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불꽃과 나비 (29/34)

#푸른 불꽃과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낙원을 여는 열쇠는 둘이다. 푸른 불꽃과 나비. 이 점에는 모순이 있었다. 나는 온전한 푸른 불꽃이 아니며 나비…는 둘 중 누구를 말하는지가 모호하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뜻이 된다.

또한 처음에는 내가 나비를 죽임으로써 낙원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천공 섬의 나비가 바라는 것은 테오그라젠스의 끝. 그는 전직관의 형태로 이 세계에 있었다. 쥬가 죽는다면 영원히 그 조각 안에 갇혀야 한다는 뜻이 된다.

만난 것은 한 번이지만 그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지켜보아야 만족할 인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낙원을 여는 것을 불가하면 동시에 이는 테오그라젠스가 우리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 또한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부분만을 생각한다면 이대로 끝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세상사가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나 하나가, 나와 쥬가 낙원을 여는 것만이 ‘낙원’을 열어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다 하더라고 툭하면 간섭하고 사람 목숨을 제 장난감으로만 아는 그 신이라는 놈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은 끝을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테오그라젠스를 눈앞에 두기 위해서는 낙원을 열어야 한다. 사도들이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도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테오그라젠스는 불러내야 할 것이고, 그걸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이번에는 마티의 의도가 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도를 이기고 싶으면 내게 온전해지라 한 이유가 처음부터 낙원을 열기 위한 온전한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작질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가설이 모두 맞는다는 가정하에 쥬가 온전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신의 첫 번째 종이라 하기에는 약하다.

그것이 불완전하기에 그런 것이라면 그 또한 나비로서 온전해지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온전해진 푸른 불꽃과 나비만이 할 수 있는 것. 그 둘이 있어야만 이뤄낼 수 있는 낙원의 열쇠….

내가… 해야 할지도 모를 살인.

소파에 몸을 묻는 내 발치에 무언가 툭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바로 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꼬마 도깨비들이 오랜만에 만난 주인이 반가운지 열심히 폴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옷이 바뀌었네?”

손을 내리니 그 위로 폴짝 뛰어오른 검은 가면의 깨비가 내 말에 옷을 자랑하듯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에 따라 소매에 달린 하얀 한삼이 길게 늘어졌다.

검은 가면의 깨비가 입었던 검은 옷차림을 이제는 색동저고리를 입었던 다른 깨비들도 모두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손을 들어 작은 가면을 툭 쳤다.

꼬마 도깨비는 하지 말라는 듯 한삼에 가려진 작은 손을 들어 가면을 꾹 쥐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 말할 줄 알아?”

가면 밑에 드러난 작은 입이 오물거렸다. 빠끔이는 입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대화는 안 되는 건가.

꼬마 도깨비를 다시 내려 주었다. 문밖에서 가까이 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그림자를 타고 사라지는 꼬마 도깨비들을 지켜보는데 검은 가면의 도깨비 하나만 자리를 지켰다.

자세히 보니 아직도 입을 뻐끔거리며 무언가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

손을 들었다. 그림자 줄기 하나가 스르륵 움직여 문을 잠갔다.

바깥쪽에서 무어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어렴풋하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작게 퍼져 나가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ㄱ….”

“…….”

“…공, 주….”

도깨비는 한삼에 감긴 제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듣는 그 목소리는 아이의 것처럼 가늘었고, 무척이나 작아 조심스러웠다.

“공…주, 아니야.”

“…그러면?”

“왕.”

“…….”

“왕, 이야.”

“내가… 왕이야?”

내 질문에 꼬마 도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덧없을 정도로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왕이라면 랑은….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쉽게 내가 왕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이들에게 있어 본인들의 왕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누구든 상관없이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몇 년을 함께하며 정이 들었던 상대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정을 갖고 대한 것이 살아 있기는 한 존재인지, 아니면 단순히 귀여운 외양의 탈을 뒤집어쓴 본질적으론 무생물인 존재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꼬마 도깨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 주었다. 제게서 떨어지는 내 손을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왕은!”

“…….”

“약, 속했어!”

“약속?”

“응! 나 봤어. 약속! 여우랑 왕이랑 약속했어!”

말을 할수록 꼬마 도깨비의 발음은 정확해지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들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건… 설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한번 흘겨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들이 들어오면 이 도깨비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모르쇠의 자세로 나올 것이다.

꼬마 도깨비는 나의 그런 다급함 따위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깨비를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그림자로 잠갔던 문을 다시 열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가 나를 삼켰다.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그림자 안에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제게는 있어 집이나 다름없는 공간으로 와서 그런 것인지 꼬마 도깨비는 신이 나 뛰어다니려고 했다.

그런 꼬마 도깨비의 옷을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왔다.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던 꼬마 도깨비는 내 낯이 굳은 것을 보더니 얌전히 몸을 늘어트렸다.

“네가 그 약속을 어떻게 알아?”

내 물음에 꼬마 도깨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질문의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마냥 귀엽게 보였을 모습이 지금은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봤으니, 까!”

“그러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웅?”

“…칼.”

손잡이 없는 검은 칼. 새카맣고도 그 위에 새겨진 음각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물건. 그건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에 가까웠다.

랑에 대한 것을 조사하면서 그런 물건을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제례용 혹은 제사용으로 만들어진 장식 칼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실용성은 없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한 것들.

눈앞의 꼬마 도깨비는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 무생물인 칼이었다. 랑이 갖고 있었던 만큼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와 동시대를 건너온 옛것이었다.

아무리 랑이라 해도…. 심지어 한때는 미숙하던 그 시절의 랑이라면 물건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수많은 주변의 것들 중 하나가 지금 내 앞에 있는 도깨비일 수도 있었다.

“너, 칼 모습일 때 둘이 무슨 얘기하는지 봤어?”

“응! 봤어. 들었어.”

“…….”

그런데 이 모든 게 단순 우연일까.

쉽게 생각한다면 그 검은 칼의 주인이 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랑은 그 칼을 내게 내밀 때 당연하다는 어조로 내 것이라 일렀다.

몸을 낮추었다. 잡고 있던 조그마한 옷자락을 놔주자 꼬마 도깨비는 바르게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너는 내게로 오기 전 누구의 것이었을까. 아주 오래전에 품었어야 할 의문이 지금에 와서야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푸른 불의 빛이 검은 가면 위로 넘실거렸다. 웃는 눈의 휘어짐이 새겨진 가면 안쪽에서 푸른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삼을 휘날리며 빙그르르 돈 꼬마 도깨비는 팔을 활짝 펴며 제 소개를 했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손에 얼굴을 덮었다.

제사를 위한 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제사 때 쓰던 검.

제사의 종류는 산신제(山神祭). 그리고 그 제사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랑.”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운명에 놀아난다는 건 정말 거지 같은 일이라고. 그건 맞는 말이다.

당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한 걸까. 당신 또한 내게서 무엇을 바란 건가.

그리고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기다란 하얀 머리칼을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

그늘이 진 벽에서 스르륵 나오는 나를 본 몇몇이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귀신이라도 봤어요? 왜 그렇게 놀라요.”

“…방금은 좀 비슷했어요.”

박상호가 조금 희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귀신같이 생겼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세진과 강유진, 이호연은 왜인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한 오정인이 이제 곧 올 거라며 귀띔을 해 주었다.

나보고는 좀 쉬고 있으라고 하더니 그새 나간 듯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그게, 류가 자는 동안 조사를 나갔는데 누굴 좀 생포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생포?”

“네. 그래서 길드장님이 우리 먼저 돌아가라고 했어요.”

“뭐를 생포하는 건데요?”

“그건 저희도 잘…. 갑자기 돌려보내진 거라서요.”

그럼 이들은 돌아오고 이호연과 주세진이 불려간 건가.

조금 전에 문을 잠그고 뭘 했는지 열었을 때는 왜 없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 이들과 달리 나는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뭔가 기분이 조금 찝찝했다. 그런 내 상태를 흘겨본 김수혁이 슬쩍 입을 열었다.

“류도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하던데요. 혹시 아는 거 있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모르겠는데요.”

의문에 빠진 그들을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보며 손민경이 물었다.

“또 어디 가게요?”

“안 가요.”

실제로 나는 몇 발자국 걷지 않았다.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던 박상호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

“손?”

답하는 어조는 의문문이었지만 그는 착실하게 손을 내밀었다. 붕대가 칭칭 감긴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뒤늦게 박상호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이거….”

“수혁 형이 그랬어요!”

“…….”

슬쩍 뒤를 보니 김수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박상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아닌 거 알아.”

“맞는데….”

순식간에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을 트롤 팀 킬러로 만들어 버린 박상호는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런 그의 손을 잡아 행동을 제지했다.

“맞다 치고.”

“나 아니…!”

김수혁이 억울하다는 듯이 뭐라 말하려 일어섰지만, 그 옆에 앉아 있던 이나연이 잡아당기자 곧바로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소파 위였기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그래도 소문에 비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아니야. 네 말대로 이 정도라는 건… 봐줬다는 거거든.”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박상호의 손에 감긴 붕대를 태웠다. 그 아래 드러난 손의 상태가 심각했다. 이걸 눈으로 보고 느꼈으면서 소문에 비하면 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문제는 그 말이 맞다는 거였다.

푸른 불이 제 손을 감싸자 박상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리 뜨겁지도 않고 아픔이 존재하지도 않자 금세 신기하다는 듯한 감탄이 나왔다.

박상호의 치료가 다 끝날 때쯤 문밖에서 익숙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손을 털어 아직 남은 불씨들을 꺼트렸다.

문을 염과 동시에 피 냄새가 풍겼다. 저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내가 느낀 향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호연은 피에 절은 모습이었다.

제 발로 잘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아선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저 꼴이 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온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 뭘 하고 온 거야?”

“그게….”

머뭇거리며 문 앞을 막는 이호연을 비집고 강유진이 들어왔다.

“설명은 내가 할 거예요.”

“…….”

그렇게 말하는 강유진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다. 과학자 콘셉트라며 항상 하얀 가운을 입던 그녀의 옷 또한 원래 붉은색이었나 착각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니 피 냄새가 이 정도로 진동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세, 길드장님은요?”

“지하실이요. 이름 막 부르는 거 아니까 본인 앞에서만 주의해요.”

설레설레 고개를 돌리며 가운을 벗은 그녀가 지친 낯으로 걸어왔다.

“어디서 뭘 하고 와야 그렇게 돼요?”

오정인이 꺼내 준 하얀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뗀 강유진이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님 스토커 잡아 오느라고요.”

“…네?”

강유진과 마찬가지로 피를 닦아 내고 있던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호연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이호연 대신 강유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류가 잡았다는 거대 뱀을 좀 보러 갔어요. 몸 전체가 그 금속으로 되어 있다길래. 마침 필요했거든요. 절단 방법도 알아내야 하고 혹시 그걸로 무기를 만들 수는 없나 해서요.”

“그거 제련 불가능하잖아요.”

“원래는 그렇지만 마침 프레데터를 만든 장인을 류가 자는 동안 잡아…, 모셔왔거든요.”

“프레데터에 대해서 물으려고요?”

“네. 아무리 들어도 원래 알려진 거랑 너무 달라서요.”

하긴. 프레데터의 그 수 많은 글귀 중 내게 일어났던 일 같은 것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었다. 만든 장본인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겸사겸사 그쪽으로 가서 뱀 사체 좀 확보하려고 했죠. 크기가 어떻든 정인이만 있으면 바로 옮길 수 있으니까요.”

“…….”

“그런데 알림이 울리더라고요. 왜 옛날에 류가 민간인 스토킹하는 놈이라고 찾아 달라 한 적 있었잖아요. 내가 깜빡하고 기록을 안 지웠더라고요.”

“그거 저번에 걔가 커넥터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좀 힘들었지만 새 커넥터를 찾아내 기록해 두었죠.”

그게 불법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기록을 안 지우면 알람이 울려요?”

“반경 5Km 이내면 울려요.”

그래서 중간에 다른 이들을 다 되돌려 보내고 이 일에 대해 잘 아는 주세진과 그놈을 잡을 역으로 이호연까지 끌고 간 건가.

그럼 왜 이렇게 피 투성이인 거지? 솔직히 말해서 쥬는 싸우는 쪽으로는 별로 재능 없었다.

저 피가 그에게서 난 거라면 이호연이 그 정도로 상처를 낸 뒤에야 잡을 수 있던 상대라는 뜻이 된다. 말이 안 된다.

내 의문이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강유진은 묘한 얼굴을 했다. 피가 끈적하게 들러붙은 머리를 헤집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발견했을 때, 그 사람. 이미 중상이었어요.”

“…중상?”

“네. 저러다 죽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거든요.”

“…직접 볼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이호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힐끔 그쪽을 쳐다보니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예린 씨도 좀 불러 주세요.”

“이예린 씨는 왜요?”

“감이 좋으니까 거짓말 탐지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 해서요.”

물론 농담이었다. 하지만 강유진은 내 농담 속에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마뜩잖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인정하는 거였다. 푸른 불꽃과 나비. 우리는 끝이 날 때까지 얽혀 들어갈 거고, 만날 것이다.

신의 탄생 같은 거에서 원래 예언자는 빠질 수 없는 법이었다. 쓸 수 있는 수단과 재능은 다 가져다 이용해야 했다.

간단하거나 단편적인 것은 알아도 푸른 불꽃이며 나비며 그런 것들을 깊게는 모르는 이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까지가 본인들이 침범해도 되는 곳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은 태연한 얼굴로 빨리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은 미안하고도 고마워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방문이 닫히자 강유진은 안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곧바로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 사람 몸에 생긴 상처, 스티브라는 사도가 낸 것과 유사해요.”

“…….”

“힐러들을 붙여 놓기는 했는데, 아물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류한테 먼저 물었어야 했어요.”

“뭐를요?”

“민경이를 불러서 제대로 치료해 줄 건지, 아니면 어느 정도 선만큼만 치료할 것인지.”

“…….”

상위 호환 전직을 한 사람을 데리고 오면 치료는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생각해 보니 이호연의 상처도 일반 치유 계열들이 치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직접 보고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어디 지하의 비밀 공간 같은 곳으로 가나 싶었는데 의외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사옥 내 치료실이었다.

본의 아니게 몇 번 와 봤던 곳이라 익숙했다. 제법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자 구름을 손에 쥐고 서 있는 이예린이 보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했다.

“…….”

문 앞에 서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머뭇거리는 내 손을 이호연이 잡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손에 고개를 돌렸다.

핏자국을 채 다 지우지 못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갈까요?”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이 그거였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가 잡지 않는 손을 들어 눈 밑에 틘 피를 지워 주었다.

“아니.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안 돌아갈 거야.”

이번 한 번에 난 모든 걸 다 끝낼 거니까.

이호연은 천천히 내 손을 놔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잡혔다. 그의 손으로부터 전달되었던 온기가 손잡이의 차가움으로 인해 사라졌다.

문을 열었다. 이호연과 강유진에게서 나던 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짙은 피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때마침 내 쪽으로 날아오는 의료진을 잡아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숨을 들이켜는 그의 옷이 홀딱 젖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 전체가 물바다였다. 투명한 것과 피가 섞여 분홍빛을 띠는 것이 두서없이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주저앉은 의료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게, 환자가….”

“아.”

대충 뭔지는 알겠네. 물로 이루어진 나비 떼가 우리 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손을 들자 제등이 그림자를 타고 튀어나왔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등 안에서 푸른 불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나비 떼가 증발했다. 기다란 제등의 몸체를 손에 쥐고 그것을 끌며 걸었다.

