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시우(及時雨)
가끔은 지나친 집착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스쳤다.
뒤도는 모습을 보면 반사적으로 손이 먼저 나간다. 보잘것없는 옷소매라도 붙잡고 싶어서.
거리가 멀면 눈을 떼기 싫다. 그건 무섭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다면 닿고 싶다. 그의 착각도 꿈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를 보며 웃고 떠들고, 마주 닿는 이가 환상도 착각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꾸만 증명받고 싶었다.
이런 그의 모습에 그녀가 질려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받아 주기를 바란다. 욕심이었다.
그리고 류는 기꺼이 그 어리광에 가까운 행동들을 받아 준다.
손을 내치지 않고, 노려보지도 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애정 서린 행동에 기꺼이 응해 주는 편이다.
다만 그러면서도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언제든 그녀가 바란다면 우리 사이에 형성된 그 관계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지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고, 그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그것들과 함께 남겨질 쪽이라는 것도.
그것을 느낄 때면 더 욕심을 부려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간다.
기억이나 추억 같은 추상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그녀에게 그라는 존재를 더 깊게 증명하고 남길 무언가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바람인지라, 기껏해야 심술부리듯 살 위에 잇자국 정도나 남기는 정도로 끝나곤 했다.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더 세게 물거나 하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피가 나게 하는 것도 싫고, 흉이 남게 하는 것도 싫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그놈은 기어이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간 셈이다.
손을 들어 곤히 잠든 이의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왼쪽 눈가 밑에 난 작은 흉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로써 류는 그놈에 대해 잊고 싶어도 거울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떠오르리라.
기어이, 자신의 바람을 이룬 셈이다. 그놈은.
원래 안 좋은 것들은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그것은 아무리 덮어 버리려고 해도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잊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일지, 잊어도 상관없는 무언가였는지. 기억해도 될 사람일지에 대한 자신부터가 없어, 감히 욕심을 내 볼 생각도 못 하는 거다.
싫어하지 않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미워하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게 전부다.
그러니 항상 무섭지. 눈치를 보고, 함부로 묻거나 하지 못하고, 무조건 편인 것처럼 군다.
가끔은 속이 꼬여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겨우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건 집착이다.
만약 진실로 그의 감정도, 그의 존재 자체도 그녀에게 좋지 않다고 한다면 기꺼이 떠날 자신 같은 건 없는 욕심.
그러니 그녀가 제멋대로 구는 건 얼마든지 상관없다. 그 또한 제멋대로 구는 게 맞으니까.
이런 고민을 할 때면 한편으로는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무방비한 얼굴로 옆에서 자는 얼굴을 볼 때면 첫 만남이 떠오르고는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한다고 해도 뭐라 할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손을 들어 하얀 베개 위에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카락을 더듬다가 그것을 손가락에 꼬았다. 그럴수록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하늘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그 또한 평범했다. 특별난 거 없는 인생이었고, 별나지도 않았다.
그냥 남들처럼 공부하고, 적당히 놀고 입시를 준비했고, 그렇게 대학을 간 그냥 그런 인생. 이렇게 정리하면 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저것들만으로 그는 스물이 되었다.
대학생이라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한 것과 전에 없던 군 생활을 하게 된 것이 그나마 특별한 일이었다.
군 생활도 남들이랑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 있다면 미련하다는 소리 들을 정도로 휴가를 꾸역꾸역 모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그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행동에 크게 의미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쉴 때 한꺼번에 쉬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평범한 인생에서 야간 경계 근무를 서다 이상한 산으로 납치되는 일 따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그곳이 완전히 다른 곳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산이야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긴 그가 전혀 모르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다.
훤한 대낮임에도 그 산은 나무가 울창해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바람이 불며 마주치는 잎사귀의 울림조차 고요한 숲이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산짐승의 기척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삼십 분가량 산을 헤맨 뒤에야 인정했다.
여긴 완전히 처음 보는 곳이라는 걸.
처음에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산에서 조난당했나, 귀신에게 홀렸나, 아니면 북한에 납치당했나. 그 많은 예상 중엔 ‘다른 세상’ 같은 건 없었다.
무전기는 먹통이고 수중에 있는 거라곤 몰래 먹으려고 챙긴 초코바 하나였다.
일단은 무조건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길을 찾기 위해 높은 곳으로 가야 할지조차 결정 지을 수 없었다. 함께 고민해 줄 사람 또한 없었다.
산속에 홀로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산짐승이라든가 하는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원초적인 어떤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새하얗고도 지나치게 커다란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그냥 죽었다고 생각했다.
물려 죽든 어떻게 해서든 죽을 거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호랑이가 사람 말을 할 때는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공격 의사가 없는 짐승을 보며 제법 진정된 그의 머리가 생각해 낸 것은 하나였다.
호랑이가 말을 할 리도 없으며, 애초에 한국 산에 호랑이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뭐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혼란스러운 그를 두고 그 호랑이는 말했다. 살아나 봐라. 그게 그의 전직관이 한 첫 말이었다.
그러고는 그를 절벽에서 밀었다. 그리 높고 산세가 험한 절벽은 아니었기에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다짜고짜 밀쳐지고 정신을 잃고 간신히 눈을 떠서 보게 된 것은 여우였다. 웬 작은 여우 하나가 그의 몸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여우를 보고 느낀 것은 그래도 여기가 어디 아프리카 오지 같은 곳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호랑이가 말하는 걸 본 상황이었지만, 얼얼한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을 잇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행동에 놀란 여우가 달아났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애초에 그 산에 있는 야생 동물이라고는 작은 새와 여우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 방도가 없었던 당시의 그는 자다가 곰한테 잡아먹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어야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것마저 그 성격 나쁜 이의 장난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장난질에 천천히 죽어 간다는 것을 느끼는 당사자였다.
있는 거라곤 나무, 숲, 여우, 작은 새. 그 속에서 홀로 헤매면 헤맬수록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배고픔이었다. 그다음에는 추위였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의 부족함이 당연하게 여기게 될 때 즈음에는 그 긴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숲속의 까만 어둠을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났다. 입은 항상 바짝 말랐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화가 났다.
나중에 가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산속을 헤매었다. 내려가도 끝이 없고,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그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구별이 안 될 지경이 되었다.
그 말하는 호랑이가 그를 죽여도 좋으니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배고픔이나 추위보다는 외로움이 그를 더 힘들게 했고, 죽어 가게 만들었다.
가끔가다 그가 잠든 틈에 옆으로 다가와 냄새를 맡으며 장난질을 치는 호기심 강한 몇몇 여우가 없었다면, 그 산에서 정말 정신을 놔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던 순간이었다.
사라지는 따스한 온기 속에서 열매는 없어지고, 간간이 보이는 개울의 물은 얼었다. 사람이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토록 적나라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냥 이렇게 평생 산에서 혼자 헤맬 거면 죽어 버리고 싶다 느꼈음에도 정말 죽을 것 같자 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극한까지 몰린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손에 죽어감을 느낄 때 그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손에서 힘을 완전히 풀려고 하는 순간 거대한 하얀 무언가가 거대한 힘으로 그를 쳐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꺼멓게 죽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옆구리도, 등도, 아니 그냥 온몸이 다 아팠다.
한밤중에 우거진 숲속에서도 저 홀로 빛나는 하얀 호랑이는 바르작거리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울컥한 마음이 입을 열게 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그건 방향을 모르는 분노였고, 길 잃은 서러움이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그치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몇 개월 만에 입을 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 만에 대화라는 것을 시도해 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저 호랑이 때문인 것 같았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격한 감정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빠르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를 돌아보는 하얀 호랑이의 눈이, 그 기이한 회색 눈에 담긴 감정이 무관심과 약간의 적의. 그리고….
짜증. 한심한 것을 볼 때의 짜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그를 두고 그 호랑이는 또다시 멋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또, 이 숲에 홀로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아….”
싫었다. 또 그렇게 홀로 죽어 가기는 싫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해지는 찬 바람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거의 그의 키 반만 한 그것을 기어이 들고 그는 달렸다.
어두운 숲속에서 그 모습을 가릴 생각조차 없는 존재를 향해 그것을 내리쳤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 나뭇가지는 부러졌고, 호랑이의 하얀 털가죽은 멀쩡했으며 그의 손바닥은 다 까져서 피가 났다.
그러나 손에 날카로운 나무 가시가 박히는 고통보다 그를 돌아보는 호랑이의 눈에 담긴 기이한 압박감이 더 묵직해, 겨우 따끔거리는 정도의 미약한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윽.”
긴 하얀 꼬리가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힘 빠진 다리는 버틸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커다란 앞발을 붙잡으며 조여 오는 숨통을 트기 위해 그는 애를 썼다.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막상 정말 죽을 것 같으니 온몸을 발버둥 치며 살려 애쓰게 되었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혼자 외롭고 의미 없게 죽고 싶어 하겠는가. 그 또한 그것이 싫은 보통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한테,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뱉는 말이 거칠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성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바짝 마른 목 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물을 마셨는지 제대로 배곯지 않은 적이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소리 질렀다. 물었다. 그에게 왜 이러는 것인지. 그 하얀 호랑이는 같은 말을 목이 쉴 때까지 부르짖은 다음에야 처음으로 그에게 반응해 주었다.
“왜 이러는 거냐, 라….”
“…….”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뭐?”
그를 짓누르던 발이 떨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며 그 호랑이는 아주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이 굴었다. 정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
그제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저 호랑이가 그를 절벽에서 밀기는 했지만, 애초에 죽을 정도의 높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위협하지도 않았고, 생존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는, 입을 닫아야 했고. 그래서 그는 천천히 메말라 갔다. 저 존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두었으니까.
그저 그가 이 산속에서 무엇 하나 못 하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존재라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넋을 놓은 그를 두고 그 호랑이는 또다시 떠나려고 했다. 조금 전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그는 하얀 털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지 마!”
간절한 그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눈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짐승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그 목소리가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살아남아 보라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사냥감이 되었고, 그 호랑이는 사냥꾼이 되었다. 배고프다 주저앉고, 졸리다 눕고, 외롭다 징징거릴 수가 없었다.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해가 떴고, 해가 졌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풀숲에 베인 상처의 아릿함 같은 건 이제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달리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제 몸 상태에 의문을 느낄 때, 그의 걸음을 늦추게 하는 것이 나타났다.
[살ㅇㅏ남으ㅅ요]
“……?”
그것이 뭔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의지할 빛이라고는 무성한 잎사귀를 파고드는 흐릿한 달빛뿐이었다. 아무리 몇 개월 동안 이곳에서 있었다고 하나 그는 사람이었다.
숲에서는 가장 약자인 위치였다. 뛰던 중에 몇 번이나 다리를 접질렸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에 몇 번이나 눈이 찔릴 뻔했다.
넘어지고 일어나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의 뒤편에서 무언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이 산이 말하고 있었다. 스치는 나뭇잎과 기척을 죽인 동물들의 행동으로.
[제한 ㅅㅣ간: ⑇분]
[제한 ㅅㅣ간: ⑆⑇분]
저게 대체 뭐야.
살아남으라 한 이상한 것 위로 시간이 떠올랐다. 아무리 정신없는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저 이상한 창 같은 거에 떠오른 시간 동안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문제는 그 시간이 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다시 봐도 그 시간이 늘어났다는 거였다.
“……!”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순간 딛고 서 있던 이끼 낀 돌 위에서 그의 발이 미끄러졌다.
그대로 그 옆 냇가로 빠진 그는 서둘러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냥꾼에게 잡히는 것이 먼저였다. 짓눌려지는 몸을 따라 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드는 그의 머리 위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끝났군.”
“잠….”
[제한 ㅅ⸎: 끝]
“…끝?”
갑자기?
그 이상한 창은 그에게만 보이던 것이 아니었는지 하얀 호랑이의 시선 또한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짓누르던 발의 압박감이 사라졌다.
살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을 틀어 그 이상한 창을 보았다. 그러나 그런 잠시간의 기쁨이 무색하게 새로운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ᐕ]
[조ㄱᅟᅥᆫ 부족]
[아⑆ᐙ!ㄴ⑇ᐧᑘ도#ㄲᐧᐏ왕⸎ᐕㅱ]
조…건 부족.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더듬는 순간 트였던 숨이 다시 조여 오기 시작했다.
짓눌린 몸 아래 돌들이 굴러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물이 들어간 귓속이 먹먹했다. 벌어지는 입으로 아무리 숨을 쉬려 해도 산소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면… 지금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죽기 싫어.
그러나 생각을 입을 통해서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연신 그 이상한 창을 봤지만, 글자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유일하게 제대로 보이는 것은 그를 내려다보는 그 회색 눈. 그리고 그 너머의 새까만 밤하늘.
이 산에 끌려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하늘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래서 이대로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게 느껴졌다.
물살 위에 널브러진 손을 움직였다. 손에 잡히는 돌을 들어 짐승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그것은 눈 바로 옆을 맞았고, 순간적으로 힘이 풀린 그 발아래에서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일어났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얀 짐승은 앞발을 휘둘렀고, 힘 빠진 그는 주저앉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차가운 물살이 뺨을 때리고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마지막 기회가 반짝거렸다.
[조ㄱᅟᅥᆫ 달#]
[도⑇#⑆의 ▇이 저ㄴ직]
[시스템 에러.]
[시스템을 재#!? ▇⑇ ⸎ㅱ?⑆!]
[⑆ㅱ⸎#?!⸎ᐧᐨᐧ▇]
[도ㄲㅐ비 공주]
[약속을 지ㅱㅕ]
약속?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호랑이는 더 이상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여전히 물 위에서 힘 빠진 몸으로 허우적거리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간신히 그 물살을 헤쳐 자갈 위로 엎어진 뒤에야 그는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찬 바람이 부니 물에 젖은 몸이 떨렸다. 색색 내쉬는 숨을 따라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추위에 벌겋게 변한 손끝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살아남고자 한 흔적이었다.
그는 그 손을 바라보다 몸을 웅크렸다. 죽기 싫었다. 정말로, 죽기 싫었다. 이렇게 죽기는 싫었다.
그 생각을 하며 소리 없이 울다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느낀 것은 온몸이 아프다는 거였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몸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귓속에 이명이 울렸다. 입 안이 너무 바짝 말라 수분 부족으로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때문인지 흘러나온 눈물 탓에 눈이 부었다. 눈 주위가 아렸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산을 헤매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굴 안이었다.
누가 두들겨 팬 것처럼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의 벽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와 봤다.
바닥을 구르며 놀고 있던 여우 두 마리가 그를 발견하더니 잽싸게 도망을 갔다.
그 도망의 끝은 숲의 경계선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쪽을 향해 갔다. 열이 오른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안 죽일 거예요?”
“…….”
침묵하는 이를 향해 더 가까이 가 보았다. 하얀 머리카락. 기다란 하얀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푸른 밤 아래 그 하얀색은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저 하얀 옷에 하얀 머리를 한 자가 그 호랑이라는 것을.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 정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어쩌면 열 때문에 생각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계곡의 폭포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물이 튀기지 않는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던 이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저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자신을 죽이려 했음을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갔다.
어쨌든,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말만, 말만 좀 통하는 뭐라도 옆에 있기를 바랐다.
저를 죽이려 한 존재와 부득불 함께 있겠다 고집부리는 꼴이었다. 이미 그것만 봐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혼자 또 산에서 살아남는 것보다는 그래도 말이 되는 존재와 있는 것이 낫다 싶었다.
또 그럴 바에야 차라리…라는 생각도 했고.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손에 들린 곰방대 같은 것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을 뒤집어 가루 같은 것을 털어 내고, 옆에 둔 검은 삿갓을 뒤집어쓴 다음에야 남자는 그를 돌아보았다.
갓에 둘린 검은 너울이 얼굴을 가렸다.
“기어이 살겠다 하니, 어찌 보면 가엽고.”
“…….”
“…그러나 동시에 보기 싫은 것도 마찬가지인지라.”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곰방대를 보다 시선을 돌렸다. 검은 너울 안에 있을 눈을 보았다.
“역시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지.”
그렇게 그는 전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의 전직관은 불친절했다. 그렇지만 말이 통했고, 적어도 혼자 산에서 헤매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는 그것에 만족했다. 애초에 처음부터가 빈약함 기대감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대화만 할 수 있으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만 해 준다면. 그거면 됐다 생각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그의 전직관은 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통보했다.
멋대로 데려오고 멋대로 내보낸다는 점에서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왜 이 산에 홀로 납치되었는가에 대한 화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나가 원래대로 살 수만 있다면, 다시 사람들 틈에서 부대껴 살 수만 있다면 지금껏 있었던 일을 모두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전직관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그 비틀린 웃음의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그가 제법 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는 동안 세상은 변했다.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아, 내가 정말로 미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무너졌고, 세상은 멸망하고 있었다. 회색빛 도시에 색이라곤 붉은색뿐. 살아 있는 것은 이상한 괴물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래, 그냥 그가 미쳤다고 하는 게 편했다. 차라리 그런 거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바람일 뿐이었다. 현실은 아프고도 차갑게 그를 덮쳤다.
그 이상한 산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그 시간의 흐름을 증명했고, 눈을 가리는 하얀 실 같은 색들이 꿈이 아니라 말해 주었다.
사람이 그립던 산에서, 이제는 사람이 그리운 세계가 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또다시 살아남아야 했다.
또다시 헤매고 찾고, 울었다.
겉보기에 멀쩡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 있다면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는 사람 없냐고, 제발 아무나 대답 좀 해 달라고.
나중에 가선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대답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제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의 쉬어 가는 목소리에 드디어 답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학생, 그만해! 괴물들 다 부를 생각인 거야?”
“…사람이죠?”
“뭐?”
“사람 맞죠?”
되묻는 그를 힐끔 이며 두 남자는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미친 건가?”
“머리 색을 보면 전직자인 것 같은데…. 왜, 좀 강하다 싶은 놈들 중에 색깔 바뀌는 것들이 좀 많잖아.”
“그럼 일단 데리고 가야 하나?”
“하지만 데려가기엔 좀….”
전직을 한 이후로 시각과 청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들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작게 이야기해도 그에게는 다 들렸다.
그는 고민하는 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데리고 가 주세요! 저, 저 강해요! 그 전직자라는 것도 맞고, 싸우는 것도 잘하니까…. 제발….”
제발 나 좀 혼자 내버려 두지 마.
간절히 비는 그를 그들은 결국 데리고 갔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듣게 된 이야기로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망해 버린 지금도 나름의 규칙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전직자, 전직관 같은 것들이 존재했고, 그와 같은 유난히 강한 전직자들 또한 지금은 제법 그 수가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였던 하늘 조각 또한, 어떤 전직자 덕분에 해결되었다고 했다.
그는 어영부영 정보를 모았다.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이런 것 하나 몰랐냐는 그들의 타박에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래도 학생은 운이 참 좋은 거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엔 그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요?”
그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지휘 능력이 있어, 사람들을 모아 이 지옥 같은 시기를 끝내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라고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했다. 또한 그들이 나름 분류한 히든 전직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환영받을 거라고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는 안도했다. 적어도, 그가 필요성이 있는 이상 이들이 말하는 무리에서 버려지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산에 갇혀 있는 동안 한 해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너무 많은 게 바뀌어 있어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들을 만난 건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그 지휘자가 명령이든 뭐든 좋으니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 가면 적어도 사람 속에 사는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절반만이 이루어졌다.
그곳은 컨테이너 박스와 막사 비슷한 것들을 여럿 모아 두고 만들어진 일종의 생존 캠프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이 그리도 자주 입에 담던 사람, 주세진을 만나게 되었다.
주세진은 그를 반겼다. 하지만 마냥 밝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되려 어둡다면 어두운 얼굴이었다.
주세진이라는 사람을 본 그의 감상은 짧았다. 언제나 한없이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 것 같은 사람.
제법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주세진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으며, 버석하게 마른 입 안으로 물 한 모금을 넘기지 않았다.
뭐가 됐든 그는, 그들이 만들고 일구어 낸 무리에 섞여 들게 되었다.
생존 캠프에서 그의 위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히든 전직자인 데다가 싸울 수 있는 신체 계열이었다.
나쁠 리가 없고, 반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협력하고, 위협이 되지 않을 때의 말이었다.
그와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안내자라며 주세진이 사람을 붙여 주었다. 사십 대 중반 정도 되는 아저씨였다.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안도감이 들자 그제야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세세히 볼 수 있었다.
웃으며 편하게 아저씨라 부르라 했다. 그 모습이 참 살가워서, 솔직히 말하면 싫을 수가 없었다.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을 볼 수 없었던 그는 그 가식적인 온기마저 너무 소중했다.
