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천공 섬과 뒤섞였던 곳들은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곳에 섞여 들어갔던 사람들은 그 순간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들을 겪었는지.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마치 시간이 멈추어 있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후유증 없는 귀환임으로 나쁠 것 없는 결말이었다.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에디와 페이즐리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들은 영국의 상황이 많이 나아지면 놀러 오겠다고 말하며 연락을 끊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멀쩡해진 하늘을 보며 몇 날 며칠을 울었고 진정했다. 다시 살아갈 준비를 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세진은 테오그라젠스에 대해 세상에 알리는 것을 선택했다. 신이 영원히 모셔지는 것이 결정 난 그날 내가 한 짓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리는 것이 좋을까 토의를 했고 결론을 내렸다.
적당히 뺄 거 다 빼고 남은 것만 알렸으므로 내게 크게 문제 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전보다 더한, 거의 전설 속 영웅 같은 것이 돼버린 것이 조금 못마땅할 뿐이었다.
말없이 일을 벌인 내 행동에 대해 공략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화난 것 같은 태도를 취했으나, 얼마 안 있어 엉엉 우는 것으로 화를 풀었다.
그들은 서운함과 걱정이 한데 섞인 푸념을 늘어트렸고 다행이라 말하며 매달렸다.
그렇게 격정적인 재회가 끝나자마자 이호연과 나는 손민호와 손민경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사옥 내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 우리를 뒤늦게 찾아온 것은 강유진과 이예린이었다. 이예린은 무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녀보다 강유진이 먼저였다.
내가 주세진에게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설명하던 날 함께 옆에 있으며 그 계획의 가능성을 계산했던 강유진은 내 멱살을 잡고 오열을 했다.
강유진이라는 사람에게 못 할 짓을 시킨 것은 맞으므로 얌전히 당해 주었다.
치료를 위해 들어 온 손민호와 손민경이 강유진이 하는 짓을 십 분 정도 응원하다 내게서 떨어트려 주었다.
솔직히 두 사람이 당하는 내 꼴을 즐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예린도 뒤에서 웃으면서 좀 즐기고 있었다는 것에 주세진의 카드를 걸 수 있었다.
테오그라젠스와 싸우면서 생긴 대부분의 상처가 환상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별로 다친 구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몸이 멀쩡하지도 않았다.
신이라는 그 존재는 환상과 물리적인 것 모두를 동시에 사용했다. 내가 보고 느꼈던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자잘한 상처들은 몸에 남아 있었다.
정신없어 느끼지 못했던 아픔이 상처를 보고 나서야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손씨 남매는 미련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살았으니 됐지 않냐고 말했다.
모든 상처가 다 치료되었지만 내 왼손에 난 흉터는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왼쪽 뺨, 정확히 말하면 왼쪽 눈가 근처에 얇고 길게 난 상처 또한 옅은 흉터를 남겼다.
나중에 거울을 보고 나서야 그 자리가 예전에 쥬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치료해 주었던 상처와 같은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영광의 상처쯤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대충 넘겨 버리는 나와 달리 내 흉터에 있어서 이호연은 제법 서글퍼했다.
하지만 흉이 남은 것은 이호연도 마찬가지였는데, 내 왼손이 꿰뚫릴 때 그 가시를 붙잡으려 했던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도 길게 난 흉터가 아로새겨졌다.
그는 내게 생긴 흉터를 대할 때와는 달리 자신의 흉터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그를 찾아온 부모님께 혼났다.
물론 나 또한 그 옆에서 우리 부모님에게 혼났다.
그렇게 혼이 난 병실에 있는 것이 지겨워 사지 멀쩡하게 붙어 있으니 이제 환자 취급 그만하라는 말을 했다가 주세진에게도 혼났다.
더 말했다가는 혼만 더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얌전히 입 다물고 주세진의 잔소리를 들었다. 사실 반쯤은 흘려들어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한참을 잔소리하다가 조금 망설이는 어조로 쥬가 떠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걔가 떠났다는 것보다 그것을 이제야 알려 준 주세진에게 더 놀랐다.
거의 입원하고 사흘이 지난 시점에야 알려 줬던 것임으로 일부러 숨겼다는 것이 명확했다.
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던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굴다 사라졌다고.
나는 그 말에 그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묘한 낯으로 바라보던 주세진은 조금 망설이다 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거라며 작은 쪽지를 주었는데… 그 안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로써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의 관계가 끝났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입원이라 부르고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피난이라 읽는 시간이 지났을 때쯤, 강유진은 슬며시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무엇이 괜찮은 것인지를 묻지 않아서, 나는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고. 일상이 반복되고 어떻게든 다들 웃음거리를 찾아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찾아왔다.
주세진에게서 세뱃돈을 받는 요상한 일도 해 보고 박상호에게 세뱃돈을 주는 묘한 경험도 해 봤다.
하늘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운이 좋다면 멀쩡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조각들 전부가 제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직관들은 다시 사람들을 전직시켜 주기 시작했고, 전직자들의 수도 천천히 늘었다. 여전히 하늘 조각 안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렸으나 상대하기 까다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김수혁이 그것을 두고 새 직장 찾지는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새삼스럽게 다른 하고픈 것이 없던 내 입장에서도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제법 안전장치가 마련된 고수익 직장이었으니 꺼릴 것도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순식간에 두 달이 지나자, 어지러워졌던 세상은 제법 사람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쯤에 연기되었던 박상호의 졸업식에 가게 되었다.
시선 쏠릴까 싶어 가기 싫다 하는 내게 기어이 간다는 소리를 받아 낸 박상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음 타깃인 주세진을 찾아 나가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호의 졸업식은 특이하게도 시간대가 밤이었는데, 그 이유를 그 학교에 가자마자 알 수 있게 되었다.
