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
총성이 울렸다. 하얀 바닥 위로 잔금이 갔다. 이호연은 바닥을 밟고 기둥을 밟으며 그 공격을 피했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발을 디디려고 하는 부분마다 날 선 것들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것이 누구 짓인지야 뻔했다.
프레데터를 들어 다윈 쪽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붉은 기류는 어디선가 날아든 하늘 조각으로 인해 막혀 버렸다.
마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묘한 원망이 서린 듯한 알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죽어! 죽어! 죽어!”
다윈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스티브 때와는 달리 금속의 움직임은 체계적이지 못했고 그 영향은 신전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신전 자체가 스티브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였다. 그 힘의 주체자가 날뛰는 순간부터 무너지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물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신전의 가장자리를 훑으며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용의 모습을 한 괴물이 바다를 가르며 튀어나왔다.
그것을 반쯤 무너진 꼴이 된 기둥에 감기고 훑으며 이호연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미치겠네, 진짜.”
개판이었다. 진짜 이런 개판에 막장은 없을 것이다.
들고 있던 단검을 놓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페널티 있는 무기보다는 익숙하고 활용도 놓은 것을 써야 했다.
프레데터를 삼킴과 동시에 류를 내민 그림자는 곧게 뻗어지는 그 모습 그대로 다윈을 향해 날아들었다.
괴성을 지르며 괴물과 함께 이호연에게 달려들기 바쁜 다윈에게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림자가 제 몸을 꿰뚫을 때까지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착각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림자에 꿰뚫렸던 몸이 재생하는 것이 보였다.
새살이 돋고, 흉터조차 남지 않고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그런 그의 몸에 남겨진 흔적은 오로지 스티브의 몸에 새겨진 것과 같은 것들뿐이었다.
애초에 다윈은 능력은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몸이었다.
그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불길한 기분이 몸 뒤를 더듬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이.
제등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이 열리며 고온에 푸른 불이 흘러나왔다. 신전 안을 가득 메우며 바다와 함께 찰랑이는 불이 향한 곳은 괴물의 입 안이었다.
쩍 벌어진 입 안으로 불이 쏟아지는 광경은 불이 저것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저 괴물이 불을 내뱉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저번 그 괴물 뱀에게 이러한 방식이 통했던 것은 그것의 겉면만이 저 금속이기 때문이었다.
저 괴물이 그 뱀과 달리 오로지 그 금속으로만 만들어진 거라면….
“…….”
할 수 있는 게 있나?
귓속에 시끄러운 북이 쳤다. 눈은 길을 잃었고 벌어진 입은 막혔다.
혼란한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 명뿐. 웃는 낯의 남자가 손을 들고, 그 손안에 담긴 총을 정확히 조준하고.
조준 당한 대상은 발이 묶였다. 상황이 나를 몰아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선택을 해야 해, 라고 변명하며 손을 들었다.
“…….”
“…저런.”
미적지근하게 식을 틈도 없이 곧바로 내게 튄 붉은색의 그것은 너무나 뜨거워서 되려 소름이 돋았다.
손끝에 느껴진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온몸의 감각들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손이 떨렸다.
검은 제등의 끝이 검은 옷을 꿰뚫고 삐쭉 튀어나왔다. 꿰뚫린 대상은 옷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미적거리더니만.”
“…….”
“결국 필요해지니까 곧바로 칼을 들이미는군요.”
아, 솔직히 나는 안도했다.
떨어지는 팔을 따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총구가 들썩이는 바닥을 따라 멀리 가서. 그로 인해 이호연이 죽을 확률이 낮아졌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안심했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어요.”
내 손에 의해 꿰뚫린 남자가, 걔가 죽지 않았다는 점이.
그리고 길을 잃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제등을 놓았다.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남자는 손을 들어 제 몸을 꿰뚫은 제등을 붙잡았고 곧바로 피어오르는 푸른 불을 제 물을 이용해 막아 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며 피 묻은 검은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내게 다시 쥐여 주었다.
“이것이 당신의 답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
“이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버릴 것인지 정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차마 내 입으로는 할 수가 없는 대답을 종용하는 질문.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그는 웃었다.
“방해 못 하게 내보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전을 에워싸던 하늘 조각에 빈틈이 생겼다. 제 몸이 뜯기고 갈라져도 그런 것 모른다는 듯이 이호연에게 달려든 다윈은 기어이 그 틈새로 이호연을 끌고 밖으로 떨어졌다.
곧바로 용의 모습을 한 괴물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며 손이 움찔거렸지만 애써 참았다.
주변을 에워싼 하늘 조각의 빈 사이사이로 거대한 용의 모습을 한 괴물과 하얀 백호의 잔상이 보였다.
마티는 나를 이 제단 밖으로 내보낼 생각도, 이호연을 이 안에 들일 생각도 없다는 듯 벌려 놨던 틈새를 다시 닫았다.
나비는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내 팔을 붙잡았다. 질질 끌고 가 제단 위에 앉혔다. 나를 굽어보는 존재가 석상으로나마 있다는 것이 솔직히 말하면 기분 더러웠다.
“자, 그럼. 이제 신을 불러 볼까요?”
“…….”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당신은 용사가 되는 이야기. 내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걷는다면… 뭐, 당신에게도 그리 나쁠 것은 없을 거랍니다.”
“…넌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그는 내 질문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의미한 관심 표현이었다. 그의 보라색 눈은 조금의 흥미도 없다는 듯 온화함을 가장하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괜히 설치지 않았다면 하늘이 무너질 일도 없었고, 테오그라젠스가 이 세상에 간섭할 일도 없었어!”
“그건 그렇지요.”
“도대체 뭐 때문에!”
“글쎄요….”
“하….”
일을 이 지경까지 벌여놓고 글쎄요? 붙잡은 제단의 가장자리가 우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 의연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마…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군요.”
“…….”
“나락에서 비틀거리는 또 다른 하나를 경멸하면서도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는 그 오만하고도 잘나신 신께서…. 무너지고 망가져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앞에서 빌고 매달리는 꼴을 보고 싶거든요.”
“겨우 그딴 이유로….”
“겨우라니요. 내 오랜 소망인데.”
그는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툭 밀었다. 피에 젖은 상태로 굴러다니던 유리 조각을 찾아 내게로 돌아왔다.
레코디아가 들고 있던 물건이자 내가 자른 그의 손에 의해 붉게 젖어 버린 물건이었다. 그는 제단을 우그러트리는 내 손을 잡아 그것을 올려놓았다. 질척한 감촉이 손안에 맴돌았다.
“나는 믿어요. 당신이 기꺼이 신을 죽여 줄 것이라고. 그러니 자-.”
억지로 그것을 그러쥐게 만드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손안이 날카로운 것에 베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티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레코디아는 피 묻은 제 손목을 기다란 천 자락에 숨기며 창백한 낯으로 내 옆에 섰다.
날아간 반대 손과는 달리 멀쩡한 손에 하얀 성서 같은 것이 들리는 게 보였다. 그것이 펼쳐지자 수십 장의 낡은 종이들이 널리 펴졌다.
“어렵지 않아요. 그걸로 이 심장을 찌르고, 헤집고, 당신의 푸른 불을 흘러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겁니다.”
손이 떨렸다. 그런 내 손을 붙잡은 손이 억셌다.
날카로운 단면이 천천히 심장을 향해 움직이고 그것이 비록 나의 의지는 아닐지언정 그것을 행하는 것이 나의 손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돌리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평생을 놀아나고 마지막까지 놀아나는 것으로 끝날 그 누군가가 불쌍해서. 가여워서. 동질감 서린 죄책감이 어려서.
어두워진 하늘 아래 내 위로 드리워진 이의 그림자는 더더욱 새카맸다.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기이하게 빛나는 보라색의 눈을 찌르고 싶다가도 원래의 색이 떠올라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났다. 나는 너를 죽이고, 너는 내 손에 죽고. 네가 바라는 이야기는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는 운명에 잘도 놀아났고.
서서히 살을 파고드는 유리 조각과 그것을 붙잡은 내 손으로 느끼는 그 선뜩함. 네 몸을 차지한 존재가 짓는 웃음소리.
사락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에워싸는 종이와….
불.
“……!”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타오른 종이에서 짙은 탄내가 나고 눈을 따갑게 하는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종이를 태우고 살라 먹는 것은 푸른 불꽃.
고개를 틀었다. 내 뒤편에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불이 멋대로 날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 내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마.”
“…….”
“내가 말했잖아. 너랑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라고.”
불이 멋대로 춤추고 움직였다.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의 궤적을 좇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 같은 형태로 변한 푸른 불이 감겨버린 눈을 더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불의 흔적이 사라졌을 때 드러난 것은 하늘색의 눈동자와 옅어진 검은 나비 문신.
문신이 새겨진 쪽의 눈은 거멓게 죽은 보라색이었으나 그 반대편의 눈은 분명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난 나한테 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아.”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손을 놓으며 유리 조각을 빼앗아 들었다. 곧바로 몸을 튼 그는 불에 타는 종이를 혼란한 낯으로 보던 레코디아의 멱살을 잡아 제단 위로 넘어트렸다.
“그렇게 제물이 필요하면 너나 해, 그거.”
“……!”
쥬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레코디아의 심장을 향해 내리찍었다. 제단 위로 붉은 피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던 손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러나.
“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부드러운 갈색 눈에 기이하게 빛나는 보랏빛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보게 된 나는 익숙한 섬뜩함을 느끼며 곧바로 물러났다.
뚝뚝 떨어지는 피와 빈 공간을 헤매는 소매. 온화하던 낯에 묘한 독기가 서렸다.
“이런 식으로 밝혀지는 건 원치 않았는데 말이죠.”
보라색 눈동자가 내 발밑을 향해 굴러갔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불은 사라진 뒤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모르게 내 발밑을 훑어보았다.
분명 그림자가 멋대로 움직였고, 그 안에서부터 피어오른 푸른 불이 쥬의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그 영향으로 쥬는 제정신을 찾았고….
그 대신 제단 위에서 살해당한 레코디아의 몸으로 나비가, 들어섰다. 그리고 아마도 저것이 나비가 숨긴 능력일 것이다.
처음부터 저럴 목적으로 태어나게 한 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의 몸에 기생할 수 있는 저 능력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만약 저 능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라면….
“걱정 마.”
“…….”
“저 새끼가 기생할 수 있는 몸은 천공 섬의 주민들 한정이니까. 나야 뭐, 예외 사항이라 그런 거고.”
쥬는 그리 말하며 제 손에 묻어난 붉은 피를 옷자락에 훔쳤다. 흐릿하게 빛나는 물의 나비를 불러냈다.
여전히 그의 왼쪽 눈은 보랏빛이었다. 그러나 빛이 죽어 꺼멓게 변해 있었고 그와 반대되는 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네 눈,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나한테 신경 쓸 틈이 없을 텐데….”
그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나비 떼가 날아들며 시야를 가렸다. 나는 그것을 흘겨보다 손을 뻗어 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는 곧바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너한테 신경 쓰는 게 아니니까 똑바로 말해.”
발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가 허공에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쥬를 붙잡은 상태로 그 위에 올라탔다. 방금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붉은 구멍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얀 종이 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흩어지는 종이 더미 사이로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는 레코디아가… 아니, 그의 탈을 뒤집어쓴 나비가 보였다.
“…또 다른 하나.”
“……!”
“그 신은 한없이 자비롭고, 한없이 온화하며, 너그럽기에 그게 누구든 평등한 사랑을 나누어 주지.”
신전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하얀 종이가 온갖 배경을 흉내 내며 우리를 압박했다. 빈 백지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온갖 것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도 똑같이 기회를 준 것뿐이야.”
제등에서 흘러나온 푸른 불이 막 종이로 변하던 것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른 불꼬리를 흐트러트리며 날아들던 종이는 신전 기둥에 들러붙는 순간 불을 떨어트리며 다른 것으로 변했다,
“어차피 나비인 것은 같고, 그 본질의 능력도 같으니 어디 한번 나 또한 인도자가 되어 보라고.”
“그게-.”
“내가 걸을 길은 내가 정한다는 뜻이지. 이제 됐지? 놔.”
그는 손을 들어 내 손을 떨쳐냈다. 그림자 밖으로 떨어진 그를 향해 나비 떼가 날아들었고 그는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날아드는 종이로 인해 가려진 시야 저 너머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단발적이나 끊기지 않는 화약의 소리가.
그 탓인지 나를 향해 달려들던 공격이 조금 느려졌다. 그 잠깐의 틈을 타 고개를 들었다.
신전을 에워싼 하늘 조각의 빈틈으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거대한 용도 백호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의 소리만이 내 귀를 스치는 전부였다.
“…….”
싸우는 중이라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설마….
그 잠깐의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위안은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주세진이 오페리움으로 이쪽 상황을 보고 있을 터였다.
무엇이든 그려 내는 그 지도에 우리라고 그려져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비록 작은 점 따위로 표시된다고 해도 그려져 있기만 하면 살아 있다는 뜻이 되었다.
누구 하나가 죽었다면 주세진이 살아남은 한쪽을 자신의 옆으로 불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이호연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꽉 다문 이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상황이 어지러웠다. 이젠 테오그라젠스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저 미치광이 사도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상황이 되었다.
“…….”
차라리, 나비가 하려 하는 모든 일에 저지선을 긋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바라는 것을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명확했다. 신을 부르고 그 신을 이기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오만한 신이 제 앞에서 기는 것을 보는 것.
애당초 이 신전도, 나를 이곳까지 불러낸 것도 다 그것을 위한 초석이었다. 날 설득하는 것을 방해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도인 스티브를 죽여 버린 놈이었다.
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신전 안을 메운 종이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고, 그 백색의 종이가 온갖 것을 그려 내는 것도 멈춘 상태였다.
제등의 끝을 그림자 위로 긁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 위에 신전. 오로지 나 하나만을 노렸다 하는 것이 명백한 장소 선정.
하지만 정말로 나 하나를 겨냥해 곤란케 하고 손발을 묶고 싶었다면 바다가 아닌 도시 한복판에 일을 저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었다.
그것을 저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지키는 입장인 나는 불리해졌다. 그런데 그런 점 하나 이용해 먹지 못할 곳에 이 신전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신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 장소, 정확한 이 위치가 필요한 것. 혹은 도시 한복판에는 신전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
뭐가 됐든 간에 어쨌든 이 장소가 저 남자에게 꽤나 중요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손을 들어 기둥을 짚었다. 힘을 주자 그것은 우그러졌지만, 그것이 다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전은 여전히 묘했고, 저 아래 숨어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호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리 조각이 넘실거리며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정성스러움에서 봤을 때, 이 신전 자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니까.
들고 있던 제등을 놓았다. 그림자는 그것을 챙겨 들었고 반쯤 내뱉는다 싶을 정도로 프레데터를 내 손안에 쥐여 주었다.
익숙한 약간의 어질거림과 함께 붉은 기류가 넘실거렸다.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부수고 보자.
단검을 든 손을 내리쳤다. 붉은 기류가 칼날과 같은 모습으로 뻗어 나와 저 밑, 신전의 바닥을 박살 냈다.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 부분을 노려서인지, 그도 아니면 스티브가 죽은 이후 그 힘을 넘겨받은 다윈이 제대로 컨트롤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흔적 때문인지. 그 한 번으로 신전은 쉽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하얀 신전의 바닥 위로 물거품 치는 바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부수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나 침몰하면 곤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태를 유지해 주기는 해야 했다. 단검을 휘둘러 내 앞에 있는 기둥 두어 개를 더 부숴 먹은 뒤에 아공간 반지에서 빙결제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제단 곳곳으로 던졌다. 기둥은 상관없으니 바닥 쪽을 위주로 던졌다. 기술의 산물은 위대했다.
유동적인 바다의 움직임으로 인해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신전이 갈라지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으나, 덜컹거리며 움직일 뿐 얼음은 절대로 깨지거나 하지 않았다.
하얀 김을 뿜는 얼음덩어리들을 확인하며 발을 떼었다. 손안에서 피어오른 미약한 푸른 불티를 백색의 종이 위로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밟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하늘 조각 탓에 외부와는 단절된 탓인지 탁 트인 신전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안의 열기가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는 것 또한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것을 밟자 그전보다 훨씬 미끄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틈으로 바다에 빠질 뻔했다. 차라리 신발을 벗는 게 덜 미끄러울 듯싶었다.
신을 벗어 들자 양말을 뚫고 찬기가 느껴졌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발끝이 곱아드는 것을 참으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저 멀리, 제단의 주변에서 레코디아의 탈을 뒤집어쓴 자와 쥬가 설왕설래하는 것이 보였다. 탕탕거리는 총소리와 바다 내음에 희석된 피비린내가 나에게까지 닿는 것 같았다.
숨을 길게 내쉬자 하이얀 김이 흘러나왔다. 푸른 불로 인해 달구어졌던 열기는 금세 식어 버린 뒤였다.
“……?”
왜 금이?
밟고 있는 얼음에 금이 간 것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곳저곳 무너진 신전의 빈 곳을 메우고 있던 얼음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바다의 유동적인 물살 탓이 아니었다. 이건 그것보다 더 능동적인 것으로 인한 붕괴. 이 신전 자체의 움직임으로 인한 것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쿵쿵거리며 바닥을 찍고 올라오는 것을 반복했다. 여태껏 이 신전에 신경 쓰지 못하던 이가 새삼스레 이 신전을 움직이려고 하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호연.”
그의 이름은 하이얀 김과 함께 흩어졌다. 툭툭 튕겨 나가는 얼음 조각이 발등을 두들겼다. 마치 내게 빨리 뭐라도 해 보라고, 어서 움직이라고 재촉하듯이 말이다.
지금 당장 이 얼음이 무너지고 신전이 무너지면 되는 것이 없었다. 바다라는 내게 취약한 환경만이 남게 되는 거였다.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빙결제를 꺼냈다. 그것을 당장에 내가 서 있던 얼음 위에 뿌렸고 나머지를 대충 주변을 향해 던졌다.
빙결제의 수는 애초에 많지 않았다. 신전 안 이곳저곳에 던지기는 했지만 그건 수월한 이동을 위해서지 결코 완성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겨났다. 저 사이로 빠져 바다에 가라앉게 된다면 다시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는 뒷목이 서늘한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 떠올랐다.
신전이 점점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반이 얇은 얼음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그림자를 다리에 감았다. 얼음에서 떨어진 발이 신전의 바닥에 닿자마자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것의 옆 등을 밟아 뛰어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에선 그림자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따라온 그림자가 내가 밟을 지짐대가 되어 주었다.
저 밑의 인영들이 아주 자그마하게 보일 정도의 높이가 되었다.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비의 신경이 분산된 것은 확실했다.
신전 안을 메우던 종이의 수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그 결과 높은 자리에 서게 된 나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프레데터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것을 휘둘렀다.
검붉은 칼날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 기류가 더해질수록 이곳은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둥 중 하나가 내가 휘두른 프레데터의 검붉은 기운에 맞아 반쯤 잘려 나갔다.
역시 같은 재질이 아니라 완전히 베어 넘기는 것은 불가능한 듯했다. 부족한 절단력 대신 힘을 더하기로 했다. 얼음 위로 발이 닿자마자 검은 그림자를 팔에 감았다.
만약 중요한 것이 이 신전이라면 그 이유는 이 신전 바닥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일 것이다.
그것 말고 이곳에서 가장 위화감이 들고, 쓸데없고,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몸을 틀어 단도를 휘둘렀다. 얼음 조각과 함께 뒤집힌 신전의 바닥에서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바닥과 스테인드글라스는 별개의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금속 조각과 얼음 조각. 푸른 바다 아래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유리 공예품. 이 난리 속에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아름다움.