그래서… 웃던 모습이 거짓이라는 듯 금세 태도를 바꿀 때도, 기를 죽이듯 허튼 생각 하지 말라 하는 그의 모습에도 웃어넘겼다.
은근히 그를 경계하는 이들의 모습에도 가만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를 밀어내는 이들의 행동에도 눈을 감았고, ‘너는 강하니.’라고 말하며 그를 앞으로 내모는 모습에도 알겠노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며 이 무리에서 쫓겨날 것 같았으니까. 더 이상 외로운 건 싫었다. 나쁘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 좋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 그 모든 게 좋은데도, 싫었다.
그에게 말 거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떠미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면서도 한없이 외로웠다.
가끔가다 꺼멓게 죽은 안색으로 밖으로 나오는 주세진이 그런 그를 보고 무슨 일 있냐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소수보다는 다수를 택해야 할 주세진이 그를 내쫓을 것 같아서였다.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너는 괜찮지 않냐며 선 긋는 그 한정된 어울림과 필요할 때면 부르짖는 그 기대와 저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웃음 어린 목소리들에 목이 졸리는 것 같다는 것을….
어차피 이해 못 해.
주세진은 모른다. 단 하나밖에 없는 지휘 계열.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끝낼 유일한 사람. 인도자. 구심점.
인류의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진 일종의 상징체.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그는, 항상 혹여나 죽지는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걱정을 받으며 홀로 생활하는 그는 모른다. 이 기분을.
그들이 싫었다. 그러나 좋았다. 다치거나 아프면 약을 주었다. 배고프지 않냐며 음식도 주었다. 외로운 그에게는 친절을 주었다.
그래, 주는 거였다.
그들에게 그는 대가를 주어야 하는 외부인이었다. 그가 전직자라서, 저들 다수가 민간인이라서. 그가 외부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이방인이라.
많은 요인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결국은 결코 섞일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그 순간순간의 따스함이 좋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였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겨난 기억은 대부분이 나쁘기만 했기에 그 약간의 좋은 것들이 더 빛나는 거였다.
나 하나만 버리면, 이것 봐. 다 웃잖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죽어 갔다. 적응했다. 벼랑으로 몰려가나 아직은 아니었다. 일단은 살아 있었다. 그러니 된 거다,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다 그 사람에 대해 듣게 되었다. 가장 문제 되던 하늘 조각을 해결했다는 전직자. 솔직히 말하면 관심 없었다.
그저 그에게 그 이야기를 하던 이들의 모습 때문에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보다도 강하지 않을까 흘겨보던 눈짓들. 그 기대와 묘한 질투.
그 사람은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보는 순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차림새가 이상하다고.
웬 새까만 게 나타나면 그 사람이려니 하라 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이상한 사람’. 딱 그 정도의 감상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보았을 때의 감상은, ‘아, 저 정도는 돼야,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겠구나.’였다.
언젠가 들었을 때처럼 새까맸다. 옷도, 얼굴에 뒤집어쓴 가면도. 들고 있는 이상한 긴 등 같은 것도.
그는 그 모습을 멀뚱히 보며 눈을 끔벅였다. 지독한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럼에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그 사람은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 까매서 그런가. 유난히 눈에 띄는 그 사람을 보며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주세진의 전략은 훌륭했으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있으니 설렁설렁하든, 실수하든 도망을 가든 상관이 없는 거였다.
그래 봤자 홀로 남아 정리하는 그가 주세진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됐다. 반복되는 것들에 지쳐서 방심했다.
설마 괴물 주제에 죽은 척 따위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맞아 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를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다 보니, 정말 놔 버린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뜯겨 나간 옆구리가 아팠다. 넘어지면서 박은 건지 이마에 뜨뜻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왼쪽 팔을 갉아 먹는 것인지 뜯어 버리는 건지 괴이쩍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런데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상처에 이미 너덜너덜해진지라 정작 보이는 것들로부터 느끼는 고통이 흐릿해졌다.
그저 누워서, 멍하니 저 멀리 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볼수록 까맣고 까매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제 죽음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다.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사람 아닌 것들에게 둘러싸여 이토록 외롭고, 이토록 아프게.
아파서 외로움이 더한 것인지, 외로워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인지 구별도 못 하고. 이렇게 혼자.
그게 싫으면서도, 차라리 이대로 먹혀서 저것들의 배 속으로 흩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를 애타게 찾지 못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죽기 싫어. 아니 사실은 죽고 싶어. 아냐, 나는 죽기 싫어. 아냐. 아냐. 아냐.
이율배반적인 생각들이 그를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그를 잡아먹고 있는 이 괴물들은 그 생각을 먹고 자라 실체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끝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죽을 용기 따위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 간절한 눈으로부터 눈 돌릴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그 숨통을 조여 오는 따뜻한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눈이 감겼다. 그 순간, 푸른 불의 열감이 그를 감싸 안았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그 온기에 어쩐지 눈물이 났다. 흘러내리는 그것에도 꿋꿋하게 눈을 떴다.
그를 향해 오는 이 불의 주인을 향해 말했다.
“…싫어.”
걸음이 멈추었다. 그 까만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웃음을 지었다.
“오, 지 마.”
그 말에, 그 사람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을 배회하던 푸른 불도 흩어졌다.
“…….”
처음으로, 이 세상도 그도 엉망이 된 이후로 아무도 들으려 해 주지 않은 그의 말을 처음 보는 저 사람이 들어주었다.
그게 이런 말일지라도, 들어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이제 됐어.
다시 눈을 감으려는 순간 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웃음까지 흘렸을지도 모른다.
“……!”
눈앞을 스쳐 지나간 까맣고 기다란 것이 그의 팔에 들러붙어 있던 괴물의 눈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시야에 검은 옷자락이 흔들거렸다. 푸른 불티가 튀었다.
검은 꽃신을 신은 발이 괴물의 어깨를 밟았다. 제 무기를 빼낸 그 사람은 그대로 손을 뻗어 괴물의 목 뒤를 틀어쥐고 그에게서 떨어트렸다.
공중에 떠오른 발이 기다랗게 늘어진 검은 덩어리를 밟았다. 기다란 제등이 휘둘러졌다.
목이 잘린 괴물이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 사람은 그를 돌아보았다.
검은 가면에 달린 너울도 까맣고, 옷도, 신발도, 무기마저 새까만 사람. 유일한 색은 그 파란 불뿐. 그마저도 심해 같은 깊은 푸른색.
괴물에 맞먹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모습에선 일말의 동정심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들어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왜.
방향이 잘못된 원망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들끓는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을 들어 하느작거리는 검은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왜….”
“…….”
그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손을 떨쳐 냈다. 허무하게 떨어지는 손을 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독한 피 냄새를 맡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뭐라 말 거는 이들의 말에 눈만 끔뻑이며 눈을 굴렸다.
어디 있어. 그 사람 어디 있어.
묻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치유 계열들이 사용하는 하얀 빛들이 눈이 부셨고, 특별한 일 없으면 볼 일 없던 주세진이 희게 질린 낯으로 뭐라 하는 것도 보았다.
왼쪽 옆구리는 완전히 뜯겨 나갔다. 왼팔은 계속 썩어 갔기에 절단할 것을 권유받았다. 치유 계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지혈뿐이었다.
피가 부족했다. 멀쩡하게 수혈받거나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애초에 수혈받을 피도 없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고민의 시간 동안에도 그의 왼팔은 썩고 있었다.
독이랬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온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수혈 팩을 구하든 실력 좋은 치유 계열을 찾든 뭐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비틀거리면서도 주세진은 기어이 제 발로 나갔다. 그를 따라가던 치유 계열들의 낯이 좋지 않았다.
가망 없는 것을 바라는 이를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그를 발견한 이가 소리를 질렀다.
“왜 여기 있어!”
“…….”
“어, 어서 들어가! 빨리!”
그를 버리고, 그를 두고. 간절히 바라는 얼굴로 웃으며 떠났던 사람.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하찮은 온기가 아니었다.
“어디, 있어….”
“학생, 이러지 말고 일단-.”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냐고!”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그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놀람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저쪽, 막사에….”
더듬거리며 말하는 이를 밀치고 그곳을 향해 걸었다. 격해지는 숨이 지금 그가 뛰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의 상태로는 걷는 게 전부였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피 냄새가 지독했다.
시야를 내리니 허리에 감긴 붕대가 피에 절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색이었다.
그것을 손으로 더듬다 눈을 돌렸다. 막사가 보였다. 힘없는 천 자락을 거두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을 밝히는 조명은 흐릿했다. 벌레가 날아들어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있었다. 여전히 새까만 차림새를 하고 얼굴을 알 수 없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그를 보는 사람이.
피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그 눈 맞춤에 잘못된 감정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피하지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제 목을 조르는 그를 놔두었다. 그 모습에 모든 것이 뒤섞여 버린 감정들이 울컥거리며 튀어나왔다.
“왜 살렸어!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싫다고 했잖아!”
“…….”
말 한마디 없는 그 모습이 정말 제게 화났냐 묻는 것 같았다. 침묵으로 그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주체되지 않는 감정에 멋대로 튀어나온 기다란 손톱이 상대의 목에 상처를 내었다. 그의 손에 잡혀 넘어지며 건드는 바람에 엎은 의료용품에서 소독약 냄새가 퍼져 나갔다.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그는 화가 났고, 슬펐고, 그리고… 싫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신이 싫었고, 이렇게 돼 버린 상황들이 싫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 더더욱 그랬다.
주세진과 몇몇 치유 계열들이 들어와 그를 끌고 갈 때까지 대화도 뭣도 없었다.
다시 정신을 잃었고, 일어났을 때는 팔 하나 잘려 있겠거니 예상했다. 잠결에 흰빛을 보았다. 낯선 푸른 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틀렸다.
눈을 떴을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왼팔은 멀쩡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피 냄새가 멎었고, 고통은 있었으나 전처럼 살이 썩어 드는 고통이 아니었다.
“…….”
그리고, 희미한 탄내가 났다.
주세진은 그날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상황 자체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함께 있었던 치유 계열들의 입막음까지 확실히 했다.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몸이 멀쩡해지니 그제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잘못된 화풀이라든가, 순간적으로 버리려 했던 것들의 간절함이라든가.
숨겨야 한다. 묻어야 한다. 죽으려고 했다는 것을 감춰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때는 다친 지 얼마 안 돼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짓말이었다.
별로 고맙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했다. 일을 더 크게 벌리기 싫었고, 살았으니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도 안 됐다.
그 사람은, 그 까만 가면을 쓴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리됐고, 정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그 사람은 생존 캠프에 합류했다. 그즈음에 커넥터가 만들어졌고, 그 사람을 부를 만한 호칭이 생겼다.
류.
짧은 어조의 닉네임이 그 사람을 부를 유일한 호칭이었다.
그리고 전직명을 보았을 때는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의문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대한 엮이지 않기를 바랐기에 관심을 끊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몇몇 군기 잡기 좋아하는 이들이 그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 시비 건 당사자들의 혀가 잘릴 뻔한 사건이 있던 이후로는 감히 누구도 도깨비니, 공주니, 입에 담지 않아 빠르게 기억 속에서 잊힌 까닭도 있었다.
그냥 그렇게 데면데면하고, 최대한 피해 다녔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그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원래라면 그렇게 끝났을 관계였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목격자가 있었다. 뛰쳐나온 그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은 그 일이 있던 이후부터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저를 죽일 수도 있는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취급이었다. 지금껏 해 왔던 모든 일이 의미 없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는 상관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그랬다.
그러나 웃기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캠프 안 사람들은 그에게 살가워지기 시작했다.
“…….”
“학생, 이제 안 아픈 거 맞지?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를 멀리하려고 하던 그 사람 또한 다시 그에게 살갑게 굴었다. 마치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주세진 앞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때문이었다. 류.
그 사람은 감히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존재가 자신들의 편이 됐다는 점에서 모두가 기뻐했지만 곧이어 마냥 좋아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류, 그 사람은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저에게 시비 거는 이들의 혀를 잘라 버리려고 했을 때도, 그것을 주세진이 말렸을 때도 그 사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 사람이 이 캠프에 합류한 지 한 달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교류가 있어야 기대고 치대는 것도 할 수 있었다. 그가 그리했듯 그 사람도 무언가 기대를 해야 이 사람들이 바랄 수가 있는 거였다.
자신들을 지켜 주기를, 자신들을 책임져 주기를.
그러나 류, 그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 누구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저 사람은 절대, 무슨 일이 생기든지 우리를 구해 주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그러니 언제나 우리를 구해 주던 이에게 더 살갑게 굴자, 하고.
뻔한 속셈이었지만 대응하는 것이 귀찮았다. 또한 우습게도 싫지만도 않았다. 그저 기분이 안 좋았을 뿐이다.
꼭, 그가 그 사람을 이용이라도 한 것 같아서였다. 그 사람이 보기엔 그나 저 사람들이나 다를 게 없겠구나 싶어서. 그게 조금 거북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멋대로 거부당하고 멋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를 대신해 거부당하는 자리에 앉은 것은 그 사람이었다.
“그래도 걔가 강하기는 하더라고. 저번에 나갔을 때도 무슨 괴물 열댓을 한 번에 죽이더라니까.”
“…그래요?”
대충 맞장구쳐 주며 손안에 든 컵을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떠드는 이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류는 강했다. 정말로. 처음 보는 순간 저 정도는 돼야 안 휘둘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괜히 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말 없는 사람.
주세진의 전략은 언제나 옳았지만 유일하게 틀린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을 내보낼 때 짐을 더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 사람을 따라가는 모두가 그냥 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이해졌다. 하나는 입 다물고, 하나는 애초에 말을 안 하니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구나, 하고.
그 사람은 애초에 그와 같은 노력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범위였다.
일부러 살갑게 굴려 하지 않아도, 도움을 주려 애쓰지 않아도 상대가 먼저 굽신거리며 무리에 합류해 줄 것을 바라는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그 변화를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을 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속이 꼬여만 갔다. 안 좋은 것은 반복되는 법이었다.
경외의 대상이 만만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그 사람은 그보다도 더 편한 상대였다. 일부러 살갑게 굴 필요도 없고 가식적으로 굴지도 않아도 되니까.
그 사람의 취급이 안 좋아질수록, 그 원인이 자신인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이, 그래서 저 사람도 저런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시작은 별거 아니었다. 약간의 질투심과 시샘이라는 별거 아닌 감정이었다.
그에게 말 거는 횟수가 늘어난 이들의 입에서 류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최대한 흘려들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그도 모르게 그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야, 학생도 저거에 비하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더라고.”
“…….”
저거….
이제는 하다 하다 사람 취급도 아닌가 보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는 거면서.
“…하아.”
그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최근 들어 자꾸만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관심을 끄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잘못된 화풀이를 했다는 점에서 오는 죄책감, 그러나 멋대로 그를 살렸다는 그 사람을 향한 잘못된 원망.
그 감정들로 인해 그는 류라는 사람 자체가 불편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그 사람을 욕할 자격도 건덕지도 없는 것이 맞았다.
“왜 그래?”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부득불 편을 든다거나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 어쨌든 싸우는 모습 보면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 가끔 보면 오히려 저게 더-.”
“아저씨.”
분명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부름에 말을 멈춘 이를 보며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 혼자 살아남을 자신 있는데 아저씨들은 아니잖아요.”
그의 말에 옆에서 맞장구치던 이들까지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굳은 얼굴들을 보니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뒤에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가서 아양을 떨든, 굽신거리든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뭐?”
“나보다는 그 사람이 누굴 구해 줄 확률이 더 높은 것 같던데.”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누구 하나 죽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게 해서 돌아왔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뿐이었다.
꾹꾹 눌러둔 감정들이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어 터져 나왔다.
“아니면 전직이라도 하든가, 도망치지를 말든가.”
싸우는 데 따라 나가지 않으면 위신이 안 서고 위치가 낮아진다 생각해서 귀찮게 따라오는 거면서.
“아.”
그러고선 결국은 도망이나 치지.
“재능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던가.”
“…….”
“그러면 그냥 저한테 그러는 것처럼 그 사람한테도 가서 치대고 아양 떨어요. 귀찮아서라도 그냥 살려 주겠다고 말할 것 같던데.”
“너!”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고 있던 컨테이너 박스의 모퉁이를 돌자 어둠 속에 스며든 사람이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뒷담 듣는 취미 있어요?”
“…….”
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괜히 그가….
“…진짜 뭐 하자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일 벌이는 게 제일 싫었는데, 사람들 속에서 섞여 들고 싶어 얼마나 참았는데 이제 와서.
이 와중에도 이 사람을 비하하는 목소리는 너무 선명했다.
“그게 진짜 강해서 그런 거겠어! 그, 뭐냐 그게 다 그 무기 덕이라고!”
그 말에 그도 모르게 저절로 시선이 까만 제등 쪽으로 향했다. 무기 덕이라니. 모르니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괜한 트집 잡기였다.
맨손으로 괴물 머리 으깨 버리는 걸 본 게 몇 번인데.
반 가면 아래 드러난 입이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제 키보다 큰 제등을 질질 끌며 뒤돌 뿐이었다.
“…짜증 나.”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잘못된 것들을 보며 안정을 원해 모르쇠 해 온 스스로에 대한 혐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끼어든 그 순간에서조차 그는 류라는 사람을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고집 어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알 수 없는 감정은 정점을 찍고 말았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인기척이 느껴졌고, 이 밤중에 누군가하고 신경 쓰여 밖으로 나왔다.
그 사람을 욕하던 이들이, 하필이면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신경 쓰여 돌아갈 수가 없었다.
몰래 뒤를 밟았다.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리 행동했다.
“저 사람은 문도 안 잠그고….”
사람들이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본인이 강하다 한들 사람인 이상 잘 때 무방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이상은 정말 아니었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자고 있는 사람의 개인적인 곳에 멋대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정말 아니었다.
그만하라 말리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데 열린 문 사이로 기다란 제등이 툭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희번덕이는 눈들이 까만 것보다 더 까만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제야 저들이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하.”
좀도둑도 아니고. 애초에 저걸 훔쳐서 뭐에 쓴다고.
관두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하는데 그들의 손이 제등에 닿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불이 붙었다.
“아아악!”
“살려, 살려 줘!”
까만 제등에 닿은 손을 시작으로 그들의 몸에 푸른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잠에서 깬 것 같은 그 사람이 밖으로 나왔고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가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짧은 단말마. 그것만을 남기고 그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그건 미끼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욕심에 스스로 죽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또한 저 사람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반가면 너머에 있을 눈과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지금까지의 방치와 외면과 모르쇠 하던 것들이 떠올라 온몸을 짓눌러서….
수치스러웠다.
죽은 이들에 관한 생각보다 그를 똑바로 직시하는 이에 대한 감정이 먼저였다. 아무리 그래도 동고동락했던 이들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감상은 없었다.
결국은 그 또한 저들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 는….”
그도 모르게 입을 열었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선 그 사람은 발끝으로 제등을 툭 치고는 그것을 넘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잠깐만요!”
그도 모르게 그 사람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쳐졌다.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커넥터?”
이게 갑자기 왜….
류의 눈치를 보았다. 슬쩍 지도에 담긴 위치를 보니 이 근처였다. 숨소리보다 얇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커넥터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서 갔고, 그 시간 동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캠프 안에 기어들어 온 괴물은 감시망에 눈을 피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기껏해야 1.5m 조금 넘는 정도. 지금껏 보았던 괴물에 비하면 한참 작은 크기였다.
제 무기를 버리고 온 그 사람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주변에 따로 모아 두었던 쇠 파이프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그것으로 괴물을 팼다.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이 그 모습에 희게 질린 낯을 할 때까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류는 들고 있던 파이프를 대충 뒤로 던지고는 또 말없이 걸어갔다.
잠시 눈치를 보다 그런 그 사람을 쫓아갔다.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온 류는 경고하듯 그를 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제등을 들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도, 문제의 무기도 사라지자 그 앞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거짓말을 했다. 사라진 두 사람이 괴물이 이곳으로 기어들어 온 날 도망을 갔다고. 주세진은 믿는 눈치가 아닌 듯싶었지만,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나 주세진은 침묵을 택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었다. 캠프 안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류를 보는 시선들이 더 매서워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라진 두 사람이 전날 무슨 말을 했었는지. 그들의 성정이 어땠는지.
그래서 그는 또 거짓말을 했다.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직접 보았노라고. 더 이상 괴물 잡으러 다니기도 싫고, 전직자… 그 괴물들과 같이 있기도 싫노라 했다고.
그러자 놀랍게도 더 이상 그들에 관해 묻는 이가 없어졌다. ‘괴물’이라고 한 점 때문이었다.
