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장르가 달라 7권
#데카르트의 악마
푸른 불과 뒤섞여 그 움직임을 멈춘 색채 덩어리를 보다 그 앞에 선 이를 보았다. 그의 손목을 묶던 끈은 풀렸지만, 그는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 있을 거야?”
“끝까지 같이 있을 거니까 돌려보낼 생각하지 말아요.”
내 물음에 단호하게 답하는 이호연을 보며 나는 맥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함께하다 보니 안 좋은 것만 닮아 간 것 같았다. 고집 센 거라든가.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향해 몸을 내뺀 그림자 줄기가 꼬리를 빼며 다시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내 손안에 들리는 것을 확인한 새벽 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거지?”
“…….”
“모른다고 하면 넌 정말 개X끼야.”
욕설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손잡이 없는 검은 칼날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무뎠다. 이걸로 뭔가를 베거나 할 수 있기는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무딘 칼이었다.
애초에 제례용 검에 살상용 기능을 기대하는 것도 웃기기는 했다. 나무 검으로도 괴물 목 잘만 베고 다니던 내가 새삼스레 무딘 칼이라 못 쓰겠다 하는 것도 웃겼고.
“…….”
나름, 준비는 다 됐다. 필요한 것도 일단은 다 갖춰졌고. 산신제(山神祭)에 쓰이던 검. 제물. 그리고 제사라고 해야 하나 이걸… 어쨌든 이 모든 것을 행할 자인 나.
기어이 완성된 온전한 푸른 불꽃.
검을 들어 쥬의 목에 들이밀었다.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뱀처럼 휘어지며 검은 칼날에 들러붙었다.
칼끝에 닿은 줄이 녹아서 끊어졌다. 그 끝에 달린 붉은 조각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흘겨보았다.
멀쩡하게 목에 걸려 있는 다른 줄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말은 하고 싶었어.”
“…….”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널 죽이고 싶었어.”
그럼에도 내가 널 죽이지 않았던 수많은 이유를 말할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주절거리고 싶지 않을뿐더러 이해나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복잡하게 얽힌 그 대단하신 운명도, 의무도, 관계도, 뭣도 없을 우리가 다신 만나지 않기를.
다시는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지 않기를.
매끄럽게 허공을 유영하는 검을 따라 푸른 불이 꼬리처럼 따라왔다. 그 궤적의 끝은 나비의 심장.
무딘 칼날이 옷을, 그 안의 피부를, 그보다 더 깊숙이 있을 심장을 꿰뚫었다. 벌어지는 입에선 신음 한번 흘러나오지 않았다.
크게 뜨인 눈만이 나를 보았다. 그 눈을 보며 나는 비웃었던 것도 같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던 것도 같았다.
뭐가 됐든 원망은 서려 있었을 것이다.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푸른 불이 그의 심장을 태웠고 그의 심장에 달라붙었다.
불이 상기하는 이미지란 위험한 아름다움, 파괴적인 문명의 시작, 그리고 생명.
그는 푸른 불 속에서 죽으며 동시에 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불 속에서, 그 흔적의 재를 거둬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예언을 따르는 방법.
죽음과 삶의 경계에 걸친 푸른 불꽃만이, 도깨비들의 왕만이 할 수 있는 짓궂은 장난이었다.
누구도 죽지 않을 유일한 길.
네가 내 손에 죽지 않고,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가장 이상적인 정론(正論).
이 길을 위해 사라져야만 했던 이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는 방울방울 눈물 덩어리를 조금 흘렸다.
신의 낙원을 여는 조건은 풀렸다. 옆에서 넘실거리던 어둑한 색채 덩어리가 푸른 불을 미뤄 냈다. 크기를 키우고,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듯 유영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몸을 빼며 우리를 삼키는 그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제 신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푸른 불에 녹아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찢어진 옷자락만이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의 옷에서 시선을 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심장을 더듬어 보는 이를, 내 옆에 선 이를 지나 우리를 잡아먹을 듯 묘한 적의를 품은 이 공간을.
“…….”
마티가 만들어 냈던 공간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완전히 새까맣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검은 세계를 가르는 하얀 선들의 유무가 달랐다.
딛고 선 것조차 어둠이었다. 발끝으로 하얀 선을 눌러 보았다. 그것이 어디에 존재할까 다르게 생각할 때마다 내 발은 계단을 밟듯 높낮이가 달라졌다.
하늘 조각 하나 없이, 있는 거라고는 하얀 선뿐인 암흑의 공간.
손을 들어 내 옆을 가로지르는 선 하나를 건드려 보았다. 매끄럽고도 얇은 실은 섬뜩한 느낌을 주며 피부를 스쳤다.
그것을 움켜쥐어 보았다. 어디선가 가위로 끄트머리를 잘라 버린 것처럼 실은 흐느적거리며 팔에 감기었다.
내가 그것을 놓으니 실은 어둠 속에 빨려드는 건지 물드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사라졌다.
“…내 옆으로 와.”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옆에 섰다. 쥬는… 입술을 짓씹을 뿐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두고 손을 내밀었다.
실 하나에 불이 붙었다. 기름을 머금은 실처럼 불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있던 실에도 불이 붙었다. 이번에는 바로 앞에 있는 것이 타올랐다.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얀 실만 가득 있을 때는 알 수 없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건….”
이호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다 나도 고개를 들었다. 검은 세상에 그어진 하얀 실. 그리고 타오르는 푸른 실.
그것은 거대한 그림이었다. 타오르는 실은 신이었고, 하얀 것들은 배경이었다. 노아 이스벨라의 능력으로 보았던 그림과 같았다.
선과 선의 사이의 면은 모두 어둠밖에 없었지만, 저 안에 들어갈 색깔들이 뭐일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나와.”
내 말에 반응하듯 색이 채워졌다. 푸른 실 안에도 하얀 실 안에도. 그것은 아주 아름답고도 어지러운 그런 그림이었다. 색색의 아름다운 것들이 자신을 보라 주장하는 것처럼 반짝였다.
빛이 있었다면 저 그림의 빛깔들이 우리의 위로 드리워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하다 못해 위압감이 느껴지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때 바다에서 신전 아래 있던 것과는 다른 그림이기는 했지만, 이쪽이 더 테오그라젠스라는 존재에게 어울리기는 했다.
지상만을 바라보는 천공의 신과 그런 신에게 생을 바라는 자들. 오로지 그 신만이 푸른 선이었다. 무료한 신에게 있어 제 섬도, 사람도 모두 같은 하얀 선일 뿐이었다.
그 하얀 선들의 틈에 끼어 있던 하얀 옷자락의 여자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건 배경으로만 남아 있던 이의 반항이었다.
반짝이던 주홍색이 광채를 잃고 조각 같던 손이 움직였다.
선명한 주홍색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둠 위를 걸어 내 앞으로 왔다. 곧바로 목을 벨까 고민하듯 손을 움찔거리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싸울 의지가 있었다면 우리는 곧바로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마티는 하얀 옷자락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
자세히 보니 이 공간에 모든 실들이 그녀의 손끝에 묶여 있었다. 그 수가 많아 엉켜든 것도 있었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챈 이호연이 그쪽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있어요?”
“실 안 보여?”
“실?”
안 보이는 건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것임에도 그녀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왔다.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잡아챈 어깨에 힘을 주니 힘없는 몸은 곧바로 뒤로 넘어갔다. 나는 그대로 반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뭐야?”
제 손과 함께 흔들거리는 실뭉치를 보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마지막 선.”
“…….”
마지막 선…. 그리고 이곳은 마티의 공간. 그러면 이 선이라는 것을 넘으면 곧바로 테오그라젠스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건가.
손에 묶인 선을 힐끔거리는 내게 그녀는 물었다.
“왜 반항하나요?”
“뭐?”
“당신의 생이라고 해 봤자 억겁의 세월 속 흔적 하나 되지 않는 순간이죠. 잊히고,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옛날의 그 무언가밖에 되지 못할 텐데.”
“…….”
“왜 그렇게까지 하나요.”
“…칼 있어?”
마티에게 고개를 돌려 이호연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 허벅지 쪽에 매고 있던 단검을 내게 건네주었다.
마티의 손끝에 묶인 실뭉치를 한데 잡아 칼로 끊어 보였다. 분명 끊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정작 상한 건 칼날이었다.
이가 잔뜩 나간 칼날을 이호연이 거둬 갔다. 그런 그를 보며 들은 말들을 화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나, 그때까지 못 살아.”
“…….”
“내가 죽기 전까지 날 모를 사람은 없을 테고, 내가 죽어서도 대대손손 기억되겠지. 네가 말하는 순간이 올 때쯤엔 내가 잊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벌인 일들마저 잊혔을 거고.”
“…….”
“네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잖아. 쓸데없는 말로 시간 끌지 마. 난 이제 너희 얼굴만 봐도 진절머리가 나니까.”
실을 움켜잡은 손안에 푸른 불이 붙었다. 이런 식의 방법은 통하는 것인지 실을 타고 불이 옮겨 가기 시작했다. 배경뿐이던 이들도 저들의 신처럼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실이 사라지자 그 안을 채우던 색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저것들이 하늘 조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색들은 모두 사라진 하늘의 조각들.
겨울을 품은, 한여름 낮을, 한밤에 어둠을, 어느 날의 노을과 바람이 찬 새벽을 담은 그런 하늘들이었다.
“…너희는 꼭 나한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더라.”
완전히 타올라 사라지는 실들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딴 거 나한테 없어. 그냥 내가 살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야. 너희가 그렇게 바라며 만들어 낸 신을 죽일 영웅이 평범하게 잘 살던 사람이었다는 걸 감안했어야지.”
“…….”
“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지금은 나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이러는 거고.”
굳이 따지자면… 그냥, 이제는 영화나 사진 같은 걸로만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하늘이 보고 싶어서.
그 하늘 아래 바뀐 것 따윈 없다고 생각하며 사람들과 섞여들고 싶어서였다.
여기서 신을 기리는 스테인드글라스 노릇이나 하는 저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바라서이다.
“쟤나 내보내 줘.”
내가 쥬를 가리키자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덤덤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우리는 닮았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너처럼은 안 할 거야 하고, 말할 수 있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이것도 그것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동시에 상처 주는 행위였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 이젠 넌 필요 없어,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런 의미를 담아 그를 보았다.
먹먹한 침묵을 뚫고 가냘프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는 안 돼요.”
“뭐?”
선명한 주홍색 눈이 눈꺼풀 아래로 사라지며 유리로 만들어졌나 의심되는 반짝이는 것을 흘렸다.
“늦었어요.”
“……!”
그녀가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내가 밟고 서 있던 어둠이 쩍 갈라졌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균열은 새로 발 디딘 곳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곧바로 피할 수가 없었다.
깨져 버린 균열에 발이 빠지며 비틀거리는 나를 낚아챈 이호연이 곧바로 백호의 모습으로 변형에 하늘로 날았다.
그래 봤자 끝없는 어둠 속이었다.
균열 속에서 거대하고도 새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휘둘러지는 그것을 피해 이호연이 재빨리 몸을 뺐지만, 소용없었다.
빛으로 산화해 사라진 그것은 곧바로 우리의 뒤편에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곧바로 내리찍듯 가까이 다가오는 손이 우리에게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니 포기하라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 푸른 불을 피워 냈다.
어둠과 하얀 실선밖에 없던 공간에 불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바다가 된 것처럼 출렁거렸고 거센 파도처럼 시작점을 모를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요동치던 푸른 불이 서서히 형태를 잡아갔다. 거대한 손의 형태를 흉내 낸 그것은 우리를 향해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상대를 살라 먹고자 하였다.
불길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원래의 색은 찾아볼 수도 없이 새파랗게 타오르는 손에서 조금의 탄내도 나지 않았다.
화형의 대상이라도 된 것처럼 타오를지언정 그 형태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불붙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물속을 헤집듯이 그것은 이 공간을 천천히 배회했다. 검은 곳을, 푸른 곳을.
그리고 마침내 그 손이 멈춘 곳에 있는 것은….
“뭘 멀뚱멀뚱 가만히 있는 거야!”
