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악인(善人), 선인(惡人) (28/34)

나만 장르가 달라 6권

#악인(善人), 선인(惡人)

손민호가 가져다준 진통제를 먹고 그에게 따로 부탁했던 것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고 하얀 약통을 이호연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약통을 열어 손 위로 뒤집어 보았다. 작은 알약 두어 개가 손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이게 뭐냐는 얼굴로 손민호를 돌아보니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하게 답했다.

“어디다 쓸 줄 알고 약을 막 함부로 처방해 줘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손 위에 놓인 약을 바라보다 다시 통 안에 집어넣었다.

“주세진,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형은 왜요?”

“따로 받을 물건이 좀 있는데…. 나는 못 구하지만 주세진은 구할 수 있는 물건이거든.”

“?”

이호연은 의아함을 담아 나를 보았고 손민호는 매우 수상쩍다는 의미를 담아 나를 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그저 웃어 주었다.

“만나러 가는 건 상관없는데…. 꼭 지금 가야 해요?”

“지금은 곤란해요?”

“조금 전에 한바탕해서….”

한바탕? 손민호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쓰러졌을 때 뭔 일이 있었나?

이호연을 보니 이쪽도 뭔가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슬쩍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호연은 한번 입 다물면 잘 안 여는 것을 아는지라 손민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부담스러울 만큼 쳐다보는 내 시선에 손민호는 결국 항복했다.

“그냥 원래부터 사이가 썩 좋지 않았잖아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길드장님이 결국 터졌다고 해야 하나….”

뭘 저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약간 답답해져 나는 곧바로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누구 때문에 화났다는 건데요.”

손민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답했다.

“뒤에서 말만 많은 사람들.”

“…….”

뭉뚱그려서 말했지만, 손민호가 말하는 게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짐작 가는 게 또 많아 콕 집어 누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손안의 약통을 만지작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있는 거죠?”

“일단은 그렇죠…. 갈 거예요?”

“네. 혼자 삽질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손민호는 복잡한 얼굴로 안경을 벗고 눈 사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지금 엄청 고민되는 거 알죠? 류를 올려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못 막잖아요.”

“…너무하네.”

길게 한숨을 내 쉰 손민호가 방금까지 내가 앉아 있던 침대에 앉아 몸에 힘을 풀었다. 그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왜 이렇게 내 주변엔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무슨 의미예요?”

“그렇잖아요. 본인 하나 목숨 건사하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왜 먼저 나서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손민호는 정말로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똑같잖아요. 힐러가 전투 가능한 경우가 흔한 건 아닌데.”

내 말에 손민호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스스로가 나서지 않는 사람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손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전직관을 만나서 대화를 좀 해 봤거든요?”

“대충 들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요. 전직이라는 건 애초에 어느 방향으로라도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말로는 이해 안 된다고 하지만 그쪽도 오지랖 넓은 사람일 거라는 뜻이죠.”

“…….”

“약, 고마워요.”

문을 여는 내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요.”

“응?”

“지금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우리랑도 좀 놀아요. 맨날 이호연이랑만 놀지 말고.”

“…….”

“말 안 해도 류가 우리한테 선을 긋고 은근히 물러서 있는 거, 알고 있거든요. 연애만 즐기지 말고 다른 것도 좀 즐겨 봐요.”

내가 선을 그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들과는 대화는 해도 어울려 놀거나 친분을 다지는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또한 대부분 먼저 말 거는 것도 내가 아니었다.

머뭇거리다 뒤를 돌았다. 나를 보는 얼굴이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해 보였지만 긴장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꼭 둘 중 하나는 죽던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둘 다 죽을 수는 있어도 하나만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와.”

짧은 감탄사에 손민호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몸 사려요. 난 오래오래 살고 싶으니까.”

“…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심정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완전히 농담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둘 다 죽을 수는 있어도 하나만 죽을 리는 없을 테니까. 전방에 서는 내 죽음은 결국 모든 게 끝남을 암시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침대 위로 완전히 드러눕는 손민호가 보였다. 몸을 웅크리는 그의 모습에서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그것을 봤음에도 내가 취한 행동이라곤 조용히 문을 닫아 주는 것뿐이었다. 칙칙한 마음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복도를 걸었다.

익숙한 길을 지나 도착한 주세진의 방 앞에서 서성거리는 비서님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화색 어린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도 돼요? 사실 안 된다고 해도 들어갈 거예요.”

“…네?”

혼란스러워하며 버벅대는 그를 두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뒤늦게 말리려는 비서님을 이호연이 저지시키는 것이 보였다.

잠깐의 설전 끝에 비서님은 우리를 포기했다. 이호연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하는 비서님과 그런 그를 막는 이호연이 보였다.

“…….”

개판이네.

평소의 깔끔함이라곤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책을 들어 훑어보았다.

어렵고 빼곡한 말로 꽉 찬 책이었다. 중간중간 찢어져 너덜거리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깨져서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유리 조각들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세진은 전투 쪽으로는 영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하는 일은 머리를 굴리는 것이지 몸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나 또한 비슷하게 하는 생각이었다. 주세진에게선 괴물 앞에 서는 자들 특유의 느낌이 옅었다.

그래서 아주 옛날에는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속 편한 자식이라고 씹은 적도 있었다. 언제, 왜 그런 것인지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 이호연이 주세진은 본인 몸 하나는 지킬 정도는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가 칼을 다루는 것을 보았을 때 한두 번 써 본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세진이라는 사람 자체는 칼보다는 펜이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그가 괴물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결국은 그 모습도 다 만들어진 모습이라는 걸.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걸.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주세진 또한 결국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주세진과 한바탕했다는 그 사람들은 오늘 생각했을 것이다. 저들에게 맞춰 주던 사람이 사실 가장 사람 흉내를 잘 내는 괴물일 뿐이었다고.

그의 노력과 인내는 이토록 쉽게 깨지고 부서지는 거였다.

“화났어요?”

내 질문에도 주세진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박살 난 책상에서 흘러내리듯 떨어지는 종이뭉치를 보다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을 보며 등진 그의 모습은 겉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단정했다. 도저히 지금의 개판을 만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후회일까? 어쩌면 후련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허무함일 수도 있다.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깽판 친걸 보면 어지간히 화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나는 일에 있어 높은 확률로 내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전직자들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이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사람일 수가 없는 우리가 걸려 있을 것이다.

“화내지 말아요.”

“…내가 해 왔던 모든 것들이 별 의미가 없었던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

“…….”

“인식을 바꾸고 분위기를 바꾸고 생각을 바꿔도…. 하나만 잘못되면 다 무너져 내려. 다시 옛날로 돌아가 처음부터 반복돼.”

“…….”

“우리도 사람인 이상 지칠 수밖에 없는데 왜 그 생각은 안 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자꾸 다른 무언가로 보는 건지 모르겠어.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주세진이 전직해 얻은 가장 도드라진 능력은 정신력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은 그를 지탱해 왔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안에서 곪아 가는 상처를 발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그 상처가 곪아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도 너희를 욕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게. 너희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게.’

그때 그가 그 말을 할 때 가볍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넘겨듣지 말아야 했다.

주세진이 저 스스로 그 말에 매몰되지 않게 아예 처음부터 못을 박아야 했다.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너나 잘살라고.

당신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음을 차라리 그 옛날 말했었다면 그는 파도 한 번에 무너지는 모래성을 홀로 쌓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의 성은 몇 번이나 무너지고 다시 완성되기를 반복했을까. 전직자에 대한 논란거리가 나올 때마다, 부정적인 인식이라도 하나 생길 때마다.

아주 작고 가벼운 것들이 크기를 키울 때마다.

내게서 등 돌린 그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었다. 울고 있을지 일그러져 있을지.

그도 아니면 이 와중에도 그 대단하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을지.

원래 그런 거였다.

인식이라는 건 무서울 정도로 쉽게 변하지 않고, 고정 관념은 처음부터 바뀔 의지가 없는 것들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 다음을 항상 생각해야 했다.

우리는 강자지만 어떻게 보면 또 약자였고, 선인(善人)이어도 악인(惡人)이고, 악인(惡人)이어도 선인(善人)을 흉내 내야 했다.

내 팔이 부러졌었나 아니었나 같은 문제는 묻히고, 주세진이 노력했던 것들이 무너진다고 해도. 사람으로서 살고 싶으면 맞춰야 했다.

그게, 옳은 거니까. 설령 그것들이 나를 죽게 한다고 해도.

“…….”

천사를 흉내 낸 꼴로 그 말을 속삭이던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난 떨지 말라고 하던 그 사람의 얼굴도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말이, 그 시선이 모두 내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내 앞에 차곡차곡 쌓아 나를 밀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누군가의 말을 빌려 입을 열었다.

“우린 사람이에요.”

“…….”

“그래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거고요. 그게… 옳은 거니까.”

저들이 우리를 밀어낸다고 하여도, 결국 우리가 지키고 싶은 누군가도 저들에 해당하니까. 우리 또한 저들이라는 그 울타리에 끼어들고 싶으니까.

누군가는 이런 내 생각을 두고 진심이 아니라 단순한 동정이나 체념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혹은 잘못된 비난과 차별에 수긍하는 겁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우리를 포옹해 줄 이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 일말의 가능성과 바람에 기꺼이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이 우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고 자신을 납득시킨다고 하여도 주체되지 않는 감정 또한 있는 법이었다.

“너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래 이렇게 말이다. 이미 나부터가 납득하지 못하는 그 꼿꼿한 불만. 남의 눈에도 보이는 내 날 선 불만.

그 말에 답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저, 그런 나에게 또다시 한없이 깊어지는 죄책감을 갖고 눈을 맞출 이를 기다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돌아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새까맣게 느껴졌다.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인 게 분명한데도 유난히 어둑하게 보였다.

단순히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의 안에서 곪아 썩어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난 탓이었다. 가장 먼저 머리를 숙여 놓고 가장 많이 그 차별에 납득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또한 내게서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 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거짓된 안주에 가려진 내 진심 같은 것들 말이다.

답을 기다리듯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얼굴이었다. 그게 어쩐지 웃음이 나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내 생각은 당연히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언제나 그다음이니까요.”

“…….”

“그리고 그다음을 위해선 움직여야 하고요.”

궤변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문제에서도 답이 되지 못할 말이나 주절거리는 내 모습에 주세진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묵직한 한숨이 손 틈새로 빠져나왔다.

내 팔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말이 돌까 싶어 유난스럽게 걱정한 누군가? 당연히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행동이 쓸데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무너져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건 나도, 이호연도, 주세진도 마찬가지였다. 전직자라는 꼬리표를 달았다면 그게 누구든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앞으로 나서야 했다.

지금 나는 주세진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거였다. 누구보다 앞에 서는 내가 이렇게 멀쩡한 척을 하는 얼굴을 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는데.

당신은 이곳에 처박혀 그렇게 죄책감과 회의감에 휩싸여 가만히 있을 것인가, 라고 몰아붙이는 거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몹쓸 짓에 주세진은….

손을 떼는 그의 얼굴은 다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그래서 서글프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힘든 것 하나 마음대로 표출하지 못하게 된 사람으로 자리 잡은 주세진이라는 사람이 불쌍해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되레 나는 그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다음을 위한 그 한 걸음을 위해.

끝난 것 하나 없는 그것들을 끝내기 위해서.

“…부탁이 있어요.”

“그렇겠지.”

그걸 당신이라고 모를까. 그 덤덤한 어조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격해진 감정을 후회하는 것이 느껴졌다.

박살 난 책상을 피해 내 앞으로 걸어온 주세진은 말하라는 듯 나를 보았다. 결코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않는 그 굳건한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제야 알아챈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의 눈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검푸른, 아주 깊은 심해색의 눈이었다.

마치 그의 인생 같은 눈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프레데터.”

“…….”

“박물관에 전시된 그것 좀 저한테 주세요.”

나에게는 없는 지위와 권력 그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은 주세진만이 해 줄 수 있는 일. 나는 미리 챙겨 두었던 약병을 꺼내 그의 앞에서 흔들었다.

“철분제도 챙겼어요.”

가라앉아 있던 그의 얼굴에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나는 음울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서 떠오르게 했다는 것이 기분 좋아 웃음이 나왔다.

상황은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데 갈수록 웃음은 헤퍼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각박하니 이렇게라도 웃고 싶은 사람의 심리일지도 몰랐다.

잠시간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주세진은 본질적인 질문을 내게 하였다.

“…네가 그게 왜 필요해. 네 무기 있잖아.”

원래라면 그의 말마따나 그런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무기 따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을 내밀자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온 제등이 내 손에 잡혔다. 그것을 쭉 잡아당겨 양손으로 받쳤다.

주세진의 시선이 기다란 제등을 쭉 훑고 내려갔다. 끝에 다다르자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나 또한 제등의 밑동을 보았다.

상해 버린 제등의 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점이 뚜렷한 힘에 관하여 내 입으로 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나 또한 질 수 있고 그래서 원하지 않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했다.

내가 얻은 이 힘이 완전하고도 굳건하다고 믿는 것으로 나 자신을 지켜왔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했다.

“…나무로는 안 돼요. 나무칼이 날카로워 봤자 얼마나 날카롭겠어요. 지금까지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해도 이번에는 안 돼요.”

“…….”

“그리고 이름 있는 무기 중 칼의 형태를 한 건 프레데터뿐이죠. 그걸 다룰 만한 사람은 나뿐이고.”

이것은 허세도,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그걸 또 다른 이름 있는 무기의 주인인 주세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민하는 주세진의 표정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누가 나보다 그걸 잘 다룰 수 있겠어요. 누가 나보다 그걸 들고 잘 싸울 수 있을까요. 없어요.”

“…….”

“사심 빼고. 총사령관으로서만 생각해 봐요. 우리한테 하나씩 붙여 놓은 강유진 씨 구름으로 봤을 거 아니에요. 사도란 것들이 얼마나 또라이인지.”

왜 내가 뜬금없이 그 무기를 원하는지도.

“…프레데터는 그 능력이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았어. 10초 이상 들고 서 있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번 기회에 확인하면 되겠네요. 내가 무생물 같은 것들이랑 기 싸움하는 걸 참 잘하거든요.”

“난….”

“내가.”

자신의 말을 끊어 먹는 나를 주세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보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내가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말했죠? 사적인 감정은 버리고 생각하라고.”

“…….”

“이제부터 우리는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 안에 우리의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원망도 안 하고 미워하지도 않을게요.”

그에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의 망설임이 어디서 나온 것일지야 뻔했다.

“어떤 전략을 내놔도 난 그걸 완벽하게 성공시킬 거예요. 나만 한 인재가 따라 준다고 할 때 그냥 좋다고 하세요. 두 손이 뭐야. 두 발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에요, 이거.”

“…….”

“알잖아요. 나 말 더럽게 안 듣는 거. 허락 안 해 주면 박물관 가서 털어 올 거예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말을 해 차라리 그가 허락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주세진은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반응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이건 또 바로 수긍하네.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 나를 보며 주세진은 결국 웃었다. 목을 틀어 매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푸른 그가 입을 열었다.

막혀 오던 숨통이 조금은 트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공략 팀 전부 불러와.”

“전부?”

갑자기? 내 되물음에 주세진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 혼자 못 가. 너 혼자 보낼 생각도 없고.”

프레데터가 있을 박물관으로 직접 가지러 가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인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내 개인적인 무기 파밍을 위해 다른 사람들도 다 보내겠다는 건가?

“그래도 몇 명은 남아야 하지 않아요? 다른 직원들이 전직자이기는 해도….”

주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가 그의 눈가를 스쳤다.

“난 수비보다는 공격 쪽이 더 익숙한 사람이야.”

“…….”

슬며시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주세진은 항상 공격 위주의 명령을 내렸다. 지금에 와선 구조 쪽의 명령을 많이 내리지만…. 옛날에는 단 한 번도 수비전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전략은 애초에 수비를 할 이유 자체를 만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수비는 공격이 실패한 이후를 위한 것이었다.

***

지옥도 당시, 주세진이 총사령관 노릇을 하던 시기에는 제대로 된 전직자의 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부분이 평범하게 살다가 상황에 떠밀려 뜬금없이 힘을 얻은 자들이었다.

통제나 되면 다행이었고, 갑자기 얻은 힘으로 쓸데없는 짓을 못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다.

제힘을 주체 못 해 사고를 친 이들은 풀이 죽어 있었고, 제힘을 뽐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은 만용이 넘쳤다.

지금에 와서 당시 주세진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런 오합지졸을 이끌고 어떻게든 전략을 세우고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는 지휘에 있어 특출 난 인재임을 자기가 직접 증명한 꼴이었다.