“전부 데리고 그냥 가세요.”

의료진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일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려한 불 쇼에 시선이 쏠려 있었다. 눈치를 보던 의료진들은 내게 인사를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방의 절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던 커튼이 뜯어졌다. 하얀 천을 붉게 물들며 그 위를 뒹구는 둘을 보며 손끝을 움찔거렸다.

주세진을 밀쳐 낸 쥬는 잠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더니 다시 주저앉았다. 검은 옷이 적갈색으로 보일 정도로 피에 절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상처는 어찌 보면 예상했던 데로 심각했고, 조금은 더 했다.

“…….”

하지만 그것들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검은 문신이 새겨진 쪽의 눈이 완전히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반대쪽 눈도 절반이 넘게 하늘색을 잃은 상태였다. 머리카락은 이제 거의 회색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커튼 위에서 바르작거리던 쥬가 손을 들자 물의 나비가 그 손안으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총의 형태로 바뀌었다.

“리블의 길드장이 몸싸움도 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속 편한 자식은 아니라서.”

저거 옛날에 내가 했던 욕인데…. 그때 욕을 주세진 앞에서 소리 내서 했었나?

잠시 고민하다 그림자를 감고 그들에게로 이동했다. 내가 본인들 바로 곁으로 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쥬의 등 뒤로 온 나는 곧바로 발을 들어 그의 발을 걸었다. 옆으로 넘어지는 쥬를 보며 그제야 내가 왔음을 인지한 주세진이 몸을 움찔거렸다.

“진짜 질리게도 만나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쥬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손을 들었다. 발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가 쥬의 몸을 포박했다. 신나게 치고받고 싸워서 그런 것인지 치료되었던 상처들이 다시 벌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언제 왔어.”

“어떤 의료진이 쫄딱 젖어서 제 쪽으로 날아올 때부터요.”

인제 보니 주세진의 차림새도 평소의 단정함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기는 한데….

“야.”

다리를 툭 차며 나를 부른 쥬가 제 손을 묶은 그림자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풀어 줘.”

“싫은데.”

“…너 다른 방법도 많은데 일부러 발 걸었지.”

“응.”

설렁설렁 대답하며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빛이 상처 위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정신도 못차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조금 전인데 너무 팔팔하게 움직인다 싶었다.

“따로 치료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강유진 또한 그의 몸이 서서히 치료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자 그것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쥬를 보았다. 내가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버리니 내 쪽에서는 나비 문신도 보라색 눈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너 때문이야.”

“…….”

“너 때문이라고.”

나를 노려보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무엇을 갖고 나를 탓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좀 알 것 같아요?”

“전부터 말했지만, 예언은 만능이 아니에요.”

이예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을 쥬에게서 떼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는 금색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넌 내 미래 못 보니까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마.”

쥬의 말에 이예린은 낯을 찌푸렸다.

“어떻게 확신해요?”

“당연한 거 아니야? 전직자는 전직관의 능력을 뛰어넘지 못하거든.”

그의 말에 이예린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나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만약 그녀의 전직관인 에스텔리니움이 나비에 대한 것을 예언했다면 그녀는 그를 따라 신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릴 인간의 길을 따라 걸으려고 하겠는가.

같은 맥락이라면 이예린은 나비라는 존재들의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쥬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차라리 나랑 얘기하는 게 낫지 않아?”

“무슨 얘기.”

“단둘이. 저 사람들 다 내보내고, 너랑 나랑 둘이서만.”

“……”

“그렇게 보지 마.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굳이 따지면 저쪽이나 나나 말하는 정도는 비슷한 것 같은데.”

그가 가리키는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쥬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기 전에 둘 사이의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리 절절하고 애틋해도, 결국은 당사자들이 아니면 모르잖아. 푸른 불꽃과 나비도 너와 나를 말하는 거니까.”

“…….”

“내가 말했지? 너 때문이라고. 너는 구심점이고, 난 인도자야. 어느 쪽이 먼저 그릇이 완성되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아?”

그래. 그것참…. 답이 정해진 질문이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이들에게 잠시간의 시간을 주기를 바라는 말을 했다. 끝을 볼 거라면 한 번쯤은 그와 거짓도 비꼼도 없는 대화를 해야 함을 알고는 있었다.

알기는… 했다.

마지못해 방 밖으로 나가는 이들을 향해 쥬가 말했다.

“도청하지 마.”

강유진은 그 말에 혀를 차며 숨겨놓은 구름 조각을 회수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간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나는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

“그냥. 미리 알려 주려고.”

그는 잠시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라기보단 내가 뭘 하든 수긍하는 애정이었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뒤돌아 쥬를 보았다. 그는 설렁거리는 태도로 제 몸을 묶은 검은 그림자 줄기를 흘겨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제힘으로 끊어 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몸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상처 스티브였나, 그 미친놈이 낸 거랑 비슷하다고 하던데.”

“맞아. 스티브가 이렇게 해 놨어. 분조장에 급발진하는 놈이거든.”

“아무리 그래도 뜬금없이 이랬을 리는 없고…. 너지? 그때 그 총소리.”

“그때를 그때라고 하면 알 수 없지 않나.”

그의 말에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가볍게 툭 쳤다. 남이 본다면 상당히 불량해 보일 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대화하자고 했으면 똑바로 말해. 질질 끌지 말고.”

“…넌 정말 성격이 나쁜 게, 답을 알고도 묻는다는 점이야.”

“…….”

그의 말로 답은 되었다.

“내가 푸른 불꽃이 되면 넌 나비가 되는 거야?”

“아니. 네가 온전한 푸른 불꽃이 되면 그놈이 나비가 되는 거지. 나는 사라지고.”

“…….”

“나는 아주 기나긴 꿈에 빠질 거야. 내 몸은 내 것이 아닌 게 되고 내 인생도 그때부터 정말로 내 것이 아닌 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어색할 정도로 담담했다. 그것은 각오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종류의 담담함이 아니었다.

이미 경험해 봤다는 듯한 종류의 침착함이었다.

“처음에는 말이야, 그냥 널 죽일까 고민도 해 봤어.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또 싫더라고.”

“…….”

“뭐 한번 싸우자마자 이건 못 이기겠다 싶었던 것도 있지만.”

“내가….”

“네가 푸른 불꽃으로서 온전해지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야. 사도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낼 거야. 그것들이 불러내기 전에 차라리 네가 불러내는 게 더 나을걸.”

“왜?”

“그놈은 신이거든. 어떤 방법으로든 이곳에 나타날 거야. 네가 불러내는 게 그나마 사람이 덜 죽으려나? 원래 신을 부를 때는 제물이 필요하다고들 하잖아.”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주었던 천공 섬의 모습처럼 이곳도 그렇게 물감을 부어 버린 것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내가 그 신을 부른다면 죽는 건….

생각을 끊었다. 쓸데없는 감정이 생길 것 같았다. 이제는 거의 다 나은 그의 상처를 훑어보았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챈 그는 예의 그 밉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레코디아를 만난 감상은 어때? 참 짜증 날 정도로 이상하게 바르고 미친놈인데.”

“…….”

“근데 그놈 말, 너무 깊게 생각은 하지 마. 사람은 뭐 어쩌고저쩌고 말은 많은데 그래봤자 네가 안 하면 신을 불러낼 놈이 그놈이거든.”

“넌 왜 이런 걸 일일이 말해 주는데?”

“…지금 아니면 대화할 일 없을 테니까. 다 끝나기 전에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와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서 아무 말이나 일단 다 뱉고 보는 거야.”

“…….”

“이렇게 정답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이걸 정답답고 할 수나 있는 걸까. 피 냄새도, 그의 모습도 정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냥…. 그래, 꿈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금세 사라지고 잊고 존재하지 않던 것이 돼 버리는 그런 꿈 말이야.”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을 그렇게 의미 없는 무언가를 취급하게 된다면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이 떠오르면 묻었다. 지금은, 당장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애써 뒤로 밀어 두었던 문제를 나 스스로가 입에 담았다.

“…내가 너를 죽이면, 낙원이 열리는 거야?”

“글쎄.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게 없기는 하지. 제물이 필요하기도 하고.”

“넌, 뭘 어쩌고 싶은 건데.”

“…….”

“…….”

그는 침묵을 유지하다 실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널 신기해하는지 알아? 이미 다른 길은 없고 정해진 것들 중 가장 나은 선택을 해야 하는데, 넌 자꾸만 다른 길로 새려고 한다는 점이야.”

“…….”

“지금도 봐. 넌 자꾸만 내가 네 손에 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지 알아내려고 하잖아. 왜? 나한테 정이라도 들었어? 왜 자꾸만 내 의견을 물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이어지던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입꼬리는 내려가고 어조는 거칠어졌다. 숨소리가 가빠졌다.

“나한테 묻는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네가 그렇게 해 봤자!”

“…….”

“…너나 나나, 어차피 휘둘리는 건 똑같아.”

마지막은 자책, 혹은 자괴감에 얼룩진 어조였다. 말을 해도 꼭 밉게도 한다. 그래서 나도 거침없이 미운 말들을 골라 답했다.

“난 네가 싫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아하지는 못할 것 같아.”

“…….”

“근데 네가 굳이 내 손에 죽어야 한다 생각할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아.”

그는 내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고약할 정도로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더 이상 피가 웅덩이 위로 퍼져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제 와서 편 먹고 함께하거나 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는 없었다.

내가 하지 않더라도, 사도들이 실패한다고 해도 테오그라젠스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물을 감당해 내는 것이 가장 버거울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작은 것을 감수하겠다고 눈앞의 그를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정의나 호감의 유무 같은 것으로 결정 나는 게 아니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해야만 하는가에 따른 선악을 따진 생각도, 도덕적 생각도, 철학적인 생각도 아니었다.

그냥 싫은 거였다. 내가, 그냥 싫은 거였다.

침묵하는 나를 바라보던 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코디아는 언제나 차선책을 만들어 놔.”

“…….”

“이미 그 녀석은 너나 내가 온전해지지 않더라도 신을 부를 수 있는 준비를 끝마쳤어.”

“그걸 알려 주는 이유는 뭐야?”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단 걸 알면서도 나도 말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굳이 필요 없는 말을 하는 것뿐이야.”

“…….”

이걸 그 나름의 사과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런 세상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세상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리 못 해도 얼굴을 마주 보며 인사는 할 수 있는 사이는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그 일말의 아쉬움에 대한 위로인 거였다.

그를 놔주었다. 제 몸을 포박하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그런 그에게 나 또한 굳이 필요 없는 말을 말했다.

“처음부터 붙잡고 있을 생각 없었어.”

“…….”

그가 어떠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야는 돌릴 수 있어도 귀는 막을 수 없었다.

“…사도라는 것들을 죽일 생각을 하지 마. 그것들은 죽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니까.”

“…….”

“하지만 꼭 죽여야만 없앨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

“……?”

“그리고… 안 죽었어. 그 사람.”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의 나비 떼에 갇혀 사라져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누굴 말하는 건지는 네가 한번 잘 알아봐.”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는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네 손에 죽을 생각 없어.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의 손에 휘둘려 죽기도 싫고. 나는,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마.”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잔상처럼 남은 몇 마리 나비가 내 곁을 알짱거리다 흘러내리는 것처럼 사라졌다.

방 안에는 그가 있었던 것이 꿈이 아니라는 듯한 선명한 흔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눈에 담다 문을 열었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뭐라 할까 고민하다 결국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도망갔어요.”

이렇게 말해 봤자 모를 리가 없었다. 몸이 성치도 않은 이를 내가 놓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의심할 것이다.

내가 그를 놔주리라는 걸 아는 건 이호연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조금의 비난 없이 내 말에 수긍했다. 다른 사람들마저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걸 놓치냐며 비난한들 그건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몫인 것이다.

이예린은 어딘가 애매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내 발밑에 그림자를 힐끔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강유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세진은 무표정한 낯으로 문 안쪽을 힐끔거렸다.

“일부러 놔준 거지?”

내게 그리 묻는 그의 어조는 잔잔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회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

짤막한 내 대답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라 더 안 하나 싶어 그를 살펴봤지만, 그 질문이 전부였다.

“…….”

그런 사람이었다. 원래부터가.

나 혼자 뭐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알 수 없는 탈력감이 들었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는 적막 속에서 쥬와 했던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내가 푸른 불꽃으로서 온전해지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그가 아닐 것이다. 같은 얼굴, 같은 사람이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일 터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나는 정말로 어리광이나 부리는 유난스러운 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그 정도로 운명에 놀아나는 것 같냐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건 명백했다. 그와 나는 비슷한 길을 걸어가야만 하면서도 그 방식과 겪어야 하는 것들이 달랐다.

그런 그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자격이 과연 내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런 그를 죽일 자격이 과연 있을까.

그 선택권이 나한테 있기는 한 걸까.

사도들은 이미 자신들의 신을 불러낼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 준비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테오그라젠스는 알아서 부활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또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기회만 주고 반응이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

지금 느끼는 가장 큰 후회는, 그의 이름을 조금만 더 성의 있게 지을 걸 그랬나 하는 자그마한 것이었다.

***

사도들이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낼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세진은 곧바로 그들이 있을 만한 장소를 탐색했다.

그가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내가 할 일은 문제의 프레데터를 만든 장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잡아 왔다던 장인은 대부분의 전직자들이 그렇듯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양은 삼십 대 정도였다.

겉모습으로 보이는 비범한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사람이 정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름 있는 무기를 만들어 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색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이의 앞으로 프레데터를 꺼냈다. 그림자 속에서 끌려 나오는 제 작품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아연함이 서려 있었다.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걸 정말로 훔쳐 오셨군요.”

“소문이랑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

태연한 내 말에 그는 조금 질린 낯을 했다. 그런 그를 두고 프레데터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반사적으로 막았다.

“괜찮아. 이상하게 갑자기 얌전해졌거든.”

내 말에 그는 검붉은 칼을 힐끔거렸다. 그림자 줄기들에 묶여 밖으로 끌려 나온 프레데터는 확실히 저번에 보았던 그 이상하도록 위험스러운 기세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것을 느꼈는지 장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한 걸음으로 검 앞으로 왔다. 그런 그를 배려할 겸 걱정을 지우지 못하는 이호연을 위해 검에서 손을 놨다.

그림자가 알아서 들고 있는지라 육안으로 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걸 들고 휘두르는 것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철분제 먹고 휘두르기는 했죠.”

내 말에 그의 얼굴은 더욱더 심각해졌다. 내가 궁금한 것은 프레데터의 능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마티로 인해 꿈에 갇혔을 때 일어난 일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해 주자 장인의 얼굴에 의구심이 서렸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이 검이 당신이 꿈에서 깨도록 자극을 주었다. 뭐, 그런 말인가요?”

“좀 많이 위험하기는 했지만 일단 의도는 그거였다고 생각해요.”

그때 내가 그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채도록, 정신을 빼 먹지 않도록 도운 것에는 분명 이 검이 주는 아픔 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프레데터가 나를 주인이라 인정해서 그런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저 검이 그럴 리는 없고.

제게 손대지 않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검이 제멋대로 그랬다는 것도 이상했다. 장인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붉은 칼날 위에 손을 올렸다가 잽싸게 거두었다.

그러고는 어지럽다는 듯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만 보면 전혀 바뀐 게 없는데…. 혹시 만지면 어질거리거나 하는 느낌도 안 드나요?”