기둥에 들러붙은 얼음 위에 서서 그것의 그림을 훑어보았다. 난색과 한색. 두 인영. 손을 뻗는 자와…. 그 손을 잡으려 하지만 다른 손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나비의 짓이 분명한 성서의 종이가 내 앞을 막겠다는 듯 몰려들었다.
시야를 가리는 종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잘려 나간 종이들이 맥없이 날아다녔다.
왼쪽 눈 밑을 스쳐 지나간 종이에 베었는지 살짝 따끔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쥬의 나비 문신이 있는 자리라 괜히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먼 공격으로 인해 원치 않을 상황이 올까 싶어 제단 쪽으로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은 다른 신전 부근에 비해 멀쩡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신전 밖으로 쫓겨난 이호연과 다윈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그곳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꽤 좋지 못한 모습으로.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단 위에 눕혀져 있는 이와 그 위를 누르고 있는 이가 멀리서 봐도 명확했다.
저를 누르는 이의 하얀 옷자락 때문에 그의 검은 옷이 거의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 힘없는 팔이 휘적이며 총을 쏘려 했지만 그것이 상대에게 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남의 몸에 기생해서 잘도 힘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중심을 잡던 것을 관두고 뛰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만있는 것은 마티뿐이었다.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생각 자체가 없다는 듯 마티는 어딘가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러 보았다.
싸울 의지가 없을 뿐이지 죽은 생각이 있다는 건 아니라는 듯 그녀는 유리 조각 하나를 띄워 제게로 오는 공격을 막았다.
그런 마티를 잠시 노려보다 다시 발을 움직였다.
어느새 제단에 눕혀 짓누른 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입 안에 붉게 물든 종이를 문 나비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종이가 끝에서부터 바스러지며 붉은 재 같은 것을 흘리자 쥬의 얼굴에 새겨진 검은 나비 문신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저게 무슨 행위인지 모르겠으나 시간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곧바로 프레데터를 그를 향해 휘둘렀다.
나비는 고개를 틀었다.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의 절반이 잘려나갔지만 그의 목을 베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의 목 대신 잘려나간 붉은 종이의 끄트머리가 맥없이 쓰러졌다.
나비는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유한 얼굴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제 손 아래 놓인 쥬의 머리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예상했을까요. 설마 푸른 불의 잿더미 아래라는 게 말 그대로일 거라고.”
“…….”
역시 아까 멋대로 움직인 푸른 불은….
“그것도 ‘이쪽’에 숨어들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우리가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들어요.”
“……?”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쓸데없는 말을 들을 필요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검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잠시 비틀거릴 정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프레데터를 너무 오래 들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 것은 유효타였다.
하얀 바닥이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 몸에 아로새겨진 검상을 눈으로 훑으며 레코디아의 탈을 뒤집어쓴 나비는 제단을 굽어보는 테오그라젠스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지친 것인지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인지 나비에게 붙잡힌 쥬는 숨을 거칠게 내쉴 뿐 더 이상의 반항을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이 붉게 물든 문신과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야가 순간적으로 꺼멓게 죽었다. 하필이면 이때. 조금만 더 버티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고개를 바로 한 나비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색의 눈이 휘었다.
“당신은 왜 나를 막나요?”
“그걸 몰라서 물어?”
“이미 선택을 하지 않았나요?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품을지.”
“…….”
“나는 그런 당신을 도운 겁니다. 이제 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놓기는 싫잖아요? 그저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게 그리 나쁘고 그리 힘든가요? 이미….”
그는 말을 끌며 쥬의 앞섶에 묻은 피를 손끝으로 훑어 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와 쥬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반절은 버린 것 같은데. 어정쩡한 것 하나까지 가지려다 나머지를 다 잃는 도박은 하지 말아요. 더 나은 선택이 눈앞에 있지 않나요?”
“…….”
“도박을 함으로써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죽음 앞으로 밀어 넣는지 생각해 봐요. 안전한 길을 걸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켜 내는가를 생각해 봐요.”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무논리의 괴변이었다. 내 죄책감을 건드리려고 하는 우기기였다.
얌전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가 죽음에 가까워지는지 알라며 히죽이며 비꼬는 거였다.
이 와중에도 숨은 거칠어지고 시야가 어질거렸다. 이 이상 프레데터를 들고 있다가는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검을 놓지 않았다.
장인의 말이 영 껄끄럽기는 하나 어쨌든 이 검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 내가 죽지 않을 정도로 알아서 조절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가 뚝뚝 끊어지는 점성의 것처럼 단검에 매달렸다. 그것을 훑어보다 나비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내게서 눈 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낙원을 여세요. 신이 이 세상에 드리워지는 낙원을. 그리고 그 낙원을 끝내세요. 그것이 당신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다음이 없는 게, 문제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글쎄요. 낙원이 왜 낙원이겠나요. 누구나 간절히도 빌고 바라니 낙원 아니겠나요?”
“그럼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네. 난 네 그 잘난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네 미친 신의 낙원 따위 원하지 않으니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이 순간 그 낙원을 가장 바라는 것은 당신입니다.”
“…….”
“낙원. 그것은 누군가의 절망이자 누군가의 삶의 연장선. 그리고… 지금 당장은 당신이 바라는 행복의 연장선이겠군요.”
“……!”
설마.
괴성이 울렸다. 조용한 바다에서 홀로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었다. 신전 주변을 메운 하늘 조각이 너무 빽빽해 바깥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다 잇기도 전에 거대한 것이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몸이 뒤로 틀어졌다. 하늘 조각이 벌어지며 두 인영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물과 피로 범벅된 인영이 내동댕이쳐졌다. 그런 그를 끌고 온 장본인인 다윈은 피에 절은 모습으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해냈어! 내가! 스티브! 내가 해냈어! 우리가 이겼어! 컬린! 내가 이겼어!”
내 시선이 어디에 못 박혔는지를 확인한 나비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감싸 쥐는 손은 다정했으나 나는 물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
“살인자. 살해당하는 이를 지켜보는 방관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손에 쥐어진 프레데터를 빼낸 그는 그것을 놓았다. 붉은 칼이 하얀 신전의 바닥 위로 떨어졌다.
“애먹게 하고 있어.”
살의에 젖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쩍쩍 갈라진 손이 피에 절은 몸을 툭툭 치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에 살의가 깃드는 게 코앞이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후회가 세찬 파도처럼 내 몸을 적셨다.
그냥 혼자 올걸.
여기서 혼자 외롭게 죽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냥 혼자 올걸.
깊은 심해에 홀로 빠져 죽으면 이렇게 숨이 안 쉬어지고, 목이 메는 기분일까 싶었다. 온몸에 짜고 따가운 것이 들러붙는 것 같았다.
나비가 잡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내 시선은 미동 없는 하얀 머리카락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를 이끌어 제단 앞에 서게 한 나비는 무릎 꿇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우리의 옆으로 다가온 마티가 검은 베일을 쥬의 눈 위로 덮었다. 그의 손을 억지로 끌어 마치 신에게 빌 듯 손을 맞잡는 형태로 만들었다.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점점 가해지고 있었다.
“당신은 구심점. 당신의 존재가 신의 잔해를 모여들게 할 거고, 그렇게 완성된 신의 존재를 나비가 인도함으로써 이 세상의 낙원이 열릴 겁니다.”
“…….”
“굳이 따지자면 나비가 죽는 것이 더 중요한 초점이기는 하지만… 이왕 할 거라면 완벽한 게 좋은 거니까요.”
제단 앞에 서니 그제야 쥬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덮은 검은 베일 때문에 그런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건 맞는지, 의식이 있는 게 맞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간절하게 무언가를 기도하는 것 같은 모습이 내가 보았던 지난 모습들과 너무나 달라 낯설 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이미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내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또 몸을 뺏겨 얌전히 누운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애초에 죽지도 않는 것들을 상대로 나 혼자 뭘 어쩌겠다고 설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뭘 바라고, 대체 무슨 꿈에 빠져서….
한여름 밤에 꾸는 한순간의 꿈조차 이렇게 덧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말을 걸어야지.”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싫다 할 때는 그렇게 시끄럽게 속닥이던 이의 말이 이토록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무형과 같은, 미신이나 다름없을 뿐인 그 감이라는 게 간절해졌다.
그거라도 있으면 적어도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 게 가장 옳을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손끝에 닿는 온기에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눈을 뜬 쥬가 검은 베일 아래에서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는 오른쪽의 눈에 아직은 하늘색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나비 문신에 희미하게 푸른빛이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 빛을 흘릴 때면 그의 하늘색 눈동자도 점점 진해졌다.
흐려질락 말락 하는 시야로 그가 입을 벙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피 묻은 입술이 달싹였다.
아무것도.
그가 하고자 하는 바는 그 짧은 말이었다.
‘난 네 손에 죽을 생각 없어.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의 손에 휘둘려 죽기도 싫고. 나는,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그때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라는 그 말은….
검은 베일이 드리워져서일까. 어느새 깜깜한 하늘이 되어서 그런 걸까. 그의 얼굴이 유난히 가라앉아 보였다.
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의 가라앉음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보며 휘어지는 눈은 저 수많은 하늘 조각 중 하나에 걸린 초승달처럼 거짓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어둠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 거짓된 달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존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비도 마티도 그를 돌아보았다. 쥬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 나비의 목을 잡아채 제단 위로 찍어 눌렀다.
손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하얀 옷과 살을 태웠다. 보라색 눈은 흥미가 가신 듯이, 혹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의 몸에 기생하면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그가 반항하려 했으나 힘은 내가 우위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나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불사는 아니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 것이 사도였다. 이건 그냥…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한 길로 걷도록 몰아붙여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마티는 여전히 한 발자국 물러난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나비의 몸을 태우든 말든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쥬는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얼굴로 다윈의 옆으로 갔다.
그러고선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어 이호연의 몸에 손을 올렸다. 그런 쥬의 행동에 낯을 찌푸린 다윈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너 지금 뭐 하냐?”
“보면 몰라? 치료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그걸 왜!”
“그렇게 하라고 했거든. 레코디아가.”
레코디아라는 이름에 다윈의 행동이 멈추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쥬는 눈을 휘며 말을 이었다.
“걔가 그랬잖아. 사람 취급을 받고 싶으면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
“…그럼 나도 죽기 전에 한번은 옳은 일 좀 해 봐야지.”
그런 그의 말에 내게 붙잡힌 나비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통하기 마련이었고, 그 누군가가 다윈이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인 상황이었다.
침묵하던 다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비틀린 웃음을 짓던 쥬는 몸을 틀어 이호연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희미한 빛이 가끔 가다 낮의 하늘을 흉내 낸 하늘 조각 외에는 어둑한 이곳을 밝혔다. 다윈은 짜증과 혼란이 가미된 얼굴로 그 둘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얌전히 있는다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쾅쾅 굴렸고, 그나마 멀쩡하게 있던 기둥을 괜히 부숴 먹으며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소란에 나비와 마티의 시선이 저절로 다윈에게로 움직였다.
그런 그들과 달리 이호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나는 쥬가 몸을 낮춰 이호연의 귀에 무어라 속닥인 것을 보았다.
순간의 잔상 같은 아주 빠른 움직임이었다. 잘못 보았나 싶을 정도로.
“끝났으면 이만 놔주시겠습니까?”
“…….”
천천히 손을 떼었다. 불이 흩어지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비는 가소롭다는 듯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쥬는 천천히 내 쪽으로 향해 걸어왔다. 그는 제 어깨에 얹어져 있는 베일을 집더니 그것으로 내 눈을 가렸다.
반사적으로 손이 움찔거리는 내게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가만히 있어. 이번 한 번만 제발.”
“…….”
다 묶었는지 내게서 떨어지는 그에게서 희미한 라일락 향이 났다. 그 희미한 향보다도 흐릿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날 미워하지는 마.”
그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밀었다. 뒤로 비틀거리는 나를 보며 그는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내가 죽어야만 모든 것이 제대로 시작되고 끝나는 건 아니지. 내가 기원(起源)이라면 너는 종말(終末)이니. 어차피 비슷한 운명, 비슷한 위치인데.”
“잠깐, 지금 뭘 하려고….”
차분하던 나비의 목소리가 다급함으로 인해 거칠어졌다. 검은 자수로 만들어진 베일은 몇 겹을 겹쳤음에도 완전히 시야를 가릴 수는 없었다.
실의 사이사이로 나를 보며 웃는 쥬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비틀리고도, 거짓된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의 손으로 물의 나비가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더니 하나의 총을 만들어 냈다. 그는 그것을 들어 총구를 내 쪽으로 향했다.
쥬에게 손을 뻗던 나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뭘 하려고. 무슨 생각을 하길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믿지 못할 이의 말에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천히 움찔거리는 손을 보았으니까. 물과 피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으니까. 죽지 않았다는 그 확실한 움직임 때문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두고 나비는 내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지만 사실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내게 내밀어진 총구를 보니 생각났다.
살인자. 방관자.
그리고 살해당하는 본인.
앞서 말한 것들이 나는 모두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게, 정말로 이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공주님.”
“…….”
충분히 움직이고 반항할 수 있음에도 눈을 가린 베일을 벗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한 것을 바라는 저치가 나의 죽음 이후에도 과연 신을 부를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방식도 아닐뿐더러 신을 죽일 존재도 없게 된다면 그의 모든 계획은 산산이 부서지는 거였다. 내가 없다는 전제가 생긴다면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로 이게 가장 옳은 해결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주 오래전 의심이 함께 피어올랐다.
그렇잖아. ‘내’가 ‘나비’를 죽이게 하려고 일이 이렇게 되었다.
그래 맞아. ‘내’가 신을 죽일 수 있기에 이 모든 것을 나비는 계획한 거였어.
우리는 확실한 것 하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해질 사실 하나는 알았다. 나비는 절대 다시 테오그라젠스 아래로 스스로 기어들어 가지 않을 거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 신을 죽일 내가 없다면 테오그라젠스를 다시 불러내는 짓 또한 하지 않을 거라는 것. 나 하나만 없다면. 이토록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
개 같아…. 진짜.
몸에서 힘을 풀었다. 눈을 감았다. 끝까지 홀로 불행한 너를 나도 모르게 동정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이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임을 안다.
알아서 문제였다.
“난, 네가… 끝까지 불행하기를 바라.”
비슷한 운명. 비슷한 위치. 그러나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 내내 걸리던 너의 그 불행함과 억울함.
어느 날에 느꼈던 남들 힘들 때 홀로 몸 편한 것에 대한 불편함. 그래, 딱 그 정도였다. 너에게 걸리는 마음이란 그 정도밖에 안 됐다.
그러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감정일지라도 느꼈다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이번에도 나는 최악의 상황에서 나를 가장 먼저 버리는 선택을 했다. 원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숭고한 희생정신 따위가 아닌, 그냥 복잡해지는 세상에 살아남는 게 무서워 도망치는 겁쟁이였고, 여태껏 애써 생각하지 않고 묻어두었던 비난이 두려운 거였다.
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 하는 비난이.
적어도 그런 비난을 받을 일은 없겠구나 싶은 것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렇게, 이딴 식으로 죽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산 게 아니었는데. 나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내 바람을 위해서.”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고, 나를 향했지만 내게 닿지 않았다.
“아….”
왜 나는 항상 뒤늦은 후회를 하고 뒤늦게야 아는 걸까. 좋아하는 상대가 죽기를 바라지 아니함의 마음은 누구나 같은 거였다.
그게 비록 사물에게서 비롯된 마음일지라도 말이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솜털이 너무 여려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저절로 떠진 눈에 보이는 것은 이런 밤중엔 어울리지 않는 그런 하얗고 부드러운 민들레 홀씨였다.
내 눈을 가린 검은 베일 같은 검은 선들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베일의 자수와 섞여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별해 낼 수 없었지만, 이 민들레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손을 들었다. 떨리는 손이 베일을 끌어 내렸다. 사그라지는 그림자는 텅 비어 있었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민들레 홀씨는 끝이 없었다.
눈이 마주친 쥬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총을 든 손을 내리고 있었다.
“…….”
겨울에 민들레는 피지 않는다.
도리어 져 버리지.
발치에 떨어진 손잡이 없는 검은 색의 칼을 손에 쥐었다. 날이 선 그것에 눌린 손에서 피가 떨어졌지만 그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애당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야 이딴 일을 겪게 되고 이딴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끝없는 상실감에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나 때문에’라는 생각이 더 나를 깊은 곳으로 끌고 갈 뿐이었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해서? 이 지경에 와서야 포기한 내게 화가 나서?
그냥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을 서성이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바람을 이루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림자에 둘러싸인 부근이 천천히 부식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라면서도 떨리는 미소를 지은 쥬는 천천히 총을 재장전했다. 멍한 정신으로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말했잖아…. 차라리, 너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나비가 쥬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그런 그를 밀쳐 내며 다시 내게 총을 들이밀었다.
정신이 멍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하나.
…일부러였어.
그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얼굴.
일부러, 내가 총에 순순히 머리를 들이밀면 꼬마 도깨비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한 장난질.
손이 떨렸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길 잃은 분노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뒤흔들었다.
손에 들려져 있던 검은 날이 그림자로 변해 발밑에 스며들었다. 어느새 내 바로 옆으로 이동된 프레데터를 집어 그를 향해 던졌다.
제게로 날아오는 붉은 단도를 보면서도 그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도가 그의 어깨에 박히는 것과 그의 총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린 것은 동시였다.
맞았나? 아픈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뒤로 넘어간다는 것은 느껴졌다. 무너진 하얀 제단 아래 있는 것은 무섭도록 새까만 바다였다.
차라리 물에 잠겨 버리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처럼 새까만 차가움이 몸을 적셨다.
귀속을 파고드는 물소리 때문인지 머리가 정정 멍해졌다. 따가운 시야로 붉게 퍼져 나가는 피가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내가 뭘 본 거지? 왜, 가만있었지.
나도 모르는 새에 믿기라도 했나? 내 손에 죽기 싫은 상대가 취할 방법이 나를 죽이는 거라는 걸 정말 생각 못 했나?
내가 죽는 것이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는 걸, 그래서 나 하나 죽음으로써 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걸 진실로 믿었나?
…그 웃음이 정말로 거짓말 같은 거짓말이라서, 속아 넘어가기라도 했나.
아니야. 아니야. 그저 내가 이걸 바랐기에 다 망가진 걸지도 몰랐다.
그를 죽여 다시 한번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수많은 이들을 죽음을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가장 가까운 이부터 잃는, 홀로 울며 웃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결론이 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나의 욕심 때문에 다 망치고, 망가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다 싫어, 선택하지 못하는 내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이 바다가 말하는 것 같았다.
이다음이 무서웠다. 그냥 차라리, 이렇게 눈을 감고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 이렇게 사라지면 그러면 적어도 이다음은 없었다.
신으로 인해 망가지는 세상도, 우는 사람도, 앞에 서서 싸우는 나라는 다음이 없었다.
다음이, 없었다. 작은 친구와 함께하는 다음이….
입 속으로 들어오는 따끔한 것들이 나를 비난하는 이들의 말씨일까. 바닷물과 뒤섞여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돼 버리는 저 눈물은 누구의 알량한 죄책감인가.
감기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 물에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마음대로 눈을 감아서도 안 되는구나.
그것이 나를 구하고 싶어 하는 이를 보며 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트리는 것 같았다.
***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언제나 온유하던 자가 이렇게 큰 소리 내는 건 처음이다. 그는 그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손안에 쥔 총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종점을 찍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 푸른 불꽃은 없네? 네가 바라는 이야기의 기원은 없어. 종말뿐이지. 네 이야기는 끝났어.”
“…웃기지 마. 안 죽었어.”
“아니. 이미 이야기를 이끄는 인도자는 네가 아니라 나야.”
어깨의 아픔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로써, 그가 바라는 이야기는 완성될 터였다.