사람이 여럿 모여 있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당시 전직자들은 괴물보다는 사람을 많이 상대해 본 자들이 다수였다.

미지의 존재에게 덤비는 것보다는 그쪽이 상대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히 무법 지대라고 할 법한 시기였다.

언제든 내 등 뒤에 칼을 찌를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하는 작전이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주세진은 그것을 항상 성공으로 이끌어 냈다. 그건 비단 그의 통솔력이 좋았다든가 작전이 좋았다든가 하는 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밑바탕이었다. 신뢰라고는 찾을 수 없는 당시 전직자들이 순순히 주세진의 말을 들었던 것은 오로지 그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물건 덕분이었다.

그것의 효용을 본 자들은 그때부터 순순히 주세진의 명령을 듣기 시작했다.

그의 명령을 반절은 듣고, 반절은 독단으로 행동하던 나 또한 그들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그때부터는 주세진이 짜 놓은 루트를 따랐고 혼자 멋대로 행동하진 않았다.

“…….”

오랜만에 보는 낡은 지도가 개판 난 방에서 그나마 멀쩡한 모습을 한 테이블 위를 덮었다. 끝의 몇몇 부분은 조금 삭아 있었고, 희미하게 낡은 종이의 냄새가 났다.

그 위를 더듬는 손이 신중했다. 그 손의 주인이자 지도의 주인인 주세진의 손끝을 따라 지도의 그림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박상호가 놀란 듯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그런 그를 힐끔 보다가 다시 지도 위로 시선을 돌렸다.

오페리움. 이름 있는 무기 중 하나. 실용성과 활용성으로만 따지자면 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지옥도가 끝난 이후로는 거의 볼 일이 없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그랬던 걸 다시 보게 되니, 세상이 정말 종말로 향하고 있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불그스름한 빛깔을 내는 빛바랜 검은 선으로 전 세계를 그려 내던 지도가 이제는 하나의 국가만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주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더욱 세분화시켰다. 그의 손이 지도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침내 서울 외곽에 지어진 박물관의 모습을 그려 낸 지도를 보며 주세진은 손을 떼었다. 그런 그의 손을 따라 지도 위에 그려진 박물관의 선들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검은 선들은 헤매듯 바닥과 벽을 기더니 천천히 박물관의 내부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주세진이 손을 움직이자 방을 채운 선들도 움직였다. 마치 직접 박물관으로 가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페리움 자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공략 팀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강유진은 주세진의 옆에 서서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주세진에게 물었다.

“결국은 털러 가는 건데 이렇게 우르르 갈 필요가 있어요? 그냥 나 혼자 가서 몰래 빼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애초에 내가 주세진에게 허락을 받은 이유는 혹여나 나중에 문제 될까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지만, 국고를 훔친 범인 취급은 받고 싶지는 않았다.

프레데터는 결국 전직자를 위한 무기였다. 그럼에도 그 무기를 방생하는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 이들은 당연히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었다.

그리고 예외적으로는 그에 맞먹는 명예와 지위가 있는 주세진.

내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뻔히 알면서 지금 이러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챈 주세진은 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너 혼자 안 보낸다고. 그리고 가 봤자 못 찾아. 아무리 장식품 취급이어도 프레데터의 가치를 잊지 마. 보안 장치도 없이 전시를 해 놨을 리가 없잖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잡자마자 잡은 사람 쓰러지게 만드는 물건을 누가 훔쳐 가겠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해도 세기의 보물이라 할 법한 것을 허술하게 보관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공략 팀 전부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주세진은 지도 위를 더듬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게다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이 너를 찾을 거 아니야. 너 혼자 나갔다가 그것들 만나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쩌게.”

“…….”

“적어도 같이 가면 상처는 바로 치료받고 도망도 갈 수 있겠지.”

그의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오정인과 손민경이 손을 들고 말했다.

“도망 담당입니다.”

“치료 담당입니다.”

참 해맑은 어조라 되려 힘이 빠졌다. 허탈한 것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자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들끼리 키득거렸다.

“같이 가. 혼자 갈 생각하지 말고.”

“…네.”

맥없는 내 대답에 주세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누군가와 나를 굳이 함께 보낸다는 것은 ‘너 혼자는 안 된다’, 즉 내 능력 부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임에도 생각보다 타격은 없었다.

그래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는 이호연 손을 툭툭 쳐 긴장을 풀어 주었다. 적어도 이제 나는 내가 그리 강하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나도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은, 그 굳건한 믿음이 참 허무하게 무너지는 평범한 사람.

최대한 늦게 깨닫고 싶던 진실이었다.

내가 나 나름의 감정 정리를 하는 중에도 주세진은 신중하게 오페리움을 다뤘다.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생각해 보면 주세진이 쓰러질 정도로 무리하는 건 오페리움의 공간 능력을 사용할 때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오정인을 보니 그녀는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젓고 다시 내부를 표현하는 검은 선들에 집중했다.

오페리움의 공간 이동과 오정인의 공간 이동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오정인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종류라면 오페리움은 말 그대로 공간과 공간을 바꿔치기하는 종류였다.

예전에도 주세진이 몇 번 사용한 적 있는 능력이었지만, 그때마다 며칠을 앓느라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는 요령도 없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공간과 전혀 관련 없는 능력을 가진 주세진이 짊어져야 했던 페널티이기도 했다.

나나 이예린이 공간 능력의 일부인 영역을 여닫을 때마다 골골거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 때문에 오정인의 능력이 가장 좋다 싶다가도, 그보다 상위 버전의 능력을 지닌 마티를 생각하면 절로 뒷골이 당겼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자 옆에서 박물관의 내부의 길을 익히던 이호연이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보았다.

뒤늦게 내 기분이 상했나 싶어 살피는 눈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유난이었다.

내 능력의 무능에 관하여는 어째 나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 전 주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호는 프레데터가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봐.”

“지금요?”

당혹스러운 박상호의 얼굴에서 주세진이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가늠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확실히 오페리움의 능력을 잘 모른다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고민할 법할 말이기는 했다.

주세진 또한 그런 박상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오페리움의 능력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 A가 개판 난 주세진의 방 B라는 공간 위로 덧씌워졌고, 박상호의 능력인 탐색의 경우 A, B 공간에 동시에 사용되는 것으로 처리된다.

이 능력이면 안전한 곳에서 공간 시뮬레이션은 물론 쓸데없이 길을 찾느라 헤매거나, 위험한 곳을 못 보는 등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박상호는 주세진의 설명에 ‘저는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일단 하겠습니다.’ 같은 표정을 짓더니 눈 위로 황금빛의 나침반을 띄웠다.

“어!”

“?”

박상호를 기다리며 지도 위를 훑어보던 중 이나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검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의 내부와 달리 선명한 붉은 빛을 띠는 거대한 무언가가 스르르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예요?”

“아, 저거 괴물일걸요?”

이나연의 물음에 나는 여상한 어조로 답을 해 주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붉은 형체를 힐끔거리며 신기해했다.

그녀와 함께 그것을 보던 김수혁이 이호연의 팔을 툭툭 치며 물었다.

“여기서 저건 못 죽여?”

“가…능은 하지.”

살짝 머뭇거리는 어조로 답하는 이호연을 김수혁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두고 잽싸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다 미묘한 표정은 짓고 있던 주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호연의 말대로 여기서 오페리움의 능력으로 박물관에 있는 괴물을 죽이는 게 가능은 했다. 가능은.

내가 몸소 해 보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주세진은 닷새를 앓아누웠지.

오페리움을 이용한 공격은 공간 이동만큼의 페널티를 안겨 주었다. 이 중에서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은 당사자였던 나와 주세진, 그리고 목격자인 이호연뿐이었다.

당시 주세진은 인류의 희망을 쓰러트려 버린 내 행동에 사람들이 불만의 기색을 보일까 싶어 그 일을 묻어 버렸다.

하지만 굳이 그가 그러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아, 찾았다!”

때마침 터져 나온 박상호의 외침 덕분에 우리의 관심은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주세진은 박상호의 말에 따라 지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세진과 박상호를 제외한 우리는 이동하는 검은 선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길을 외웠다.

손민경이 핸드폰을 들고 주변의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검은 선이 움직이고, 방이 복도로 다시 방으로, 그 방에서 옆방으로 공간은 움직였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다.

“저 안에 있어요.”

박상호의 말을 들으며 벽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보았다. 주세진이 잠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자 내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그림은 실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주세진을 보니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망설이다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하얀 벽 위에 손을 올리니 손끝에서부터 실제와 다를 것 없는 감촉이 느껴졌다. 슬며시 푸른 불을 손끝에 감으니 벽 위로 일렁이는 보랏빛의 막이 드러났다.

“저거 그거죠? 안전 가옥에 있는 결계. 한다, 한다, 말이 많더니 진짜로 설치했었네.”

뒤에서 지켜보던 강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레데터가 있는 박물관에 그 결계를 설치하겠다고 한 기사는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물컹한 젤리 같다가도 힘주면 딱딱하게 변하는 그것을 몇 번 더듬다 손을 떼었다. 당장에 부술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주세진이 쓰러질 것이다.

걱정 어린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강유진에게 말했다.

“부술 수 있어요, 이거.”

태연한 내 말에 강유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대단하기는 하네요. 국가에서 만든 회심의 역작인데 저거.”

“국가에서 만든 거예요?”

하긴 안전 가옥도 국가에서 설치한 기관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는 했다. 그럼 저거 부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네…. 그건 좀 곤란한데.

저걸 어쩔까 고민하는데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부술 수 있으면 그냥 해. 나중에 다시 설치하면 되니까.”

“네?”

“사람도 없는 박물관 결계 좀 부순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 그러게 누가 쓸데없는 데 돈 쓰랬나.”

“…….”

프레데터의 가치를 운운하던 분은 어디 갔지….

답지 않게 다크해졌다. 어지간히 한바탕했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흑화했나 봐. 깐깐하던 평소와 달리 원리 원칙을 던져 버린 주세진은 정말 거침없었다.

***

국가에서 만든 회심의 역작이라더니, 과연 그 이름값을 했다. 오정인의 공간 이동으로 박물관 바로 앞까지 이동한 우리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 안으로는 이동이 안 돼요. 저번에는 됐는데…. 그사이에 업그레이드시켰나 봐요.”

오정인은 분하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결계의 일정 거리에 가까워지면 이동 능력에 제한이 생기는 방식인 듯했다.

주변에 괴물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따로 챙겨 두었던 약병을 꺼내 그 안에 든 것을 집었다.

“그거 진짜 먹게요?”

내 손 위에 놓인 것을 발견한 손민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나 싶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좀 이따 피 빨릴 예정이라서요.”

“…하나만 먹어요, 그럼.”

그의 말에 손에 올려진 철분제를 하나만 빼고 다시 약병으로 집어넣었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이호연이 그게 뭐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철분제.”

“…….”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한 이호연은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서 있던 오정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했다.

오정인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을 꺼내 이호연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내게 내밀며 말했다.

“물이랑 같이 먹어요.”

“응.”

처음으로 철분제를 먹어 본 감상은 ‘그냥 알약 삼키는 것과 똑같구나.’였다. 하늘 조각 안에 약초를 섞어서 만든 거라기에 뭔가 더 특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주세진의 오페리움으로 사전 답사를 한 덕분에 우리는 헤매지 않고 박물관 안을 돌아다녔다. 간간이 툭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생각보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위치에 몇 마리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돌발 사고라고 할 법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릴 때도 안 해 본 도둑질을 다 커서 해 보네. 그것도 국립 박물관에 있는 물건을.”

조금은 한탄이 서린 손민호의 말을 시작으로 평소와 달리 조용하던 공략 팀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다들 내심 긴장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건 박물관 기증 물건을 털러 온 것에 대한 긴장감은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해야 할 정도의 적이 나타났다는 점에 대한 긴장감이었다.

눈에 익은 건물 내부를 훑어보는 내게 박상호가 질문을 했다.

“근데 누나 무기는 무슨 능력을 갖고 있어요?”

“응?”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오페리움을 보고 나니 새삼 이름 있는 무기에 대한 관심이 생긴 듯했다.

손민호는 그런 박상호에게 가벼운 타박 조로 말했다.

“야, 넌 그걸 인제 와서 묻냐?”

“형은 알아?”

“아니. 몰라. 뭔 능력이에요?”

어이없다는 듯이 손민호를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피하지 않는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타박을 한 상대가 박상호가 아니라 나였던 듯했다. 아마 본인들과도 좀 놀라고 했던 말의 연장선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 건 오페리움처럼 다양한 기능은 없어. 푸른 불이랑 그림자 강화? 그 정도밖에 없어.”

“귀신은 못 다뤄요?”

귀신? 기대하는 듯이 나를 보는 박상호의 말에 반응하듯 발밑의 그림자들이 술렁거렸다. 그것을 힐끔거리다 말했다.

“다룰 줄 알았다면 내가 이 시대 고스트 계열 포켓몬 마스터였겠지.”

애초에 이것들은 사념 같은 거였다. 의지도 없고 생각도 없는, 적의밖에 없는 것들.

귀교(鬼橋)를 타고 넘어올 수 있는 것들은 애초에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오는 것들뿐이었다. 텅 빈 것들을 다시 채울 적의는 이곳에 넘쳐흘렀고.

그래서 자꾸 나한테 덤비는 건가. 괜스레 발밑의 그림자를 잘근거리며 밟았다.

잡다한 이야기와 깊은 생각을 반복하니 문제의 결계가 쳐진 벽 앞으로 금세 도착했다.

손을 뻗어 그 위를 더듬으니 보랏빛의 벽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벽 위로 덧씌워졌다. 그것을 훑어보던 김수혁이 이호연에게 물었다.

“넌 저거 못 부숴?”

“글쎄….”

다소 성의 없는 답이었지만 이호연의 얼굴을 살펴보니 정말로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나처럼 보자마자 부술 수 있나 없나 가늠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나는 손민호로부터 왼팔 금지란 말을 듣고 오른손에 그림자를 감았다. 뱀처럼 내 팔을 기어 올라온 그것은 한겨울의 추위와는 다른 스산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곧바로 보랏빛의 결계 위를 내리쳤다.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결계가 깨져 버린 유리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보음이라도 울리는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조용하네요.”

“그만큼 자신 있었다는 뜻이겠죠.”

하긴 누가 국가에서 내놓은 회심의 역작을 부숴 버릴 거라고 생각했겠어.

결계 조각 하나를 들어 눈으로 훑은 이나연이 그것을 뒤로 휙 던졌다. 그것을 지켜보다 다시 손을 올려 벽을 부쉈다.

급작스러운 내 행동에 몇몇이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벽 부숴야 하는 건 맞잖아요.”

언제 이거 여는 장치를 일일이 찾아.

“그…렇죠, 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오정인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류는 정말… 신체 계열로 전직했으면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런데요, 뭘.”

그녀의 말에 대충 답해 주고 잔해를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딱 내가 부순 벽 정도의 크기의 통로는 사람 둘이 간신히 함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우리는 일렬로 서서 그곳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오페리움으로도 보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이었다.

손을 내밀자 자그마한 꼬마 도깨비불이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어두컴컴한 곳에 푸른 불이 떠오르자 뒤편에 서 있던 박상호가 입을 열었다.

“그거 불…. 귀신의 집에 있는 조명이랑 색 비슷해요.”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손을 흔들어 불의 색을 바꾸었다. 평범한 붉은 불로 바뀌자 김수혁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것이 들렸다.

불 계열 마법사들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발 조심해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자 바로 내 뒤편에 서 있던 이호연이 조용히 말했다. 딴생각에 빠져있어 계단이 있는 줄 몰랐던 터라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다.

“딴생각했죠?”

“아니?”

의심 어린 눈을 피하니 이호연이 나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걸음을 멈추고 그런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호연이 걷던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넘어지면 받쳐 주려고요.”

“…….”

옅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나도 그와 비슷한 얼굴을 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은 덕분에 산소 부족을 겪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쪽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말수가 줄었고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침묵 사이로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저 안쪽. 깊고 어두운 통로 안쪽으로부터 불길하고 음울하기 그지없는 것이 느껴졌다. 무형의 기운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선명했다.

“…….”

하지만 내게는 다소 익숙한 감각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을 류를 처음으로 보게 된 날도 이런 감각을 느꼈으니까.

그때 랑이 뭐라고 했더라.

기억해 내면 프레데터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희미한 기억은 도저히 선명해지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계단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느껴졌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 박물관 소장이 참 비범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걸 박물관에 장식할 생각을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여기 소장, 전직자였어요?”

“아뇨. 왜요?”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맡겠다고 했는지 궁금해서요.”