그의 말에 프레데터 위로 손을 올려다보았다. 느껴 본 적 있는 어질거림이 느껴지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반응을 기민하게 눈치챈 장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고뇌하는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검에서 손을 떼었다. 전에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일어났던 일 같은 건 없었지만 피 빨아 먹는 건 여전했다.

이호연은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것 같았지만 원래의 문제점은 그대로라는 걸 알자마자 마뜩잖은 얼굴을 했다.

때마침 장인의 입이 열렸다.

“…뭔지는 알 것 같군요.”

장인은 그때 있었던 기현상이 무엇인지 알아낸 듯 복잡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를 보는 얼굴이 상당히 미묘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이 검은 그때 당신을 도운 것이 맞아요. 아마 나름대로 지키는 방식이었던 터일 테죠. 당신의 원래 무기가 남의 손이 닿았음에도 적당히 봐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검이 절 주인으로 인정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럼 왜 날 도운 거지? 우리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장인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이 만든 명작을 보는 시선에 약간의 혐오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프레데터가 당신을 지킨 이유는… 처음으로 찾은 제대로 된 숙주가 죽는 게 싫어 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숙주?”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

그러니까 처음으로 만난 튼튼하고 제대로 된 숙주가 죽는 게 아쉬워 도왔다는 소리였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제 명작을 이딴 것으로 분류해 버리는 내 말에도 장인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제가 만들어 낸 것에 대한 회의감은 엿보였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걸 안 쓴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딴 거라도 당장은 필요한 것이 현실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고 여전히 제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인에게 물었다.

“이 검, 못 쓰게 돼도 상관없나요?”

“못… 쓰게요?”

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연신 프레데터를 힐끔거리는 것이 혐오감과 애틋함은 별개의 감정인 듯했다.

그런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안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레데터가 박물관에 기증된 이유는 그 위험성과 중요성 때문이지, 이 물건의 실질적 주인은 여전히 이 명작을 만든 장인이었다.

제 물건에 이어 본인까지 납치되어 온 현실에 어안이 벙벙할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물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류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게 그….”

“끝에를 좀 봐 주세요.”

내 말에 그의 시선이 제등의 끄트머리로 움직였다. 놀람으로 크게 뜨였던 눈이 경악을 더욱 커졌다.

“이 귀한 게 왜!”

“…….”

그 귀한 것을 귀하게 다뤄 본 적이 없는 나는 괜히 찔려 입을 꾹 다물었다. 한탄이 담긴 눈으로 망가진 제등의 끝을 눈으로 어루만진 그가 뒤늦게 제 작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못 쓰게 돼도 되냐 물었는지 알아챈 듯했다.

“나무로 된 지팡이로는 공격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나무는… 애초에 뭔가는 베거나 하는 재료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거 지팡이, 하아….”

할 말 많은 얼굴이었다. 그는 복잡스러운 심정으로 제 작품을 힐끔거리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죠. 세상이 또 미쳐 돌아가는데.”

“…고맙습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복잡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빛 좋은 개살구 아니면 장식용 취급이었는데….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조롱거리가 되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그 또한 제법 속을 썩였을 것이다. 장인은 조금 애잔한 얼굴로 제 작품을 보다가 방을 나갔다.

이 이상 자리를 지키면 내게서 검을 탈취해 갈지도 몰라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주인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실험뿐이었다.

강유진이 오정인의 능력으로 옮겨왔다는 뱀 사체는 현재 사옥 지하 연구실에 놓여 있었다.

그만한 크기를 수용할 만한 곳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여태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나 자신에게도 좀 놀랐다.

딴생각에 빠진 나를 힐끔거리던 이호연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의 잔상에 퍼뜩 놀라 반사적으로 큰 소리가 나왔다.

“뭐 해!”

“…….”

내 말을 들었음에도 이호연은 프레데터로부터 손을 떼지 않았다. 단검을 묶어 두고 있던 그림자들이 그의 손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강제로 검붉은 단검으로부터 떨어트렸다.

“그냥 확인 좀 해 보려고 한 것뿐이에요.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더 오래 버티나 해서.”

“…….”

“화났어요?”

“…안 났어.”

이런 일로 뭐라 하기엔 지금까지 위험한 짓은 내가 더 많이 저질렀다. 조금 복잡스러운 기분으로 프레데터를 다시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주세진이 오페리움을 통해 사도들의 위치를 찾아내기 전까지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초조해지는 것이 명확한 이호연을 보다 일단은 움직이기로 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 연구실은 언젠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조금은 수상쩍은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넓고, 뱀의 사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원래 이곳에 무엇이 있었던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쥔 것을 휘둘렀고 예의 검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것들은 시리게 빛나는 금속을 긁어냈다.

그것을 훑어보며 그림자를 팔에 감았다. 다시 한번 더 힘주어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금속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뱀의 사체가 겉면만 금속으로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각난 뱀의 사체들을 체크하던 강유진은 검붉은 기운을 흘려 대는 프레데터를 힐끔거리다 내게 물었다.

“상태는 어때요?”

“헌혈한 직후랑 비슷해요. 좀 어지러운 거 빼고는 버틸 만해요.”

“저 금속 자를 때는요?”

“확실히 칼은 나무가 아니라 철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마냥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날이 무딘 칼을 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프레데터의 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면 역시 저 금속과 같은 재질이 아니라서인데. 힘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기껏 갖고 온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몇 번 더 그것을 휘둘러 보다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쪽은 대충 해결된 것 같고, 이제 남은 건 사도들이 모여 있을 장소를 찾는 건데….

때마침 문제의 장소를 찾는 것을 담당했던 주세진이 이예린과 함께 연구실로 들어왔다. 예언의 힘을 빌려 찾아본다더니 성공한 듯했다.

이런 일은 박상호가 더 제격일 것 같지만 그의 능력은 단위가 전 세계라면 말이 달라졌다. 보물찾기는 정해진 범위에서 하는 것이지, 전 세계에서 찾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예언 쪽이 더 알맞은 능력이었다.

“?”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이예린의 손에 아스트로노미가 들려 있었다. 그전에 보여 주던 별의 반짝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금이 간 별자리 판을 흘겨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거 이제 못 쓰지 않아요?”

내 물음에 이예린은 내 발밑을 힐끔거렸다.

“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

“있잖아요, 그 그림자 이상하다거나 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림자? 그녀의 물음에 나는 내 발밑을 보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새까만 그림자는 얌전하게 내 발밑에 붙어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몰라요. 이상하거나 안 이상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밖에 없거든요.”

솔직한 내 대답에 이예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그림자가 막 말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말?”

말은… 못 하는데. 애초에 말을 할 만한 인격이 있거나 지식이 있거나 하지도 않았다.

괜히 이런 것을 묻는 건 아닐 테고.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저런 걸 묻는 걸 텐데. 뭐지?

고민하는 나를 지켜보던 이호연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 그림자랑 대화하는 걸 본 적 있어요.”

“뭐?”

그 말을 하는 이호연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런 그의 표정보다 내가 그림자와 대화했다는 점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끔가다 말 안 듣는 것들을 짓밟거나 하며 응징한 적은 있어도 말을 건 적은 없었다. 인격체로 대우하기엔 이것들은 살아 있다고 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호연은 내가 이것들과 대화를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주먹을 꼭 쥐는 이예린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대화했는데?”

“그건….”

이호연은 답하기를 망설이며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이 장소에서 말하는 게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시선을 그에게서 돌릴 겸, 애초에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인 이예린에게 질문을 옮겼다.

“그래서, 그건 왜 물어본 거예요?”

“…아. 옛날에 그 그림자가 나한테 말을 걸었어요. 류한테는 자기가 말 건 거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굳이 그 말을 지킬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랬던 것일 터였다.

이제 와 말한다는 것은 지금은 아주 작은 단서라도 끌어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일 테고.

“뭘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그 그림자가 아스트로노미를 활성화시켰다고 해야 하나. 멋대로 내 손에 감겼었거든요. 그런데 그 직후의 바로 아스트로노미가 움직였어요.”

“…아스트로노미를요?”

그녀의 말에 아스트로노미를 눈으로 살펴보았다. 빛이 꺼져 버린 별자리 판에 음울한 것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발밑에 그림자를 움직여 그것을 들었다. 순순히 제 물건을 손에서 놓은 이예린이 신중한 얼굴로 그것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낙담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달리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 또한 내심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스트로노미는 정말로 일회용이었던 듯했다.

지금으로선 이호연이 한 말이 더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단둘이 될 때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듯싶었다. 이따 따로 대화하든가 해야 할 듯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더 생각해 보든가 해야겠네요.”

내 말에 이예린은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로노미를 다시 이예린에게 돌려주며 주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찾은 거예요?”

조용히 이호연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던 주세진은 갑자기 자신을 불렀음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모이라는 뜻으로 손짓하는 그를 중심으로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모였다.

주세진의 낯을 슬쩍 살펴보니 눈 밑이 조금 거뭇해진 것 외에는 따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평소에도 피로로 퀭해 보일 때가 많아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제 얼굴을 살피는 내게 집중하라 가볍게 타박한 주세진이 낡은 지도 위, 바다 한복판을 손으로 짚었다.

“……?”

“여기야.”

“…….”

몇 번을 다시 봐도 바다가 맞았다. 그것도 태평양 한가운데.

옆에서 강유진이 비꼼이 담긴 감탄을 내뱉었다.

“이건 누굴 저격해서 고른 장소인지 너무 뻔한데요.”

전부터 느낀 것인데, 사도들은 자꾸만 나를 저격하는 무언가가 좀 있는 것 같았다. 언짢음에 낯을 찌푸리는 나를 본 강유진이 지도 위를 바라보며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여긴 가는 것부터가 문제일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이예린이 지도 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공간 이동으로도 안 되나요?”

“지금 이 길드에 이동 능력 가진 사람은 셋이나 되는데, 하나는 길치 하나는 호빵맨 하나는….”

“…개복치.”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말을 이어 주었다. 호빵맨의 말에 개복치는 약간 짜증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이제 안 쓰러진다고 몇 번을 말해.”

개복치의 허세였다. 지금도 몇 번 썼다고 얼굴 위로 피로가 보이는데 여기서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까지 썼다가는 무조건 쓰러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길치인 오정인에게 맡기자니 한 번에 성공 못 하면 끝이라 영 불안하고. 성공해도 문제인 건 똑같지만.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왜 골라도 하필이면 바다야.”

“골랐으니까 바다인 거죠.”

“…….”

맞는 말이기는 했다. 자신을 흘겨보는 내게 어색한 웃음을 짓는 강유진을 보며 이예린이 의아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왜 호빵맨이에요?”

“제가 불 타입이라서요. 바다에서 싸우는 건 좀….”

바다 위에서는 그림자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바닷가 근처였으면 지상에 있는 것을 끌어다 쓸 수라도 있을 텐데, 이렇게 사방이 물인 곳이면 불가능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뭔데요?”

“바다를 전부 증발시켜도 된다고 하면….”

“그게 될 리가 없잖아요.”

이래서 싸움은 남의 집에서 해야 하는 거였다. 저번 바닷가에서 싸웠을 때도 환경적 요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면 금방 끝났을 것을 질질 끌었었다.

바다 위라고 불을 못 쓰는 건 아니긴 하지만 문제는 그걸 하나하나 조절하고 컨트롤 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저격 미스로 바다 위에 불이라도 부어 버리면 그걸 수습할 자신도 없었다.

저번이야 바닷가였고, 사도들도 없었으니 무리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 사도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류와 프레데터를 동시에 쓸 자신도 없고.

“장소가 바다만 아니면 되는 거야?”

“?”

지도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주세진의 물음에 나는 의문을 담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지도 위를 보고는 낯을 찌푸렸다.

“미리 말하는데 그거 하지 말아요.”

지금 주세진이 무엇을 생각하고 물어본 것인지는 뻔했다. 오페리움의 능력을 이용해 공간과 공간을 뒤바꿔 버릴 것을 제안한 거였다.

예전에 건물 하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일주일 동안 의식 불명이었던 사람이 하기에는 알맞지 않은 말이었다.

장난으로 그를 개복치라 놀리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주세진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예전보다 오페리움을 잘 다룬다고 해도 요령이 늘어난 거지, 조건이 완화된 건 아니었다.

오페리움이 가져가는 대가는 여전하다는 뜻이었다.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장소 한번 기막히게 찾기는 했다. 가는 것도 문제고, 가서도 문제고.

답답함에 계속 바라보면 답이 나오기라도 한다는 듯 지도 위를 뚫어져라 보는데 하얀 손이 그 위로 올라왔다. 손의 주인은 이호연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세부적인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오페리움에 새겨진 작은 무인도였다. 그는 손끝으로 무인도에서 주세진이 짚은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쭉 이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여기까지 많이 멀어요?”

답은 강유진에게서 돌아왔다.

“제일 빠른 배로 미친 듯이 운전을 한다 해도 한 시간은 넘겠지?”

상대 쪽에서 도착하기를 마냥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 배도 안 되겠네. 하지만 이호연은 얼굴은 더욱 신중해질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이동할 수 있어요?”

그의 질문에 대상은 나였다. 나는 약간의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짚은 곳을 보았다. 조금 전에 그가 가리켰던 작은 무인도였다.

설마….

“아슬아슬할 것 같기는 한데…. 십 분이면 도착할 것 같거든요.”

“…….”

도박이었다. 이호연이 용의 모습으로 변형할 수 있는 시간은 끽해야 십 분. 그 안에 도착 못 하면 우리는 바다 위에서 이도 저도 못 하는 게 된다.

물론 각자 불과 바람 위에 올라타면 된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이호연의 마법 실력에 있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나와 그 둘 밖에 못 간다는 점이었다. 내 이동 능력은 애초에 동반 일인밖에 안 되고.

그리고… 또 누굴 위험하게 만들기도 싫고. 그나마 함께 갈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이호연이기는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나 혼자 가고 싶었다.

혼자서 사도들과 다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이호연을 지킬 자신도 별로 없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방식이 우리 둘 밖에 그곳으로 못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지도를 움켜쥔 주세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잔잔한 얼굴이었지만 그도 아는 거였다. 저번처럼 무리해서 다른 이들을 함께 보낼 수는 없다는 걸.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심적으로도 불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냥 나 혼자 갈래요, 하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가 상대의 의중과 심리, 생각을 기민하게 눈치챈다는 것은 결코 마냥 편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시간은 앞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차분히 하나하나 따지고 들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

“그래서 아까 한 말은 뭐야?”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볼 시간 좀 달라는 주세진의 말에 흔쾌히 응하며 이호연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젠 이런 식의 이동이 익숙한지 놀라지도 않고 난간 위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왔다. 저들에게 익숙한 사람이 와서 그런 것인지 고양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옥상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는 내게 고양이 한 마리를 안겨 주며 그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형이 방법을 찾아본다고는 했지만 이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거 이미 알고 있잖아요.”

“…….”

“죽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고, 인제 와서 실력 좋은 물 마법사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 내가 물어보는 게 그건 아닌 거 알잖아.”

“…그냥, 넘어가 줬으면 싶었거든요.”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제 몸을 타고 오르는 고양이를 내려 주었다. 그의 등 너머 일렁거리는 보랏빛 막이 보였다.

사옥 전체를 감싸는 방어막은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직 튼튼해 보였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챈 이호연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초조해하고 있는 거 알아요?”

“…….”

“무리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게 눈에 보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그러니까 나 두고 가지 말아요. 알겠다고 하면 말할게요. 내가 뭘 봤던 건지. 내가 왜,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며… 겁이 나는지.”