간신히 불을 피해 나비 떼에 올라서 있는 쥬. 그는 눈 안에 푸름을 담은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저를 향해 가까이 오는 불붙은 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저대로면 위험했다. 저 손이 가까이만 가도 그는 온몸이 타오를 게 뻔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낯이 저절로 구겨졌다.
타오르는 거대한 손이 마치 징벌이라도 내리듯 쥬에게 닿기 직전, 결국 나는 그 푸른 불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행동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호연은 곧바로 그 손 아래로 달려들어 쥬를 낚아챘다.
용의 입에 물린 채 간신히 살아났음에도 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욕설을 짓씹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나머지 불을 불러들여 손과 우리 사이에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다.
끝이 없는 어둠의 공간에서 그 벽은 유일한 지표가 되었다. 어느 정도 멀어졌나 싶을 때쯤 백호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었다.
나는 곧바로 밑으로 내려갔고 이호연은 쥬를 내팽개침과 동시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방해하지 마!”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는 쥬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멍했다. 허탈하고 지친 자의 눈이었다.
그는 느릿느릿 입을 열어 말했다.
“방해한 적 없어.”
“네가-!”
“쓸데없이 내 생각을 하느라 집중 못 하는 건 너잖아. 내가 불에 타든 말든 뭔 상관이라고.”
“…….”
잡고 있던 그의 옷을 놓았다. 슬며시 눈을 굴려 나를 보는 그를 보며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쳤고, 반항할 힘 따윈 없는 그는 뒤로 넘어졌다. 무력한 모습을 보며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
“이제 너한테 볼일 없어.”
마티에게 내보내 달라고 한 것으로, 불에 타 죽을 놈 살려서 여기다 방목한 것으로 나는 최소한의 도리는 지켰다.
살아서 나가든 말든, 나머지는 다 쟤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았으나 나를 붙잡는 손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놔!”
“…….”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데!”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진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데에는 재능 있어.”
“…….”
“말했잖아, 내가. 좋아한다고.”
“…하. 야. 개소리하지 말고 이거 놔. 지금 도대체, 나랑 뭘 하자는 건데!”
진정하라는 듯이 내 어깨를 붙잡은 이호연이 쥬의 손을 떨구었다. 붉은 흔적이 남은 제 손을 들여다보던 쥬는 예의 웃음을 지었다.
“기어이 넌, 푸른 불꽃이 됐고 신도 불렀지. 거기다가 날 살리기까지 했네?”
“…….”
“…네가 그러면 나는, 난-.”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웃음을 지우고 점점 격해지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입이 다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끝의 나락으로 추락하다 간신히 건져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숨이 멈추었다.
“…….”
거대한 벽처럼 몸집을 키운 불의 벽 너머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그때 그 바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몸이 굳으려고 했다. 저릿한 손에 애써 힘을 주었다.
이곳의 어둠인지 내 그림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던 것이 푸른 불을 끌어안은 채 내 옆을 배회했다.
역시 아까 그 거대한 손은 봐준 거였다. 유흥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끔찍한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자가 겨우 그딴 불 조금으로 버벅댈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저곳과 이곳을 막고 있는 푸른 불의 벽 또한 의미 없는 것일 뿐이었다. 손을 뻗어 벽의 역할을 하는 불을 거두었다.
“…….”
거둬지는 푸른 불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서서히 드러났다. 산화하는 빛을 흘리며 천천히 걸어오는 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아니고, 살아 있는 무언가도 아니라는 것을.
저게… 테오그라젠스?
두꺼운 천으로 된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베일을 고정하는 머리 장식은 단순 세공의 반복으로 화려한 듯하면서도 단순했다.
옷은 천 덩어리를 대충 두른 것 같은 밋밋한 형태였으며 어깨의 장식 또한 머리 장식과 비슷해 화려하지 않았다.
그의 차림새에서 특별나다고 할 법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별거 없는 몇 가지만으로 그는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허리에 묶은 천 뭉치와 각 장식에 더해진 보석, 끈. 베일에 더해진 천. 그것들이 담고 있는 ‘하늘’.
천 안에 ‘하늘’을 담고 있는 자가 신이 아닐 리가 없었다. 옷 안에서 밤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손에는 웬 망가진 하얀 화관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차림새 따위가 아니었다. 천천히.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산화되는 빛들이 따라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도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압감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자가 두려우나 흐릿했다. 아니,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라서, 죽이는 것도 손을 대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거라 몸 깊숙이 새겨진 것처럼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죽일 아이구나.
“…….”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귓속은 점점 먹먹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가? 그런데 귀는 왜….
“…….”
귀가 뜨거웠다. 무언가 귓속에서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더듬었다. 축축하면서도 끈적이는 것이 묻어났다.
“…피?”
이다지도 안쓰럽고, 가여운 것이 말이지.
“……!”
어느 틈에! 눈앞에 하얀 베일이 드리워졌다. 신의 웃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차가운 손이 귀를 스치고 묻어난 피를 내 뺨에 쭉 문질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망가진 화관에서 하얀 꽃 몇 송이가 떨어졌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꽃잎을 따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상할 정도로 시선이 가서였다. 아니, 그쪽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끝까지 방해하는군.
왜, ‘하늘’인 테오그라젠스가 꽃을….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 주변을 배회하던 신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멋대로 움직인 그림자가 내 눈을 가렸다.
그러나 신의 손이 하나하나 닿을 때마다 그림자 줄기는 얇아졌다. 힘없이 사그라지는 검은 선 사이로 신이 베일을 걷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담은 기다란 머리가 쏟아져 내리고, ‘하늘’을 담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를 보면서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눈. 그 깜깜한 밤하늘을 담고 있는 눈을 보며 눈 한 번을 깜박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 나를 죽인다고. 어디 한번 해 보라.
그 같잖은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다면 말이지.
“…어?”
시야가 빙글 돌며 점점 낮춰졌다. 몸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게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검은 도포가 보였다. 잘려 나간 기다란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지는 것이, 그 사이로 우뚝 서 있다 넘어지는 익숙한 다리가.
지금 나….
다시 한번 해 볼까?
“……!”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휘어지는 상대의 눈이 보였다.
내 목을 잡고 있던 신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잡혔다.
손을 들어 그것의 출처를 쫓았다. 내 목에서 난 상처였다. 길게 이어진 상처는 상체 전체를 헤집어 놓았다.
검은 도포가 붉은 것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그런 나를 보며 신이 물었다.
다시 한번?
“…….”
고통은 없었다. 되돌아갔다. 반복되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 뒤부터 계속…, 그러니까 이건 현실이 아니라….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반복되었다. 시야에 붉은색이 계속해 퍼져 나갔다. 되묻는 신의 말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나마 드문드문한 생각을 이을 때면 하얀 꽃송이가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그러면 테오그라젠스는 다시 내 눈을 보고 나는….
그래. 다시?
“…….”
입을 벌렸다. 아직은 붙어 있는 목을 숙여 내 몸을 보았다. 제대로 내 뜻을 따라 움직이는 몸을.
지친 내가 재밌다는 듯 테오그라젠스는 잠시간 고문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 잠깐의 틈으로 그림자 속에서 흐릿하게 깜박이는 둥근 눈 두 개가 보였다. 천천히 깜박깜박하는 그것이. 그것을 보며 막힌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식은땀이 몸을 적셨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정돈되는 것이 느껴졌다. 눈 위로 온기가 어렸다.
그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다그치듯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다시 내게로 뻗어지는 신의 손을 잡았다. 화관을 들고 있는 손이었다.
힘을 준 손안에서 꽃송이가 뭉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먹먹하게 느껴지던 것과 달리 여린 꽃의 감촉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그것 하나에만 집중했다. 테오그라젠스의 손이 주춤거리는 그 한순간을 노려 입을 벌렸다.
그리고 힘껏 혀를 깨물었다.
“류!”
풀렸, 다.
비틀거리는 나를 붙잡은 이호연이 희게 질린 낯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제게로 돌렸다. 저절로 벌어진 입 안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손을 들어 귀를 더듬어 보았다. 피가 묻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분명히 그건, 정신계 마법이었다. 환상? 환각?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이호연을 밀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사그라지는 불 속에서 고고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신이 보였다.
애당초 가까이 다가온 적 없다는 듯 제자리에 서서 즐거워하는 신이.
테오그라젠스는 흥미가 가셨다는 듯 그곳에 서서 나를 바라보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빈자리를 다시 메꾼 것은 조금 전의 거대한 손이었다.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푸른 불이 스치자 혀의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이호연이 다시 백호의 모습으로 변형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슬며시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최우선 사항이 아니었다.
불이 꺼진 채 천천히 움직이는 손을 그제야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거대한 손은 사람의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석상 같은 흰색이었다. 그 손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불을 그 손을 향해 날렸다. 저들이 살라 먹을 것을 발견한 불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유연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별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불이 붙은 손이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허공을 수놓는 불티를 밟으며 그것을 피했다.
그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물의 나비가 보였다. 고개를 틀어 저 아래 있을 이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런 내 시야를 방해하듯 불붙은 손이 아래에서부터 튀어나왔다. 짜증 날 정도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팔이었다. 문제는 팔 하나라는 것.
저게 테오그라젠스의 신체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신체 구조를 생각해 보았을 때 저 손이 전부가 아님이 자명했다.
그런데 겨우 저것 하나로도 우리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의도가 명백했다. 테오그라젠스는 지금 우리를 갖고 놀고 있었다.
그 잠깐의 사이에 사라진 테오그라젠스를 찾아야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쓸데없는 곳에 힘을 낭비하는 것밖에 안 됐다.
“……!”
발을 떼려는 순간 바로 옆의 검은 공간에 금이 갔다. 하얀 단면을 가진 검은 조각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 공간은 너무 제멋대로였다. 벽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벽이 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낮거나 높은 곳에 발이 디뎌졌다.
그리고 멋대로 깨졌다. 테오그라젠스가 바라는 대로, 내게는 불리하게. 상대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열기가 느껴졌다. 아래서부터 튀어나온 손이 둥글게 감싸이며 내 퇴로를 막았다. 사방이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피할 곳. 어디로 피해야 하지. 아래도, 위도, 옆도. 모두 타오르는 손이 나를 노리는 곳이었다.
당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열기에 물든 공간에서 이질적인 감촉이 스쳤다. 뺨을 적시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틀자 불 속에서 쓰러져 가는 작은 나비가 있었다.
“…나비.”
또. 또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날았다.
도박이었다. 지금 나는 내가 심장을 찔러 넣어 이곳으로 오게 만든 이를 믿느냐 아니냐를 선택해야 했다.
“…….”
다른 선택지가 없는 그런 도박을.
나를 받치던 불티가 사라졌다. 그다음 불티를 밟으며 나비가 날아든 곳을 향해 뛰었다. 불에 감긴 거대한 손이 움켜쥐면서 내가 달리는 곳을 가로막았다.
마치 푸른 불의 막 안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푸르고 푸른 세상에서 다른 색이라고 그 미세한 틈에 있는 어둠. 그리고 흐릿한 빛을 내는 나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런 작은 틈으로는 어린아이도 지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고 조금은 짜증 나게도 ‘신’은 그런 내 편을 들었다.
발밑에서부터 뻗어져 나간 그림자가 거대한 손에 얽매어졌다.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나를 움켜잡으려 하던 손이 강제로 벌어졌다.
내가 완전히 그 손안에서 몸을 뺀 뒤에야 그림자는 내 뜻대로 움직였고 사그라지는 어둠을 따라 거대한 손은 천천히 다물어졌다.
뒤돌아 그것을 확인했다. 불이 붙지 않은 곳을 향해 달려들어 팔에 금을 만든 하얀 백호가 보였다.
내가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이호연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방향을 튼 손에 의해 곧바로 잡혔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선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곧바로 변형을 풀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다시 그 손안으로 기어들어 갔을 것이다.
이호연이 떨어지는 방향의 푸른 불을 거두었다. 서둘러 내려가 이호연을 살폈다. 그는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금 사이를 노려요.”