아무래도 내가 프레데터가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이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으로 오기까지 설치되어 있던 결계는 누군가 이것을 훔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저 안에 있을 것이 사람을 잡아먹게 하지 않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열까요?”

문 위로 손을 올린 이호연이 고개만 틀어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올린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둥실거리며 떠 있던 붉은 불 자락이 다시 푸르게 바뀌며 흩어지는 연기처럼 나를 훑었다. 누군가가 어루만지는 손길 같은 그것은 내 뺨을, 어깨를 귓가와 눈가를 스치다 마침내 눈을 감싸며 사라졌다.

온기가 남은 눈을 떴다. 낡은 경첩이 조용한 이 공간에서 저 홀로 선명하게 소리를 내었다. 차가운 먼지 냄새가 가장 먼저 오감을 자극했다. 피부 위로 따끔한 기운이 스쳤다.

기나긴 여정 같은 시간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이곳에는 검붉은 기운을 흘리는 새빨간 칼 한 자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데터….”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만약 무생물에게도 의지가 있다면 지금 저 칼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적의에 가까울 것이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단순히 느낌이 아닌 실제로도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 손을 들어 보니 자잘한 생채기들이 손등 위에 새겨져 있었다. 손민호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하얀빛이 상처를 지워 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요….”

오정인의 말에 앞을 보았다. 그 흔한 유리 상자 하나 없이 장식대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프레데터의 옆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가까이 가지 말 것. 건들지 말 것.

누구 보라고 적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본의 아니게 실제로 그 경고문을 보는 사람이 된 나는 프레데터를 훑어보며 고민했다.

프레데터는 이름 있는 무기 중에서는 가장 무기에 적합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두 뼘 반 정도 될까 싶은 칼날은 알리바바의 도적들이 들고 다닐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색은 피를 머금다 못해 말라 굳어 버린 것 같은 검붉은 색이었다.

손잡이를 둘둘 감은 검은 천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붉은색으로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적색경보가 울리는 물건이었다.

저걸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류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이 끝없는 심연에 갇힐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면 프레데터는 수백 개의 칼날이 노니는 곳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강제적인 만용의 두려움이었다.

발밑에 그림자들이 술렁거렸다. 제멋대로 스르륵 움직인 그림자 줄기가 장식대를 타고 올라 프레데터를 건드렸다.

붉은 칼날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던 피 냄새가 더 진해졌다. 조명에 하얗게 빛나던 칼날에 새빨간 빛이 더해졌다.

가까이 다가간 그림자 줄기가 잘려나갔다. 꼬리를 버리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다시 발밑으로 돌아온 그림자를 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붙잡았다.

“가까이 가는 건 위험해요.”

“우리 지금 저거 훔치러 온 거야. 그리고… 한번 경험해 봐서 아는데 위험한 짓은 하는 게 답이더라고.”

내 말에 의구심으로 낯을 찌푸리는 이호연을 두고 앞으로 걸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이호연은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몸 자체가 튼튼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호연과 같은 신체 계열인 이나연과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맷집은 있는 손민호가 따라 왔다.

간간이 손민호의 손에서 반짝이는 하얀 빛들이 자잘하게 생기는 생채기를 치료했다. 몇 가닥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눈으로 훑고선 다시 앞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에, 푸른 불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나를 위해 랑이 류를 내줬었다. 그때 랑은 새까만 제등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것들의 자존심은 무척이나 강하고 굳세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화를 입힌다고. 그것은 어찌 보면 심술이자 적의라 했다.

긴 통로를 걷는 내내 결국은 생각해 낸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 잡아 먹힐 것 같은 검은 나무를 보며 나는 주춤거렸다. 그런 내게 랑은 말했다.

무기란 결국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무리 싫다 거부해도 이것들은 또한 원하고 있다고.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이것을 다루고자 필요한 것은 무모함이라 했다.

“…….”

손을 뻗었다. 발밑에서 흘러나온 그림자 줄기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방해했다. 손을 휘휘 저으니 그것들은 툭툭 끊어지며 맥없이 쓰러졌다.

칼날에 손이 가까워질수록 손등에 새겨지는 잔상처들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뒤편에 서 있던 손민호가 상처가 날 때마다 치료했다.

“하지 말아요.”

“하지만….”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손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손을 한번 감싸고는 사라졌다. 느른한 피곤함과 함께 상처가 사라졌다.

불의 온기가 남은 손위로 더 이상 상처가 생기지 않았다. 손끝이 붉은 칼날에 닿았다.

“……!”

만지는 순간 눈앞이 어질거렸다. 온몸에 피가 생기와 함께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손을 내렸다. 손잡이에 매여진 천에 손이 닿자 그 위에 아로새겨진 글자들이 붉게 빛났다. 나는 그 문자들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어떤 용도인지는 알았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제등에 걸려 있던 천 자락들에 새겨져 있었던 것도. 꼬마 도깨비의 본체인 검은 칼날에 감겨 있던 천에 새겨진 것도 모두 이 문자들이었다.

무슨 의미냐 묻은 내게 랑은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 의미 없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랑은 제 것이었던 무기를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눈속임이지. 화려하고 복잡스러워 보이는 그것들에 신경 쓰고 겁을 먹으라고 만든 것이니까.’

손잡이 위에 살짝 올려놓았던 손을 움직였다. 손잡이를 잡으니 손안이 타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손안에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열기와 열기가 얽혀들었다. 랑은 내게 무모한 것이 답이라 했었다. 결국은 무기가 잡은 사람을 주인으로 인정하게끔 기를 죽이라는 소리였다.

“나와.”

내 말에 내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서둘러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런 그들을 피해 손을 휘둘렀다.

손에 들려 있던 프레데터로부터 흘러나온 검붉은 무언가가 바닥과 벽을 가르고는 사라졌다.

그것을 눈으로 훑으며 곧바로 프레데터를 그 벽으로 집어 던졌다. 벽 위로 그러진 선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검은 그림자가 프레데터를 삼켰다.

벽 위를 전부 삼킬 것처럼 넓게 퍼져 있던 그림자가 다시 선 안으로 스멀거리며 돌아갔다.

“…지금 뭘 한 거예요?”

손민호가 멍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내밀었다.

“치료 좀 해 주세요.”

“아니, 일단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은 좀 해 주고….”

말은 그러면서도 그는 착실하게 손을 치료해 주었다. 입구 쪽에 서 있었던 박상호는 앞으로 걸어 나와 바닥과 벽에 새겨진 흔적을 손으로 만지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사이에 치료는 끝났다. 멀쩡해진 손을 몇 번 쥐였다 폈다 반복해 보고 손을 내렸다.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약간 화상 입은 정도야. 다 나았고.”

걱정 어린 기색의 이호연에게 웃으면서 말해 주자 어느새 우리 쪽으로 온 오정인이 박상호가 더듬는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뭘 한 거예요?”

“기 싸움?”

“네?”

“난 그렇게 배웠거든요. 말을 안 듣고 주인으로 인정 안 하면 할 때까지 기부터 죽이라고.”

내 말에 나를 쳐다보던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까 손잡이에 있던 천 봤어요?”

가까이 서 있던 이들 중 하나였던 이나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그것이 무엇으로 보였는지를 물었다.

“어…. 봉인?”

“그렇게 보이죠? 굳이 따지면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긴 해요. 상식적으로 보면 그 천을 멋대로 풀면 안 될 것 같고. 근데 그거 아니에요.”

장식대 위에 반쯤 타다 말고 남은 천을 끌고 와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천을 무기로부터 떨어트리지 않는 이상 시작이 안 되거든요.”

“천을 거두는 건 괜찮아요? 보통 그런 건 천을 건드리는 순간부터 꼬이기 시작하던데.”

일행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마법사인 김수혁이 곧바로 의문을 제시했다. 꽤나 예리한 지적이었다.

“원래는 다룰 자신이 없으면 건드리지도 말아야 하는 거죠.”

“…자신 있었어요?”

“아뇨. 없으니까 그림자 안에 바로 집어넣은 거죠.”

“네?”

“말했잖아요. 우린 그거 훔치러 온 거라고. 전직관의 도움 없이 이름 있는 무기를 손에 얻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다루는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프레데터를 손에 넣는 게 목표였지,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애초에 필요한 순간에만 꺼낼 쓸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거였다. 다음에 다시 사도와 싸우게 된다면 내가 프레데터에 피를 빨려 쓰러지는 것보단 싸움의 결과가 더 먼저 나올 테니까.

그러니 이건 최후의 보험 같은 거였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것이라도 필요할 때를 위한 보험. 그리고 그 시기가 멀지만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림자 속에 갇힌 프레데터가 그 기를 죽이기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프레데터를 가지러 온 것인지 깨달은 것은 이호연뿐인 것 같았다. 조금 어둑해진 낯을 슬쩍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 여기서 나갈까요?”

무어라 더 묻고 싶은 듯 머뭇거리던 그들은 내 재촉 어린 손짓에 얼떨떨한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재고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이후를 생각할 틈 없이 지금에 집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몸을 버리는 일이었다. 등을 미는 손을 쭉 내미니 팔 위에 피부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왼팔과 오른팔이 각기 다른 감각을 주장하는 건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

계단을 밝고 올라가는 발아래 그림자들이 중간중간 거칠게 요동쳤다. 저들 안에 들어온 물건 때문인 듯했다.

그것들을 느끼며 프레데터가 무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었다면 납치, 감금, 강요였을 일을 무생물에게 하니 별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

“왜 그래요?”

“아니…. 그냥 옛날 일이 좀 생각나서.”

이호연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방금 한 말대로 그저 옛 기억이 생각나 멈칫거린 것뿐이었다.

“…….”

다른 건 다 기억이 났는데 류를 처음 본 순간 뒷걸음치는 내게 랑이 뭐라고 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떠오른 그의 말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별 영양가가 없는 잡담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씁쓸한 그런 이야기였다.

‘무서워하지 말렴.’

무서워하지 말렴. 그 어투는 다정했다.

‘그래 봤자 네 손과 발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무기일 뿐이다.’

“…….”

그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랑의 얼굴이 조금 매정하게 느껴졌다.

‘…별 의미 없는 물건이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일 뿐이고.’

‘그럼 이건 랑에게 의미 있는 물건인가요?’

‘…글쎄다. 나도 내가 이걸 어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그 말을 하는 랑의 얼굴이 기다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그의 얼굴을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가 랑의 얼굴을 훔쳐보기도 전에 그는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정하고도 다정한 낯으로.

‘그러니 네게 주마. 물건의 의미조차 모르는 나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인 네게 주는 것이 더 의미 있겠지.’

‘소중한 거 아니에요?’

‘…소중했었지. 그래서 의미가 퇴색되고, 모르게 되었나 보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니 더 이상 물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제등은 오랜 주인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쥐어지게 되었다.

가끔 랑은 제등을 마법 쓰는 데 안 쓰고 이상하게 사용하는 나를 보며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그의 것을 너무 막 써서 기분이 상했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기우였다.

왜 그리 보냐는 내 질문에 랑은 누가 좀 생각나서 그렇다고 답했다. 지금에 와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말한 그 ‘누구’가 누군지.

여우의 흔적이 눈에 보일수록 느끼는 건 정말 지독하도록 얽힌 관계구나 싶은 감상이었다.

처음에 느꼈던 뼈아픈 배신감과 서운함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저 그 둘 사이에 끼어 버린 제삼자가 된 기분이었다.

랑은 나와 그 여우를 분리해서 대했다고는 하나 그걸 온전히 다 믿는 건 아니었다. 랑도 그 여우도 자꾸만 나를 그들 사이에 엮었다.

“…….”

사도와 한 판 하고 쓰러졌다 깨어난 이후로 여우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거나 멍한 것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좋은 징조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소한 순간순간마다 랑을 떠오르는 것처럼 그 또한 사소한 순간마다 그 여우가 생각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그건 정말 지독한 벌이며 죄악이었다.

“류.”

“응?”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부르는 이호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답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나를 보고 있는 공략 팀이 보였다.

“왜요?”

“류가 대답을 안 해서…. 괜찮은 거죠?”

“어…. 못 들었어요.”

“안 읽씹이 더 상처인데.”

뾰로통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한 오정인이 내 앞으로 걸어오며 앞쪽을 가리켰다.

“사실 별말 아니었어요. 이 건물 나가자마자 바로 리블로 돌아갈 것인지 물어봤어요.”

“일단… 돌아가야죠.”

내 말에 오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몸을 틀어 입구 쪽으로 걷는 그녀를 보며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지나 조금 전 지나쳐 왔던 전시실을 걷고 있었다.

“…….”

손을 들어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상할 정도로 생각에 깊이 빠졌다.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는 사람의 말을 못 들을 정도였다. 피곤해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런 내 행동에 앞서가던 이들의 걸음도 모두 멈추었다.

위화감이라고 해야 하나. 기시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전시실이 아까도 이런 느낌이었나.

하나를 의심하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딛고 선 바닥이, 벽이, 공기가.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았다. 오늘 처음 와본 곳이 익숙하면 얼마나 익숙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을 것들이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상했다.

“왜 그래요?”

“…여기 아까 지나갈 때도 구조가 이랬어요?”

“네?”

“난 왜 아닌 것 같지.”

“…….”

반질거리도록 깨끗하게 관리된 유리 상자 위로 손을 올렸다. 손자국이 깨끗한 유리 위에 묻어났다.

내 말에 그들은 그제야 주변을 훑어보았고 곧이어 낭패 어린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손민경이 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더니 화면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 화면을 들여다보니 주세진의 방에 그어졌던 오페리움의 검은 선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다르다. 사진 속 검은 선들이 표현해낸 방과 지금 우리가 선 이 방은 미묘하지만 조금씩 달랐다.

일이 꼬였다.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박상호의 눈에 황금색의 나침반이 떠올랐다.

그것은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박상호의 말을 듣자마자 오정인을 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공간 이동도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전시실의 입구 쪽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이 다음 방이 불이 꺼져서라기엔 지나치게 어둑했다.

손을 뻗으니 어둠에 손이 닿았다. 투명한 벽, 혹은 새까만 벽을 만지는 것처럼 무언가가 진입을 막고 있었다.

“갇혔어.”

내 말에 뒤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막막함이 담겨 있었다.

“…….”

이런 일을 최근에 겪은 것 같은데. 손을 떼고 다시 그들에게 돌아갔다.

이상할 정도로 깨끗한 창을 뚫고 주홍빛의 노을이 흘러들어왔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햇살을 받았다. 손에 닿는 노을의 온기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마치 허상처럼.

정신계 마법인가? 마치 홀리는 것처럼 깊은 생각에 빠지던 조금 전이 떠올랐다. 그 잠깐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의미가 되는 건데.

방심했다. 더 조심했어야 했다. 유일한 정신계 마법사로서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거기에 홀라당 넘어간 꼴이었다.

“…하.”

비틀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능력이 완벽하지도 굳건하지도 않은 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딴 식으로 남에 손에 쉽게 놀아났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자존심이 꺾이는 것과는 달랐다. 아주 깊은 속내부터 조금씩 갉아 먹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눈치를 살피며 힐끔거리는 이들이 보였다. 지금은 이러한 감정을 티 내서는 안 되었다.

일단은 이게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부터가 알아야 했다. 손끝에 거슬리는 거스러미를 뜯어내며 고민하는 나를 두고 먼저 입을 뗀 것은 오정인이었다.

“격리당한 것 같아요.”

“격리?”

오정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오정인은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스쳐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을 가득 먹은 수채화처럼 흐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누가 인위적으로 우리를 이곳에 가뒀어요.”

“영역 같은 거예요?”

내 물음에 오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류랑 이예린 씨가 쓰는 영역이랑은 좀 달라요. 굳이 따지자면 옛날에 이예린 씨네 집에 생겼던 공간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때라면…. 저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오정인의 가설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손을 들어 오정인이 만지고 지나간 자리들을 더듬어 보았다. 오정인처럼 무언가 구별해 내는 재능은 없었으나 무언가 인위적이라는 감각은 느껴졌다.

주먹을 들어 벽을 쳐 봤다. 위쪽에서 세라믹 조각 같은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역이랑 그때 그거랑 많이 다른가요?”

“비슷한데 미묘하게 달라요. 류랑 이예린 씨 경우는 공간 일부의 일시적인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주인으로서 잠금장치를 거는 거죠. 밖으로도 안으로도 주인이 아니면 마음대로 오갈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

“류도 이예린 씨도 영역 안에 있으면 더 강해지죠? 공간이 주인에게 맞는 환경으로 바뀌어서 그런 거예요. 물 타입이면 바다. 불 타입이면 화산. 그런 식인 거죠.”

“영역을 쓰고 나서 비틀거리는 것도 그거랑 관련 있어요?”