원래라면 축하를 알리는 꽃이 늘어져 있어야 할 교문에는 양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건전지 방식의 플라스틱 양초가 있었고, 실제로 불을 붙여야 하는 밀랍 양초도 있었다. 양초를 팔던 사람의 집요한 시선을 무시하고 사람 수만큼 양초를 샀다.
운동장에서 하는 졸업식은 마냥 추울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렇게 춥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두의 손에 들린 양초 덕분인지 그저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간간이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거나 했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그렇게 한밤중의 졸업식은 따스한 불꽃 아래 시작되고 그 끝을 맺었다.
아마도 그 촛불은 졸업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이들을 향한 반짝임 같은 거였을 거다.
내가 경험했던, 여타 알던 졸업식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나였지.
살아남은 이후로 처음으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미소 짓는 이들을 담은 사진을 보다 눈을 감았다.
“뭔가 이상해. 걔가 이제 성인인 거잖아.”
내 말에 이호연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뒤에서 끌어안는 몸이 따뜻했다. 그 몸에 기대며 침대 위에 놓인 발을 흔들거렸다. 발을 쭉 내밀어 보았지만 그의 발에는 닿지 않았다.
그 짧은 몸부림으로 흘러내리는 이불을 다시 내 몸 위에 덮어 주며 그는 목 뒤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들어 그의 하얀 머리칼을 헤집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잡았다. 슬쩍 밀어내니 그는 몸을 바로 했다.
맨살을 타고 내린 손에 닿는 것은 그의 팔에 남은 흉터였다.
그 위를 더듬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호연은 반대 손을 들어 내 왼손을 잡았다. 짙게 새겨진 흉터 위로 입을 맞추는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넌 뭐라고 하고 싶어?”
내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눈에 담긴 애정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내게 아주 깊은 흔적을 남기길 바란다는 듯이, 제 말이 나를 묶어 두기를 바란다는 듯이 간절히 말했다.
“사랑해요.”
“…….”
“아주 많이. 정말로. 사랑해요.”
나는 몸을 틀어 그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내 몸을 끌어안으며 그것은 짧지만은 않은 것으로 변모했다.
“…….”
천천히 떨어지자 그는 그만큼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침대에 바르게 눕히고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옷을 집어 입었다.
슬그머니 흘러나온 그림자가 나를 감쌌다. 어둠에 잡아먹힌 시야 끝에 닿은 것은 여전히 푸른 향을 내비치는 호수의 옆이었다.
손을 들어 버드나무를 짚었다. 세월을 견뎌 낸 거목이었다. 영원 같은 시간을 견뎌 낸 거목.
그런데 나는 이제 이 나무를 보면 베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웅크려 쥐는 손을 따라 거칠게 일어난 나무의 겉이 툭툭 떨어졌다.
이곳에 머물던 귀신들은 모두 떠났다. 그로써 아주 오래된 인연들 또한 끝났다.
손을 뻗었다. 발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검은 칼이 튀어나왔다. 검을 들어 손에 힘을 주었다.
치켜든 검이 향하는 곳은 버드나무의 몸통이었다.
엉망이 된 연구실을 다 뒤져내 기어이 찾은 하늘 조각.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공간에 오지 않았었다.
그냥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 끝내자, 하고.
“…….”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나무에 박힌 검은 칼이 이질적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헝클어지는 머리를 내버려 두었다.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그대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 버드나무 아래 피었던 민들레가 빠르게 시간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공간의 시간이 흘렀다. 버드나무는 울음소리를 흘렸고, 고래 등 같던 기와집은 허물어갔다. 노랗던 민들레가 하얗게 변하고 그것은 바람을 타고 제 갈 길을 갔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다 천천히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푸른 풀밖에 없던 호숫가 주변에 샛노란 민들레가 한가득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니, 눈물이 났다. 이로써 진즉에 떠났어야 할 이는 떠났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살았고, 나름대로 세상을 구했다. 이로써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끝났다. 그래 정말, 짜증 날 정도로 완벽하게.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이게 다 민들레가 너무 많이 피어서 그런 거다. 일편단심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민들레가 피고, 그것이 하얀 솜털이 되어 떠나가서 그런 거였다.
미련 없다는 듯이 날아드는 작은 꽃씨 때문에. 그것들이 새로 피어날 자리를 찾아 떠남으로써.
그럼으로써 정말, 정말로….
“…끝났다.”
끝을 알리니까.
푸른 초원 위에 피어난 작고 노란 민들레가, 박상호의 졸업식에서 반짝이던 작은 촛불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히 손을 들어 가장 가까이에 핀 민들레를 건드렸다. 노랗던 그것은 내 손이 닿자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것을 따라 눈을 돌리며 생각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혹시라도 이곳으로 발걸음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어떤 미련과 그리움에 사무치더라도 이곳에는 다신 오지 않을 거라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서라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내 마음이 반영이라도 된 것인지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검이 박힌 버드나무가 검과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란 그것들로부터 만들어진 하얀 재가 하얀 꽃씨와 함께 하늘 위로 홀홀히 날아들었다.
저 수많은 민들레는 무덤이었다. 내 모든 설움의 무덤에서 피어난 미련이었다.
내 마지막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그런, 노란 꽃.
하얀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날았다. 하얀 재와 함께.
수를 셀 수 없는 그것들이 내 눈에는 거꾸로 흐르는 비처럼 보였다. 비가 내린 자리에는 새로운 꽃이 또다시 피어날 거다.
그러니… 끝났다. 정말로. 다.
끝났다.
“…….”
이제 나는 행복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