그는 곧바로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만들어 놓은 금을 보았다. 내 의지로 움직인 푸른 불을 한껏 담은 그림자가 잽싸게 손을 타고 올라가 금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얀 석고상 같은 팔 위로 금이 차지하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손을 감싸고 있던 푸른 불을 모두 거두어 틈 사이로 모두 몰아붙였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타닥거리는 불소리와 함께 이 공간을 울렸다. 손 안쪽에서부터 푸른 불이 피어나고, 금이 가지 않은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그것은 그제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태울 것을 잃어버린 푸른 불은 꺼지지 않고 내 곁으로 몰려들었다. 주변을 에워싸는 불을 흐트러트리며 고개를 들어 둘러보았다.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마티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 조각도. 그리고 쥬도.
마티를 붙잡고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녀가 이예린과 접선했을 때 했던 짓. 이예린이 해 주었던 말과 일치하는 테오그라젠스가 내게 한 행위에 관하여.
그사이에 도망간 건가?
지나치게 날 서기 시작하는 나를 진정시킨 것은 걱정스러운 물음이었다.
“안 다쳤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가벼운 타박에 평소라면 웃었을 이호연 또한 주변을 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그 허연 손에 잡힐 뻔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다.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은 신이었다. 반쪽짜리든 불완전하든.
마치 허상을 향해 나 홀로 검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그 거대한 손에 들러붙은 푸른 불이 태운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싶었다.
그나마 반응이 있다 싶은 것도 이호연이 그 손을 물었을 때고. 그 틈을 비집었기에 효과가 있었던 거다.
“…….”
잠깐만. 여태껏 푸른 불에 조금의 타격도 없던 게 이호연의 힘에는 타격을 입었다고?
그 둘의 차이점은 직접적인 물리 공격이냐, 마법이냐였다. 이런 경우가 전에도 꽤나 자주 있었다.
그 검은 비석이나, 그 이상한 금속이랑 비슷한 경우인 건가? 그렇다면 그건 어디까지 해당하는 거지?
테오그라젠스라는 신 또한 물리적인 공격만 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필이면.”
정말 그런 거라면 곤란했다. 무기라고는 이 나간 단검. 그리고 조그마한 단도뿐이었다. 신을 상대로 통하는 무기라 추정할 수 있는 물건들도 이제는 없었다.
류도 프레데터도 그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졌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조금의 경계도 풀지 못한 채 서 있는 상태였다. 만일 상대가 이런 식으로 진 빼는 게 목적이라면 제대로 짚은 거기는 했다.
…나머지도 어딜 갔는지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고.
답답함에 머리를 쓸며 고개를 틀었다.
“……?”
쥬?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뭐지?
의아함에 그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는 것에 집중하니 무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눈에 서서히 온기가 서렸다.
“류, 눈이….”
이호연이 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릴 정도로 나는 보는 것에 집중했다.
초점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세상이 어둑하다가도 푸르게 보였다. 마치 푸른 막이 눈 위에 덧씌워진 것 같았다.
그것이 연기처럼 사라지자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이 보였다.
누군가를 피해 뒷걸음질하는 쥬와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테오그라, 젠스?
내가 조금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을 가리며 드리워진 베일. 널찍한 소매 아래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꽃송이.
제 첫 번째 종을 향해 몸을 숙이는 자와 그런 신을 향해 총을 들이미는 성자. 희게 질린 낯으로 도저히 총을 쏠 상태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을 뻗던 테오그라젠스의 행동이 멈추었다.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신이 베일 속에서 웃음 지었다.
너. 매번 쓸데없는 걸 보는구나.
그래. 그렇지. 그러면 되겠어.
그 눈, 내게 주련?
“……!”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런 내 앞으로 뻗어지는 팔이 보였다. 마치 내가 다루는 그림자 같은 어둑하고도 날카로운 것을 이호연이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튄 붉은 피가 뺨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끝을 모르고 늘어나 내밀어진 내 손을 꿰뚫었다. 뒤섞인 피가 엉켜들어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환상?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다.
내 눈을 노린 그것은 눈 바로 앞에서 멈췄다. 손의 고통보다 정말 눈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 먼저 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되었다.
나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꿰뚫린 손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손을 이루는 피부가 땅겨지는 것이 소름 끼쳤지만 물러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다급히 붙잡았다.
“움직이면 안 돼요!”
“어….”
마치 꿈처럼 손을 뚫은 검은 가시 같은 것이 사라졌다. 그러나 손의 고통은 그대로였다. 흘러내리는 피의 뜨끈함 또한 진실이었다.
울컥거리며 쏟아져 내리듯 피가 흐르는 손을 이호연이 잡아 지혈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를 두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베일이 드리워진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쥬의 얼굴 또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 절망, 아득한 무언가로부터 깨달은 포기.
그 감정들이 잔뜩 얽어매진 얼굴로 그는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마치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거칠었고, 간절해서 나는 이상하게도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의 말이 무언가에 안 보이는 벽에 막힌 것처럼 흐릿하게 들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 망. 도망…쳐.
손에 피가 멈추지 않았다. 관통당한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못 쓸지도 몰랐다.
그나마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다친 게 왼손이라 다행인 건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리어 내 머릿속은 가벼워졌다. 그래서 더 잘 알 수 있었다.
와, 진짜. 저건…. 못 이긴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감히 저것을 죽일 생각을 못 하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했다며 강제로 죄악감에 휩싸이는 이런 몸으로는 못 이긴다.
아직 잔해가 남아 있던 푸른 불 아래 또 다른 신이 고개를 내밀었다.
형태 없는 어둠과 섞여 눈만 깜박이는 그 한심한 신이. 그런 신에게 나도 모르게 비는 이 순간이 정말 죽음을 앞둔 순간일 것이다.
“살려 줘.”
나 말고.
나 때문에 안 엮여도 되는 일에 엮인 사람들을.
테오그라젠스의 시선이 또 다른 하나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 가장 거칠게 움직이며 몸을 틀었다.
그 움직임에 슬며시 들쳐진 베일 아래 그의 얼굴 하관이 드러났다. 이전, 베일을 거둔 그의 얼굴을 보며 눈밖에 생각나지 않던 것과는 달랐다.
그의 입이 보였다. 놀란 듯 조금 벌어졌다, 비틀어지는 입이.
검은 공간에 사방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음 사이로도 놓칠 수 없는 것은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죽음이었다.
나는 또다시 정신 놓을까를 걱정하며 볼 안쪽을 짓씹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비릿함과 아릿함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멀쩡한 오른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았다. 이호연의 소매는 내 피와 그의 피로 흠뻑 젖어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를 잡아당기는 내 손힘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잠깐 사이에 희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그의 입이 벌어지며 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 아쉽게도 달려드는 죽음의 소리가 너무 커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검은 가시가 어둠을 꿰뚫고 나오는 소음을 뚫고 내 귀에 닿기에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마지막은, 내 발밑에서 해일처럼 몸을 부풀리던 검은 그림자였다.
***
기절했나. 아니면 그냥 주변이 깜깜한 걸까. 그도 아니면 눈이라도 멀었나.
다행히도 마지막 예시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느릿느릿 떠지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흩뿌려지는 빛이 보였다.
“…….”
숨쉬기가 버거웠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주변을 에워싼 흐릿한 보랏빛 막이 보였다. 남은 구슬을 이호연이 챙겨 왔던 걸까.
간신히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것은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시의 숲이었다. 천천히 정신이 깨어나는 것처럼 몸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몇 시간을 두들겨 맞아도 이렇게까진 안 아플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빛이 퍼지는 쪽인 다리는 감각이 안 돌아오는 걸까.
먹먹한 귓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간신히 닿은 목소리가 울음에 젖어 있어 나도 조금 슬펐다.
“류? 정신이 들어요? 나, 나 보여요?”
“…아파.”
정말로. 온몸이 다 아팠다. 그런데 그 아픔보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다리 쪽이 더 무서웠다.
몸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만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내 다리 쪽을 보고 있었다. 그쪽으로 눈을 돌리니 익숙한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낼 생각도 안 하고 쥬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빛의 근원지가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입이 불안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됐음에도 직접 치료해 준다는 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인가.
떨리는 손을 들어 보았다. 그나마 멀쩡한 줄 알았던 오른손도 수십 개의 바늘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 꼴이었다. 그런 내 손을 이호연이 붙잡았다.
내 숨소리가 옅어지는 것을 직접 느껴 볼 줄은 몰랐다. 사라져 가는 숨소리처럼 작아지는 목소리를 쥐어짜 봤다.
“…나 죽어?”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집중 못 하겠잖아!”
답은 이호연이 아닌 쥬에게서 돌아왔다. 저렇게 다급한 얼굴은 처음 봤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와, 나 진짜 심각한가 봐.
그래도 눈을 안 다쳐서 다행이었다. 내 손을 끌어 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이호연을 불렀다. 진짜 이게 끝이면 얼굴은 보고 싶었다.
“나, 일으켜 줘.”
적어도 내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야 진짜 포기하든가 아니든가 하지. 내 말에 이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간절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던 쥬가 이호연에게 소리쳤다.
“너, 당장 쟤 눈 가려! 절대 밑에 못 보게 해!”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그 손을 타고 진득한 피 냄새가 났다.
피 냄새 풍기는 어둠 속에 갇히니,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난 직후 나 홀로 건물의 잔해 밑에 기어들어 갔던 것이 생각났다.
외롭고 외로워 죽어 가던 그 가라앉던 기분이 함께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온몸의 아픔과 눈을 덮은 손의 온기가 아직 나는 살아 있다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끝없는 어둠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깨우듯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그때 그 남매, 오빠 쪽은 안 죽었다고! 전직까지 해서 알아서 잘 살아남았어!”
“…….”
“그 자식, 지금도 멀쩡히 살아서 잘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내 입으로 이딴 거 말하게 만들지 말고 네가 그 새끼를 직접 만나라고!”
아. 안 죽었구나. 아주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설프게 눈을 가린 이호연 덕에 그의 손 틈으로 어떤 상황인지가 대강 눈에 들어왔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다 조금 눈을 굴려 보았다.
보랏빛 막을 조금씩 부시고 있는 검은 가시가 보였다. 집중하니 나 외에 그리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느껴졌다.
적어도 살려 달라는 내 부탁은 들어줬나 보다. 그래, 그거라도 해 줘야지….
나까지 좀 멀쩡하게 살려 줬으면 좋을 텐데. 역시 신이라고 하기엔 참 어설프고 약했다.
속으로 혀를 찼다. 테오그라젠스가 쥬처럼 그냥 겉으로만 휘황찬란하지, 별 볼 일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 텐데.
어째 그 반대다. 또 다른 하나의 힘이 하찮은 만큼 내가 강하고 쥬가 약한 만큼 그 신이 더 강하니.
어쩌면 이것 또한 그들의 성향일지도 몰랐다. 평등하게 사랑해 모두에게 기회를 준 신과 그딴 것 없이 자신만 중요했던 신.
그래서 내가 또 다른 하나에게는 개겨도 테오그라젠스만 보면 몸이 굳는 건가?
또 다른 하나를 할 수만 있다면 죽여 버리겠다 말하지만, 테오그라젠스만 보면 그에게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도 그러한 이유라면….
애초에 이거, 못 이기는 싸움이었다는 거잖아.
허탈함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내 행동이 불안감을 안겨 준 것인지 얼굴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더 많아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그 미적지근한 온기가 애처로웠다.
“…….”
이대로 죽기는 싫었다. 억울해서라도 이렇게는 못 끝낸다. 누구 맘대로 이렇게 끝내.
손에 푸른 불을 피워 보았다. 오른손에 고통이 사라지나 싶더니 불이 꺼져 버렸다. 불의 온기가 그 자리를 피하니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조금은 오른손에 새겨진 고통이 가셨다. 그나마 다른 곳에 비해 멀쩡해진 손을 들어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가리지 마.”
“…….”
망설이던 손이 슬그머니 눈을 가리는 것을 관두었다. 그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피나 눈물이 아닌 그의 얼굴이.
“…안 다쳤어?”
“그걸 지금, 나한테 물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심하게는 안 다쳤다는 거네. 신은 신인가 보다. 바로 앞에 있던 이호연이나 쟤까지 이렇게 멀쩡하게 지켜 낸 걸 보면.
이왕 하는 김에 조금 더 해서 밖으로 빼돌리는 것까지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역시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되는 신이었다.