내게로 가까이 온 그는 놓으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을 끌어안듯 나를 붙잡았다. 겨울의 찬 바람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품에 갇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몸이 저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도닥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풀어주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처음에는 환각이나 환청 증세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어요.”

“…….”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분명 그 그림자와 대화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번에 나한테 화살 쏜 거야? 정신 차리라고?”

“…똑같았으니까요. 그때랑 무서울 정도로 똑같았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류는 기억을 지워 버렸죠.”

“……!”

그게 그때라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따라 이호연의 몸에도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잠깐만, 잠깐만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싫어요.”

답지 않는 고집이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 더 바둥거리자 그는 마지못해 나를 놔주었다.

“…….”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비참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파 보일 정도로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할까.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그의 얼굴을 물들였다.

마침내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듯 멍했던 나. 그런 내 주위를 에워싸던 그림자. 그 그림자에 홀리듯 굴었던 나.

그가 내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이유.

“말, 할 수가 없었어요. 무엇으로 혼자 버티는지 눈에 훤해서, 자기 능력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지… 뻔해서. 본인이 가장 강하기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는 걸 아는데, 그 능력 자체가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

“…….”

그 당시 내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니 최근이 아니라 당장 며칠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가 걱정했던 대로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까지 간신히 유지했던 정신마저 무너졌을 것이다.

불안에 떨고 도망이나 갔을 것이다. 내가 무너진 뒤에 일어날 일은 받아들일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니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를 위해 항상 입을 다물던 그가 처음으로 그를 위해 입을 다물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둘 다를 위한 회피.

이호연은 내 손을 피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눈물 자국을 지우고자 했다.

‘내가 너를 기억해야 해?’

그는 그 이야기는 조금 가볍게, 그 이후에 느낀 감상도 가볍게 말했다. 다만 그 내용은 자기비하에 가까웠다.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내가 기억을 지우고 난 다음이 무서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두 번,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한번, 지웠을까? 과연 내가 기억을 건들 수 있다는 그 쉬운 회피 방법을 한 번만 썼을까. 몇 번이고 그랬던 거라면, 옆에서 매번 잊혀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류가 사라지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요? ‘나를 잊었으면 어떡하지?’였어요. 다시 만났을 때도 무서웠어요. 나를 잊었나 하고.’

함께하는 순간순간 또다시 잊히는 건 아닌지 무서워해야 했던 건 아닐까.

위험한 짓이었다. 석궁도 활도 제대로 다뤄 본 적 한번 없던 이호연이 내게 화살을 쐈다는 점부터가 이상하기는 했다. 조금만 빗나가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을 움직인 것은 몇 번이나 반복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왜 내가 눈을 못 떼는 줄 알아요? 눈을 떼면 또 기억을 지웠을 것 같아서예요. 아무렇지 않게 날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갈까 봐 무서워서예요.”

“…….”

“그 모든 일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너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불안을 먼저 느끼는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데 매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말을 해도 괜찮은지, 어디서부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고…. 가끔가다 괜찮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면 무서웠어요. 그래서 난….”

아쿠아리움에서 했던 대화는 그의 심정에 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가 느껴야 했던 불안감과 초조함과 비참함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나를 보며 함께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러니까, 그가 항상 내게 져 주는 거다.

자꾸만 괜찮냐고 물었던 거였다.

탈력감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울컥했던 것인지 금세 울음을 그친 이호연은 언제나 온유했던 얼굴을 집어 던지고 초조함과 집착 엇비슷한 것을 드러낸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가 하는 애정 표현에서는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이라거나, 집착, 순수하다고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느끼고는 했다.

놔주기 싫다 했던 그의 말이 이제야 좀 와닿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쓰고는 했던 능력이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림자가 나를 따르는 것은 그저 저들의 왕이 내게 그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들의 왕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느꼈던 감상이 다시 한번 질척거리며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했다.

직접적인 위협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철회해야 할 판이었다. 그림자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우울감에 몸이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기억을 지우는 횟수가 늘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 능력 자체가 처음부터 문제시되는 거였다면….

나는 뭘 믿고 움직여야 하는 걸까. 이것이 본질적인 나의 두려움이었다. 그 대단치도 않은 것 때문에 이호연은 숨이 막혀 온 거였다.

“…몸 좀 숙여 줘.”

내 말에 이호연은 순순히 몸을 숙여 주었다. 항상 위에 위치하던 얼굴이 내 바로 앞에 있었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눈물기 어린 눈에 짧게 입을 맞추니 순간의 울음에 짜게 변질된 감정들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짜다.”

내 말에 그는 손을 들어 내가 한 것처럼 똑같이 내 뺨을 감쌌다. 굳이 제 눈물이 묻어난 입에 키스했다. 잔상처럼 남았던 눈물의 짠맛은 금세 사라졌다.

생각보다 덤덤한 내 모습에 그의 얼굴에 조금은 안정감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머뭇거리던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처음부터 말하는 게 나았을까요.”

“글쎄….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림자를 다루는 걸 안 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하네.”

쓸 수 있는 수단을 약간의 위험성 때문에 마다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냥 말 안 하는 것이 답이기는 했다.

내 시선이 발밑으로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이호연이 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잘근거리며 짧게 내 입술을 짓씹는 것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씹은 자리를 혀로 핥고 물러나더니 다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 두고 혼자 가지 말아요.”

“…….”

강유진이 말해 주었던 예시가 이제야 좀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과 주세진을 두고 장르가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었다.

내가 보는 나와, 이호연이 보던 내가 얼마나 달랐던 것인지, 이제는 알겠다.

그는 제 목숨이 위험한 곳이라 한다 해도,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건 마냥 집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절해서 나도 그를 따라 조금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꿈과 환상에 취한 나는 지옥도가 끝난 시대에 살며 행복하다 스스로를 세뇌시켰고 그런 나를 보는 이호연은 점점 더 깊어지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멀리, 빙빙 돌고 나서야 상대의 잘못된 점을, 나약함을 지적하게 되었다.

이제야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미 알고 있으니까 새삼스럽지 않게 인정하는 거였다.

그의 죄책감은 너무나 오래됐고 너무나 쓸데없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생긴 그 감정은. 나 하나가 인정하지 않아 생긴 그 감정이.

하지만 나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 이 순간에 의미 없는 말은 없었으며 상대를 더 아프게 하는 말은 없을 테니까.

내가 네게서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감히 바라건대, 나는… 네가 그 케케묵은 감정을 내다 버렸으면 좋겠다. 그 쓸데없는 감정에 취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내가 바라는 건 분명 그런 거여야 했다.

입 안에 모래가 들어간 기분이었다. 바닷물에 젖은 발에 질척하게 달라붙은 모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들을 떼어 놓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시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거세든 아니든 바다에선 물살이 일고 내게 들러붙은 미련 같은 모래는 그것에 휩쓸려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가 그 바다에서 나와 모래를 거닐면 다시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그리도 믿고 의지하던 내 능력에 관하여,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해서도, 의지해서도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바닷물이며 모래였다. 나를 끊임없이 깊은 곳으로 몰아넣는 존재였다. 내게 손짓하는 저 깊고 깊은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악의.

하지만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믿으면 안 되며, 의지하지 말라고?

불가능하다.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테오그라젠스.”

적어도 그 신이란 존재를 끝내기 전까지는… 안 된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추워지는 계절에 맞추어 온기를 빼앗겼다. 그것이 아쉽고 애틋하다는 듯이 붙잡는 손이 따스했다. 그래서 나도 그 손에 손을 얽고 눈을 감았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내가 싸워야 하는 이유. 그런 건 사실 없었다. 이유는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혼자 싸워야 하는 거고. 내 최후의 저지선이던 랑도 알 수가 없게 되었고. 미래도 앞으로의 일도 아무도 모르는.

결과물을 보고 나서야 아, 그렇게 된 것이구나 하는 것밖에 남지 않은 나머지.

차가운 공기가 입 안을 스치고 다시 내쉬는 숨을 따라 하얗게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단 한 번도 눈 돌린 적 없다는 듯, 나를 마주 보는 겨울 하늘 같은 눈을 보며 말했다.

“다 잘 되겠지?”

“…….”

“아니. 그래야만 해.”

강제로 떠밀려진 자리. 그 대단하신 서사극의 주인공. 그렇다면 결과도 같아야 할 것이다. 웃는 게 내가 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여전히 정확한 방법은 모른다.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인지도, 신은 죽여서는 안 되며 모셔야 한다던 그 말의 방식도. 나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예언. 아스트로노미가 내게 보여 주었던 신의 죽음 이후. 그 길이 있다는 것은 분명 내게 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노라 일러 주는 것과도 같았다.

정확한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 능력 정도는 있다는 뜻일 거였다.

지금으로선 그 불완전한 것 하나만이 유일하게 믿고 기대야 할 곳이었다. 그것이 너와 내가 적어도 울지는 않을 미래로 가는 길이기를 바랐다.

“…….”

겨울이 너무 길었다.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는 누군가의 비명처럼 들렸다. 이 아래 많은 사람들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와 함께 바람이 부는 어두운 계절. 나는 이 모든 것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이제 그만 들어가자.”

끝이 무서워 날 붙잡은 손을 더더욱 힘주어 잡았다.

***

바깥에서 묻혀 온 찬기를 흩뿌리는 우리를 보며 강유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보 쪽으로는 기발한 정도로 습득력 좋은 그녀가 이호연이 했던 발언을 잊었을 리는 없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제는 별로 상관없었다. 물어본다면 기꺼이 답해 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강유진이 내게 이야기 한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이.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나름대로 쓸모 있을 법한 물건이 생각났어요.”

“…….”

“같이 보러 갈래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연에게는 혼자 고민하고 있을 주세진이나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끝까지 내게서 눈을 못 떼는 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강유진을 따라 몸을 틀었다.

우리는 함께 복도를 걸으면서도 오로지 테오그라젠스와 그의 사도들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뿐 ‘나’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배려가 아니라 무서워 피하는 회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굳이 말하지 않는 상대에게 캐묻지 않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궁금하지 않아요?”

“뭐가요?”

“나랑 이호연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걔가 말한 게 뭔지. 내가 뭘 숨기고 뭐가 문제인 것인지.”

“…….”

“물어보면 답해 줄 수도 있는데.”

강유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유난히 동그랗다는 생각이 드는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혹시 지금 화났어요?”

“누가요?”

“누구긴 누구예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지.”

“…화, 안 났는데.”

내 말에 그녀의 낯이 찌푸려졌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보기엔 류, 화난 거 맞아요. 표현 방식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화풀이하는 것같이 느껴지거든요.”

“…….”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고 어이없는 건 아는데… 괜찮은 거 맞아요?”

“왜요?”

“…지금 되게 불안해 보이거든요. 참으면 병나는 건 맞는데 그걸 잘못된 방식으로 안 참으면 참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류가 딱 그 상태예요.”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다. 벽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아직도 덜 녹은 거처럼 저릿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화풀이…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분에 겨운 목소리를 내뱉는 것처럼 군 건 사실이니까.

나도 나를 주체하지 못하겠으니, 누가 내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기를 바란 걸지도 모르고. 화풀이 맞네, 이거. 화가 난 것도 맞고.

“…….”

바타르.

그래서 그도 내게 그리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웃는 낯으로 날 보고, 제 이야기 좀 들어 달라 총을 들이민 거였나?

로웰 콕스도 그래서 울었나? 그녀의 말은 여전히 허황된 말이었다. 결국 나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한 거니까. 이런 내가 무슨 신이라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멍때리다 웃음을 내뱉는 나를 강유진은 더욱더 심각해진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화풀이 맞는 것 같아요, 아니, 화풀이 맞아요.”

“…….”

“있잖아요. 지금 내가 화가 나거든요? 테오그라젠스니 사도니 뭔 현실 같지도 않은 것들이 튀어나와서 날 몰아붙이는 게 짜증 나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작 별로 없다는 사실이 짜증 나는 만큼이나… 그냥 다 모른 척하고 싶어.”

그리고 그 회피의 기저에 깔린 것은 바타르가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일 것이고.

“무섭기도 해요. 옛날처럼 돌아가 버린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난 힘이 있기 이전에 덜덜 떨던 시기가 더 기억에 남거든요.”

그래. 로웰 콕스처럼 말이다.

고개를 들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형광등을 계속해 바라보니 꽤나 눈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 빛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원래 영웅이라는 건 좀 더 비범한 사람이나, 그렇게 평가될 정도로 문제 많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설 주인공들도 그렇지 않은가. 지나치게 선하거나 지나치게 무감정하거나.

나는 마냥 선하지는 않아 이기심으로 인해 죄악감을 느끼고, 마냥 무감정하지도 않아 죄책감을 떨구지 못한다.

티를 내지 말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여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독을 내뿜는 뱀 입에 뛰어드는 것도. 죽지도 않는 것들 앞에서 허세 부리며 서 있는 것도.

괴물과 싸우고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에 사는 것도. 그냥… 나도 똑같이 무서웠다.

나도 무섭다는 걸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 괜한 화풀이를 한 것이다.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말없이 서 있는 강유진에게 물어보았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래 그런 게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가끔은 굳이 몰라도 되는 진실 같은 것도 있어요.”

“…….”

“만약에 말이에요. 그냥 나중에… 정보 수집이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알게 되다가 내가 몰랐던 진실 같은 걸 알게 되면요….”

가령… 천공섬의 주민이라든가, 그들 사이에 있던 사도들의 과거 같은 것이라든가. 이 모든 일의 원흉에 관해서….

“굳이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거 아니면 알려 주지 마세요.”

내가 그 진실이라는 것을 통해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지 않도록.

어쩌면 이런 부탁을 하는 이 순간에 이미 나는… 굳이 몰라도 되는 그 진실이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강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틈이 없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이만 가자며 강유진의 등을 밀었고 힘없는 몸은 저항 한번 못 하고 앞으로 쭉쭉 밀려 나갔다.

입은 자유로우니 대답하려면 얼마든지 했을 테지만… 강유진은 답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그에 관하여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약간은 어색한 시간을 보냈고 더 이상 그럴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유진의 연구실에 있는 커다란 화면 위로 띄워진 지도는 그 크기를 점점 줄이더니 오페리움으로 보았던 무인도 하나에 초점을 잡았다.

손을 올려 그 위를 더듬어 보았다. 세계지도로 보았으면 새끼손톱보다도 작았을 섬이었다. 화면의 그림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우리나라와 그 섬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이 더해졌으며 화면의 가장자리에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그래프와 숫자가 깜박거렸다.

“저기까지 이동하는 거 가능할 것 같아요?”

“…지금은 될 것 같아요.”

옛날이었다면 해 볼 엄두도 안 났을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되어도 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바다라는 점.

내 시선이 지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새파란 바다로 옮겨지는 것을 본 강유진은 복잡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 장소를 바다로 고른 건 류를 저격한 게 맞을 거예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구름 한 뭉치를 떼어 와 내 앞에 내밀었다. 도넛 모양으로 변한 구름 안에는 미국의 해변에서 있었던 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카샤의 괴물과 머뭇거리는 나. 환경 오염을 걱정하느라 크툴루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이걸 보고서 장소를 바다로 정했다는 거예요?”

내 물음에 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처럼, 상대 또한 우리의 정보를 수집할 수가 있죠. 원래 서로가 잘 모르든 알든 정보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거든요.”

그녀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류는 언제는 그 중심이죠. 다른 잡몹들로는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아카샤의 괴물을 불러냈을 거고….”