캠프 안에는 제법 많은 전직자가 있었다. 이 이상 그 둘의 행방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다른 전직자 모두를 밀쳐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말 때문에 침묵한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저들이 전직자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풀리지 않은 문제가 없던 일이 되어 묻혔다.
다만, 그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최대한 피해 다녔던 것이 무색하게도 검은 것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변명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뭐라 말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자꾸만 시선이 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보다 보니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들 때문에 밥 한 번을 편하게 못 먹는 거라든가. 애초에 사람들이랑 부닥칠 일 없게 슬금슬금 피해 다닌다는 거라든가.
그 자신보다도 확연히 취급이 더 안 좋은 거라든가.
따뜻하고 멀쩡한 음식 대신 싹이 난 감자 세 알을 받아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매번 만들어진 음식을 나눠 줄 때 받아 가지도 않길래 뭘 먹나 싶었는데…. 애초에 받은 적이 없는 거였다.
“…….”
이건 아니었다. 제일 많이 움직이는 게 저 사람인데. 뻔했다. 무슨 의도로 저런 것밖에 안 준 것인지. 그도 당해 봐서 알았다.
이건 적당히 뻗대고 그들에게 친절하게 굴라는 일종의 시위 같은 거였다. 외부인인 너에게는 아무것도 안 준다는 의미기도 하고.
또한 사라진 두 사람에 대한 추궁이기도 했다.
머뭇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를 옆에 있던 이가 붙잡았다.
“괜한 짓 하지 말아.”
“…….”
“쟤도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여기 기어들어 왔으면 먼저 숙일 줄도 알아야지.”
“그렇다고-.”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사라진 두 사람이 정말 도망갔다고 믿는 사람 없어.”
“…….”
“너도 우리가 장단 맞춰 줄 때 적당히 해.”
입 안에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사라지는 작고 검은 인영을.
그리고 그를.
그건 경고였다. 네가 사람 취급받으면서, 사람들이랑 함께 어울려 살고 싶으면 그들의 뜻에 따르라는.
누군가는 적의를, 누군가는 무관심을.
동조에 휘둘린 무고한 낯과 얕은 동정심이 담긴 눈들.
그러나 모두가 사람 하나를 몰아붙인다는 것은 똑같았다. 시선이 떠올랐다. 푸른 불 아래 사라지는 이들을 두고 그를 보던 시선이.
가면에 가려진 그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놓인 접시를 들고 음식을 나눠 주던 사람의 손에 있던 도구를 뺏어 멋대로 음식을 접시에 쌓았다.
“지금 뭐 하는 거-.”
“적당히 해요.”
“…….”
“그냥 좀 적당히 하라고요. 아니면 이게 그쪽들 목숨값보다 못해요? 지금 사람 하나를 가지고 뭘 하는 건데!”
들고 있던 것을 놔 버렸다.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낸 철제 집게가 바닥을 굴렀다. 그가 당할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제삼자가 되어 보게 되는 광경들은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잘못됐고, 이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데워 놓은 물을 따로 받아 둔 보온병 하나를 들고 그곳을 나왔다. 뚜껑을 닫지 않은 보온병 안에서는 김이 나고 있었다.
“…짜증 나.”
정말로 다.
하늘이 무너진 이후로 세상은 항상 추웠다. 몰아붙이는 시선으로 건물 안에서 밥도 못 먹게 하는 것도 너무한데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음식 하나 안 주는 건 거의… 학대에 가까웠다.
상대가 어리다는 것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저들보다 어린애를 몰아붙인다.
그 사람이 어리다는 건 굳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행동과 하는 짓 몇 번만 주의 깊게 살펴도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그 사람한테 말 한 번이라도 걸 때, 존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부터 그것을 증명했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런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언제나와 같았다.
보는 사람 속을 더 꼬이게 만들 정도로.
“……?”
류가 머무는 컨테이너 박스 쪽에 오니 가스 냄새가 났다. 뭔가 달칵거리는 소리도.
소리와 냄새의 근원지는 박스의 뒤쪽이었다. 모퉁이를 돌아보니 버너를 앞에 두고 낑낑거리고 있는 류의 모습이 보였다.
“…….”
그러니까, 이런 점들. 가스 끼우는 법도 몰라 헤매는 이를 어른과 아이라는 선상에 두었을 때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잠깐!”
“……!”
말리기도 전에 류는 불을 켰고, 가스가 새는 와중에 불을 켠 이후야 뻔했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불은 위에 올려놓은 냄비 위로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놀라 뒤로 주저앉은 류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는 들고 왔던 보온병을 뒤집어 버너 위로 물을 부었다.
“가스가 새는데 불을 켜면 어떡해요!”
“…….”
뭐라 말하려는 듯 류는 입을 열었지만 곧이어 꾹 다물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고민하다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주먹밥 두 개와 부가적인 음식 몇 가지가 쌓아 올려진 그것을 류 쪽으로 밀었다.
“…….”
“먹어요.”
“…….”
“또 불내지 말고 그냥 이거 먹어요. 아니면….”
손을 뻗어 류 옆에 놓여 있던 감자 하나를 집었다.
“바꿔 먹든가.”
다른 곳으로만 향하던 시선이 그제야 그의 쪽으로 돌아왔다. 분명 가면에 다 가려져 있는데도 또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감자나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그가 준 것은 가지고 가고.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반가면 아래 드러나 입이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움직임이 작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류는 손을 뻗어 감자를 낚아채 가려고 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감자를 들고 있던 손을 높이 들었다.
“…미리 말하는데 약 올리는 거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가 봐도 그가 류를 약 올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손이 꽉 쥐어지는 것이 보였다. 한 대 칠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손은 금세 풀렸다. 아예 신경을 끄겠다는 심보인지 몸을 트는 것이 보였다. 그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넓은 소매를 붙잡았다.
“…….”
“…놓으라고 말하면, 놓을게요.”
벌어진 입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를 향한 기세에서 온갖 욕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왜 자꾸 이렇게 괜한 짓을 하는 것인지. 거의 시비 거는 것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매정하게 그의 손을 쳐 버리는 이의 늘어지는 검은 너울을 볼 때면 거기에 휩쓸려 속이 꼬였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꾸만 말을 걸고 음식을 가지고 왔으며, 음식도 아닌 빈약한 식재료를 들고 멀뚱히 서 있는 이에게 음식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 보는 시선도 늘고, 수군거리는 말들도 늘었지만, 신기하게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놔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자신을 놓고, 놓고, 놓다 보니 더 이상 놓을 게 없어 저들을 놔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잡을 게 없는 그는, 다 놔 버린 순간 그를 건져 올린 이에게 신경을 쏟는 거였다.
자꾸만 겹쳐 보이니까. 그는 여전히 왜 이 사람이 싫다는 사람을 굳이 살려 줬는지 그 이유를 모르니까.
그리고… 그들과는 같은 사람 취급당하기는 싫다는 일말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방치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함께 나간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했고, 먼저 움직였다.
불만으로 일렁이던 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언짢음으로 바뀌었고, 그 언짢음을 바탕으로 그에게 신경을 끄는 것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결국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안전성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충족된다면 사람 둘 정도 없는 취급하는 거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저기….”
“…아.”
“그, 걔한테 갈 거지, 학생? 이것도 같이 들고 가. 둘이 먹기에는 적을 수도 있기는 한데….”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그의 말에 밥을 담은 통을 넘겨준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멋쩍음과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흘겨보는 눈들 또한 보였다. 그 눈빛에 당사자가 된 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럼에도 이렇게 나서니까, 이 작은 순간순간들이 선명하게 남아 저들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손안이 열기에 닳아 올랐다. 원래라면 여름이어야 하는데, 그 뜨거운 열기에 손 떼기 싫을 만큼 세상은 추웠다.
그 추위 속에 혼자 멀뚱히 있는 류는, 눈을 못 떼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그를 발견한 류의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림짐작해 보기론 아마 평소처럼 욕이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도망가는 척이라도 하던 류는, 완전히 포기한 것인지 신경을 끄기로 한 것인지 그가 올 때면 이젠 고개만 돌렸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 위로 꼼지락거리는 이의 손을 보다 그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리… 정말 못하네요.”
“…….”
그러다 기어이 한 대 맞았다.
“윽!”
“악!”
“……?”
맞은 정강이를 붙잡고 주저앉은 그는 자신의 신음 소리에 이어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정강이를 찬 발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류의 모습이 보였다.
달싹이는 입에서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황당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전직한 이후로 이렇게 맞아서 아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괴물을 포함해서 말이다.
오히려 때린 쪽이 아파했지. 상황이 묘하게도 때린 쪽이 아픈 건 이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것 같았다.
“…제가 때린 건 아닌데.”
그 말이 더 약 올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류는 그를 밀어서 완전히 주저앉게 하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그새 사라진 작은 인영을 눈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래도 이제는 갔다가 돌아오기라도 했다.
같이 있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점은 류라는 사람은 은근히 성격이….
“…저 정도면 좋은 건가?”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 보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애매했다. 저한테 시비 거는 사람이면 혀부터 잘라 버리려고 하기는 했다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다.
아마 보여 주기식 위협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류는 사람들을 먼저 피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언제나 그 주변을 배회한다. 그러니 듣지 않아도 될 뒷말을 멀뚱히 듣고 있었던 거였다.
류가 저들에게 말만 해도 대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추천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랬듯이, 사람으로 살고 사람 속에 어울릴 거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건 한 번쯤은 다 놔 버리지 않으면 놓을 수가 없는 감로수 같은 거였다. 바짝 마른 목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 주는 그런 물.
그러니 애초에 처음부터 맛보지 않는 것이 좋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계란말이인지 스크램블에그인지 뭔지 모르겠는 것을 보다 조금 집어 먹어 보았다.
“…….”
저번에 갖다준 소금을 쓴 건 좋은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어야 할지 헷갈렸다.
“그냥 갖다주는 거 먹으면 좋을 텐데.”
고집이 세다. 아마도 상대 또한 느낄 생각을 하며 혹시 몰라 들고 온 계란 몇 개와 조금 전에 받은 밥을 넣어 볶았다.
정말로 류가 그라는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했다면 그 또한 이렇게 뻔뻔스럽게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류는, 언제나와 같았다. 제멋대로 하나 더 갖다 놓은 수저를 그냥 놔두고 원래 자신이 앉았을 자리를 당당히 차지해 먼저 밥 먹는 그를 모른 척한다는 점에서.
볶음밥을 그릇에 담아 옆에 두었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돌아온 검은 옷의 주인은 조금 머뭇거리다 그것을 받아 들었다. 천천히 그것을 먹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
“말 안 해 주면 다음에 뭘 갖고 올지 모르잖아요.”
상대는 답이 없었다. 애초에 답할 거라 기대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말하는 거였다. 침묵이 싫어서.
“아까 맞은 데 아픈데.”
“…….”
“맛있어요?”
“…….”
“…이제 안 왔으면 좋겠어요?”
손이 멈추었다. 그는 다 먹은 그릇을 내려놓고 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정말로 싫어하는 건지, 사실은 아닌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의 의견을 계속 묵살할 수는 없었다.
진심으로 상대가 그저 혼자 있는 것을 바란다면 이제 그만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음식으로 장난치는 것도 관둔 것 같고.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상대의 의견뿐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고개만 끄덕이면 이제 안 그럴게요.”
“…….”
숟가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류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으나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오지 말라는 뜻일까, 고민하는데 소매를 움켜쥐는 작은 손길이 느껴졌다.
“…….”
아주 조금. 류의 손에 쥐어진 옷은 아주 조금이었고, 신경 쓰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얕은 힘으로 당긴 정도였다.
그 손짓에 기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이 못 할 짓을 한 거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밀어내는 사람에게 멋대로 다가와 더 밀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건, 어찌 보면 강요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그 작은 손짓이 기쁘지 않은 것만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그는 글러 먹었던 거다.
다시 멀어지려는 손을 붙잡으려다 방향을 바꿔 펄럭이는 옷소매를 붙잡았다. 류의 손은 움찔거렸으나 그의 손을 완전히 쳐 내지는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적어도 상대가 옷소매를 잡는 것을 매정하게 쳐 버리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벌어져 갔다.
그의 곁에서 알짱거리는 고양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류가 먼저 다가오는 일이 있었다.
밥에다가 야채를 넣으려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젓기도 했다. 거스러미를 자꾸만 뜯어 피가 나는 손을 달라 손을 내밀면 순순히 내주었고.
밖을 나가 돌아다니다 구출한 어느 가족 중 고맙다 인사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류에게는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그 틈을 다른 이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 압도적인 강함 앞에서 그 전에 것을 묻어두고 먼저 다가올 뻔뻔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주는 거예요?”
그의 물음에 까만 가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검은 너울이 팔랑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손안에 쥐어진 작은 사탕 두어 개를 보다가 결국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이, 그러니까, 그게.
순간적으로 좀, 귀엽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생각을 하니 괜스레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라 그는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또 무언가 심사가 꼬였는지 류는 그의 정강이를 툭 차고는 뒤돌아 가버렸다.
한번 호되게 아파 봐서 그런지 그 뒤로는 가끔가다 분을 못 이겨 때리거나 할 때는 강도가 약해졌다.
여전히 대화라고 할 만할 말은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류와 말이라는 걸 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계기는 사소했고, 그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란 추상적인 것들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류와 그가 함께 나간 날이었다. 하늘 조각은 아니고 주변을 배회하는 괴물 무리가 심상치 않아 그것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주세진의 오페리움으로 주변의 지형과 괴물들의 수, 종류를 어림짐작했다. 한 번도 함께 주세진 앞에 서 있던 적이 없어 몰랐는데, 류는…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멀뚱히 있어 주세진의 전략을 잘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였지 애초에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걸 함께 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멋대로, 라면 멋대로 구는 거였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외곽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을 텐데,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듯 류는 혼자 앞으로 나갔다. 그런 류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원래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말어.”
“원래 저런다고요?”
“그래. 그니까, 학생은 적당히 주세진 그놈 말 들으면서 행동하고 우리도 설렁설렁 움직일 테니까…. 크흠. 자, 다들 움직이자고.”
“…….”
그와 나왔을 때는 그래도, 중간까지는 함께 움직이는 성의라도 보였는데. 애당초 그 사람과 나올 때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훤했다.
건물의 터였던 것을 돌아다니는 내내 간간이 허공으로 치솟는 검은 그림자라든가 푸른 불꽃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나마 같이 있을 때는 돌아다니는 척이라도 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천천히 자리에 앉기 시작하는 이들도 보였다.
그는 그것을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곳에 서서 지켜보았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떠한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저 사람들을 그나 류가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의문이 충동심이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진심으로 위험하게 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분명 주세진은 저 사람들만 데리고 움직였다. 그럼에도 성공을 이끌어 냈다.
그런데 저 모습을 보면 그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된 것만 같았다. 그러면 둘 중 하나였다.
저들이 주세진마저 속였거나. 애초에 할 수 있는데도, 다 떠밀었던 거거나. 그렇다면 그는 무리에 가장 큰 악영향을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로 인해 해이해지고 엉망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정말 결과가 그렇다면 그때는… 말해야겠지. 그가 존재함으로써 망쳐 버린 것들을. 적어도 주세진에게는 말해야 했다.
주세진이라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이 적어도 사람 사는 꼴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건 아무리 강하다곤 해도 두 사람을 가지고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눈을 굴려 류를 보았다. 괴물의 목을 틀어잡아 벽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신체 계열인가.”
어째 마법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마법은 장식이었다. 저번에 맞았을 때도 아팠던 걸 보면 신체 계열 쪽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류의 손에 의해 던져진 괴물이 남은 건물의 잔해를 부수고 시시덕거리며 앉아 있던 이들을 향해 날아왔다.
깜짝 놀란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괴물을 뒤따라온 류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누구 하나 다치면 어쩌려고 이걸 이쪽으로 향해 던져!”
“……?”
의아함이 서린 가면이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너희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돌아다니지 않고 안전한 곳에 있었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에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
벽에 박혀 바르작거리던 괴물이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처럼 죽은 척을 하고 있던 거였다.
놀란 그가 그곳을 향해 뛰어내리기도 전에 류가 앞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괴물의 다리를 잡아 더 이상 못 오게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그 하나였다. 놀란 이들 중 하나가 류의 팔을 잡아 확 끌어당기는 것이 보였다.
예상 못 한 이의 방해에 류는 비틀거렸고, 그 틈을 괴물은 놓치지 않았다.
기다란 손이 류를 향해 휘둘러졌다. 류는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했으나 기다란 너울이 그 손에 얽혀 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너울과 하나인 가면이 벗겨지는 것이 보였다. 류의 팔 하나는 여전히 사람에게 붙잡혀 있었고, 다른 손은 제등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벗겨지는 가면의 위를 눌렀다.
“…가면, 조심해요.”
“…….”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가면 너머의 눈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류는 가볍게 제 팔에 매달린 이를 뿌리쳤고 그가 손을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본인의 손으로 가면을 눌렀다.
솔직히 말하면 가면 너머 얼굴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선이었다. 얼굴을 보일 생각도 이름을 알려 줄 생각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가면을 쓰고 움직였던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거다, 라는.
고개를 트니 검은 그림자에 꿰뚫려 죽은 괴물의 사체가 보였다. 그것을 보다 고개를 돌려 주춤거리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후.”
이건 더 이상 숨기거나 해서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주세진이 원인이나 다름없는 그를 내쫓든 아니든 이제는 말해야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주세진이 화내는 것을 그 날 처음으로 보았다.
분명 언제나 피로하고 자주 쓰러지고 하던, 오히려 따지고 보면 병약하다 싶은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주세진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잔잔하고 고요했으면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질책조차 담기지 않은 어조였다.
그러나 조용한 화를 담은 기색은, 그간의 의문을 풀어 주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온유하기만 한 이가 이 정도 되는 인원수를 전부 이끌고 통제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화를 냈고, 그 모습은 고요했으나 반발적인 마음이 들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검푸른 눈은 깊은 심해와 같았다.
생존 캠프에 있는 모두가 주세진에게 혼난 꼴이었다. 류는 애초에 말을 들은 적도 없는 것. 그는 듣는 척해 놓고 사실은 들은 적도 없다는 점에 대한 괘씸죄까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어라 할 때는 주세진이 그와 류 둘 다 내보냈기에 무슨 내용이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뀌었다. 더 이상 그들은 류나 그에게만 의지하지 않았다. 밥 갖고 장난치지도 않았고, 몰아붙이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멈추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하게도 주세진이 그들만 밖으로 내보내는 일도 잦아졌다.
물론 딱 그들이 적당히 힘들 정도. 목숨에 위협이 갈 만한 곳은 절대 그들만 보내지 않았다. 아마 나름의 벌이자,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록 슬그머니 밀어내는 그들의 행동마저 완전히 막지는 못했으나 그건 이미 각오한 부분이었다.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고.
“…내쫓을 건가요?”
또한 이것도 그가 각오한 부분이었다. 며칠의 고민 끝에 그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에 눈 사이를 꾹꾹 누르던 주세진은 낯을 찌푸렸다. 의문을 담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왜 그런 말을 하죠?”
“애초에 제가, 원인이었으니까요.”
“원인이라….”
피곤해 보였다. 주세진은 책상 위에 낡은 지도, 오페리움 위를 툭툭 두들기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함께 가서 내가 내놓은 전략대로 싸울 것을 명령했지, 부탁한 게 아닌데.”
“…네?”
“그러니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명령을 내려놓고 제대로 확인도 안 한 내게 있고, 사람들이 그 명령을 제대로 따르도록 만들지 못한 나한테 있는 거겠죠.”
“하지만….”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면 그 입장에 맞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거예요. 내 잘못된 명령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주세진은 그 말을 하며 시선을 그의 왼쪽 팔과 옆구리 쪽으로 돌렸다. 검푸른 눈동자가 더 깊어지고 어둑해졌다.
“내 책임이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그만 나가 봐요. 애초에 내가 먼저 눈치를 채고 움직였어야 했던 문제니까.”
“…….”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걸 묻지 말고 내게 사과를 요구해요. 그게 정당한 거니까.”
“…네.”
그는 조용히 인사하고 그곳을 나왔다. 애초에 이곳 모두가 주세진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셈이었다. 그 사람이 알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제 책임이라 주장했다. 그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지휘 계열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자리에 앉았으면서.
복잡한 감정을 내쉬었다. 그건 흐릿한 기체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속은 여전히 불편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가장 큰 컨테이너 박스의 위로 올라가 그 위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구멍 난 하늘이 보였다.