“이건 추측인데… 아마 일시적으로 그 공간 안의 환경을 본인에게 맞추는 과정 자체에 대한 대가를 주인이 치러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일종에 인테리어 값이 청구된 거죠.”

몸을 낮춰 조각을 집었다. 하얗고 매끈한 조각은 손을 조심하지 않으면 날에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고개를 들었다. 깨끗한 하얀 벽과 천장에선 이런 조각이 떨어질 만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대충 뒤로 던지며 오정인에게 물었다.

“그때처럼 내가 영역을 열어서 나가는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굳은 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박살 나는 바람에 땅을 구르고 있던 벽의 잔해 몇 개를 집어 장식함 위에 올렸다

모두가 가까이 다가오니 오정인이 그것들을 정리했다. 대충 아홉 개의 조각을 사각형 모양으로 놔둔 오정인이 그중 가운데에 있는 조각을 가리켰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공간이 여기인 거예요.”

“…….”

“상대는 지금 이 아홉 개로 나뉜 공간을 전부 다루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가운데에 가두고 나머지 주변을 둘러싼 여덟 개의 공간으로부터 우리가 있는 공간을 배척하는 거죠.”

“배척한다는 건….”

손민호의 물음에 오정인은 굳은 낯으로 말했다.

“이 방 외에는 어디로든 갈 수 없게 만드는 거죠.”

그렇다는 건 내가 가운데 조각인 이 공간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그 주위를 감싸는 다른 여덟 개의 공간으로 인해 헛수고 그 이상은 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 전보다 어둑해지는 분위기 사이에서도 내 시선은 조금 전의 세라믹 조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명 아래 하얗게 빛나는 그것을 보다가 오정인이 올려놓은 아홉 개의 조각을 보았다.

서로 맞지 않는 조각들이 구색 맞추기처럼 사각형을 흉내 내고 있었다.

격리라고 했지….

고개를 들었다. 원래 우리가 가는 방향이었던 입구 쪽은 어둠에 잡아먹혔다. 그곳으로는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세라믹 조각이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숙여 아홉 개의 잔해를 훑어보았다. 격리…. 격리보다는 나머지 여덟 개의 공간이 가운데 하나를 놀려먹는 거에 가까운 거 아닌가.

유리 상자 위를 두들기는 손가락을 따라 소리가 울렸다. 벽의 잔해 아래, 유리관 아래에 장식된 전시물은 설명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물건은 그 의미를 아는 순간부터 가치가 생긴다. 적을 얼마나 잘 아는가에 따라 상대하기 편해진다. 그럼 지금 우리의 적은 누굴까.

공간을 다루고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는 내가 알기론 하나였다. 답을 아는 질문을 부러 해 보았다.

동시에 그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뇨. 나보고 이런 거 해 보라고 하면 머리가 터질 거예요. 길드장님도 이런 건 못할 거고. 이건 재능의 문제 같은 게 아니에요. 사람인 이상 이런 거 못 해요.”

사람인 이상 이런 건 못할 거다…. 이럴 만한 일을 벌인 건 역시 마티일 것이다.

공간의 능력을 가진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어쩐지 다른 사도들이 내 앞에서 알짱거릴 때 혼자 안 보인다 싶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낭패였다.

공간. 공간이라….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능력들을 사용했다.

모두가 상대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예측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이를 고르라고 하면 마티의 공간 능력이 제일이었다.

공간이라는 능력의 활용은 어디까지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민하며 손의 거스러미를 손톱으로 긁었다. 얇고 뾰족하게 손톱 옆을 찌르듯 일어선 그것을 손끝으로 계속해 뜯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혼자 있었다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만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

이 느낌은….

“불?”

“불?”

나와 김수혁이 동시에 말하자 주변을 훑어보던 다른 이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로 몰렸다.

“갑자기 무슨 불이요?”

박상호의 물음에 나도 김수혁도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불이나 연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의 감각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불은 시각적으로는 상대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후각을 속이지는 못했다. 뒤늦게 후각에 집중하니 탄내 대신 흐릿하게 무언가 향 같은 것이 맡아졌다.

우리 중 후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인 이호연을 돌아보니 그는 당혹감이 서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게….”

이호연은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그는 다급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는 반대 손으로는 내 입가를 가렸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 코까지 막혀 숨쉬기가 힘들었다.

“최대한 숨 쉬지 마.”

이호연의 말에 우리를 보던 다른 이들도 옷 소매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눈을 굴렸다.

이나연이 입가를 가리지 않은 손을 뻗어 둥근 형태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이호연이 자신의 입가를 덮고 있던 손을 떼었다. 막 안이 괜찮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하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잠시 막 안의 향을 맡는 것 같던 그는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그제야 내 얼굴을 덮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런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었다.

“왜 그런 거야?”

내 질문에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가 맡은 향의 종류 때문인 듯했다. 대체 뭐였길래….

말하기 껄끄러울 뿐 말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얼마 안 있어 입을 열었다.

“류도 아는 물건이에요. 옛날에… 봤던 향초 기억나요?”

옛날에 봤던 향초? 내가 그와 함께 향초라고 불릴 만한 물건을 봤던 것은 한 번뿐이었다.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준다는 그거?”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중에 그 향과 물건을 아는 사람은 이호연밖에 없는지 대부분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중 아닌 사람에 속하는 것은 손민호와 손민경이었다. 치유 계열인 그들은 그 물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 물건이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지가 생각났다. 그가 왜 그 향을 아는지 얘기가 나올까 싶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거 본인 의지가 있어야 꿈꾸는 거 아니야?”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는 그리 말하며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이호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손민호가 입을 열었다.

“무조건 원하는 것만 보여 주면 치료가 안 돼서 중간에 새로 만들어졌어요. 중독성도 심하고…. 그래서 옛날 건 다 폐기된 지 오래예요.”

손민호의 시선은 이호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찡그린 얼굴이 네가 왜 그걸 아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이호연과 손민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손민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새로 만들어진 건 어떤 식인데요?”

툭 내뱉는 내 질문에 손민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향초가 의료용인 건 알고 있죠? 꿈의 내용을 꿈꾸는 본인이 아니라 제삼자가 간섭해 바꿀 수 있도록 변경됐어요.”

“그건….”

“위험하죠. 그래서 초기에 나왔던 것보다 더 취급이 중요해졌고요.”

그런데 지금 그 취급 주의 물건이 이 밀폐된 공간 안을 점령했다, 이거구나. 주세진이 그런 위험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거나 가볍게 취급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함에도.

나와 김수혁이 동시에 느꼈던 불의 감각이 뭐였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향초에 붙은 작은 불씨였다. 그나마 빠르게 알아차려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 향을 맡았다면 향초에 불을 붙인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꿈에 빠지게 되었을 거라는 건데…. 그건 넓게 보면 정신계 마법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꿈속에서 계속해 보여 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니 저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정말, 악질적인 방법은 다 쓰는구나.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겠는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놀아날 뻔했다. 취급 주의 물건을 빼돌려 뭘 하려고 했던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 왔다.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나를 손민호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머리 아파요?”

“생각을 너무 해서요.”

“후유증 같은 걸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요.”

그렇게 말한들 지금 그걸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손민호 또한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역시 그때 입원시켜 버렸어야 했는데….”

“입원시켰으면 몰래 도망갔겠죠.”

할 말 많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손민호를 보며 나는 슬쩍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나연이 만들어 낸 막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가볍게 만지면 말랑거리는 슬라임처럼 울렁거리는 막은 세게 미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하게 변했다. 보라색의 결계와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막이 뚫려서 향에 취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안전한 막 안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거였다.

이나연이 만들어 낸 막의 넓이는 좁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 막 안에 들어온 사람의 수만 여덟이었다. 조만간 산소가 부족해질 게 자명했다.

당장은 모면했지만, 결국 우린 갇힌 셈이었다. 언제까지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뭐라도 해야 하는데. 초조함에 거스러미를 뜯어내는 손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다.

결국 말끔하게 떼어진 거스러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어 버린 자리가 욱신거렸다. 나중에 보면 붓겠구나 싶었다.

부러 손을 올려 확인하지는 않았다. 힘을 빼고 늘어트리는 손 위로 검은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만약에 내가 그 아홉 개의 공간 전부에 영역을 연다고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봐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요.”

오정인과 대화하면 할수록 저번에 그 공간을 빠져나온 것이 참 운 좋은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예린의 예언은 결국 들어맞았었다.

그때처럼 예언이 있었다면 나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예언가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마법사 둘. 하지만 마법사의 감은 예언과 달랐다.

그래도 또 모를 일이긴 하다.

감인지, 예언이지, 혹은 본인의 자기주장인지 모를 여우의 속삭임이라면 이곳을 나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방식이 어떻든, 목적이 뭐든 여우의 속삭임이 틀렸던 적은 없었다. 문제는 그 여우의 목소리는 내가 원한다고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를 둘이 양쪽으로 날 잡아당기며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눈앞에서 주홍 머리와 하얀 머리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손을 올려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피로감에 뻑뻑하던 눈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 향,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어?”

굳은 낯을 풀지 못한 체 서 있던 이호연이 내 부름에 고개를 틀어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얀 머리가 내 옆에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머리로 향했다.

산신도 하얀 머리였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쪽으로 튀었다. 그를 올려다보느라 들었던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류?”

“아니, 그냥.”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산신을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는 것이 없다는 거에 대한 불쾌감을 애써 죽이며 다시 고개를 틀었다.

평소보다 어둑해 보이는 회색 눈이 코앞에서 보였다.

“……!”

놀란 것을 티 내지 않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도 다시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목 부근을 더듬는 그의 얼굴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 아파요? 아까부터 너무 자주 멍한데….”

“아니, 안 아파.”

이호연의 얼굴에 의심이 서렸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그의 손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옷 소매를 잡았다.

“그래서, 알아? 향이 어디서부터 맡아진 건지.”

온기 없는 닿음이 이상하게도 안심되었다. 잠시 말없이 있던 이호연의 입이 열렸다.

“아뇨. 갑자기 맡아진 거라….”

“갑자기….”

갑자기라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정말 그 향이 갑자기 이 방으로 흘러들어왔거나, 집중해서야 맡아질 정도로 느리고 옅게 이 방을 채웠거나.

만약 후자라면 그 향은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온 걸까. 전시실은 입구와 꽉 닫힌 창문 외에는 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천천히 방안을 훑던 시야에 내가 던져 놨던 세라믹 조각이 잡혔다. 벽을 치니 천장에서 떨어진 물건이었다.

“…….”

입구는 검은 벽 같고, 창을 타고 흘러들어온 노을은 아무런 온기도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벽을 치니 세라믹 조각이 나왔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 뒤바뀐 세계에 갇힌 것 같았다. 막 밖에 무형의 존재로 흘러 다니고 있을 향을 생각했다.

공간의 격리.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사도는… 사람이다.

마티라 할지라도,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공간을 아홉 개로 쪼개 다루는 것은 못 한다는 뜻이다.

뭔가… 뭔가 알 것도 같은데.

하지만 이것을 완전한 정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마티라는 존재를 모르고 사도를 모르고 그녀를 몰랐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한 번.

그 한 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 마티를 보았던 날 이예린은 그때 분명 목이 잘렸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잘려 나간 머리카락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마티는 내 팔을 잘라 먹으려고도 했었다. 도포에 막혀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때의 섬뜩함은 분명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칼에 베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오정인이 얘기해 주었던 공간의 활용법이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나중에 공간 능력 전담 연구팀의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말한 이론으로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그 이론의 기반은 공간과 공간의 연결이라고 했다. 그건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해, 이뤄 내는 결과물이지 하나의 것을 둘로 쪼개 버린 것이 아니라 했다.

솔직히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내가 보고 이예린이 당했던 것은 미지의 방법이라는 소리였다.

그때 의문이 들었다. 이예린은 정말 목이 순간적으로 잘려나갔던 걸까. 혹은 환상이라도 본 건 아닐까.

하지만 공간과 환상을 엮으면 도출되는 결론이 없었다. 나에게 있어 그 둘은 다른 카테고리였다. 언뜻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거였다.

“공간과 환상….”

환상은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공간은….

공간은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오정인의 방식이 다르고 주세진의 방식이 다르듯.

오정인의 것을 수채화와 같다 비교할 수 있다면 주세진의 것은 정도(正途)와 같다 칭할 수 있었다. 능력은 사용하는 이의 성격과 방식을 따라갔다.

그러면 마티라는 사람…의 방식과 성격은 뭘까. 딱 한 번 보았던 마티는 이상하다는 말 외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제멋대로며, 남의 말을 듣는 것 자체를 할 줄 모른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그러면서도 내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듯 굴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듯….

“…….”

나를 공격한 건, 내가 자신이 바라는 기준에 충족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판단했을 때였다. 공격을 멈춘 건 무언가가 그녀의 기준에 충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예린을 그 공간에 가두었던 것은 본인이 바라는 어떤 예언을 위해서.

마티의 능력은 항상 그 바라는 것을 위해 상대를 가두고 몰아붙이는 용도로 쓰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그 조각을 타고 넘어오는 괴물들로 사람이라는 존재를 몰아붙인 것처럼.

이 공간을 마티가 만들었다면, 자신이 바라는 것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구는 그녀라면.

“…아. 알겠다.”

애초에 우리를 가두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이건 내게서 본인이 원하는 무언가를 이끌어 내기 위한 몰아붙이기였다.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향초의 향. 그 향으로 노리고자 한 건 나였다. 남의 꿈이며 머릿속이며 조작하고 조절해 무언가를 이끌어 내려 한 거였다.

어떻게 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를 가둔 상대가 원하는 것. 그것을 제공하면 이 공간은 풀린다.

나 하나 때문에 위험에 몰린 저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도 이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나갈 방법을 알아낸 것만으로 다른 것은 상관없게 되었다.

다른 것은 알 필요도… 없었다.

원하는 것만 취득된다면 원래 다른 것들은 배제되곤 했다. 그냥 지금도 그러한 상황일 뿐이다.

마티는 무언가를 바라고 그래서 나를 몰아붙이고. 그 상황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함께 위험해질 이들은 눈에 안 보이고.

사람이라면…이렇게 본인 원하는 것만 하며, 남 생각 안 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치밀었다.

이젠 하다 하다 사도마저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뭘 바랄 거면 본인들 신한테나 가서 빌 것이지, 왜 괜한 사람 기분을 개같이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숙였다. 무릎을 짚고 선 팔이 하나는 익숙하고 하나는 어색했다. 손민호가 붙여 놓은 테이프를 다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심이 들었다.

내 팔 하나마저 남들의 허상을 충족시켜 줘야 했다. 이젠 사도마저 내게서 무언가를 바란다. 남들의 허상과 이상을 위해 내 몸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남들을 위해 모든 것들을 충족시켜 주고 나면 내게 남는 건 무엇일까.

기껏해야 배척받지 않고 같은 사람으로서 대우받을 작은 권리뿐이었다. 남들은 쉽게도 얻는 그것을 난 너무 어렵게 손에 쥐어야 했다.

흘러내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보니 꼭 머리카락과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어둠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무언가 홀리는 기분이었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 위에 새겨진 검은 그림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적의만 가득한 삿된 것들의 부름은 생각보다 고요하고, 어찌 보면 아름답고, 슬프게도 우울하고, 또한 다정했다.

아주 오랫동안 굳건하다 믿었던 힘.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도 의심도 하지 않았던 나의 유일한 지지대.

손을 뻗으면 내게 무엇 하나 바라지 않을 것들이 그 손을 잡아 줄 것만 같았다. 아니다. 저것들이 원하는 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 주는 게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지 않을까.

나는 사람보다는 귀신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사실 얼마든지 더 무서워질 수 있는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 쪽 아닌가.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들기는 손. 웅웅거리는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 무어라 말하는 이들의 기척.

그리고 내게 손짓하는 삿된 것들의 부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음울한 어둠이 아닌 그늘진 어둠이 내 시야를 가렸다.

그 안에서 생각했다. 주세진이 틀렸다, 고.

그는 처음으로 잘못된 전략을 짜고 명령을 내렸다.

처음부터 그냥, 나를 혼자 보냈어야 했다. 나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저들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이 때문에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않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는 나 혼자 보내거나 나 혼자 가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했다.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게 잘못돼 가는 것 같은 이 기분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지가 않아 무서워졌다. 아직도 내 기억은 온전하지 않고, 그것들은 텀을 두고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지가 무서웠다. 그것들을 생각하면… 아주 멀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런 곳으로 도망가고만 싶어졌다.

그곳이 나를 부르는 저 검은 것들의 세상뿐일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웠다.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혼자서….