“…….”
나는 입을 닫았다. 쓸데없는 말을 하면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 잠이 왔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직 안 끝났는데.
깜박이는 시야로 보랏빛 막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하얀 천이 보였다.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치챈 이호연이 욕을 짓씹었다.
쥬는 연신 내 다리 쪽과 다가오는 신을 힐끔거리다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내게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끝을 내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기어이 소리를 질렀다.
“그냥 넘겨! 넘기라고! 너 이대로 있으면 진짜 죽는다고!”
“…….”
“제발 말 좀 들으란 말이야!”
간절하다 싶은 외침을 무시했다.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차가운 어둠에 닿은 뺨이 시렸다. 짙은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가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타다 남은 잔해의 불이 슬며시 타오르는 것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게 말을 걸었다.
“…죽기 싫으면, 뭐라도… 좀 해 봐.”
“류?”
그런 나를 이호연이 불안함을 담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설명을 해 주고 안심시켜 줄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깨어 있는 모든 정신을 집중해 말을 내뱉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다.
“잡아먹히기 싫어서, 그렇…게 숨었으, 면….”
그렇게나 살고 싶어, 그렇게나… 기회를 주고, 죽어 갈 것이 안타까워 제힘을 쪼개 우리에게 나누어줬다면.
“뭐라도 해.”
이제 와서 다 포기한 듯이 그렇게 멀뚱멀뚱 있지 마.
신은 눈을 깜박였다. 전보다 그 존재감이 흐릿해진 것이 단순한 나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힘없고 가련하기까지 한 존재였다.
쥬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명감이나 대단한 희생정신으로 또 다른 하나를 내어주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아니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그림자에서 이것을 끄집어내 그 끝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나 원망스럽고, 분노하는 대상이었다.
“…….”
또한 이것이 내 그림자 아래 스며드는 순간부터 알아서. 신 같지도 않은 이 신이 정말로 간신히 신의 이름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서.
더럽게 평등한 신은 희생을 강요하는 만큼 자신도 희생했다. 이것도 신이라고 묵인한 게 아니었다.
이래서였다. 이미 제힘을 쪼개고 나누어 주어 남은 힘이 얼마 없는 이 한심한 신이 기꺼이 또 제힘을 날려 먹으며 내가 살려 달라 한 이들을 모두 지켜 주어서.
그래서 내 그림자에서 나가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였다.
무료한 신 테오그라젠스는 여흥으로 제 사도들에게만 능력을 주었다.
방자한 것들이 뛰어놀든 저를 죽이든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은 또 다른 하나, 이 땅은 공평한 기회를 위해 이렇게 하찮아졌다.
천공 섬의 사람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느라.
하지만….
“이건, 나한테 기회가 아니었어.”
이렇게 사는 것도, 이런 힘을 얻어 사람 취급 못 받는 무언가가 되는 것도. 나도, 쟤도. 넌 우리에게만 기회를 주지 않은 거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네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신이라면….
“나한테도 제, 대로 된 기회를 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네가 생각하는 평등한 자애심이 아닌 너 때문에 희생된 내게 편애를 보이란 말이야!
테오그라젠스가 손을 뻗었다. 쥬가 총을 꺼내 그 신을 겨누는 것이 보였다. 날 끌어안는 이호연의 품속에서 익숙한 것이 보였다.
[마⑇막 기ㅎㅚ]
[ㄱㅖ승, 여우ㄹ 설ㄷᅟᅳᆨ⸎]
[너는 ㅇ직 아니야]
[푸르ㄴ 불⑆]
뭐?
눈을 깜박였다. 건조함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푸른 불이 타올랐다. 신에게 총을 겨누던 쥬가 뒤늦게 뒤도는 것이 보였다.
푸른 불그림자 아래 숨어 있던 신이 그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보랏빛 막이 깨졌다.
테오그라젠스가 얼굴을 가린 베일 속에서 웃는 것이 느껴졌다. 신의 음성이 울렸다.
찾았다.
언제나 그림자에 뒤섞여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또 다른 신은 테오그라젠스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베일의 가장자리를 수놓은 하얀 꽃은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다각도로 빛났다. 다만 그 입가는 테오그라젠스와 달리 드러나 있어서, 움직이는 입 모양이 보였다.
[미, 안. 미안했, 어.]
[…]
고개를 숙인 신이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건 마치 축복을 내리는 듯 그 순간만큼은 차가워진 몸에 온기가 감돌았다.
살짝 드러난 베일 아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테오그라젠스가 ‘하늘’을 담고 있다면 또 다른 하나는 ‘땅’을 담고 있었다.
입맞춤은 짧았다. 겨울처럼 차가웠으나 다가오는 봄 같은 온기도 느껴졌다. 눈 위로 다시 온기가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것을 본다며 신이 탐낸 눈에는 보였다. 그 짧은 행위로 눈앞에 신이 더더욱 작은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
그래서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령 테오그라젠스가 또 다른 하나를 잡아먹는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을 거란 걸.
그가 바란 완전해질 힘은 이미 그가 버린 사람들에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밀어 넣은 사람들에게로 쪼개고 쪼개져 나뉘었으니까.
또 다른 하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눈 내리는 겨울날 단 하나 있는 촛불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아주 작은 들꽃 같은 움직임이었다.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빈껍데기만이 남은 그 신은 기어이 테오그라젠스마저 끌어안았다.
작은 두 손으로 저보다 거대한 존재의 귀를 막았다. 작은 몸으로 그 몸을 끌어안고. 맞대는 이마에 온기를 담는, 저를 잡아먹는 존재에게마저 공평한 사랑을 주는 신.
[…]
끝까지 제 입으로 뜻을 전하지도 못하게 된 하찮은 신.
저를 갉아먹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사랑한 이 땅의 신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바스러지는 재조차 이리도 초라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테오그라젠스와 닿은 몸이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작은 빛의 입자도 아닌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저가 그리도 애타게 찾던 것을 잡기 위해 테오그라젠스의 손이 허망한 허공을 휘저었다. 그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망가진 화관이 또 다른 하나의 뒤를 따라 부서지고 삭아 재가 되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건 사라지는 신의 흔적을 눈으로 좇는 이호연도 쥬도 아니었다.
손의 틈새로 보이는 기다란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무정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두에게 다정한 신이 준 마지막 기회였다. 내가 바란,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기회.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설레지 않았고 도리어 알 수 없는 초조함만이 내 몸을 떨리게 했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으려니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멀뚱멀뚱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오늘 여행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
맞는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짰던 모든 계획과 기대감이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창밖의 하늘은 맑았다. 여행 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비도, 눈도 안 오고 겨울 같지 않게 햇살은 따스했다. 심지어 미세 먼지도 없다며 전날 밤 친구의 들뜬 메시지를 받았었다.
그 친구의 말처럼 정말 깨끗하고 선명한 하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고대하던 여행인데, 가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뭉그적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엄마.”
“왜? 그만 일어나고 빨리 준비해. 아침 먹고 갈 거지?”
“엄마, 있잖아…. 나 여행 가지 말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돌아보는 엄마를 보며 나는 이 알 수 없는 예감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
“…….”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가면 안 될 것 같아.”
엄마는 보송하게 마른 세탁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대로 와 앉았다. 이제 내 손을 잡고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냐고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럴 거야. 나조차도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럼 나는 이제 뭉그적거리던 것을 관두고 나갈 준비를 하겠지.
그러나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가기 싫으면 그렇게 해.”
“어?”
당황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도리어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 아니…. 나 진짜 가지 마?”
“가기 싫다며?”
내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 뭔가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정말?”
이렇게 쉽게? 알 수 없는 위화감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가는 엄마를 보다 베개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두들겨 타자를 쳤다. 욕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은 벗어났다.
뜬금없이 몇 달을 고대하던 여행을 안 가겠다는 내 말에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애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저들도 못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배탈이 나서. 엄마랑 싸운 탓에 외박 금지를 당해서. 몸이 안 좋아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모두가 못 간다고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어떻게 여행 당일에 모두가 못 간다고 하는 걸까.
이상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내가 가장 이상했다. 묘하게 술렁거리는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치다 어느새 다시 잠들었다. 깨어나서는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때 즈음에는 그 이상한 기분이 순간의 꿈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간절히 바라던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 뿌듯함과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대학 합격 발표 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격양된 기분은 안 느꼈던 것 같은데.
침대에 앉아서 계속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생각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입을 일 없게 됐지만, 버릇처럼 같은 곳에 걸어 놓은 교복을 손을 들어 더듬어 보았다.
어제가 졸업식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괜히 책장에 정리된 책 위를 더듬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정신없다는 엄마의 타박을 들었지만 내 이상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점심 즈음이 되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상하게도 화면 위에 떠 오른 친구의 이름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이 나빠졌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우리 지금 너희 집 간다. 치킨 사 갈게. 사랑해. 문 열어 줘!”
“뭐?”
뭐라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말 친구들이 왔다.
치킨이며 피자, 떡볶이까지 한가득 사 온 모습에서 뭘 먹을지 의견 통합이 안 된 결과물이 저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떨떠름한 나와는 달리 엄마는 어서 오라며 애들을 반겨 주었다. 당당하게 들어오는 것이 이 집 자식이 내가 아니라 쟤들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 아직도 자고 있었어?”
친구의 물음에 그제야 내가 아직도 보송보송한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인원수에 맞춰 컵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한바탕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야 대화가 시작되었다.
“근데 넌 여행 왜 못 간다고 한 거야?”
조용히 컵 안의 음료만 홀짝이던 나는 그 물음에 지레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런 내 반응에 내게 질문한 친구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일어나고 보니까 뭔가 기분이 그래서. 가면 안 될 것 같고 괜히 불안하고…. 가는 순간부터 내 인생은 꼬이고 불행해지는 것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 자진해서 진흙탕 속에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더라고.”
말을 끝내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끝났다. 괜히 말했나 싶은 순간 친구 하나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 하연이가 뒤늦게 중이병이 세게 왔구나? 막 왼손에 숨겨진 힘이 미쳐 날뛰지는 않아?”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정말로,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젖는 것 같기도 하고, 엄청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지.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평소와 똑같았다. 사 온 음식을 조금 집어 먹다 친구에게 되물었다.
“…넌 엄마랑 왜 싸웠는데?”
내 물음에 친구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생이랑 싸우다가 걸려서.”
“겨우 그걸로?”
“그게, 내가 화나서 동생 컴퓨터 부쉈어.”
“와?”
“아, 걔가 먼저 시작했다고!”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즐거웠다. 편했다.
그리고 묘하게 아쉽고도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지만. 금세 그런 기분은 사라졌다. 다 잊고 이대로만 시간이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평소와 같았다.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가며 우리는 웃었다. 나는 거기에 어울리다가도 멈칫거렸고 어쩐지 지친 기분이 들어 어느 순간부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도착한 여행지에서 예약한 펜션을 보며 감탄했을 우리는 대학 생활을 하며 자취를 할지 통학을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취하기로 결정 났다는 친구는 자기 집에서 술 마시자며 우리를 꼬드겼다. 싫다 빼는 친구는 없었다.
“근데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여행 못 간 건 좀 아쉽다.”
“…나중에 가면 되지.”
그 말을 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허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었는데 그것의 빈자리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멍하니 그게 뭘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 그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 친구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두들겼다. 고개를 돌려 그 친구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미세 먼지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금이 간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을.
하늘이 무너졌다.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급하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추려 아파트 지하 벙커로 대피한 우리는 전직자라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며 살았다.
가끔은 삭막해진 풍경과 예민하게 구는 사람들. 최소한의 편의만이 준비된 환경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함께한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모르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부모님도 곁에 있었기에 힘든 티를 더더욱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몇 달이 지났다. 식량 자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는 대형 마트가 많았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한 대체재가 존재했다.
그랬기에 그런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누구 하나가 먼저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가족 전부가 함께 있는 나를 조금 원망스럽게 보던 친구가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 해도 함께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유대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할지언정 잠들 때는 옹기종기 모여 잠들었다. 우리는 아마, 비교적 그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 중 제법 편했던 쪽에 해당될 것이다.
