 있던 담뱃갑을 주세진 쪽을 향해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의 모서리 부분만 바라보고 있던 주세진은 잠깐은 망설이겠지 하고 생각한 그녀의 예상을 뒤엎고 자연스럽게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종이를 내려놓고 라이터를 꺼내 불붙이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몇 년 동안 금연한 사람답지 않게.

깊게 한 번. 느리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연기 한 줌.

그리고 손에 들기만 하고 그 이상 입에 대지 않는 모습까지. 그것을 눈에 하나하나 새기며 강유진은 눈을 감았다.

저런 모습이 좋은 거였다.

“…이상을 바라신다면 현실도 마주 보세요.”

“…….”

“제가 옛날에 했던 말이죠.”

주세진의 유일한 단점이라 한다면 너무 굳건하기만 했다는 점이다. 잘못된 일이다 싶으면 조금도 져 줄 줄을 몰랐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지옥도 당시 만들어진 성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보다 더한 것들이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필요한 법이었고, 주세진은 그것을 알아야 했다.

전직자와 민간인을 다른 객체로 보는 사람들의 앞에 서면서, 이상만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잘못돼 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바른 쪽으로만 변하는 그는 인간적으로는 매력 있으나… 역시 노련한 쪽은 아니었다.

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약은 그녀가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을 수 있는 거다.

그의 손안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눈에 담으며 물었다.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금은 차마 그 말이 안 나오네요.”

역시 숨기는 것이 답일까. 가끔은 현실을 모르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정답은 모른다. 류가 진실을 아는 것이 좋을지, 아닐지. 그게 맞는 일일지 잘못된 일일지.

도의적. 인간적. 공적, 사적. 어느 것을 기준으로 잡냐에 따라 모든 답은 달라진다. 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답은 더더욱이 복잡해진다.

선의가 악의가 될 수도 있는 상항.

“…….”

하지만 말이다. 그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 그건 이럴 때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알아 봤자 좋을 것 없는 진실. 모르는 게 약.

그러나 기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은 호의에서 비롯된 그런 것.

그래서 주세진에게 물어보았다. 성향부터가 다른 저 바르고 바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답이 궁금해서.

만약 같다면 아, 나도 조금은 바른 사람이구나. 아, 이게 맞는 답이구나 하고 스스로를 변명하게 될 것이고.

만약 답이 다르다면… 약고 못된 그녀는 주세진을 또 탓할 것이다. 이상만을 바라 현실을 보지 않는다고. 아니, 이번에는 현실만 바라다 이상을 완전히 잃게 만들 거라고.

현실에 지친 사람이 이상을 꿈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류에게 있어 그 조금의 기회도 뺏고 싶지 않았다.

이상만을 바라고 그 이상적인 행복 속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인 문제는 묻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묻어 두고.

뭐 어떤가. 우리가 언제는 그렇게 완벽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고. 그러니까.

“우리 이거, 없던 일로 해요.”

“…….”

“노아 이스벨라는 내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은 거예요.”

어차피 이것을 마지막으로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다시는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쪽은 문제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고, 따라서 류에게 전해 줄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말을 맺은 그녀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누구 따라 금연이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역시 그렇게까지 하기엔 그녀는 그리 바른 사람은 아니었다.

의지도 약하고 말이다.

그녀의 길드장님은 어째 계속 말이 없었다. 고민이 깊은 얼굴이었다. 정말로 이대로 묻기만 하는 것이 답일지, 그 이상의 더 좋은 결과물은 없을지 찾아 헤매는 아주 익숙한 얼굴.

그것들을 눈에 담으며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말했다.

“포기하는 법을 배우세요, 길드장님.”

“…….”

“우리는 결국 사람이라서… 완벽한 답 같은 거, 도출해 내지 못해요.”

아무리 질 좋은 정보가 많아도. 아무리 완벽한 전략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우리는 매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불에 타오른 재가 툭툭 떨어졌다. 단 한 번 입에 댄 돗대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느리게, 천천히.

바르기만 한 사람이 그 으스러지는 감정을 배워 나가는 과정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거침없지만 조금은 작은, 저와 달리 평범한 신체 능력을 가진 그들에게 놀라지 말라 들려 주는 친절한 소음이었다.

제지당하는 거 하나 없다는 듯 거침없이 방의 문을 열던 이가 낯을 조금 찌푸렸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몸을 따라 유난히 길고도 새까만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졌다.

“뭐야. 폐암 열차 소굴도 아니고.”

손을 들어 휘휘 젓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짧게 웃었다.

“무슨 일이에요, 류.”

“여기 주세진 있어…. 여기 있네….”

뒤늦게 주세진을 발견한 류는 조금 어색한 얼굴을 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정말이지. 유교 국가에서 자라 가장 유교적인 차림을 하고 다니면서 제일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이예린도 그러지 않았는가. 류가 자기한테 존댓말 한다는 사실이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끔 놀랍다고.

주세진은 종이 뭉치를 정리해 제 옆에 둠으로써 류의 시야에서 치워 냈다. 그래 봤자 비범하기 그지없는 저 사람이 모를 리가 없겠지만….

역시나. 새까만 눈은 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주세진은 여전히 선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을 관찰하던 강유진은 시간이나 벌어 보자는 생각을 하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길드장님 찾은 거예요?”

“아. 우리 놀러 가요?”

“잉?”

“김수혁이랑 박상호가 다 같이 놀러 가는 계획을 짜고 있던데?”

전혀 모르는 사실인데. 의아한 얼굴을 하는 주세진 쪽도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은 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 놀러 가요.”

참… 요새 들어 공략대랑 잘 어울린다 싶었더니,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일단 일을 치고 나중에 말한다는 점에서.