“재수 없게 바다 위에서 제대로 못 싸운다는 걸 얻어걸렸다는 거네요.”

운도 더럽게 없지.

아카샤의 괴물들이 아무 전조도 없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곤 했던 일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그 또한 정보 수집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았을 그들은 내가 바닷가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건 불리한 싸움인가? 확실한 힘의 격차가 나지도 않는 상황에서 장소 또한 내게 불리하다.

이대로면….

땅끝을 향해 파고드는 나를 다시 위로 끌어 올린 건 강유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불리한 건 아니에요.”

“……?”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점을 들자면 기술력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성실하지도 않았거든요.”

“…….”

“또한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고 도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재료가 있고 자원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실험해 보고 도전해 볼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으니까요.”

지금 강유진이 말하는 것은 리블이 성장할 수 있었던 과정이기도 했다. 주세진은 투자와 도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싶을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아이디어만 좋다면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실패하더라도 비난하지 않았고 다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리블이 가장 공을 들인 분야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그건 하늘 조각을 공략할 공략대가 아닌 연구팀이라 할 수 있었다.

여타 다른 길드와 정부에서 공략을 할 헌터에 공을 들인 것과는 달리, 리블은 연구와 개발 쪽에 더 집중했다.

연구팀만 수십 개라는 소리를 예전에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하늘 조각만 따로 연구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안의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만을 연구하는 곳도 있었다.

오정인의 능력 같은 특이하거나 독보적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연구하는 이들도 따로 있었다.

하지만 가장 커다란 성과를 내는 것은 역시 누가 뭐라 해도 생산 쪽의 연구원들이었다. 자원의 활용에서 멈추지 않고 전에는 없던 물건들을 만드는 곳.

그리고 지금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는 뻔했다. 저쪽에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기술력.

즉, 쉽게 말하면 저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템빨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멍한 얼굴을 했다.

내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강유진은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에야 검푸른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가 그것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쪽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내가 류에게 먼저 보여 주려고 한 건 이쪽이에요. 이게 만들어진 지는 쫌 됐는데 여태 마땅히 쓸 만한 곳이 없어 창고에 있었거든요. 찾아내는 것도 힘들었어요.”

“뭔데요?”

“이거.”

그녀는 하얀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시약병 같은 것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푸른 액체가 묘한 빛을 흘리며 찰랑거리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액체를 바라보는 나를 지켜보며 강유진은 그것에 관하여 설명했다.

“빙결제라고 하는 거예요. 얼음초 알죠? 그걸 먹고 자라는 파랑이의 피로 만든 물건이에요.”

“파랑이면 그 파란 물고기?”

“네.”

이름 한번 참 성의 있게 지었네. 절대 잊지 못하는 종류이기는 하지만. 묘해진 내 얼굴을 보면서도 강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걸 바다 위로 부으면 대략 십 분 동안 바다 위가 얼어붙을 거예요.”

“범위는요?”

“한 병당 초등학교 운동장 삼분의 일 정도.”

애매하네.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지만 싸우면서 날뛸 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좁기는 했다. 게다가 십 분이라는 제한 시간.

녹을 때마다 새로 병을 붓는 비효율적인 방식을 쓸 수는 없었다. 바다 위가 얼 때까지 그것들이 마냥 기다려 주는 변신물 만화의 악당 매너를 보일 것 같지도 않고.

“어는 데는 오래 걸리나요?”

“대략 1, 2초? 어는 건 오래 안 걸려요. 문제는 그 언 게 녹는 데 있지만.”

“……?”

“물이 든 컵 안에 얼음 넣고 휘저으면 그만큼 얼음이 빨리 녹잖아요. 바다가 유동적인 만큼 얼음이 빨리 녹는다는 것도 계산해야 해요.”

생각보다 제약이 많네….

“이거 얼마나 있어요?”

“…일단 다른 길드에도 요청을 하기는 했지만, 수량이 여유 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긴. 파랑이는 이름이 하찮아서 그렇지 애초에 보기 쉬운 종류의 괴물이 아니었다. 그 피를 갖고 정제해서 만든 물건이면 그만큼 필요한 파랑이 피도 더 많았을 거고.

그나마 바다 위에서 뛰어다닐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낸 게 다행이기는 했다. 여차하면 다 끌고 영역으로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라면 적어도 내가 발 디딜 곳이 넘쳐날 터였다. 문제는 역시 마티의 공간 능력인데…. 공간끼리 싸우게 되면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기껏 만든 영역은 쓸모없게 되고 나는 괜한 힘만 뺀 것이 된다. 고민에 빠진 나를 지켜보던 강유진이 눈치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

꼭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그리고’라는 말 중 좋은 경우는 없던데.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얼음 위에서는 불 사용을 자제해야 해요.”

“왜…. 아.”

비현실적인 상황에 비현실적인 물건들을 보다 보니 정작 상식을 잊었다. 얼음이 불에 녹는 게 당연했다.

“그럼… 얼음 위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은 그림자뿐이고, 불을 쓰고 싶으면 내가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거네요.”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일부의 환경만 만들어질 뿐이지 달라진 게 크게 없었다.

결국은 바다 증발이라는 생태계 파괴자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알아서 내 능력을 잘 컨트롤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곤란한데….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득한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강유진은 들고 온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더 있나?

세로는 짧고 가로로 긴 상자 안은 검은 벨벳으로 채워져 있었다. 단순한 상자가 아닌 특정한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인 듯했다.

움푹 들어간 구멍 안에는 아기 주먹만 한 보랏빛 구슬이 들어가 있었다. 단 세 개뿐인 구슬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치고는 상자의 크기가 제법 컸다.

강유진은 보관된 구슬 중 하나를 들더니 내게로 내밀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드니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건….”

“원래 물건이라는 건 어떻게 쓰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거니까요.”

손안에 쥐어진 보랏빛 구슬 위에는 상당히 익숙한 마법 진 같은 것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강유진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더니 구름을 불러와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구름에서 나온 구슬 세 개. 상자 안에 있던 구슬 세 개. 총 여섯 개의 구슬이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

“어디서 난 거예요?”

“절반은 예전에 길드장님이 혹시 모른다고 따로 사 놓은 거고, 절반은 굴러다니고 있던 거 주웠어요.”

“…….”

묘한 낯을 하는 내게 강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국가에서 만든 회심의 역작이 왜 굴러다니는 것이 되어 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뱀 시신을 확보하러 갔을 때 저걸 구해 온 건가? 못 쓰게 된 일부의 건물에 저 구슬을 구비한 곳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정보 쪽으로 비범한 강유진이라면 어디서 파밍해야 하는지도 알았을 테고. 잠시간 구슬의 출처를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보니까 여기도 이 구슬로 만든 방어막 쓰고 있던데.”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 보았던 보랏빛의 막은 분명 이 구슬로 만들어진 막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구비해야 하는 것도 맞고.

그런데 내가 이걸 들고 가면 지금 리블 사옥에 만들어진 막이 깨졌을 때 다시 그 막을 구축할 수 없게 된다.

내 걱정이 무엇인지 눈치챈 강유진은 조금은 곤란하면서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사도들은 다 거기 있잖아요. 이 근처에 있을 것들은 우리끼리 처리할 수 있는 정도고요.”

“그래도….”

“그거 하나당 목숨 하나라고 생각해요. 마음 같아선 더 쥐여 주고 싶은데 애초에 수가 그만큼 있지도 않아서 불가능하더라고요. 열심히 긁어모은 거예요, 그거.”

“…….”

“그러니까 가지고 가요.”

구슬의 무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게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겁다고 떨쳐 버리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을 내어 주라고 말한 것은 주세진일 것이다.

다만 언제나 차선책을 생각하던 주세진이 이것까지 내게 쥐여 주었다는 점에서 어느 쪽으로도 이게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버린 것 또한.

“…혹시, 검은 비석을 둔 곳에서 하늘 조각을 하나 주웠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하늘 조각?”

“네. 제꺼…. 그냥 갑자기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기다 던져 버렸었거든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 줄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찾아 봤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 작은 미련이었을 뿐이다.

막상 마지막이라고 하니 버렸던 것마저 마음에 걸리는 그런 것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간절하게 찾고 싶던 것도 아니니까. 전부 다 간절하게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손안에 들린 구슬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내가 손에 쥐기로 한쪽은 이쪽이었다. 그러니 놓은 것은… 이제 됐다.

미련 가져 봤자 후회만 할 테니까. 손에 쥐어진 것들을 챙기기에도 나는 버거웠다.

“가기 전에 애들 만나서 인사라도 해요. 안 그러면 삐질 테니까.”

“…네.”

강유진이 챙겨 준 물건들을 아공간 반지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여러 의미로.

높낮이를 알 수 없는 감정과 생각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강유진의 말마따나 가기 전에 공략대 사람들이나 한번 보고 갈까 싶어 복도를 걷고는 있었지만 거침없는 발걸음처럼 머릿속은 가볍지 못했다.

그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잠시만요!”

“?”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드니 리블의 사원 중 하나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내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오가며 언젠가 한 번은 봤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불러서 이야기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의아함을 담아 그 사람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직원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달려오더니 내 옷 소매를 잡아 끌어당겼다.

시선을 내리니 낯익은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다 몸을 낮추어 아이의 시선을 맞춰 주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어?”

“엄마는 나 여기에 있는지 몰라요! 몰래 왔거든요.”

아이의 말에 직원을 흘겨보았다. 직원은 아이가 엄마 몰래 온 것은 몰랐는지 당혹과 억울함이 담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 자국을 지워 주었다. 그새 누가 간식거리를 입에 물려 주었던 듯했다.

“다음부터는 엄마 허락받거나 같이 다녀.”

“엄마는 맨날 안 된다고만 하는데.”

“그래도.”

내 말에 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작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나도 모르게 흐릿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난 왜 부른 거야?”

“아, 맞다! 이거….”

아이는 검은 천 뭉치를 내게 건넸다. 익숙한 색감에 슬쩍 눈을 가늘게 떴던 나는 그게 내 옷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아이에게 받은 옷을 자리에서 일어나 펼쳐 보니 역시나 두루마기가 맞았다.

“아….”

뭔가 허전하다 싶더니 이걸 잊고 있었네. 꼬깃꼬깃하게 졌던 주름 자국은 금세 사라졌다. 그것을 팔에 걸쳤다.

“이걸 주려고 일부러 온 거야?”

“네!”

“…착하네.”

이럴 땐 잘했다고 사탕이라도 쥐여 줘야 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현재 내게는 아이에게 줄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었다.

“덕분에 안 지겠다.”

“싸우러 가요?”

순진무구한 눈은 걱정이나 두려움보다는 용을 무찌르러 가는 용사의 동화를 들을 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응. 오늘 봤던 커다란 뱀 기억하지? 그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거랑 싸우러 가.”

“안 무서워요?”

“…글쎄. 하지만 꼭 이겨서 돌아올게.”

아이는 슬그머니 저를 내게로 데려다준 직원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바람대로 몸을 다시 낮추어 주자 작은 손이 어깨를 짚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여려 간지러웠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언니가 제일 쎄대요. 아빠는 자기가 더 쎄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보기엔 언니가 더 쎈 것 같아요.”

귀여운 비밀 폭로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작게 소리 내어 웃는 나를 직원은 묘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아이한테는 미안했지만 소곤거리는 아이의 말은 전혀 비밀스럽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고 아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그렇게 작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작게 냈으니 정말 아무도 듣지 못하리라 생각한 게 아이답다면 아이다웠다. 그것이 귀여워 아이의 말랑거리는 볼을 콕콕 찔러 보았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아이는 그 새까만 눈을 반짝이며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근데 엄마는 강한 사람은 항상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빠도 늦게 오는 거라고 울어요.”

“…아빠가, 전직자셔?”

내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의 어머니가 다급한 얼굴로 누군가의 신원을 애타게 찾았었다.

길드 소속이라면 신원을 따로 확인하지는 않았을 테니…. 헌터로서 활동할 정도의 힘은 없던 전직자였을 확률이 높았다.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의 벙커 안에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안전 구역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게 옷을 돌려주겠다며 찾아온 것이 핑곗거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는 눈은 간절했다.

어쩌면 엄마가 가장 강하다고 하는 내게 무언가 확인받고 싶어 왔을지도 모른다.

“…….”

뭐라고 해야 할까. 함부로 무사할 거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상처가 될 것이 뻔했다.

직원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후회하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로서는 아이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었을 테지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이의 어머니를 찾을 때까지 함께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신기하고도 슬프게도 아이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이제 그만 엄마에게 갈까, 하고 묻는 내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너무 빨리 철들어 버린 모습이었다.

내 품에 안겨 돌아오는 아이를 발견한 아이의 어머니는 울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엄마에게 안아 달라 손을 뻗는 아이에게선 작은 훌쩍임이 들렸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직원을 돌아보았다.

“저기….”

“애기한테 사탕 좀 전해 주세요.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거여도 좋고. 휴게실 쪽에 많을 거예요.”

“…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시선이 더 몰리기 전에 자리를 벗어났다. 팔에 걸쳐 놨던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쳤다.

아이의 눈물이라도 흡수했는지 두루마기는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

***

공략대 사람들과 따로 인사나 할까 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이뤄지지 못한 계획이 되었다. 생각보다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 주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따로 들러야 하는 곳도 있었고. 그 일을 해결하고 보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다녀와서 인사하면 되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런 내 아쉬움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그들 스스로 나를 찾아왔다. 주세진과 이호연, 강유진. 그리고 이곳으로 올 거라고 차마 생각 못 했던 이들.

한데 모인 이들을 보며 내가 무슨 반응을 더 하겠는가. 하나밖에 없었다. 모인 이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흘렸다.

괜스레 틱틱거리며 놀리는 말을 했다.

“표정, 진짜 웃긴 거 알아요?”

내 말에 훌쩍거리던 오정인이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짜, 흑, 끝까지 놀려어…. 흐어엉.”

“안 놀릴게요. 뚝.”

“그럼, 내가 데려다줄래요.”

“그건 안 돼요.”

단호한 내 말에 오정인은 서럽다며 이나연에게 매달렸다. 그런 오정인을 대충 토닥여 주는 이나연의 얼굴도 걱정으로 까칠해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안 울겠다며 눈도 안 깜빡거리는 박상호와 김수혁은 겉으로 보기엔 눈이 벌게져서 그냥 무서워 보였고. 손씨 남매는 차분한 얼굴로 나와 이호연의 상태를 체크했다.

손민경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피로감도 몸을 늘어트리던 탈력감도 모두 사라졌다.

“무릇 힐러란 후방이 아니라 전방에서 뛰어다니는 게 국룰인데.”

“아무리 실력 좋은 힐러라도 물 위에서 뛰어다니는 재주는 없어요.”

내 말에 손민경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내 왼쪽 팔을 살펴보는 손길은 신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해요. 그래도 제대로 뼈가 붙었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가면 좋을 텐데.”

그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팔꿈치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고도 모자라 팔을 빙빙 돌려 보았다.

내가 그럴수록 손민경의 낯은 찌푸려졌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역효과라 볼 수 있었다.

다른 쪽은 어떠려나 싶어 이호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이호연의 손을 꼼꼼히 체크하던 손민호가 주머니에서 꺼낸 하얀 무언가를 방심하고 있던 이호연의 입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얼굴로 뒤늦게 뱉으려 하는 이호연의 입을 막아 버리는 손민호와 그런 손민호의 뒷목을 붙잡는 이호연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손민호는 아찔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은 다급한 어조로 외치고 있었다.