“유하연!”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굳은 낯으로 나를 보는 이호연을 보니 그제야 물이 들어가 먹먹하던 귀에서 물이 빠진 것처럼 소리가 선명해졌다.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불안감에 흔들거렸다.

술에 취했을 때 빼고는 몇 번 부르지도 않은 내 이름을 외친 이호연은 간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

느릿느릿 대답하는 나에게서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어깨너머로 나를 굳은 얼굴로 보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시야를 내리니 아무것도 없이 멀끔한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검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그런 바닥이.

“…….”

이것 봐. 난 항상 괜찮아야 한다니까.

잘못된 생각이 옳은 것이 되어 나를 끈덕지게 잡아 늘어트렸다. 손을 올려 내 어깨를 잡은 손을 덮었다.

놀란 것인지 뭐가 무서운 것인지 항상 따듯하던 손이 평소와 달리 차게 느껴졌다.

그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 내고 몸을 바로 했다. 그림자가 일렁이며 다리를 타고 올라와 손안에서 맴돌았다. 조금 전의 것과는 달리 그것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되레 나를 가라앉히는 저 깊은 어둠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지금은 내 편이라는 것처럼 성실히 내 의지를 따랐다.

그 고요함을 기꺼이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류….”

“지금 말고 나중에 얘기하자. 일단은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잖아.”

웃으면서 하는 내 말에 이호연은 반박하고 싶은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에게만 들리도록, 뒤편에 서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 때문에 여기 왔고, 나 때문에 위험해진 거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지.”

“하지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 아직은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거든.”

“…….”

“…그거 알아? 가끔 네가 이렇게 유난스럽게 굴 때면… 내가 아주 잘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어떤 쪽이든, 어떤 식이든 그런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되는 건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내가 느끼는 것들은 참 제멋대로 굴었다.

내 말에 이호연은 놀란 듯 주춤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난 그런 게 아니라….”

“알아. 아니까, 우리 나중에 말하자. 지금 말고 나중에.”

“그 나중이… 있기는 한 거죠?”

“…있을 거야.”

나는 아직 도망쳐서도 안 되고 도망칠 생각도 없으니까. 우리의 나중은 있을 것이다.

그는 내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 회색 눈을 보는 게 무서워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이참에 이호연이 내게 질려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 있었고, 그럼에도 날 포기 못 해 매달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여 들었다.

나한테 지쳐 가는 상대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지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조차 나는 점점 더 나쁜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걱정스러운 낯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서 일단 나갈까요?”

그들은 내 말보다 나와 이호연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배려인지 뭔지 모를 것들로 인해 그 누구도 내게 질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기꺼운 나와 달리 어색한 침묵 사이로 손민경의 입이 열렸다.

“저기, 아까 방법이 없다고 했었는데… 나갈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 알 것 같거든요.”

나는 그리 말하며 그림자가 감긴 손을 들었다. 내 손을 감고서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것을 몇몇은 조금 꺼림칙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이참에 빛 좋은 개살구가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도 확인해 보죠, 뭐.”

“빛 좋은 개살구면…. 프레데터?”

김수혁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뒤로 물러났다. 손을 들어 뒤로 가라는 손짓을 보내니, 그들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이호연을 김수혁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꼼짝하지 않는 이호연을 보며 김수혁은 이나연을 불렀다.

이나연의 손에 이끌려 뒤로 물러나는 내내 이호연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와 그 사이의 나중이 코앞으로 오게 된다면, 나는 그에게 아주 많은 사과를 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것들이 더 남아 있었다.

가령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너의 비밀이라든가, 그것을 듣고 난 다음 내가 보일 반응이라든가.

너의 그 유난스러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같은… 사소하고도 대단스러운 것들. 너도 나도 그다음을 예상할 수 없어 감추고 미뤄 두기 급급한 것들.

하지만 결과물은 비슷할 것이다. 결국에 먼저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게 누구일지 너무나 뻔한 이야기였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을 다무는 너의 행동은 나를 위해서인가 너를 위해서인가.

너는 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추일까, 그런 나를 자유로이 풀어주는 존재일까. 아니면 애타게 울며 붙잡고 형상 유지를 하게 만드는 이일까.

뭐가 됐든 사실 이제는 상관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냥 이제는 내가 끝내지 못했던 모든 것의 끝을 보고 싶었다.

좋든 나쁘든. 설령 나쁘기만 하더라도 차라리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정도로.

팔을 뻗었다. 발끝의 그림자들이 손에 엉켜든 것들과 뒤섞였다. 어둑한 것들이 잠시 시야를 가리더니 손안에 묵직한 것을 쥐여 주고는 꼬리를 뺐다.

목 뒤에 누군가 칼을 들이민 것 같은 오싹한 기류가 느껴졌다. 몸 안에 혈관이 팽창하고 피가 빠르게 순환하는 것처럼 몸에 열이 올랐다.

손잡이를 잡은 손 안쪽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드러난 검붉은 칼날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반절이 타 버린 손잡이에 감긴 천의 글자들이 붉게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무기에 감긴 봉인 같은 것들은 사람에게서 무기를 지키고자 함이 아닌 무기로부터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제대로 다룰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그것들을 풀어 내릴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프레데터를 만든 사람이나 박물관 관장이나 패기와 만용에 휩싸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단검을 잡은 손을 위로 들며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단검에서 튕기듯 튀어나온 붉은 기류같은 무언가가 바닥을 갈랐다.

“저건….”

내가 하는 짓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들 중 오정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질거리는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뒤늦게 붉은 잔상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보았다.

깨지고 박살 난 대리석 아래 있는 것은 어딘가의 벽이었다.

“방어막 치워요.”

다시 한번 단검을 들며 말했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이나연의 방어막이 사라졌다.

프레데터에서 흘러나온 붉은 잔상이 방을 부술 때마다 허상의 공간 뒤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났다.

벽 뒤에는 반짝이는 전등이 달린 천장이 있었고, 천장을 부수면 어느 조각상의 머리 위가 보였다.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 이상한 세계가 점점 드러남과 동시에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쥐고 있던 프레데터를 놓았다.

붉은 칼은 저를 기다리고 있던 그림자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

숨이 찼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지친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아까 잡았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사용법을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휘두르기만 하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그 대가가 계속 이런 식이라면 오래 사용할 물건이 못되었다.

추운 겨울날 얼었던 손이 녹듯이 찌릿 거리는 손을 바라보다 그림자를 뚫고 튀어나오는 제등을 손에 쥐었다.

프레데터로 난리를 친 덕분에 문제의 그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원더랜드보다 더 이상한 방안을 둘러보며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등에서 흘러나온 푸른 불의 줄기가 프레데터로 인해 새겨진 흔적들을 따라 타올랐다.

틈을 비집고 맥없이 무너지는 잔해들을 살라 먹는 푸른 불그림자 너머로 드러나는 세상을 보며 나는 낯을 찌푸렸다.

벽 너머 천장이라든가, 바닥 아래 벽 같은 이상한 광경 정도야 앞으로 다가올 일의 전조에 불과했다.

발을 옮겨 공략 팀이 모인 자리로 이동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들의 얼굴에 담긴 것은 당혹감과 미지의 것에 대한 옅은 두려움이었다.

우리가 있던 방의 흔적은 이제 우리가 딛고 선 바닥의 일부밖에 남지 않았다. 허상의 공간이 타오르고 남은 것은 새까만 암흑과 그 위를 유영하듯 떠다니는 박물관의 일부분이었다.

벽이 떠다녔고, 천장도 떠다녔다. 전시품과 우리가 딛고 선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우주에서 길 잃은 미아와도 같은 꼴이었다.

“일단 거기서 나온 건 좋은데…. 이게 대체 뭐예요?”

박상호가 기가 질린 낯으로 물었다. 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살라 먹을 것을 잃고 사라져 가는 푸른 불을 보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둠을 유영하는 박물관의 잔해 외에도 반짝이는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번처럼 저것에서 괴물이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싶어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시선을 둔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조심하라 일러 주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입을 막았다.

“!”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내 입을 막은 것과 같은 유난히 허연 손들이 손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호연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쪽으로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항상 물가에 돌아다니는 애를 보는 심정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이호연이 그러니 유난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연 손들은 어디선가 더 나타나더니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제등을 뺏어 저 어둑한 어딘가로 던졌다. 고개를 틀어 아래로 추락하는 제등을 보았다.

입을 막은 손은 고개를 돌리는 것은 제지할 생각이 없는지 나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제등의 흔적을 찾아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오른쪽으로 틈과 동시에 발을 들었다. 손목을 붙잡고 있는 허연 손의 기다란 팔을 발등에 걸어 밑으로 찍어 눌렀다.

끈질기도록 엉겨 붙던 그것이 떨어져 나갔다. 손을 뻗어 제등이 떨어진 곳을 향해 뻗었다.

저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흘러든 검은 그림자가 내 발밑으로 스르륵 돌아왔다. 그런 나를 기다려 주기라도 했다는 듯 허연 손은 다시 팔을 잡아챘다.

팔에 힘을 줘봤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붙잡은 것이 느껴졌다. 대체 몇 개까지 있는 건지 모르겠는 것이 이번에는 허리에 감겼다.

이 이상 사지가 다 붙들리면 정말 곤란하겠다 싶어 손을 떼어 내고자 했지만 어딘가에서 시작된 기다란 팔은 나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팔에 발을 걸어 힘을 주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끝까지 힘주어 버틴 팔은 고무로 된 것처럼 휘어질 뿐 뼈가 부러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끝까지 버틴 그것 때문에 발이 걸린 나만 중심을 잃고 잠시 휘청거릴 뿐이었다.

“……!”

나를 붙잡은 팔은 내가 비틀거리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힘을 주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제등을 집어 던졌던 것처럼 나를 아래로 떨어트릴 생각인 듯했다.

다리에 힘을 줘봤지만 조금씩 가장자리로 끌려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틀어 다른 이들을 보았다.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손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을 그들을 향해 던졌다.

허공을 날아가던 그것은 무언가에 막히듯 사그라졌다. 몇 번을 더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벽이 있는 듯했다.

어느새 팔이 하나 더 늘어나 오른쪽 발목을 붙잡았다.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힘이 강한 그것이 확 잡아당기자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빠른 속도로 끌려가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공간을 떠다니는 잔해들로부터 그림자를 불러냈다.

수십 개의 검은 것들로부터 꿰뚫린 허연 손은 조금의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를 계속해 끌고 갔다.

속으로 혀를 차며 몸을 틀었다.

그림자 줄기가 내 손에 감기며 내가 끌려가는 것을 저지했다. 양쪽으로 잡아당겨 지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림자 줄기는 슬금슬금 움직이며 내 팔목을 붙잡은 허연 손의 틈을 파고들었고, 그것이 성공하자 곧바로 안쪽에서부터 날을 세워 기어이 그것을 내게서 떨어트렸다.

자유가 된 손을 움직여 그림자 속에 갇혀 있던 프레데터를 꺼냈다. 손 부근에서 일렁이던 검은 그림자가 팔에 감기었다.

몸을 일으켜 발목을 잡은 손의 손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깊숙이 들어온 그것은 살을 파고들어 바닥에 박혔다. 조금의 어질거림과 함께 끌려가던 몸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비실거리기 시작한 손들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미지의 곳으로 떨어질 뻔했다는 것의 두려움인지, 단순히 프레데터를 쓴 피곤함인지 확실치 않았다. 아니,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쿵쿵거리는 걸 보면 전자가 맞는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쓸 거면 프레데터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닌 그림자 속에 넣어야 하는 것을 아는데 손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떨쳐 낸 허연 손들이 가장자리로 스르륵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나 혼자만 위험했다는 것이, 그래서 나 혼자 정리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

저들끼리 얘기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내가 없어진 것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불을 막아 낸 무언가가 이번에는 내 손을 막았다. 손을 거두었다. 프레데터를 든 쪽의 손바닥 안쪽이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보이지 않는 벽 너머를 눈에 담았다. 이야기를 하고, 심각해졌다가, 분위기를 풀 듯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을.

나 때문에 최근에는 음울함이 항상 드리워지던 회색 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유독 반짝거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지 않는 순간의 네가 내 옆에 있을 때의 너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서.

‘그런 당신의 옆에 남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불행해지겠군요.’

왜 하필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걸까.

이제 네가 내 옆에 있을 때 웃기보다 가라앉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너의 불행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손에 쥐고 있던 프레데터를 놓았다. 작은 그림자 줄기들이 발밑에서 뻗어져 나와 그것을 가로채 갔다.

오른손을 들어 확인해 보니 상처 하나 없는 손이 보였다. 하지만 프레데터를 잡았던 손은 여전히 따끔거리고 있었다. 반대 손으로 더듬어 보기까지 해 봤지만 묻어나는 건 없었다.

“…이건 너무 뻔한 거 아닌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 뒤를 돌았다. 간절하다 싶을 정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긁어 대는 허연 손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닥을 긁어 댄 손톱 밑에서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마치 간절하게 살고 싶은 사람의 손 같은 꼴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발을 들어 짓밟았다.

“뻔해서 기분이 더 더럽네.”

발밑에 깔린 것을 뭉개다가 발을 떼었다. 발밑에서 바르작거리던 것은 내 발을 잡으며 매달렸다. 언제 나를 끌고 가려 했다는 듯, 절절매는 꼴에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쿵쿵거리던 심장 소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손의 떨림은 멈췄다. 고개만 틀어 뒤를 보니 그들은 여전히 나를 잊고 웃고 있었다.

어쩌면 저쪽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저런 결말이 멀리 보면 더 나을지 모른다. 정말로 그렇다며 나는 기꺼이 저 모습을 응원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근데 난 그건 싫어.”

이중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싫었다.

내 말에 반응하듯 저들끼리 대화하던 이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눈 깜박이는 것조차 멈춘 그들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시에 손을 들어 나를 삿대질했다.

“이기적이야.”

“못됐어.”

“너 때문에 다 불행해져도 좋아?”

“우린 다 죽을 거야.”

“너 때문에.”

“너 때문에.”

“…….”

나를 비난하는 이들 중 유일하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는 나를 삿대질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말없이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온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손끝으로 훑었다.

“뺨이 차요.”

“…….”

“마치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처럼요.”

무표정하던 얼굴이 표정을 만들어 냈다. 걱정을 담은 눈이 나를 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입이 다정하고 온유한 말투로 말을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되겠죠? 당신은 그런 나를 지켜보고, 나는 눈을 감고.”

“…….”

오른손의 따끔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칼날에 손이 베이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내 뺨에 올려진 그의 손을 덮었다. 차가웠다. 그의 말마따나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처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나요.”

“네가 먼저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

“우리가 똑같이 죽음을 맞는다고 해도, 먼저 눈을 감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내 손 아래 덮여 있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제 손을 덮은 내 손을 느릿느릿 떨쳐 내고는 몸을 바로 했다.

눈에 슬픔이 서렸다.

“이기적인 사람.”

“…….”

“끝까지…. 끝까지 나한테만 잔인하지.”

“…한 번쯤은 너한테 비난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한 번쯤은 네가 나한테 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

“근데 막상 들으니까….”

손을 올려 그가 그리했던 것처럼 그의 뺨을 만졌다. 반짝이는 회색 눈에서 흐른 눈물이 눈가를 스치고 내 손등을 타고 이동했다.

언제부터였으려나. 약간의 궁금증을 갖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 모든 게 가짜라는 게 너무 티 난다.”

“…….”

그의 뺨에 얹었던 손을 떼어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는 순순히 두어 발자국 물러나며 나를 보았다.

“흉내를 내려면 좀 더 성의를 보이지 그랬어. 걔는 애초에 나한테서 시선을 안 떼.”

“…….”

“내가 도망갈까 봐 무서워 화조차 마음대로 못 내. 내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한테 못 맞춰서 안달 나 있어.”

“하지만 동시에 당신 때문에 불행해지고 있죠.”

“…….”

낮은 목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울음의 흔적이 남은 얼굴로 빙긋 웃은 상대가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잖아. 당신이 없는 저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잖아.”

그는 몸을 낮추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덕분에 후드티의 후드에 가려져 있던 목이 드러났다. 하얗고 곧은 목에 본 적 없던 커다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얼굴로 말하지 마. 짜증 나잖아.”

“보기 좋으라고 한 모습인데.”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뒤로 물러나는 그를 눈에 담으며 그의 뒤쪽을 훑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새 바닥에 모두 쓰러져 있었다.

“내게 집중하셔야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상대가 내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다시 그에게로 눈을 돌려주었다.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

하얀색의 짧은 머리가 점점 길어지더니 끝에서부터 주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반짝이던 회색 눈동자도 주홍색으로, 그리고 다시 여러 색의 색깔이 뒤섞인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눈으로 바뀌었다.