그녀도, 그도 이 이야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만 이로써 정말 끝이라는 사실이, 영원히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사이가 될 수 없는 종지부가 찍혔다는 것이 조금 슬플 뿐이었다.
그래, 아주 조금. 아주 조금.
***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어깨를 꾹 누르는 손이 아팠다. 아니, 다른 것이 더 아픈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
거대한 괴물의 사체 뒤에 숨어 내 옷을 끌어 내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흘러내린 도포 사이로 하얀 티셔츠가 붉게 젖어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바닷물의 끈적임과는 다른 궤의 끈적임이었다.
깜빡이는 시야로 울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더듬어 보았다. 평소와 달리 차가웠지만 살아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답 없는 작은 도깨비와는 달리 만져지고, 느껴지고, 살아 있었다.
다행이야, 다행인데….
그럼 나는, 다행이라고만 말하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피를 흘려서 그렇다. 이렇게 몸이 쳐지고 한없이 아득한 곳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래서다.
자꾸만, 자꾸만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것도.
“…….”
마음대로 정신을 놓지도 못하게 하는 그가 미웠다. 애틋했다. 싫었다. 안도했다. 나는, 난…. 왜 나만 자꾸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아픈 데는 없어?’
‘울지 마. 나는….’
내뱉어야 하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네가 하는 말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에 들어간 물이 다 빠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다.
벙긋거리는 그의 입은 보였지만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니 뜨거운 물이 귓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감각이 소름 돋았다.
마치 현실로 끌려 나오는 것과 비슷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왜 네가 사과하느냐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차마 나오지를 않았다. 이런 내가 한없이 나쁜 사람인 것 같다가도 어쩔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원망은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허우룩한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니, 이런 상황이라 이제는 볼 수 없는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할 시간도 없고, 그리워하지도 못하고, 이 슬픔을 미뤄 놔야 하는구나.
이렇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마비된 건지 몸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다시 앉히는 손길이 애처로웠으나 그것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손을 늘어뜨려 그림자 위를 더듬어 보았다. 허공을 휘젓는 것도 이렇게 덧없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모르겠어.”
“…….”
“바다에 너무 오랫동안 빠져 있었나 봐. 지금도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아.”
나를 끌어안는 몸을 마주 안아 줄 힘이 없었다. 몸에 고이고 고인 물이 뜨겁게 달아올라 흘러내렸다. 바닷물을 많이 삼킨 듯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것이 입가를 스쳤다. 스치기만 했는데도 짰다. 짜고 아픈 맛이었다. 발치에서 찰랑거리는 바다의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울음을 삼키는 것은 언제나 목을 아프게 만들었다.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이 그제야 입을 열게 해 주었다.
“…네가, 살아서 다행이야.”
이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물과 같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깨끗한 물속에서 살 수 없는 물고기였다. 그래서 그 진실을 말하면서도 아팠다.
정말로.
언제 잃어버렸는지 또다시 텅 비어 버린 어깨를 더듬었다. 빈자리가 이번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져 사라진 두루마기의 행적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영영 볼 수 없게 된 것에 관하여 그렇구나… 하며 넘겨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텅 비어 버린 사람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힘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밀어냈다. 옷을 바로 하고, 기껏 갖고 온 것이 무색하게 잃어버리고 만 프레데터 대신에 류를 손에 쥐었다.
잠시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일어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뜨겁게 울컥거리며 피를 뿜어내는 어깨의 상처가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붉음을 눈에 담으며 마치 암시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자기 최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안 죽었어. 안 죽었어. 안 끝났어.
애초에 도깨비는 무생물에 깃든 허상의 요정 같은 거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평범한 검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 이 모든 게 다 끝나고 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처럼, 내가 다시 불러내면 다 해결될 거다. 지금은 그 생각만 해야 했다. 실패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됐다.
그러니까 제발 좀. 멀쩡하게 움직이란 말이야.
몇 걸음 떼자마자 몸이 앞으로 비틀거렸다. 괴물의 사체를 붙잡아 팔에 힘을 주었다.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이럴 시간 없었다.
빨리, 빨리 뭐든… 해야….
“……!”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부축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호연 또한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물리적인 무언가가 몸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가장 미약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때와 비슷했다.
누군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사람의 시선 같은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존재의 시선이 이토록 살 떨리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리가 없었다.
힘이 풀린 손에서 제등이 떨어졌다. 발치로 굴러떨어진 제등의 구슬 장식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다시 몸을 낮춰 제등을 집었지만, 다시 몸을 일으킬 엄두가 안 났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울리는 소음이라고 해 봤자 파도가 부서지는 비명만이 유일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그 비명을 뚫고 울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유리 따위가 아니라 세상이 무너지는 소음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왜?”
‘나비’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레코디아는 언제나 차선책을 준비해 둔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몸을 차지한 것 또한 일단은 ‘나비’였다.
신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아직 가루가 되지 않은 제단의 위에서 히죽이며 웃는 남자가 보였다. 손에는 유리 조각을 들고 제 가슴을 찌른 작자가. 아마빛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나비’가.
나비의 죽음, 그리고 제물.
저 신전의 재료는 스티브의 몸과도 같은 금속. 다르게 생각한다면 저 신전도 스티브의 몸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신전에서. 마치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과도 같이.
조건은 이뤄졌다. 신의 사도 둘의 죽음은 제물이 되고, 기생이라 할지라도 나비가 스며든 심장이 한 번 더 바쳐졌다.
불완전한 조건. 그러나 실패는 아닌 방식.
그것의 결과물은 무너지는 하늘.
어느 날 시작된 재앙의 전조처럼 하얀 선이 하늘 위로 그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조각들이 바다에 퐁당퐁당 빠졌다. 그 빈자리에 드러난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밤하늘이나, 심해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완전한 어둠.
불러냈구나. 푸른 불꽃도, 나비도 없이.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낸 거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뭐 그리 대단한 것을 이루겠다고. 왜 이렇게 나를 가만두지 않는 걸까.
제단에서 흘러나온 수백 마리의 물의 나비가 하늘의 구멍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장관이라고 할 법한 모습이었다.
어둠밖에 남지 않은 밤하늘. 그 위를 별 대신 헤매는 빛의 물 나비.
흐릿한 빛을 반사하는 물의 나비들은 반짝거리며 신을 안내했다.
아득하다는 표현이 지금의 상황에 가장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거대한 해일을 마주 보는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거목을 올려다보는 것과도 같았다.
사람인 이상, 아니, 이 땅 위에서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이상 이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한없이 무기력한 무언가가 된 기분으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뻥 뚫린 구멍으로 흐릿한 손이 내밀어졌다. 눈으로 보기에도 불완전한 그것은 그 완전하지 않은 모습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진짜 신의 모습이라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히 반항심을 가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주의 미아가 된 것 같은 스스로의 하찮음을 끌어내는 저 존재가.
내가, 이기고자 한 상대라고.
시스템 창의 장난스러움은 그저 신의 따분한 유흥이었을 뿐이었다. 그 가벼움과 내가 신을 죽였다는 미래의 일면 하나로 나는 기고만장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저런 건 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허공을 휘젓던 손이 저가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어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또한 그건 정답게 굽어보는 자애로운 종류의 느낌도 아니었다. 무엇을, 어떤 하찮은 것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까 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다리가 떨렸다. 손이, 입술이,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겨울날 바다에 빠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 명백하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였다.
망량신(魍魎神)이라 불리며 저 존재를 막아 냈다는 푸른 불꽃이, 내가 되어야 할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못 해. 그런 거. 나는, 못 해.
그런 내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신은 웃었다.
얼굴을 가리는 그 천 사이로 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이 세상 전부를 감싸 에워싸는 하늘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그 웃음 한 번에 밤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이 거세게 움직이고, 흐릿하게나마 빛나던 별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파도의 비명은 이제 절규가 되어 이 바다를 울렸다.
“…윽.”
“……!”
얼굴 옆에서 푸른 불이 번쩍였다. 그제야 시선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손을 움찔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호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서는 살 익는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제야 그의 손에 검은 제등이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내 물음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스스로에게 정신 차리라고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당혹스러움에 입을 열자, 내 행동을 저지하던 모든 것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몸의 자유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그것을 몸소 느껴 보니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했다. 다시 고개를 들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이호연의 손목을 잡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은 분명 불에 덴 상처였다. 그 상처를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도망쳐야 해.
내쉬는 숨 한 번에, 내뱉는 숨 한 번에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멀리멀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다.
여기서 도망가지 못하면 죽게 될 거야. 그게 나든 눈앞의 이호연이든, 둘 다든. 죽을 거야.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제등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낯설지 않은 것이 나타났다.
[너]
“……!”
시스템 메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는지 이호연 또한 몸을 움찔거리며 시스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ㄹ 부ㄹ꽃]
[내놔]
[네가 숨ㄱㄴ 또 ⑇른 하나를 내놔]
[내놔]
[내놔]
[내놔]
[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
반복되는 글자들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의구심이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의문.
설마….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여전히 하늘 뒤에 숨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
상황이 어지러워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 또 다른 하나는 내 불그림자 아래 숨어 있었다.
쥬의 몸에 기생해 있던 나비를 쫓아낼 정도의 힘은 가진 상태로 말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테오그라젠스가 또 다른 하나를 얻지 못했다. 즉, 무료한 신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또한 저 신은, 온전히 하늘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건 아마도 내가, 푸른 불꽃이 나비를 죽여야만 열린다는 낙원의 예언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가 있든 없든, 결국 테오그라젠스를 푸른 불꽃이 불러내지 않으면 온전히 불러낼 수가 없는 거였다.
불완전한 신을 한곳으로 모으는 건 구심점인 푸른 불꽃이니까.
가능성은, 있다.
손을 들어 어깨의 상처를 더듬었다. 여전히 피가 나는 그것은 아무리 치료해 보려 해도 낫지 않았다. 총알이 박히지도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말이다.
손에 묻어나는 벌건 피를 보며 생각했다.
확인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걸 어서 빨리 찾아내야 한다고.
저것을 어떻게 해야 죽이지 않고 없앨 수가 있는 것인지. 적어도… 사도라면. 그래 그 잘나신 신의 첫 번째 종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생을 저 신을 죽이는 것에 목표를 둔 나비라면… 알 것이다.
비록 저 스스로를 바치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이 나비라는 존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쥬에게 심장이 꿰뚫린 레코디아의 몸에 기생한 거였다. 죽은 몸에도 기생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으니 이미 죽은 몸을 한 번 더 찌른 것 정도로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손에 끼워 두었던 반지를 빼냈다. 떨리는 손이 그것을 놓쳤지만, 다행히 바다에 빠지기 전에 이호연이 낚아챘다.
반사적으로 잡았을 뿐인지 그의 손 또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호연은 망설이는 얼굴로 반지를 손안에 감추었다. 그 자신도 본인의 행동에 놀랐다는 듯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말했다.
“…왜, 여기 왔는지 잊지 말자.”
“…….”
왜 우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여기서 도망도 못 가고 이러고 있는지.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내 손 위에 안착한 반지 위로 익숙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얼마 안 남은 빙결제를 끄집어냈다. 손을 덜덜 떠는 나 대신 이호연이 그것을 받아 들어 집어 던졌다. 병에서 쏟아져 나온 액체가 바다를 얼렸다.
저것을 밟고, 제단으로 올라갈 거다. 가서 때리든 패든 해서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끝낼 것이다. 전부 다.
제단 위에 누워 있는 ‘레코디아’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몸을 웅크린 마티와 다윈… 바짝 굳은 채 하늘만 바라보는 쥬가, 보였다.
“…….”
처음부터, 그냥 처음 아니… 두 번째 만남에서라도 죽였더라면. 괜한 죄책감과 울렁이는 인간성 같은 거에 지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었다면….
아직도 떠오르고자 마음먹는다면 당장에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르작거리는 움직임과 숨결과 힘이 들어가던 목.
내가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이의 모든 것이. 그리고 상대도 기억할 것이다. 나를 죽이는 이의 모든 것을.
어쩌면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어, 하고.
‘내가 말했잖아…. 차라리, 너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냥 너를 죽였어야 했어. 아는 사이만도 못한 그게 뭐 그리 마음에 걸려서 멍청하게 굴었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뭐가 바뀌는 걸까.
태풍이 부는 바다처럼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깨끗하던 밤하늘은 언제 그렇게 맑았냐는 듯 흐릿해져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을 적시는 빗방울이 눅눅하면서도 시렸다.
우리가 만든 얼음이 거칠게 바다 위를 유영했다. 지금 밟고 선 괴물의 사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중심을 잃고 바다에 빠질 수준이었다.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그림자를 다리에 감았다. 내 다리와 발목, 발을 빙빙 감은 그림자는 그 상태로 길게 늘어져 최대한 얼음덩어리에 가깝게 몸을 뺏다.
질질 끌리는 제등의 등이 활짝 열렸다. 푸른 불꽃이 쏟아져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밝혔다. 자꾸만 굳어 버리는 몸을 애써 움직이며 달렸다.
그림자의 끝에 있는 것은 새까만 바다였다. 그것은 밤에 젖고, 신의 분노에 젖은, 결코 내 편이라 부를 수 없는 자연이었다.
바다가 거칠어서 그런가. 아니면 미지의 힘이 개입이라도 한 걸까.
스티브나 다윈의 공격에도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굳건하던 빙결제의 얼음덩어리가 밟는 순간 쉽게 으스러졌다.
바다에 발 한쪽을 빠트리는 내 팔을 이호연이 재빨리 낚아챘다. 순식간에 무릎이 바다에 잠겼다. 발끝부터 시작해 온몸이 어는 것 같았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시야를 가렸다. 뺨에 들러붙는 감촉이 거슬렸다. 출렁이는 바다의 물살을 따라 시야도 함께 어질거렸다.
어쩌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소금기가 남은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깨끗한 얼음 위로 점점이 묻어나는 빨간색이 선명했다.
난파된 뗏목처럼 거칠게 움직이는 얼음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짚고 일어서는 자리에 묻어나 있던 피는 물살에 휩쓸려 쉽게 지워졌다.
“아직, 움직이지 마….”
이호연의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등을 들어 얼음 위로 내리쳤다. 깊숙이 박힌 제등에 매달려 등 안에 깃든 푸른 불을 할 수 있는 만큼 끄집어냈다.
해일보다도 거대한 푸른 불이 하늘을 덮기 위해 움직였다. 세상이 불타오르는 광경도 이 정도로 열기에 젖지는 않을 터였다. 빗소리와 불의 타닥임이 섞여 들어갔다.
수증기가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어느 것이 비구름이고 어느 것이 수증기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카맣게 물들었던 바다는 푸른 불을 반사하며 푸르게 빛났다. 어디서부터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불길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발에 힘을 주어 다시 제등을 빼냈다. 이제 발이 시린 것 정도는 아무런 고통이 되지 않았다.
주변을 에워싼 푸른 불은 비를 막았고 거친 바람을 막아 냈다. 비교적 전보다 잔잔해진 해류를 눈에 담으며 마지막 남은 빙결제를 던졌다.
제단의 끄트머리에 닿은 그것은 튕겨 나가며 바다에 떨어졌다. 길게 이어진 얼음의 길을 보며, 저 불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신의 시야를 견뎠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들이 바르작거리는 걸 친히 지켜보며 뜸을 들이는 듯한 그 시선을.
미끄러운 얼음 길 끝에 다다른 제단. 하이얀 입김을 흘리며 굳어 있던 쥬는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으나 나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시린 맨발에 타인의 옷자락이 밟혔다.
“…진짜, 너는 세상에 다신 없을 미친놈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신에게 바쳐지는 것들은, 죽은 것도 있고 산 것도 있었지만 살아 있던 무언가라는 것에서 궤를 달리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아하고 새하얀 제단. 저들의 신 테오그라젠스가 굽어보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자.
물과 피에 뒤섞인 갈색 머리가 얼굴을 덮었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늘어트려진 절반이 잘려 나간 갈색 머리라든가, 피에 물든 하얀 천 자락 같은 옷은 익숙했다. 저 껍데기 안에 든 것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지만.
손끝이 굳어 갔다. 단순히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나를 지켜보는 신의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몸을 굳히고 걸음을 망설이게 하는 감정의 이름은 아연함에 가까웠다. 이건, 몰이해적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제 심장에 박아넣은 유리 조각을 쥔 섬세한 손은 끝까지 그것을 놓지 않았다. 저 스스로를 죽이는 손이었다.
그 어떤 신도, 제 종을 바쳐 부르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종이 스스로를 바치는 거였다면, 그래도 부름에 응하지 않았어야 했다.
무료한 신은 그 예외였다. 그리고 저 종도 그에 따라 정상은 아니었다.
손을 뻗어 ‘레코디아’의 몸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었다. 날카로운 단면에 그것을 쥔 손 안쪽이 따끔거렸으나 그리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을 대충 바다로 던졌다. 미동 없이 누운 이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말해.”
“…무엇을?”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닿은 몸은 차가웠다. 몸은 죽었지만, 말을 했다. 그는 하나 남은 팔을 들어 내가 그런 것처럼 내 옷자락을 쥐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머리 색과 같은 아마색이었다.
“……!”
“무엇을, 바라나요, 당신은….”
“…….”
레코디아? 아니야, 눈이….
흐릿한 갈색 눈은 보랏빛으로 물들다가도 다시 가라앉았다. ‘나비’가 스스로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인한 형상인 듯했다.
어쨌든 상대가 나비가 아닌 레코디아라면… 오히려 이쪽이 좋을지도 몰랐다.
“…너. 네 입으로 말했지.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거라고. 그리고 너는… 그래서, 사람이 맞다고.”
“…….”
“해 봐, 한번. 말해. 내가 신을 죽이는 방법이든 모시는 방법이든. 네가 생각하는 그 옳다는 일 좀 해 보라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레코디아는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스스로… 무엇인지 알아, 야 합니다. 왜 그가 푸른 불꽃을, 구심점을 바랐는지… 왜 당신이, 예언을… 더 생각, 구심점….”
“…….”
눈이…. 보라색으로 물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실패한 이유를… 왜 신은 이런 선택을 했, 는지… 그분은 이미….”
“이제 그만.”
“……!”
크게 벌어진 눈이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절반이 넘게 차올랐던 보랏빛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손에서 힘을 풀자 레코디아는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 그의 뒤로 지독한 화약 냄새가 났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총구를 내리는 쥬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내게로 걸어와 레코디아의 옷자락을 쥐었다. 힘주어 잡아당기더니 그를 다시 제단 위로 눕혔다.
여태껏 말 한마디 없던 마티가 비척비척 다가왔다. 멍한 주홍 눈이 제단 위에 바쳐진 자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멀뚱히 지켜보았고, 눈을 감았다. 그게 끝이었다. 마티도 다윈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갈색 눈 위로 손을 덮어 그 눈을 감겨준 자는 거짓말 같은 그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그는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살아 있었네?”
“…….”
“심장을 노렸는데…. 검이 박히는 바람에 빗나갔나 보다.”
“너…. 뭘 한 거야.”
“뭐가? 아, 이거?”
쥬의 손이 단정한 얼굴에서 떨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맞춰 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내려 하얀 바닥을 물들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네가 아니면 신을 불러낼 놈이 얘라고. 사도란 그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들이거든.”
“…….”
“봤잖아. 뭐가 바쳐졌는지. 그 목숨 정도라면 불완전하게나마 신을 부를 수 있다는 거지. 그러면서 나만 죽으라고 하고 말이야….”
짐짓 억울하다는 말투였다. 그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니 속에서부터 차오른 감정이 울컥거렸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미친 새끼. 너, 진짜 미쳤구나?”
그는 내 말을 웃는 얼굴로 받아쳤다. 사그라지는 불이 다시 등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비가 몸을 다시 적시기 시작했다.
웅장하게까지 들리는 빗소리 사이로 쥬는 말했다.