사람 간의 관계도 저 하늘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구멍을 메꾸려 노력하지만 결국은 다시 무너지고, 메꾸고 무너지고. 우리는 아슬아슬한 것들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러나 언제나 저 검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거다. 그게 싫다면 눈을 돌려야 하는 거다. 그 사람, 류처럼.
높은 곳에 앉으니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중에 그 사람은, 눈에 익어 버린 검은색은 한 자락조차 보이지 않아 의문이 들 때쯤 머리 위로 작고 하얀 꽃들이 떨어졌다.
“…….”
“…….”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는 생화가 뺨을 스쳤다. 꽃을 뿌리는 손 아래 검은 소매가 선명하게 보였다.
왜 이 회색빛 도시에서 구멍 난 하늘을 배경으로 둔 이 순간에도 하얀 그 꽃보다 그 검은색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까.
손을 드니 꽃 하나가 손안으로 떨어졌다. 눈가를 스쳤고, 어깨에 앉고, 머리카락에 걸려 자리를 잡았다.
가면 아래 입이 벌어졌다.
“…고마워.”
“…….”
말, 했다. 그것을 깨닫고 입을 열자 류는 곧바로 뒤로 물러나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면서 흩뿌려지는 하얀 꽃이 팔랑거리며 휘날렸다.
꿈을 꾸었나 싶었다. 그러나 머리며 어깨며 그를 덮은 꽃은 생생히 살아 있어, 이게 꿈이 아니라 말해 주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꽃을 구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곧이어 이것이 고마움의 의미로 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속이, 간지러웠다. 류가 사탕을 선물이라고 주었던 그때처럼.
“…….”
또, 얼굴에 열이 뻗치는 것이 느껴졌다. 쏟아진 꽃들의 꽃잎이 너무 얇고 부드러워 닿는 것만으로 간지러웠다. 그래서 그의 속까지 간지러운 거였다.
손이 움츠러들며 떨어진 꽃들을 움켜쥐었다. 향이 강한 꽃이었다. 흐릿한 불 냄새, 탄내와 뒤섞여 진한 꽃향기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건 그의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미쳤어.”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자꾸만 뭔가 좀… 귀엽게 보인다는 점부터가.
얼굴도, 이름도, 나이조차 모르는 사람. 항상 이상한 까만 가면이나 뒤집어쓰는 사람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점부터가….
“진짜 미쳤나 봐.”
꽃을 담은 손을 보다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하얀색이 그의 머리 색과 똑같았다. 그대로 뒤로 몸을 누우니 계절감을 잃은 추위 속에서 활짝 핀 꽃들이 한 올 한 올 떠올랐다.
모든 게 다 이상한 날이었다. 그는 쫓겨나지 않아도 되었고, 그간의 설움은 끝났다. 봄이 아님에도 꽃이 그를 덮쳤고, 이 회색빛 도시에선 가장 보기 싫은 그 붉은색이….
감정이 되어 뒤섞인 그런 날.
하지만 그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외면했다. 낯설고 어색해서. 그런 적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묻었다. 다만 다 숨기는 법도 몰라 이유도 모르면서 초조해하고, 괜스레 틱틱거렸다.
그런 그를 류는 이상하다는 듯 멀뚱히 보고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그의 모습에 되려 스스로가 낯부끄러워 자제했다. 원래의 태도를 취하려 노력하는 그를 보며 류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다.
“머리 자르게?”
“…네.”
그 뒤로 말하기 시작한 류의 모습에 오히려 말수가 줄기 시작한 건 그였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더듬던 손이 굳었다. 들고 있던 가위가 저절로 내려왔다.
검은 가면이 그 가위 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가위를 뺏어 들었다.
“잘라 줄까?”
“남의 머리 잘라 봤어요?”
“응. 옛날에 친구 머리…. 절교당할 뻔했어.”
“…가위 내놔요.”
그의 말에 류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웃는 건 그가 아닌데, 그의 속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말만 하고 정작 가위를 뺏지 않는 그의 모습에 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안 망칠게.”
“…….”
그게 문제가 아닌데.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잡는 손길이 닿을 때마다 숨이 막혀 왔다. 최대한 눈을 내리떴다. 그런 그의 시야에 잡히는 건 검은 한복과 검은 너울 자락이었다.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찢어졌는지 너울에 빈틈이 있었다. 그 틈새로 이쪽을 힐끔 이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찢어졌어요.”
“알아.”
“꿰매 줄까요?”
조금씩 잘려 떨어지던 하얀 머리카락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야 그 말이 류에게 가면을 벗어 달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말은-.”
“움직이지 마.”
고개를 들려고 하는 그의 머리를 류는 손으로 꾹 눌러 막았다. 다시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류의 괜찮다는 말은 이 이상 선 넘지 말라는 경고라는 것을.
간지럽게 조여 오던 속이 이번에는 다른 느낌으로 조여 왔다. 결국은 그와 류의 사이에는 벽이 있고, 선이 있으며 그 결과물은 저 가면인 것이다.
가면만 벗으면 전혀 모르게 되는 그런 사이. 애초에 처음부터 뭘 바라고 다가간 것도 아니면서 아주 커다란 무언가를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짧고도 불그스름한 감정을 더 깊숙이 꾹꾹 묻었다.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작은 불씨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류는 그때부터 그에게나마 말을 하고, 더 나아가 무해한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는 놀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선이 있었다.
먼저 무언가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도와 달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식 하나를 먼저 먹고 싶다 하지 않았다.
멋대로 왔다가는 바람이었고, 손에 잡히지 않는 바다의 모래였다. 여전히 그가 먼저 잡아도 되는 곳은 기다란 소매 정도. 상대가 먼저 잡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냥, 이 정도에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일상을 흉내 냈다.
“명칭을 제대로 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명칭?”
“괴물들이요. 매번 일일이 어떻게 생겼다며 설명하기는 힘드니까요. 최근엔 가장 많이 보이는 그 까만 개를 닮은 괴물의 명칭 얘기를 하던데….”
“그 두 발로 서는 거?”
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의 무릎에 앉아 있던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의 눈이 연신 그의 꼬리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
최근에 류가 밖을 돌아다니다 구해 온 일가족 중 하나였다. 이곳에 있다가 며칠 뒤면 가족과 함께 다른 안전 구역으로 간다고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흔들거리던 류는 아이의 머리의 턱을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서현이가 정해 볼래? 이름. 까맣고 멍멍이 닮았는데.”
“어…. 그럼 까미!”
“그래. 까미로 하자.”
류의 말을 멀뚱히 듣고 있던 그는 이어지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낯을 찌푸렸다.
절대 못 잊고 구별하기도 쉬운 이름인 건 맞는데, 그 까미가 우리가 죽여야 할 존재라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의견은 의견이니 그는 그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괴물의 이름은 정말로 까미로 결정이 났다. 뭐, 케르베로스나, 까미나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류는 정말로 그렇게 결정할 줄은 몰랐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결과물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짓던 주세진이 떠올랐다.
나름의 평화라면 평화였고, 조금은 갖게 된 여유 속에서 바뀌는 건 류뿐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여유 속에서 누그러지는 존재였고, 웬만큼 만족하여야 남을 돌아볼 시간이 생기는 존재였다.
그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학생! 이거 들고 가.”
“사과네요?”
“저기 아저씨들이 나갔다가 구해 왔대.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있을 때 갖고 가서 먹어.”
“고맙습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상태가 괜찮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사과를 구한 것 자체가 용했다. 그리고 그걸 굳이 붙잡고 나눠 줄지도 몰랐고.
사과를 구해 온 당사자이자 그에게 적당히 하라 일렀던 아저씨는 그가 그것을 들고 있는 모습에 낯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이어 사과 하나를 더 들고 와선 그에게 내밀었다.
“너 어차피 그거 갖고 또 걔한테 쪼르르 갈 거 아냐. 너 혼자서 두 개는 더 먹게 생겼구먼. 그거 하나로 둘이 뭘 한다고….”
“어, 고맙습니다.”
“크흠. 둘이 처음부터 묘하더니만 요즘은 다른 쪽으로 묘하고 말이야.”
“…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네가 걔 처음에 피해 다닌 거 모르는 사람 없어.”
티가, 났나…. 노골적으로 피해 다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다른 쪽으로 묘하다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기가 무서웠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그를 보며 괜스레 헛기침한 아저씨는 말을 이었다.
“그래놓고 우리 보고 뭐라 하기나 하고 말이야. 이제 와서 그거 같고 뭐라 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체 걔한테 왜 그리 신경 써?”
“…그냥, 그냥요.”
그의 대답에 돌아오는 답은 싱겁다는 말이었다. 그는 대충 인사를 하고 류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갔다.
언제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을 골라 머무는 류가 있을 만한 장소는 뻔했다. 신체 계열이 아니라면 발 디딜 엄두도 못 내는 곳.
다리에 힘을 주어 컨테이너 박스 위로 올라오면, 보인다. 꿰매느라 분리한 너울 때문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마저 새까만 그 사람이.
바람에 휘날리는 그 긴 머리를 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로 선을 찍찍 그어 놓은 것 같았다.
손을 뻗어 그것을 감고, 류는 그를 돌아보고. 그렇게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 수 없으니 현실인 것이다.
“사과 먹을래요?”
“웬 사과?”
되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모습에 만족하는 것도, 현실이니까 가능한 거고 현실이니까 한계인 것이다.
“껍질 깎아서 줄까요?”
“토끼 모양으로 깎아 줘.”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
그의 말에도 류는 기대하듯 들고 있던 너울을 내려놓고 그를 보았다. 기대 어린 눈에 못 이겨 결국 일단은 해 보기로 했다.
“아.”
“토끼 귀 잘렸어….”
그리고 결과물은 역시나 실패였다. 어정쩡하게 잘린 귀를 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를 빼내 제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 그 또한 한 조각을 잘라 입 안에 넣었다. 조금은 퍼석한 그런 맛이었다.
“토끼 사과 같은 거 좋아해요?”
“음…. 귀엽잖아. 옛날 생각도 나고. 나중에 시간 되면 배워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나중에 엄마한테 토끼 사과 깎아 달라고 할 거야.”
“…….”
“오래 걸리잖아. 옆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겠지. 옆에서 알짱거린다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
사람들은 그에게 왜냐고 물었다. 걔한테, 류한테 왜 그리 신경 쓰냐고.
빈말로도 맛있다고 못 할 것을 먹으며 웃음 짓는 모습을 보며 그는 그 웃음을 따라지었다. 그들에게는 어렵고 그에게는 너무 쉬운 답을 생각하면서.
왜냐니. 그야….
당신들은 보려 하지도, 보지도 않던 이 사람의 웃음이 나에게는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니까. 이미 이렇게 보았고, 그럼으로써 기억에 남아 알고 있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자꾸만 눈이 가고, 생각나고, 닿고 싶은 거다. 욕심이 생기고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신경 끄는 건 이제 못 한다. 모른 척도 불가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희미하게 타오르는 그런 감정을 꾹꾹 짓누르는 것까지다.
“나중에 말이야. 저 건물들이 다시 세워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남들 하는 것처럼 똑같이 즐기고 살 거야.”
무얼 하고 싶냐는 그의 말에 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정말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졸업한 학교에 놀러 가는 거, 수족관이나 영화관에 가는 거. 맛있는 거 먹으러 돌아다니는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
바람을 타고 흘러든 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그게 너무 간지러워서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계절이 사라진 세계는 분명 추워야 하는데, 자꾸만 열이 올라 그를 곤란하게 했다. 그래서 그 열감에 젖은 그는 그도 모르게 말했다.
“나중에 말이에요…. 정말로 다 괜찮아지면, 같이 가요….”
류는 답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나 후회가 들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는 그 애매한 시간들이 그리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하늘이 조각 난 이후 가장 빛나던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잊지 못하는 거다. 조금도.
“…다른 거 입었네요.”
“응. 추가할 게 있다고 가져가서.”
“?”
누가 가져갔다는 거지?
의문을 담아 류를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애초에 정말 궁금해서 물었던 것도 아니라 그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낯선 차림새를 한 류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검은 고무줄로 기다란 머리카락을 올려 묶는 류에게서 눈을 못 떼는 것은 그 하나가 아니었다.
항상 입고 있던 새까만 한복이 아닌 평범한 후드티에 바지 차림은 모두에게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벗지 않은 도깨비 가면이 묘했다.
어쨌든, 확실히 한복을 입었을 때보다는 더 어려 보였다.
사라진 너울 대신 살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보다 후드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이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저랑 둘이서 나갈 거예요.”
“들었어. 바다 쪽 정찰이랬지.”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넥터에 떠오른 지도를 살펴보았다. 주세진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지역은 월미도의 방파제 부근이었다.
바다 쪽으로 괴물들이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생존 캠프에서 누가 겁도 없이 거기까지 나가 그런 것을 보았나 했더니 애초에 목격자는 여기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끔가다 구출하게 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곳, 안전 구역이자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부가 있는 곳. 그곳 사람들이 목격자였다.
듣기로는 그곳에 대통령인가 국회 의원인가, 어쨌든 높으신 분들이 있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있는 이곳에 물자를 전달해 주는 곳도 그곳이라 했다.
주세진과 그 사람들 간에 무언가가 오갔기에 그가 이곳에서 괜히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카더라식의 추측이었기에 대충 흘려들었다.
그런 것들에 깊게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무언가가 오고 갔든 아니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것에 관심 두어 힘 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건물 사이에 숨어 있는 놈들이나 하늘 조각을 공략했던 평소와 달리 오늘의 목적은 정찰이었다.
주세진의 낯은 평소처럼 음울하고 어두웠다. 그는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정찰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일렀다.
실제로 괴물이 바다에 터를 잡았다면 그 수가 어떨지 모르니 괜히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껏 아무 말 없다가 다른 이의 눈에 보였을 정도면 그 수가 이미 상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입을 뗀 주세진은 조금 망설이는 듯싶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다무는 주세진의 모습을 보며 그는 조금 속이 쓰렸다. 다른 사람들도 붙여 줄까. 아마도 그게 주세진이 말하고자 했던 바일 터였다.
“…아뇨. 괜찮아요.”
주세진에게는 티 나지 않게 그의 옷소매를 꼭 쥐는 류의 손길이 느껴졌다. 적의나 경계심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싫다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류를 대신해 말하는 그를 보며 주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와 속에 고였던 한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산에서 나와 보았을 때보다는 많이 괜찮아진 꼴이었다.
그 때문인지 추위도 덜했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면 하얀 김이 흘러나왔고, 찬물에 닿으며 몸은 떨렸다.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추운 세상이었다.
“…….”
솔직히 말하면 류가 싫어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거절을 입에 담을 생각이었다. 아직은 누군가와 함께 나간다는 것이 그리 기껍지는 않았다.
아예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위험한 일을 해야 할 때면 그냥 혼자 하고 싶었다.
대부분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나가서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류는 그를 버리고 홀로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는 류 혼자만이 싸우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나 그는 그거 하나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시린 손에 입김을 부는 류를 바라보다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밀었다.
“……?”
“춥잖아요.”
“괜찮아.”
“보는 제가 더 추워서 그래요.”
겉옷 하나 없이 기모 후드티 하나 입은 차림새. 손끝이 빨겠고,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이 조금 튼 것이 보였다.
이 정도는 받아 주기를 바랐다.
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에게서 목도리를 받아 갔다. 자주색의 목도리가 얇은 목에 감기었다.
그것은 그와 류가 해안선을 향해 달려갈 때 바람을 타고 살랑거리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 기다란 천 자락을 타고 시선을 올리며 지독하도록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였고, 추위에 붉어진 귀가 보였고, 얼굴을 가린 검은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을 그는 뒤에 서서 보았다. 앞서 달려 나가는 사람의 뒤를 쫓으면서. 그건 손을 뻗어 봤자 닿는 것은 넓은 옷소매밖에 없는 위치였다.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고.
목도리를 내주어 목이 허전해 그런 것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춥게 느껴져서 그는 말도 없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했다.
그런 그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짧았다. 그의 행동을 서두르자는 재촉으로 보았는지 류는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를 다리에 감았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다다른 해안선의 높다란 방파제 주변을 배회하며 그와 류는 말없이 주변을 정찰했다.
미약하게나마 피 냄새 같은 것이 날까 싶었지만, 바닷바람에 쓸려나간 지 오래인지 주변에 맡아지는 향이라곤 바다 내음밖에 없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흔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괴물을 여기서 본 게 맞기는 한 건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류는 방파제 부근을 기웃거리며 파도치는 바다를 훑어보고 있었다. 중심 잃고 빠질 리는 없겠지만 괜히 눈을 떼지 못하겠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류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기척을 느낀 류가 고개를 들었고 한참을 달리느라 흐트러진 목도리가 거의 풀려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걸쳐놓은 것에 가까운 모습에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방파제의 둑 사이사이를 기어드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연가시?”
그의 말에 류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작은 지렁이 같던 것들이 떼로 튀어나오더니 서로 얽히어 거대한 줄기로 변했다.
“……!”
그것은 곧바로 류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것을 가볍게 피한 류는 조용히 손을 들어 검은 그림자로 그것을 꿰뚫었다.
그림자를 타고 흘러든 푸른 불에 타 버리는 그것들을 보다 몸을 낮추는 류의 모습에 그는 서둘러 그 곁으로 뛰어갔다.
“위험해요!”
차마 손은 못 대고 말하는 그를 힐끔 본 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아래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아까 그 이상한 줄기에 휩쓸려 떨어진 목도리를 주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기다란 목도리의 끝을 잡고 그것을 끌어당기던 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림자 속에서 무기를 끄집어냈다.
그제야 류가 잡은 목도리의 끝을 붙잡고 늘어지는 좀 전의 이상한 줄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목도리,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류는 그리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았다. 뒤로 물러나라는 듯 손을 내미는 모습에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그 기분을 뒤로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의 정체를 눈에 담았다. 조각조각 난 것들이 한데 뭉쳤다.
그것은 연가시가 서로 얽히는 것 같기도 하고, 의미 없는 낙서가 의지를 가진 모습 같기도 했다. 하얀 가루를 흩날리며 방파제가 무너졌다.
그와 류가 방파제의 주변에서 훌쩍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징그러워.”
류는 짧게 읊조리며 손에 쥐고 있던 제등에서 푸른 불을 흘려냈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한 결과 알게 된 것은 류는 손대기 싫은 괴물이 나올 때만 마법을 쓴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벌레, 해충, 그 외 징그러운 것들 다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찰만 하고 와, 라는 주세진의 말은 이미 잊은 것 같기도 했다.
거대한 푸른 불의 창 하나가 괴물의 몸을 갈라 불태워 버렸다. 무너진 방파제의 위에서 탁탁 타오르는 푸른 불티만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
그런데 괴물이 저거 하나가 맞나?
묘한 기시감이었다. 분리된 것 같다가도 한데 뭉쳐 행동하던 연가시 괴물들의 모습. 겨우 저거 하나를 안전 구역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발견할 확률.
잠시 그가 생각하는 사이 절벽이나 다름없게 된 방파제 위로 뛰어든 류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은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금방 올게!”
류가 가는 방향에 조금 탄 채로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목도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괜히 참견해서 신경 쓰이게 만든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어느새 파도가 치는 방파제 아래까지 다다른 류는 들고 있던 제등을 쭉 내밀어 목도리를 건져 냈다.
들고 있던 제등을 손에서 놓고 물에 젖은 목도리를 꾹 짜는 모습을 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스레 탓하는 비겁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류가 좀 더 그를 밀어냈더라면, 이라는 그런 생각.
혼자서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잡힌 것은 그때였다.
“…사람?”
무너진 방파제. 둑의 역할을 하던 암석의 사이로 사람의 손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그 아래로 내려갔다.
“…….”
사람이 맞았다. 꺼멓게 죽은 살이 눈에 들어왔다. 시취마저 바다 냄새에 휩싸여 깨닫지 못했던 거였다. 쓰린 속을 뒤로하고 겹겹이 쌓아 올려진 둑을 치웠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에 그는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시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 류의 팔을 붙잡았다. 평소라면 은근히 매정하게 그 손길을 피했을 류는 그의 다급한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띠며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말하기가 꺼려졌다. 이왕이면 몰랐으면 했다. 그러나 그가 머뭇거리는 그 잠시간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류는 그가 지나쳐 온 길을 되돌아갔다.
돌무더기 아래 매장되어 있던 다수의 시신을 발견한 류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늦게 그 뒤를 따라온 그는 지독한 모습에 눈을 감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시신은 모두 눈이 없었고, 익사였는지 몸이 모두 불어 있었다. 처음 발견한 시신이 가장 양호한 모습이었다.