날카롭다는 감상에 가까운 이목구비가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뀌고, 키는 줄고 체격도 줄었다. 하얀 털로 뒤덮인 후드티는 천이 늘어나며 사도 특유의 하늘거리는 하얀 옷으로 바뀌었다.

하얗고 고운 손을 따라 새겨지는 하얀 베일이 주홍색 머리 위에 덧씌워졌다. 눈을 감고 길게 늘어난 베일의 양 끝을 들어 올린 모습을 한 그녀는 아름답고도 성스러웠다.

다만 그 신앙은 고결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광기 어린 것이었다.

느릿하게 떠지는 눈이 나를 보았다. 저 눈에 담긴 스테인드글라스가 어떤 것의 신화를 새겨 넣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딴 일을 벌인 이유가 뭐야.”

“이유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도 네가 죽기는 하는 존재인지 좀 확인해 보고 싶은데 여기서 밀어도 돼?”

“그런다고 안 죽는 거 아시지 않나요.”

여전히 짜증 나. 잔잔하게 미소짓는 저 얼굴을 일그러트리게 만들고 싶었다.

마티는 고개를 기울이며 내 오른손을 보았다.

“재밌는 물건을 얻으셨군요.”

그녀의 말에 나 또한 내 오른손을 보았다. 칼에 베이는 것 같던 아릿함이 사라지고 다시 따끔거리는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프레데터를 아직도 잡고 있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 보다 아래로 늘어트렸다. 마티가 무엇을 하고자 나를 이런 이상한 공간으로 끌고 온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을 탐색하듯 흘겨보는 내 시선에 그녀는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늘어트렸다.

“푸른 불꽃께서는 대화보다 제 목을 베는 것을 더 원하고 있으시죠.”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나는 나름 평화주의자라 대화를 더 좋아하는데. 너랑도 대화할 의지는 있어.”

“…….”

“네 말마따나 이참에 대화 좀 해 보자. 네가 죽으면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원한다면 죽은 네 목을 손수 들고 해 줄게. 대화.”

“아시지 않나요.”

“뭐를?”

“이 공간에서는 당신도 저도 죽지 않음을. 당신께선 이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지 않나요?”

그녀는 뒤돌아 쓰러져 있는 이들 중 하나인 손민호의 옷에서 단추를 떼어 와 내 앞에 들이밀었다. 잘 보라는 듯 내 눈을 응시하던 그녀는 그것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바닥에 닿으며 튕겨 나간 단추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금세 멈출 거라 생각했던 물건은 끝을 모르고 계속 돌았다.

내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확인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린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꿈속이니까요.”

“…그 향초에 이런 기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남의 꿈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새로 만들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 말을 하던 손민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가 말한 ‘간섭’의 범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준이 상대가…정신계와 관련된 능력을 갖추고 있냐에 따라서일지도 모른다.

멈출 듯 말 듯 몸을 굴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단추로부터 시선을 떼고 주홍색으로 물든 눈을 보았다.

그녀는 길게 늘어진 하얀 천 자락 사이에서 붉은 향초를 꺼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이호연과 함께 보았던 그 물건이 맞았다.

“삼 년이 안 되는 시간 만에 이런 물건을 만들어 냈다는 건 놀랍기는 하지만… 생각도 못 했던 세계의 것들을 모두 파악하기에 삼 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

“그렇게 보지 말아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께선 나와 대화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을 벌였다?”

“글쎄요.”

눈 한번 깜박이는 사이에 내 코앞으로 다가온 마티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덮었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선명한 주홍색의 눈과 베일 아래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다란 주홍 머리칼이었다.

“누구를 위함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

“꿈은 깊을수록 긴 법. 당신의 꿈은 지독하도록 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간은 많아요.”

“…너랑 대화할 생각 없어.”

“꿈이라 생각하세요. 단순 꿈으로 치부할지 말지는 당신께서 정하세요. 나는 말하고, 당신은 듣고. 우리의 말은 애초에 서로에게 닿지 않으니까요.”

***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르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감히 말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발견한 손민경이 그를 뒤로 밀었다.

“상호, 너는 뒤로 물러나 있어.”

“하지만….”

“말 들어!”

그녀의 말에는 이 상황에 너까지 신경 써 줄 틈은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박상호는 그 의미를 알고 있음에도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되려 방해일 뿐이라는 걸 저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쪽 팔 잡아! 이호연, 넌 어떻게 해서든 그 칼 당장 손에서 떼어 놔!”

손민호의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든 그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프레데터로부터 흘러나온 검붉은 무언가가 검은 옷자락에 감긴 팔을 타고 움직였다. 미동 하나 없는 단검을 쥔 손에서는 계속해 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새겨졌다.

검은 도포가 피에 물들어 더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작은 웅덩이를 이루는 저 피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흘러나온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민호와 손민경이 그녀의 오른손에 매달려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상처가 치료되는 것보다 새로운 상처가 새겨지는 것이 더 빨랐다.

이나연은 돌무더기나 다름없는 바닥을 긁어내는 왼손을 틀어잡은 채 자꾸만 경련하듯 움찔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김수혁이 그런 그녀를 도왔다.

이호연은 류의 오른손을 잡아먹을 듯 구는 프레데터를 떼어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붉은 넝쿨 같은 것이 팔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호연의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곧이어 그의 손이 장미 덩굴을 만진 것처럼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손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그것을 류에게서 떼어 놓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정인이 허공에서 천 뭉치를 꺼내더니 손을 뻗어 강제로 류의 입을 열었다. 입 안에서 쏟아져 나와 천을 적시는 피가 너무나 검고 붉었다.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상한 공간에 갇혔고, 류가 프레데터를 이용해 그 공간을 없앴다. 그들은 곧바로 박물관의 입구로 이동되었으며 류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프레데터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폭주라도 하듯, 혹은 저를 붙잡은 이를 잡아먹기라도 하듯.

“제발 좀 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르겠는 말이 울려 퍼졌다. 저토록 다급하고 간절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회색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발…. 제발….”

간절한 그의 얼굴에도 새침한 얼굴은 평소의 가벼운 웃음을 짓지 않았다. 미동 없이 꾹 감긴 눈이, 붉은 것들이 덮으려 하는 하얗게 질린 뺨이.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죽지 말아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그들에게도, 죽은 듯이 누워있는 본인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는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의 부모님도 이렇게 그를 떠났다. 그의 간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때와 겹쳐 보이는 모습에 저절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안 죽을 줄 알았다. 저 사람만큼은 정말 끝까지 살아남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모든 것이 무서워졌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전부 다.

무서웠다. 절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한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저 사람도 저런데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나 하는 현실이.

저렇게 강한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이 차갑게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그를 일깨웠다.

그의 다리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민호와 손민경 옆에서 온갖 의약품들을 끄집어내던 오정인이 그런 그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너, 여기 있지 말고….”

“죽어요?”

눈물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무서웠다. 다시 한번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가끔가다 그를 놀리는 목소리가 좋았고, 그를 어린애 취급하면서도 존중해 주는 그녀가 좋았다. 학교로 찾아와 간식을 한 아름 챙겨 주던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류가 죽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엉엉 우는 그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적막이 찾아왔다.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이호연이었다.

“안 죽어.”

“…….”

“적어도 이렇게는 아니야…. 이렇게는, 이런 식으로는….”

류의 손에 들려진 검을 잡은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확신 없는 간절함이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움직여. 안 죽었어. 제대로 숨 쉬고 있고 이 정도 피를 흘렸다고 죽지는 않아. 우는 데 힘쓰지 말고 손을 움직여.”

그 말을 하며 다시 손을 치료해 나가는 손민호의 손 또한 엉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류였으나 단검 주변을 배회하는 이들의 손도 점점 상처가 깊어지고 있었다.

다시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치료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힘이 세서 저 넝쿨 같은 것을 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정인처럼 비상사태를 대비해 모든 약품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김수혁처럼 할 줄 없는 게 없더라도 침착하게 다른 이들을 돕는 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기껏해야 무언가를 잘 찾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쓸모없기도 하고 좋게 포장되기도 하는 애매한 능력이었다.

또한 이 능력의 본래 목적은 ‘보물’을 찾는 것에 있었다.

“…….”

프레데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 있는 무기였다. 그것들은 의지가 있는 것처럼 주인을 따지고 주인 아닌 자들을 응징했다.

만약에 정말로 무기에 의지가 있다면, 그래서 프레데터가 류의 적으로 분류된다면….

류에게는 동급의 아군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능력은 찾는 것. 탐색이란 그 의미부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밝히는 것에 있었다.

그건 어디에서 어떤 것이든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의 걸음이 앞으로 향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그를 발견한 몇몇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라 외쳤다.

이호연은 그 외침을 듣지 못한 것처럼 류만을 바라보다 몸을 숙여 무어라 그녀에게 속닥이고 있었다.

그는 물러나라는 말을 무시하며 보이는 것들에 집중했다. 검은 도포 아래 그보다 더 새까만 어둠 속에 숨겨져 있을 그것. 눈 위에 아로새겨진 황금색의 나침반이 빙빙 돌았다.

그것은 점점 옅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손등 위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류의 밑에 얌전히 있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위로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가장 잘 숨기는 것들과 무엇이든 탐색하여 찾아내는 능력의 싸움이었다.

***

“……?”

잘못 봤나? 아직도 따끔거리는 오른손을 들어 그 위를 보았다. 검은 것과 검붉은 무언가가 일렁거린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손을 내렸다. 어차피 꿈속이니 의미 없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어째 깰 생각을 안 하네.”

지금 이게 꿈이라며 나는 지금 픽 쓰러져 자고 있다는 소리인데. 서둘러 이 꿈에서 깨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해야 깰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저 밑으로 떨어지기라도 해야 깰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슬쩍 밑을 내려다보았다. 끝이 안 보이는 어둠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까맣고, 음울함 하나 없이 무정한 곳이었다. 이게 내 꿈이라는 게 마뜩잖았다.

“설마 내가 못 깨는 게 너 때문이야?”

“…이제야 대화를 하는 건가요?”

“왜? 네가 하자며 대화. 해 주겠다고 할 때 그냥 받아들여.”

고개를 틀어 상대를 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꼴인 나와는 대비되는 모습의 마티가 간신히 고개를 들며 나를 보았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는데… 꿈을 잘 다루시네요.”

“내 꿈이라며.”

“…….”

“그럼 이 공간은 영역처럼 내 거라는 거잖아.”

“그렇다 해도 이곳의 모든 것을 다루는 게 지나치게 익숙해 보이는군요.”

“아, 그거. 그냥 되던데.”

손을 들어 마티 쪽을 향해 휘둘렀다. 어디선가 날아온 칼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는 뒤편으로 날아갔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나는 지나치게 이 공간을 잘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되는 걸 어쩌겠는가. 말 그대로 ‘그냥’이었다.

마치 내가 다른 이에게 환상을 보여 줄 때처럼 의지를 갖고 행동하니 이곳의 모든 것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는 했다.

남을 홀리는 환상과 꿈 모두 결국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불러내는 과정이었으니까.

문제는 ‘공간’ 능력인 마티가 이러한 공간으로 날 끌어당겼다는 것인데.

여전히 조금은 미심쩍었지만, 지금으로선 상대에게 농락당하지 않을 힘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옛날에 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

“대화를 할 때는 내게 익숙하고, 우위라는 확신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고. 물론 이런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맨날 시비 걸고 도망가던 사도 중 하나인 네가 빌빌거리니까 기분은 좋네.”

“…그런가요?”

“어. 이래서 너희들이 자꾸만 귀찮게 굴었나 싶을 정도야. 괴물 불러다 다른 사람들로 인질 잡고, 그걸로 사람 힘 다 빼놓은 다음에 깐족거리는 거 보면 한 대 치고 싶었거든.”

비꼼이 가득한 내 말에도 그녀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꿈속이었다. 상대는 이번에도 진짜 몸이 아닐 것이다.

고통도 못 느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날 꿈에서 깨게 안 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 정도로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건지, 그도 아니면 또 따로 속셈이 있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앞에 섰다. 어차피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꿈에서 깨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의 장단에 못 맞춰 줄 것도 없었다.

“…너 옛날에 나보고 온전하지 않다고 했었지.”

“그래서 답도 드렸지요. 스스로를 마주 보라고. 우리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약한 거예요.”

“…….”

“당신은 그 누구보다 강하면서 동시에 나약해, 자신을 마주 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웃는 낯의 나를 그녀는 고요한 얼굴로 보았다. 손을 까닥이니 어둠 속을 유영하던 어느 벽의 창문에서 떼 온 커튼이 날아와 의자처럼 뭉쳐 모양을 부풀렸다.

그 위에 앉아 마티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그녀는 지켜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불꽃이란, 구심점. 삿된 것들의 왕이자 기록되지 않은 망량신. 신이란 허상의 것을 믿는 자들로부터 만들어지고 존재의 가치를 얻은 자들.”

“…….”

“그들만큼 순수하도록 본인을 잘 아는 존재는 없을 테지요. 이전의 망량신이 신의 자격을 얻지 못했던 것은 섞여서였습니다. 인간의 배를 타고 태어나 인간의 삶을 살며 그것에 맞춰 나갔기 때문이죠.”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려면 맞춰 나가야 하는 게 있는 거야.”

“하지만 그는 동시에 신에 맞먹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의 왕자 같은 게 아닌 도깨비들의 왕이었으며 망량신이었으니까요.”

“…….”

“그리고 당신은 푸른 불꽃이 될 존재죠. 당신도 그분도 버리는 것을 못 해 스스로를 마주 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분보다도 더하죠. 그렇기에 당신께선 그토록 강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나약해,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당연하고도 당연해 자연스럽게 맞춰 나갔던 내 모든 삶이 이유라 하는 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내가 남들한테 맞춰 주지 말고 짜증 나면 짜증을 내고 화가 나면 화를 냈어야 한다는 건가? 그때마다 감정에 치우친 결과물을 마주 봐야 한다는 건가?

그럴 거면 혼자 살아야 한다. 사람으로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을 지금 나더러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동시에 그녀가 말하는 존재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언제나 제멋대로. 무료한 자신을 위해 희생되는 이들에게 한 톨의 관심조차 없는 존재.

지금 그녀는 내게 자신의 신처럼 굴지 않아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하는 거다.

“이딴 헛소리나 하려고 일을 벌인 거야?”

“왜 헛소리로 치부하는지 모르겠군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지금의 당신을 온전한 자신이라 할 수 있나요? 화를 내고 싶을 때 화내지 못하고, 웃기 싫은데 웃어야 하는 게 당신의 의지는 아니잖아요.”

“…….”

“남한테 발맞추는 순간부터 자신을 잃기 시작하는 겁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근원을 다루는 자가 본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완벽해질 수 있나요.”

“너….”

“순수함과 잔인함은 얼핏 보면 비슷합니다. 둘 다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것이기 때문이죠.”

마티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칭칭 감겨 있던 밧줄이 툭툭 끊어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사라지고 다시 온전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주홍색 눈을 번뜩이며 나를 보았다.

“슬픔에는 웃음을. 진실에는 거짓을. 분노에는 인내를. 그렇게 모든 것들에 다른 것을 덧씌우고 나면 당신께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

“알량한 동경심? 거짓된 웃음의 가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

“…….”

“그러다 죽어요. 하나하나 다 뺏기면 남은 게 없어 말라 죽을 거예요.”

“그럼, 살고 싶으면 네 신이 그렇듯 나더러 미친놈처럼 굴라는 거야?”

내 말에 마티는 고개를 기울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따라 목의 흉터가 드러났다. 어쩐지 그 흉터에 자꾸만 눈길이 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나요?”

나쁘지 않다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으면 남는 게 없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오른손의 따끔거림이 점점 줄고 있었다.

그게 좋은 징조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제 곧 이 거지 같은 꿈이 끝날 거라는 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건 꿈이기에, 내가 한낱 꿈이라 치부해 버릴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는 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

“그런데 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고 싶지는 않아. 적어도 잘못된 걸 옳다고 자기 세뇌하며 사는 게 정상은 아닌 걸 알거든.”

누군가 내게 유난스럽게도 군다고 욕할지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옳은 일을 할 때조차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 헛소리를 들어줬으니까 이번에는 내 말 들어.”

“…….”

“너. 무슨 생각이야.”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가요.”

“네가 하는 꼴이 애매해서. 말하는 것만 보면 넌 마치 내가 제대로 각성해서 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거든. 아무리 봐도 내가 강해지는 게 네 신한테 좋은 결과는 아닐 게 분명한데.”