“넌 욕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뭐가 됐든, 내가 널 그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거잖아? 좋겠다? 넌 이제 자유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니면. 뭐, 날 죽이기라도 했을 거야? 날 죽이고 싶었어? 살인이 기꺼워?”
“…….”
“거봐. 아니면서. 너도 은근히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라니까. 뭐 나야 네가 쓸데없이 정의감이 넘치지도, 의무감에 목매지도 않아서 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지만.”
몸을 움찔거리는 나를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감정에 취해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 걸까.
봤으면서. 자신의 총이 무엇에 맞았는지 봤으면서, 일부러 그랬으면서 어떻게….
지금 그는 날 도발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분히 고의적으로.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속을 긁어내고 할퀴고 있었다.
그건 끝도 없이 불행해지라 저주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보며 그는 입꼬리를 내렸다. 손안에 총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것을 나를 향해 들었다.
“그냥 집이나 가지 그랬어. 옛날처럼 네가 좋아하는 도망이나 가지 왜 굳이 여길 기어 와? 왜, 이번에는 네 옆에 걔가 대신 총 맞아 줄 것 같아?”
이 정도면 그냥 내게 죽여 달라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흥분해서는 안 된다. 침착하게, 과하게 감정에 얽매지 말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일부러. 나를 더 자극하려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멀거니 듣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나를 붙잡은 손을 떨쳐 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나를 보며 쥬는 껄렁껄렁 들고 있던 총을 제대로 잡았다.
그의 손이 걸쇠를 잡아당기기 직전, 내가 그를 붙잡기 직전. 방해하는 이가 없었다면 그다음이 어떻게 됐을지야 뻔했다.
그러나 그 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악!”
“……!”
“……!”
제단의 바닥이 갈라지며 다윈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제 몸만 한 거대한 검을 내게로 휘둘렀다.
내가 뭔가를 반응하기도 전에 총소리가 울렸다. 다윈의 광기에 젖은 눈에 분노가 서렸다. 금이 간 얼굴과 몸처럼 그의 팔에도 금이 갔다.
“남의 싸움에 끼어들지 마!”
쥬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몸을 틀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제등이 손의 움직임에 따라 그 몸을 돌렸다. 등에서 흘러나온 푸른 불이 제등의 몸 전체를 감쌌다.
허리를 비틀고, 다리에는 힘을 주었다. 어깨와 팔, 내뻗는 몸 모두에 힘이 들어갔다.
길게 꼬리를 빼는 제등의 구슬 장식이 거칠게 움직인 것은 검은 나무가 다윈의 팔에 꽂히는 순간이었다.
금이 간 팔 위로 박힌 제등은 그대로 바닥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와 뒤섞여 다윈을 묶어두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다시 내게로 총구를 돌리는 쥬에게 달려들었다.
총성이 울렸다. 몸을 낮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총을 피했다. 손을 뻗어 검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붙잡은 멱살을 힘주어 잡으니 손톱 끝이 조금 아팠다.
그 상태로 그를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힘 빠진 팔이 맥없이 흔들거렸고, 조준을 잃은 눈먼 총알은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너.”
“…….”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이 어찌나 곧은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게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잠깐 움직인 것만으로 숨이 거칠어졌다.
이대로 손에 힘만 줘도 그는 질식사였다. 더한 힘을 준다면 목이 부러질 터였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누른 무릎이 아직도 시렸다. 그와 반대되는 감정들이 울컥거리며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을 흘겨보는 그의 얼굴을 적셨다.
제 얼굴로 떨어지는 것에 눈을 움찔거린 그는 색이 변해 가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죽여 버리고 싶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얕은 기침을 내뱉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정말로 원하면 기꺼이 죽어 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의 감정이 다시 속에서 피어올랐다. 내가 왜 죽이지 않았었는지. 내가 왜, 어떤 심정으로 당장의 평화를 추구했었는지.
다시 떠진 그의 왼쪽 눈은 다시 하늘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 마치, 그 자신은 운명에서… 나비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듯이.
“죽여.”
“…….”
“…죽일 수 있으면.”
그래서, 차마 그 이상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게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손에서 힘을 푸는 나를 그는 고요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제 목을 더듬으며 말했다.
“넌 나 못 죽여.”
“…….”
“네가, 정말로 사람이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정말로 다 놔 버리고 죽겠다 결심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그는 손을 들어 나를 툭 밀었다.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지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우린 재수 없게 걸려서 이 일에 휘말린 거였어.”
“…….”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인 놈이 끝도 책임져야지.”
“…뭐?”
어느새 바로 선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얗고 곧은 손이 나를 가리켰다.
“푸른 불꽃.”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나비. 우리 둘 다, 결국은 온전해지지 않았지. 그런데 신 테오그라젠스는 불완전하나마 이곳에 나타났어.”
“…….”
“똑같이 불완전한 두 존재가 있다면, 이 세상의 신은 누구를 선택할까. 온전해진 적도, 경험도 없는 너? 아니면 자신의 힘 스스로 망량신이라 불리는 자리에 오른 존재?”
그의 말을 들을수록 손이 움츠러들었다. 불길한 생각이 비와 함께 몸을 적셨다.
“어느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대한다는 건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공평하게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또 다른 하나는 테오그라젠스의 편이 아니지만 네 편도 아니라는 뜻이지.”
“…….”
“그 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없어. 그저 공평히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사도가 그 목숨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면, 그 목숨으로 멸망을 막을 존재를 불러내는 것처럼. 똑같은 대가를 받아 가는 거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제단 위에 고요히 누워 있던 레코디아의 모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건 흙으로 만든 자기가 깨지는 것과도 같았다
목숨으로 신을 부르고, 남은 것들을 한데 모아 또 다른 존재를 불러내야만 하는 두 신의 아래 놀아난 자의 최후였다.
“길은 트였어. 그 꼬마 도깨비가 길의 초석이었고.”
“…….”
“네… 목숨 값이자 운명이라는 길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노잣돈이야.”
일부러 그런 게 맞았구나… 역시.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누군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너무 익숙한 손길이었다.
나를 쥬에게서 떨어트린 이호연은 솟아오르는 칼날을 피해 아직 남아 있는 얼음덩이 위로 올라왔다.
눈을 돌리니 그림자의 줄기에서 기어 나오는 중인 다윈이 보였다. 내가 쥬와 한바탕 하는 사이 그 또한 다윈과 싸움이 있었는지 손에 열기가 남은 피가 묻어났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에 집중했다. 뭔가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내게 있어선, 내 손으로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내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 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 이유를 영원히 모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제물은 바쳐졌고, 신은…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할 푸른 불꽃으로.
“……!”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이호연이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막혔던 숨이 한 번에 터지는 것처럼 거친 기침이 나왔다.
“…류!”
“…….”
시꺼먼 피가 손에 묻어 나왔다. 잔기침을 하는 내내 나는 그 검은 것을 뱉어 냈다. 등을 두들기는 손이 다급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간절했다.
정신없이 기침하는 사이에도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주인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으아아악!”
쇠를 긁는 것 같은 거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매에 피를 문질러 닦으며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제등에 박힌 제 팔을 벅벅 긁어내는 다윈의 몸에 금이 늘어나고 있었다. 발끝부터 쪼개지는 몸을 보는 그의 눈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
류는, 마치 다윈의 생명을 삼키는 것처럼 위험스럽게 푸른 빛을 흘렸다. 등이 흔들거리며 비명과는 맞지 않는 맑은 소리를 냈다.
제등의 주변에 검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지켜만 보던 신의 시선 또한 집요해짐을 느꼈다. 다시 굳어 가는 손에 애써 힘을 주었다.
“저건….”
“죽…었어?”
내 물음에 이호연은 답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어서였다. 조각난 철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제등은 저 홀로 고요할 뿐이었다.
저 생명이라곤 느낄 수 없는 철이 우리를 위협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던 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
“……!”
몸이 기울어졌다. 얼음을 붙잡아 중심을 잡은 이호연이 자꾸만 검은 피를 뱉어 내는 나를 부축했다.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신전과 제단의 흔적들이 스티브에 이어 다윈마저 죽어버리자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이 모든 상황을 멍하니 지켜만 보던 마티는 신전 주위를 맴돌던 하늘 조각을 거두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이호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얼음 대신 밟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마땅한 것이 없었다. 빙결제는 이제 없고, 이대로 모든 것이 바다에 빠져 사라지면 그림자도 쓰지 못한다.
지금 내 상태로는 공중에 떠다닐 불티 하나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할 것이다. 이호연의 바람 능력을 믿자니 가까이 붙어선 그에게서 나는 피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욱.”
이 정도면 온몸의 피를 게워 내는 수준이었다. 드리워진 그림자와 한데 엉키는 검은 피를 볼수록 시야가 흐려졌다. 대체 뭐가 문제여서….
“…….”
이것도 그건가. 제물. 레코디아의 목숨은 똑같이 목숨으로. 스티브는 다윈으로. 그럼 이제 남은 건… 나인가.
흐릿해지는 시야로 바다의 물결 사이로 사라지는 제등이 보였다. 언뜻 주변을 배회하는 검은 기류가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처럼 보인 것 같았다.
몸을 아프게 적시는 비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다. 조금 뒤면 바다에 빠져 비에 젖은 것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겠구나 싶었다.
이호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나마 남은 기둥을 향해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이 기둥에 닿고 손이 그것을 긁어내며 버텼지만….
이미 삭아버린 것을 붙잡아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우리는 추락했다.
나를 끌어안는 품 안에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간신히 피어오른 작은 불은 금세 꺼져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티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바다 위로 밤하늘보다 검고, 심해보다 깊은. 저 하늘 너머의 어둠처럼 텅 비지는 않았으나 어둑하고 음울한 것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본 것이 아픔으로 인한 환각도 착각도 아닌 듯싶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존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랑.”
찰랑이는 바다의 수면에 몸이 닿기 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손을 늘어트려 차가운 겨울 바다를 헤집어 보았다.
그런 내 손을 바다에서 떨어트린 어둠은 그 음울함에 맞지 않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저들의 왕을 닮은 그런 다정함이었다. 내 힘의 본래 주인이 다루어서 그런 거였다.
“무슨….”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이호연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했다. 나도 별로 믿고 싶지는 않았다.
검은 피가 멈췄다. 검푸른 수면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익숙할 뿐이었다.
손을 들어 입가를 문질렀다. 그런 내 손을 막은 이가 하얀 명주 천으로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내 뒤를 올려다보는 이호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 그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나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검은 피를 조심스레 닦아 주는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여태껏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이제 와, 이제야 입에 담아 보았다. 계속 미루고 미루어 모든 것을 망쳐 버리고만 후회와 질척이는 감정을 품고서.
“날 위해 죽어 줄 수 있어요?”
“…물론.”
“내가 당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왕이 되기 위해서, 푸른 불꽃이 되기 위해서… 랑을 죽여도 돼요?”
“굳이 네 손에 피를 물들이지 않아도 기꺼이 그리 해 줄 수 있지.”
그 답에 뒤돌 수밖에 없었다. 눈을 흐릿하게 만들던 눈물로 이루어진 막이 눈물방울 하나가 되어 흘러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림자도 푸른 불도 다룰 수 없었다.
도깨비 같은 힘도 귀신같은 걸음도 없이, 아주 무력하고 힘없는 전직 이전의 상태였다.
지금의 나는 온전하지 않은 푸른 불꽃도, 푸른 불꽃이 될 불티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왕도 망량신도 될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
나비에게 몸을 뺏겼던 쥬와 달리 나는 이런 식이었던 거다. 몸은 뺏기지 않지만 이전의 힘은 다시 빼앗기는.
다정한 손이 바람에 뒤엉킨 머리를 쓸어 주었다. 비라도 계속 맞고 있었다면 내가 우는 게 아니라 우길 수 있었을 텐데, 새삼 다정한 그는 비를 막는 것 하나도 잊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랑은 푸른 불꽃이 아니다. 푸른 불꽃이었던 존재지만 이제 더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는 거다. 랑은… 푸른 불꽃이 아니라 테오그라젠스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그에겐 빛바랜 영광이 있을지언정 미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아가.”
“…….”
“오늘의 너는 아주 평범한 아이로 눈을 감을 거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네 바람이 이루어져 있을 거란다.”
결국은 도돌이표. 푸른 불꽃이 되는 건 나. 쥬는 내게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그도 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게 내가 바란 적 없는 바람이어도요?”
“네가, 바라지 않았을지라도.”
나쁜 사람. 끝까지…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
살기 위한 힘을 얻으려 하니 죽어 달라 하는 이 맹랑한 말에 어떻게… 그리 다정해. 이마에 닿는 온기가 따듯했다. 그건 아이에게 내리는 작은 축복 같은 거였다.
…마지막 인사였다.
그는, 애초에… 여우와 약속을 하는 순간부터, 그의 장례를 스스로 치르고 나를 기꺼워하는 순간부터 신이라 불리지도, 다른 신을 내몰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푸른 불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무릎 꿇리지 못한다는 온전한 왕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몸짓을 따라 기다란 머리가 하느작거렸다. 그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기다란 귀고리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그는 손을 들어 귀고리 하나를 떼었다. 그것을 내 손에 쥐여 준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을 더듬었다.
“언젠가는 내가 한 말을 떠올리면 좋겠구나.”
“…….”
“아주 오래된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알아요…. 하나는 알아요.”
“…아가. 그럼 이거 하나만 더 기억해 주렴. 나는 기나긴 시간을 헤매 만난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단다. 이건 그저, 돌아가야 하는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
“오래된 것이 옛것으로. 살아갈 아이는 앞으로.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이제 끝으로.”
랑의 발치에 그림자가 내 밑으로 흘러드는 것이 보였다. 어둠과 어둠이었지만 흘러든 것은 다른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랑의 손에서 피어난 푸른 불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그림자가 흔들리던 얼굴은 끝까지, 다정하게 웃어서, 나는 그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깊은 밤이 물러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느새 랑의 손에 들려진 제등에서 함께 피어오른 푸른 불이 바다를 덮을 것처럼 서서히 그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불은 바다를 덮었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잡아먹었으며 하늘의 틈새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시야를 가렸다.
그 모습은 가히 신이라 불릴 법한 모습이었다.
그림과 같았다.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주었던 그림과.
어느 남자. 하늘을 뒤덮는 불. 과거가 반복되었고 이것이 현재였다.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안에 쥐어진 귀고리의 금속이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밤이 낮이 되었고 겨울은 포근한 어느 봄날의 시간이 되었다. 푸른 불이 감싸 안은 세상은 그러했다.
영원히 나를 지켜 주겠노라 말하는 듯한 그런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뒤돌아봐요.”
제발 한 번만 더….
뒤돌아 나를 보고, 망설여. 내가 당신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줘.
신이 있다면, 내게 신이 있다면 그 모습이 누굴 닮았을지야 뻔했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인가.
평등함이라는 이름으로 무관심하게 방치하지도, 방관하지도 않는 자. 그 압도적인 존재로 우리를 짓밟지 아니하는 자.
…사랑과 자애라는 그 이기적인 것을 기꺼이 품에 안겨 주는 존재.
그것이 우리의 바람과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신이라기보다는 가족, 친구, 스승, 버팀목. 그런 좀 더 친근하고 애틋한 것들의 이름이 아닌가.
그러한 것들에게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는 이유는 그 격 높은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서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가 나의 신이 아니기를 빌었다. 내게 무한한 힘을 주는 대단한 신이 아니기를.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기를.
내가 손을 뻗는다면 기꺼이 잡히는, 붙잡으면 평생 내 옆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찮은 존재이기를 바랐다.
시야가 깜빡거렸다.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온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이 감각은 분명 졸음이었다.
웃는 낯으로 나를 보며 푸른 불을 불러내던 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가 뒤돌아 나를 보기를 소망하였고 그는 내가 그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만난 것은 당신의 바람이 나의 바람과 맞닿아서.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바람은 서로가 달랐다.
그게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 랑은 신이 아닌데, 이제는 붙잡을 수가 없으니까.
***
“아….”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것은 어둠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눈이라도 멀었나 하는 생각을 하다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흐릿한 불빛에 그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조금 아팠고, 아직도 비에 젖은 것처럼 온몸이 눅눅했다. 아니, 끝없이 늘어지고 싶은 것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여기는 어딜까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손을 들었다.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은 평소의 것과는 달랐다. 그 불의 세기가 달랐고, 전보다 더 짙푸른 색이었다.
방 안을 맴돌며 길게 꼬리를 빼는 불의 잔해들이 방 안을 밝혔다. 그제야 이곳이 리블 사옥 내 입원실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
[당신의 전직명은 ‘도⑇#⑆의 왕’. ㄱㅖ승하ㅣ⸎!#]
어둠 속에 피어오른 푸른 불에 기대어 드러난 글자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몇 번이나 웃음이 나왔다.
그럴수록 내 속은 텅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결국에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가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손안에 잡히는 이불을 쥐어뜯듯이 잡았다.
몸이 저절로 웅크려졌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홀로 울었고 숨을 죽였다. 소리 내어 우는 것 하나도 죄스러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혼자 울었다.
“왜….”
왜 나는 이런 방법으로밖에 살아남지를 못하는 걸까. 왜 이딴 식으로만 혼자 살아서 돌아오는 걸까.
매달리고 가지 말라 매번 그래 놓고서 이번에도, 내가… 내가 그 손을 놓았다. 나는 또 도망친 거다.
숨이 막혔다. 아직도 그 깊고도 차가운 바다에 빠져 있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깜빡이지 않아도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뜨거운 소금물 덩어리가 익숙해졌을 즘에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린 긴 머리가 정신없이 시야를 가렸다. 손을 들어 그것을 넘겼다.
[당신의 전직명은 ‘도⑇#⑆의 왕’. ㄱㅖ승하ㅣ⸎!#]
겨우 이딴 거 때문에. 겨우 이런 장난 같은 말로 이루어진 한 줄도 안 되는 것 때문에. 랑은 죽어야 했던 거다.
손을 들어 시스템 창 위로 올렸다.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닿자 가려진 글자가 드러났다.
[당신의 전직명은 ‘도깨비들의 왕’. ㄱㅖ승하ㅣ⸎!#]
내가 왕이라는 것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한없이 가라앉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곤 하던 그림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짜증 날 정도로 유순했다.
아픈 것과 별개로 몸은 가벼웠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그 신과도 같던 힘이 내 몸 안에 있다는 감각이 명확해서, 정말 개 같았다.
검은 제등이 없음에도 푸른 불을 끝없이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있던 모든 핸디캡이 사라지고 내가 흘겨보곤 했던 능력이 고스란히 내게 넘어왔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바랐다. 정말로 바랐다. 이 힘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어.”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이 바라지도 않던 바람이 이루어져서는 안 됐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겨우 이딴, 결말을 원해서 내가 그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나는…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무엇을 놓을지 결정했다.
그래서 알았다. 그 과정까지가 얼마나 힘들고 헛헛하고 쓰렸는지. 그래서 이렇게 끝나는 건 안 됐다고 되새기는 거였다.
사람이 사람을 가장 먼저 잊는 요소는 목소리라고 했다.
나를 보던 얼굴이 생생했다. 퍽 다정했던 행동들도 소록소록 잘도 떠올랐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고, 그럼에도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고, 그 앞에서 울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웃어주고 싶었다.
애오라지 바란 것은 겨우 그런 것들뿐.
아직은 생생히 떠오르는 그 목소리가 잊히고 퇴색되고 끝내는 떠올리려 해도 알 수 없게 될 거라는, 기다리는 것밖에 남지 않은 현실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차마 소리 내지도 못하는 울음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했다.
정말로, 너무나 많이.
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밑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동안 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어 보았다.
차게 식은 것은 내 발도 마찬가지인지라, 서 있던 자리가 데워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을 떼자 하얀 대리석에 묻어나는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아마도 얼음 위를 뛰어다닐 때 생긴 상처에서 흘렀던 피일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맨발로 걸었다.