적어도 죽은 사람을 껴안으며 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지옥도라고 부르던 시기가 끝이 났다. 그 과정이 제법 길었고 함께한 이들도 많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는 별로 되지 않았다.
다시 송신되기 시작한 TV에선 이 지옥을 끝낸 영웅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순간, 아 저 사람은 평생 사람들의 시선 속에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손뼉 치고, 그를 환호하는 사람들과 같이 섞여들었다. 아마도 이름 모를 그 사람에 대해 약간의 경외감도 느꼈을 것이다.
대충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나는 그리 열광하지 않았고 조금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많은 관심을 쏟아붓지는 않았다.
비단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비교적 힘들게 버텨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만큼 그 사람에게 열광했고 왜 조금 더 빨리 이 지옥을 끝내주지 않았냐며 조금의 원망을 내뱉기도 했지만….
의미 없이 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낯을 찌푸릴 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다.
솔직히 그 사람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 전직자에 대한 별생각도 원망도 없는 내게는 그리 관심 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런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평화와 행복이었다.
평화로운 시대가 다시 찾아왔고, 나는 무너졌던 대학이 완공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학교에 다녔다.
살아 있는 지옥이라 불리던 시대에서 살아남은 것치곤 내겐 그다지 슬픈 기억이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운이 참 좋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벌써 약 2년이 지나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 반년도 다 넘어가는 지금도 그때의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전히 전직자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밀어내지는 않을지언정 같은 사람으로는 보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
나는 그 무엇도 잃지 않았다. 전직자가 된 나를 경외심에 젖은 눈으로 보는 사람도 없었다.
부모님은 나를 볼 때 미묘한 걱정 어린 눈을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터놓지 못할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그것이 감사하게 여겨야 할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가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 아주 가끔 TV에 나오는 그 사람을 볼 때면 더더욱.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 사람 말이다.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것에 비례하여 점점 어둑해지는 회색 눈을 볼 때면 그냥 좀 슬픈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렇게 남들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시간이 흘렀다. 평화로워진 세상에서 옛날에 가지 못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시원한 카페에서 각자의 폰을 들여다보며 이게 좋네, 저게 좋네, 이야기 나누는 친구들을 보다 목이 타는 기분에 눈앞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하연, 하연, 하연. 이거 봤어? 어때 좋지?”
호들갑 떠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도리어 애틋하다면 애틋했다. 그래서 초조한 기분으로 더더욱 성실히 답하고 어울렸다.
또 다른 친구가 핸드폰을 든 손을 쭉 펴며 말했다.
“휴학하고 싶다.”
“갑자기?”
“아니, 과제 너무 많아. 교수님은 자기만 과제 내는 줄 안다니까.”
친구의 말에 다른 이들도 자기도 똑같다 맞장구치며 우울해했다. 그들 중에서 나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
목이 탔다. 녹아드는 얼음이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빨대를 휘저으니 그것은 다시 위로 떠올랐다.
점점 말수를 잃는 내게 친구들은 말을 더더욱 많이 걸기 시작했다.
너, 여기 가 봤어? 과제 다 했어? 이따 점심에 뭐 먹을까? 오늘 수업 몇 개 남았어? 우리 문학 이론 교양 과제 언제까지였지? 하연아,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사소하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말들. 그리고 이어지는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던 질문.
“너, 뭐 아는 거 있어?”
마지막 질문을 한 친구의 눈은 한번을 깜빡이지 않고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보며 결국, 웃음을 지어 주었다.
아마도 일그러진, 제대로 된 웃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다 아니까.
이제 됐다. 이 정도면… 이제 됐어.
얼굴은, 어영부영 어떻게든 기억을 했다. 그런데 목소리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끌었다.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오래 듣는 만큼 내가 더 길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제 됐어.
“…응. 알아.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거.”
그 말을 하자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이 행동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 한번을 깜빡이질 않는 허상들이었다. 답을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미련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를 원망해?”
누구도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서글픈 마음으로 닿지 않을 말들을 나 혼자 중얼중얼 내뱉었다.
“나 미워? 내가 잊어서? 나 혼자 살아서? 내가… 그때, 나는….”
여전히도 어떻게 나 혼자 살아남았는지 모르는데.
“하연아.”
“…….”
“우리 여행 어디로 갈까?”
무표정했던 낯이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딱, 내가 기억하는 그런 웃음을. 내가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면서. 그래서 나는 울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이 겨우 이런 거라서.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놓았다. 미련 같은 물방울이 유리잔을 타고 천천히 낙하했다. 꿈은 끝났다.
“…나는 못 가.”
못 가. 우리는 이제, 다시는 같이 여행 가지 못해. 다시는 이렇게 웃지도 대화하지도 못해.
나는 정말로 원했다. 이런 미래를. 기억은 할까 싶은 사소한 나날들로 이루어진 이런 미래를. 정말로, 정말… 많이 원했다.
까맣게 덧칠해지는 세상을 보며 내 마지막 미련도 뚝,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나는 제대로 포기를 했다. 가망 없는 이 미래에 관하여.
***
몸이 흔들거리는 느낌. 누군가 내 몸을 흔드는 게 아닌 천천히 움직이는 것에 몸을 누인 듯한 감각이었다.
귓가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도 들렸다. 그 틈새를 비집고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도 들렸다.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것이 희게 빛나는 국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빼곡하게 채워진 하얀 꽃잎이 조금은 단단하게도 느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눈을 깜박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똑바로 누워 있는 내게 보이는 것은 기다란 깃대였다. 어딘가 익숙한 화려한 술을 단 깃대를 보다 손을 들었다.
낯선 하얀 옷자락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섬세한 하얀 실로 수가 놓인 그 옷소매를 훑어보다 시야를 높였다.
상처 위로 작은 하얀 국화가 들러붙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제야 선명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라면 일어나지 않을 거야.”
“…….”
반쯤 몸을 일으킨 나를 보며 웃는 낯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했다. 머리는 희고 눈은 까맸다. 머리 위에 귀나 꼬리는 머리 색과 똑같은 흰색이었다.
그녀는 내 발치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누운 곳이 어느 관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 안을 가득 채운 국화꽃을 비롯한 하얀 꽃을 보니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꼭 아무것도 없는 눈밭에 버려진 것처럼 말이다.
그것들을 훑어보다 관 아래를 내다보았다.
비단 꽃을 던지는 아이들. 붉은 실을 꿴 바늘을 들고 뛰어다니는 이들. 그리고 관을 짊어지며 어딘가로 향하는 행렬.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탈이 씌워져 있었다.
그것들을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장미를 닮은 하얀 꽃 한 송이를 들어 그 향을 맡던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며 웃었다. 자세히 보니 관의 가장자리에 앉아 기다란 치마로 내 다리를 가린 상태였다.
“…….”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인데… 표정이 안 좋네?”
“…….”
“좋은 꿈을 꾸게 해 주었는데도 말이야.”
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앞으로 빼 내 얼굴을 잡았다. 짐승의 것을 닮은 동공이 나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꽃이 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 꽃은 저 아래 행렬의 발에 의해 짓밟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흘겨본 그녀는 혀를 차며 잡은 얼굴을 놔주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이 생겼네.”
다시 관의 가장자리에 앉은 그녀는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어차피 지켜질 약속. 왜 질질 끌었니? 결국, 상해 가는 감정만 끌어안고 이 지경이 됐어.”
“…….”
“계속 그렇게 말 안 할 거야? 재미없게.”
제 기다란 하얀 머리를 손끝에 감던 그녀는 그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행렬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깜깜하기만 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곳이 어딘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너. 이게 누구의 장례 행렬인지 아니?”
“…몰라.”
솔직한 내 대답에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너. 아니면 나.”
“……!”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나를 보며 그녀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너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게 가능하다고 봐? 당연히 둘 중 하나만이 미래로 가는 거지.”
“…….”
“원래라면… 네가 태어나자마자 그 몸을 내가 가졌어야 했는데. 그 왕자가 약속만 어기지 않았다면 말이야.”
“…왕자?”
“뭘 모르는 척해? 너도 잘 알잖아. 성제의 아들. 나를 죽이고 산신을 죽인 어린 영웅이자 어린 왕자였던 비형의 이야기지.”
랑.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 위를 메우듯 올라가 있던 꽃송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 꽃을 흘겨본 그녀는 손에 턱을 괴었다.
“그자는 내게 약속을 했어.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할 것을.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올려 주기를.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기를.”
“…….”
“약속을 할 당시의 그는 참 어리숙했지. 어거지로 입은 관복이 어색할 나이였으니까. 그런데 홀로 있을 시간이 많으니 재밌는 짓을 벌이더라고.”
“재밌는 짓?”
“…이 삶은 너의 삶이니 내가 뺏는 것은 안 된다고 말을 바꿨어. 이상도 하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으로 떠돌아다녔으면서. 이제 와 약속을 어기다니.”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굳어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서글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한순간의 착각이라는 듯 그녀는 금세 표정을 바꿨다.
“이상한 건 너도 마찬가지지만. 좋았잖아? 네가 그리 바라던 세상이잖아. 왜 굳이 그걸 깨?”
“…진짜가 아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넌, 너만 좋으면 되는 거잖아. 가짜면 어때. 진실이 아니라면 어때. 네가 좋다는데. 그 누가 무어라 할까.”
일부러 이러는 건가. 발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무릎 밑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저 하얀 치마 아래 다리 상태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기다란 치맛자락으로도 감추지 못한 무릎 위의 바짓자락이 새빨갛게 물든 걸 보면 기대를 버리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런 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려 주던 그녀는 손끝으로 내 이마를 콕 찌르며 말했다.
“안 아프지? 꿈속이라 그래. 그런데 너. 이 꿈 밖으로 나가 뭘 할 건데?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해?”
“…….”
“비형이 도깨비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기묘한 출생 때문이야. 너랑은 다르지.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아이. 네게는 신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어. 그러니 감히, 신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더라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거지.”
그래서 테오그라젠스만 보면 몸이 굳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죄악감이 들었던 건가….
진짜, 죽이는 거 한번 까다롭네. 한숨 같은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움켜쥐는 꽃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런 나를 흘겨보던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그래서 너는 푸른 불꽃이 될 수 없지만 나는 될 수 있는 거야.”
몸을 뒤로 뺀 그녀는 처음으로 비꼼이 담기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해 줄게.”
“…….”
“신에게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도, 네가 그렇게 좋아 죽는 사람들을 지켜 주는 것도. 너는 한 마디만 하면 돼. 내게 네 몸을 넘기겠다고.”
여유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당연한 것을 말하는 얼굴이었다.
몇 명을 학살했는지 모를 그 절대적인 존재를 죽인다는 점에 있어 조금의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잘났으면서 왜 이제껏 내 몸 하나를 빼앗지 못했을까. 이딴 방식을 고수하며 내 입으로 몸을 내놓아라, 하고 말하는 걸까.
색이 바뀌던 갈색 머리와 하늘색 눈이 떠올랐다. 화하는 마음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움직임을 따라 내 다리를 덮은 하얀 치맛자락이 조금 들추어졌다.
그 아래 드러난 바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여전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다리도. 오른쪽 손도. 두들겨 맞은 것 같던 몸도. 움켜쥐듯 힘을 주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얀 국화꽃. 장미를 닮은 하얀 꽃.
그것을 집어 그녀가 그리했던 것처럼 향을 맡았다. 진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고통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으나, 후각은 멀쩡해 저 아래의 상처가 환상통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의 그 아픔이 단순히 나의 착각이라고.
장미를 닮은 꽃을 그녀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너,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 같은 거 없었지.”
“…….”
웃는 얼굴이 굳었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쥐고 있던 꽃을 으스러트렸다. 진득한 시선이 그 꽃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전부터 생각했어. 네가 정말 나와 같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딴 성가신 겉치레나 다름없는 왕 같은 거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잖아.”
“…너와 나를 동일시하면 안 되지.”
“네가 나라면!”
“…….”
“왕이 되겠다, 그 자리를 나에게 달라 같은 그 말 모두가… 그저, 랑을 괴롭히려고. 너도 어디 한번 네가 아끼는 것 모두를 잃어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겠지.”