“호연아, 힘 빼! 힘! 네가 힘주면 나 죽어!”

“…….”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손민경 또한 내게 몰래 먹이려고 했는지 앗, 하는 얼굴을 하며 손에 든 것을 뒤로 감추었다.

“그거 뭐예요?”

“피로 회복제 비슷한 거요.”

피로 회복제면 피로 회복제지 비슷한 건 또 뭐람.

슬쩍 이호연 쪽을 보니 결국 먹었는지 손민호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입을 틀어막은 얼굴이 그 잠깐 사이에 파래진 것이 맛은 영 아닌 듯했다.

먹어야 되나…. 기껏 챙겨 온 정성에 웬만하면 먹기야 하겠지만 내가 만든 음식도 참고 먹어 주는 이호연이 저럴 정도면 그냥 맛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데.

고민하는 나를 보며 손민경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나며 손을 들었다.

혹여 말하는 사이 약을 집어넣어 버릴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냥 삼켜도 돼요?”

“씹으세요.”

“씹든 아니든 삼키는 건 다 똑같은데….”

“올바른 복용법을 준수해 주세요.”

마지못한 얼굴로 손을 내밀자 손민경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받자마자 버릴까 염려된다는 의심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없다니. 나를 너무 잘 안다.

한숨을 내쉬며 살짝 입을 벌리자 곧바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괜히 버텼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류, 씹어요.”

“…….”

혀에 닿는 맛부터가 이미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결국 그것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느릿느릿 씹으며 오만상을 짓는 나를 보며 손민경의 뒤쪽에 서 있던 오정인이 훌쩍이며 웃는 것이 보였다. 꽤나 약 오르는 얼굴이었다.

이호연과 마찬가지로 입을 막아 버리는 내 앞으로 사탕 하나가 내밀어졌다.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내자 사탕을 가져온 장본인인 강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직원이 류한테 전해 달래요. 애기가 전해 달라고 한 물건이라고 하던데요.”

“…….”

손을 들어 강유진의 손안에 있던 것을 집었다. 알록달록 예쁘게도 포장된 그것을 풀어 입 안에 넣었다. 익숙한 단맛이었다.

때에 맞지 않는 달짝지근한 맛이기도 했다. 그것을 입 안에 굴리면서 고개를 틀었다.

일련의 소동이나 다름없이 떠들썩한 우리를 고요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시선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주세진은 그것을 인정한 이후부터 말이 없어졌다.

아마도 미안하고도 죄스러운 쓸데없는 감정 때문일 터였다. 미련스러웠다 참.

입 안에 사탕을 굴리며 그런 그에게 걸어갔다. 그런 나를 가라앉은 눈으로 보던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내가 손을 들어 손뼉을 치자 그의 눈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이 미련한 올곧음이 좋았다.

“여차하면 데리러 와요.”

“…….”

“그걸로 계속 지켜볼 거잖아요.”

내가 그의 오페리움을 가리키자 주세진은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미안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데리러 오지 말아요.”

“…….”

오페리움의 기능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은 멀리 보는 눈으로서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특별난 물건이라 하더라도 저 먼 바다를 헤맬 우리의 상태를 명확하게 표시해 주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생사여부를 알려주는 깜빡이는 작은 점 정도.

물론 그마저도 대단스러운 건 맞지만…. 죽을 만큼 다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있을 그들은.

지켜보지 못할 그가 속이 쪼그라들고 초조함에 매몰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버티며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하는 게 우리 둘만인 건 아니잖아요.”

“그, 렇지.”

내 말에 긍정하는 그의 얼굴이 너무 아파 보여 내 입 안까지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다디단 설탕 덩어리로도 어쩌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 묵직한 것들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취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갔다 오면 연봉이나 올려 줘요.”

내 말에 주세진은 눈을 깜박였고, 대답하지 않다가 결국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손을 들어 삐뚤어진 내 두루마기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예 이 길드를 줄 수도 있는데.”

“그건 싫어요. 내가 경영하면 망할걸요. 그런 건 내 적성에 안 맞아요.”

“너 경영학과 아니었어?”

“성적에 맞춰서 간 건데요.”

1학년은 토익 따위 공부 안 한다고 했던 내 말은 잊었나. 나한테 길드를 쥐여 주면 퇴사율이 오를 게 뻔했다.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주세진은 내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네 연봉을 올려 주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

“내가 원래 몸값이 좀 비싸요. 무려 지옥도의 영웅이잖아요? 실시간 용사고.”

“…….”

“그러니까 처져 있지 말아요. 어디서 뭔 얘기를 듣고 왔든.”

웃음기를 지우고 하는 내 말에 주세진은 눈을 꾹 감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 해 봤자, 겨우 이것뿐이었다.

당신의 책임감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새삼 느껴라,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 그렇게 말하듯이 구는 것.

“모아 놓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멀쩡하게 돌아올게요.”

“…….”

“…돌아올게요.”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는 주세진을 두고 이호연의 옆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내게 뻗어진 손들이 차마 내게 닿지 못하고 물러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모른 척했다. 그것을.

소란스럽던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강유진이 내게로 가까이 와 구름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은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수증기가 되어 내 몸에 스며들었다.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구름, 그 자체의 감각이었다.

비상 연락망이었다. 거리가 꽤 되는 바람에 기능이 그렇게 좋을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음성 정도는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급하면 그냥 도와달라고 외쳐요.”

“그럴게요.”

“꼭이요.”

“…네.”

뭐라 더 말하려고 입을 여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이젠 정말로 가야 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완전한 밤이라 할 수는 없지만, 황혼보다는 어둡게 가라앉은 색이었다.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곧이어 어둠으로 가는 길목에서나 볼 법한 음울한 그림자가 우리를 감쌌다.

***

“갔어요?”

그녀의 물음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짧아진 머리를 손으로 더듬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노려보는 박상호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왜 이제야 오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 이제 와요?”

생각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말로 뱉는 그를 보니 확실히 애는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능력이 뭔 줄 알면서도 그런다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부정 타면 어떻게 해요. 나도 모르게 보면 예언할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안 좋은 예언이라도 해 봐요.”

그녀의 말에 박상호는 당혹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 길드 내에서 류와 그녀가 제법 친분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에게 선을 긋는 그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배웅을 위해 모인 것을 보니 기분이 영 그랬다.

누구는 무려 세상을 구하러 떠났는데, 모인 건 이 정도였다. 혼돈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이 쓰렸다.

이러면 아무도 그녀의 노력을 모르는 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괴물 하나라도 나오면 왜 그 사람이 안 보이냐 욕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류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앞뒤 안 재고 솔직한 것 같다가도 지나치게 신경 쓴다. 방 밖에 그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아는 척하지 않는 배려심도 있었다.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영웅이라는 거 참 거지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필요에 따라 허울뿐인 명예마저 남기지 못하지 않는가.

“…….”

류는 떠나기 전 그녀를 따로 찾아왔었다. 재미로 봐달라며 타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는 괜히 부정 탄다며 해 주지 않았지만 류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것을 손에 쥐었다.

결론은 본인 앞에서 하지 않길 잘했다는 거였다.

그것은 그대로 불에 태워 버렸다. 얼른 류가 돌아와 왜 남의 물건을 태워 버리냐며 짜증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주세진은 오페리움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아직 눈치를 살피는 박상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를 시작으로 서성이던 이들도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이름 있는 무기인 오페리움의 시야에도 그들은 잡히지 않았다. 아직 그림자 안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작은 덩어리 한 개가 이동하는 것은 보였다. 아마도 류와 이호연 둘 중 한 명의 히든 게이트일 터였다.

해당 전직자만 이동 가능한 게이트까지 잡아낸다는 점에서 오페리움이 대단한 것인지, 그런 물건에도 잡히지 않고 몸을 숨기는 게 가능한 류의 능력이 대단한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왜 게이트가 하나만 잡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고.

“어….”

이변은 어지럽게 움직이는 오페리움을 바라보던 중에 일어났다.

지도 위를 보면 볼수록 시야가 흐려졌다. 숨이 가빠졌다. 그녀의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손민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시야에 금빛의 반짝임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며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이들을 보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저절로 지도 위로 돌아갔다. 입이 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손을 들어 막아 보고자 했지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은 것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간신히 눈을 굴려 손을 보았다. 환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 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 새카만 어둠은 그녀에게만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말을 걸었다.

너, 우리 가 말, 하지말 라 고 했잖-아아.

“……!”

손을 묶은 그림자 줄기 중 하나가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관통되는 아픔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아픔은 없었다.

대신,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열세 개의 별자리. 아스트로노미 위에 새겨져 있던 별자리들이 눈에 보였다. 그것들은 시야를 바꿔도 계속 따라왔다.

“저기요, 괜찮아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답해 주기 위해 입을 열자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익숙하고, 많이 들어 본 목소리. 이건 에스텔리니움의 목소리였다.

“불꽃과 나비는 그 어느 하나도 완성되지 않으니.”

눈앞에 보이는 별자리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끝없이 흐르는 우주의 움직임과도 같았다.

손목을 묶었던 그림자가 풀리고 그것은 어느 형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되다 만 것 같은 덩어리.

그것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붙잡았고 쓰다듬었다. 마치 그녀에게 안됐구나 하고 위로하듯이.

벌을, 받, 아야지. 약 속 어겼, 잖아.

네 입 으로말 해. 네 입으 로 직접-.

그 아이의 불행을.

강제로 혀가 묶인 것처럼. 말하기 싫어 발버둥 치고 결국 억울함에 눈물이 흘러나오는 순간에도.

예언가의 입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결국은, 상실을 겪겠구나.”

아주 오래전에 완성되지 않았던 예언. 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이어지고 만들어지던 이야기. 미래. 가장 선명한 실 가닥.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가장 온전한 미래의 잔해.

그것은 이제야, 이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입을 빌려.

***

그림자를 타고 도착한 무인도는 정말 작아, 이걸 섬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것 하나도 놓치지 않은 오페리움의 능력이 변태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아까의 쓴맛이 안 없어졌는지 이호연의 얼굴은 영 좋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 안에서 굴리던 사탕을 넘겨주자 이호연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사탕이 하나라서.”

“…….”

그는 입 안에 들어온 것을 와작와작 씹어 삼키고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나를 흘겨보았다.

“왜 이럴 때….”

“원래 이럴 때 해야 분위기 있다잖아.”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그가 바라보는 쪽을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여?”

“보이지는 않지만… 냄새는 맡아져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인간을 넘어 동물이라고 보기에도 힘든 수준의 후각이었다. 내가 맡을 수 있는 냄새라고 해 봤자 바다의 짭짤한 소금기뿐이었다.

날은 어둡고 바다는 깊었다. 새파란 바다는 붉은 노을도, 까매지는 하늘도 모두 잡아먹어서인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우주만큼이나 알 수 없는 곳이 바다라고 했던가. 우리를 망각으로 이끈다는 표현에 어울릴 법한 광활함이기는 했다.

까맣고 까만 것이, 익숙하다면야 익숙한 색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이 손끝을 스치다 힘없이 떨어지고 다시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손을 뻗으면 무언가 잡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바다에서 기어 나온 무언가가 나를 끌고 들어갈 것 같다는 망상에 가까웠다.

이러한 감상이 드는 이유는 내 발밑에서 일렁이는 것들도 저 바다처럼 깊고 까맣기 때문일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 생생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난 지금이라도 너 여기 두고 혼자서 가고 싶어.”

“…….”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자기 희생정신 같은 건 아니었다. 난 그렇게 숭고한 마음가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혹여나 하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걱정에.

내가 네 죽음을 보는 것보다는 네가 내 죽음을 보는 게 낫다는 이기심에.

하얀 머리카락은 가장 밝은색이면서도 시간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바뀌는 빛의 변화에 따라 쉽게 물들며 색이 바뀌었다. 하늘의 구름처럼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하얗고 옅은 색들. 그래서 어디서나 쉽게 물들어 살 수 있을 것 같은 너. 그럼에도 가장 반대되는 색에 뛰어드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을 안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기다란 검은 머리를 쓸다 그것을 이어 내밀고, 그의 하얀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호연은 배려인지 뭔지 모를 마음으로 몸을 숙여 주었다. 그래서 그냥 밋밋한 웃음이나 흘리고 말았다.

“이제 그만 가자.”

그는 멀어지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것뿐이었다. 아주 잠깐인 시간. 망가지는 세계에서의 잠시간의 여유.

그는 손을 놓았고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고개를 틀어 새까만 바다와 바다색에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았다.

입술이 달싹였고 그의 손끝은 옷 위를 툭툭 쳤다. 거리를 가늠하는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날아갈 때 입을 열면 안 돼요. 잘못하면 혀 씹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지금 상황에 하기에는 싱겁다면 싱거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나도 비슷한 걱정거리를 내뱉었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잘 던져 볼게.”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액체가 담긴 병을 흔들자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물러나라는 그의 말을 따라 그에게서 멀어졌다.

회색 눈 위에서 선명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던 까만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순식간에 거대한 백호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하얗고 어딘가 신성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로 변화한 그를 훑어보다 발을 떼었다.

뺨을 스치는 하얗고 기다란 것을 따라 시선이 저절로 움직였다. 머리부터 뒷목까지 이어진 기다란 털은 부드러웠으나 그 외의 것들은 차가운 파충류의 비늘과도 같았다.

그것을 더듬다 몸을 낮추어 뱀처럼 길고 얄쌍한 목을 끌어안았다. 그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길게 늘어진 하얀 털을 붙잡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땅을 박차고 섬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붙잡은 목덜미와 하얀 털을 놓치면 그대로 하늘을 나는 체험을 할 수 있겠다는 아찔한 생각을 하며 더더욱 몸을 낮췄다.

간신히 눈을 뜬 가느다란 시야 사이로 들어온 것은 하얀 털. 그리고 그 털 사이로 보이는 하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림자를 늘어트려 나와 이호연의 몸을 묶을 여유가 생겼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만들고 몸에서 조금 힘을 뺐다. 고개를 들어 하늘과 바다를 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용을 타고 날아다니는 하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다우면서도 씁쓸했다. 그건 간간이 보이는 꺼먼 구멍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보니 새까맣도록 먹먹한 생각도 덤으로 딸려왔다.

이 모든 일이 좋게 끝난다면 난 다시 온전한 하늘을 보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

그것은 이제 영화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되었다.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상념을 지우고 눈에 힘을 주었다.

떨어트리지 않게 주의하며 약지에 끼워 두었던 반지를 입으로 빼냈다. 바람의 저항으로 인해 손을 드는 것도 제법 힘겨웠다.

잘못하면 그대로 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식은땀이 났다. 눈앞에 아공간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한 손에는 하얀 털을 붙잡고 다른 손은 들어 그 안에 챙겨 두었던 빙결제 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곧바로 다음 병을 꺼내기 위해 아공간은 닫지 않았다.

내가 준비를 끝마침과 동시에 저 멀리, 아주 작은 점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가며 시야에 잡혔다.

이호연 또한 그것을 발견했는지 몸을 틀어 그곳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아직은 먼 거리. 그럼에도 시야에 잡히는 것.

“…….”

미친 자식들. 그것 말고는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태평양 한가운데에다가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꼴을 직접 보았다면 주세진이라 할지라도 욕을 했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하얀 털을 쭉 잡아당겼다. 그것을 느꼈는지 이호연의 속도가 줄기 시작했다. 입에 물고 있던 반지부터 빼내어 다시 손에 끼웠다.