“아까 그 괴물, 연가시를 닮았었지.”
“네….”
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였다. 부자연스럽게 살 위에 난 구멍들이 어떤 의미인지 뻔했다.
류는 물끄러미 죽은 이들을 바라보다 손끝을 튕겨 작은 불씨를 시신 위로 떨어트렸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시신들을 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일부러 한 매장…이겠죠.”
“그 연가시 같은 놈이 해 놓은 짓이겠지.”
“그럼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게 된 것도….”
“일부러, 누구든 불러들이려고 제 모습을 드러냈을 거야.”
이 정도의 수의 인원이 사라지는 과정을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도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직자가 등장하며 사람들은 다시 모여서 살기 시작했고, 그런 무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침묵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이 사람들은….
서로를 찾고 찾다가 이렇게 된 것일 터였다. 하나하나 수습해 묻어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 이상한 것들에게 먹히지 않도록 화장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세상이었다.
“저 바다에 있어.”
“…….”
“난 온 김에 아예 잡아서 갈 생각이고. 그러니까 말리지 마.”
어느새 뽀송뽀송하게 마른 목도리가 그의 품에 안겼다. 저 할 말만을 하고 류는 다시 밑을 향해 뛰었다.
그제야 그의 기시감이라든가 그 이상한 감각들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류에게 자신이 짐은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적어도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존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착각이었다.
애초에 류에게 그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저 똑같을 뿐이었다. 똑같이 자신보다는 약하고, 똑같이 결과적으로는 본인이 지켜야 할 것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낯부끄러울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결국 아무리 남들과 달리 대화를 한다 해도 거기까지일 뿐인데. 류라는 사람에게 그는 그저 대화나 하는 남일 뿐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뒤에 멀뚱히 서서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아무것도’에는 그 또한 포함되었다.
바닷가라 바람이 더 차서 그런 거였다. 놓쳐 버린 이를 향해 뻗은 손끝이 유난히 시린 것은 이곳이 바다라서 그런 거였다.
류는 푸른 불을 바다 위로 띄웠다. 푸르고 푸른 바다가 일렁이자 곧이어 괴물이 튀어나왔다. 좀 전의 것은 몸의 일부였다는 듯한 크기였다.
검은 그림자 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것을 밟고 올라간 류는 그것의 머리를 향해 등을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푸른 불을 불러냈다.
괴물의 몸이 타올랐다. 그것은 제 타 버린 몸을 뜯어 버리고는 남은 몸을 분해하며 류에게 덤볐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괴물의 모습이 어지럽게 선을 그었다.
검은 줄기가 그 위에 선을 덧대고, 푸른 불이 색을 입히고 류는 그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그게 류라는 사람이 살아남은 방식이자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손안에 쥐어진 목도리를 움켜쥐었다. 희미한 탄내가 느껴졌다. 허상 같은 그 희미함이 전부였다.
검은 그림자 위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불티가 그런 류의 주변을 배회하며 흩날렸다.
눈을 감았다 뜨면 금세 사라질 허상인 것만 같아 감히 눈 한번 깜박이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죽은 척하고 가만있던 연가시 괴물 하나가 슬그머니 류의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것을.
“……!”
“류!”
손에 쥐고 있던 목도리를 내던지고 뛰었다. 밑으로 떨어지면서도 류는 손을 들어 그 연가시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번져 나가 몸체를 태워 버리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발목을 붙잡았던 것은 이미 다 타 버렸지만 이미 류는 바다 위였다. 그림자 줄기가 류를 향해 내뻗어졌지만 짧았다.
손을 뻗은 류가 그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무력하게 바닷속으로 빠지는 류를 보며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
추웠다. 온몸의 열기를 뺏기는 기분이었다.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그에게 붙들린 상대 또한 마찬가지인지 추위에 떨리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
말과는 달리 가면 아래 드러난 입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둘러 바닷속에서 나와 류를 끌어 올려 주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수영을 못할 줄은 몰랐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는 심장이 끝도 없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벌어진 입에서 물거품이 흘러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젖은 옷을 꾹 눌러 짜며 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풀린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바다 특유의 냄새에 뒤섞인 희미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류가 주저앉아 있는 부근에 물에 희석된 불그스름한 것들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쳤어요?”
“…괜찮아.”
“잠깐 좀 봐요!”
아무래도 방파제가 바닷속으로 무너지며 생긴 지대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거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에 빠진 것 때문인지 기진맥진한 채로 주저앉아 있는 류를 억지로 바르게 앉혔다. 오른쪽 무릎 부근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찢어진 옷 사이로 제법 크게 벌어진 상처가 보였다. 그의 예상대로 무너진 방파제의 암석에 부딪히며 생긴 상처인 듯했다.
자세히 살피기 위해 손을 뻗자 곧바로 류가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쳐 냈다.
“…….”
“아프니까 건들지 마.”
“아, 그게 그러니까….”
“……?”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까만 가면이 기울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는 뭐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놓고 바닷물 때문에 상처가 더 아플 것도 생각 못 하고 손부터 대려고 했다. 진짜, 한심해서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홀로 일어나 돌아갈 준비를 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에서도 옷에서도 여전히 물은 뚝뚝 떨어졌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은 덜덜 떨면서도 절대, 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왜, 도와달라고 안 해요?”
“…뭐?”
“한 번쯤은 그냥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손이 닿지 않으니 목도리를 대신 건져 달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바닷속에 숨어든 괴물을 죽일 거니 그렇게 알라, 가 아닌 같이 괴물을 죽이자,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다리를 다친 지금, 이 순간에도 부축이든 뭐든 도와달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 말 한번을 안 해 주는 걸까.
피 냄새와 바다 내음이 섞여 들어 이제는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머릿속에서도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류는 말했다.
“내가 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
“난 도와달라고 말하기 싫어. 너한테 매번 도움받아야 하는 그 사람들하고 나는 달라.”
그 말을 들으며 그제야 그가 얼마나 무례하고도 오만한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대가 평소와 달리 극도로 예민해져 있음을 하나하나 내뱉는 말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도와주니 마니 말하지 마. 애초에 너도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아니잖아. 적당히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지.”
“…….”
“…그리고 난 너랑 주고받는 사이도 될 생각 없어.”
이해는 했다.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 왜 화가 났는지. 그가 잘못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이란 건, 사람의 말이라는 건 상당히 제멋대로인 감정에 더 치중되는 표현법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데요?”
홀로 받은 상처가 억울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인정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라는 관계가 얼마나 얄팍하고 의미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그 말들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툭, 하고 말을 내뱉었고 그와는 달리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은 류는 더 못돼질 수 있는 거였다.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해.”
“…….”
“너 하나 갖고 뒷공작 하는 그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럴 여지를 주는 네 그 애매한 태도가 더 문제야. 애초에 나한테 뭔가를 바라지 마.”
“왜요?”
“…….”
류는 답해 주지 않았다. 기어이 그 다리로 혼자 캠프로 돌아갔으며 끝까지 그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추위에 떠는 어깨를 보았고 물이 떨어지는 머리끝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가면 속 얼굴을 끝까지 볼 수는 없었다.
정찰만 한 꼴이 아닌 그와 류의 모습을 본 주세진은 낯을 굳혔고 일단은 류를 치유 계열의 전직자들에게 보냈다.
마른 옷과 따뜻한 담요, 김이 나는 뜨거운 물을 담은 컵을 그에게 들려 준 뒤에야 주세진은 입을 열었다.
“분명 정찰만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는 컵 안, 김과 함께 흔들리는 수면 위에 비친 그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이상한 연가시 괴물. 방파제 밑에 매장되어 있던 다수의 시신. 그리고… 괴물이 먼저 공격을 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노라고, 그 과정에서 류가 다쳤노라고 이야기했다.
주세진은 그의 손에 들린 컵의 온도가 미적지근해질 때까지 침묵했다. 그리고 벌어진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의 눈을 보는 노력이라도 하는 게 좋겠네요.”
“…….”
“결과만 따지자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난 그 결과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류는 언제나 그 과정을 무시했다. 결과만 좋다면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그것을 그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변명하고 진실에 가까운 거짓을 내뱉었다.
“그 괴물이 먼저 공격한 건 사실이에요.”
“…….”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이런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에 대해 어쩔 수 없잖아, 하고 변명하는 것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모든 것을 미뤄 내고 홀로 해결하려 하는 그 사람이 이러한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만든 다른 이들 또한 이리 변명할 터였다. 어쩔 수 없어, 라고. 그러니 그 또한 그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비겁하고도 회피 외의 의미 따위는 찾을 수 없는 말에 주세진은 낯을 굳혔고, 결국은 고개를 돌렸다.
실망했을까, 본인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에 화가 났을까. 진실은 본인밖에 모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뭐가 잘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진실만을 말해도 그는 누군가에게 죄인이었고 거짓만을 말한다 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현상 유지였다. 이 아슬아슬한 모든 관계에서 그는 그 애매한 태도로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다.
여유 속에 누그러진 이들의 관계와도. 모두에게 밀쳐지고 몰아붙여진 상태에서 얻은 동질감에 얽혀 들었을 류라는 상대에게서도. 그는 정말로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날은 바다에 빠졌고, 자기혐오에 사로잡혔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팠고 목 안쪽이 욱신거렸다. 계속해 기침하는 그를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듯,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다다른 곳에서 그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자리를 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혼자 들고 온 음식을 먹었다.
상대를 거부하고 날 세우기 바빴던 시기의 누군가처럼. 그건 상당히 외로운 과정이었다.
결국 그는 열이 너무 심하게 올라 치유 계열을 찾아갔다. 의료 물품을 관리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의 상태를 본 치유 계열 전직자는 한참을 뒤지다가 겨우 발견한 해열제와 감기약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떡하죠. 지금 있는 약은 이것뿐이에요.”
“안전 구역 쪽에서 물품이 안 왔나요?”
“그게… 요즘 그쪽도 사정이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목격하는 괴물 수도 늘었고, 그쪽에는 애들도 많다 보니 약이 더 많이 필요해서….”
그는 그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약을 받았다. 그에게 배정된 곳으로 가던 중 문득 류가 떠올랐다. 그와 똑같이 바다에 빠졌던, 그보다 더 얇은 옷을 입고 있었던 그 사람이.
“…….”
그래, 그러니까 이런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는 그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열은 조금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애초에 그 약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열에 취해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아팠다. 머리가 아팠고, 몸이 아팠다. 그러나 춥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불편한 모습으로 잠든 이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간이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대어 잠든 사람의 품에는 예의 그 기다란 제등이 들려 있었다.
방 안을 데우는 열기는 그 제등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불이었다. 옅은 탄내와 선명한 푸른빛. 도저히 모를 수도 꿈이라고도 치부할 수도 없는 존재.
입 안이 썼다. 열 때문이고 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매정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거 하지 마.”
“…약 먹었어요?”
목이 쉬었다.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아파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동문서답하는 그를 보며 가면 아래 입이 벌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야.”
“…….”
“그러니 너도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마.”
“바라면, 안 돼요?”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내게.
열에 달뜬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열기에 녹아든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제등 위에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참 뒤에야 류는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놀란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반사적으로 답했다.
“…아, 뇨.”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그는 왜 아니라고 답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그렇노라고 답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것.
그의 대답에 류는 다시 말이 없었고 그가 일어나려 하자 그제야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됐어.”
“왜, 그런 걸 물어봐요?”
“…자.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으니까.”
비교적 차가운 편인 손이 그의 눈을 덮었다. 시원했고 슬펐다. 류는 끝까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그 손끝이 그의 눈가를 스쳤고, 장난치듯 눈썹은 덧그리다 머리를 헤집어 보는 것은 느껴졌다. 그는 다시 눈을 떴고 푸른 불 아래 그 사람을 보았다.
힘없는 손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방 안은 류의 푸른 불 덕분에 따뜻했다.
그 열기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었다가 녹아 물이 되어 버린 것이 그의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는 모른 척하고 숨기고 일부러 묻어 버리는 것으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부러 못되게 말해도, 끝까지 제멋대로 군다고 해도 이미, 이미 너무 오래전부터 이래서 이제는 뒤로 물릴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그러나 앞으로 향할 수도 없는 마음이었다.
류는 답해 주지 않았지만, 저 질문의 의도와 그의 거짓된 말의 답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차가운 푸른빛과 달리 그의 마음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그것의 이름을 제대로 깨닫자마자 사그라져야 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말 한 마디도 못 해 본 감정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상대가 그것을 원하니까. 애초에 그 상대를 위한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 끝을 맺어 버리는 것도 그 상대였다.
열에 기대어 눈물 두어 방울을 흘렸다. 열 때문에 유난히 뜨거운 그런 눈물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대단치 않은 호감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왜 류가 그에게 도와달라고 하기를 바랐을까. 왜 류 앞에만 서면 자제심이 사라지고 감정이 울컥거리는 걸까.
그 답은 너무나 쉬웠다.
“…….”
입을 열었지만 하고픈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단어의 첫음절마저도.
말하지 못한 것들이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말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현상 유지가 답인 게 맞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짓밟고 미워하다 그는 잠들었다.
아니라고 답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며.
그 뒤로 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했으나 선을 그었다. 그전의 선보다 더 길고 굵은 선이었다.
그는 감히 그것을 넘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허무한 다짐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 즈음부터 모든 상황이 감히 그 선을 넘지 말라 그를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괴물의 수가 늘었고 전에는 없던 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찾아온 봄처럼 누그러져 있던 사람들은 다시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그건 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수가 줄었고 검은 한복을 절대 벗지 않았으며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그건 한밤중에 커넥터가 울리고, 죽거나 다치는 사람의 수가 늘 때마다 더 심해졌다.
주세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좋지 못한 안색이 더 나빠졌다. 지도를 보다가 어지러움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은 언제나 찢어져서 핏빛이 돌았고, 얼굴에 살이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태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가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작은 실수에도 언성이 오고 갔다.
안전 구역 쪽에서 전달되는 물품들은 점점 빈약해졌고, 묘한 사람들이 류를 찾아 이곳을 오고는 했다.
외부인의 잦은 방문을 사람들이 반길 리 없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매번 류는 극도로 예민해져 돌아왔으며 아주 가끔은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무신경했던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불안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사람들은 전보다 류에게 치대기 시작했다.
류는 그것을 무시했고, 외면했지만 결국 그 애써 참던 것이 터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류가 다치게 한 사람이 나왔다.
듣기로는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이를 밀쳤다고 했다. 문제는 그 한 번이 골절이었고, 그 한 번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는 거였다.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류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다시 경계심이 서렸다. 외부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언제든…이라는 가정을 담은 눈으로.
모두가 숨소리를 죽였다. 툭 하면 시비가 붙었고, 말로 해결하던 이들도 손을 들었다.
그렇게 기어이….
“…맞, 았어요?”
“…….”
“누가, 아니 잠깐만 좀 봐요.”
“내버려 둬.”
“대체 누가-.”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참견하지 마! 쓸데없는 관심 끄라고!”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뺨이 붉었다. 부은 뺨 쪽의 입술에선 피가 나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사람이 때린 모습이었다.
천천히 잘못돼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
지쳐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세진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고 그래서, 그는 원망스러웠다.
결과만을 봤을 때는 가장 옳은 선택, 과정을 보았을 때도 가장 옳은 선택. 그러나 그 옳기만 한 선택 속에서도 사람은 죽어 갈 수 있었다.
반복되는 싸움과 반복되는 하루였다. 류는 주세진의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때가 아니면 사라지기 일쑤였고, 있더라도 멍하니 앉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였다.
여전히 누가 류를 때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의 침묵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류에게 말을 걸거나 하는 것도 제약이 생겼다. 그 시선들. 그가 류에게 다가가기라도 하면 감시하듯 따라붙는 그 시선들을 볼 때면 말문이 막혔다.
“학생은 안 그럴 거지?”
“…….”
간절함이 소름 끼쳤다. 그러나 마냥 부정적일 수도 없었다. 두려움의 흐느낌과 울음과 울부짖음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점점 더 우리는 끝으로 몰려갔던 거였다.
그렇게 최악으로 향하는 상황에서 기어이 주세진이 쓰러지고 말았다. 피로와 부담감, 스트레스. 이유는 많았다.
주세진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대부분이 놀라기는 했으나 그렇게 술렁거리지는 않았다. 모두가 한 번쯤은 이럴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다고 모든 경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던 건 아니었다.
주세진이 쓰러지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류를 찾아오는 외부인의 수가 늘었다. 그중 단 한 명. 자신의 소속이랍시고 이름을 밝힌 것은 한 명뿐이었다.
천칭.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류는 단 한 번도 그 외부의 손님을 안 따라 나간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류는 나갔으며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전에 맡았던 미약한 피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
그 이후로 외부 손님은 없었다.
류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가면 쓴 그 얼굴이나마 보게 된 것은 주세진이 막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주세진이 머무는 곳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검은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류는 그를 보았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문을 여는 손끝에 말라붙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손끝이 모두 붉고 멍들고, 부어 있었다. 건들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손이었다.
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도 말이 없었다. 그는 그 뒷모습을 쫓으며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치고 지쳐서 이 사람이 떠나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잠든 것인지 눈을 감은 주세진의 모습을 바라보다 돌아가려 하는 류를 불렀다.
“류.”
“…….”
“…….”
떠날 거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우리가 침묵 속을 헤매는 사이 주세진이 눈을 떴다.
주세진은 잠결인지 진심인지 모를 얼굴을 하다 손을 뻗어 류를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류가 그 손을 쳐 내려 했지만 주세진의 입이 열리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목소리가 거칠었다. 차마 아픈 사람을 쳐 낼 수는 없었는지 류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도깨비 가면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대신해 손을 떼어 달라는 의미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류를 붙잡은 주세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곧이어 그 또한 류처럼 주세진에게 붙잡혔다.
“약속, 할게….”
“…….”
“아무도, 너희를 욕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게…. 너희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게. 그러니까….”
손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선 그저 검은색으로 보이는 검푸른 눈이 다시 눈꺼풀 아래로 가라앉았다.
류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벌어진 입은 웃음을 흉내 냈으나 그 속에 담긴 것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속 편한 새끼.”
그 말의 어조에 담긴 것은 명백한 원망이었다. 그러나 그게 미움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류는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수많은 시선을 다시 무시했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당장 어제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할 잠시간의 여유였다.
그러다 그는 보게 된 거였다. 그 이상하고도 기이한 모습을.
그날은 함께 하늘 조각을 공략하러 간 날이었다. 류는 혼자 먼저 앞서가 버렸고 그는 다른 이들을 적당히 챙기느라 류를 뒤쫓는 게 늦어졌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다른 이들만 두고 류를 찾으러 갔을 때 보면 안 되는 것을 보았다.
“…나, 그래서…. 응, 아니. 그런데….”
“…류?”
조심히 불러 보았지만,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림자. 류가 다루던 그 새카만 그림자가 사방으로 길게 몸을 내뺐다. 그것들은 일렁거리며 류의 주변을 배회했고 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홀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광경을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보게 되었다.
“…….”
“…아니, 아니야. 아…. 난, 하지만….”
그는 가까이 다가가 조심히 손을 뻗어 기다란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 작은 손길에 류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전과 같이.
“…여기 어디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류는 다시 신경이 예민해졌다. 스스로를 비웃었으며 질색을 했다.
“이젠 하다 하다 미쳤나 봐.”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다른 문제일 수도 있잖아요.”
“그게 더 문제네. 차라리 미친 게 낫겠다.”
그 이상한 그림자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마저 말하면, 제 능력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류가 어떤 반응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굳건한 강함과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으로 스스로를 지탱하는 사람에게 그 능력의 문제점을 거론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렇게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살얼음판을 걷던 것 같은 시간 끝에 결국 류는 선택을 했다.
“다녀올게.”
류는 그렇게 말했다. 잠결에 들은 목소리가 언뜻 상냥했던 것도 같았다.
그 다녀온다는 말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붙잡지 않은 것을 그렇게 후회할 줄은 몰랐다.
다녀올게. 그건 거짓말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면서. 그가 아는 마지막 모습이면서. 다음에 만날 때는 모르는 사람으로 올 거면서 굳이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그 심정을 그는 알 수 없었다.
류는 기억을 지웠다. 그것을 아는 건 그 하나뿐이었다.
류의 행동에 문제는 없었으나 그건 교류가 없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모습이었다. 알지만 모르는 사이. 최소한의 기억만 남기고 이 캠프 안에서 있던 일들을 잊은 모습.
내쳐진 손이 아팠다.
“잊었어요?”
“…….”
“제가 누군지, 몰라요?”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멍한 어조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그의 귀를 타고 속을 후벼팠다.