언제나처럼 병실의 입구 옆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손을 들었다.
그대로 내리쳐 거울을 깨부쉈다.
“…….”
깨져버린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서 흐르던 피는 방 안을 맴돌던 푸른 불에 닿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깨진 거울에 묻어나는 피만이 이것을 부순 범인이 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
결국은 이거다. 싫다 미루고, 도망치고, 외면한 결과물이 결국은 이거였다.
조각 난 거울에 비친 조각 난 내 모습이 진짜였다. 이게, 결과물이었다.
“나와.”
조용한 병실에 내 목소리는 듣지 못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상대는 못 들은 체라도 하려는 것인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속에서 끓던 것이 울컥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나오라고!”
숨이 거칠어졌다. 색색 내쉬는 숨결 사이로 무언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방 안을 배회하던 푸른 불이 멋대로 움직이고 깨진 거울 파편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하….”
제멋대로 몸을 길게 뺀 그림자가 유리 조각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에 스쳐진 거울 조각들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 보았다. 그림자의 주인인 내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림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건든 거울 조각을 집어 살펴보았다.
평범한 거울. 내 얼굴을 비추는 그것을 비틀어 내 발치를 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겐 그림자가 없었다.
손이 떨렸다. 마냥 분노하기에도 하찮은 모습이 거울 안에서 그 모습을 슬며시 드러냈다.
푸른 불그림자 아래 숨어든 신.
청색 불이 드리워지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불그림자. 그 아래 숨어든 신 하나. 여태껏 랑에게 들러붙어 숨어 있던 것이 이번에는 내 밑으로 숨어들었다.
아마도 ‘불그림자’이기만 하면 제 몸을 숨길 수 있었겠지. 이젠 그걸 만들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어서 이곳에 있는 걸 테고….
시선을 내렸다. 그림자 위에 푸른 불을 빌려 제 모습을 형상화한 신은 하찮았고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겨우 이딴 것 때문에… 몇 명이 죽어 나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 속에서 헤매야 했지?
그러모아 품에 안아도 한 줌 될까 말까 한 이 자그마한 신 하나 때문에 나는… 그토록,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고, 그런 식으로밖에 살아남지 못했는데….
입을 열었다. 울음과 함께 뒤섞인 온갖 감정들 때문에 목소리가 떨렸다.
“…하는 거라곤 남한테 빌붙기. 기회랍시고 사람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고,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무관심하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맑은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간 거울 조각은 파편을 흘리며 구석으로 떨어졌다.
동그란 푸른 불의 눈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신의 위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미약하나마, 불완전하나마 제 모습을 드러냈던 테오그라젠스와 달리 또 다른 하나는 이토록 형편없고 하찮았다.
몸이 떨리거나 두려움에 떨리지 않았다. 감히 마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딴 믿을 구석 하나 없어 보이는 신을 위해 우리는 싸웠고, 싸움에 휘말렸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그렇게 기꺼웠나?
누군가는 이 질문에 그러하다 답할지도 몰랐다. 하늘 조각이라는 새로운 자원이 가져다준 혜택들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한 선의 시련만을 주었을 때다.
이 신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괴물이 더 강해지고 하늘이 무너져도, 불그림자 아래 숨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이 신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강제로 쥐여 준 것들이나마 기쁘다고 웃고 그것들 가지고 싸워야 했다. 이 신을 위해서.
나락으로 떨어져도 기댈 수 없는, 우리를 앞으로 미는 것밖에 못 하는 이딴 신을 위해서. 그게 우리가 살기 위한 과정에 반드시 끼게 된 과정이니까.
어떻게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있는 걸까? 평등하게 사랑해? 기회를 줘?
웃기지 마.
이건 그냥 또 다른 하나가 테오그라젠스에게 먹히기 싫어 대신해 싸울 우리를 떠민 거였다. 살고 싶은 열망에 빠진 우리와 복수를 원하는 천공 섬의 주민들을 꾀어낸 거였다.
원인이 뭐든간에, 왜 그럴 수밖에 없던간에!
때마침, 바라는 것이 있던 어느 도깨비들의 왕을 이용한 거였다….
“…네가 테오그라젠스랑 다를 게 뭐가 있어?”
멋대로고. 저들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고. 저들 때문에 죽어간 이들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ㄴㅏ는 그 무엇도 죽이지 않ㅇ]
[…]
“…….”
시스템 창을 빌려 대화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력한 이 존재가, 신이었다.
“그딴 것도 변명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너 같은 신을 지키고도 숨겨 주고도 싶지 않으니 내 그림자에서 나가라 외치고 싶었다.
밖을 헤매다 테오그라젠스에게 먹히든, 저 스스로 살아날 방도를 찾든, 방자한 내 행동에 분노해 무료한 신의 편을 들든.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켜야 했다. 이 하찮은 신을 뺏기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이 지경에 될 때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마저 다 끝!
주체되지 못하는 감정이 날뛰었다. 머리를 헤집고 벽을 치고 정신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다 소리를 질러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너ㄴ 가며ㄴ 뒤에 숨ㅓ 오ㄴ전⸎ 왕이⑇⑆]
“…테오그라젠스한테 먹혀서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면 없는 듯이 굴어.”
입 닥쳐.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티내지 마.
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내가 신경 써야 할 필요는 없었다.
“넌 이 세계의 신이지만, 내 신은 아니야.”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거울 조각을 들었다. 푸른 불이 방 안을 떠돌아다녀서일까. 아니면 이젠 내가 왕, 푸른 불꽃이라 그런 걸까.
언젠가 랑의 눈에 푸른 귀기가 서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 색은 그대로인데 푸른빛이 감돌았다. 지금의 내 눈이 그때의 그의 눈과 같았다.
새까만데, 기이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어둠 속에서 그 색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푸름을 눈에 담다 거울을 떨어트렸다.
“네가 그 가당치도 않은 신이라는 위치라도 지키고 싶으면….”
입 다물어. 그 옛날 네 같잖은 배려와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숨죽이고 입 다물고 살아야 했던 우리처럼.
그딴 거라도 주어지지 않아 죽어 가야 했던 우리처럼.
동그란 눈은 여전히 느릿느릿 깜박이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천천히 눈을 감은 그것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이딴 것도 신이라고 남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
텅 빈 검은 흔적을 눈으로 더듬다 눈을 돌렸다. 누군가가 내 귓가에서 자갈자갈 떠드는 것 같았다. 흐릿하게 들리는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남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내가 있던 방과는 달리 불이 환하게 켜진 복도 탓에 눈이 조금 아렸다. 꼬리처럼 내 뒤를 따르던 푸른 불은 서서히 사라졌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대부분이 의료진이라 그런 것인지 피가 묻은 내 맨발을 신경 쓰고 있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걷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었다. 걷다 보면 생각을 할 것이고, 생각을 하다 보면 무엇이든 다음에 뭘 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었음에도 나는 계속 걸었다. 소매를 붙잡는 손이 아니었다면 끝을 모르고 발만 움직였을 것이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놔.”
“류….”
간절한 손길을 차마 매정히 뿌리치기가 힘들어 고개를 틀었다. 내가 깨버린 거울의 단면도 이런 회색빛이었는데.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덮었다. 지금은 추운 겨울 바다를 헤매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차가웠다. 놀란 눈이 불안을 담았다.
나는 그가 놀라지 않게 누가 봐도 다정하다 싶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의 볼을 쓸며 입을 열었다.
“치료는 받았어?”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지켜보며 나는 웃었고 다행이라 말했다. 그리고 손을 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길 잃은 원망 탓이었다. 애써 끌어 올렸던 입꼬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런데… 나 지금은 네 얼굴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흠칫 놀란 손이 서둘러 내 손을 붙잡았다. 설핏 슬픈 기분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도 지금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붙잡은 손을 놔주었다. 그의 마음 어딘가에 움푹 팬 자국을 발견하거든 그것을 만든 것이 나임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를 두고 정처 없이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익숙한 길을 찾아 알아서 몸이 움직인 것처럼 맨 꼭대기 층인 주세진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문을 열었다. 아직 치우지 않아 여전히 어질러져 있는 방 안을 둘러보고 그나마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소파 위에 앉았다.
잠시 그렇게 컴컴한 방 안에 앉아 생각했다.
화풀이라고.
동시에 그건 나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던 설움이라고.
자기 혐오적 생각과 자기방어적인 생각이 서로 싸웠다. 나는 내 편을 들지 남의 편을 들지조차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고, 그럼에도 원망하고 싶고. 그 원망하고픈 마음은 결국 나 하나 편해지고자 하는 짓임을.
그리고 실제로는 전혀 마음 편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보다 어두운 곳은 없을 것이다.
껌껌하게 가라앉은 방 안에 작은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보기 싫다고 했는데.”
“그리고 여긴 내 방이지.”
그 말에 슬며시 눈을 떴다. 고개는 돌리지 않고 눈만 굴려 방의 주인을 찾았다. 그는 애당초 이 방에 온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괜히 책장 앞을 서성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던 것 같다.
“울어요?”
주어가 없는 물음이었으나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아니.”
“그럼 화났어요?”
“걔가? 너한테?”
주세진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면 비웃는 게 아닌가 의심할 법한 어조였다. 다리를 들어 끌어안았다.
그 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은 체 노래를 흥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엉망진창이에요. 기껏 가서 뭐 하나 제대로 하고 돌아온 게 없어요. 얻은 것도 없고. 잃기만 했어요.”
“적어도 너희는 살아서 돌아왔지.”
그의 목소리가 떨린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말마따나 살아서 오기는 했다. 살아서… 살아서만….
“…살아서만 돌아온 게 문제라는 거예요.”
“…….”
“보통 영웅의 성장 소설 같은 걸 보면 가까운 누구 하나는 꼭 죽잖아요. 그 죽음이 성장의 발판이 되고, 복수심이든 뭐든 성장의 이유가 돼요.”
팔 하나를 내려 소파 위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 위를 더듬었다. 그림자 사이에서 머리를 내민 검은 칼날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무생물이었다.
희망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시 만나지 못할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바보가 될 거라는 예감이었다.
“난 그딴 거 없어도 영웅 노릇을 해 줄 생각이었어요. 그런 거 없어도 영웅 노릇을 할 수 있었어요. 못 해 줄 것도 없었어요.”
“…….”
“근데… 안 되더라고요 그거. 테오그라젠스를 직접 보니까 그냥 도망치고 싶어졌어요.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소파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내 옆에 앉은 이에게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밤인데 하늘이 갑자기 새파래졌어.”
“…….”
“처음에는 날이 밝은 줄 알았지. 그런데 해가 없더라고. 그런데도 낮이라 착각할 만큼 밝았어.”
“…하늘을 덮은 게 불이었을 테니까.”
“맞아. 그건 새파란 불이었어.”
“…….”
“불이 사라지고 보니 하늘에 가 있던 금이 없어졌더라. 하늘 조각이 떨어진 부근에는 푸른 막 같은 게 생겼고.”
그래 봤자 시간 벌이용이다. 그걸 주세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끝난 게 없다는 걸 알아. 저 막이 없어진 이후 네가… 나서야 한다는 것도.”
“…….”
“그러니까, 도망쳐도 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주세진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 말의 의미가, 어조가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끝이라는 걸 아는 사람 같지 않은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이 땅을 밟고 서 있는 사람들은 네 덕분에 산 거라고 볼 수 있어. 네가 아카샤의 조각을 해결했으니까. 네가,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
“그러니까 너도 한번은 그냥 네 마음대로 행동해.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죽음을 각오한 사람조차도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말은 나를 자극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사랑이네, 우정이네 같은 뻔하고도 무한(無限)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며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서야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냥 도망가도 된다는 듯한 시선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런 것을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내 등을 밀며, 가라고, 자신을 버리고 가라고 외치던 목소리도 이랬다.
칼을 더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 떠밀지 말아요.”
“…….”
“내가 정말 도망이라도 가면 그 원망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그게 내 역할이야.”
“…….”
“…그거라도 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원망의 말이 나온다는 건 결국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고, 그럼 책임을 져야지.”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웃음을 지어 주었다.
“이 정도면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속 편한 자식은 아니지?”
“…그거 그만 우려먹어요.”
“인상 깊었거든. 대놓고 욕 들어 본 건 처음이라서.”
“…….”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얻게 된 다양한 인간관계가 모두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끝까지 참고 참았던 거겠지.
나를 향한 친절함이 목줄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줄에 순순히 손이라도 내밀어 준 이유 또한 분명히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 목줄에 목을 내어 주지는 않을지언정 손은 내밀어 줄 것이다.
“안 도망가요.”
“…….”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그거 몇 번 해 봤는데 끝이 좋았던 적이 한번이 없더라고요. 미련하게 이미 실패했던 길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고.”
쥐고 있던 검은 칼을 놓았다. 그림자에 스며드는 그것을 눈으로 훑어보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지지해 주는 건 좋은데, 가끔은 붙잡는 것도 좀 해 봐요.”
내 말에 주세진은 스러져 가는 새벽의 별처럼 웃었다.
“모두가 붙잡으니 나 하나쯤은 가라고 등 떠밀어 줘야지.”
그래서 나도, 웃었다.
“선수 뺏겼어요, 그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주세진은 붙잡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고도 차분하게 말했다.
“신발은 신고 다녀.”
겨우 한다는 말이 그거라서, 웃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앞에 서는 거다.
이러니까.
끝없는 밤하늘에 있는지도 모르는 별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만든 작은 별 무리가 너무 예뻐서.
그것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마지막 빛이라 해도 그 순간이 너무 예쁘니까.
비록 그 별이 어둠을 밝히지는 못할지라도, 삼켜서 없애 버린 감정들과 함께 펑펑 터져나간다고 해도.
조각난 별 조각과 함께 흘러가는 내 마음은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멍하니 창밖을 보는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밤하늘 아래 세상이 빛을 잃고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종말의 배경이었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곳의 배경이었다. 나는 제법 오랫동안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
인적 없는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전력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보통 영화 보면 이다음에 꼭 누구 하나 죽던데.”
“…….”
“이렇게 말해도 모르려나….”
발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내 손 위를 배회했다. 검고 어둑한 것이 스치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자그마한 단도였다.
그것을 손안에서 갖고 놀다 뒤를 돌아 던졌다. 금색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자르고 지나간 단도는 그대로 벽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눈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내 눈도 저 눈처럼 파랗게 빛나려나.
창이 크게 트여 있어서 그런지 불이 꺼진 복도는 시야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푸르스름한 것이 꽤나 운치 있다 할 법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매번 뒤에 숨어 말만 전하던 예언가가 직접 나타난 건.
“에스텔리니움.”
내 부름에 이예린의 모습을 뒤집어쓴 예언가는 웃었다. 같은 얼굴로 짓는 미소임에도 그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의 걸음을 따라 황금색의 기류가 흘러 다녔다. 그 안에 담긴 반짝임은 사라져 버린 미래의 별처럼 빛나면서도 흐릿했다.
모든 것을 초월한 것 같은 분위기와 맞물려 시선을 끌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무슨 말을 하려고 나타난 건지나 빨리 말해.”
“…내게 화가 났어. 그렇지?”
“…….”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내 시선에 에스텔리니움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저, 마지막 길을 제시하려 하는 것뿐이란다.”
“마지막?”
“그래, 마지막. 우리의 이야기도 너희의 이야기도 끝맺는 마지막 길. 너의 관문. 네가, 오로지 너만이 해야 하는 일.”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 손이 가리키는 것은 아주 깊고 깊은 저 땅 어딘가였다.
“상실의 밤. 그 아래 피어오른 푸른 불꽃. 그 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한 마지막 제물은 불에 홀릴 나비.”
“…….”
“그게 네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거란다.”
끝까지 자기 하고픈 말만 하네.
잠시 고민하다 그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로 에스텔리니움을 스쳐 지나가, 벽에 박힌 단도를 끄집어냈다.
페이즐리가 주었던 단도. 그것으로 벽을 살짝 그어 보자 선명한 선이 새겨졌다.
“예언 말이야. 내가 알기론 예언 능력을 가진 건 이예린밖에 없거든? 그 얘기는 천공 섬에서도 예언가는 너 하나뿐이었다는 뜻이 되겠지?”
“…….”
“그리고 나한테는 아주 오래전부터 뒤따라오는 예언이 하나 있고, 그놈한테 예언 능력은 없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예언가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나를 지켜보았다.
“…‘넌 내 미래 못 보니까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마.’라고 했거든. 그때는 생각 못 했어. 그 말의 의미가 나비는 예언 능력을 알고 있고, 그 새끼 성격상 그걸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걸.”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어지?”
“너지? 검은 석판에 적힌 문구를 말한 거. 나비를 거치면서 변형되기야 했겠지만 본질적인 예언을 한 건 널 거야. 너는 나비의 앞날은 못 보아도 내 앞날을 보니까.”
“…….”
“그래서 이예린도 나한테 보낸 거야. 그 예언이 실현될 때까진 무조건 나는 살아남을 테고, 그때까지는 적어도 이예린이 죽는 걸 내가 막을 테니까. 아냐?”
내 물음에 에스텔리니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얼굴은 참 익숙한 사람인데 그 안에 들어선 게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애당초 나비는 ‘푸른 불꽃’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어. 천공 섬엔 그런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 존재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너뿐이지. 수백 수천 갈래의 미래를 훔쳐보는 예언가인 너 말이야.”
“…또 다른 세계의 흔적마저 놓치지 않는 실 짓는 장사꾼인 나 말이지.”
그녀는 손을 뻗어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천천히 그것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따라 머리카락에 황금빛이 어리다 사라졌다.
“내가 미래를 본 대가로 너는 내게 과거의 것을 보게 만들었어. 아마도… 내가 온전해질 방법을 말이야.”
“그러니 끝을 바라는 내가 푸른 불꽃이라는 존재를 미래에서 찾아내어 나비에게 이야기했다는 거군.”
“왜, 아냐?”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이 갈래갈래 흩어지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정하지 않는 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이제 와 그것 갖고 뭐라 할 생각은 없어. 굳이 네가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이 세상은 테오그라젠스에 의해 엉망진창이 됐을 테니까.”
예언가와 푸른 불꽃에게 의탁한 또 다른 하나는 별개였다. 나비가 푸른 불꽃이라는 존재를 모르게 되어 내 운명이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테오그라젠스가 이미 푸른 불꽃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전혀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예언. 나를 졸졸 뒤따르는 그 예언에 관하여.
‘당신은, 스스로… 무엇인지 알아, 야 합니다. 왜 그가 푸른 불꽃을, 구심점을 바랐는지…. 왜 당신이, 예언을… 더 생각, 구심점….’
“…구심점.”
“…….”
“그 구심점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말해.”
에스텔리니움은 천천히 입을 뗐다. 이 이상 숨길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고, 생각했고, 머리를 굴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금색의 기류가 흩어졌다. 복도에는 다시 불이 들어왔고, 이예린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몸을 받아 들었다.
그저 잠든 것뿐인지 이예린은 고른 숨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를 안고 이동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다가도 맥없이 쓰러졌다.
끝까지 살아남은 생각은 하나였다.
이 사람도 참 다사다난한 인생이다, 하는 누가 누구에게 할 처지가 아닌 생각.
얼마 가지 않아 내가 누워 있었던 병실이 보였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비어 있어 이예린을 눕혀 놓기 좋겠다 싶었다.
이예린을 한 손으로 받쳐 않고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 나보다 먼저 문을 여는 손이 있었다.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다시 물러나는 손을 눈으로 좇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활짝 열린 문을 흘겨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이예린을 눕혀 주고 그 옆에 앉았다.