끊어진 밧줄이 조금 전의 허연 손들처럼 가장자리 밖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손과는 달리 밧줄은 한 번의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무생물인 물건에게 어울리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내 신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

“나는 사도이며, 사도란 신을 모시는 자들이죠. 나의 신은 변치 않아요. 내가 그분의 사도인 이상.”

“…그리고 그 신이 죽지 않는 이상?”

마티는 내 말에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지금 눈앞의 이 여자가 내게 바라는 건….

“자. 인제 그만.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난 아직 말 다 안 했어.”

“말했잖아요. 나는 말하고, 당신은 듣고. 우리의 말은 애초에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고.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꿈속의 세계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옛날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처럼 어둠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하얀 선들이 그어졌다.

조각난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위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고 하니 그것은 내 손에 닿자마자 바스러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실 짓는 것들이 훔쳐본 그림이 완성돼 가고 있어요.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흐름을 따라 걷고, 아무리 벗어나려 한들 그마저 정해진 하나의 길이겠죠.”

“…….”

“그 길의 끝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손안에 느껴지던 통증이 이제는 거의 없다 싶었다. 검은 공간을 쪼갠 하얀 선 사이로 새파란 불들이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나비가 인도할 자들을 모으는 구심점. 그들이 따르는 자인지 대항하는 자일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도 아니면 허무하게 쓰러질 이들일 수도 있고요.”

빈 공간을 채워 넣듯 쏟아져 내리는 불의 온기에 눈이 따가웠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풍경 속에서 마티는 조각난 유리 조각상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불의 빛을 반사하는 그것은 깨져야만 아름다운 종류의 것이었다.

“기나긴 꿈이 끝났네요.”

마티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새파란 불꽃이 나의 시야마저 가렸다. 처음으로 푸른 불꽃이 뜨겁게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느껴 본 적 없던 열기에 감기자 나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겼다. 탄내와 그을음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이대로 불 속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대로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안정감.

그리고 그 열기 속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것이 뺨에 닿았다. 이마에 닿았고, 눈가에 닿았다. 그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얼굴의 선을 타고 느릿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사라졌던 손의 통증이 한번에 몰려왔고, 먹먹하던 귀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있을까 했더니 차가운 것이 또다시 얼굴을 적셨다.

흐릿하게 들리던 말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제발…. 제발….”

간절한 목소리가 슬프도록 익숙해 결국 눈을 뜨게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겨울의 이른 노을에 물든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회색 눈이었다. 그의 눈물이 눈가에 닿아 나도 모르게 눈이 깜빡여졌다.

감았다 다시 뜨이는 눈꺼풀 사이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이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돌아왔다. 길고도 깊은 지독한 꿈에서 드디어 깨어났다.

나를 비난하는 말 한번을 제대로 못 하고 우는 얼굴을 보니. 아, 환상도 꿈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차라리 그가 내게 욕하거나 화를 내거나 비난하기를 바라는 한편, 그것이 무서웠다. 이제 와 그것을 ‘괜찮아’ 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다. 그런데, 그걸 더 빨리 인정한다고 뭔가 변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괜찮지 않은 나의 모습을 흘겨보지도 않고, 못마땅해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그런데 나는 그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줬다 뺏을까 봐 무서웠다. 그다음이 항상 목을 죄는 것 같았다.

꿈일 뿐일지라도, 거짓된 환상일지라도 그것을 실제로 겪어보니 알겠다.

누가 욕하더라도 나 빼고 얘기하는 저들의 모습이 싫고. 나를 잊은 듯 구는 그들의 모습이 싫었다. 나를 비난하는 이호연은 싫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목 안쪽이 울컥거리며 아팠다.

나는 나를 버리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겨우 좀 맞춰 주고 참는 거로 할 수 있는 거라며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회색빛 도시를 멍하니 걸어 다니는 것이 싫었다. 나를 배척하고 밀어내더라도 사람이라는 틀에 함께 끼워 맞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미 이쪽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이제는 도저히 옛날처럼 혼자 있을 수도, 배척당하는 것도 싫었다.

혼자 삭히며 홀로 괜찮아야 하던 그때의 나는 어렸고, 외로웠으며 사람의 온기가 한없이 그리웠다. 나를 이용해도 되고 막 써도 되니 그들의 틈새에 끼고 싶었다.

끼워 줬으면 했다. 끝내는 지쳐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하지만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 주고, 내게 무리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들을 그렇게 다 겪고 받았는데 인제 와서 되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걸 나약함이라고 한다면 나는 평생을 나약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차갑게 식은 것이 아닌 미적지근한 그것은 이호연의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내 왼팔을 붙들고 있던 이나연이 손을 놔주며 다급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김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민호와 손민경을 불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한 채 울먹거리던 박상호를 치료해 주던 손민호와 손민경이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호연이 나를 받쳐 안아 일으켜 세우자 오정인은 물을 내밀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토록 다정한 나약함은 없을 것이며, 이토록 행복한 고문도 없을 것이다. 언제 뺏길지 모르는 것을 품고 있는 건 그만큼 뺏기기 싫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나약함과 행복은 결코 나를 완전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테오그라젠스는커녕 그의 사도마저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자리매김의 마침표였다.

“…….”

울음에 덮인 얼굴을 손에 묻었다.

과연 내게 선택권이 있기는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더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

이건… 꿈이다. 눈앞에 보이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회색의 풍경이 그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건 꿈일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있었던 일이라고.

마티가 하필이면 꿈을 통해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나를 마주 보아야 한다 했고, 그 마주 봄에 있어 과거의 것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 터였다.

이호연이 내가 그 향초의 향을 맡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나는 그 향을 이미 맡았다.

이 꿈이 그녀가 멋대로 꾸며 낸 것인지 진실된 나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기분 나쁜 것을 보면 진실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도시를 돌아다니는 여자애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색색이며 숨을 내쉬는 입에서는 하이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은 추위에 터서 거칠어 보였다. 손끝은 아파 보일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맥없이 탁탁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발은 신발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퉁퉁 부어 있을 것이 뻔했다.

저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정신을 빼놓고 괴물밖에 없는 세상을 홀로 돌아다니던 그 수십 일 중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 그 순간은 매일이 똑같고 매일이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낮이 언제고 밤이 언제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들면 그게 밤이고,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면 그게 낮이었다. 하늘은 언제나 어두웠고, 해는 붉었다. 그 붉음의 빛은 세상을 밝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날들이었다.

생각이 멈추고 눈앞에 보이는 이와 시야가 동일시되는 것이 느껴졌다. 과한… 감정 이입을 하는 것처럼.

걷다가 괴물이 보이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기어 들어가 숨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순간이 내게 있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암흑 속에 숨어 있으면 그나마 있던 미약한 시간 감각마저 완전히 사라지고는 했다. 내가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건지 내가 지금 숨 쉬고 있기는 한 것인지.

사실 나는 아무도 몰라주는 이 어두운 곳에서 이미 죽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생각들에 숨이 막혀 질식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소리 내지 않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길게 자란 손톱으로 손등을 할퀴고 긁어냈다.

붉게 달아오르는 상처의 감각을 느끼며 아직은 내가 살아 있음을 상기했다.

손끝에 축축한 것이 느껴지면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손등과 손톱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피 냄새를 맡고 괴물이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더 이상 손등에 상처를 낼 부위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덜 아프고, 피도 안 나고, 그러면서도 아릿함은 남는 것을 찾아 손을 움직였다. 추위 속을 오랫동안 헤매어 손이 건조했다. 그래서인지 손톱 옆에 거스러미가 쉽게 일고는 했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어내는 버릇이 그때 들었다.

한번 뜯어 버리면 쉽게 염증이 나 오랫동안 잔잔하게 아팠다. 열 손가락이나 되니 다른 곳의 거스러미를 뜯어 버릴 때면 그 이전의 손가락은 이미 다 나았다.

열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다 뜯어 버리면 그중 하나는 무조건 염증이 생겨 쉽게 부었기에 아릿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그 하찮은 아픔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부은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시간을 보냈다. 세지 않아도 그 짓이 수없이 반복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러다 얼마나 그렇게 헤매고 다녔는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을 때쯤 사람을 만났다.

어느 남매였다.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순히 오래전 일이라 잊어버린 것인지 애초에 물은 적이 없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꿈을 통해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매의 얼굴 또한 흐릿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기억해 내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기대였다.

그 둘은 어느 잔해 밑에 기어들어 가 멍하니 시간을 죽이던 나를 찾아냈다. 정확히는 본인들이 숨을 장소를 찾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 둘은 다급한 얼굴로 내가 숨은 공간에 비집고 들어왔다. 서로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늘이 무너진 이후에 항상 그렇게 살아왔듯 숨을 죽이고 입을 닫았다.

끝나지 않는 영원처럼 느껴졌던 장소가 다르게 느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공간은 그리 좁지는 않았으나 셋이나 수용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가 마주 닿을 정도로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날 아프게 하지 않아도 마주 닿는 사람의 온기와 숨소리에 내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울음에 몸을 움찔거리는 나를 겁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둘 중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누구든 상관없었다. 손길은 따뜻했고, 추운 겨울의 온기가 사람의 온기로 덧씌워졌다는 것에 나는 만족했으니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은 입구를 막아 놨던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흐릿한 빛 사이로 멀어지는 등을 보며 나는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그런 내게 그들은 손을 내밀었다. 갈 때 없고, 같이 다니는 사람도 없으면 같이 안 가겠느냐고 해 주었다.

내게 있어 그 말을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손을 잡으니 얼어붙어 굳어 버렸던 것 같던 손이 그제야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십 일 동안 막혔던 숨이 그제야 쉬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본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남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괴물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숨어들던 사람들이 만나고 만나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연령대는 다양했다. 누군가는 부부였고 누군가는 남매였다. 누군가는 나처럼 아예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다녔다. 그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동시에, 적어도 내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때는 몰랐다. 다양한 연령대가 모인 그들 중 왜 노인은 없고, 아이는 없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정도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그 어두운 속에 기어 들어가 손의 거스러미나 뜯으며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다. 그때는 그랬다.

그들은 내게 이름을 물었고, 나이를 물었다. 올해 스무 살이라는 내 대답에 그들의 반응이 모두 같았던 것은 기억난다.

‘아직 애네. 애야.’

그들 중에 가장 어린 것은 내가 맞았고 또래라고 해 봤자 남매인 그 둘밖에 없었다. 그들마저 나보다 나이가 확실히 많았었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날 보며 애라고 웃는 그들의 모습에는 적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웃음으로도 적의를 표현한다는 걸 몰랐다.

시작은 가벼웠다. 그들은 내가 ‘애’로서 행동할 것을 바랐다. 애는 애답게 어른 말을 잘 듣기를 바랐다.

왜 이 많은 사람 중 처음 만나게 된 것이 그 남매였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너희가 가장 어리고 젊으니까, 라는 이유로 위험은 항상 우리의 몫이었다. 자신들보다 몸도 더 날쌔고 체력도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그들은 내게 ‘어른’으로서의 모습도 바랐다. 애라며 귀찮고 위험한 걸 다 떠넘길 때는 언제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바랐다.

더 이상 애가 아니니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하라고 했다. 그 책임감으로 본인들이 무사히 도망갈 때까지 시간을 벌기를 바랐다.

그 대단하신 어른의 의무로 식량을 구하고 필요한 것들은 가져오기를 바랐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혼자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또 싫었다.

적어도 이렇게 사는 순간에는 나와 대화해 주는 사람이 있었고, 혼자 어둠 속에서 죽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그렇다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조건 나빴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데 고생이 많다며 도닥여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아픈 데는 없냐며 물어봐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내가 자꾸만 그들을 나쁘게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사람끼리 살 수 있어 다행이지 않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냥 세상이 이래서 내가 한없이 예민해지고 까탈스러워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가다 낯을 굳히는 나를 보며 그들도 그리 말했다.

세상이 이래서 내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힘든 건 알겠는데 남들한테 그걸 티 내면 안 되지 않겠느냐고. 내가… 문제라고.

비난했고 달랬다. 가끔은 화도 냈지만 결국엔 사과를 하고 달랬다. 달래고 화내고, 달래고 비난하고. 달래고, 달래고, 달래고.

그냥 좀 좋게좋게 넘어가자 라고 말했다.

그때쯤부터 환각이 보였다. 환청이 들렸다. 갈수록 정신은 멍해지고 몸은 무기력해졌다. 그냥 생각하는 게 귀찮고 모든 것이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냥 ‘애’를 바라면 애답게 굴어 줬고 ‘어른’이기를 바라면 어른처럼 굴어 줬다. 그렇게 하는 게 그냥 편했다.

세상이 변했으니까 나도 변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그러다 평소와 같던 어느 날, 사고가 났다. 사람이 많은 만큼 필요한 물건들은 빠르게 떨어졌다. 전기와 물은 공급이 끝난 지 오래였다. 물 한 잔 마시고 싶어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평소처럼 그런 것들을 구하러 가는 건 나와 그 남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이들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드는 어느 남자였다.

겉으로는 우리의 보호자 겸 함께 가는 일손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일 한번 안 하고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것을 보면 허튼 생각 못 하게 감시하는 역할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평소처럼 비어 있는 가게에서 물건들을 챙겼다. 어릴 때도 안 하던 도둑질을 인제 와서 한다는 처음의 꺼림칙함은 예전에 죽은 지 오래였다.

죄책감이라는 건 이런 세상에서 바라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그렇게 돼 버린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소리가 났고, 우리의 뒤쪽을 흘겨보던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갔다.

굳이 뒤돌지 않아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고 있던 물건을 내다 던지고 뛰었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는 세 개였다.

익숙한 사람의 것이 두 개. 하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 남자가 다급한 손으로 문의 손잡이 사이에 막대기 같은 것을 끼우는 게 보였다. 우리는 아직 이 안에 있는데, 눈까지 마주쳤는데.

그는 그렇게 뒤돌아 도망쳤다.

맨손으로 문을 두들겼다. 근처에 있던 물건들을 손에 쥐고 휘둘렀다. 뒤도는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열려! 제발 열리라고!’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유리문은 깨지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이 조금만 더 튼튼하고 단단한 거였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포기했으면 이렇게 무섭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을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남매를 보며 나는 되려 점점 손에 힘을 풀었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정확히 눈에 담았다.

괴물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전직을 한 지금은 제자리에서 손만 까닥여도 쉽게 죽어 버릴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 높지는 않은 마트의 천장에 닿을 만큼 키가 크고 기괴하게 가느다란 괴물이 팔을 휘둘렀을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몸을 웅크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머리 위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팔을 들어 끌어안은 머리 위로 유리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는 괴물의 모습은 살짝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었다. 온갖 것들이 부서지는 소음에 먹먹한 귀속을 파고드는 외침이 들렸다.

‘오빠! 오빠!’

팔을 내렸다. 주저앉은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릴 수는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온전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괴물은 이제 우리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다는 듯 저 혼자 날뛰는데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나 또한 더 이상 그런 괴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도와줘! 제발… 제발 도와줘….’

내 손을 붙잡고 하는 말이 너무나 간절했다. 제 오빠를 살리는 것 좀 도와달라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했다. 그녀의 오빠는 하필이면 괴물의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내 등 뒤의 유리문은 깨져 있었다. 나가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미동 없는 그를 챙기고 다시 여기까지 올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손이 너무 따듯해서. 이 상황에서조차 나는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을 떨쳐 낼 수 없을 만큼 그 온기가 좋았다.

또한 여전히 그날 내 등을 토닥여 준 것이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런 나를 보던 그 처참한 폐허 같던 눈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고개를 틀어 뻥 뚫린 출구를 보았다. 눈을 질끔 감았다. 그대로 달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무 물건을 집어 괴물을 향해 던졌다. 내게로 향하던 눈이 몇 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달렸고 그녀는 제 오빠를 바깥으로 옮겼다. 다급한 얼굴로 내게 손짓하는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풍압을 느꼈다.

이렇게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뜻 들었던 총소리. 나는 뒤돌지 않았다. 유리문을 건너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았을 때 괴물은 왜인지 제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제 오빠를 챙기는 그녀를 도와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간신히 살아서 돌아간 그곳에서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던 남자는 무척이나 살가운 얼굴을 하며 우리를 반겼다.

모두가 우리를 반겼다. 누군가는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살려 낸 그녀의 오빠는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내가 머물던 곳엔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없었고 아이도 없었다. 노약자가 없는 이유를 알게 된 건 그때였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미끼가… 필요해졌다. 마트에서 괴물이 나왔던 것은 단순 우연이 아니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의 수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피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쏠리는 모습은 내가 그 시선의 주인이 아님에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들었다. 제 오빠 대신 본인이 자진해 미끼가 되겠다며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한데…. 우리 오빠 좀 부탁하면 안 될까. 우리 오빠 좀 살려 주라. 대신에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할게.’