너를 버리고, 산신을 죽임으로써 지켜 낸 것들을 제 손으로 버리게끔. 그 모든 것을 저버리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기나긴 시간 속에 갇히라고.
복수가 아니었을 거다. 그런 거창한 의미로 괴롭힌 게 아니었을 거다. 그냥, 그냥. 분해서 한 헛말 같은 저주.
가끔가다 꼬아서 듣고 꼬아서 말하는 나를 보던 다정한 눈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내 행동에 화 한 번 안 내고 노련하게 넘기던 모습도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그의 성정이 온유해서도, 기나긴 시간 속에 담긴 노련함 때문도 아니었다.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비꼬는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꼬아서 듣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는 나를 그녀와 겹쳐 보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행했던 일을 하지 않은 척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나 또한 그녀를 나와 온전히 분리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오히려 가장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할 법한 것이었다.
그녀는 하얀 꼬리를 살랑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내 얼굴이라 생각하니 알 수 있었다. 저건 짜증이었다. 거슬리는 것을 볼 때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인정하기 싫은 것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얼굴이었다.
“…짜증 나게.”
“…….”
“맞아. 그딴 자리, 내게 있어 무얼 하지? 난 그냥 무엇 하나 잃기 싫었던 이기적인 그놈에게 모든 걸 잃는 걸 맛보게 해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래서 만족했어?”
“…별로. 그래서 더 심술을 부렸지.”
관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앞을 내다보니 행렬이 향하는 길을 막고 있는 이가 있었다. 붉고 커다란 꽃 두 송이가 달린 귀가 큰 나무 가면을 쓴 자였다.
검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어깨에는 짐승 가죽을 둘렀다. 누군지 모를 그자는 가만 서서 관 위의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그녀 또한 이름 모를 그자를 보고 있었다. 텅 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조심히 입을 열어 보았다.
“싫어한 거야, 미워한 거야?”
“…미웠지. 그렇다고 싫어했던 건 아니야.”
“…….”
“…그 한번을 갖고 영원을 말하며 싫어하고 미워하기엔 그는 다정하고도 불쌍하고, 언제나 용서를 빌어야 하면서도… 그 삶에서 벗어나고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지.”
이기적인 사람….
“하지만 단 한 번을 도망친 적이 없었어. 어쩌면 나와 한 약속이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도망친 무언가였을지도 몰라. 가여운 그의 어머니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제 사촌에게서.”
“…….”
그녀는 제 손을 들어 눈에 담았다. 검은 눈이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내 시간은 완전히 멈췄어. 그가 내 시간을 멈추어 버렸지. 이제 나는 자라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그저 옛것이 되었어. 하지만 비형은 아니었지. 그는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홀로 시간이 흘렀지.”
“…….”
“그 시간 속에서 천천히 무너졌으면, 그만하면 죄를 다 갚았다 할 법도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더라고. 그래서 괜한 고집을 피우며 이 몸도 싫다, 저 몸도 싫다 그랬지.”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내가 태어났다는 거구나. 천 년이 넘을 시간을 홀로 멈춰 버린 시간 속에 갇혔으면서도 그는… 내게 다정했던 거다.
목 안쪽으로 뜨거운 것이 울컥하며 올라왔다. 그 아픔이 선명해 손을 들어 목을 어루만졌다. 홀로 아픔을 주장하는 목을.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손을 뻗어 가장 곱고 예쁘게 핀 장미를 닮은 그 꽃의 꽃잎을 뜯어 내 위로 뿌렸다.
“나는 타고난 성격이 꼬인 걸지도 모르지.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가엾어. 그런데 용서하기는 싫어. 괴롭히고 싶은데 너무 상처받는 건 또 싫더라.”
“…….”
“나는 네가 만들어 낸 허상이고, 너는 내가 만들어 낸 이상이지. 결국은 서로가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인 거겠지.”
하늘거리며 떨어진 꽃잎이 부드럽게 머리에 앉고, 뺨을 스쳤다. 하얀 옷자락에 걸려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네가 그 꼬일 대로 꼬여 버린 감정을 잘라 내겠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인 거겠지. 나는 그저 과거일 뿐이니까.”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였으면서 왜….”
“나에게는 쉽지 않았으니까.”
“…….”
“함께 얽혀들었으나 동시엔 연관 없는 네게 나라는 존재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 어차피 결국은 네가 그 당사자가 아닌 거니까. 그러나 쉽다고 말하지 마.”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이 너무 단호해서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결국 나는 그 감정에 있어 제삼자였으니까.
그들의 감정에 상관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그 끝을 알리는 기묘한 관계였다.
그녀는 나를 통해 저의 이상을 보았다. 그녀의 이상은 욕심낸 적 없는 지위였으며 허무하게 죽지 않아도 될 위치였다.
또한 내게 있어 그녀는 모든 과거였다. 내가 바라던 이상에 가까운 후회와 미련이며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고 할 법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 모든 것이 끝났다. 이상도 과거도. 그냥 살아가는 현재만 남는 거였다. 행렬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 회화적인 가면을 쓴 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가면의 붉은 꽃 일부가 하얗게 물들어 마치 그녀가, 그리고 그 산신이 좋아하던 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 미련이라도 된다는 듯 국화 사이에 고개를 숨긴 그 꽃을 찾아내었다.
“꽃치자야.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그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며 어느 신의 바람이지.”
“……!”
그녀의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꽃을 태웠다. 불티가 된 그것은 흩어지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흐릿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전직명은 ‘도깨비들의 왕’. ㄱㅖ승하ㅣ⸎!#]
푸른 불티가 시스템 창에 들러붙었다. 잘못된 표기들이 불에 살라 먹히며 사라져 갔다. 아무리 지워 보려 해도 지워지지 않던 글자가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의 전직명은 ‘도깨비들의 왕’. 계승하겠습니까?]
반절의 선택권은 내게 있었으나 반절의 선택권은 원래의 주인에게 있었던 거였다. 하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던 그때. 나는 누군가 전직을 하려는 나를 한번은 말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이번에도 나를 말릴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다.
저딴 기능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짜증이 존재했으나, 동시에 어쩌면 저것이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선. 내가 할 말은 하나였다.
“네.”
말이 끝을 맺는 것과 동시에 시스템 창에 들러붙어 있던 푸른 불이 몸을 키웠다.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는 반투명한 그것에게서 눈을 떼었다.
손에 턱을 괴고 나른한 웃음을 짓던 그녀는 처음으로 밝은 어조로 말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
“내가 원망스러워? 그딴 철없는 말로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서?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과하지 않을 거야. 내 헛말로 허깨비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 결코 사과하지 않을 거야.”
“…….”
“…하지만, 너에게는 해야 옳겠지? 너는 그것을 기만이라 여기고 필요치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 책임을 질게.”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손이 내 어깨를 밀었다. 몸이 뒤로 넘어졌다. 반쯤 누운 듯한 자세로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죄고, 기어이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네가 끝낸 우리의 미련의 대가이며… 너무, 멀리 온 우리의 이야기니까.”
얼굴을 가까이한 그녀는 코끝이 닿기 전에 멈추었다. 휘어지는 눈이 제법 익숙했다.
“이건 나를 위한 장례야. 내 마지막. 이제는 만날 시간. 그리고 이건 내 마지막 심술. 너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어, 그렇지?”
“…어?”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우가 나를 관 밖으로 밀어낸 거였다. 빙글 돌아가는 시야로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꽃비가 보였다.
이 장례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끝까지 의뭉스러우나 그와 동시에 다정했던 이의 배웅이라는 게 느껴졌다.
푸른 불에 휘감겨 자세를 바로 한 나는 흩날리는 꽃잎과, 하얀 머리칼 사이로 행렬을 막은 자가 가면을 슬쩍 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칼이 길었다.
그 사이에서 빛나는 하나밖에 없는 귀고리가 보였다. 올라가는 입꼬리도. 그것을 보며 나는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후회가 담긴 인사를 했다.
“…안녕.”
뺨을 스치는 꽃잎이 내 인사에 대한 답이었다. 눈을 감고 그것을 느꼈다. 다정한 봄기운을 품은 그것은 나를 감싸다 사라졌다.
행렬이 향하는 곳에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이 마중을 오는 것이 보였다. 관을 타고 끝에 다다른 여우는 제게 손을 내미는 자를 흘겨보았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꽃을 나누어 가졌다. 여우는 커다란 새빨간 꽃을 품에 끌어안았고 상대는 작은 하얀 꽃을 남은 붉은 꽃 옆에 달았다.
주체할 수 없이 멋대로 날아들던 푸른 불들이 정렬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이 밝아지는 그 길의 끝에는 귀문(鬼門)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문 하나가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 둘은 천천히 걸었다. 지금껏 지체한 시간을 움직이는 그 둘을 나는 슬프지만 기쁜,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서둘러 그들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잠시 움찔한 나를 눈치라도 챈 듯 꼬마들은 잠시 망설이듯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머뭇머뭇 행렬을 보다 나를 보았고, 슬금슬금 내 쪽으로 오다가도 걸음을 멈추었다. 행렬을 따르던 이들이 들고 있던 물건들이 그제야 생각났다.
비단 꽃과 깃대, 그리고 누군가의 향낭, 실뭉치와 바늘. 갓끈, 속에 넣을 것을 잊어먹은 부채 집, 가락지와 비녀. 내 눈앞에 있는 꼬마들의 본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슬픔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망설였지만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나한테 묶어 두고 싶지는 않다고. 슬픔에 젖은 헛말로 한 존재의 시간을 천년이 넘도록 묶어 버린 행동을 따라 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몸을 낮추었다. 망설이는 작은 도깨비들의 등을 밀어주었다. 손에 엉겨 붙으며 나를 꼭 안아준 작은 도깨비들은 느릿느릿 행렬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도 떠나는 거죠?”
내 물음에 어느새 옆에 서 있던 기척 없던 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해괴하다면 해괴한 가면이었다.
그녀의 걸음을 따라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검은 공간에 푸르른 버들잎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고개를 드니 커다란 버드나무가 몸을 기울이며 내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슬쩍 걸음을 떼 보니 물결이 이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내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발로 서 있었다. 허리께에서 찰랑이는 차가운 수면 위로 내 모습이 비치었다.
물속에 잠긴 다리를 보았다.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버들잎을 손을 내려 밀어냈다.
“…….”
투명한 물속에 잠긴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검은 공간에서 더더욱 하얗게 빛나는 것 같은 낯선 하얀 옷이 물에 젖어 반들거렸다.
분명히 존재했다고 생각한 붉은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금색 수가 놓인 까만 천은 허리 부근에서 묶여 꼬리를 길게 뺐다. 하얀 바지. 검은 신. 겉에 입은 하얀 겉옷 안에 입은 검은 저고리.
그러나 겉에 입은 옷이 너무나 희어 하얗게 보이는 복장이었다.
내가, 꿈속 장례식을 지켜보던 입장일 때 입었던 그 옷이기도 하고 실제 그 장례인 지금 입은 옷이기도 한 묘한 옷이었다.
물끄러미 옷을 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옷 한 벌을 지어 주고 가고 싶다 하셨지요.”
“…끝까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방사시의 가면을 뒤집어쓴 이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손안에 검은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이제 보니 없던 손잡이가 생긴 것이 보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집었다.
프레데터와는 달리 이 검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애달픈 진실이었다.
혼자서 따라가지 못해 내 옆에 남아 버리고 만 물건이니까.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검은 칼날 위로 떨어졌다. 매끄러운 단면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은 푸른 수면을 흐트러트렸다.
호수의 푸른 향 내음이 짙었다. 모든 감각이 정상이었고, 내 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여우의 말마따나 나는 이 공간에 도착한 이후로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우리, 다신 만날 일 없는 거죠?”
“…….”
정말 끝까지 짓궂었다. 내게 다 끊어 달라더니. 설마 그 끊어야 하는 감정이 하나 더 있었을 줄이야 몰랐지.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가장 복잡한 감정의 상대는 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예요?”
“…….”