흐트러진 금색 머리를 대강 정리해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그림자마저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
“…….”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시선을 주고, 시선을 피했다. 뭐라도 있다는 것처럼 내 발치만 보는 이호연의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이대로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뭐라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던 이호연은 천천히 걸어 내 앞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몸을 낮춘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옆에 놓더니 조심스레 내 발목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내 다리를 그는 놔주지 않았다. 그는 맨발로 돌아다니느라 먼지가 묻은 내 발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발끝이 저절로 옹송그려졌다. 알 수 없는 내 두려움 따위 눈치채지 못한다는 듯 차갑게 얼은 발을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그가 반대편 발에 손을 옮긴 뒤에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하지 마.”
“…….”
“…손 더러워져. 하지 마.”
그는 내 말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내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머뭇거리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에 울렸다.
“보기 싫다고 했는데…. 신발을 안 신은 게 계속 신경 쓰였어요.”
“…….”
그제야 그가 들고 온 것이 신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마 그의 머리에는 닿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하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화풀이였다는 거 알잖아.”
“…….”
“그런데 왜, 왜 이렇게까지 해?”
내가 대체 너한테 뭐길래.
내가 이딴 답답한 전개의 진부한 소설 클리셰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뭐 얼마나 특별하기에 기꺼이 자존심을 버리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 옷 위에서 흐트러지던 하얀 머리카락이 천천히 떨어졌다. 느릿느릿 고개를 든 이호연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면… 그냥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요. 미쳐서 이런다고 생각하면 편하잖아요.”
“…….”
“좋아해요.”
“너….”
“좋아해도 되나요?”
그는 그 말을 하며 웃었다. 마치 옛날에 그를 거부했던 카페에서 내게 싫어하지 말아 달라 하던 그 날처럼.
옆에 놔두었던 신발을 들어 내 발에 신겨 주며 그는 말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화를 내든, 화풀이를 하든 그 이후를 무서워하지 마요.”
“…….”
“누가 봐도 내가 더 좋아하니까. 그래서 난 얼마든지 날 버려도 좋은걸요. 그러니까… 이젠 나를 싫어해도 좋으니까, 미워하지만 말아 줘요.”
“…왜?”
“나를 싫어하는 건 나만 참으면 되지만, 나를 미워하면 그건 스스로도 상처받을 거잖아요.”
“…….”
나도 모르게, 한숨이 길고도 흐릿하게 흘러나왔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나거나, 감정이 북받쳐서는 아니었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애초에 틀렸다.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방법 따위 모른다.
그의 손에서 발을 빼냈다. 이번에는 그 또한 그런 내 행동을 막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닿고 싶은 듯 거두지 않는 그의 손만이 뚝뚝 떨어지는 미련을 보여 줄 뿐이었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었다. 반항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그는 몸에 힘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멀어지는 어깨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에서 흘러나온 그림자가 우리를 삼켰다.
끝없는 어둠으로 가라앉으며 이호연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끝을 모르는 추락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이래서 네가 싫어.”
“…….”
“…싫다고!”
언성이 높아지는 나를 그는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움켜쥔 그의 옷을 놔주었다. 눈을 감았다. 귓가에 목소리가 스쳤다.
“미워하지만 말아 줘요.”
“…안 미워해.”
아니. 못 한다에 가까웠다, 이건.
“너 한 번도 나한테 널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 없는 거 알아?”
“…….”
“…지금 물어봐.”
머뭇거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이호연이 결국 입을 뗐다.
“나, 좋아해요?”
“아니.”
내 대답에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날 붙잡은 손을 밀어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차마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잡았다.
강제로 내 눈을 마주하게 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날 좋아만 하는 건 아니잖아. 언제나 그 이상이지.”
“…….”
“…좋아하기만 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
어떻게, 미워해. 어떻게 싫어해. 너를.
차갑게 얼었던 입술에 닿은 온기는 나와 달리 뜨거웠다. 어쩌면 울음을 삼키느라 열이 올라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거라면 이 온기는 가엽고도 애처로운 열기였다. 그러나 마주 닿고, 어루만지며 섞여 가는 어지러운 온도의 변화에서 그것은 점점 사라져 갔다.
만약 그가 제 목을 맨 목줄을 기꺼이 내 손에 쥐여 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줄에 내 손목을 매달아 줄 거다. 상대도 나를 놓치지 않도록.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그거 말고 더 정확히 표현할 말 따윈 없는 그런 관계.
***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나와 이호연을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이예린이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태연히 물었다.
“깼어요?”
“네…. 뭐. 내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댁들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계속 몰라도 될 것 같네요.”
이예린의 시선이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호연의 얼굴을 흘겨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그녀를 따라 이호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
“티 늘어났다.”
내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내린 이호연은 내가 잡아 뜯느라 늘어난 목 부근을 보더니, 손을 올려 목을 덮었다. 시선이 이예린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중간에 가시지 않은 묘한 분노에 내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지느라 그런 것 같았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감정을 한참을 받아 준 이호연의 인내심이 놀라울 정도였다.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갈아입고 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나를 본 이예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쪽만 문제가 아닐 텐데요.”
“?”
내 쪽으로 손을 뻗은 이예린이 한쪽으로 늘어트린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대충 깨달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앉았다.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요.”
“아니라는 말이 정말 신빙성 없는 거 알죠?”
“그냥 깨무는 거에 좀 집착해서 그런 건데요.”
“…그쪽도?”
“나는 승부욕.”
혼자 물리는 건 별로라. 이예린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떨떠름해졌다. 애초에 왜 이 사람이랑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뻘쭘함에 괜히 발을 흔들거리다 입을 열었다.
“왜 쓰러졌는지는 알아요?”
“말 돌리려는 의도가 뻔하지만, 몰라요.”
“에스텔리니움이 나타났거든요.”
“…….”
이예린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그녀는 손안에 잡히는 침대의 시트를 쥐어뜯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언도 했어요?”
“예언 같은 오지랖이나 부리다 갔는데요.”
“…….”
“에스텔리니움한테 몸 뺏긴 게 처음이 아닌가 봐요?”
내 물음에 이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가, 사도들을 찾아서 떠나자마자 에스텔리니움한테 뺏겼어요.”
“…내가 죽는다는 예언이라도 했어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상실에 관한 예언을 했어요.”
아….
내가 가자마자 예언을 했다라. 그 속내가 꽤나 꼬인 것이 아닌가 의심할 법한 타이밍이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런 것일 테지만.
점점 내려가는 고개를 잡아 고정시켰다.
“옛날에 그랬잖아요. 예언은 확신을 던져 주는 불씨라고.”
“…….”
“그쪽 전직관도 옛날에 나한테 그랬어요. 예언을 듣고 나면 난 정도를 걷든가 사도로 빠져나갈 거라고.”
결국은 그 말을 따를지 말지는 내 선택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예언은….
“오지랖이에요. 예언은 오지랖이라고요. 듣고 싶으면 듣고, 싫으면 적당히 걸러 버리면 그만인 거예요.”
“그걸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기 싫으면 무시할 거예요.”
“…….”
“그러니까 내가 받아들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예언 하나 때문에 또 인사 안 해 주면 그때는 진짜 삐질 거예요.”
동그랗게 떠진 황금색 눈에 당혹과 어이없음이라는 감정이 뒤섞였다. 그 눈을 보며 나는 웃었다.
얼굴을 붙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쉬고. 몸 안 좋다 싶으면 의료진 찾아가요.”
“…어디 가게요?”
“내 일을 하러요.”
이예린은 그 이상 나를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완전히 문이 닫히자 나는 끌어 올렸던 입꼬리에서 힘을 풀었다.
예언은 오지랖이다. 굳이 내가 그것을 들어주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멋대로 정해 버린 운명이라는 것처럼 짜증 나고 성가신 헛소리일 뿐이다.
그걸…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나비를 죽인다는 예언과 운명 그 모든 것을 피해감으로써 도리어 상실을 겪은 내가.
“…….”
이 밑에 있다고 했지. 어떻게 여기 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만나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등에 닿은 벽이 점점 물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에 퐁당 빠진 몸에서 힘이 풀렸다. 이전과는 다른 아늑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싫어 눈을 돌려 버렸다.
언뜻 보면 애처롭다 싶게 손을 내뻗는 것들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누가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악랄하다 싶은 모습이었다.
원래는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 모를 넓고 텅 빈 공간은 뱀 사체마저 치워 버리자 삭막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완전히 치운 것은 아닌지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발로 문지르다 이 공간 한가운데 있는 이를 보았다. 어쩌면 이 피가 그 뱀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기 좋은 꼴은 아니네.”
“…그 꼴을 굳이 보러 내려온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웃긴 거 알지?”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터진 입술에는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물에 쫄딱 젖은 채로 계속 이곳에 방치되었던 것인지 그는 떨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사지를 결박한 끈이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저런 물건을 멋대로 들고 와서 쓸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일 터였다.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보다 발을 들었다. 어깨를 짓밟는 내 행동에도 그는 덤덤한 얼굴을 했다.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한테 맞았어?”
“지금은 너한테 맞고 있지.”
“이 팔 못 쓰게 만들어 버리기 전에 그냥 말해.”
“…….”
“너 상대할 마음 별로 없으니까 그냥 말하라고.”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명이 별로 없는 곳이라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머리 색이 조금 진해져 있었다.
눈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해져 있었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넌 좋겠다? 원하는 걸 기어이 얻어서.”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건 아마도 처음으로 그가 감추지 못한 수치심과 죄악감일 터였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러면 뭐가 달라진다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잇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입을 꽉 물었다.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그쪽이 그에게 더 상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하긴. 네가 누구한테 맞든 내 상관은 아니긴 하지.”
“…….”
“계속 그렇게 말 안 할 거야?”
어깨 위에 올린 발에 힘을 주었다. 그의 입에서 참을 수 없었는지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그를 패 놓고 방치했을지는 뻔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심술일 뿐이었다. 화보다 더하고 슬픔보다 짙은 그런 심술.
발을 떼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은 무정하다 싶을 만큼 덤덤했지만 내 속은 아니었다. 무언가 자꾸만 울컥거리며 치고 올라왔다.
그것을 다 뱉어 버리면 조금은 편할까 싶다가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차라리 처음 널 봤을 때…. 아니, 적어도 두 번째 만남에서라도 널 죽였어야 했어.”
“…….”
반응이 없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고 많은 것을 잃었는데,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얻어낸 이는 정작 반응이 없었다. 허탈함을 품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얘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깟 알량한 양심 때문에? 그게 그렇게 무거웠다면 나는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그럼 뭐가 그렇게 달라서,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죽이지 않은 걸까. 뭐라 소리 지르고 싶어 힘껏 벌린 입에서 정작 나오는 말은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먹 쥔 손이 떨렸다. 차마 움직이지 못하는 몸 대신 입이 움직였다.
“…그냥 널 죽였어야 했어. 그냥 죽여 버려야 했다고!”
거칠어진 숨을 내쉬는 나를 보던 무거운 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고, 생각한다고 뭐가 바뀌는데? 하지도 못했으면, 만약을 기리는 말 자체를 하지 마!”
“…하.”
그 말을, 네가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귀찮음을 가장한 설움이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건 손도, 어깨도, 힘준 턱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참고 참다 터진 사람처럼 그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면, 내가 네 손에 얌전히 죽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소리야?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왜 내가,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쇠를 긁는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아무것도 없고 넓기만 한 곳이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넓게 울리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그의 외침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드러난 그 솔직한 표정과 몸의 떨림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내가 선택한 건 회피도, 도망도, 공감도 아닌 함께 언성을 높이는 거였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보다 각자의 상처가 더 중요했고, 내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상대의 더 큰 상처를 눈에 담는 걸 택했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야? 일을 이따위로 만든 게 누군데! 너 때문에 결국 그 거지 같은 상실을 겪은 것도, 잃은 것도 나야!”
“그게 그렇게 억울해? 그럼 난 뭔데! 어릴 때부터 내 마음대로 살아 본 적도 없는 나는, 남은 거라곤 죽는 것밖에 없는 삶을 산 나는!”
“안 죽었잖아!”
“그래 안 죽었어! 그리고 너도 살았잖아!”
“누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내가 언제 너한테 죽이지 말아 달라고, 살려 달라고 빌었느냐고!”
“적어도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날 죽이는 게 넌데!”
“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했냐고!”
그러니 이건 상처밖에 남지 않는 의미 없는 대화였다. 간간이 감정이 격해지고는 하던 이호연과의 대화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건 옛날에 풀지 못해 방치한 감정을 정리하는 대화였다.
하지만 이 대화에 남는 것은 없었다. 풀리는 것도 없었다. 오히려 꼬아만 갈 뿐이었다.
이 끝에 남는 거라곤 상처와 적의, 설움밖에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것 말고 남을 것이 있을 거라 믿지 않는 이들의 대화이기도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위의 물도 이렇게 끓지는 않을 거다.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것을 뱉어 내듯 쥬는 격해졌고, 사지를 묶은 것만 없었다면 내게 달려들었을 기세였다.
문제는 내 사지를 묶어 놓는 것이 없었고, 나 또한 그와 같은 상태였다는 거다. 간신히 쌓아 올렸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존재하지 않는 무너짐의 울림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가장 먼 부근부터 형광등이 깨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드리우는 방 안에서 그는 외쳤다.
“왜? 내가 네 손에 얌전히 안 죽어 준 게 이제 와 억울해? 애초에 네가!”
“…….”
“네가…. 네가 안 죽인 거잖아….”
“…….”
“나와는 달리 너한테는 애초에 기회가 많았어. 언제든 나를 죽일 힘이 있었고! 그럼으로써 네가 산다면 좋다고 웃을 놈들도 많았고! 그런 것도 다 나랑 달리, 네가… 너 혼자만 얻은 것들이잖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새벽이슬 같았다. 그렁그렁 맺혔다가 떨어지고 피 묻은 검은 나비 문신을 스쳐 떨어지는 것들이 맑았다가도 탁해졌다.
“나한테는 그 한 번이 유일한 기회였어! 너랑 달리 처음부터 혼자고 아무 힘도 없는 내가 간신히 일궈 내고 만든 기회였다고!”
“…….”
“그래, 애초에 네가 끝까지 비겁하게 회피만 하지 않았으면 내가 움직일 일은 없었겠지. 내가 발버둥 칠 수 있는 건 네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때뿐이니까.”
눈물을 떨구는 눈이 독했다. 나를 노려보는 눈에는 원망과 애증이 깊게도 서려 있었다.
“고맙다고 할까? 아니면, 네 손에 안 죽어서 미안해?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온 건데!”
그러나 그에게 있어 내게 남은 감정은 하나뿐이었다. 이호연이 그리 부탁하던 깊고도 깊은 미움. 그것밖에 없었다.
고인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손을 들어 떨궈진 눈물을 닦아 냈다. 손에 묻어나는 축축한 감촉이 기분 나빠 비틀린 웃음이 나왔다.
“…말, 다 했어?”
“……!”
뻗어 나간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강제로 일으켜진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며 내 앞으로 끌려왔다. 목이 졸린 듯 그는 켁켁 소리를 냈다.
“네가 죽기 싫은 것처럼 난 사람을 죽이는 게 싫었을 뿐이야. 그런데 넌 왜 다 내 탓인 것처럼 말해!”
“이거 놔!”
“내가 비겁하다고?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널 죽이든가 했어야 한다는 거야? 그럼 죽기 싫다는 소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죽기 싫다 말하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내 심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내 기분도 모르면서.
뭐가 그렇게 잘나고, 뭐가 그렇게 혼자 억울해서 그딴 말을 해. 결국은, 자기 멋대로 원하는 걸 쟁취해…. 다신 못 보게 만들었으면서….
나는 이제, 다시는 랑을 볼 수가 없는데….
“결국 산 건 너잖아! 결국에 산 건….”
너랑 나, 둘 다다.
너는 살았고 나도 살았다. 다만 살아남은 그것이 너에게는 목숨이었고 내게는 인간성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은 그 혼자 만들어 낸 게 아니었다. 결국은 그와 내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네가 살고 싶었기에, 내가 욕심부렸기에.
이렇게 화가 나고 서러워할 자격이 내게 있기나 한지 모를 정도로 그 사실은 명확했다.
차라리 나도 너처럼 목숨을 구원받은 거였다면 이렇게 뻔뻔하게 화도 못 냈겠지. 인간성이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라 여겼던 주제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를 내팽개쳐 버렸다. 이제 와서 그를 죽이는 것만큼 의미도, 명예도, 이유도 없는 건 없을 터였다.
그러니 죽이면 안 된다.
“…….”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며 후회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니다. 내가 한 말을 후회하지 않을 거다.
애초에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난 널 안 죽일 거야.”
“…….”
짓씹듯 내뱉는 말이 건조하고도 거칠었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죽이든 아니든, 결국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너도 딱 그 정도야. 죽었든 아니든 상관없는 네 목숨처럼 너도… 나한테 아무 의미 없어.”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상처받은 얼굴일까? 사실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처받은 쪽이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비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달싹이는 입. 꺼멓게 죽어 가는 눈과 희게 질리는 얼굴.
그 얼굴을 보며 비웃었다. 뒤돌아 걸어가려는 나를 향해 그는 말했다.
“…우리 둘 다 안 죽었잖아.”
굳이 뒤돌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계속해 이어졌다.
“우리 둘 다 안 죽었다고. 이것보다 좋은 결론이 있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나를 엮는 그의 말에 발걸음이 멈췄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얕은 한숨으로 내뱉었다. 깨진 형광등의 조각이 나뒹구는 어둠 속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랑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나한테는 네가 죽지 않는다는 게, 그렇게까지 최선으로 느껴지지 않거든.”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이야기라고. 너도, 나도 안 죽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단 말이야!”
“…….”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면, 그건 정말 의미 없는 믿음이었다. 어둠과 뒤섞이고 그림자에 엉키며 존재하는 것이 눈을 떴다.
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저 말을 듣고도 그렇게 뻔뻔하게 내 옆에 붙어 있을 거냐 비난해 보고 싶었다. 그 물음의 화살을 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로 돌렸다.
손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씨를 어둠 속에 던졌다. 푸른 불그림자 아래에서만 존재하는 어느 신이 슬며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그랬지. 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라고.”
“너… 왜, 그걸….”
“…….”
“말도 안 돼…. 이딴 게 어디 있어, 말이 다르잖아!”
보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어디에 못 박혀 있을지 눈에 훤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랑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그냥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울 것 같은 기분인지라 결국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
그건 무슨 수를 써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참 잘도, 놀아났다.
***
멍하니 앉아 화면에 뜬 지도를 눈에 담았다. 손을 뻗어 그 위에 닿기 직전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말도 없이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
“…….”
답은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이 무엇일지야 뻔했다. 바닥을 차 회전의자를 돌렸다. 나를 보는 얼굴이 어둑했다.
“형이, 도망가도 된다고 했다면서요.”
“안 도망간다고 했었는데 그새 너한테도 말한 거야?”
“…왜요?”
“…….”
왜냐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대신 자리에 앉혔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내가 도망이라도 가 봐. 주세진은 엄청 욕먹을걸. 자기가 도망가라고 했다고 말할 인간이잖아.”
“…그런 일을 없을 거예요.”
“왜?”
“다 봤을 테니까요. 하늘이 무너지고 그 틈새에서 나오던 걸. 그리고 하늘 전부를 덮던 푸른 불을 봤다면, 어떻게 욕을 해요.”
“하지만 그건 내가 한 게 아닌걸.”
“그리고 류가 아니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죠.”
“꼭 나보고 도망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은 말이네.”
내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는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봤죠?”
“네가 패 놓고 방치까지 한 놈?”
“…….”
“그 끈 말이야. 이 길드에서 그런 물건을 개인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고, 그중에서도 몸싸움이 가능한 사람도 얼마 없지.”
그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일 주세진은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어서 난방도 안 되는 곳에 얼어 죽으라는 듯이 사람을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물었다.