“내가, 너를 기억해야 해?”
류는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감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고,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왜 기억을 지웠느냐 묻는 것도 의미 없었다. 그 이유마저 잊어버렸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냥 다 싫었던 것이다. 그냥 모든 게 다 힘들었던 것뿐이다.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냥 그 모든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그 또한 그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잊히기 싫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아프고 슬펐다.
감정이 거세당한 사람처럼 류는 싸우는 것 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무감정한 모습과 태도에 도리어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류는 전부 다 무시했으며 그 교류되지 않는 감정에 단 한 번을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은 잃어버린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채워져 나갔고,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부득불 하늘 조각을 따라 들어가는 것. 도망가는 이들을 붙잡아 그 노력이라도 보게 하는 것.
자신이 상처가 생겼는지 아닌지도 구별 못 하는 이에게 약품을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하늘이 낮과 밤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할 정도로 채워졌을 때 즈음부터, 류는 항상 새벽에 나와 멍하니 하늘을 보고는 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에 나와 답 없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요?”
“그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렇게 또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낮이 밤이 되고 새벽이 되고 다시 낮이 되는 그 반복적인 하루 속에서 어느 날 류가 입을 열었다.
류의 옷처럼 하늘이 까맣고, 하늘의 빈 조각 사이로 제 몸을 드러내는 붉은 것의 불티가 흐드러져 마치 별똥별처럼 보이던 날이었다.
“너 호구야?”
“……?”
몇 달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류는 입을 열었다.
“왜, 저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절절매?”
“…그렇게 보여요?”
전보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땅히 할 만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중얼거려 보았다.
“그냥, 그래야 하니까요. 안 도와주면 죽을 것이고 도와준다면 살 거예요. 그걸 알면서 가만히 있는 건 힘들잖아요.”
“…….”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기어이 저들의 틈새를 비집고 그 비틀린 정을 얻어먹으며 살아남은 거였다. 이제 와 그것을 관둘 수는 없었다.
그럼으로써 잃게 될 것들과 얻게 될 그 비난의 시선들이 어떨지 알고 있었다.
류는 말없이 쏟아져 내리는 불티들을 보았다. 이렇게 대화가 끝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침묵의 끝에 다다라 알게 된 것은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널 버리면서까지 도울 필요가 있어?”
“…….”
“네가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잖아. 너… 보면, 그냥 죽어 가는 사람 같아.”
“…아, 니에요.”
그의 반사적인 답에 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 불었다. 너울 아래에서 살랑이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런 류의 뒤로 검붉은 불씨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네가 먼저잖아.”
“…….”
“남보다 네가 먼저야. 그러니까… 널 버리면서까지 그렇게 하지는 마.”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왜 안 되는데?”
당연한 것을 묻는 어조였다. 이상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쉬운 말이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를 갉아먹는 저들을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고 허락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억제하던 마음이 서럽게 울렁거렸다.
“…….”
감정을 묻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은 부담일 뿐이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의 삶과, 언제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 하는 류의 상황을 떠올릴 때면 없던 일로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첫 만남이든 그간의 대화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럼에도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을 향한 이 감정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의 위험함을 재고 따지고 고민하는 것부터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를 버리면서까지 남을 위해 굴지 말라는 말을 한다. 남보다 네가 먼저라 말해 준다.
아무것도 몰라도.
그와 수많은 말이 오고 간 저들도 절대 해 주지 않는 말이었다. 그와 수십 번 얼굴을 맞댄 이들은 들어 주지 않는 그의 꼬인 심정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말을 들어 주고, 처음으로 그런 말을 해 준 사람.
그림자를 타고 사라지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감정을 내뱉었다.
“…좋아해요.”
정말로. 이제는 숨기는 것 따윈 불가능할 정도로.
“정말… 당신을 좋아하나 봐.”
이젠 나도 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차마 전하지 못할 말들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툭툭 튀어나왔다. 얼굴에는 열이 몰리고 심장은 멋대로 뛰었다.
당신에게는 전달하지 못할 말을 홀로 되뇌며 그 밤을 보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감추었던 마음은 한번 불이 붙으니 꺼질 줄을 몰랐고, 결국 그는 티를 냈다.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어영부영 시간이 지났다. 하늘이 완성되어 가고, 건물이 생기고,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생기고.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조금 될까 싶던 때, 당신은 떠났다.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그 누구도 모르게.
“…….”
누군가는 류를 욕했다. 무책임하다고. 또 누군가는 화를 냈다. 그런 식으로 가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동정도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혹여나 다른 이들도 따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감시의 시선이 더해졌고, 사람들이 그에게 살가워졌다.
당신의 자리란 이런 거였다. 앞으로 내몰리는 자리. 그의 위치란 그런 거였다. 당신이 만들어 낸 틈.
그가 류보다 취급이 좋았던 것. 조금 더 사람으로서 취급받을 수 있었던 것. 그 모든 게 다 류 때문이었다. 그런 자리였다.
사람 취급받고 싶으면 굽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사람으로서 대우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친절해졌다.
도망갈까 봐. 류처럼 도망갈까 봐.
속이 비틀리고 울렁거려도, 그 가식적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도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만약 그마저 도망간다면 그 수많은 욕과 비난이 누구에게 향할지 뻔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류가 없는 자리를 메꾸는 것. 부족함을 사람들이 느끼지 않게 해 그 비난의 시선을 끊어 버리게 하는 것.
그것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이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게 속이 쓰렸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숨을 죽이던 이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그는 그냥 그렇게 무슨 대단한 희망인 것처럼, 대단히 책임감 있는 사람인 것처럼 몰려갔을 뿐이었다.
멋대로 류를 비하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함부로 입 나불거리지 말라 욕할 수도 없고 닥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제발 좀 놔달라, 빌 수도 없었다.
그런 자리였다.
***
부모님은 다행히 무사하셨고,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주세진이 만든 길드에 들어갔다.
그 길드에 들어가며 그가 내민 조건은 하나였다. 사람들이 더 이상 류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주세진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오랜 기간이 걸리기는 했으나 툭 하면 튀어나오던 류의 이름은 더 이상 쉽게 내뱉을 이름도,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변화를 보며 눈앞에 있을 때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해 주었다면 좋았을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길을 걷다 마주치는 우연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모자를 눌러쓰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거나 하는 짓도 해 봤지만 류는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세진이 만든 길드는 자리를 잡았고, 세상도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발 디딜 곳을 찾아 웃는데 그 혼자만이 붕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공략대라며 주세진이 영입한 이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통성명만 하고 대화는 없었다. 함께 하늘 조각을 공략하지만, 그뿐이었다.
동갑내기라며 친하게 지내자 다가오는 김수혁도 밀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향초에 손을 댔다.
“…….”
그 향초의 효과 자체는 별거 없었다. 기억을 되새기는 것.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간절했다.
어차피 같은 장면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 빠졌다. 혹여나 순간적으로나마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류에게 가지 말라 외칠 수 있지는 않을까 해서. 꿈을 꾸고 그 꿈에 빠지고, 잠들고 영원히 눈을 뜨기 싫은 시간이 반복되었다.
밥도 먹지 않고 그냥 잠만 잤다. 꿈에 빠졌다. 꿈에서밖에 만나지 못하는 이를 보며 같은 것들의 반복을 보면서.
그가 제대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처음으로 주세진이 언성을 높였고, 괜찮다고 부득불 말해도 기어이 서울까지 오셨던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다가 떠나셨다.
그래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는 건 정말 아니라고. 이렇게 살려고 그 고생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 향초는 처음부터 중독성이 강한 물건이라 폐기할 예정이었다. 그런 걸 그가 멋대로 사용한 거였다. 그 사실에 주세진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한계까지 몰린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로.
주세진은 곧바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길드 사옥에는 제법 많은 수의 상담가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담당한 것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심리학 전공의에 정신계 마법까지 다룰 수 있던 몇 안 되는 인재였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가끔은 입을 다물었고 가끔은 입을 열었다. 그 긴 대화의 시간에도 그는 괜찮아지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티 낼 수가 없었다. 괜찮지 않은 모습에 달려들 사람이 너무 많아 그 속이 어떻든 그는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다.
조금은 낯선 건물들이 익숙한 형태로 자리 잡고, 하늘은 일부의 빈 공간을 제외하고는 푸르게 빛났다.
그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이들에게 선 긋는 것을 관두었고, 애써 피하던 자리에 나갔다.
“…오랜만이야.”
그의 말에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리 친했던 친구들은 비어 있는 자리를 애써 외면하며 웃었다.
떠들썩했지만 전보다는 조용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익숙한 얼굴들이 부족했다. 즐겁게 웃다가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멈칫거리는 이들이 생겼다.
“잘 데려다줘. 중간에 버리지 말고!”
“안 버려.”
그의 말에 친구는 낄낄거리며 웃다 자리를 떠났다. 집 가는 길이 비슷하다며 그에게 떠넘겨진 친구는 술 취한 걸음으로 한참을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어우워….”
“핸드폰 줘 봐. 부모님께 연락하게.”
“나아… 주거….”
“계속 꼬장 부리면 진짜 버리고 간다.”
그의 말에 친구는 팔을 쭉 뻗어 안아 달라는 듯 굴었다. 당연히 그는 질색하면 뒤로 물러났다.
“야, 이 매저한 새기야….”
“…….”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옆에 같이 앉아 주었다. 가을이 오는지 이젠 밤에는 제법 선선했다.
한참 뒤에야 조금은 술이 깬 친구가 입을 열었다.
“야아….”
“왜.”
“너어… 전직자자나….”
“…….”
“…아니, 진짜 내가 이 말 안 하려구 했거든. 근데에… 진짜 네가 보기에 내가 X같고 개새끼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할지 알 것 같았다. 미리 대비해서 그런지 막상 술 취한 발음으로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네가 무서워….”
“…그래.”
“진짜 내가 개X낀데에…. 나아…. 시바아. 무섭다고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무섭다고….”
“…….”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아니, 그렇잖아. 내가, 내가 너 본 게 몇 년인데…. 왜 무섭고 지랄이냐고…. 끄윽, 흡.”
울기 시작하는 친구를 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귓가로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겨우, 겨우 네가 전직자 된 것뿐인데에…. 막 네가 그 새끼들이랑 겹쳐 보여. 어찌 됐든 이렇게 멀쩡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전직자 덕분인데, 흐윽… 난 무섭다고….”
“…….”
“미안해…. 흐어엉. 미안해, 내가 나쁜 새끼야아…. 흐윽.”
“…난 그래도 너 살아 있어서 좋아.”
그의 말에 친구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손을 뻗어 등이라도 두드려 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행동마저 무섭게 느껴질까 싶어서였다.
그는 친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울다 지쳐 잠든 친구를 업어 그의 집에 데려다주었다.
“아, 호연이…. 오랜, 만이네.”
“…안녕하세요.”
친구의 어머니는 어색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제 발로 걷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의 친구를 침대에 눕히고 가겠다는 말을 사양했다. 그는 인사를 했고 전과는 달리 빠르게 닫히는 문을 보며 뒤돌아섰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멍하니 주변을 배회했다. 다신 못 올 곳이니 주변에 하늘 조각이 있지는 않나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하늘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는 걸 들었던 것 같은데. 번호가 뭐였더라.
“c-58이었나….”
천칭 측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 외에 주변에 보이는 위험은 없었다. 그는 아려오는 속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없이 우울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 봤자 뭐 하나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
눈앞에 존재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특이한 기척이 느껴졌다. 불을 다루는 전직자들 특유의 탄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래서 고개를 든 순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를 찾을 수가 있었다.
흑색의 비단 두루마기. 검은 가면과 너울 사이로 삐져나온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류….”
상대 또한 그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년. 거의 반년 만에 보는 거였다.
뭐라도,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류 또한 이렇게 갑자기 만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류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가 버벅거리는 사이 류는 손을 휘둘렀다. 일단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그냥 맞았다.
설마 그대로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익숙한 주세진의 방 천장이었고 그는 순간적으로 꿈을 꿨던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얼얼한 목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 류를 봤어.”
그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처리하던 서류를 뒤로한 채 걸어오던 주세진의 걸음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해?”
“애초에 맨손으로 날 기절시킬 사람이 류 말고 어디 있어!”
그의 말에 주세진의 시선이 그의 목으로 향했다. 손으로 눌러 보니 얼얼한 것이 멍이 든 것 같았다.
거기서 기절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금세 몸에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다짜고짜 기절시키고 도망간 걸 보면 싫다는 뜻일 텐데….
자신이 없었다. 먼저 찾아도 될지. 그를 싫어하지는 않을지. 그냥 전부 다 잊어버리고 싶은 무언가는 아닐지.
금세 포기해 버리는 그를 보며 주세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건강해 보인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상호의 첫 하늘 조각 공략 날, 평범하던 숲 형태의 조각 안이 온갖 지형이 뒤섞이고 죽은 척하는 괴물에게 뒤통수 맞은 적이 많아 그것들을 완전히 으깨 버리고 있을 때.
짙은 피비린내의 그 붉음으로도 숨길 수 없는 선명한 푸른 불티가 쏟아져 내리는 걸 본 순간 얼마나 숨이 막힐 것 같고, 얼마나 간절했는지 류는 모를 것이다.
“안녕.”
그에게 거는 말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차분했고, 답지 않게 장난스러웠다. 그를 제외한 다른 공략대 사람들하고도 말을 주고받는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봤던 날 선 기색이 없었다. 말에는 여유가 느껴졌고, 행동에는 조바심이 없었다.
조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쪽이 더 좋았다.
적어도 하루하루 죽어 가는 것 같던 그때보다는 살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상한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기 전에 류는 다시 멀리 가 버렸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디 아프거나 하지 않은 듯했다. 사람을 지나치게 경계하지도 않았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되었다고, 이 이상 욕심부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마도 주세진이 왜 학교 안 가냐고 묻지 않았다면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며 배고픈 만족감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학교?”
“…너 복학했잖아.”
“…오늘 며칠이지?”
개강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주세진은 할 말 많은 얼굴로 수강 신청은 했냐 물었다. 다행히 하기는 했었다. 망해서 그렇지.
이참에 그냥 자퇴할까 말하는 그에게 주세진은 단호한 얼굴로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어영부영 학교에 갔고 처음으로 출석한 날 조별 과제를 통보받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 멀뚱히 앉아 있었다. 강의실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것을 지켜보다 남는 사람을 찾아 헤매던 서정은이 같이 하자고 말을 걸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나둘 사람이 모였고 마지막 한 사람을 찾아 데리고 오는 서정은 쪽을 보다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희미한 탄내와 불 그을음 냄새.
서정은과 함께 오던 이의 첫인상은 새침하고도 장난스러워 보인다는 거였다. 머리가 굉장히 길었고 그 색이 무척이나 까매 얼굴이 유독 희게 느껴졌다.
김수혁에게서도 가끔 탄내가 났기에 불 쪽의 마법 계열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관심을 껐다. 무료한 시간이 흘러갔다.
조별 과제는 시작도 안 했는데 망한 것 같고, 왜 학교를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의욕이 없었다. 일단 해야 하는 것들은 다 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다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고개를 바로 하자 머리 색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복학했어?”
“…….”
“…요?”
그렇게 사교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서 솔직히 놀랐었다. 그는 대충 대답했다. 유…하연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그의 대답에 묘한 얼굴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것을 보니 뭔가… 이대로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네?”
“혹시 전직자세요?”
“…아뇨. 민간인인데요.”
민간인? 보통 전직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민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직자, 그중에서도 헌터였다.
의심이 짙어졌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말에 대충 얼버무렸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확신했다.
“류.”
탄내. 키. 긴 검은 머리카락. 모든 것이 다 그녀가 류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학교에 더 빨리 갔어야 했어.”
“학교 간다고 무조건 마주친다는 법은 없잖아.”
“같은 수업, 같은 조야.”
“…….”
심지어 같은 과 후배였다.
기막힌 우연에 주세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들고 있던 옷을 그의 몸 위에 대 보며 주세진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모르겠어. 아는 척해도 될지.”
류는 일상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멋대로 그 일상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친하게라도 지내 볼래.”
마침 같은 조이기까지 하니 기회는 많았다. 뒤늦게 너무 재수 없게 굴지는 않았나 온갖 걱정이 몰려오기는 했지만, 이 마지막 기회마저 져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쪽에선 널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렇기는 하지. 친해지면… 류, 라는 걸 알려 주지 않을까?”
그의 말에 주세진은 뜨뜻미지근한 얼굴을 하며 다른 옷을 꺼내 그의 몸에 대 보았다. 버건디색의 브이넥 니트였다.
“나 셔츠나 니트 종류는 별론데.”
“왜?”
“셔츠는 불편하고 니트는 뜯길까 봐 신경 쓰여.”
그의 말에 주세진은 손에 들린 옷을 살피더니 직원을 불러 말했다.
“한 사이즈 더 큰 거로 주세요.”
“……?”
“예쁘게 보이고 싶다며. 어느 정도 불편한 건 감수해야지.”
그건 그렇다. 그는 빠르게 납득하며 얌전히 주세진이 골라 주는 옷을 받았고, 그것을 입었다. 민폐는 되기 싫어 없는 시간을 쪼개 조별 과제만큼은 열심히 했다.
전공 수업보다 교양 수업이 더 중요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을 걸고, 눈이 마주치고, 웃고, 대화를 나누고, 싫어하지만은 않아 달라 빌었다.
좋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냈을 때는 그 옛날 열이 오른 그의 곁에서 푸른 불을 쬐어 주던 모습이 생각나 결국 울어 버렸다.
나름의 일상을 즐겼다. 류와 주세진이 만났다. 날 선 것이 사라진 두 사람의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고 있던 류에게 도와주어도 되냐 물을 때는 또다시 거절과 적의의 눈빛을 받을까 무서웠다. 그러나 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안도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절대 허용 안 하던 그 불안한 굳건함이 조금은 틈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큼 류는 안정된 생활을 누렸구나 싶어서.
그리고 바닷가의 동굴에서 류와 함께했던 순간이 꿈처럼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
키, 키스…. 진짜, 어….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에 열이 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옆에 놓인 검은 두루마기는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말해 주고 있었다.
주세진이 꼬집은 볼의 얼얼함도 꿈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었다. 꿈도, 그의 헛된 상상 같은 것도 아니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지경이었다.
“네가 좋아.”
그 말에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류는, 정말 끝까지 다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얼마나 울고 싶고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 말을 하는 그녀가 그의 눈에 어느 정도로 사랑스럽게 보였는지, 감히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그의 속이 얼마나 죄책감에 쓰려 왔는지도.
이대로 울음에 목이 메어와 숨을 못 쉬게 된다 해도, 그렇게 죽게 된다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고, 슬펐다.
***
류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녀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말이다.
전과 성격이 너무 달라서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
“괜찮아.”
류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가 얼마나 단꿈에 빠져 있던 것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전과는 다른 그 가벼운 태도와 가끔은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들. 장난스러운 어조, 툭 하면 남을 놀리고 밉살맞게도 말하는 모습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다 선이었다. 그 모습들을 앞에 내세워두고 괜찮다고 주장할 터이니 이 이상 선 넘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때때로,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은 류는 그에게 묻고는 했다. 왜 자신을 좋아하냐고.
그건 진실로 궁금하다기보단 그것을 빌미로 살고 싶어 하는 이의 마음에 가까웠다.
옛날 일을 꺼내며 마치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듯 굴다가도 혹여나 그의 언성이 높아지기라도 하면 무너진다.
감정이 사라지는 어조로 말하고,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운 말을 하며 비틀림을 드러낸다.
언제나… 자신을 학대한다.
울고 소리 지르고 화내야 할 모든 상황에서, 화가 나고 슬픔을 느끼는 본인을 질타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좀 어때. 그냥 그런 거지, 뭐.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가벼움으로 그 모든 감정을 흘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면서도. 그렇게 흘러가지 못한 것들이 풀리지 않는 비틀림으로 남으면서도.
그래서 비꼬고, 일부러 못되게 말하고, 삐뚤어진 시선을 보낸다.
또 그 이상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보았나, 또다시 기억을 지우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언제나 그의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차마 그것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류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갖다 붙인 변명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상한 그림자를.
그것은 죄책감이 되었고 무서움이 되었다. 처음에 말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 류를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이제는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불안감.
그녀가 제 능력의 문제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어느 순간에도 굳건하던 그 능력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무너지지는 않을지.
여전히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생각하면 낯부터 굳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알려도 괜찮을지.