“임종의 딸이라고만 들어서요. 마지막이니까, 이름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나 싶은데.”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 주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잊히기를 바라는 걸까. 그 의미를 알지는 못했지만, 부정적인 것은 아닐 거라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네 개의 눈이 웃는 방사시의 가면을 벗고 큰 흉터가 새겨진 얼굴을 드러낸 그녀가 웃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저 혼자 사부작거리며 소리 내는 버드나무가 있었다.
꿈같은 풍경이자, 단 한 번의 밤이 찾아오지 않아 직접 그 밤을 찾으러 온 모습이기도 했다.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홀로 시간이 흘렀을 사람. 그의 끝없는 죄악감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의 죄악감도.
“안녕.”
마치 그 말이 하나의 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버드나무도 호수도 하얀 꽃잎이 되어 사라졌다.
시야를 가리는 수많은 꽃잎 끝에 다다른 것은 다시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었으나 그 환상 같던 공간과는 달리 무정하고 끔찍한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신의 공간.
손을 들어 목 부근을 더듬어 기다란 줄을 끌어냈다. 누가 어느 틈에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 걸어 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그 난리 통에 잃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살아온 이 땅의 신은 공평했다. 그러니 이런 환상 같은 기회를 내게만 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가장 못 미더운 것이 누구일지 뻔했다.
손에 든 것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작은 꽃이 들어간 유리 목걸이였다.
힘주어 잡았다가 놓으니 장식된 보석이 연보랏빛으로 물들며 그 안에 든 꽃 또한 연보랏빛으로 변했다. 작은 보석을 손끝으로 세 번 톡톡 쳤다.
둥근 유리가 열리며 그 안에 있던 꽃들이 흘러나왔다. 작은 연보랏빛의 꽃잎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여우의 말 중 맞는 말이 있기는 했다. 당사자이기에 그 복잡한 감정을 끊어 낼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핑계를 대 보았다. 이건 그저, 다급한 얼굴로 내 다리를 치료하던 그에게, 그 사람이 살아 있음을 말해 주었던 그에게 진 빚을 갚는 것뿐이라고.
그것이 핑계며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꽃잎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데 뭉친 연보랏빛의 덩어리를 보다 칼을 든 손을 들었다. 푸른 불이 뱀처럼 검은 몸체를 휘감았다.
내리치는 검에 뭉쳤던 꽃잎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흩날렸다.
“…찾았다.”
어둠 속에 웅크려 앉은 미아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만약 나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면 그는 그 남자를 봤을 것이다. 천공 섬의 나비. 남의 아픈 데를 쑤시는 뱀 같은 혀를 가진 이를.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억지로 일으키는 내 손을 그는 뿌리쳤다. 몇 번의 실랑이가 반복되자 그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놓으라고!”
“…….”
“놔, 제발, 제발 좀!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안 돼.”
단호한 내 말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을 품은 것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초점 없는 눈이 원망을 담아 번뜩였다.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는 예의 총을 들어 나를 향해 겨누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과 방아쇠에 닿지도 않은 손을.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인지 이 모든 일에 회의감이 든 것인지 그는 팔을 늘어트렸다. 멍한 얼굴이 나를 보았다.
“죽여.”
“…….”
“그냥, 그냥 좀 죽여 줘. 너도 그게 좋잖아. 너도 나 죽이고 싶다며! 그냥 차라리 죽여서 끝내라고!”
“그런다고 안 끝나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
“일어나.”
그 말을 끝으로 뒤도는 나를 그는 거친 손길로 붙잡았다. 다시 되돌려지는 몸을 따라 낯선 하얀 옷자락이 휘날렸다.
“왜 안 죽인다는 건데!”
목에 피가 나는 게 아닐까 하는 절절한 외침에도 나는 모든 감정이 잔잔했다.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왜 매번 너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면서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는 핑계를 대어, 기어이 너를 이렇게 찾아내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그건, 그저….
“그게 맞는 거니까.”
“…뭐?”
나는 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존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는 것은, 다만 그게 맞는 거니까.
네 불행이 네 행동에 대한 모든 정당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이해할 조금의 건덕지는 되었다.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든 아니든.
그냥 그랬을 뿐인 거다.
“너도 네 삶을 살아야지.”
그 여우마저 순순히 내가 나로서 살아갈 시간을 주었는데.
“네 몸이잖아.”
아무리 내가 너를 밉다 여긴다고 하더라도, 네가 살아온 삶이었다.
누구보다 너 자신의 삶으로서 살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싸운, 너의 삶.
“그게… 맞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해서 바라는 것이, 그냥 너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게 서럽게 느껴졌을 뿐이다. 남들에게 당연한 그것이 네게 아니라는 것이 결국 내 손을 들게 만들었다.
몸을 낮춰 떨어진 총을 주웠다. 그것을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원망의 대상이 틀렸고, 언성을 높여야 할 대상도 틀렸다는 걸. 서로가 그걸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있는 그나마 만만한 이에게 화풀이했다는 걸.
너도, 나도.
“…말했잖아. 난 너 안 죽인다고. 그리고 네 총이 향해야 하는 곳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잖아.”
“…….”
“내가 아니야. 내가 너의 신이 아니듯.”
“…잠깐, 잠깐만-.”
내게 손을 뻗는 그를 피해 조금 뒤로 물러났다. 허망한 손을 보며 나는 말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지. 바뀌면 안 되는 사실이 있어.”
“…….”
“우린…,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해도.”
내 원망도 너에게 향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깨달았지만.
“다신 만나지 말자. 그렇게, 하자.”
그럼에도 나는 네가 싫었다. 그래, 미웠다.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우리는 절대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었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못돼질 수 있는 적당히 친절한 사람들. 우리는 그냥, 각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다.
너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함을 나는 알고 있어서, 내 검은 도저히 네 목을 벨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미우니까 밀어내는 거고.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보며 쥬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떠오른 뜻을 해석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네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조금은 그 마음을 헤아려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건, 개선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을 때 해당하는 경우였다.
지금처럼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사이에 모든 것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너는 살 거야. 나도 살겠지. 하지만 같이 살아가지는 않을 거야.”
“그게, 네 결론이야?”
“그게 우리 사이의 마지막이지.”
“…그래, 짜증 날 정도로 완벽한 결말이네.”
맞아. 정말 완벽한 결말이다. 그리고 내가 정한 이 길로 나를 인도한 것은 너. 나비.
“난 내 역할을 할 거야. 그러니 너는 네 역할을 해. 나를 테오그라젠스 앞까지 데려다 놔.”
“…너는.”
그는 입을 열어 무어라 하려 했지만,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잠깐의 틈. 그 작은 기회를 잡아내지 못한 그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었다.
귓가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실제로도 울리는 소리였고, 너와 나 사이에 있는 무언가에서 나는 소리기도 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둠에 하얀 금이 간 것이 보였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꺼져 가던 칼날의 푸른 불이 다시 거세졌다.
어둠이 깨지고, 그것을 찢어발기며 나타난 것은 거대한 백호였다. 거대한 용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눈임에도 그 안에 담긴 안도감과 애정이 느껴졌다.
흐릿한 하얀 빛을 흘리는 백호가 길게 울음소리를 흘리자 어둠 위로 하얀 금이 쫙쫙 그어지기 시작했다.
전과는 다른 묘한 위압감에 몸을 굳히고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그런 나를 보며 쥬는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제 손에 쥐어진 총을 만지작거렸다.
“…….”
그런 그를 흘겨보다 고개를 돌렸다. 보는 것에 집중했다. 눈에 푸르른 귀기가 서리니 천천히 이 공간에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칼을 들어 그 허점을 향해 휘둘렀다. 푸른 불이 들러붙은 곳을 향해 이호연은 몸을 부딪치기도 하고 기다란 꼬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럴수록 금은 더해져 가 백색과 흑색의 비율이 비슷해질 지경이 되었다.
그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철컥거리는 금속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증오 서렸던 기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 사람이 입에서 흘러나온 두 개의 기도가.
신이시여.
나는 웃을 것입니다. 웃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심장을 향하여 겨눠지는 종자의 총구를
받아들이소서. 감당하소서.
당신의 끝이 머지않았습니다. 당신의 시작이 머지않았습니다.
“나의 신이여.”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홀린 기분으로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총구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나는 웃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탕.
짧은 것 같기도 하고, 긴 것 같기도 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왼쪽 뺨이 따끔했다. 흘러내리는 피를 무시했다. 뺨을 타고 미적지근해지는 붉은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거기 있었구나.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까만 머리가, 하얀 옷자락이, 붉은 핏방울이 내 움직임을 따라 휘날렸다.
왼손을 들자 손등에 무언가에 꿰뚫린 흉터가 남은 것이 보였다. 이것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거지. 그것을 잠시 눈에 담다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하얀 천 자락을 움켜쥐었다. 흩날리는 베일이 얼굴에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그 옷자락의 주인을 보며 나는 웃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믿는 사람 하나 없는 신이랑 너랑 동급인 존재가 만들어 낸 영웅 중에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자.”
신이란 허상의 것을 믿는 자들로부터 만들어지고 그 존재의 가치를 얻는 자들. 테오그라젠스는 어떠한가? 이제는 이딴 걸 신이라 떠받들고 두려워하는 존재는 없다.
모두 다 신의 손에 의해 죽었으니까.
오른손에 들린 검을 따라 흩날리는 푸른 불이 어둠 속에서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신이 손을 뻗었다. 깨져 버린 어둠을 끌어모아 만든 검은 가시가 그의 등 뒤에서 나를 향해 뻗어져 나왔다. 이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
그러나 거대한 짐승의 발이 가시의 시작점을 깨부수자 검은 가시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부서지는 어둠 위로 테오그라젠스의 몸이 부닥쳤다. 손안에 잡힌 온기에서 그가 살아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우는 내게 선택권을 넘겼고 심술궂은 힌트를 주었다. 그들의 공간에서 모든 감각기관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상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지.”
망량신인 도깨비들의 왕이었으나 동시에 사람이었던 신라의 왕자가 온전한 신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운명을 같이하면서도 확연히 차이 나는 푸른 불꽃과 나비.
굳이 내가. 오로지 푸른 불꽃이, 장난과 홀리기를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왕만이 테오그라젠스를 이길 수 있는 이유.
똑같은 종류의 힘에서 더 우위에 있으니까.
“참 잘도 갖고 놀았더라, 너?”
이제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감히 신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죄악감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내가 질 수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신의 몸 아래에서부터 뻗어 나온 그림자가 어둠 위를 덮었다. 어둠과 어둠이 뒤섞여 들었다.
제 목을 틀어쥔 방자한 인간을 밀어내기 위해 테오그라젠스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팔에 닿자 하얀 옷에 그보다 더 하얀 실로 새겨진 자수가 흐릿한 빛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신의 손에 푸른 불이 옮겨붙으며 그 손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 한 번 더 그 같잖은 능력으로 환각이라도 걸어보든가. 내 공간에서.”
벌린 입에서 하이얀 입김이 나왔다. 알 수 없는 추위가 공간을 맴돌았다. 음울한 기운이 어깨를 짓누르고 이성 없는 적의가 득실거렸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이겼네?”
같은 능력을 사용하면서 공간의 주도권마저 내게 뺏긴 순간 테오그라젠스는 이미 내게 진 것이다.
푸른 불을 머금은 칼이 어둠을 갈랐다. 그것은 곧바로 틀어쥔 신의 목에 닿아 그 목을 베었다.
신을 위해 만들어져 또 다른 신을 베어 버리는 검은 칼날 위로 흩어지는 푸른 불을 보며 떨어지는 머리를 잡아챘다.
하얗고 조금 두꺼운 감이 있는 베일이 손안에 가득 쥐어졌다. 금속 장식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잘려 나간 하늘색의 머리카락이 후드득 잘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자 그것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뒤로 넘어가는 머리를 잃은 신의 몸을 남은 거라곤 적의밖에 없는 것들이 손을 뻗어 붙잡았다.
어둠에 먹히고 뜯기는 그것을 흘겨보다 손안에 쥐어진 신의 머리에 눈을 맞췄다. 여전히 베일 아래 감추어진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을지 조금은 궁금했다.
그런 내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머릿속에 낯설지 않은 음성이 울렸다.
나는 죽지 않는다.