“어떻게 끌고 온 거야?”
“…류의 전직관이 물에서 건져서 줬어요.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살려는 놓으라고요.”
“랑이?”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신 만나지 못할 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굳었다. 손을 들어 입매를 만졌다.
아무렇지 않게 웃을 자신은 없었다. 고개를 들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호연은 그런 내 행동에 내 어깨에 뺨을 기댔다.
“왜 살려 놓으라고 한 걸까. 내가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까 봐?”
아니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살고 싶다는 걔가 불쌍해서?
가능성은 있었다. 랑은 그를 가여운 아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새삼 불쌍하게 느껴져 살려는 주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끝을 알리는 그 상황에서….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 마지막 행동마저 의뭉스러웠다.
답답함에 눈이 저절로 움직였다. 뭐라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뺏기고 싶었다. 그런 내게 조금 전 보았던 지도가 다시 눈에 띄었다.
방 주인인 강유진이 안 보여 멍하니 바라보던 지도였다. 붙잡고 있던 이호연을 놔주며 물었다.
“저 지도는 왜 저러는 거야? 기계 고장 났어?”
그제야 지도로 시선을 돌린 이호연이 화면에 떠오른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다리에서 내려와 화면 앞에 섰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면, 이거 일단은 세계 지도 맞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모습이랑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뭔가 기록되어 있는 거라도 없나 주변을 훑어보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세진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강유진이 우리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불법으로요.”
내 말에 강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호연 쪽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이호연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주세진은 이호연의 주머니에 있던 카드를 빼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래도 이쪽도 역시 불법이었나 보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예요?”
지도를 가리키며 묻는 내 말에 강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헤집는 모습은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빡친 것 같기도 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주세진은 돌돌 말아 놓은 오페리움을 펼치고는 손짓을 했다. 그런 그의 손짓을 따라 오페리움을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고개를 들어 다시 화면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화면의 지도는 내가 원래 알던 세계 지도가 멋대로 지각 변동을 일으켜 새로운 땅을 구성한 모습이었다.
오페리움에 새겨진 것은 원래 내가 알던 세계 지도 위에 처음 보는 땅들이 덧그려진 모습이었다. 두 개의 지도가 미묘하게 맞물렸다.
강유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천공 섬.”
“…….”
“천공 섬으로 추정되는 땅과 이곳이 뒤섞이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만한 건….”
“마티.”
멍한 눈으로 레코디아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윈도, 스티브도 다 죽었지.
홀로 살아남은 자. 꼴에 동료애라도 있었나? 그럼 이게 그 복수고?
꼬일 대로 꼬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애당초 그들이 죽는 게 싫었다면 신을 불러낼 생각 따위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도 아니면… 기어이 나를 푸른 불꽃으로 만드는 걸 성공하든가.
어이없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눈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얌전히 발밑에 붙어 있는 그림자, 그 안에 숨어 있을 신이란 걸 생각하니 어이없다 못해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하나는 무료하다고 일을 벌이고 하나는 무능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민폐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이 상황에 나보고 도망가라고 한 거예요?”
“…….”
패기 있다고 해야 하나 이걸. 그냥 무모한 것 같은데. 입을 꾹 다문 주세진을 뒤로하고 강유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천공 섬이랑 뒤섞인 곳들은 지금 어떻게 됐는데요?”
“일단… 미국 쪽이랑 영국이 제일 심각해요. 미국은 땅의 절반이 천공 섬이랑 뒤섞인 상태고 영국은 런던 쪽만 그런 것 같기는 한데….”
“…….”
미국과 영국.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한 잊고 싶은 한 사람의 얼굴도 떠올랐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뱀 사체, 치웠어요?”
“아뇨, 아직… 저번에 류가 자른 조각 몇 개는 따로 연구실에 두긴 했는데 뱀 자체는 아직 지하에 있어요.”
뜬금없는 내 물음에 그녀는 의아한 낯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과는 달리 지하에 뱀 사체는 없었다.
아마도 스티브와 다윈이 죽는 순간 사라져 버린 제단처럼 없어진 것일 터였다. 연구용으로 놔둔 것은 그대로라 하니 괴물 쪽만 사라졌다는 건데.
하지만 영국에는 페이즐리 오스틴이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일부나마 그 금속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미국은 로웰 콕스의 고향이었다.
그녀는 제 고향에서 그 금속을 끌어모았던 자고. 천공 섬과 동기화가 된 지역 모두 그 금속이 있는 곳이었다.
만약에 금속을 추적해서 천공 섬과 뒤섞이는 거라면 이다음은….
나에게는 페이즐리의 단검이 있었다. 연구용으로 뜯어온 금속들이 아직 이 길드 안에 있을 터였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곳의 조건은 모르나 이 가설이 맞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방을 뛰쳐나가려는 나를 이호연이 다급한 손길로 붙잡았다. 소매를 붙든 손이 간절했다. 주세진이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물었다.
“어디 가려고.”
“뭐라도 해 보려고요. 이다음에 천공 섬이랑 뒤섞일 가능성이 높은 건….”
“…….”
“…….”
내가 생각한 것을 주세진이 생각 못 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막는다는 건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미 그도 아는 거다.
이건 정말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범위의 문제라는 걸.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는 우리의 모습에 강유진도 이호연도 낯이 굳었다.
“난 도망 안 간다고 말했어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먼저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의 문제죠.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그런데도 나가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가는 거죠.”
나는 주세진과 마주 보며 그가 지금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은 씁쓸했다.
“…있잖아요. 내가 제일 싫은 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거예요. 남들 보기엔 얘는 싫다, 싫다 말하면서 왜 자꾸 나서나 싶을 수도 있는데요.”
“…….”
“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더 싫어요. 그러고 있으면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별도 안 가고, 이럴 바에야…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
“나는, 그래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나는 그래서 그 어둠 속에 홀로 있었다. 혼자서 무너진 건물 틈새에 숨어 목숨을 구걸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죽기 싫어 숨고, 가만히 죽음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걱정하는 사람들을 두고 내 멋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은 얼핏 보면 이기적인 거라 할 법도 했지만.
어쩌면 이 이기적인 행동마저 내 나름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으로써 실체 없는 이 죄악감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환상 속에서만 헤매며 내게 손 뻗는 이들에게 괜찮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라는 자기 위로.
나는 거창한 이유로 타락한 신을 무찌르는 전설의 용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재수 없게 얻어걸린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서는 것에 크나큰 이유 따윈 없었다.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거였다.
“이번에도 나 혼자 도망가면, 정말로 다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보내 줘요.”
언제나 올곧은 눈이 나 때문에 무너진다는 건 꽤나 슬픈 일이었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그의 안에서 무너진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걸 본 것 같았다.
다시 드러난 눈은 변함이 없어서 그저 내 착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움켜쥔 손은 내가 본 것이 마냥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입 안에서 미안, 이라는 단어가 맴돌았지만 끝내 뱉지는 않았다. 그냥 미안해하지 말라고 웃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하고.
하얗게 질린 손에서 힘을 풀지 않던 주세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려고.”
“…예전에 이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닌 모시는 거라고.”
마티도 랑도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도 그 의미를 온전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신을 죽이는 미래가 있다는 것.
비록 그 신 앞에서 굳어 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과 그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썩 원하는 결과물은 아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뒤바뀐 전직명이며 힘에 관하여 생각하다 눈을 감았다. 어쨌든 푸른 불꽃…이 됐으니 전과는 달리 적어도 굳어서 아무것도 못하지는 않겠지.
설령 내가 굳어 버린다고 해도 이젠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는 내 발밑의 존재가 알아서 하겠지만.
눈을 떠 아래를 흘겨보았다. 잔잔한 그림자는 남들과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내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는 설령 그다음의 미래가 없더라도 그 길을 택하는 게 나았다. 이예린에게는 예언은 오지랖이라 했으면서 이러는 것도 웃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원래 모순적인 거니까.
“가만 앉아서 죽는 걸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내 말에 그들이 어떤 표정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시선은 내 발밑에 그림자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게 신이라면, 테오그라젠스가 그리도 하찮게 여기는 인간에게 기어들어 와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존재라면 본인이 죽기 싫어서라도 뭔가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까지만 맡아서 하는 거고, 그 이후는 이 신의 멱살을 잡아끌고 나오든 해서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룰 것이다.
신 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내가 바라는 그 최소한의 것이라도 반드시 이루어 줘야 할 터였다.
그림자로부터 시선을 떼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잡는 손이 느껴졌다.
“조별 과제, 좋아해요?”
“……?”
강유진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를 비롯한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당연히 싫어하죠?”
“그럼 이번 한 번만 좀 좋아해 봐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강유진은 양손을 들어 내밀었다.
“자. 손!”
“……?”
반사적으로 그 위에 손을 올리자 그녀는 잽싸게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무어라 반응도 하지 못했다. 왼손에 걸린 수갑을 멀뚱히 보는 사이 그녀는 남은 한쪽을 제 손목에 채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말도 없이 혼자 뛰쳐나가는 걸 예방하는 거죠.”
오른손을 올려 수갑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힘주어 끊어 버리려는 내 손 위에 강유진의 손이 올라왔다.
“이거, 평범한 수갑이라 류가 힘주면 바로 끊어져요.”
“…….”
“이게 끊어지는 순간부터 나와의 관계도 끝내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네?”
해맑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굳은 낯으로 내 손을 수갑에서 떨어트렸다.
“미국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혼자 해결하는 게 정말 익숙한 사람이구나, 하고. 그렇게 많은 전직자가 있었는데 류는 정말 필요한 경우만 아니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고 했죠.”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수갑이 걸린 손을 흔들거리자 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혼자 나가 버리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갑이라니…. 곤란한 낯을 지우지 못하는 나를 보며 강유진은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옛날이랑은 다르잖아요. 이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같은 것도 아니고요.”
“…….”
“주변에 능력 있는 사람이 많다 싶으면 좀 써먹든가 이용하든가, 하다못해 그냥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못 하니 어떻게요. 떠먹여 주든가 해야죠.”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그와는 달리 주변에 무언가 많이 모일 것 같구나.’
전직관이 말했다. 나는 그 나비와는 달리 주변에 많은 것들이 모일 거라고. 어쩌면 나비가 그리도 애타게 푸른 불꽃을 찾은 것이 이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역시 이런 뜻이었나.
인도자가 이끌고 갈 이들을 끌어모으는 건 구심점의 역할. 이상할 정도로 인복은 좋다 싶었지.
허탈한 숨을 내쉬고 팔에 힘을 풀었다. 수갑에 묶인 손이 달랑거렸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나름의 방법을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모두’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정말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내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강유진은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잡힌 나는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 되었고, 그런 나를 보는 주세진과 이호연은 혼란한 낯을 했다.
손을 움찔거리는 꼴이 아무리 그래도 풀어 주어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에게 대충 손을 절레절레 저어 주고 의자에 앉았다.
강유진은 제 방을 돌아다니는 내내 나를 끌고 다녔고 나는 회전의자에 편안히 앉아 바퀴가 굴러가면 굴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며 계획을 세웠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더듬으면서.
마침내 준비가 끝난 강유진이 이만 나가자고 했을 때, 복도에서 정답게 수갑을 나눠 끼고 나온 나와 강유진을 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상당히 묘했다.
그리고 그건 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나를 확인한 강유진이 헛기침을 하며 대신 시선을 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테오그라젠스를 다시 불러낼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거든요.”
“…….”
“저기요, 듣고 있어요?”
강유진의 말에도 쥬는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내 발밑. 그림자 안에 숨어 있을 존재를.
집요한 그의 시선에 이호연이 낯을 찌푸렸다. 나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왜, 죽어도 본인이 해결은 못 하겠대?”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그가 지칭하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쥬는 기다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푸른 불꽃과 나비가 함께하는 순간만이 신의 낙원은 열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네.”
그의 어조는 무미건조했다. 무언가 포기한 이의 것처럼 텅 비기도 했다. 결국 바뀐 것이 무엇 하나 없다는 허탈감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지를 묶어 놓은 끈 때문에 그것마저 편하게 하지 못했다. 결박된 제 손을 보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죽이게?”
“…….”
그 말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낙원을 여는 조건은 죽음.
애초에 왜 그는 죽음이라 확신하는 걸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그의 말이, 그것과 관련된 모든 인물이 입 모아 말해서 관념처럼 굳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엄지손톱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툭툭거리며 생각했다.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을. 뒤바뀐 것들에 관하여.
“너는 그게 왜 네 죽음이라 생각하는 건데?”
“…내가 직접 해 봤으니까. 열세 개의 심장에 칼을 꽂아 하늘을 무너트릴 존재를 순간이나마 불러낸 게 나니까. 그리고 너도 봤잖아. 그 새끼가 어떻게 신을 불러냈는지.”
“…….”
“네가 내 심장에 칼을 찔러 넣는 순간 신을 부를 준비는 끝나는 거야. 죽어 버린 내 육신에는 그 자식이 깃들고, 그놈은 제 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신을 죽이는 것?”
내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일그러지는 웃음이 그 사실이 전혀 유쾌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넌 그놈 목적이 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못 들었어? 그거 아냐. 그놈 목적은 그냥 신이란 놈한테 엿 먹이는 거야. 네가 그렇게 하찮게 본 놈한테 당해 봐라. 이런 심리라고.”
“…….”
알고 있었다. 본인 입으로도 말했으니까.
“…그리고 난 그딴 이유로 죽어야 하는 거고.”
그것도, 알고 있었고.
흩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그의 마음의 잔해를 굳이 주워 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내는 방법. 심장. 제단. 칼. 그가 말하는 방식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심장을 찔러 넣는다면 조건은 달성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어떠한 확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하얀 것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몸을 떠는 나를 이호연이 놀란 얼굴로 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야.”
그리 말하면서도 내 시선은 그 희끄무레한 것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다란 하얀 머리칼을 늘어트린 이가 환상과 현실에 사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쥬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내게 ‘그를 죽이는 것이 답이다.’라고 말해 주듯이.
“…….”
한참을 아무 행동 없이 지켜보자 여우는 김이 샜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처음 보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쥬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몸을 낮추어 쥬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하이얀 입김처럼 사라져 버렸다.
언뜻 그녀의 시선에 내 그림자 쪽으로도 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목소리의 잔해가 귓가에 속닥였다.
잃어버리지 마.
무엇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 불친절한 조언이었다.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깜박였다. 눈앞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그러고 보면, 똑같이 다시 태어난 것임에도 나는 그와는 달리 몸을 뺏긴다거나 하는 걱정은 없었다. 그의 전직관처럼 분명 여우 또한 존재하나 그녀는 내게 위협을 한 적은 없었다.
내가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것을 코앞에 들이밀지언정.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수갑은 좀 풀어 줘요.”
“…혼자-.”
“안 뛰쳐나갈게요.”
내 말에 강유진이 그제야 수갑을 풀어 주었다. 자유를 되찾은 왼손을 빙빙 돌리다 손을 뻗어 쥬를 강제로 일으켰다. 손에 잡힌 끈에서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아까는 멱살을 잡아서 몰랐던 부가적인 효과였다. 이걸 고스란히 티 안 내고 참는 얘도 보통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넌 나도 엿 먹이고 싶었잖아.”
“…….”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도 안 하고 너한테 피해 안 갈 방법만 찾은 거겠지.”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넌 마음대로 말하면서 나는 그럼 안 돼?”
네 인생 멋대로 휘둘리는 게 싫다고 남의 인생 휘둘러 놓고. 네 상처가 아프다고 저보다 아프길 바라며 총질이나 하는 놈이.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마치 얼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아서 침몰했다가 녹아서 떠오르는 그런 얼음.
지금 내 상태도 그랬다. 머릿속은 차갑고 한없이 침착하며 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잔잔했다.
동시에 침몰했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감정이 요동치고 울렁거렸다.
천천히 눈을 굴려 그나마 멀쩡한 부분을 찾아내었다. 티 나게 팰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끌어 올린 옷자락 속의 몸과 달리 멍 하나 없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참 밉게도 보였다.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애초에 난 그리 도덕적이지 않았다. 내게 불행을 안겨 준 놈에게 손 한번 안 올리는 박애주의적인 성향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감정 따위는 하나도 없지만, 이거라도 한 번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쳤다. 얼굴에 주먹이 닿음과 동시에 붙잡은 것을 놓자 그는 비틀거리다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강유진이 뒤늦게 내 팔을 붙잡았다.
“이미 많이 팼잖아요! 더 때리다 잘못하면 죽어요!”
“난 팬 적 없는데요.”
내가 아니라 뒤에서 가라앉은 얼굴로 지켜보는 이호연이 팬 거다. 물에 젖은 놈을 일부러 전류 흐르는 끈으로 묶어 놓은 것도 동일 인물일 터였다.
“…….”
보통의 사람처럼 나 또한 누군가를 때리면 맞닿은 부위가 아팠다. 그림자를 감지 않는 이상 내 신체나 맷집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쥬가 부러진 이빨을 뱉어 내는 것만큼 때린 내 손도 제법 아팠다. 욱신거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네 멋대로 행동했으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야.”
“…….”
“왜 그렇게 봐? 내가 널 때리는 것 정도는 예상했을 거 아니야.”
“…이미 맞은 놈을 또 때릴 줄은 몰랐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가 언제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다고.”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네가 나를 죽이지 않음에 안도해야 하는 사이지.
때린 건 난데, 어쩐지 내 손이 더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순적인 아픔이 기분 나빠 몸을 틀었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따라왔다.
쥬는… 강유진이나 주세진이 알아서 끌고 나오겠거니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비상구 계단으로 가는 내 옷소매를 조심스럽게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랑이 살리라고 건져 줬다고 했지.”
슬그머니 기어 나온 그림자가 문을 닫았다. 계단에 앉는 내 옆에 함께 착석한 이호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왤까. 왜 살려 준 걸까.”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물으면서도 나는 홀로 생각했다.
랑은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희망 고문을 하는 취미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저를 끝으로 안내하는 나비라 할지라도 그는 자애롭게 굴었을 터였다.
동시에 랑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자신은 테오그라젠스를 막을 푸른 불꽃이 더 이상 아니며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을.
자신의 끝이 시간 벌기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테오그라젠스를 다시 불러내야 함도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 방식이 내가 나비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는 거라는 사실도.
결국 랑이 쥬를 살려 주었다는 건, 내게 살인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랑은….
그의 죽음. 마지막에 기어이 내게 넘긴 힘과, 푸른 불꽃의 자리. 굳이 나비인 쥬를 살려 주었던 그의 행동. 그 모든 것이 내게 칼자루를 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답에서 새로운 답을 도출하려고 하고 있었다. 끝까지 의뭉스러운 그 사람이 그렇게 직관적인 답을 줬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 여우. 그 여우의 제스처는 무슨 뜻이었을까.
복잡해지는 머릿속이 버거워 눈을 꾹 감았다. 언뜻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올라가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싶었다.
그런 내 손을 얽어매는 온기가 느껴졌다. 슬쩍 눈을 떠 이호연을 보았다.
“죽이기 싫은 거예요?”
“…왜. 비겁한 것 같아?”
“아뇨. 싫으면 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어요.”
“…….”
모두가 내게 그를 죽이라 손에 칼을 쥐여 준다 해도 단 한 명이라도 내 손에 있을 칼을 떨쳐 내 줄 수 있다면, 그건 살 만하다는 뜻일 거다.
열세 명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야 했을 그를 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비교해 보면 분명 그랬다.
…나는 그를 동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못 죽이는 걸 거다. 혹은 이예린에게 느꼈던 감정처럼 짜증 난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고.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비슷한 운명이니까.
그러니 기껏해야 좀 아프게 때릴 뿐인 거다. 그마저 내 손도 함께 아프도록.