천천히 하늘을 유영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저 밑에 있는 것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모두가.

거대한 해양 괴수 하나가 저와 똑 닮은 것들 사이를 가르며 수면 위로 목을 길게 뺐다.

가까이에서 봤다면 그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폭포로 보였을 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들이 배회하며 지켜 내는 것은 거대하고 새하얀 신전이었다.

둥근 바닥. 가장자리에는 열세 개의 기둥을 세운, 천장은 없는 기이한 바다의 신전. 가운데의 원을 기준으로 휘어진 벽돌을 쌓은 것 같은 바닥의 틈새가 선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제단과 석상. 그 석상의 머리를 바라보다 신전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 위에 둥실거리며 떠 있는 신전의 주변에는 하늘 조각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늘 조각은 중간중간 자기들끼리 뭉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서로 다른 하늘이 뒤섞이다 떨어지는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눈먼 괴물 하나가 제단 주변을 배회하는 하늘 조각에 닿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졌다.

“…….”

존재 자체가 그곳에 없었다는 것처럼.

무언가가 존재했으나 순식간에 그 의미를 상실한 곳을 바라보다 눈을 굴렸다. 문제의 하늘 조각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이호연이 백호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병의 마개를 빼내었다. 둥그스름한 마개를 손에서 놓자 그것은 곧바로 신전을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주변을 배회하기만 하던 하늘 조각이 순식간에 움직이며 마개를 삼켰다. 하늘 조각은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듯 느릿느릿 허공을 유영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곧바로 신전 근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조각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어막이었다.

또한 저 수중 괴물들이 데코용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있어 방해되는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괴물부터 먼저 처리하자!”

웅웅거리는 바람 사이로 내 목소리가 들릴까 하는 걱정은 이호연이 곧바로 밑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퇴색되었다.

기척에 예민한 괴물들은 저들을 향해 날아드는 우리를 느끼자마자 괴성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무형의 것이 분명한 소리임에도 마치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따끔거렸다. 거센 바람을 스칠 때의 따끔함과 비슷한 정도였다.

병 입구를 막고 있던 뚜껑을 내다 버린지라 찰랑거리는 빙결제를 흘릴까 싶어 불을 감은 손가락으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손이 얼지는 않았지만 시린 감각은 그대로 느껴졌다. 내다 던지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조금 더 기다렸다.

괴물 중 하나가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내민 순간까지.

내가 던진 병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정통으로 맞은 괴물이 잠시 주춤거렸다.

새파란 액체가 괴물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팽창하는 얼음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병 하나에서 나온 양이라고 보기엔 놀라운 얼음덩어리가 바다 위로 떠올랐다. 운 나쁘게 병에 맞은 괴물은 그대로 얼음과 함께 바다 위를 유영하는 신세가 되었다.

곧바로 병 두어 개를 더 꺼내 주변에 던졌다. 다닥다닥 던질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밟고 뛸 것을 만들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저 괴물들 또한 내가 밟고 다닐 발판이 되어 줄 터였다.

마지막으로 꺼낸 보라색 구슬은 하늘을 향해 던지며 이호연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미끄러운 얼음 탓에 예상했던 것보다 아슬아슬하게 얼음의 가장자리에서 발이 멈추었다.

바로 옆에서 찰랑이는 바다를 힐끔 보다 고개를 들었다. 이호연은 이미 저들의 범위 안에 든 이후였다.

거대한 보라색의 방어막은 신전을 포함한 이 부근을 전부 감싸고 있었다.

잔상으로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백호가 지나갈 때마다 수중 괴물의 몸 위로 길게 이어진 상처가 겹겹이 늘어가거나 살점 덩어리가 바다 위로 철퍽철퍽 떨어졌다. 어떤 것은 몸이 들려 하늘 조각을 향해 내던져지기도 했다.

잘려나간 어느 괴물의 기다란 꼬리가 바다에 빠지고 그 부근만 적조 현상이 일어나듯 붉게 번짐과 동시에 이호연의 변형이 풀렸다.

그는 곧바로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해 얼음을 밟고, 짧은 바람의 길을 밟고, 괴물의 머리를 찍고 그것들의 안면을 찢어발겼다.

점점 괴물의 수가 줄기 시작하자 하늘 조각이 빛을 반사하듯 반짝이며 다른 괴물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번 괴물의 종류는 조류인지 그것들을 바다에 적신 날개를 활짝 펴며 허공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을 관찰하듯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제자리에 서서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류를 잡았다. 끝이 상해 버린 제등은 그런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새파란 불을 내뱉었다.

얼음이 녹지 않게 주의하며 푸른 불을 하늘 위로 띄웠다.

길게 늘어진 꼬리나 날개. 다리. 어디 한곳이든 불이 붙기만 하면 괴조들은 순식간에 타올라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푸른 불에 잡아먹혔다.

바다를 헤엄쳐 내게로 달려드는 수중 괴물들은 그림자로 그 머리를 꿰뚫어 버렸다. 몸이 꿰뚫리는데도 불구하고 달려드는 것들은 힘으로 응수하였고, 그것들의 거대한 몸은 결국 물살을 가르며 무너졌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들 사이사이로 얼음과 함께 완성된 지형을 눈으로 확인하며 불의 강도를 높였다.

보랏빛 장막 안을 가득 메울 것처럼 거대해진 불의 파도가 바다를 증발시켰다. 그와 함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증발된 바다의 물이 눈에 보이는 형태의 수증기가 되어 막 안을 채웠다. 희뿌연 연기 사이를 헤쳐나가며 류를 손에 쥔 상태로 괴물의 사체 위로 뛰어올랐다.

딱딱한 괴물의 사체에 오르자마자 미리 만들어 두었던 얼음이 모두 녹았다. 수증기로 인해 눅눅한 습기가 피부 위로 느껴졌다.

한바탕 푸른 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금이 간 보랏빛 장막.

그리고 그 장막으로 인해 그어진 선 안에서만 해수면이 낮아진 바다와 하늘 조각에 감싸여 보이지 않는 신전뿐이었다.

그것은 물에 떠 있는 것이 아닌 허공에 떠 있는 것이었는지 낮아진 수면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예상컨대 하늘 조각이 저것을 띄우는 매개체일 것이다. 고개를 들어 신전을 보았다. 이런 식으로 저것의 밑동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건….”

스테인드글라스…인가? 저게 왜 저기에?

둥근 신전의 바닥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그러나 그것은 밑에서 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도록 숨겨져 있었다.

하얗게 피어오른 수증기 탓에 정확한 그림도 색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때마침 막에 생긴 작은 금 사이로 수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야가 선명해질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색(暖色)과 한색(寒色)으로 이루어진 그림.

조금 전보다는 훨씬 선명해졌지만,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것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세의 기적 한가운데에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거대한 바다의 벽이 막 너머에서 사납게 일렁거렸다. 분명 의지가 없는 자연일 뿐임에도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푸른 불을 쓸 때 남들이 이런 기분으로 나를 볼까 싶었다.

병을 들어 아무 곳을 향해 던졌다. 그 위로 내가 자리를 옮기자마자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낯설지 않은 팔이 튀어 나왔다.

오랜만에 본다고 하기엔 최근에 본 적이 있는 바다 좀비였다. 전처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곳엔 내가 지속적으로 신경 쓰고 지켜야 할 이들이 없었다.

발밑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불완전한 막 안을 둥글게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온 이호연은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변형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보랏빛 구슬이 그와 동시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타이밍 맞춰서 잘 썼나 보네?”

“좀 아슬아슬했어요. 하마터면 중간에 깨질 뻔했거든요.”

역시나. 아무리 대단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푸른 불을 버티는 것은 버거웠나 보다. 벌써 구슬을 두 개나 써먹었다. 하지만 몇 개 없다고 아끼거나 할 처지는 아니었다.

“한 번 더 할 거야. 구슬 꺼내.”

바다를 헤엄쳐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좀비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이호연은 곧바로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를 중심으로 보랏빛 막이 완성되는 것을 확인하며 제등을 앞으로 내밀었다.

금이 간 벽 사이로 빠져나가던 수증기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푸른 불은 순식간에 몸의 크기를 키웠다.

조금 전의 것이 나름의 섬세한 조절이 가해진 것이라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무차별적이며 일견 무식하기까지 한 방식이었다.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직접 닿지 않게 최대한 조심했음에도 이 부근에 선을 쳐 놓는 용도로 설치한 방어막이 깨지고 있었다.

어차피 깨질 거면 이쪽도 더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막 안을 다시 한번 메워 버린 푸른 불이 형체를 만들어 갔다.

수백 개의 작은 화살로 변한 그것은 내가 손짓을 하자 바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건 불로 만들어진 장대비와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 무식하게 많으면 섬세하게 조절 안 해도 머리나 심장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몸이 너덜너덜해질 터였다.

한바탕 지나간 소낙비의 끝처럼 푸른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둥실거리며 바다 위를 떠다니는 사체들을 흘겨보다 여전히 막 안을 맴도는 푸른 불을 떨어트렸다.

물이 증발하는 소리가 울렸다. 바다의 짠 내보다 이제는 탄내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바로 옆에 있느라 불이 스치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어야 했을 이호연의 막은 금세 깨져 버렸다. 조금 전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내 옆이 아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테지만 ‘조금만 더 빨리 깨졌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꽤 간담이 서늘했다.

조금 전의 것과 같이 완전히 산산이 조각난 보랏빛 구슬을 흘겨본 이호연이 그것을 대충 불에 타는 괴물의 사체 위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쪽을 향해 떨어지다 작은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보랏빛 막이 보였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해 바다를 갈라놓던 부근마저 사라지자 빈 공간을 메우듯 바다의 해일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피해 불티를 밟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잠시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무사히 하늘 위로 올라온 이호연이 끝나 버린 모세의 기적을 보며 말했다.

“바다를 증발시킬 수 있다는 말이 진짜였네요.”

“사실 나도 조금은 허세였어.”

“…….”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정도까지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바다를 증발시키지는 않았으니까. 아카샤의 바다도 실제 지구의 바다보다는 좀 작기도 했고.

일부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증발하는 걸 보면… 정말로 이 땅에 바다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금 간 벽 사이로 찔끔찔끔 새어 나오던 수증기가 한 번에 퍼지는 모습은 제법 장관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뻥 뚫렸던 바다는 다시 평평해졌다.

그 위를 떠다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 조각이라는 방어막 뒤에 숨은 제단을 제외하고는.

서로가 뭉치고 뭉쳐 유리 돔 같은 모습을 유지하던 조각들은 조금 기다리자 다시 떨어져 천천히 제단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조각 하나하나가 비추는 경관이 달랐다. 어떤 것은 밤하늘이었고, 어떤 것은 푸른 들판이었다.

이곳과 같은 바다를 비추는 곳이 있는 한편, 반대되는 붉은 용암 지대가 담긴 조각도 있었다.

찰랑거리는 파도가 조각에 닿을 때면 조각 위로 익숙한 빛무리가 퍼졌다가 곧이어 사라졌다.

아무래도 조각에 닿으면 어딘가로 이동되는 것은 일정한 물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마치 우리가 하늘 조각을 공략하기 위해 그 위에 떠오르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제단의 주변을 유영하는 조각 사이사이로 그 안쪽에 있는 이들의 인영이 보였다. 누군지 구별해 낼 수는 없었지만 새하얗고 하느작거리는 옷들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유일하게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누구일지도.

하늘을 수놓는 불티를 밟으며 제단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준비한 것은 없다는 듯 괴물을 더 불러내지도, 저들이 직접 내게 덤비지도 않았다.

이상할 정도였다. 하늘 조각이 스르륵 움직이며 우리가 통과할 공간을 만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조각 하나하나에 지난날의 하늘이 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으면 감탄이 나왔을 수도 있고, 주마등을 보는 것 같다며 짜증 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열세 개의 기둥에 둘러싸인 원형의 공간은 새하얗고도 성스러워 보였다. 그 중앙에 놓인 제단과 그 위를 굽어보는 석상은 일견 고귀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저 석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도 않고, 목이 잘리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무너진 성전에서 보았던 그 석상이 맞았다.

테오그라젠스. 저들의 신. 이 세계의 하늘.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비틀린 신앙심을 품은 신의 종이 아닌 충실한 신의 종들이었다.

“…….”

어쩌면 그 표현도 틀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들 중에 충실하고도 신실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제 신을 사이비라고 욕하는 내게 맞다고 장단 맞춘 놈이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데, 그걸 알고도 신앙심 있다 할 수는 없었다.

검은색…. 다른 사도들. 그리고 그때의 그 천공 섬의 나비와는 달리 검은 옷에 검은 베일을 머리에 뒤집어쓴 쥬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뒷모습만큼은 참 신실해 보이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오로지 석상이 굽어보는 제단 위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묘한 침묵 사이에서 나는 차분히 그들을 눈에 담았다. 스티브는 매끈한 얼굴에 맞지 않는 기묘한 상처를 달고 있었다. 마치 토벽에 금이 간 것 같은 꼴이었다.

그 부위가 저번에 내가 페이즐리의 단도로 베었던 곳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시야를 내리자 그의 천 자락 같은 옷 사이로 뺨과 마찬가지로 금이 간 몸이 보였다. 그것을 보니 알 수 없는 기분에 침몰하는 것 같았다.

애써 그곳에서 시야를 돌렸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마티였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무정한 낯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다윈은 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내 옆에 선 이호연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이호연은 낯을 찌푸렸지만, 일단은 지켜보자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으니, 마치 초대라도 받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들이 내가 오기만을 바라며 바다 한가운데 신전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따르면 초대는 초대였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이 신전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침묵이 깨졌다. 이 고요함을 깨 버린 장본인은 온유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차분한 아마빛의 머리가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

“여전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군요.”

그리 말하며 나를 보는 갈색 눈이 조금 서글퍼 보여 나는 어이가 없었다. 미친 거 아니냐 욕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는 그런 내 모습에 손을 들어 기도하듯 그러쥐었다. 맞잡은 손을 떼 한 손은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다른 손은 검은 베일이 둘러진 쥬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것은 마치 세례를 내리는 성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손이 검은 베일에서 떨어지는 순간 꼿꼿하게 펴고 있던 쥬의 허리가 꺾였다. 하얀 바닥 위로 붉은 것이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

레코디아는 내 눈을 끝까지 마주 보며 검은 베일과 함께 쥬의 머리를 잡아챘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억지로 바로 하고 목을 뒤로 꺾었다.

눈가를 가리는 베일이 강제로 들춰지자 눈을 꾹 감고 있는 쥬가 보였다. 왼쪽 뺨. 나비가 새겨진 문신에서 붉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모습으로.

책을 만지던 손이 그 붉은 것을 훔쳐냈다. 마치 그림을 덧그리듯 피 묻은 손끝으로 검은 나비를 더듬었다.

힘없는 쥬의 손이 잠시 들어 올려졌으나 몸 상태가 이상한 것인지 그 손을 맥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내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밀자 스티브의 눈 또한 번뜩였다. 손끝으로 제등을 더듬으니, 그 또한 손안에 반짝이는 검날을 품었다.

마침내 레코디아의 손이 쥬의 얼굴에서 떨어지고 그가 눈을 떴을 때 보인 색깔은….

“그럼 이제부터….”

레코디아는 느릿느릿 말하며 떨어트린 손을 다시 내렸다. 완연한 보랏빛으로 변한 눈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신을 부를 방안을 함께 고안해 보도록 하지요.”

“……!”