“…착각하지 마.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고작 목 하나 벤다고 죽을 거라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신이란 결국 사람이 만든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일지 무형의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보이는 모습 그대로 목이 잘렸다고 테오그라젠스가 죽지는 않는 것처럼.
그러니 모든 신은 자신을 믿는 이에게 알맞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눈을 홀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랑의 능력인 푸른 불꽃의 본질이 사람의 정신을 파고드는 능력의 매개체인 것처럼 말이다.
믿는 자 하나 남지 않은 신을 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신이 과연 강하다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쥬는 왜 약할까.
이유는 하나였다. 그 두려움과 아득함, 고통 모두가 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
진실 같은 그 모든 감각이 테오그라젠스라는 신이 만들어 낸 눈속임이었다는 거다. 그렇기에 온전한 푸른 불꽃만이 그 신을 이길 수 있는 거였다.
사람을 놀리고, 홀리는 도깨비들의 왕만이.
그럼에도 그는 신이었다. 테오그라젠스는 내가 사는 세상의 하늘이었다. 그것이 환상일 뿐일지라도 죽어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모시는 거다’.
나는 그 답을 찾았다.
테오그라젠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만 그의 눈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원래 같은 능력이라면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것이 절대적인 마법 계열의 법칙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시작됐을 모든 환상. 극단적이었던 목이 베이던 상상도, 정말 현실적으로 패배했다 여겼던 검은 가시 테러도 다.
거짓에 적당한 진실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깼고, 결국은 이겼다. 상대가 절로 욕이 나오도록 치사하게 군다면 이쪽도 똑같이 굴어 주면 되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내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한 것에는 또 다른 하나에게만 빠져 있던 테오그라젠스의 방심 덕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낚일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내 발밑에서부터 피어오른 푸른 불이 어둠으로 덮인 공간을 태우며 영역 뒤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과 나의 싸움. 환상과 환상을 다루는 자들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나.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내 영역의 밖에 있는 것은 내가 살아왔던 세상도 아니었고, 테오그라젠스의 공간도 아니었다.
그것을 흘겨보다 나는 즐겁다는 듯한 어조로 테오그라젠스에게 말했다.
“그러게, 머리를 더 잘 굴렸어야지. 설마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여기로 왔을까.”
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마침내 그 사지를 굴복시켰다. 그래 내가, 기어이 이겼다.
들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대충 눈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곳에 눈을 맞췄다.
“평생 여기서 살아. 남의 인생 깽판 치지 말고, 멀쩡한 세상을 네 유흥거리로 만들지 말고.”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꾹꾹 눌러 둔 화가 드러났다. 억울하고도 허탈한 감정들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눈물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가만둔 채 신의 머리를 보았다.
“이렇게 끝날 일을 갖고….”
그 고생을 한 내가 가여워서. 불쌍해서. 한심해서. 억울하니까. 그러나 끝났다는 것이 기쁘고 즐겁고 또, 또… 모르겠다.
울음이 드리운 눈으로도 붉은 하늘이, 황폐한 붉은 땅과 그 위에 세워진 무너진 성전이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기어이 내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그 계획에 따라 준 사람과도 눈이 마주쳤다. 무사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까지 확인하자 허탈감과 안도감은 더더욱 짙어졌다.
사라지는 어둠 사이로 푸른 불에 타 사라지는 오페리움이 보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써 버렸다는 듯이 그것은 그렇게 불에 타 사라지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는 주세진의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어느새 변형을 푼 이호연이 놀란 얼굴로 주세진을 챙겼다.
쥬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진실로 저의 인생을 쥐고 흔든 신을 이겼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차마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이곳이 그에게 있어 가장 익숙할 장소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를 방치했다.
황폐한 붉은 땅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쥬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얀 옷자락. 하얀 베일을 쓴 남자가 굳을 얼굴로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진득한 시선은 내 손안의 신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정상적인 몰골을 유지할 힘도 남지 않은 모습. 딱 사라지기 직전에 간당간당한 모습을 보여 주던 또 다른 하나보다는 약간 나은 정도의 수준이었다.
내 계획은 성공했다. 짜증 나지만 모두가 바라는 방향으로. 손안에 쥐어진 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신은 죽이는 게 아니라 모시는 거라고 하더라고.”
“…….”
“이 망나니 같은 신을 모시는 건 당신이 될 거고.”
잘려 나간 목 부근에서 아직도 타닥거리는 불소리가 났다. 신의 첫 번째 종이라는 작자는 그런 신의 모습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끌어 올려진 입꼬리가 고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기괴했다. 들고 있던 신의 머리를 그의 품에 안겼다.
“잘 지내봐. 여기서 평생 그 신이랑 단둘이, 사이좋게.”
그 누구의 인생에도 관여하지 말고 끝없는 시간 속에 갇혀 그리 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죽고, 이 일을 아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하늘의 신이 살아가는 동안. 그 하늘의 아주 작은 조각만이 저 위에 걸린다고 해도. 그것마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영원히 이 안에 갇혀 살아야 할 것이다.
남자는 제 손에 들린 신의 머리를 보며 몸을 숙였다. 베일에 감긴 신의 머리에 입을 맞춘 그의 눈이 쥬를 향했다. 비틀어진 입매가 벌어졌다.
“너는 기어이, 운명을 벗어났구나.”
“…….”
“어찌 보면 그 또한… 네가 이끌어 낸 길이겠지.”
나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정말로, 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는 인도자가 바라는 대로 그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는 최고의 결과물이었다.
이 공간에 영원히 신을 그 종자와 함께 가두어 버리는 것.
굳은 낯의 이호연을 괜찮다고 밀어낸 주세진이 들고 있던 붉은 하늘 조각을 내게로 넘겼다.
그것을 보던 나비는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이런 방법을 찾아낼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지.”
레코디아의 마지막 말을 듣기 직전까진 생각도 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구심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저절로 모이는 중심.
나비는 그것을 일종의 신을 죽일 자들이 모을 존재로 해석했던 것 같지만… 그건 조금 틀린 해석이었다.
어떤 사람을 모이게 둘 건지 결정하는 주체는 나니까. 결국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 주변에 모이게 되는 거지.
공간 이동과 어떤 땅도 놓치지 않고 그려 내는 오페리움을 다루는 능력이 있는 주세진이 내 편인 것처럼 말이다.
손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에 망가지는 조각에서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붉은 조각에 금이 감과 동시에 함께 신을 모실 성전의 공간이 깨져나갔다.
유리 조각처럼 무너지는 세상에서, 신의 성자는 웃었다. 그 성자의 믿음 하나 얻지 못한 신은 죽지 못한 채 영원히 모셔질 것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붉은 조각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눈을 다시 떴을 때, 눈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반짝였다.
어둠 속에 별처럼 걸린 하늘 조각들을 보며 나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은 그냥 보내 줘도 되지 않아?”
“…….”
하긴 이 끝에 다다르는 과정이 거창했던 것에 비해 끝이 허무하기는 했다.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하얀 천 자락을 질질 끌며 내 앞으로 걸어온 마티 또한 말없이 내 앞에 주저앉았다.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
결국 끝까지 남은 건 신도, 가장 현명하고도 충실한 신의 종도 아니었다. 한 발자국 물러나 다른 길을 물색하던 이였다.
바닥에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차곡차곡 밟아 시선을 올리니 그 종착점은 목에 난 커다란 흉이었다. 그 흉터를 눈에 담으며 물었다.
“그것도 힌트였어? 박물관에서 한 짓.”
“…….”
“절반의 환상과 절반의 공간 능력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선 상관없긴 하네.”
내 말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우리 위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노을이 졌다. 껌껌한 비구름이 드리워졌고 밤에 저물었다.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유영하는 하늘 조각들을 보았다.
붉은 조각을 아직까지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금이 간 그것은 천천히 바스러졌다. 붉은 입자가 날아올라 다른 하늘 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로써 그 누구도 다시는 그 붉은 땅에 있을 성전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함께 지켜보던 마티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
“이 땅의 신은 자신의 힘을 쪼개고 쪼개 뿌렸죠.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힘을 품었으니 땅이 무너질 일이 없을 테지요.”
그 신의 힘을 품은 자들이 전직관과 전직자일 터였다.
“당신을 드리우는 하늘 또한, 기어이 죽이지 않고 모시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냈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붉은 입자가 퍼져 나가는 하늘 조각들을 보았다. 저 조각들이 또 다른 하나의 힘을 쪼개어 받은 전직관과 전직자의 역할을 하며 하늘을 지탱할 거다.
마티는 손을 올렸다. 다양한 색감들을 품고 있던 하늘 조각들은 난색(暖色)과 한색(寒色)을 기준 삼아 둘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어떠한 형체들을 따라 그렸고 둥글게 뭉쳐져 내가 바다의 신전에서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를 완성시켰다.
“…….”
저거였구나. 그때 그 그림이. 그리고 마티의 눈 속에 박힌 그림이.
손을 내미는 한색(寒色) 조각의 인영. 그 손을 향해 손을 뻗으나 뒤편에 다른 것들로 인해 추락하는 난색(暖色) 조각의 인영.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던 결과야?”
언제나 이상하게 행동하고, 언제나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이였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녀가 바란 것이 이런 결말이었는지, 아니면 운명이 정한 정도(正途)였을지는 모르겠다.
마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 녹아든 눈물은 자신의 부정을 부정하고 있었다.
저 눈이 완전히 생기를 잃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것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레코디아.”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듯했다. 신을 모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던 사도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나는, 그렇게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원치 않았고,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토록 허무한 최후를 맞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
“나는 살고 싶었습니다. 가장 이기적이고, 악랄하며, 명예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그런 방식일지라도.”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왼쪽 뺨을 꾹 눌렀다. 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이웃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사냥꾼을, 인사해 주던 푸줏간의 노인을 죽이고, 죽여 살았죠. 그리고 희생하는 이들을 보며 이곳으로 와 사라지는 이들을 보며 또다시 살았습니다.”
“…….”
“당신이 신을 죽이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행동했던 건가. 그녀는 박쥐였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으로 찌르기만 하니 종잡을 수가 없던 것이다.
자유와 목숨. 하나는 갈망이며 하나는 집착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 둘 모두를 손에 넣었다.
말없이 그저 지켜보는 나를 보며 주홍색 눈이 휘어졌다.
“당신이 바란 것은 아닐지언정 결국 난 당신 덕분에 살았고, 미약하나마 분명한 자유를 손에 넣었지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공간에 장식되어 있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조각들이 빛의 입자를 뿌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보답할게요. 당신의 공간을, 사람으로서 살아가고픈 당신의 터전을 돌려줄게요.”
그녀가 눈을 감자 유난히 반짝이는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눈을 뜨자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반짝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언뜻 유리 조각이 빈자리를 메꾸며 달각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
예쁘다.
그러면서도 눈부셨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곳을 훑어보던 이호연이 뒤늦게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채고는 누군가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그는 말리며 다시 제 다리 위로 눕혔다. 쭉 뻗은 다리 위로 머리를 올린 채 눈을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내 반응에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넘겨 주며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여기 아까 거기예요. 우리가 그 이상한 공간으로 가기 전 있었던 곳. 그리고 지금 주변이 난장판이라 사람들이 정리하고 있고….”
무어라 더 말하려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에 봐 봐.”
“…네?”
“하늘, 하늘 좀 봐 봐.”
그제야 이호연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위로 돌렸다. 곧이어 그의 회색 눈이 놀람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눈을 휘며 웃었다.
동이 트는 하늘의 색은 신비로웠다. 어둑하게 푸르면서도 묘한 빛이 서린 것 같았다.
그것이 겨울에 알맞지 않은 따스한 햇살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푸르른 하늘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눈을 아리게 했다.
저렇게, 멀쩡한 하늘을… 기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던 하늘을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얼마 만인 걸까.
주변을 정리하던 사람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흠 하나 없이 매끄러운 하늘이었다. 동이 틈에도 어두운 곳 하나 드러나지 않는 온전한 하늘이었다.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찼다. 그 찬 기운에 서늘해지는 손을 잡는 이의 손이 있었다.
그 온기가 이것은 꿈도 환상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마음껏 안심할 수 있었다.
하늘이 참, 예쁘다고.
정말 다 끝났다고.
내가 정말, 서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