동정이라 하기엔 애틋하지 않고, 동질감이라고 하기엔 내가 그를 싫어한다.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이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 말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빨리 안 가면 강유진이 또 수갑을 채울지도 몰랐다. 내 말에 이호연은 웃음을 지어 주었다.
“……!”
“……!”
우리는 동시에 계단을 오르던 것을 멈췄다. 예민한 감각이 섬뜩한 적색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곧바로 이호연의 팔을 잡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로비의 중앙에서 튀어나오는 우리 때문에 놀라 소리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소리 지를 사람들 모두가 다른 아득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입구 쪽의 투명한 유리 벽 너머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허공에 뚝 떨어진 잘못된 색 배합의 물감 덩어리로 이루어진 블랙홀 같았다.
그 안으로 바로 엊그저께만 해도 직접 걷고 생활했을 사람들의 공간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세상과 세상이 엉켜 들고 뒤섞이는 과정이었다. 믹서기에 갈리는 음식물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허공에 열린 싱크홀 같기도 했다.
부서지는 땅과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사람들은 건물의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그건 이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리블의 직원들이 공포에 잠식된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침착함을 흉내 내는 그들의 몸도 차마 감출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뒤도는 나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거친 손길이었다.
“살려 주세요!”
“잠깐, 이것 좀 놓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떨쳐 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 아비규환 속에서 잘못해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마저 몰리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었다. 울부짖는 이의 손길을 간신히 떨쳐 냈다. 살려 달라는 말이 귓가에서 반복했다.
밀려드는 인파에 이호연은 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함부로 움직였다가 사람들이 다칠까 싶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인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일단은 혼자서 움직였다. 그림자를 타고 곧바로 옥상으로 왔다.
“…….”
가장 높은 곳에 서니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엉망진창으로 섞여 어둡고 암울하기만 한 저것의 너머, 잡아먹혀 사라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천공 섬. 그곳의 주인인 신도 주민도 남지 않은 땅.
우리의 것이 아닌 조각난 땅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함 따위가 아니었다. 발 디디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붉은 땅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 간 죽은 땅.
저 붉은 자국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푸른 염료가 엎어진 것 같은 모습으로 보았다.
모두가 죽어, 그 사후를 누구도 수습해 주지 않았던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땅. 붉은 것은 피였다. 삭혀져 사라지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잔해였다.
이것이 아주 질 나쁜 악몽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상 아래에서 일어나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 난간 위에 발을 올렸다. 어스름히 드리워진 보랏빛 막은 저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금이 가고 있었다.
남은 구슬 전부를 쓴다 해도 저건 못 막을 것이다. 오페리움을 보면 천공 섬과 뒤섞인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걸 장담할 수 있을까.
나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그 잘못된 해석 아래 다 죽을 수도 있었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은 거에서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하는 존재를 보며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기괴하도록 길고 거대한 팔을 내밀었다. 땅을 짚고 기어 나오는 모습이 익숙했다. 아주 오래전 아카샤의 조각에서 보았던 그 공간의 주인.
오로지 내가 들어간 아카샤의 조각에서만 발견된 존재.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피부가 똑같았다. 마른 몸에서 뚝뚝 끊어지는 살점도, 몸이 닿은 곳이 어디라도 부식시키는 것도.
거대한 하나의 눈이 빠르게 구르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입을 여니 그 안에 머금고 있던 보랏빛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고여 있던 것이 흘러내리듯 쏟아지는 액체는 맹독이었다. 연기를 피우며 녹아 가는 땅이 보였다.
“…….”
어쩌면 나에게는 푸른 불꽃이냐 아니냐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테오그라젠스도 아닌 저것으로부터도 이길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 걸 설명할 수 없었다. 이미 기가 질려 버린 것처럼.
발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져 건물을 감쌌다. 마치 옥상에서 먹을 뿌리는 것과도 같았다. 검은 것들에 감싸인 추가 건물 안에선 이제 바깥 상황을 알지 못할 것이다.
상황을 알 수 없어 사람들이 불안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지켜보기보다는 나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림자를 타고 타오르는 푸른 불들이 일제히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재앙의 기록물이라는 아카샤의 조각 안에서도 제 자리를 뺏겨 본 적 없는 그것은 입을 쩍 벌렸다.
입의 끝이 땅에 닿았다. 또 다른 끝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벌어졌다. 푸른 불이 괴물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건물을 덮고 흘러내려 몸집을 키우던 그림자가 괴물의 사지를 묶었다. 강제로 입을 닫게 만들려는 힘으로부터 몸부림치며 그것이 나를 보았다.
손을 들어 입을 묶는 그림자를 끊어 버리고 그것은 다시 입을 쩍 벌렸다. 욕심쟁이의 주머니처럼 괴물의 입 안은 끝없는 우주가 담겨 있었다.
손을 뻗어 주변에 있던 건물을 낚아채 입 안에 넣은 그것은 제가 먹은 것을 자랑하듯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입 안으로 들어간 것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어둠밖에 없는 우주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괴물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가장 맛깔난 것을 잡아먹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였다.
땅을 짚고 그것은 몸을 쭉 빼냈다. 아직 상의가 다 나온 것도 아니고,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가려지는 것 같았다.
건물을 그림자로 덮어 버리기를 잘했다. 미지의 공포에 떠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받는 공포심보다는 덜할 것이다.
그림자를 타고 그것의 앞으로 움직였다. 나를 보는 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버겁다고 느낀 걸까.
나는 왕이 아니던 그 옛날에도 기어이 저 괴물을 이겼었는데. 그 사체를 밟고 서서 끝이 없는 것 같던 공간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었는데.
이유는 하나다.
더 이상 내겐 무기가 없어서. 무한한 푸른 불을 쏟아부어 주던 류가 더 이상 없으니까. 나를 뒷받침해 주던 존재가 더 이상 없으니까.
나는 그때보다 더 강하고, 격 높은 무언가가 되었으나 그 대가로 잃은 것들을 더듬느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싸울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저 괴물이 세상을 덮을 것처럼 거대하다면 나 또한 그런 존재가 되면 되는 거였다. 이젠 등에서 기어 나오는 푸른 불꽃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의지를 따라 끝없는 푸른 불이 타올랐다. 매캐한 불 냄새, 건조한 불의 온기가 느껴졌다. 불티와 함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줄기 수 개가 괴물의 입을 틀어막고 동여맸다. 그것을 끊어내려 하는 괴물의 손에도 그림자가 가닥가닥 얽히었다.
검게 물들어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괴물을 두고 눈을 굴렸다. 저것을 소환해 낸 것이 명확한 저 이상한 블랙홀.
하늘 조각을 이용하던 다른 때와는 확연히 다른 종류였다. 하지만 저것도 일종에 게이트, 그러니까 통로라면….
어쨌든 틀어막을 수는 있다는 소리였다.
손을 들었다. 푸른 불이 그림자를 타고 움직였다. 이미 불에 타 흘러내린 것 같은 괴물의 피부를 노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괴물이 튀어나온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푸른 불을 보면서도 나는 낯을 굳히지도, 곤란해하지도 않았다.
바다를 아무리 많이 퍼 간다 해도 그 끝은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아무리 많고 많은 불을 삼킨다 해도 내 불을 끊어지지 않았다.
불 아래 생겨난 그림자. 불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불. 둘 중 하나만 멀쩡하다면 끝없이 사용 가능한 무한한 자원.
엉망으로 물든 물감 덩어리에 푸른색의 영역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색이 엉켜든 그것은 서서히 그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정말 왕이라면… 영역을 열지도 귀교 따위 없어도 그것들은 나를 따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서서히 변화하는 어둠을 보며, 그런 내 생각이 너무 잘 들어맞아 조금 슬펐다.
건물을 덮은 그림자가 조금 떼어져 나왔다. 그 틈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흘겨보다 다시 앞을 보았다.
괴물의 사지를 속박하던 그림자도 내게로 몰려들어 한데 뭉치고 있었다.
괜히 전직명이 ‘도깨비들의 왕’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속에 줄곧 숨어 살던 삿된 것들이 뭉쳤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그것들은 겁 없이 움직였다.
까맣고 까만 것들이 뭉쳐 만든 현상은 어느 거대한 가면을 쓴 무언가였다.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가면에서 푸르게 흐르는 안광이 엿보였다.
무엇을 흉내 낸 건지 알 수 없는 그림자의 놀이. 히죽 웃는 도깨비장난.
손으로 추정되는 어둠이 움직였다. 또 다른 어둠이 움직여 칼의 현상을 만들었다. 무엇이든 흉내 내어 따라 하는 그림자답게 이것은 제멋대로 바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하늘을 가르는 칼이 있다면 이러했을 것이다. 어둠을 뚝뚝 떨어트리는 검 위로 푸른 불이 타올랐다.
괴이하고도 그 정체를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림자 도깨비 같은 것이 타오르는 검을 휘둘렀다.
그건 망나니 같았다. 또한 춤추는 무희 같기도 했다. 검이 휘둘러지자 하늘에 닿을 것처럼 벌어져 있던 입이 베였다. 거대한 입에 가려져 있던 눈 위로 검이 박혔다.
눈 안에서 타오른 푸른 불이 천천히 괴물의 몸속을 메웠다. 물에 젖은 듯 번들거리던 피부가 가뭄 난 것처럼 갈라지며 그 틈에서 푸른 불이 튀어나왔다.
반절밖에 남지 않은 입에서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맹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상대는 그림자였다.
형체 없는 흉내쟁이들. 맹독에 뒤덮인 그림자 도깨비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발을 들어 괴물의 입을 짓밟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힘을 주어 눈에 박아 넣었던 제 검을 뽑아냈다. 여전히 푸른 불을 흘리는 검이 바닥을 끌었다.
푸른 불이 닿은 맹독에 불이 붙어 빠르게 증발하였다. 그것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어떻게 힘을 다뤄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를 다룬다는 것이 같으면서도 전보다 더 세심하게 굴어야 했고 정교함을 요구했다.
익숙하지 않아 조금 버거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확실히, 그전에 내 힘은 이 힘에 비해 부스러기 같았구나 하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맺히는 목 뒤가 조금 서늘했다. 그래도, 프레데터보다는 낫다.
키에에에에에엑-!
괴물을 제 머리를 땅에 박으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기다란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나 그 손이 닿은 그림자는 잠시 일렁이기만 할 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땅거미처럼 몸을 늘어트린 그것은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했는지 저를 뱉은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땅을 짚기 시작했다.
푸른 불에 뒤섞여 움직임을 멈춰 버린 게이트에서 억지로 힘주어 제 몸을 빼내고자 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손을 내렸다. 그림자 도깨비가 몸통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몸통이 잘려도 완전히 죽지 않고 버티던 바르작거리는 손이 그림자로 만들어진 도깨비를 움켜쥐었다.
하나, 그림자였다. 학습 능력 따윈 볼 수 없는 괴물의 모습처럼 이번에도, 마지막 몸짓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 허상과 현실에 경계에 걸쳐진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때와 달리… 가볍게 이겼다. 정말 쉽게.
푸른 불을 담은 그림자가 괴물의 조각난 상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먹이를 놓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악의밖에 남지 않은 삿된 것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조각조각 나는 괴물의 사체를 저들의 공간으로 끌고 가는 일련의 모습은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다시 내 발밑으로 스며드는 그것들을 보다 뒤를 돌아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 경외감과 함께 두려움이 서린 것이 보였다.
보지 않아도 지금 내 눈에 푸른 귀기가 서려 있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남달라 보일지 알 수 있었다.
이로써 나는 저들에게 같은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질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자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그리고 조금 서러웠다.
[당신의 전직명은 ‘도깨비들의 왕’. ㄱㅖ승하ㅣ⸎!#]
그러니 그 입 닫아. 네가 할 역할은 하나뿐이야. 슬며시 제 모습을 드러낸 신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끝까지 제 의지를 내보이지 않았다. 다만….
“…….”
제 몸에 드리워진 푸른 불 조각을 띄웠다가, 감추고. 띄웠다가 감추는 행동을 반복했다. 깜박이는 불빛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의 장난. 푸른 불의 본래 능력.
“…….”
손을 뻗어 스며든 신을 그림자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제 와 이러는 것조차 가당치 않아 짜증이 났다.
로비로 들어서는 나를 피해 사람들이 물러났다. 모세의 기적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런 내 행동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걸 봤음에도 나는 뒤돌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주 태연해 보이도록 걸었을 뿐이다. 등이 따끔거릴 정도의 시선을 무시하고.
“…오지 말라니까.”
그런 내 옆으로 기어이 와 그 시선을 나눠 버리는 이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호연은 거칠 것 따위 없다는 듯 말했다.
“싫어요.”
“…….”
“난,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라도 하게 해 줘요.”
그래 봤자 시선이 갈라지는 것뿐이었다. 그게 내게는 ‘그래 봤자’이지만 그에게는 ‘굳이’였다. 굳이 사서 고생하겠다는 이에게 결국 나는 흐릿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더듬고 하얀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이호연은 몸을 낮추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까이 다가온 귀에 입을 맞대며 말했다.
“그 새끼는 어디 있어?”
“…휴게실이요.”
그의 말을 들으며 몸을 떨어트렸다. 내 시선은 사람들을 스쳐 여전히 괴기하게 일렁거리는 공간을 보았다.
푸른 불이 뒤섞이며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미세하지만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움직일 터였다.
시간이 없었다.
그의 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나 좀 도와줄래?”
“…얼마든지.”
제게서 떨어지는 내 손을 붙잡고 안쪽에 입을 맞추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을 들으니 속에 있는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저 시선들과 달리 그는 나를 똑바로 보았기 때문일지, 정말 사람 같지 않은 힘이 생겼다는 걸 나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내가 이런 힘을 갖게 됨으로써 잃게 된 이에 대한 얼굴이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끝을 향해 내달리는 기분은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으니까.
***
끈이 쓸린 자국인지 그 끈에서 흘렀던 전류 때문인지 드러난 팔목이 붉었다. 맞은 뺨은 부어 있었고 입가도 터졌다. 나는 누구처럼 노련하게 패는 법 따위는 몰랐다.
그래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건 마지막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예의였다.
내가 사람으로서 취급받고 싶고 나 스스로도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다면 지켜야 할 마지막 선.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
“네 말마따나, 너무 미워하지는 마. 너나 나나 그럴 처지는 아니니까.”
쥬는 내 말에 천천히 눈을 끔벅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꽤나 길었던 망설임에 비해 그의 입을 빌려 튀어나온 말은 짧았다.
“…안녕.”
무덤덤한 인사말. 안녕. 안녕. 안녕.
그 말을 나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모든 것을 끝낼 말, 안녕 하고.
“…난, 내 말 지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옆에 놓인 끈을 잡아 내게 들이미는 것이 꽤나 속이 꼬여 보였다.
“그러시겠지.”
“…….”
“안 미워해. 그렇게 보지 마. 어차피 너 아니면 나 하나는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냥 내가 운이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소리 내어 내리치는 발이 내 그림자를 밟았다.
“어차피 놀아날 거면 그 끝은 너한테 놀아나는 게 낫지. 안 그래?”
“…….”
끈을 잡으려는 내 손보다 먼저 나간 것은 이호연의 손이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쥬의 손목을 묶었다. 그런 이호연을 물끄러미 보던 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넌 진짜 괜히 살려 줬다.”
“…….”
“재수 없는 자식.”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 덕분에 그 기묘한 침묵은 금세 깨졌다.
강유진은 묘한 낯으로 들고 있던 것을 내게 넘겼다. 그것을 받아 든 나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리 사이에 수갑은 아직 튼튼해요?”
“아직은 멀쩡한데 조만간 끊어질 것 같아요.”
“좀 봐줘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모습이 새침했지만 진실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강유진이 쥐여 준 물건을 훑어보다 쥬의 앞으로 갔다. 몸을 낮춰 제 목에 무언가를 거는 나를 그는 흘겨보았다.
“왜, 도망갈까 봐 개 목줄이라도 거는 거야?”
“네가 좀 개 같기는 해.”
“뭘 거는 건데.”
“…….”
굳이 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긴 했다. 언제 도망갈지, 언제 사라질지 몰라 거는 거였으니까.
남은 하나를 대충 그림자 속으로 넣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강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내게 가까이 와 귀에 속삭였다.
“호연이 주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쪽은 이런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믿어서요.”
내 말에 강유진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물건의 주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터였다.
나는 그저 웃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에요.”
“…….”
“배웅으로 안 끝낼 사람들이잖아요.”
내 말에 주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어 웃을 수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은 그가 정 많은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를 비롯한 모두를 공평히 아끼는 그 심정이었다.
그러니 그는 위험한 일에 다른 사람들이 엮이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것이 비록 내게 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 심정 하나로 타인을 희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주세진에게는 참 못 할 짓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데리고 나가 주라.”
내 말에 이호연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끌려 나가는 쥬의 얼굴 또한 다른 의미로 덤덤했다.
그들이 방을 완전히 나가자마자 나는 주세진을 붙잡았다. 그는 의아한 낯으로 나를 보았다.
“할 말 있어?”
“좀, 중요하게 할 말이 있기는 해요.”
내 말에 주세진은 조금 굳은 낯을 했다. 내가 굳이 내보낸 것이 이호연인지 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미묘한 침묵 사이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음…. 저도 먼저 나갈까요?”
“아뇨. 같이 들어요.”
내 말에 강유진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중요한 얘기냐 묻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 이런 위험한 일에 남을 끌어들이는 걸 애초에 원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방향성이 그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애달프게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위험성에 굴복할 인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감히 이야기를 꺼낼 용기라도 생기는 거였다.
‘모두’가 원할 결과물을 얻을 방법에 관하여.
“내가 이용하고 싶다고 하면 거기에 어울려 줄 수 있어요?”
“…뭐?”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그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이용당해 줄 수 있어요?”
강요는 안 할 것이다. 그에게는 강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주세진은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강유진은 내가 한 말의 저의를 찾겠다는 듯이 답지 않게 낯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주세진에게서 어떤 답을 듣냐에 따라 입을 열지 닫을지 결정하려는 심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린 것 같은 시간이 지나 주세진이 한 답은 상당히… 맥없는 답이었다.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는데?”
“좀… 정확하게 답 좀 해 주면 안 돼요?”
내 말에 강유진이 말을 툭 내뱉었다.
“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보며 강유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강유진은 주세진이랑 대화 끝난 뒤에 불러 따로 대화했어야 했나?
잡스러운 고민에 빠진 나를 부른 것은 주세진이었다. 그는 저와의 대화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뭘 부탁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애매한 답으로는 안 돼요. 그리고 말했잖아요. 부탁이 아니라….”
“이용이라고?”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주세진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럼 이용당해 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너를 이미 충분히 많이 이용했어.”
그 말에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갑갑함에 움찔거리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얌전해진 나를 보며 주세진은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안전할 것이라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때. 더 나은 방법이라는 이유로.”
“…….”
“나는 그때의 일을 너에게 사과하지 못했어. 감히 사과해도 되는지도 확신이 없었지. 너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지쳐 가던 사람들을 택한 것에 관하여. 끝으로 몰려가는 너희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방관한 것에 관하여.”
“그거는….”
상황이 안 좋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미 나로 인해 분쟁은 한번 일어났었고 또 내 편을 들면 그 지옥을 끝낼 수도 없으니까….
고개가 기울어졌다. 또 불편한 이야기다. 왜 이럴 때 그런 옛날 일들을 끄집어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걸까. 약간의 원망이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가 이어 하는 말에 결국 내 감정은 또 저 밑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니 이용하고 싶은 만큼 이용해 봐. 이용당해 줄게.”
“…….”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내팽개쳐진 감정은 나름 꿍얼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금세 묻혔다.
바다. 정말 깊은 바다 같은 색이었다, 그의 눈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나를 주세진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보았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의뭉스러운 조각들을 끌어모아 낸 결론에 관하여.
내가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방 안에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만 장르가 달라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