여태껏 그것을 말하지 않은 그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화내도 된다고 하는 류는 아무것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거였다. 그가 얼마나 치사하고도 비겁한지, 얼마나 자신을 놓기 싫고 간절한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이기적인 그는 싫어하지 않기만을 바라던 주제에 이제는 도망가지 말란 말을 했다. 붙잡아도 되냐 허락을 받았다.
일그러지고 잘못된 것들을 서로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으면서 우리는 회피를 택했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그러짐 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그가 문제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 못 놓는다는 것. 이제는 그 매정한 뒷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
애써 꾹 눌러둔 욕심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숨길 수가 없었다. 감출 수가 없었다. 자꾸만 닿고 싶고 확인받고 싶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몰린 그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난 뒤에도 매달릴 수 있게.
매달리는 그를, 그 하나만을 유독 특별하게 생각해 줄 이가 쳐 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욕심이었다. 깊고 깊은 바다보다 어둡고, 질척거리는 것에 가까운 욕심. 그는 욕심을 부리는 죄인이었다.
그것이 가장 죄처럼 느껴지던 순간은 당연하게도 류의 어머니를 마주했을 때였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한국에 왔었던 날. 류가 로거스와 할 일이 있어 먼저 다락방에서 내려왔던 그는 류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앨범 구경하지 않겠냐 말하며 그를 보는 얼굴에서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스레 긴장되어 앨범 속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그에게 류의 어머니는 곧바로 말을 꺼냈다.
“우리 애가 선 긋고 말 밉게 하고 그러지?”
“…네? 어, 아뇨!”
당혹스러운 마음에 버벅거리는 그를 보며 그녀의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한테도 그래.”
“…….”
“나랑 지 아빠한테도 그런다고. 그러니까 일부러 감싸 주려고 안 해도 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이 와중에도 앨범 속 사진에 어린 여자애는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게 버릇 든 것 같더라고.”
“…….”
“2년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저기, 그 성격 나쁜 편 아니에요! 오히려 그 정도면 좋은 편…인데.”
“난 애 성격 나쁘다는 말은 안 했는데. 그렇게는 생각했구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류가 놀리는 거 좋아하는 게 누굴 닮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재밌다는 듯 한참을 웃은 그녀의 어머니는 점점 웃음을 흐리더니 서글픈 낯으로 앨범의 사진을 더듬었다.
“친구들이랑 여행을 갔었는데, 이렇게 늦게 돌아올 줄은 몰랐어. 그렇게 간신히 돌아온 애한테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어.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잠만 자다가 멍하니 누워만 있거나. 가끔은 갑자기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고 방에 있는 거울을 죄다 깨 버리더라고.”
그 말에 그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 지냈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목 안쪽이 조여 오며 아팠다.
“그래서 밖으로 내보냈어.”
“…네?”
“언제까지고 그렇게 둘 수는 없으니까, 학교라도 가라고 내보냈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라고. 네가 그렇게 맨날 싸우기만 하던 세상이 더 이상 아니라고.”
“전직자…인 거 알고 계셨나요?”
그의 말에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한번을 의심 안 하겠어. 그 어린애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는데. 한집에 살면서 모르기도 힘들지.”
“…….”
“내보내니까 전보다는 좋아지기는 했었지. 그런데 그것도 완벽한 답은 아니더라고. 우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갑자기 밝게 행동했어.”
“…….”
“애가 그렇게 노력하는데…. 난, 오히려 그러니까 더 물어볼 수가 없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입을 다무는지.”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 캠프 안에서 있던 것들도 그 이전의 것들도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때의 그 서러움과 괴로움과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하고 싶던 그 감정들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류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누구에게나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상대라면 더더욱이.
사랑하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다독여 줘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니까 그 다독이는 것이 어려운 거였다.
그러기 위해 끄집어내야 할 그 기억들과 감정을 마주 볼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서우니까. 우리는 겁쟁이였다.
“…저도, 무서워요.”
그의 말에 다정한 손길이 등을 두들겼다.
“그래도 그때 우리 애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
“우리 애 편들어 줘서 고맙고. 애가 인복은 있나 봐.”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겨우 말 몇 마디, 겨우 그 행동 몇 번으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을 부리니 낯을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또다시 잘못되는 것들의 주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환청과 환각이 보인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는 딛고 선 바닥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감에 손이 떨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하는 모습에 지금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입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가장 기대는 것이 자신의 그 굳건한 힘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무서워서. 괜찮다고, 그 거짓된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류를 지탱하는 것이 그 힘이라서.
말 못 해. 절대 말 못 해.
또 그렇게 무너진 모습으로, 천천히 끝으로 몰리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또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마치 그 안 좋은 상황을 반복하듯 로웰 콕스가 한국에 오고, 괴물들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돌아다녔다.
류는 또, 이상한 그림자에 둘러싸여 초점 잃은 눈을 했다. 달려가 그 매정한 뒷모습을 붙잡을 틈이 없었다.
당장 정신을 차리게 해야 했다. 깨진 창을 통해 보는 그 모습이 무너지는 그녀의 모습을 투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석궁.”
“뭐?”
이나연이 의아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제대로 답할 틈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석궁을 뺏어 들고 오정인을 붙잡았다.
“당장 옥상으로 가!”
다급한 그의 얼굴에 오정인은 당황한 얼굴을 하다 곧바로 건물 옥상으로 이동을 시켜 주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가장 겨누고 싶지 않던 상대에게 그것을 겨누었다. 하얀 화살이 어둠을 흩트려 놓고 넋 나간 이의 정신을 깨웠다.
그를 돌아보는 이를 바라보며 그는 숨을 내쉬었지만, 오히려 그 숨통이 조여 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숨겨 온 진실이 드러날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류 하나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가령 지금껏 간신히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무너지는 순간이 말이다.
초조함과 사라지는 여유 속에서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전직자는 배척되지만 동시에 필요한 무언가였다.
골절에 내상, 뇌진탕까지 온 사람 하나 치료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조용한 병실에 류를 눕혀 두고 손민호든 손민경이든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차라리 안 봤으면 좋았을 장면을 보았다.
주세진과 그 뒤에 서서 초조한 낯을 가리지 못하는 치유 계열 전직자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어느 사람들.
“이게 뭐 하는 짓인가요.”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주세진은 무표정한 낯으로 제 앞을 막은 이들을 보았다. 자세히 훑어보니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정부 쪽의….
“보는 눈이 많네. 다른 급한 환자들도 많지 않나? 일단 저 사람들은 보내고 얘기하도록 하지.”
남자의 말에 주세진의 입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눈치 보던 전직자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연신 주세진 쪽을 힐끔거렸다.
“그 급한 환자를 치료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보는 눈이 많다고 했네.”
“…….”
“어느 쪽이 이득일지 통계 못 내는 건 아니겠지?”
“…하.”
냉소 어린 낯으로 웃던 주세진은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누르더니 손을 들었다. 주춤거리던 전직자들이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묻죠.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요.”
“자네가 하지 않을 입막음으로 인해 번질 위험 요소의 싹을 제거하는 것이지.”
“…….”
“누구를 치료하러 가는 건지는 대강 들었다네. 그러니 막아야지. 저 많은 수의 입에서 나올 말을 막고 혼란이 일지 않게 조절해야지.”
“그딴 게-.”
“그딴 게!”
“…….”
“그딴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있어. 그리고 그 시기가 지금이야!”
주세진의 기세가 날 서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옆에 서 있던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가 손을 떨었다. 남자는 자꾸만 손을 움찔거리는 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와 싸울 생각이 없어.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와 자네가 사이가 안 좋다는 낭설이 돌아서야 좋을 것이 없지.”
“…….”
“지옥도의 영웅 취급받는 그 애가 중상이라는 말 또한.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뭔가. 자네 공략대에도 치유 계열이 있지. 그자만 조용히 데리고 들어가서 치료하고 끝내.”
“참… 쉽게도 얘기하시는군요. 다친 건 그 애인데.”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정한 낯은 노련한 정치가 같았고 동시에… 그냥 지독히 현실적인 얼굴이었다.
“이 자리에 오른 우리는 목숨과 안전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야 할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책을 마련해야 하지. 그것이 전직자 관리 기관이었고 지금은 안전할 거라는 믿음의 여론이야.”
“…….”
“자네가 소수인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지위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노력하는 것일 뿐이야.”
“…그걸 알면서 지금 치료 하나 제대로 못 받게 만드는 건가요? 그 애도 당신들이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저토록 선명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낯을 구기는 주세진을 보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직자이지. 최소한의 안전을 간신히 보장받는 이들에게는 영원할 위협적인 잠재적 존재.”
“그 존재에게 빌붙어 살려고 하는 게 누군데!”
“…….”
천천히 숨을 고르는 주세진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결국 끝으로 몰렸구나. 결코 하지 않던 비난의 말이 주세진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지금 이 세상은 끝으로 몰렸구나.
남자는 그런 주세진을 보며 덤덤한 낯으로 말했다.
“우리라고 그걸 모를까. 그러니 명성 외의 실질적 권한도 권력도 없는 자네의 무리한 요구도, 지나친 간섭도 봐주었던 거야. 우리도 우리 나름 자네들 편의를 봐준 거라네.”
“…….”
“…난 나쁜 사람이 아니네. 물론 자네도 마찬가지지. 전직자도, 민간인도 나쁜 사람은 없어. 우리는 그저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지가 다를 뿐이야.”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라고 말하는 건가요?”
“전직자들에게 있어 정부는 뒤에 숨어 이득이나 챙기는 놈들이겠지. 하지만 전직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안전책을 보장해 줄 유일한 기관이야.”
“…….”
“반대로 전직자들에게 자네는 최소한의 인권을 만들어 준 사람일 터이고, 아닌 자들에게는 지옥을 끝내 준 인물이기는 하나 동시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존재이겠지.”
남자는 손을 들어 주세진의 어깨를 짚었다.
“자네는 전직자들에게 영웅이 될 수 있어. 하지만 민간인들에게는 아니야. 지금도 자네는 불안해할 다수의 존재가 아닌 그 아이 하나 치료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나.”
“…….”
“예전부터 생각했지. 자네는 좋은 보호자야. 훌륭한 지휘관이야. 하지만 영웅은 아니야. 사람들은 결론만 보지. 그리고 그 결론에서 자네는 다수의 사람을 버리고 소수의 전직자들만 챙기는 존재야.”
“…….”
“…부디 무력한 이들의 가련한 발버둥이라 생각해 주게.”
남자는 떠났고 주세진은 남았다. 비틀린 웃음과 헛헛한 것들을 내뱉던 주세진은 한참을 그곳에 홀로 서 있다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 빈 자리를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그것은 낯을 굳힌 손민호가 그를 발견하고 뛰어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류, 어디 있어?”
“…이쪽으로 와.”
이 끝에 있을 결말에서 과연 웃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지 그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건데. 그런데 왜, 왜 우리는 이렇게….
이런 우리의 뒤에 숨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당신들은 왜….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고 몸을 낮추는 것을 택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남들 시선 피해 치료받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기만뿐인 위로와.
“…사랑해.”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밖에 없었다.
***
그것에 관하여 과연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당사자인 당신마저 괜찮다 웃어넘기려 하는데. 그가 할 수 있는 건 또다시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어쭙잖은 핑계 대고 앞서서 계단을 내려가고 쓰러진 당신을 붙잡고 우는 게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점점이 늘어나는 손 위에 상처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차라리 당신의 이 고통이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라면 그 상처도 아픔도 다 내게로 떠넘겨지면 좋겠노라고.
팔에 들러붙는 붉은 기류를 뜯어낼 때, 그와 함께 그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고.
영원히 감긴 것만 같은 눈을 볼 때면 매달리고 싶었고, 하얗고 파랗게 물든 뺨을 볼 때면 그냥 다, 관두고서 둘이서 도망이나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도 지금에 와서도, 그가 한 것은 무엇이 있나.
걸어 나갈수록 상처만 남을 길을 알면서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자신은 무엇인가 하는 죄책감이 이제는 끝없이 가라앉는 죄악감이 되는데.
그런 그의 감정과 상관없이 영원히 눈 뜨지 않을 거라 하는 것 같은 모습에 목이 메었다.
잠시간 박상호에게 시선이 쏠리고 모두가 그를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으로 몸을 숙여 눈 뜨지 않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는 혼자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게 어디든. 당신의 기분이 어떻든. 내가 얼마나 망가지든 상관없이.
매달리고, 끌어안고, 내쳐진다 해도 손을 뻗어 붙잡고 함께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는 쪽이 아니다 하더라도.
당신이 영원히 눈을 감겠다 한다면 기꺼이 나 또한 눈을 감으리. 이번만큼은 이번에는 부디. 제발.
당신 혼자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
그는 이미 한번 스스로를 버렸다. 괴물들 사이에 던져져 먹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살린 건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때부터 이 낯설고도 진득한 감정이 퍼져 나가 그를 잠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미치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다면, 이런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미치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사랑해요.”
어딘가 일그러지고 비틀렸으나, 그럼에도.
“…사랑해요.”
그러니 이왕이면 살아 줘요. 제발.
그럼으로써 당신이 기꺼이 누렸어야 할 모든 것을 누리고 그 또한 싫다면 그냥 마음껏 좋아하는 것만 누리다가 그냥 그렇게. 그렇게….
무언가에 쫓기듯 사라지지 말고, 정말 원하는 순간에 다 끝남으로써 무엇도 당신을 붙잡지 못하게 된 순간에….
정말로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럴 때 나를 떠나줘요.
“…….”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말을 했다. 이제는 놓지 못한다고, 끝까지 들러붙을 거라고, 매달릴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런 순간에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감히 붙잡을 수 없음을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깨닫고 싶지 않았다.
무슨 자격으로. 내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붙잡지?
결국 그 또한 족쇄였을 뿐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족쇄라서 류는 끝없이 추락하고 불행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나는 당신에게 잊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것은 욕심이었다. 당신에게 있어 겨우 그런 존재로만 남고 싶지 않은 헛된 욕심.
당신에게 있어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잊기 싫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나를, 나를….
나로 인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멈추기를 바랐다.
결국은 그 또한 그녀를 망치는 수많은 것 중 하나였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속닥이는 그 수 많은 것 중 하나. 그의 감정은 결국 그녀에게 있어 악의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박상호의 능력으로 간신히 눈을 뜬 류는 그를 보자마자 소리 없는 울음을 내뱉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은 그 순간마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서럽게도 울었다.
그러나 그 숨죽인 울음은 누군가에게 제 나약함이 드러날까 숨기기 급급한 모습에 가까웠고, 버릇과도 같아 보였다.
그게 슬퍼서 힘껏 끌어안았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쓰러졌다 다시 눈을 뜬 류는 또다시 어딘가 낯선 모습을 내비쳤다. 지나치게 차분하고 담담한 모습. 모든 것을 남의 이야기 취급하는 듯한 태도.
스스로가 완전해지는 것 같다고 말함에도 그의 눈에는 되레 점점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스러져 모든 걸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제 몸을 맡겨버린 것처럼 말이다.
“있잖아. 만약에 너는 너 때문에 안 그래도 미쳤는데 내가 더 미치면 어떻게 할 거야?”
류는 그에게 그리 물었다. 그는 이미 붙잡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바람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답은 똑같았다.
“안 놔줄 거예요.”
붙잡을 사람이 없다면 완전히 무너질 당신을 알기에.
“그러니까 류도 날 놓지 말아요. 내가 진짜 미치든 아니든.”
자신 하나 버림으로써 그녀가 조금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과거의 그가 그리했듯 다 포기하고 자신을 놔 버리지 않기를 바라서.
끝의 끝에서 하나라도 마음에 걸려 위협 앞에서 뒷걸음칠 수 있는 존재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 말했다.
“…뭐 어때요. 내가 그게 좋다는데.”
최후의 저지선이든 뭐든. 당신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가 되고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무언가가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나를 살렸듯 나 또한 그러리.
그 옛날. 붉은 피비린내가 퍼지는 회색의 세상 속 붉게만 존재하는 태양 아래에서. 푸르게 빛나는 불을 품던 새까만 그 눈동자를 마주 보던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란 걸 어렴풋이 짐작했던 걸지도 모른다.
“넌 그렇게 인성 파탄 난 내가 왜 좋다는 거야?”
“글쎄요. 왜일까요.”
“…….”
“원래 이런 건 본인이 아니면 잘 모르는 거잖아요.”
아무리 말로 설명하려 한들 이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방법을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옛날부터 시작된 죄책감과 책임감. 애정과 애틋함. 약간의 동질감. 너무나 소중한 그 간질거리고도 저릿한 마음.
그것들로 한데 섞인 몸은 멋대로 움직여 그녀를 끌어안고 그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나랑 하나만 약속할래요? 이건 무조건 알겠다고 해야 해요.”
그 옛날부터 하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요.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좋고 나중에 언젠가여도 상관없어요. 그냥 도와달라고 그 말, 한 번만 해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홀로 상처받은 그녀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또다시 홀로 몰아붙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기꺼이 도와달라는 말을 듣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것을 이루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적어도 그 말을 듣는 순간이 온다면 마지막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
이제 비밀은 없었다. 미련한 마음과 이기심으로 숨긴 그 비밀을 털어놓아야 함을 알았다.
어쩌면 사실을 알게 된 류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그제야 들었기에 할 수 있던 결심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결심과는 별개로 세상은 점점 끝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류를 두고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강유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함께 나갈 것을 요구했다. 부탁이 아닌 요구. 드문 일이었기에 그는 곧바로 알겠다고 말하며 움직였다.
그리고 만났다. 거의 완연한 보라색으로 물든 눈을 갖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던 그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남자의 상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빛을 내뿜는 물의 나비 수 마리가 달라붙어 있음에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의 그 남자를 살펴본 강유진의 말에 따르면 왼쪽 눈은 거의 실명.
팔, 다리 각각 하나씩은 부러졌으며 과다 출혈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치료를 하지 않는 이상 옮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한 심각한 몸 상태보다 그의 눈에 먼저 들어왔던 것은 남자의 왼쪽 눈 아래 새겨진 검은 나비 문신이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그 부분만 파내려고 했던 것처럼 살이 움푹 파여 있었다. 물의 나비를 얹은 왼쪽 눈은 미동이 없었다.
천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팔, 다리조차 남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숨결에 따라 움직이는 흉부와 희미하게 떠진 상태로 주변을 살피는 오른쪽 눈뿐이었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달싹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는 강유진과 주세진을 확인하고 몸을 숙여 귀를 가까이했다.
여태껏 움직이지 않던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멱살을 잡고 뒤로 넘어트린 그는 비틀린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 줄까?”
“…….”
“공주님은 날 절대 못 이겨…. 난 절대 걔 손에 안 죽을 거야….”
옷자락과 함께 그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강유진과 주세진이 달려와 남자를 붙잡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라앉는 기분으로 그 애매한 색의 눈을 보았다.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이라는 남자.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건… 걔가 아니라, 나야….”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질척한 피가 묻어났다.
“네 손에 안 죽는 건 류도 마찬가지야.”
“…하. 진짜, 짜증 나는 새끼야, 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당사자는 걔랑 나야. 푸른 불꽃도 나비도… 네가 아니라고.”
손을 타고 흐른 피가 옷을 적셨다. 떨어지는 피가 뺨을 스쳤다. 온몸에 비릿한 냄새가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의 왼쪽 눈에 들러붙어 있던 물의 나비는 자리를 옮겨 검은 나비 위로 움직였다. 마치 그곳에 스며들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넌 방해물이야. 도움이 안 된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이 거지 같은 운명을 끝낼 수 있는 건 결국 나인데…. 그러니까 넌… 방해하지 말, 고 꺼져….”
남자는 끝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쓰러지는 남자의 목을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힘을 준다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어쩌면 이로써 푸른 불꽃과 나비라는 그 운명이 끝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으로써 류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이 자유로워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면?
이 남자가 죽음으로써 모든 운명의 책임감이 류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무거도 없었다.
열이 올라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목을 결국은 놓아주었다. 옆으로 쓰러지는 남자의 몸을 강유진이 붙잡았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건 조금은 비참하면서도 결국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구나, 하는 죄악감을 불러일으켰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겠다는 그녀를 마주 보면서도 술렁이고 일렁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열었다. 말문을 트게 해 준 것은 이예린의 말. 그리고 류의 의심. 질척이는 기분에 휩싸여 내뱉은 진실과 과거를 들으며 류는 담담한 태도를 고수했다. 이미 짐작하던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듯이 조금은 씁쓸해 보였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모르게…. 바람을 이야기했다.
“나 두고 혼자 가지 말아요.”
담담한 얼굴. 담담한 태도.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는 눈을 감고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런 그를 류는 기꺼이 마주 앉아 주었으나….