아닌가. 류는 원래 사고부터 친 다음에 알아서 수습까지 하고 알려 주는 타입이었던가.

어느 쪽이 더 곤란한가 생각해 보다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둘 다 곤란하다. 둘 다.

뒤늦게 류를 따라 들어오던 이호연 또한 담배 냄새를 맡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더니 류처럼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거의 혐오하는 듯한 시선이라 조금 상처였지만 원체 후각 자체가 예민하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왼손을 들어 손을 휘젓는 행동을 따라 얇지만 계절에 비해 길다 싶은 소매가 팔랑거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드러나는 흉터를 잠시 눈에 담다 입을 열었다.

“하던 일 끝내고 바로 갈 테니까 계획 먼저 짜고 있어 봐요. 어차피 안 간다고 해도 납치해서 갈 거잖아요.”

“납치라뇨. 걸을 필요도 없이 모셔서 가는 거죠.”

말은 잘한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직은 앳된 티가 다 가시지는 않은 새침한 얼굴. 웃음 따라 휘어지는 눈과 그 아래 남은 옅은 흉터 한 줄기.

평소와 같지만, 여전히 눈은 연신 주세진이 숨긴 종이 뭉치 쪽으로 간간이 향하고 있었다.

더 할 말 없음에도 미적거리며 방을 나가지 않는 모습에서 저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때까지 나갈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곧바로 숨기는 주세진의 모습에서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이라는 게 티가 나서도 있겠지만….

이를 어쩐다. 그녀와 주세진이 복잡하게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류가 마음먹고 저것을 보자 한다면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세진 또한 그것을 알기에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겠지만.

“…….”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강유진은 조금 궁금해졌다. 무엇을 선택할까. 어떻게 할까.

백로 같은 저 사람이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 바르고 바라서 가끔은 보는 사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

그러나 밑바닥까지 몸소 경험했기에 선을 명확하게 아는 사람. 주세진은 숨겼던 것을 손에 쥐었다. 봐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 모습에 류는 고개를 기울였다. 상대의 의중이 궁금하다는 듯. 그리고 주세진은 아무렇지 않은 어조,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했던 그녀 자신도 당황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네 복학 관련….”

“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네.”

“여기 앉아-.”

“가자!”

주세진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류는 이호연의 팔짱을 끼고는 바로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주세진, 담배 피우더라.”

“원래 피웠어요.”

“…진짜?”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고 주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조금은 단 듯 지독한 듯한 담배 냄새가 방 안을 떠돌았고, 정답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했고 나름의 위기를 벗어났다.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강유진은 실수로 말한 것이다.

“이래서 내가 길드장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렇게 배려심 넘치고 사람이 선해서. 그 책임감과 위태로움마저, 그래,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말에 곧바로 몸이 굳고 곤란한 얼굴을 하는 저 모습까지. 여지 따위는 주지 않는 저 단호함도 사랑하기에.

“저는….”

“이거 고백 아니에요.”

“…….”

“그러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못 들은 척, 평소처럼 모르는 척하면 돼요.”

류는 그를 사랑스럽다고 표현하는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거였다. 오로지 그녀 하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후회할 짓은 하지 마세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후회가 남는 문제들이 있었다. 정답 없는 것들이란 결국 후회라는 진득한 감정을 남기는 거였다.

하지만 말이다.

“난 당신을 두고 후회의 감정을 가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잘못된 것을 택하든, 그나마 나은 것을 택하든. 후회뿐이라고 모두가 말하는 문제 하나가 그녀 한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하지만 이 이상 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그만큼 후회를 덮어씌울 감정이 너무 커서, 주체 못 할 만큼 버거울 정도라서. 정말 지독할 정도라서.

어영부영 질질 끄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서. 더 나아가는 게 무서운 것이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상대를 마주 보고자 마음먹었을 때라면 결코 눈 돌리지 않는 저 오롯한 눈.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그 검푸른 눈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제 제 생일에 꽃 보내는 거 하지 마세요.”

차마 저버리지 못해 간간이 들여다보는 그녀의 마지막 혈육에게 당신의 딸이 생일이라 일러 주는, 뻔뻔한 이를 향한 그 부드러운 질타가 좋기는 하지만.

그녀 또한 옳은 선택을 모르기에 서류 이상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여지마저 주고 싶지 않았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주세진은 들고 있던 담배를 종이 위로 비벼 불을 껐다. 칙칙한 재가 떨어지고, 그의 손에 들린 라이터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이 종이 끝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불에 타오르는 종이 위로 어느 신의 마지막 글귀가 떠오르고 있었다.

‘…□□□□.’

발음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언어. 그러나 뜻은 명백한 단어.

“…….”

어쩌면 지금 당장 그녀가 하고 싶은 말.

조금은 궁금했다. 그 마지막의 순간 또 다른 하나는, 그 어리석고도 사랑이 넘쳐흐르던 신은 무슨 의미로 테오그라젠스에게 저 말을 한 것일까.

우리에게 하듯 그 밋밋한 애정으로? 아니면….

강요, 명령하는 어조로?

그러니까 이건, 일종에 지적 호기심이다. 저 미지의 단어를 발음해 보고 싶은 지적 호기심. 핑계를 앞세워 입을 열었다.

“사랑해.”

“…….”

“사랑해, 라고… 쓰여 있네요. 거기.”

짧아진 담배의 열기가 뜨거워서 손이 데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손에 쥐었고, 밝은 어조로.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마냥 즐겁다는 어조로, 글귀를 읽었다. 그 대단하신,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비과학적인 언어를.

결코 그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해 주지 않을 상대를 향해서.

아, 정말 지독한 짝사랑이었고.

아, 정말 슬프고도 사랑스러운 감정이었다.

불에 덴 손이 아팠다.

<외전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