‘그….’

‘괴물한테서든… 사람한테서든… 제발, 살려 줘.’

거절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안 된다고 외치는 자신의 오빠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무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노인과 아이는 없었다. 노약자는 무리에 속하지 못했다. 속한다고 하더라도 미끼에 불과했다.

그렇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그녀의 희생 역시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어 주었을 뿐,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정신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움직였다. 발버둥 쳤다. 내가 열심히 모았던 물건들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조금씩 빼돌렸다.

마지막에 빼돌린 것은 그였다. 그렇게 우리는 둘이 되었다. 그리고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는 횟수가 늘었다. 나도 모르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그 사람은 내게 화를 냈다. 그래 맞아. 화를 냈었다. 그럼에도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면 주변에 있던 물건을 내 쪽으로 던지거나 했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던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멍하니 말했다.

‘자꾸만 보여요. 들려요. 당신 동생이 나타나서 나보고 살려 달라고 해요. 그런데요…. 내 친구들도 같이 나타나서 말해요. 살려 달래요.’

‘…….’

‘나 때문에 죽은 거래요. 내 친구들도 당신 동생도. 그런데 그 말이 갈수록 진짜인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난, 죄책감이 들어요. 진짜일까 봐.’

그는 내 말에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유난 떨지 말라고. 그리고 물건이 날아왔다. 그중 제대로 맞은 것은 얼마 없었다. 제삼자와 그때의 시선을 함께 공유해서 보니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흐릿하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다친 것이지 팔을 다친 것은 아니었다. 감정에 취했다고는 해도 가만있는 상대를 저렇게까지 못 맞혔을 리가 없었다. 동생과 꼭 닮은 얼굴의 남자가 우는 얼굴로 외쳤다.

‘…그러게 왜. 왜 날 화나게 만드는데. 내가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네 어리광이라도 받아 줘야 해? 제발…. 제발 사람 화나게 좀 하지 마.’

화났다는 사람이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것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그저 ‘네, 네.’ 하고 답할 뿐이었다.

그런 내게 그는 다시 물건을 던졌다. 이마에 맞은 물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것을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보았다.

그런 내게 그는 외쳤다.

‘너 가. 가 버려! 가라고! 사람 화나게 하지 말고 가 버려! 내가… 내가… 그냥, 날 버려. 버리란 말이야…. 너도 이거 잘못된 거라는 거 알잖아!’

‘…….’

‘그냥 가라고…. 제발 가…. 거긴 아무것도 없다고. 네가 보는 쪽에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

그의 말대로였다. 내가 답하며 바라보는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난… 그가 저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그는 가까이 다가왔다. 바닥을 손으로 짚어 내 바로 뒤로 온 그는 자신의 손으로 내 등을 밀었다. 나는 맥없이 앞을 향해 비틀거렸다.

그는 계속해 나를 밀었다.

‘가…. 가서, 다시는 나한테 오지 마. 그냥 네 멋대로 살아. 또 그딴 이상한 놈들이랑 같이 다닐 바에야 그냥 혼자 살아. 그냥 평생 혼자 도망 다녀.’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그냥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해. 마음에 안 들며 그냥 패버려. 참지도 말고 남의 말, 잘 듣지도 마. 네 멋대로 살아. 남보다 그냥 너 먼저 생각하고 그냥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

‘…….’

‘너도 알잖아. 나랑 이러고 있는 거 잘못된 거고 옳지도 않은 거.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쳐. 아주 멀리멀리 도망쳐서 다시는 나한테 올 생각도 못 하게, 그렇게 도망쳐, 제발!’

그의 말 때문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된 것을 할 때의 옳은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 옳은 일을 할 때의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도망쳤다.

해방감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그냥 서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우울한 감정들에 뒤섞여 이름을 모르게 된 것들을 등에 짊어지고 달렸다.

마치 등 떠밀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건을 던지는 그에게 가지 말라고 해 놓고, 가 버리라고 외쳤던 것도 잊고서. 그렇게 그의 가 버리라는 말도 잊고서.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우울에 잡아먹힌 망상들만 품고서.

결국엔… 그저 내가 살고 싶어 나 자신을 속이고, 지우고, 또 속인. 거짓과 거짓으로 점철된 진실이었다.

이게… 진실이었다.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그 아래 눈은 조금 붉게 부어 있었다. 상대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꿈을 꿨어.”

“…어떤 꿈이요.”

스르륵 떠지는 하얀 속눈썹 아래 회색의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그것을 보다 손을 올렸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하얀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내 손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링거 줄도.

내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손을 다시 내려 주었다.

“상처가 치료가 안 돼서 꿰맸어요. 무리하게 움직이면 봉합한 거 터진다고 하니까 조심해요.”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조금 넘었어요.”

“그래? 벌써 어두컴컴해서 밤인 줄 알았어.”

“겨울은 원래 낮이 짧으니까요.”

“그렇지. 아직도 겨울이네.”

꿈에서 보았던 과거도 겨울이라 그런가. 겨울이 너무나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끝난 적이 없거나.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개를 틀어 창밖을 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문 것은 아니었지만 어두웠다. 오른손을 조금 움켜쥐어 보았다. 마취가 풀린 건지 아팠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손을 이호연이 잡아 제지했다. 이것 또한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손 위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다쳤어?”

“프레데터 쓰지 말아요.”

“많이 아파?”

“그거 너무 위험해요.”

우리는 서로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들어 붕대 위에 불을 붙였다.

“류!”

“…….”

푸른 불이 붙은 붕대는 순식간에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천천히 팔을 타고 오른 불은 피부 안에 숨겨진 바늘과 덜렁거리는 피를 품은 링거 줄까지 태웠다.

중간 부분이 끊어진 링거 줄로부터 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병실 안에 지독한 비린내가 번졌고 그 떨어지는 핏방울의 울림이 유일한 소음이 되었다.

아직도 핏자국이 묻어 있는 손안으로 푸른 불을 그러쥐었다.

치료되지 않는다던 상처들이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전보다 치료 능력이 좋아졌다고.

마치 랑과의 첫 만남에서 오랜 흉터로 남을 것 같던 상처들조차 사라졌던 것처럼 말이다.

“손 이리로 줘 봐. 치료해 줄게.”

자신의 손을 잡으려는 나를 피해 이호연은 손을 뒤로 뺐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언뜻 보면 두려움마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거 하면 피곤해하잖아요.”

“아니. 이젠 아니야.”

“…왜요?”

“저번에 아스트로노미 때문에 쓰러졌을 때 생각나?”

손을 들어 그의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그때도 꿈을 꿨었거든?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까 꼬마 도깨비들이 좀 바뀌었더라고. 근데 걔네는 애초에… 내가 성장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애들이야.”

“…….”

“그냥 알 것 같아.”

맞아. 이건 그냥 아는 거야. 너무나 당연한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처럼.

“적성에 맞지도 않는 치료 능력을 쓴다 해서 피곤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꼬마들이 지금이라면 말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류….”

“에스텔리니움이, 내게 미래를 보여 준 대가를 받아가겠다고 했어.”

그녀 또한 천공 섬의 주민이었다. 그네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실패한 테오그라젠스의 끝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나.

정확히는 신을 죽일 영웅으로서 온전해진 나였다.

내가 완전해지는 방법은 나를 마주 보는 것이고.

“그때 나는 꿈을 꿨고, 지금도 꿈을 꿨지. 그건 내가 잊어버린 것들이고. 그것들을 마주 볼 때마다 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완전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대가가 그거였던 거다. 완전해진 내가 테오그라젠스를 이길 수 있도록. 내가 내 과거를 마주 보는 것이 미래를 본 것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치료해 줄게.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이 지경이 돼서야 얻은 그 대단하신 힘으로 내가 좋다는 사람 치료해 주면 좀 어떤가. 그거라도 못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정해진 길을 걸어 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는 내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신중히 치료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만약에 너는 너 때문에 안 그래도 미쳤는데 내가 더 미치면 어떻게 할 거야?”

“…….”

오래전에 누군가는 나를 보내 버리는 것으로 그걸 해결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좋았던 방법은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이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 좀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안 놔줄 거예요.”

이건 좀 의외네.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면 멀리 떠나보내고 행복하기를 빌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항상 그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손이 얽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새겨진 칼자국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니까 류도 나 놓지 말아요. 내가 진짜 미치든 아니든.”

“…….”

“약속해줘요.”

“…그래도 돼?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번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했던 질문을 그에게 해 보았다. 이호연은 내 질문에 조금은 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어때요. 내가 그게 좋다는데.”

“넌….”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그는 웃으며 대신 말을 이어 주었다.

“호구 같다고요?”

“…그렇게 생각은 안 했는데.”

“옛날에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내가?”

진짜?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니 그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팔을 들었다.

왼쪽 소매를 걷어 새파란 테이프를 뜯어 버렸다. 평소라면 말렸을 이호연이 이번에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손을 들어 팔을 쓸었다. 푸른 불들이 피어올랐다. 사그라지는 푸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넌 그렇게 인성 파탄 난 내가 왜 좋다는 거야?”

제멋대로고 독선적이다. 절절하게 사랑해 주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 입으로 네가 내 모든 것의 첫 번째는 아니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리 다를 것 없는 생각이었다. 내 모든 행동의 첫 번째는 나지, 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의 첫 번째는 나라는 듯이 구는 그와 달리.

이호연은 내 질문에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의 웃음을 닮은 말이 흘러나와 내 귓가를 스쳤다.

“글쎄요. 왜일까요.”

“…….”

“원래 이런 건 본인이 아니면 잘 모르는 거잖아요.”

그는 내가 떼 버린 테이프 뭉치를 둥글게 뭉쳐 쓰레기통에 버렸다.

“좀 더 잘래요?”

“아니. 잠 다 깼어. 나가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들을래.”

그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 내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 힘에 내가 비틀거리자 그는 아예 나를 끌어안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바로 옆에서 속닥이는 말이 간지럽기보다는 질척하게 느껴졌다.

“나랑 하나만 약속할래요? 이건 무조건 알겠다고 해야 해요.”

“그러면 이미 약속된 거 아니야?”

“…직접 알겠다고 하는 게 듣고 싶으니까요.”

“…뭔데?”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요.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좋고 나중에 언젠가 여도 상관없어요. 그냥 도와달라고 그 말, 한 번만 해요.”

무슨 뜻으로 그런 약속을 하자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었다. 그의 등에 얹어 마주 안았다. 그에게서 옅은 피 냄새가 났고 나에게서 그 비릿한 향에 더해 흐릿한 탄내가 났다.

그것들이 뒤섞여 누구에게서 무슨 향이 나는지 그 선이 모호해졌다. 그래서 나 또한 그 모호함에 취하고 휩쓸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럴게.”

그는 그 짧은 대답 하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나를 놔주었다. 서로에게 이렇게 구는 것이 과연 좋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저 때문에 미쳐 간다 해도 놔주지 않겠다는 이호연은 분명 선인은 아니었다. 거기에 좋다고 답하는 나 또한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게 정상인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람을 선인(善人), 악인(惡人)으로 정확히 나눠 구별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복잡스러운 존재였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우리는 상대에게 세상에 다신 없을 개X끼일 수도 있는 거고, 놓쳐서는 안 되는 일생의 은인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와 나의 관계가 잘못된 건지 아닌지 구별해 보는 것이 이제는 의미 없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있어 우리 둘은 애절한 사이고 누군가에게 있어선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일 테니까.

그냥 지금은… 그런 거였다. 나중을 기약하고, 그 나중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사랑이나 속닥이는 것. 그것 하나라도 마음 편히 하는 것.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각박하고 끝으로 가는 것 같음을 느낄 때마다 나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너는 내게 답하고, 같은 말을 하고 애정 어린 몸짓을 표했다. 손이 얽히고 몸을 마주 닿고 상대의 온기를 뺏으려는 듯이 굴었다.

추억을 만들어 주는 상대가 추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거 하나는 우리 둘 다 같은 마음일 터였다.

애달픈 우리의 마음. 눈물에 뭉개진 마음. 끝나지 않는 비구름을 뚫고 떨어질 햇살 한 줌을 바라는 그런 마음.

“…….”

끝이 정말로 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이 손은 놓기 싫은 이기적인 것.

맞닿은 몸이 떨어지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더 진실된 얼굴을 드러낸 것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게 어떠한 쪽이든지 간에 진실이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느꼈던, 이호연이 내게 끝까지 입 다물고 말하지 않았던 비밀에 관하여 들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끝을 준비하자. 누가 그리 속삭인 것처럼 우리는 떨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하기 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알겠다 말하였고 그런 나를 데리고 이호연은 병실을 나와 휴게실 쪽으로 갔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말을 하는 순간부터 어림짐작은 되었다. 망가지는 세상 속에서 내가 가장 보고파 하면서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얼굴들.

문을 열자 초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던 부모님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의 발밑에서 일렁거리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내 발밑으로 몰려들었다.

“숨 막혀, 엄마.”

나를 꽉 끌어안은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곧바로 어깨를 때리는 손길이 돌아왔다.

“넌! 어떻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

긴 한숨을 내쉬면 손에 얼굴을 묻는 모습이 익숙했다. 내가 하늘이 무너진 이후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이후 가장 많이 보았던 모습이었다.

머뭇거리는 내 등을 이호연이 살짝 밀었다. 그 손길에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떼었다.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런 내 옷자락을 엄마가 꽉 움켜쥐었다.

“왜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거야.”

“그러게. 자꾸 그러네.”

“왜 위험한 일에 끼어들어. 왜… 하필, 하필이면 네가 그래야 하는 거야….”

“…평범하게 살아 보려고 나도 노력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 제대로 끝난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

끝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제멋대로 끝내려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유난 떨지 마, 라는 그 말의 의미를 내 멋대로 해석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 것처럼 말이다.

괜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나는 나를 정당하게 만들었고 그것에 기대어 살았다. 그렇게 살았다.

끝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비틀어진 게 분명한 그 만들어진 평화를 바라면서. 그러니.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

나는 결코 좋은 자식은 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말을 내뱉었다.

“이번 한 번만 더 위험한 짓 좀 할게. 이런 말, 애초에 하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정말 마지막으로 이번 한 번만.”

이번에는 부디 나 스스로 끝맺고 그것에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볼 수 있도록. 실패한다면 그 뒤는 어차피 없을 테지만….

그러니 인제 와서야 이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끝에 와서야 강제로 보이는 진실을 눈에 담은 나는, 이제야 결심이 서는 거였다.

조심스럽게 엄마의 몸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두어 발자국 물러나는 나를 엄마는 아연한 얼굴로 보았다.

간절한 손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그것을 손을 들어 마주 잡아 주고 싶었으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엄마의 얼굴이 암담해졌다. 무어라 말하기 위해, 나를 붙들기 위해 입을 여는 엄마의 어깨를 아빠가 잡았다.

언제나 유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굳건해 보이기 위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떨리는 눈가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얼굴이었다.

“꼭 네가 해야 해?”

아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가라앉은 얼굴을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의 말은 어떻게 보면 죽으러 가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친절한 주세진은 부모님에게 대강의 상황을 말하기는 했을 거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는 그 자식의 말을 들었다.

죽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그 미래의 결심을.

차마 좋은 자식은 될 수 없는 나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떨리던 눈은 눈꺼풀 아래로 그 모습을 숨겼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린 아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너랑 뭘 얘기하든가 해야 했어.”

“…….”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 말 안 하고 잠만 자는 거, 억지로 끌고 나와서라도 뭔가 얘기를 하든가 해야 했어.”

“그때 그렇게 해 봤자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을 거야.”

또한, 그때 그랬다고 하더라고 지금의 이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사히 집에 돌아간 순간부터 나는 이미 푸른 불꽃이었을 것이고, 그건 신을 죽일 영웅의 길을 이미 걷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내 말에 아빠는 참담한 얼굴을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죽었는지 아닌지 소식 하나 없던 내가 돌아오고 나서, 우리 집이 마냥 화목하고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힘들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이 없는 나를 엄마는 학교라도 다니라며 집에서 내보냈다.

몇 개월 만에 나온 세상은 회색빛의 그 세계가 아니었다. 그렇게 일상을 꿈꾸었다.

아무것도 끝낸 게 없이 그것을 누리려고 했기에 이런 사달이 난 걸지도 모른다.

“넌, 끝까지… 옛날부터 크면 속 썩이겠구나 싶었지.”

“…응.”

“이번 한 번만이야. 이번 한 번만… 집에 가야지.”

“응.”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한 번만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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