그것이 답이 아님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아니 앞으로 평생을 생각하고 더듬고 후회할 것이다. 차라리 그 말이라도 하지 말걸. 그렇게 무책임하게 매달리지나 말걸, 하고.
왜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지. 왜 나는 방해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강하지 못한 것인지.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망설이고 피하고 싶어 하던 그녀는 그 때문에 손을 들었다.
검은 제등에 꿰뚫리고도 웃던 남자. 꺼멓게 죽은 것 같은 눈으로 그런 남자를 보던 류.
남자의 손에 들린 총구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방해만 되고, 도움도 안 되었다. 그냥 그는 짐이었다.
기어이 테오그라젠스는 눈을 떴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류가 바라지 않던 일은 결국 일어났다.
푸른 불이 하늘을 덮고 뒤도는 이를 붙잡고 싶어 뻗는 손을 지켜만 보았다. 정신을 잃은 류를 붙잡고 지켜만 보았다. 사라지는 존재를.
“오래오래 살아라.”
“…….”
“…살아남아.”
그는 그렇게 말했다. 류의 전직관은, 온통 새까맣고 푸르게 물들어 가던 그 남자는.
마지막까지 류를 지켜보며 웃었다.
***
아마도 그 남자의 능력이었을 것이다.
요동치는 해일과 함께 그들을 덮은 것은 새까만 검은 그림자였다. 그 어둠 끝에 다다른 곳은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장소였다.
“이호연!”
그를 부르는 목소리 또한 익숙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물에 젖은 몸이 한기를 내뿜었지만 지금 그런 쓸데없는 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치료를 시작하려는 손민호의 손을 류 쪽으로 돌렸다. 이미 류를 치료하고 있던 손민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그를 보았다.
“너도 일단 치료부터-.”
“나중에. 나중에 해, 그딴 건.”
그를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며 함께 딸려 온 존재의 멱살을 붙잡았다. 천천히 끔뻑이는 눈이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그저 화풀이인 듯 순수한 분노인 듯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모를 화를 풀었을 뿐이었다.
사람이 없을 지하실로 끌고 가 팼고, 오는 길에 가져온 끈으로 사지를 결박했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치료를 하는 이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뒤돌아 나가려는 그에게 남자는 말했다.
“기껏 살려 줬더니 돌아오는 게 이런 거야?”
“그 입 다물어.”
“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
“…내 덕분에 벗어났잖아. 그 운명에서. 거기서 네가 한 게 뭐가 있어? 괜히 나한테 이러지 말고…. 가서 걔한테 빌기나 하는 게 어때?”
남자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그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한참을 못 박힌 듯 서서 주먹을 움켜쥐다 그곳을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세진에게 끌려가 치료를 받았다. 멍하게 정신을 빼놓은 시간이 끝난 뒤 찾아간 류의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생각보다 빠르게 류를 찾았을 때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를 보기 싫다고 말하는, 애써 웃으려다 실패하고 만 얼굴을 보았을 때도… 어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결국은 마냥 매정하지 못해 미워하지 말아 달라 비는 그를 끌어안는 그녀를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고 죄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 옛날처럼 수치스러웠다.
옛날과 다를 게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류도 마찬가지였다.
류는 옛날이나 그때나 다름없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순간의 과정을 위해서라면 본인 하나쯤은 놓아도 된다는 태도도 여전했다.
원치 않아 외면해 오던 누군가의 심장을 찔러야 한다는 거에 대한 거부감도. 원망스러운 또 다른 하나에 대한 것도.
그 안에서 술렁이는 감정을 무시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 움직였다. 하지만 테오그라젠스는… 강했다.
‘인간’은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검은 가시의 틈에 숨어 얄팍한 방어막 하나만을 믿고 죽지 말라 빌었다.
제대로 치료해 내지 못하는 존재가 원망스러웠고 그녀 혼자 이 꼴이 나게 만든 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끝내는 이 상황 모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또 다른 신이 미웠다. 그러나 그 원망 속에서 피어난 기회라는 게 뭔지.
테오그라젠스처럼 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하나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기회에 힘입어 선택지를 준 것은….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그의 전직관이었다. 그자가 준 선택지는 사실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의 힘을 모두 받아들일 것.
“그 애가 그것을 선택했으니, 나도 같은 걸 택해야지.”
같은 얼굴로 무정한 낯 외에는 할 줄 모른다는 듯이 구는 상대에게서 그 이상의 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저 정말로 이게 마지막 만남일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 약간의 아쉬움으로 인한 질문을 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의 질문에 처음으로 감정이 사라진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죄를 마주하러 가야지.”
죄를 마주하러 간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저런 얼굴을 잘 알았다. 그가 류를 볼 때면 그 까만 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죄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내가 본 당신의 얼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어이 방법을 찾아내 신을 죽이고, 테오그라젠스의 목을 들고 짓던 그 표정을.
기쁨이라기엔 서러운, 허무함이라 하기엔 고양된 표정. 온갖 감정이 뒤섞인 아득하고도 아연함.
그는, 아니. 류가 아니라면 그 자신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결코 이해 못 할 얼굴이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 뒤는 나름의 평화가 만들어지고 지속되었다. 사람들이 웃고, 우리도 나름 웃었다. 그것이 간신히 만들어진 평화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류!”
“…….”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다 갑자기 주저앉은 류는 희게 질린 낯으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식은땀이 흘렀고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짓씹은 입술을 마치 고통이라도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은 다리였다.
“이상은 없어.”
하루 종일 온갖 방법으로 검사를 끝낸 손민호와 손민경이 내린 결론이었다.
아파서,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몇 시간 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던 류의 모습과는 알맞지 않은 말이었다.
류의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던 주세진과 강유진도 그 말에 낯을 굳혔다.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강유진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류에게 물었다.
“테오그라젠스랑 싸울 때 다리가….”
“…잘렸죠. 근데 그건 환상이었어요.”
“혹시 그때 그 정신계 마법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서요.”
강유진의 말에 류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법 계열의 무조건적인 상호 작용.
류는 이미 테오그라젠스와의 정신계 마법에서 그 우위를 점했다. 그 순간부터 그 신이 행했던 모든 마법을 무용지물이 되었다.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다. 그러나 나오는 족족 류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민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을 때는 낯을 굳혔다.
“마법 쪽의 문제가 아니면 환상통일 수도 있어요. PTSD 같은 문제-.”
“아니에요.”
“네?”
“아니라고.”
그 말을 하는 류의 기세는 누가 봐도 날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 얘기 자체를 꺼내는 걸 허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번 주저앉으면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 채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진통제 같은 것은 먹히지 않았다.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낀 류는 갈수록 말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며칠 동안 사라져 연락이 안 되기도 했다.
결국 불안함에 며칠 만에 만나 류에게 그의 집에서 머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이유는 서글펐다.
“부모님 앞에서까지 주저앉아 낑낑거리는 꼴 보이기 싫어.”
그렇게 며칠간 옆에서 지켜본 류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한밤중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놀라 깬 그는 거실에서 눈을 감은 채 돌아다니는 류를 보았다.
밥을 먹다가도 그것을 전부 게워냈다. 갑자기 거울을 깨거나 했고,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렸다.
가끔은 그에게 화를 냈다. 대부분이 잠에 취해 본인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화였다. 다음 날 일어나 왜 팔에 멍이 들었냐는 질문을 해 그는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상태가 더 나빠질 때는 보통 평화 속에 웃음 짓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TV 프로를 보거나 직접 밖을 돌아다니거나 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실상 별로 없었다. 끌어안고, 마주 보고. 사랑하고 가끔은 화를 받아 주고.
상관없었다.
화풀이 대상도 좋았고, 제게 사랑 외에는 속닥일 줄 모르는 인형 취급해도 좋았다. 모든 걸 잊게 만드는 순간의 쾌락을 이끌어 내는 도구 취급을 해도 좋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괜찮아지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그 모습에 괜찮다, 괜찮다 되뇌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박상호의 졸업식을 갔다 온 오늘도.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테오그라젠스와의 일이 끝난 지 벌써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류는 여전히 다리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침대에 눕히고 아래에 자리 잡아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밖에 없었다.
실상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다리의 고통이라는 것이 실제의 고통이 아닌 손민경의 말마따나 일종의 환상통 같은 것이라는 걸.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리 와.”
그에게 손을 뻗는 모습에서 그녀 스스로도 받아들일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 손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회피의 시간이 더해졌다.
흉터를 따라 입을 맞춰 보았다. 손에, 어깨에, 눈가에. 그렇게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흉터들에 다다라서.
온몸을 다해 끌어안아도 그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간절히 매달렸고 그런 그의 행동에 류는 간지럽다며 웃었다.
오랜만에 졸음이 서린 눈이었다. 그는 류가 깰 때까지 끌어안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얀 베개에 얹어진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쥐기 위해 움직이는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매끄러운 실 같은 감촉을 느끼다 눈을 굴렸다. 어느새 하나씩 늘어난 유난히 말랑거리는 인형들이 침대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옷장에는 그의 옷에 반절은 될까 싶은 류의 옷이 차곡차곡 늘고 있었고 현관에도 그에게는 맞지 않을 신발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에 둘러싸인 지금 순간에도 여전히 불안해서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는 분명, 욕심을 부리는 거였다.
“좋은 꿈 꿔요.”
소곤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밤중, 겨우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물짓지 않았으면 했다.
그와 함께 웃고 떠들다가도 저 멀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을 멈춰 주기를 바랐다.
그럴 때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걸 때때로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순간이나마 붙들고 싶어서.
그와 함께 웃고 떠들다가도 저 멀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곳을 바라만 볼 때면 붙잡고 싶어서.
나는 당신을 부르고 끌어안고 마주 보며 말을 걸어.
할 수만 있다면 머물지 못하고 항상 헤매는 그녀를 따라 어딘지도 모를 곳을 함께 헤매고 싶었다.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넌 뭐라고 하고 싶어?”
그 말에 의미가 무엇일까. 무슨 의미일까.
아주 짧은 순간 수많은 의문과 걱정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의 순간이 의미 없게도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뿐이었다.
“사랑해요.”
“…….”
“아주 많이. 정말로. 사랑해요.”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빌며 이번에는 그를 선택해 주기를 빌며 반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
눈을 뜨고 빈자리를 더듬으며 흔적처럼 남은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손에 감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이게. 답이구나.
이게…, 당신에게 답일 수밖에 없구나.
울고 싶은 마음에 몸을 웅크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를 보면서 아무리 좋은 것들만 떠올리려 해도 저절로 연관 지어 생각나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걸 알았다. 그래서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슬펐다.
류는 말했다. 자신이 그에게 있어 불행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녀에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바란다고 이루어졌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 단순하고 명료해졌을 것이다. 이제는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 세상에 살면서 숨어 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슬픔도 불행도 지겹다며 이제는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웃는 것 말고는 못 하는 사람.
그걸 아는데 어떻게 나까지, 당신을 붙잡아.
어떻게든 행복해지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그저 바랄 뿐이다. 마냥 불행만은 아니길. 마냥 잊고만 싶은 존재만은 아니길.
조금은 숨 쉴 틈이 되었던 존재이기를.
홀로 남은 방 안에서 그는 조용히 마지막 대답을 더듬었다. 류에게 있어 다른 그 어떤 말보다 단순하고 기꺼울 그 말을.
더 많이 해 주고 더 많이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사라진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
멍하니 앉아만 있던 것을 관뒀다. 움직여야 했다. 옷을 입고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다 일단은 주세진에게 연락을 넣었다.
류가 하던 일들을 모두 그가 맡아서 할 생각이었다. 남들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것도, 웃으며 이제 우리는 행복하기만 할 거라는 듯 구는 것도.
“…….”
연락을 끊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해서 뭐가 바뀌었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은 전부 다 되돌아갔을 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뭘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고개를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그렇게 한낮의 하늘에 뉘엿뉘엿한 노을이 질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살금살금 빠르게.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이 깜깜해지고 달이 떠오를 때가 돼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런 그를 뒤에서 껴안는 몸이 너무 익숙해서, 저 밖에 쏟아지는 달빛처럼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
“그 상태로 들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엉켜버린 그의 입에서 나온 짧은 음절에 상대는 고저 없는 어조로 말했다. 어딘가 가라앉은 것 같은 목소리는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기도 했다.
“나… 멀리 도망갈까 생각했거든?”
“…….”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무도 몰라서, 어딜 봐도, 누굴 봐도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어.”
뭉개진 눈물이 방울방울 등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곳은 더 이상 없더라고. 세상은 이렇게 넓은데, 나 하나 도망갈 곳이 없어.”
“…….”
“다 끝났다고 모두가 말하는데, 난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들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나도 행복하다는 듯이 굴기를 원하는데!”
말의 어조가 점점 빠르고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손을 잡았다. 간절하다는 듯이 그를 끌어안은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탄내와 잿가루가 묻어나는 손이었다.
“난 아직도 화가 나고 슬프다고! 이제 기뻐하고 안도만 하는 게 안 된단 말이야! 난 아무것도 안 끝났어! 그런데!”
“…류.”
“…다들 그걸 원해. 내가 끝내길 원해. 사람들은 모두가 더 이상 내가 과거의 것들을 붙잡고 질질 짜는 꼴을 원하지 않고, 누구보다 앞서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해.”
“…….”
“우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거 진짜 거지 같고 X같은데…. 왜 그걸 바라는지 이해가 돼서 더는 못 참겠다고….”
조심히 껴안은 손을 풀었다. 류는 순순히 그를 풀어 주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말을 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게 그런 거라서….
슬픈 거였다. 우리는.
그 뒤로 류는 더 이상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더 무기력해지고 멍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다 주세진에게 당분간 좀 쉬고 싶다고 말했고, 주세진은 필요한 것들을 말하라고 했다. 류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밖에 나갈 마지막 구실을 버렸다는 듯 그날 이후로 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못했던 것에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랬듯 류는 가장 가깝고도 사랑하는 대상일 가족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깨어나는 것은 잠깐잠깐. 현실을 외면하듯 본인이 말한 아무도 모를 유일한 곳이 꿈속이라는 듯이 잠만 잤다.
억지로 깨워 밥을 먹였다. 깨어 있을 때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그에게 물었다.
“너… 상담받는다고 했지.”
처음으로 류가 직접 상담을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잠깐의 결심으로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세진과 함께 온 상담가와의 시간에서 류는 노력하는 것 같으면서도 경계심을 풀지 못했다.
대부분은 입을 꾹 다물었고, 가끔은 대답을 해 주었으며 그보다 더 가끔은 거부를 했다. 그러한 류의 태도에 상담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상대의 신경을 누그러트리고 진정시킬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인 정신계 마법조차 실력이 더 우위인 류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화를 거절하고 입을 다무는 류에게 있어 어떤 질문이 상대를 자극하는 말일지 구별해 낼 수가 없어 함부로 무언가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불행의 시초일 하늘이 무너지던 날의 이야기도, 그 이후의 이야기도. 조금이라도 그때의 일들에 관한 말을 할 낌새만 보여도 류의 신경은 날이 서고 예민해졌다.
그건 지금껏 욱여넣었던, 그럴 수밖에 없던 서러움과 화와 슬픔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의미 없고 그나마 시작이라도 한 나날이 지나던 중 이예린이 집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이예린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 고성이 오가고 무언가 깨지거나 던지는 소리가 들려 들어갈 것을 망설이던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방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상담사와의 대화 중 아무리 신경이 날카로워져도 물건 한번 던진 적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의 물음에 짧아진 머리칼을 대충 뒤로 넘긴 이예린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알면 다쳐요.”
“…….”
“그렇게 보지 마요. 무서우니까.”
이예린은 그리 말하고는 다음에 보자며 집을 나갔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먼저 정리해 주었다.
류는 약간은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무슨 일이었냐 물으니 생각보다 가벼운 어조의 답이 돌아왔다.
“이예린이 내 머리채 잡고 싸움을 걸었어.”
“…….”
“…물건은, 내가 깼어.”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라 결국 그는 웃음을 흘렸다.
뭐가 됐든 이예린의 방문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근래 보았던 류의 모습 중 가장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대충 어질러진 것을 훑으며 말했다.
“내가 치울게요.”
“아냐. 내가 했으니까 내가 치워야지. 어질러서 미안.”
“그럼 우리 같이 치울까요?”
그의 물음에 류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방 안이 다 정리되었을 즘 류는 말했다.
“왜 너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아?”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어떨지 두려워 그는 부러 어질러진 것들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외면 따위 상관없다는 듯 류는 손을 뻗어 눈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가족이라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인 희생은 못 할 거야.”
“…….”
“…그냥 그렇다고.”
그 대화를 끝으로 류는, 조금 달라졌다. 상담할 때 지나치게 날 선 대답을 하거나 입을 닫지 않았다.
단답형이라 할지라도 답을 했고, 답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싫다 말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잠만 자던 것도 끝났다.
먼저 부모님 좀 보고 오겠노라 했고 그즈음부터는 잔잔하게 미소 짓는 것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처럼 마냥 가볍고 장난스럽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마치 어린애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던 그 날부터 조금도 자라지 못했고, 이제야 제대로 된 성장을 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헛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간의 모든 것들이, 그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이 단순히 성장을 위한 성장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는 건 너무 아프게 느껴졌고, 서러웠고 싫었다. 꼭 아파야만 성장하는 게 아닌데.
그래서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 조금은 슬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애틋했다.
류는 아픈 것만 먹고 자라나려고 해서, 자라려면 아픈 것만 먹어야 하는 세상이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이상 그 무엇도 기약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고 슬금슬금 봄이 오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아직 추운데도 불구하고 서둘러 꽃을 피우려 하는 것들이 있었다.
창에 서서 그런 것들을 흘겨보던 류는 조금은 뜬금없다 싶은 그 타이밍에 그에게 말했다.
“애쓰지 마.”
여전히 겨울 속에 사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네 자존심, 인생 그런 것들을 버리면서까지 내게 애쓰려고 하지 마.”
“…….”
조금은 다르지만, 그 옛날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를 울린 그 말이 또 그를 울리려고 했다.
전과는 달리 아프고 날 선 상태로. 그때와는 달리 쓰리고 아프게.
“…왜요?”
“…….”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럴 뿐인걸요.”
그때처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닌 온전한 그의 바람으로. 손이 시린 것 같은 기분에 상대의 손을 움켜쥐었다.
과거에는 소매나마 붙잡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것은 금세 놓치기 쉽도록 매끄럽게 만들어진 비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손은 힘주어 잡으면 절대 그를 뿌리치지 못할 것을 아는데,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래서 더, 더.
얽히고설키기를 바랐다. 이 손이나마. 가락가락 얽힌 손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쉰 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가 못 버틸 거야.”
“…….”
“…그런데 나는 욕심인 걸 알지만, 네가 버티면 좋겠어.”
“……!”
“내가 도망 못 가게, 아니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게…. 옆에서 붙잡아 줄 수 있어?”
그 말에 더 무슨 생각을 할까. 붙잡았다. 껴안았다. 매달렸고 조금은 울음 섞인 마음으로 가장 형용하기 어려운 그 애절함 마음을 입 속에 담았다.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게. 도망갈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제쳐 두더라도 영원히 이곳에 남고 싶을 마음이 들도록.
한참을 껴안고 지분거렸다. 류는 조금 귀찮아하다가도 결국은 다 받아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날 무슨 대화…한 거예요?”
“이예린이랑? 솔직히 대화는 아니었는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금세 열기가 가시고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으며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이제는 다 상관없어 흘려들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나보고 그러더라고. 확실히 하라고.”
“…….”
“그러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뿅망치를 꺼내더니 그걸로 날 때렸어. 옛날부터 한번은 이렇게 해 보고 싶었다고.”
“……?”
“그 뒤는 뭐 그냥… 나름대로 얘기를 나눴어.”
소리 지르고 물건 던지고 난리였던 것 같은데. 무어라 더 말할까 하다가 뭐 어때, 라는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끌어안은 것들이 너무나 기껍고도 소중해 다른 쪽으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류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옛날에 그랬을 것처럼 자신의 눈으로 나름 괜찮아지는 세상을 보았다.
자신을 애정으로 끌어안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았고 웃음을 머금었다. 꼬깃꼬깃한 쪽지를 건네는 강유진에게는 고맙다고 말했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와 함께 그 쪽지에 적힌 장소로 가, 멀리서나마 살아남아 다시 한번 살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언뜻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짓고 서로를 부르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로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상처 입은 사람끼리 서로를 붙잡고, 위로하며, 다독이고 다시 한번 살아나는 과정을 거치는 거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살아남을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혼자가 아닌 모습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나만 장르가 달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