레코디아가 말을 끊는 것과 동시에 스티브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피하려 했지만 어느새 제단의 바닥 아래에서 튀어나온 예의 금속이 내 발목을 붙잡은 뒤였다.

설마… 이 제단 전체가 스티브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가?

생각을 더 할 수 없었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스티브가 내게 팔을 휘둘렀다. 그의 팔은 인간의 것이 아닌 금속으로 된 거대한 괴물의 팔과도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제등을 놓았다. 흘러나온 그림자 줄기가 내 손에 겉으로는 차가우나 만지는 순간부터 피부의 안쪽을 달아오르게 하는 붉은 단도를 쥐여 주었다.

내가 그것을 손에 듬과 동시에 내 앞으로 보랏빛 구슬이 날아왔다. 원형으로 넓게 퍼진 막 위로 스티브는 팔을 내리쳤다.

막이 잠시간에 시간을 벌어 주는 사이 단도를 내리쳐 발목을 묶어 두고 있던 금속을 잘라냈다. 깨지는 보랏빛의 장막 사이로 휘어진 눈과 눈이 마주쳤다.

자유를 찾은 다리를 들어 그런 그를 향해 휘둘렀다. 스티브는 곧바로 팔을 내려 그런 내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금속의 무게 탓인지 조금 둔한 면이 있었다.

그 잠깐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걷어차려던 발을 틀어 그대로 스티브의 팔 위로 올라탔다. 제 팔을 밟고 올라선 나를 올려다보는 스티브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그는 목을 뒤로 물렸고, 아쉽게도 내 공격은 그의 어깨 위로 움푹 팬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멈췄다.

“이…!”

“꺼져.”

반대 팔을 들어 올려 휘두르는 그를 피해 발끝에 힘을 주었다. 밑에서부터 기어들어 온 그림자가 지짐대가 되어 주었다.

그것을 밟고 올라가자마자 단도를 한 번 더 휘둘렀다. 푸른 불과 함께 내리쳐진 붉은 기류에 정통으로 맞은 스티브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잠깐 틈이 난 사이에 이호연 쪽을 보니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한 그가 다윈의 목을 물고는 기둥을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 생각했던 대로 몸 자체가 튼튼한 것은 아닌지 기둥 위로 내팽개쳐진 다윈은 낑낑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죽일 수도, 하물며 어디 한 군데 절단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대라면 차라리 타박상으로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저쪽은 대충 해결하겠지 라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신전의 돌인지 철인지 모를 조각들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티브가 보였다.

마티는 뒤편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레코디아는 비틀거리는 쥬를 제단 위에 눕히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신을 부를 방안을 찾아보자고 했었지….

쥬는 내게 말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아도 저것들은 기어이 신을 부를 거라고. 그리고 지금 그는 제단 위에 올려진 상태였다.

불길한 기분에 머리끝이 삐쭉 서는 것 같았다.

제물. 설마….

언뜻. 반짝이는 보라색 눈이 나를 향해 구르고 휘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그 말. 그가 했던 말의 의미.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너는 나의 손에 죽지 않는다는 그 말.

나비는 인도자. 테오그라젠스를 부르는 방법은 푸른 불꽃이 나비를 죽이는 것. 그러나 ‘푸른 불꽃이’라는 것보다 ‘나비가 죽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거라면?

아마빛의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있던 레코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마티가 움직였다. 그녀는 제법 커다란 유리 조각을 꺼냈고 그것을 레코디아는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그것이 향하는 곳은….

나비로 선택당한 이의 심장이었다.

스티브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들고 있는 단검을 어느 쪽으로 휘둘러야 하는지 명확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사이. 1초가 1시간 같고, 1분은 하루 같이 짧으면서도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잃어버린 시간 사이에서 나는 정답을 내려야 했다.

네가 내 손에 반드시 죽을 필요는 없다, 라는 것은 네가 굳이 죽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내 양심과 흔들리는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는. 네가 그리도 말하던 남에게 놀아나는 방식으로는 아니어야 함을 이야기한 거였다.

앞으로 뻗어지던 발이 멈추었다. 몸을 틀었다. 들고 있던 검을, 내리쳤다.

“무슨…!”

붉은 기류가 스쳐 지나간 이의 손이 유리 조각을 품은 상태로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붉은 것의 비릿함은 바다의 거센 향에 의해 날아갔다.

하얀 옷을 적시며 제 손을 붙잡고 물러나는 아마빛 머리의 남자. 그것을 바라보는 크게 뜨인 눈 속에 스테인드글라스.

고개를 돌리자 기다란 머리카락이 시야에 선을 그었다. 바로 앞에 날 향해 내리쳐지는 것들이 보였다.

늦었나? 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히죽이는 얼굴이 보였고, 뒤늦게라도 무언가 해 보자 하는 순간 히죽이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

달칵이는 소리가 울렸다. 내 어깨를 짚은 이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내밀어진 총이 걸쇠를 잡아당겼다.

총성이 울렸다. 총의 입구가 달궈지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 왜, 네가….”

“그냥… 이런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구멍 뚫린 제 이마를 더듬으며 스티브는 더듬더듬 말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제 금속으로 된 무기들을 챙기지도 못하며 뒤로 물러났다.

쩍쩍 갈라지는 얼굴이 마치 가뭄이라도 난 것처럼 무너지고 있어서, 그 모습이 비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

손. 단도를 붙들고 있지 않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힘을 풀었다. 내 어깨를 짚은 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요.”

그는 말했다. 인사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귀하신 분.”

남의 몸을 차지한 뻔뻔한 낯짝으로.

“어떻게….”

“재밌는 얼굴을 하는군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었고 어깨로 흘러내린 베일을 거두어 손에 들었다.

완전히 드러난 그의 눈은 양쪽 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보라색의 눈동자였다.

이 감각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소름 끼치고 위압적인 무언가에 짓밟히는 것 같은,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파르라니 날 서는 이 감각을.

어째서? 왜? 분명 내가 그를 죽여야지만 몸을 뺏기는 거라고 했는데 왜 지금?

도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는 언뜻 즐겁기까지 하다는 얼굴로 천천히 총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 하나하나가 남의 몸을 뺏은 이 같지 않게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제 손을 놔주시겠나요?”

“…….”

“당신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하여도 제가 이 총을 당신의 머리에 겨누는 게 더 빠를 거랍니다.”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흐음. 어떻게라…. 애초에 이러려고 만든 몸인데?”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늘어트렸던 팔에 힘을 주었다. 팔꿈치를 남자의 명치를 향해 휘둘렀지만, 그가 붙잡고 있던 내 어깨를 뒤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 혼자 비틀거리는 것으로 끝났다.

등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총구로 턱선을 훑으며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든 그는 기이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으로 나를 보았다.

“들었잖아요? 함께 신을 부를 방안을 고안해 보자고.”

“…너 알고 있었지.”

“무엇을?”

“테오그라젠스가 죽으면 그다음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내 말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온화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보자 나 또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와는 달리 일그러지고 비틀린 웃음이.

단도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으나 그는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며 제게 공격을 가한 손을 붙잡았다.

“…….”

힘이…. 전과는 달랐다. 붙잡힌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신의 죽음 다음이, 무언가 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이상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것까지 제가 생각해야 함은 아니니까요.”

“…….”

“나머지가 죽든 말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 정 살고 싶다면 발버둥 치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내 갈망이 이루어진다면 그다음은 무엇이어도 상관없거든요.”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진짜 미쳤구나?”

“욕을 하고 싶다면 하세요. 원래 내게 중요치 않은 말들은 그리 와닿지 않으니까요. 얼마든 욕하고, 원망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걱정하며 절망하세요. 푸른 불꽃.”

“…네 목 따이는 거나 걱정해.”

잡히지 않은 손안에 푸른 불을 피워올려 그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었다. 몸에 밴 반사신경은 그대로인지 불을 피해 주춤거린 그의 손힘이 약해졌다.

손을 떨쳐냈다. 그에게서 떨어지며 단도를 휘둘렀다. 가슴팍 위에 기다란 잔상이 남았다. 미적지근한 것이 뺨에 튀었다.

도포의 소매로 그것을 닦아 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흘겨보며 재밌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상처를 낼 줄은 몰랐는데…. 이 몸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상기하고는 있는지요?”

“그래서 뭐. 내가 네 몸 아니라 망설이거나 할 줄 알았어?”

어차피… 나중에 다 치료할 수 있는 상처였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의 뒤편으로 무언가 하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잔상을 따라 신전의 바닥과 기둥이 조금씩 금이 가고 하얀 바탕 위로 붉은 피가 번져 나가는 것도 보였다.

아마도 이호연이 상대하는 사도의 피일 터였다. 레코디아는 여전히 제단 앞에서 잘린 손을 붙잡고 있고, 마티는 멀뚱히 서 있었다.

스티브는 무너지는 제 얼굴을 붙잡고 눈앞에 남자를 노려보느라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이호연이 상대하는 것은 다윈일 것이다.

다른 것들이 싸울 의지가 없거나 상실한 것에 비해 그놈은 관종인가 싶을 정도로 끼어드는 것을 좋아했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 새끼.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호연이 그 녀석을 데리고 시간을 버는 것이 나았다.

그래 시간을 벌고… 생각을 해서,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정답일 길을 걷는다면….

“…….”

“혹시 잘하면 그 아이가 다시 이 몸을 차지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

“정말로? 하…. 순진하기도 하시지. 멍청하기도 하지.”

그는 손을 들어 제 상처를 더듬었다. 빛이 어리기만 했던 그전과 달리 온전한 새벽빛을 품은 물의 나비가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나비를 손으로 더듬다 손안에 움켜쥐더니 그대로 터트려 없애 버렸다.

“그 아이는 참 어리석어요. 내가 지금껏 못 뺏어 가만있던 것이 아닌데. 그 정도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생각할 줄 안다고 생각했건만….”

물에 젖은 손이 여전히 피가 묻어 있는 왼쪽 뺨, 검은 나비 문신 위로 올라갔다.

“끝까지 반항하니 좋게 끝날 것도 이렇게 성가시게 되었잖아요?”

“…….”

“뭐,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듯하군요. 재밌네, 재밌어. 이래서 난세의 용사는 환영받는 거군요. 하지만 말이에요.”

“……!”

눈앞에서 빛의 입자가 퍼져 나갔다. 뺨에 닿은 차가움으로 그것이 물방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앞. 눈 한 번 깜박일 틈에 내 앞으로 이동한 남자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그는 빛이 서리는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검붉은 색과 차가운 듯 묘한 부드러움을 품은 색이 뒤섞였다.

“당신의 역할을 먼저 해야지. 내가 어떻게 만든 길인데.”

“이거 놔!”

“내가 이딴 거적때기를 뒤집어쓰는 선택을 해가며 만든 길인데!”

처음으로, 나비. 신의 첫 번째 종자의 잘나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또 다른 얼굴이 들이밀어 졌다.

“……!”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너는!”

프레데터를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렸다.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스티브의 모습을 보며 나비는 낯을 굳혔다.

그의 신경이 저쪽으로 쏠린 틈을 놓치지 않고 프레데터를 휘둘렀다. 어차피 상처를 입혀 봤자 순식간에 치료된다.

지금 저자의 목적은 내가 아닌 ‘푸른 불꽃’. 예언을 실행해 테오그라젠스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브!”

호랑이의 앞발에 짓눌려 있던 다윈이 고함을 치는 것이 들렸다. 방관하고 있던 마티가 뒤늦게 손을 들었고 레코디아의 온화하던 낯이 절망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나비는… 굳은 낯을 풀고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죽어.”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

“귀찮게….”

그는 제 몸 위로 떨어지는 금속 조각들을 털어 냈다. 사람의 형체였던 것이 색을 잃고 바래고, 무너지는 그 과정이.

그렇게까지 짧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말이 안 돼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다 못해 온화한 얼굴로 같은 편이었던 이를 죽인다는 것이 소름 끼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티브! 스티브!”

피투성이 하얀 옷자락을 질질 끌며 다윈이 뛰어왔다. 붉은 흔적을 따라 눈을 돌리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호연이 굳은 낯으로 이쪽을 보는 것이 보였다.

간절한 손길이 빛바랜 조각들을 더듬고 끌어안았다. 두 개의 보라색 눈동자가 서로를 보았다.

한쪽은 무덤덤하게 한쪽은 격한 감정을 품고서.

“살려 준다고 했잖아! 천공 섬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때, 우리만큼은 안 죽게 해 준다고 했잖아!”

“그래. 내가 분명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다윈. 스티브가 먼저 약속을 어겼잖니? 내가 아니라 그가 나쁜 거란다.”

“…….”

“그리고 지금은 네가 나쁜 거야.”

나비는 천천히 걸어가 주저앉아 있는 다윈은 양 뺨을 잡았다.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정해 준 길을 걸으라고. 스티브는 내가 정한 길을 벗어났고 그래서 죽은 거야. 인도하는 이의 말을 잘 들었어야지?”

“하지만, 하지만….”

“그리고 지금 네가 막 내가 정한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어, 다윈. 우리는 신을 모시는 자들이야. 그런데… 그 신을 부를 방법을 도리어 방해하면 안 되지 않겠어?”

테오그라젠스가 아니었어.

“내가, 푸른 불꽃을 설득하고 있었잖아? 날 방해한 스티브가 나쁜 거야.”

저 남자였어. 사도란 존재들이 생각할 줄 알고 반항을 할지언정 벗어날 수가 없는 이유는.

제 사도들에게도, 제가 만든 세상에서 사는 이들에게도 일말의 관심도 없는 테오그라젠스가 아니라….

저 남자가 사도로 선택당한 이들의 목숨 줄을 잡고 있는 거였어.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준 그림. 처음부터 사도란 존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테오그라젠스가 아니었다.

무료한 신에게 즐겁게 해 주겠다 속삭인 저 남자가 사도를 만들도록 종용했고, 신을 죽이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도 저자였으며….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다른 사도들을 희생하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 모두가 그가 만들어 낸 이야기이며 그가 정한 길을 걸은 이들의 최후였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어쩌면 우리의 실패는 그의 그러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이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욱이 벅찬 감정 때문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비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휘었다. 그는 살아 있던 이의 흔적인 금속 조각을 집어 다윈에게 내밀었다.

“비록 스티브는 내가 정한 길을 끝까지 걷지 못했지만… 네가 대신 걸어 준다면 그 또한 행복할 거란다, 다윈.”

“…….”

“스티브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다윈?”

“상대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능력….”

“그래 맞아. 상상하는 어떤 생명체든 만들 수 있는 소원을 빌었던 컬린의 길을 네가 함께 걷는 것처럼, 이번에는 스티브의 길을 함께 걸어 주기로 하자.”

뭐?

그는 들고 있던 금속 조각을 다윈에게 쥐여 주었다. 다윈은 그것을 보며 눈은 울었고 입은 웃었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피가 묻어 있을지언정 매끄럽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에 잔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죽기 직전에 스티브의 얼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윈은 손을 들었고 가뭄에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금이 간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면서 훌쩍였다.

그런 다윈에게 나비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자. 이제 나를 방해하는 장해물을 치우자. 내가 걸을 길을 더 단단하게 다지자.”

그의 눈이 내게로 움직였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아주 귀한 것을 탐내는 것 같으면서도 가질 수 없다면 깨트려 버리겠다는 악의가 담겨 있었다.

“절망하도록. 그래서 힘을 갈망하도록. 바닥을 기며 신에게 빌도록.”

그는 손을 들었다. 총구가 들린 손이었다. 그것이 향하는 곳은….

“죽여.”

이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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